출처 : https://theqoo.net/2682572875
천재실학자 정약용은 생전에 집필한 저서가 매우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게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그 외에도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등 수많은 책을 썼음
이 책들 대부분은 정약용이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건데 그가 유배생활동안 이렇게 많은 책을 집필한 이유는 뭐였을까?
알다시피 정약용은 정조가 매우 아꼈던 신하였음
정조는 정약용에게 암행어사 직위를 내려 관찰사들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명했는데
평소 비리를 매우 싫어했던 정약용은 정조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노론 벽파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함
그리고 정약용은 이 일을 계기로 서용보한테 미운털 단단히 박혀버림
하지만 당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정약용을 누구도 함부로 조정에서 내치긴 힘들었음
그러던 중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정약용을 지켜줄 든든한 보호막도 함께 사라져버림
평소 정약용을 싫어했던 몇몇 조정대신들은 이 참에 정약용을 조정에서 완전히 내쫓기 위한 명분을 찾기 시작함
" 천 명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못 죽이면 한 명도 못 죽이는거나 마찬가지요. "
- 영화 자산어보 中
결국 그들은 정약용을 완전히 골로 보내버릴 명분을 찾아내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
이 사건으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됨
비록 한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됐지만 정약용은 언젠가 조정에서 다시 자길 불러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정치, 행정, 의학, 지리서 등 수많은 분야의 책들을 집필하기 시작함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은 정약용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일 리 만무했고
특히나 정약용 때문에 한번 파직 당한 경험이 있던 노론 벽파 서용보가 그의 복귀를 극렬히 반대했었음
결국 정약용은 두 번 다시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함
수원 화성 설립에 큰 공을 세워 정조의 꿈을 실현시켜준 걸로 유명한 정약용은 정작 정조실록에선 언급이 별로 없음
이는 정조실록을 편찬한 사람들 중 서용보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가 의도적으로 정약용의 활약을 배제시켰다고 보는 의견이 많음
하지만 사고가 남달랐던 정약용은 이 일까지 모두 예상했던 것인지 유배생활을 하며 아들들한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수많은 책을 집필한 이유를 밝힘
" 지금 내 생각을 이렇게 책으로 많이 남겨 놓지 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날 (종교 사건으로 유배 된) 죄인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냐. "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약용의 활약이 많이 배제됐으니 정약용이 유배생활동안 책을 많이 남겨놓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지금과 다르게 평가하고 있었을 수도..
첫댓글 통찰력이 있으셨네
이래서 스스로의 기록도 중요하구나...
와....
역시 똑똑한 사람은 미래까지 보는구나.......남다르다 진짜...멋지고 존경스러움
일기 쓴다 오늘부터
족같네 능력있는사람은 유배보내서 평생 올라오지도 못하게하고 부패한것들만 한자리씩 해먹고 나라 망조들게하고 어휴 씨발
강진에 다산 초당가면 진짜 주변에 뭐 없고 글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진짜 멋있다
ㅠㅠㅠㅠㅠ정조가 조금만 더 살았어도ㅠㅠ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