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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 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ayings on Discipleshi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의 뜻을 깨닫겠냐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 달라고 옥중에서 부탁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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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겠냐고 고백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부탁하며 종이 아니라 형제로 맞아들여 달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을 뒤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모든 소유를 버린 채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데 머뭇거린 제자나(마태 8,21-22 참조)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떠나 버린 부자 청년처럼(마태 19,16-22 참조),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무엇인가를 마음 한 켠에 쌓아 둔 채 그것에 의지하며 위로를 찾는 이라면 그분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신 “자기 소유”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온갖 집착, 아집과 교만, 이기심과 재물, 형식적인 신앙생활일 터입니다. 건축물을 짓거나 전투에 나서는, 세속적인 일조차도 매우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진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가 치열한 고뇌와 희생 없이 어찌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타성에 젖어 허울뿐인 제자의 됨됨이 속에 거저 얻어지는 믿음은 없습니다. 나이 든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꼭 곁에 두고 싶어 하였던 오네시모스를 기꺼이 돌려보냈듯이(제2독서 참조), 우리도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갇혀 살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 때문에 무엇인가를 용기 있게 버릴 때 찾아오는 ‘자유’에 맛 들여 갈 때, 비로소 제 십자가를 힘껏 끌어안고 참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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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들을 너무나 아낀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시집온 며느리가 아들을 빼앗아 간 것 같아서 며느리를 미워하였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괴롭힘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아들은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자신을 떠난 아들을 원망하였습니다.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소유’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위 어머니가 한 것은 ‘소유’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물건은 소유하는 것이고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려 하니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오히려 보내 주어야 합니다.성모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셨습니다. 아드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된다고 떼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하느님께 봉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현 방법입니다. 사랑하면 흘려보내 주어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봉헌하라’는 뜻입니다. 봉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잃습니다.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투자의 귀재가 자신에게 적은 돈을 맡기면 크게 불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적은 돈을 아끼지 않고 과감히 그에게 내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돈을 위해서 적은 돈이라도 내어놓아야 하듯이, 더 큰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이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다른 모든 것을 내어놓고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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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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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에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오랜 기간 그 안에서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본성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새장의 문을 열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새를 놓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새장 문이 열리자 새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까지 날갯짓을 해 보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자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주는 모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장은 이미 열렸으나 그 새는 좀처럼 나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처럼 새장 안에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쩌면 이러한 새장 속의 새인지도 모릅니다. 열등감, 죄의식, 상처, 분노,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각자 자신만의 새장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장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새장 속의 새처럼 문이 열려 있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날갯짓을 포기하고, 새장에 갇힌 채 재산, 명예, 쾌락, 분주함 등의 ‘모이’나 먹으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새장에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이’를 과감히 포기하고 날갯짓을 연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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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누구를 따른다는 말에는 ‘순종’(順從)과 ‘순명’(順命)이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두 단어가 똑같은 뜻으로 쓰이긴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순종은 ‘좇아서 따르는 것’이고, 순명은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측면이 강하고, 순명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는 ‘순명’보다는 ‘순종’ 쪽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어린아이가 엄마나 아빠를 따르는 것과 같고, 순명은 종이 주인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명하기보다는 순종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그렇다고 순명이 나쁜 의미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따라나서려면, 스스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누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로우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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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황당한 말씀입니다. 마치 가족을 멀리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가족이 주는 십자가는 작아도 무겁습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뜻대로 따라 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십자가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면 가족은 ‘서로에게 십자가’가 됩니다. 다투고 멀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뜻과 네 뜻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를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 애써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 살라는 당부입니다.
누구나 가족에게 기대를 겁니다. 자녀들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이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기대가 무너지고 희망이 꺾이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제는 그 안에 숨겨졌던 ‘주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의 반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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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약간의 고통이라도 우선 피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지만, 남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만큼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우리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십자가는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자신을 위한 길이라면 누구라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행위가 곧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몹시도 힘든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걸어간다면,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걸으시면서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 이미 당신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이 십자가의 길을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참행복의 길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그 길은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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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국가 반역자를 처형하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였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삶의 역경을 평화의 계기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고통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마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가구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환영하는 나무는 어떤 것일까요? 아무래도 가구를 만들기에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어떤 굴곡 없이 쭉쭉 뻗어있는 나무일 것입니다. 여기에 단단하기까지 하다면 최고의 나무로 반기겠지요. 그런데 키도 작고 뚱뚱하고 모양도 뒤틀린 나무가 있습니다. 휘어지고 뒤틀려서 볼품없는 나무로 사람들의 철저한 외면만 받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공명이 잘 된다는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이렇게 볼품없어 보이는 형태가 된 이유는 이 나무가 자라는 로키산맥의 지형 때문입니다. 로키산맥의 해발 3,000~3,500m 지점은 바람이 매섭고 눈보라가 심하며 강수량도 아주 적습니다. 생명체가 제대로 살 수 업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다 보니 키가 작은 볼품없이 휘어진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이겨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귀한 나무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시련 등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귀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고 직접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악과 타협을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서도 안 됩니다.
탑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합니다.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테니까요. 우리는 주님을 선택하면서 영광스럽고 흠 없는 삶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탑의 기초만 놓은 채 포기하는 사람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적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외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많은 적은 재물욕, 쾌락에 대한 욕망, 이기심, 남을 쉽게 판단하는 닫힌 마음 등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적군을 나 혼자의 힘으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꼼꼼히 따져보면 승리를 위해 당연히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매우 당황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했던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경우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더욱더’ 등의 비교급 대신 사용했던 말이 ‘미워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서 살아갈 때, 자신의 십자가를 무겁게 느끼지 않고 기쁘게 짊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제일 좋은 나무는 없습니다. 각자의 쓰임새가 있을 뿐이죠(이정섭 목수).
편 되어주기.
종종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어떻게 상담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들어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최대한 많이 들어주려고 했지만, 이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누군가에게 어려운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 사람이 “나의 경우는 이러했었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했을 때 정말로 큰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특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것입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상대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상대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만 기억하면 분명히 상대방의 진정한 편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웃의 편이 되어주는 모습을 주님께서 먼저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웃의 편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편이 되어주십시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두번 째 독서인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노년기에 접어든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세밀하게 유추할 수 있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젊은 시절, ‘열개의 팔’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펄펄 끓는 혈기와 넘치는 에너지로 온 세상을 뛰어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오로 사도는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 시절을 끝낸 폐마(廢馬)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온몸 여기 저기가 쑤시고 아픕니다. 수시로 닥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자면서 몇번이나 깨어 끙끙 앓습니다. 아침이면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날씨라도 궂으면 삭신이 부서지는 듯 합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운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혹독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늙고 병든 것도 모자라 투옥된 신세였습니다. 연세 드셨지, 갖은 병고로 괴롭지, 옥에 갇혀있지, 정말이지 바오로 사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울적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과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희망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쓰신 편지의 수신자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필레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편지와 달리 필레몬에게 쓰신 서한에서는 무척이나 간곡함이 돋보입니다. 필레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었는데, 꼭 좀 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필레몬의 소유의 종 오네시모스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극진히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 같아서는 충직한 오네시모스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당시 법이 정하는데로 노예 신분인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분노한 필레몬이 오네시모스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겠습니다. 서한의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은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필레몬서 19절)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주인 집에서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도피 자금으로 주인 필레몬의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스가 도망나옴으로 인해 생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가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늙은이’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몸’이란 표현까지 구구절절 써가며 필레몬에게 간청하십니다.
노예 오네시모스를 바라보는 노인 바오로 사도의 시선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모스를 사람도 아닌 가축 같은 존재, 자신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소유물, 매매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로 바라봤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새로운 인간이요 신앙의 동지, 총애하는 아들로 바라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에 대해 ‘내 심장과 같은 그’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게 바라봤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자세는 놀라움을 넘어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 노예 제도 등과 같은 신분으로 인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은연 중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측면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국민적 관심사였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틈틈히 시청하며 정말이지 슬펐습니다. 청문회장 한켠을 차지하고 줄줄이 앉아 계셨던 분들, 그들이 보여준 언행 하나 하나는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수많은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보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더군요.
후보자를 앞에 두고 깐죽거리며 우롱하고, 상대를 올가미에 옭아매기 위해 갖은 유치한 언행들을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들이 몰염치하게도‘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운운할 때는 정말이지 뒷골이 다 땡기더군요. 국민의 대표라고 자처하려면,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걸맞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질문하고 발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시정잡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껄렁껄렁·후안무치,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그들이 한 일은 온 국민을 모욕하고, 범 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인 것 뿐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정말이지 지도자를 잘 뽑아야겠습니다.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지도자, 틈만 나면 버럭 버럭 소리 지르는 지도자, 언행에 품위나 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도자, 비열하고 천박한 지도자를 뽑는 순간, 그 뒤로의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40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더불어 유태인 학대를 피해 수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몰려듭니다. 구소련은 리투아니아내의 각국 대사, 영사관의 폐쇄 명령을 내리지만 마지막 일본 영사관만은 문을 닫지 않고, 피란민들은 마지막 희망을 일본영사관에 걸게 됩니다.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기하라 지우네는 일본외무성에 문서를 보내 유태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의 3번이나 반복되는 요청을 묵살합니다. 일본 외무성은 대외적으로는 유태인 난민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이라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 독일과 협력관계였던 탓에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들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입니다.
영사관을 둘러싼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며 스기하라는 결국 결심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일이 불러올 파장과 다가올 파면, 불명예, 경제적 궁핍, 가족의 고통이 눈에 선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 판단합니다.
그는 자격조건을 크게 완화하여 무자격에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비자를 발급합니다. 물론 일본외무성의 허락 없이 발행하는 것으로 당연히 문서위조이나 그런 것쯤 상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위조라 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940년 7월말부터 9월 초까지 매일 비자를 발급하였으며 막바지에는 거의 하루 300장 정도를 발급합니다. 거의 한 달에 발행하는 분량을 하루에 발급했다 합니다. 2000번대 이후로는 연번호도 적지 않습니다. 영사관이 폐쇄될 때 까지 연번호가 지정되지 않은 비자까지 포함하여 수천 장 이상 발행되었으리라 보고, 비자 한 장으로 한 가족 전체의 입국이 허가됐던 것으로 보면 대략 6천명 이상의 유태인이 비자를 얻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는 영사관이 폐쇄된 날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위한 열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발급합니다. 이후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해 리투아니아는 독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가며 이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은 20만 명이상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탈출한 스기하라는 1941년 체코영사관서 근무하였으며 소련의 체코 점령 때 체포되어 수감생활 후 일본으로 송환됩니다. 이후 자국에서 1947년 외무성으로부터 면직됩니다. 전쟁 후 이스라엘 측에서 일본외무성에게 요청한 그의 행방에 대하여 “‘스기하라’라는 외교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실로 미루어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1986년 7월 31일 영면에 들기까지 일본에서 전구를 팔면서 소박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스기하라의 이야기가 알려졌을 때, 기자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을 찾아가서 외교관으로서 출세의 길을 버린 아버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옳은 일을 택했으니까요.”
스기하라는 동방정교회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조: ‘생명의 비자: 양심의 법을 존중한 스기하라 지우네’, 아시아뉴스]
하느님 나라는 소유욕을 버린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마치 층층계단식 논과 같아서 내가 받은 것을 흘려보내주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되어있습니다. 세포가 각자가 가진 것을 옆의 세포에게 전달해주지 않으면 함께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어줄 줄 모르면 암세포가 됩니다. 본인은 소유하며 살고 싶겠지만 결국 본인도 죽고 이웃도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닥쳐올 가난과 고독, 멸시 등의 어려움이 두렵기 때문에 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내어주는 만큼 생기는 결핍에 대한 불안함이 모아들이게만 하는 것입니다.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결핍을 인내할 능력부터 키워야합니다.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친구가 없어도 행복하고 친구가 있어도 행복하며 부유해도 행복하고 부족해도 행복할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힘들이지 않고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면 아무 것도 내어주기 싫습니다. 저도 처음 유학 가서 말을 배울 때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소유욕이 엄청 증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물건으로라도 채우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도와 아프리카 친구와 함께 같은 방을 썼는데, 그들 특유의 냄새는 참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정말 네 것 내 것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저의 것을 마구 가져다가 쓰고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뭐 그런 것들이 없다고 특별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별이 없는 그 친구들의 행동에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물건을 찾아서 다시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잘 산다는 것으로라도 만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야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으려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합니다.
전북 전주의 한 교회에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란 푯말을 붙인 상자를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그 같은 물품들을 넣게 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내용물이 수집됐습니다. 고급 양주에서부터 외설테이프, 추잡한 액세서리, 불량서적 등이 쌓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매월 정기적으로 불에 태워버리고 각자 새 생활을 다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건전한 가정생활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운동 덕분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을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통”도 만들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행복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내어주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들에 내 것을 넣으면 죄가 사라지고 광야라는 곳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버티셨습니다. 이 능력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난과 고독과 지루함, 겉보기는 고통스럽겠지만 친해지면 평화로워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가진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기도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밀려오는 지루함과 싸워봅시다. 혹은 집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성경을 1시간만이라도 필사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과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시간이든, 재물이든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딱 15가지의 물건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물건을 쌓아놓고 삽니다.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부족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아무 오락거리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참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은 교통이 혼잡하고, 주차비가 비싸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좋다고 합니다. 저도 기차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시내에 나갔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시간이 남아서 아는 형제님의 소개로 ‘Stardust’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30분가량 기다려서 맛있는 버거를 먹었습니다. 식당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특이한 점 때문에 형제님은 저를 그 식당으로 안내했던 것 같습니다. 종업원들은 모두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음식을 주문받고 자리를 안내하지만 멋진 노래를 춤과 함께 불러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지만 언젠가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할 젊은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습니다. 주인은 젊은이들을 미래의 멋진 뮤지컬 배우로 소개하였습니다. 손님들도 젊은이들의 노래에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이 중에 20명이 뮤지컬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주인은 종업원들의 꿈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손님은 종업원들의 열창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종업원들은 식당이라는 자리에 서 있지만 이상은 멋진 뮤지컬 무대를 향해 날고 있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Stardust’를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음식도 먹고,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바보라고 불리던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가슴에 있던 열정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타고난 성실함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선택한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온달의 가능성을 알아본 평강공주와 평강공주를 믿고 따랐던 온달은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의 신분이지만 오네시모스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아들로 여겼습니다. 오네시모스는 자신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아들로 여겨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성서는 전하지 않지만 오네시모스는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온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식당의 종업원들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왕에 뉴욕에 왔으니 기쁘게 지내려고 합니다. 한국처럼 빠르고 신속한 사회는 아니지만, 이곳의 문화와 제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유능한 영업사원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판매하고, 아프리카에서도 가스난로를 판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능력은 없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일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뉴저지 성 미카엘 성당의 9시 미사이고, 다른 하나는 12시에 있는 롱 아일랜드 한인 성당 40주년 기념미사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기회를 주셨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건 힘과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넘어졌고, 배반했고, 좌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이해하셨고, 용기를 주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으로 교회가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버려 길가에 버려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앙이 희망으로 자라나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며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따르려
겉사람을 떠납니다
당신을 따르니
비로소
알사람을 만납니다
당신을 품으려
헛것을 버립니다
당신을 품으니
비로소
참것을 얻습니다
당신을 닮으려
헛나를 벗습니다
당신을 닮으니
비로소
참나가 됩니다.
천사들의 비웃음거리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현세 모든 것 소지품~목숨까지 다 영원행복을 준비하는 재료들입니다.
하느님 가족으로 영원행복 받을 준비과정이 곧 세상 생명사리인겁니다.
하늘과 지상 지금과 미래 죽음 후 영원삶 훤히 아시는 예수님말씀이죠.
내일을 모르고 하늘도 모르고 죽음 후 영원 행복나라 깜깜하게 삽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미래 구상들을 막 떠들어대는데 사실 비웃음거리죠.
비싼 옷 입고 명품가방 들고 외형에 투자할 때 천사들은 비웃는답니다.
죽으면 투쟁 힘 정치 과학 실력 재물 미모 등 다 꽝! 영원한 창피거리.
세상살이에 물심 목숨 다 쓰고 영원 살이 거지 영혼 비웃음 속에 살죠.
미사의 영성 11 성변화 후 환호 - 신앙의 신비여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성당에 가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은 믿지 않는 친지들과 심지어는 부모와 배우자에게서 들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생기기는커녕 내야 합니다. 가끔은 “돈 없으면 성당에도 못 다닌다.”는 이야기마저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인데도 왜 사람들은 성당에 나오고 교회를 이루려고 애씁니까? 그것도 죽자 사자 성당 일에 매달리는 사람마저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실제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고, 게다가 우리는 103위 순교 성인들을 자랑으로 삼는 후예들이 아닙니까? 현세적인 이득도 없는데, 무엇이 우리를, 어떤 매력이 우리를 이렇게 교회로 모이게 합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것 같은 사회 안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학으로 무엇이든 다 해결할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이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1-13) 곧 한 소년이 내어놓은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것을 내어놓으면 나는 죽을 텐데 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신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기적을 돈 내고 돈 먹기 또는 돈 나눠 먹기(?)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루카 9,23-24)임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인간이 여기서 ‘나’ 라고 이야기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지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왔던 방법과 처세적인 습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 놓은 본인도 먹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먹게 된다는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4-57)
그리고 그분이 빵을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몸을 우리 영생의 양식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당신이 우리 생명과 존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신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그렇다면 우리를 그렇게 따르지 않으면 미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우리의 인생을 걸머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가 먹고 마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먹고 마시며 우리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이라는 분은 누구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은 우리 현세에서 실패한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사회에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서도 아주 최극형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우리 생명의 길이라고 여기며 따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죽음의 세력을 쳐부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렇다면 십자가의 의미,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열쇠요 전제조건입니다. 부활하고자 한다면, 아니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면 죽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그리고 죽는 것이 신자의 근본이요, 기본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럼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얻을 것입니까? 우리는 바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해관계로부터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따라야 합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고 체험하여 얻은 내 존재와 삶의 사고방식과 이해관계를 버리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밟고 일어서는 방법에서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방법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상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요 가르침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짊어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마태 26,42; 마르 14,36) 사도 바오로는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이유가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뜻보다 우선하고 더 낫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25)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선포하고자 하고,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은 열매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요 전제조건입니다. 부활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의 하느님 나라이지만, 십자가는 오늘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진 주님의 자녀들에게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하늘나라의 문이요 그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해야 할 순간에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루카 24,38) 일도록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짊어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이요 권리로 여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1코린 1,31)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알 것이며, 우리를 통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도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6-48)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짊어지는, 주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버림과 따름 -루카14,25-27-
곽승룡 비오 신부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인생의 길에서 “자신만 존재하지 않기”를 초대하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을 팽개치라는 것이 아니라, 타자 특히 가난한 이웃을 초대하기를 바라신다.
또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 길을 가기 위해 어떤 근본적인 것을 스스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묻고 관상해봐야 한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따르고자하면서도 소유한 물질을 어떻게 포기할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한 물질을 가지고도 주님의 부르심을 실행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면 된다. 곧 내가 소유한 물질을 가지고도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까를 스스로 계속 질문할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심과 깊은 관련을 가지도록 안내하신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더욱 집착하는 것은 혹시 물질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닐까?
우리는 더 큰 성공, 더 많은 돈 그리고 큰 힘과 많은 명성을 가져다주는 이 시대의 가치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연 하느님을 포기해야 할까? 를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런 이미지들과 가치관 그리고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눈에 성공한 사람들, 정치인들, 유명인들 또는 영화배우들 운동선수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족과 목숨까지 스스로 미워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루카14,26)는 예수님 말씀처럼, 이 표현이 무척 강해보이지만, 우리가 생명 자체를 만들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가족은 삶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강조한 말씀이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로 왔다는 말씀처럼, 우리도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첫째로 섬기지 않고, 우리 가정, 교회, 부모, 모든 좋은 것을 섬길 수 없다. 그분 앞에서 우리 삶을 조절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드리고, 제사에서 그분에게 맛 배를 드린 이스라엘 사람처럼, 우리도 첫째 재산들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 중심이라는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
곧 주님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그 가치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위해 버림과 따름을 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대와 이 시대의 문화가 매우 다른 점은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것도 내려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 이것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키워드는 “의식적으로 내가 선택하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너무 극단적 방식을 지양하라는 주님이시다. 이처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항상 선택이다. 주일을 지킬 것인가, 나의 일을 할 것인가, 주님을 만날까, 친구를 만날까, 주님 안에 휴식을 할까, 나의 취미로 휴식을 할까, 자비롭게 용서해야할까, 정의롭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까, 이처럼 우리는 종종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많이 느끼고 곰곰이 생각한다. 결론은 둘 다 하십시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가 쥐고 있는 것들, 나쁜 생각들, 뒤끝, 개인적인 유감, 적대감, 분노, 야망 등 강한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준비를 하지 못한다. 또는 내가 어떤 길 위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실현하고자 한다. 오늘 세례를 받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결심을 봉헌하면서도, 세상일과 친구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를 염려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들이 요구하고 있는 그 값의 무게를 계산하고 재야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결론은 둘 다하세요. 그리고 그 방법을 찾으세요. 주님의 선택은 극단적 흑백 논리가 아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며 주님은 버림과 따름의 영성을 제시하신다. 이 버림의 영성은 자기를 버림으로서 자신을 찾고, 가족을 미워하면서 참으로 가족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나의 것을 버림으로서 나의 것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버림과 따름의 영성은 욕망과 야망과 교만을 버리고, 주님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따르는 삶이다. 주님은 버림과 따름이 바로 당신의 삶이고, 또 우리의 생활이 되도록 초대하신다. 온전히 버리는 것은 주님을 따름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나의 강한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인 듯싶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곧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하고,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삶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고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거의 모두가 다 자신의 십자가가 제일 큰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어쩌면 내 삶의 고통스러운 한 부분이자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져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가진 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의 집안의 경우 동생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서 인간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가에 대해서도 많이 원망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심을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은 성당의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를 나가시면서 신명나게 활동을 하셨고, 저는 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3년 전에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자서전이 있는데 그 자서전의 제목은 ‘한 생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주된 내용들은 바로 하느님 안에서 온 삶을 이루어 가면서 삶의 모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참된 행복을 사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 계실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제가 병이 낫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아온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주신 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련과 고통이자 동시에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바로 그 십자가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를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답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에 이은 시편 90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영혼의 쉼터인 주님을 찾아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쓰레기입니다. 인스탄트 세상이라 잘 포장된 인스탄트 물품, 식품에 쓰레기도 참 많이 나옵니다. 쓰레기 같은 거짓 뉴스, 기사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인스탄트 인간에, 쓰레기 인생이 될 위험도 다분합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인간이 누구인지 치열히 찾지 않으면 참 나를 살 수 없습니다. 생각 없는, 영혼 없는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지혜서가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우리의 속 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그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 옛날이나 고도의 첨단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이나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 이고 고뇌와 고통도 계속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귀착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참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우리는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인간이 갈구하던 지혜를 하느님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지혜는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지혜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할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평범해 보이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에 흥분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마치 인기스타를 방불케하는 예수님이요, 생각없이 추종하는 무리들 같은 느낌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주님 말씀입니다. 과연 다음 예수님의 말씀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지혜로운 답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자답게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지혜이자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주님이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하지 않으셨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 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잘 살고 있습니까? 갈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삶이 혼란하고 복잡한 것은 삶의 방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따를 분을 잃었기, 잊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갈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요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평생 죽는 그날까지 따라 살아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할 길입니다. 30년전 사제서품식 미사때 입당성가 445장을 들으며 입장할 때 흘렸던 눈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
생명의 빛이신 그분만을 따를 때 복잡 혼란한 삶은 단순해지고 진실해집니다. 위로와 치유가 있고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감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란 말마디 그대로 예외없이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려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로 표현하는 사례가 잦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사랑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가족에게도 무집착의 눈밝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의 무정한 말씀을 약화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근본적이고 무조건적인 추종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마주하는 사람에게 다른 인간적 관계들은 부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웃도 올바로 집착없이 이탈의 정신으로 순수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를 절대로 망각해선 안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형제애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저절로 깊어지는 형제애요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이 답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마음의 병,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참 나를 알게 되어 저절로 겸손과 지혜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가족은 물론 모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의 사랑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주님 사랑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사랑이 수도자는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성소입니다. 이런 예수님 사랑을 노래한 성가 61장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이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세상 어떤 것과도.”-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 사랑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 때문에 수인까지 된 바오로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옥중에서 얻은 오네시모스를 ‘내 아들’이라, ‘내 심장’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그 지고하고 순수한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형제들도 사심없는 집착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하느님 사랑 같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셋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결코 우열이나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입니다.
누가 남이 대신 질 수도 없고 내려 놓을 수도 없는 각자의 제 십자가입니다. 제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제 고유의 운명의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삶이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니 원망해서는 안되는 내 십자가의 짐입니다. 참으로 내 십자가가가 무엇인지 잘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짐을 덜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짐을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여 기도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침내 자기 책임의 십자가를, 자기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사랑하면 십자가는 선물이 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이 식으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도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도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제 십자가가 빠진 삶은 완전히 자기 상실의 헛된 삶입니다. 구원도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야말로 천국의 열쇠, 구원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제 십자가의 열쇠로 천국문을 열고 들어 가야 합니다. 자나깨나 살펴봐야 할 내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복음 중 망대와 전쟁 이중 비유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 늘 깨어 삶을 점검하며 살펴 보라는 의미입니다. 도중하차 않고 죽는 그날까지 끝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완주해야 하는, 싸워야 하는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삶은 죽어야 끝나는 평생 마라톤 경기와도 같고 평생 영적 전투와도 같습니다.
넷째, 안팎으로 부단히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발적 버림과 가난, 비움의 삶입니다. 세상 소유물로 부터의 이탈입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이탈에 이은 재물로 부터의 이탈입니다. 참으로 주님만을 사랑할 때, 참 좋은 보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버림과 비움의 이탈입니다. 예수님도 분명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유냐 존재냐의 갈림길입니다. 소유에 눈이 멀어 노예되어 존재를 잃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사람들입니다. 소유의 주인이 되어 참 자유로운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하되 소유에 소유되지 않는 이탈의 자유는 참으로 예수님만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 당장은 실천하지 못해도 참으로 나날이 안팎으로 버려가는 이탈의 삶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집착이, 탐욕이 우리를 눈멀어 무지하게 합니다. 참으로 날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여, 제 십자가를 지고, 안팎으로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평생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참 자유롭고 행복한 구원의 삶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주님을 따르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군중이 뒤따라갑니다.
당신을 따라 오는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예 따를 생각을 포기하라고 겁을 주는 것이고 포기를 종용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당신을 따르되 그에 따른 고통을 각오하라고 격려하시는 걸까요?
물론 따르기를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오하고 분발하라고 하시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지혜로운 판단을 하라고 충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에서 지혜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나 복음에서 “먼저 앉아서 계산하고 헤아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 지혜로운 판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무모하게 따르지 않고 지혜롭게 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무엇을 하거나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나친 비관으로 문제점만 크게 보기에 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친 낙관이나 치밀함의 부족으로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입니다.
이 양 극단과 관련하여 저는 저질러 놓고 보는 형입니다.
물론 그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위해 고민을 하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빨리 식별이 나면 빨리 포기하지만 그 식별이 쉽지 않을 때 고민을 오래 하지 않고 저질러 버리는데 하느님의 뜻이면 될 거고 아니면 안 될 거라는 믿음으로 그러는 거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지혜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얘기하고,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를 얘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성령의 지혜가 아니면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고린토 전서 2장 11절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도 성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자기 뜻/자기 의지대로 따를 수가 없고, 자기 힘만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고, 공자가 얘기하듯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가 되면 곧 내 욕구가 가는대로 마음이 따라가도 법을 어기지 않는 경지가 되면 나의 뜻이 욕심에 휘둘리지도 않고 두려움에 휘둘리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 자기 의욕만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계산치 않고 집을 짓고, 적은 수의 군대로 큰 군대와 싸우러나서는 것과 같이 무모한 것이고 그렇게 나섰다가는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바를 다시 깊이 묵상해봅니다.
“전능하시고....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하나 제시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 잉~ 너무 지나친 주문이 아닌가요? 어떻게 일부야 버릴 수 있겠지만 다 버리라구요!
예수님이 주문하시는 것을 한걸음 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소유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한번 볼까요?
이것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앞서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우리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등이 정말 내 것입니까? 아니, 내 목숨마저도 실제로 내 것이라 할 수 있나요? 다 하느님의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며 소유물로 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그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소유하는 것이 나에게 밀착시키는 행위라면 미워하는 것은 나에게서 멀리 위치시키는 행위가 되니까요.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니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 것으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어느 관계를 막론하고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또 부르심을 받을 때 그들을 흔연히 떠날 수 있는 내적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그에 덧붙여 예수님은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자질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네요. 내가 소유하는 것이 나를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자질, 스펙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점이나 허물, 장애 등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고백인 셈이지요. 사실 그것만이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러니 어느 훌륭한 누군가를 흉내내면서 괜찮은 사람인 척 치장하지 말고, 자기의 약함과 어두움, 수치와 모욕, 고통과 죽음이라는 자기 고유의 실존을 인정하고 받아안은 채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 십자가야말로 자기는 물론 타인을 위해서도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것이라고는 죄악과 허물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은 그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자기 것으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종이 참으로 가난한 자요 그래서 복된 종"이라고 권고하였지요.
오늘 제2독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화를 전해줍니다. 바오로가 감옥에서 얻은 아들, 자기 심장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오네시모스를 원래 그 주인이었던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는 "아, 바오로야말로 정말 예수님의 참제자였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내 소유라 할 수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 아들, 형제, 동지를 모두 얻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바오로가 "심장"으로 여기니 그를 자기 것으로 계속 두고 필레몬에게 돌려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평생 도망친 노예로서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고 바오로와 필레몬도 참동지가 못되고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필레몬과 오네시모스의 관계도 원래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형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원수 관계로 추락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바오로처럼 내 소유(라 여기는 것을)를 버리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면서도 기꺼이 자기를 내려놓고 순명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내 소유를 내려놓고 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수밖에요. 보통 사람들은 반대로 내 소유를 지고 내 무거운 십자가는 내려놓고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이렇게 세속적인 영웅을 따르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런데 뭔가 당시 주류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조건으로 가문, 종족, 직업, 학문, 재산, 신분, 성격 등을 따지시지 않고 다만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지를 보신다는 점입니다. 다른 어느 종교 지배계급과 달리 외적 조건보다 마음을, 열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점에서 어부도 세리도 마귀 들렸던 이도 따라나설 수 있으니 이 또한 새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7-18)
바오로가 그랬듯이, 이런 깨달음으로 예수님 제자가 되신 벗님은 참으로 복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버림과 추종
이종훈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주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그분을 모범으로 삼아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그분의 제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소유를 남기지 않고 다 버려야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올바르게 배워 익히기 위해서 제일 먼저 자신의 소유를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제대로 배우지 못하니 깨달음도 없다. 자유와 평화도 없다. 그러면 무엇을 버리나? 자신의 믿음을 버린다. 하느님을 믿는다지만 말뿐이다. 마음 그리고 육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과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실행한다. 그러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도 같은 죄에서 말이다. 버림은 고사하고 변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 변하는 시늉이나 그렇게 보이기 바라는 것 같다. 아니면 수없이 시도했어도 잘 되지 않으니 언제부터인가 체념하고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면 깊은 곳에서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변화는 노력이 아니라 버림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무의식에 담겨 있어서 나의 육체에 배어 있는 습관은 어쩌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믿는 모든 것을 버린다.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얻고자 하는 것이 나의 꿈을 이룸이 아니라 나의 완성이고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탑을 완성하고 전쟁하지 않고도 평화를 지키면 좋다(루카 14,28-32). 불완전한 인간성을 완성하고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실천하여 증언하신 사랑이 진리이고 하느님처럼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 길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라고 가르치셨다. 버림, 십자가를 짊, 추종 중에 중심은 십자가를 짊인 것 같다. 물려받은 것과 누군가 내 안에 새겨놓은 그 법칙들을 어떻게 단 번에 모두 내다 버릴 수 있겠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을 방해하는 그것들을 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새겨진 그 법칙들 혹은 그 목소리는 아마도 이 세상 삶이 끝나는 날에야 사라질 것 같다. 그 때까지 듣기 싫어도 듣고, 싫어도 같이 살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주님 뒤를 따른다.
예수님, 버림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 목숨을 건 결정일지 모릅니다. 비유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로 죽기도 하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어차피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게 저의 이 육체입니다. 축복받은 삶은 장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제 삶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자기 소유를 넘어 함께 공유를
이영 욥 신부님
땅을 소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금은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살 수 있지만, 돈이 없던 옛날엔 정당하게 땅을 소유하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땅을 일구는 것입니다. 불모지를 일구어 밭으로 만든다면 그 밭은 나의 노동력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나의 노동력으로 창출한 가치는 나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사유 재산권의 노동가치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나의 노동력으로 땅을 일구어 밭을 만들 때, 반드시 내가 노력한 딱 그만큼만 밭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 땅은 이전에 다른 일곱 사람이 거의 다 가꾸어놓았는데, 때마침 내가 조금만 노력하여 밭으로 만든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땅을 소유하는 순간, 이전에 그 땅을 가꾸었던 일곱 사람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유할 때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공유해야만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사유 재산권은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에 종속되며 다른 사람들의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완전하고 영원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망각하고 재화를 섬기는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우리는 ‘자기 소유’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물에는 물론 우리의 노력도 포함되어 있지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서 시작되어 나 이전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소유’를 넘어 ‘함께 공유’해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소유’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르듯(지혜 9,15). 우리를 재물의 노예로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소유’를 넘어 ‘함께 공유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선물
김해선 비비안나(시인)
저희 부모님은 천주교와 무관한 분들이셨습니다.
평생을 유교적 전통을 지키며 대가족 중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1년을 꼬박 초하루와 보름날에 새 밥을 지어 제사상에 올리셨습니다.
하루하루가 농사일로 고된 생활이었지만 부모님은 최대한의 정성을 할머니께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집에서 혼자만 성당에 다녔기 때문에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할 때는 조금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성당에 다닐 마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후에 부모님께서는 서울 근교 부천으로 이사하시고 그해 설 명절, 부천의 한 성당 설 미사에 참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날 미사 때 제대 앞에 차려진 차례 상과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의 모습, 그리고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론 말씀에 아버지께서는 크게 감동하셨다고 합니다.
천주교가 한국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전교했다는 것을 아버지도 막연하게는 알고 계셨지만, 두루마기 한복을 입으신 신부님께서 조상에 대한 연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런 종교라면 믿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고, 이후 부모님은 교리를 듣기 시작하셨습니다.
두 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자연스럽게 성당 노인대학에 다니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만, 저희 집은 종갓집이기에 제사는 계속 예전과 같이 모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신부님께서 하신 것처럼 제사상을 정성껏 차리시고 천주교 방식으로 제사를 모셨습니다. 식구들이 많다 보니 종교도 다양했습니다.
작은집과 막내 작은 아버지, 셋째 고모님은 개신교를 다니시고 광주에 계신 고모님들은 불교를 믿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사를 모시기에 앞서, 해마다 형제들이 모두 무탈하게 모여서 제사를 지내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우리 형제들 모두가 종교가 다르지만, 형제들의 종교를 존중한다고 하시며 각자의 방식으로 정성껏 제사에 참여해달라고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2년 전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방식으로 장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언제쯤이나 성당에 다닐까 싶어, 우울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중학교 1학년 때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을 하느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아버지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희 집의 제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동생 역시 아버지의 방식을 이어받아 제사 때마다 타 종교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존중과 배려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하면 상대방 생각도 중요하다는 단순함이라고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의 각기 다른 종교에 대해 배려할 줄 아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버지께서 저희 가족에게 남겨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순교자 성월에 순교와 배교(연중제23주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시대를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다. ‘성리학과 나라’, ‘천주교와 나라’를 놓고 당시의 사람들은 갈등하며 순교와 배교를 살았다. 누가 더 ‘하느님의 뜻’을 살았는 가는 보는 관점을 어느 곳에 둘 것이냐를 놓고 판단하게 된다.
어째튼 당시 시대가 복잡했다. 신자에게 양단간의 선택이 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졌다. 순교도 했고 배교도 했다. 순교는 죽음이고 분명한 것은 생명이다. 그러나 배교는 어떨까? 그 죽음은 생명이 되지를 못했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사정은 복잡하다. 당시 사대적 상황에 배교도 깊이 있게 다루어야할 부분이다. 구원문제는 하느님께 유보된 일이다. 그 속을 정확히 어찌 알랴.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성당 안팍을 드나들며 외적으로 드러난 열혈 신자와 성당 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사는 쉼의 신자들, 누가 더 훌륭한가는 외적인 판단만으로 모른다. 하느님만이 정확히 아실리라. 누가 더 자유로운 영혼이냐는 그분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하느님 뜻 따라 누가 보던지 안 보던지 선택한 것을 충실히 책임지며 오늘을 살 뿐이다.
하늘에 뜻 두고 하늘을 우러러 살자.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33).
내가 가진 모든 것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신학생 때 이야기입니다. 신학교에서 소임을 마치고 떠나시는 신부님의 짐 정리를 도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제관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짐들을 보며 ‘충격’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짐도 짐이지만 버리지 못하고 아까워 움켜쥐는 신부님의 ‘소유욕’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저도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임지를 떠날 때마다 늘어난 물건들에서 그때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 있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시절의 충격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정신으로 주님만을 따르고자 했던 신학생 시절의 결심을 떠오르게 합니다. 새파랗게 젊은 신학생이 나이 지긋한 신부님의 이삿짐에 혀를 끌끌 찰 수 있었던 건, 어린 치기였는지 모르지만, 당시 저는 실제로 가진 것이 없어 떳떳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문제는 지금의 나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기도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라는 구절을 되뇌어봅니다. 특히 소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진 것을 최소화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소유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누구든지 안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병영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관계이다. 이것을 버리라고 한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근데 이런 관계안에 묶여 있는 애착을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이 애착에서 우리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자녀의 생에 부모가 관여하는 것은 동반자살을 하겠다고 공언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관여하려고 하는 애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서로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오늘 복음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고추 밭에서 거미집을 보았다. 처음으로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거미줄에 촘촘히 있는 새끼 거미들이다. 어떻게 보면 동물이 사람보다 자식을 키우는데 더 현명한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살아 남도록 그냥 두고 본다. 단지 어미는 어느 시기까지 목숨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먹이를 제공할 뿐이다. 인간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관여하려는 욕망을 버리는 것이 순교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진 십자가 <루카,14/25-3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세상의 태어나 생명을 지니고 사는 한 십자가에 눌려 살아야 합니다. 누가 이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십자가는 더 무겁고 고통에 고통이 가해집니다. 이숍 이야기에 당나귀가 소금을 지고가다 강가에서 너머진 후 소금이 녹아 가벼워 지니 다음도 그렇게 해서 가볍게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를 알아차린 주인이 다음은 솜을 잔득 싫고 가다 물에 일부러 넘어진 당나귀는 물을 머금은 더 무거운 집을 지고 가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당한 고통을 벗어나려고 하면 점점 더 심한 올가미에 엉키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제가 40이 조금지난 때 본당신부를 구만두고 학교 선생으로 재직 중 하루는 금요일 수업을 6시간 하고나니 배는 고프고 짜증도 나고 하여 이 고통을 벗어보려고 장상에게 도저히 이런 힘든 일을 할수 없으니 본당으로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쓰고 봉투에 봉해서 장상의 편지함에 넣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려 마침 금요일이라 십자가의 길을 하던 중 9처에 와서 묵상중 주님이 저러시다가 길가에서 죽으시면 우리의 구원이 무산된다는 생각에서 제가 이런소리기 나왔습니다. “ 주님 가시던 길 일어나 끝까지 가세야 합니다. 일어나 가세요.” 그런데 나는 주님의 구원의 협력자로 이 작은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지 하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기도를 중지하고 달려가 편지함의 편지가 다행이 있어 편지를 지저 버리고 기도를 계속하면서 3년의 기간을 마쳤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따라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 십자가의 영광과 구원의 역사가 우리와 함께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가난해 져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하기 싫은 일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상담 중 “신부님 말씀은 바른 말씀이지만 따르려 하면 어렵습니다. 더 부담이 됩니다. 나는 내가 질머진 십자가를 벗어 놓으려고 하는데 신부님은 지고 가라는 말씀 너무나 부담됩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을 믿습니까? 기도하여 내 뜻대로 해결해 달라고 청하는 마음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자기를 떠나야 참 믿음이 되는데 믿는다고 할 수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을 만들어 내기위함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완성이 불가능합니다.
지금 순교성월입니다. 순교는 믿음을 통해서 사랑으로 완성 되어야 순교의 으총을 누리게 됩니다. 순교정신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주님의 참 제자로 살고 나의 희생 없이 구원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뒤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 27)
(Whoever does not bear his cross and come after me, is not able to be my disciple.)
김웅태 신부님
+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태풍 링링이 한반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태풍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루카 14, 25~33)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라가지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데 있어서 자기가 맡은 책임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윤리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맡은 책임은 가정에서의 역할, 사회적인 지위와 그에 걸맞는 역할, 그리고 인류 공동의 존재로서 이웃을 보살피는 일 등,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물을 다 버려야 한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 33)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 것,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소유가 전혀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주가 필요하지요. 잘 곳, 입을 것, 먹을 것이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여유 있는 돈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들도 필요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것까지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일까요?
자기 소유를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어려움을 겪는, 그러한 갈등이 되는 것이야말로 생각해봐야 할 것들입니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또한 주님께서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는 것, 그러한 마음으로 믿고 계명을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그렇게 모진 분이 아니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실천을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따르는 삶, 그리고 그런 것들이 곁들여진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내가 버리지 못하는 소유물이 있습니까?
•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버린 소유물을 무엇입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기꺼이'(루카 14장 25~33)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게 쉽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자기애가 강해서 역행하거나 거슬러 사는 형태를 취할때 엄청난 인내와 꺾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다 꺾을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된다는 것이 있으십니까?
살다보니 ~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며 살지 않으면 ~
갈수록 고정화되고 탄력이 줍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꺾으려하면 목숨을 걸고 꺾이지 않으려 버팁니다 ᆢ
1년에 산 100개를 정복하는 분이 계십니다.
'왜 오를까 내려올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
몇년을 지켜보면서 그분의 정신력과 의지는 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있더군요.
십자가상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까지 가려면 쓸데없는데 힘쓰지 말고 기꺼이 내놓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해나갑시다!!
'기꺼운 마음으로 하먼 쉬워집니다.'
예수, 내 인생의 모든 것
한민택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참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은,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향한 길이며, 제자들에게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단순히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재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말씀에는 ‘전적인 투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그것은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삶을 그분께 투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에서 과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걸 만큼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는 사람이며, 모든 것의 기준을 그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의 예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필레 9)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사도의 삶은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사실 그 만남은 그가 박해하던 교회 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해 미리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리 3,7-9 참조) 그분께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도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의 화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단순히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과 사랑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입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온갖 유혹들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으며, 우리 마음의 눈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두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임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아는 여정에서 어디쯤 와 있습니까? 그분은 내 인생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느냐에 따라 갈릴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장재봉 신부님
루카 사도는 오늘 그곳에는 예수님을 좇는 거대한 무리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덕이었을 텐데요. 그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구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문으로 들었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하며 숨죽여 주님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콩밭에 계신 듯 보입니다. 뭔가 신기하고 멋진 일을 기대하고 몰려든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계시니까요.
그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거북했을 겁니다. 하물며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이나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도 죄다 당신 제자의 자격이 없다는 말씀에 도대체 뭔 얘긴지…… 어안이 벙벙한 채 걸음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폭탄선언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을 테니까요. 어리둥절하고 망연자실한 마음은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아연실색하여 주님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시는지, 따지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르심이 결코 가족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냉혈한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의 심지는 당신 제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의 우선순위를 밝힌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어리둥절해 하거나 뜨악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저 막연하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생각만 할 뿐 주님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는 ‘남’처럼 지내는 것은 아닌지 캐묻고 싶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삶이 법의 테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교회의 전례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거나 교리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주님을 잘, 제대로 따라가는 줄 착각하니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정녕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최고봉인 양 여기는 오해가 만연하니 말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네 번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스무 번이나 하셨다고 밝힙니다. 이야말로 주님을 아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된 구원자임에 감격할 때에만 비로소 당신을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을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보잘것없음에만 주목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비웃었고 하느님의 자비심을 폄하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내리신 이스라엘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냉정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
하느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바리사이들은 머리로는 하느님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했기에 주님과 어긋난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찔림 받기 원합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은 그분 곁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은 그분의 걸음을 좇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식은 무조건적인 따름으로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따름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외침이며 허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식물들은 새잎을 계속해서 내기 위해서 오로지 빛을 향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식물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째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빛이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 따르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눈 부신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말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주 분명한 믿음의 선을 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해 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곧 따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여 오직 그분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귀한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기에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아서, 그 가진 것에 연연한다면 결코 주님을 향할 수도 좇을 수도 없습니다.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를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주님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선 사람들은 세상의 계산에 약삭빠른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손해이며 피해로 계산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수긍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당장의 손해에 마음이 기울었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이익이라고 결단내렸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삶이라 해서 주님의 나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 안에 품은 바알,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마음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슬퍼하며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믿음은 세상의 것을 뒤로하고 잘라내는 외로움의 결단인 이유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말씀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군중”에게 똑같이 이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만천하에 공개하십니다.
이제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외칠 차례입니다. 주님의 보편적인 공정하심을 널리 알리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만천하에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 앞에서 우리는 숱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혼란해 하지 맙시다. 망설이지 맙시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천국을 향한 길에 들어섰으니 돌아서지도 맙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분을 향한 사랑이 매일 매일 불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청합니다.
예수님 제자 됨의 심각성
박일 신부님
제자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루 카 13,24 참조). 또 하늘나라의 잔치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 은 초대하는 목소리에 즉시 응답하고 따라야 합니다. 때문 에 새로 구입한 밭을 살펴보는 것도 포기하고, 새로 산 겨릿 소를 부려보는 것도 중단하며, 아내를 맞이하는 것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루카 14,18-20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 제자 되는 첫걸음은 일단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고, 그분의 말을 듣는 것입 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분을 뒤따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 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든 것 위에 모셔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을 그분 뒤에 놓아야 합 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요구를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 고 모순적이며 도전적인 단어를 사용하시어 요약하십니다. 바로 ‘미워하다’, ‘증오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참으 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 존재의 탄 생지요, 성장의 못자리이며, 인생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들 인 가족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라’ 고 하십니다. 당신이야말로 사랑해야 할 단 한 분이시며,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동반자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라
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미워하라’는 뜻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뒤에 놓으라는 뜻 이요, 둘째 자리에 놓으라는 뜻입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예외적으로,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똑 같을 수 없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분 외에 다른 모든 것들 은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 안에만 구 원이 있습니다(사도 4,12 참조).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 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명예도 잃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남긴 그 어떠한 것 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지워지는 운명도 받아들여 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본질적으 로 사람들이 대단히 거북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 는 가운데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쉬운 길이 아니니,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는 사 람, 다른 임금과 전쟁하게 된 임금의 예를 들면서, 일시적 인 열광과 제 나름의 미래를 그리며 섣불리 따라나서지 말 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기 전부를 걸어 완전히 헌신하는 자세로, 죽을 각오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 결국에는 참 평 화와 광을 얻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계산을 잘하자.
박덕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이며 성모 탄생 축일입니다. 절기로는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이 며 추석이 가까웠습니다. 올해는 절기가 빠른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이십니다. 원죄 없는 분이 태어난다는 것은 인 류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좋으신 어머니의 생신은 우리들의 축일이 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 다. ‘돈이 많이 드는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 냐?’ 또 ‘어떤 임금이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 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계산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농부의 고백입니다. ‘제가 사는 곳 일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주변 농부들은 모두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땅은 석유 매장지 바로 바깥에서 끝나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고 저는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벼락부자가 된 농부들은 도시로 떠났지만 저는 40년이 넘게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도시로 간 그 사람들은 한 가정도 예외 없이 이혼을 했고 자녀들은 타락했습니 다. 그러나 저의 가정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면서 굳은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또 저희 자녀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만 불행한 줄 알았는데 저희가 가장 복받은 가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계산을 잘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큰 것을 놓친다는 소탐대실(小貪大 失)에 빠질 때도 많습니다. 가장 큰 지혜는, 지금 내 앞에 이루어지는 나쁜 현실, 어려운 일들도 주님께서 섭리하신다고 굳게 믿고 잘 받아들이면 오히려 훗날 주님의 보살핌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 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이 드는 건 인생의 오르막길을 가느라 그런 것이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이 들지 않으면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느라 그런 것이다.”
성모님 탄생 축일과 한가위를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계산은 했는데...!
박순호 신부님-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지만 저는 나름 계산이 빠르고 꼼꼼한 사람입 니다. 예전에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닌 것 같은 생 각도 듭니다. 갈수록 아무 계획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늘기 도 합니다. 술에 취하면 더 잘 그럽니다. “난 오늘만 산다.”는 영화의 대사처럼 그거대로 폼 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만 이렇게 생 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사건들이 하나씩 더해 갈수록 더 잘하기 위해 계획하고 계산하는 것이 그만두고 싶은 무거움 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사람은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100% 없다고는 못해도 자기 삶을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 삶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버려두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본능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적인 계획은 빼더라도 인생 전체가 걸린 부분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입니다. 나름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나도 신부님이 되어야겠다 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저런 신부님이 되어야겠다고 계산을 하긴 했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 지 않은 것이 재미있고 신나는 것들이 주변에 너무 많아서 한눈을 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 기에다 내 계산이 틀린지 맞는지 검토하지도 못하고 중요한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 다. 다시 말하면 어디까지 계산해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계산을 끝내버린 것입니다. 공사 경 비가 예상보다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기운이 빠집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성당에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경비는 생각을 했는데 신학교에 갈 공부 경비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놀았는데 계획이 많이 틀어졌습니다. 너무 어려서 잘 모르고 계산한 것이니 취소하기로 하고 다시 계산을 하여 계획을 세웁니다. 지금 신부가 되어 주보 강론을 쓰고 있으니 그다음에는 잘 된 것 같지만 내용만 다르지 마찬가 지입니다. 다 살펴 계산한 줄 알았는데 놓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변수가 되어 공사 경비를 마구 올려 버립니다. 저는 이 탑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물 질적 세상의 온갖 유혹들 그 경우의 수를 모르고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가 어느 정도로 강하게 올지는 계산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수정하고 계산하고 그러면 또 몰랐던 변수가 생기고 이제는 너무 버거워서 모든 계획을 접고 싶은 마음이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신 자분들도 경제적일지 정신적일지 모르지만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인력은 안되니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길 청합니다. 주님, 아직은 공사를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면 대출 부탁드립니다. 계산 은 했는데 많이 모자랍니다. 비웃음을 당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소유권은 주님께 드리겠습니 다. 완성할 수 있도록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저라는 탑을 당신이 마저 세우시고 당신이 소유 하시기를 바라오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예수님이 제자 되는 길
황봉철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저는 두 가지로 묵상합니다.
그 첫 번째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즉 결코 버리지 말고 예수님처럼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탑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처럼 곰곰이, 또 전쟁을 치르고자 하는 임금처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부모 형제자매의 인연)이란 정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지고 가기 힘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어,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염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요한 19,25-27)
그러니까 우리도 그 혈연을 끝까지 잘 지고 가야 하겠지요?
그것이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 혈연보다도 더 우선하는 것이 신연(信緣), 즉 믿음의 연인데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신의 목숨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목숨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라면 예수님처럼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내가 버려야 할 소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 예로 우리는 오늘 제2독서인 필레몬서(9-17)를 묵상하게 됩니다.
1장으로만 되어있는 이 서간의 내용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현재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수발을 들고 있는데, 그의 주인인 필레몬에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정중히, 그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의 편지로 보입니다.
내 생각을 접고 먼저 상대방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즉 나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역지사지의 마음!
제1독서인 지혜서(9,13-18)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서 지혜로 구원을 받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잘 따르기 위해서는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고,
내가 버려야 할 소유가 무엇인지를 잘 구별하여(욕심과 역지사지) 그것을 또한 버릴 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최민석 신부님
어두운 새벽 온 세상이 고요하다. 있는 그대로 받아 안은 채 침묵 속 고요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정중동의 고요한 일렁임에서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인지 텅 빈 침묵의 세계가 나를 초대한다.
처음에 나는 어둠속 침묵의 방에서 허둥대다가 천천히 나를 포기하게 된다. 포기하고 나면 고요한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들숨과 날숨을 생생하게 바라본다. 점점 텅 빈 침묵 속에 휴식으로 다가선다. 휴식은 쉼이다. 가쁜 호흡이 사라지고 쉼으로 들어간다. 잠시 멈추고 쉬어간다.
이른 새벽 일어나 촛불 하나 밝히며 어둠에 빛을 구하며 빛이신 그분의 현존 가운데 쉼을 얻는다.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말씀이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왔다. 그 분께서 세상에 왔다.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5, 9)
하루를 정신없이 사는 많은 이들에 쉼은 빛이 된다. 삶의 여백을 만들어 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은 자신을 성찰하며 사유하는 시간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시간, 텅 빈 충만의 시간이다.
노래도 쉼표에서는 쉬어가야지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쉼표도 악보의 한 부분이다. 아니 숨표의 여백이야말로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다. 숨표에서 쉬어갈 줄 모르면 박자를 놓치게 된다. 쉴 때 쉴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의 박자를 잘 맞추며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께 하나 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평화를 구하곤 한다. 이 땅에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당신의 평화를 구할 때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현장 유가족의 손을 잡고 평화를 구하던 노래가 생각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가슴으로 울던 그들과 함께 하며 온 마음으로 외쳐 부르던 노래다.
“평화의 성령이여, 오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 화해하는 지혜, 인내의 지혜, 서로 존경하는 지혜, 서로 나누는 지혜, 단결하는 지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지혜 9, 13-18)
이 땅에 함께 사는 이들을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 내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구하니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이 솟아오르듯 내 가슴에 지혜의 샘이 솟아난다. 주님은 나를 이 세상에 당신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평화의 도구로 부르신다. 나의 눈물로 구하는 지혜가 새로운 풍경이 되어 나에게 다가 온다.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은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삶의 현장에서는 늘 눈물이 넘칠수록 기쁨이 피어나고 웃음이 넘칠수록 슬픔이 흘러내린다. 눈물 속에 웃음이 섞여 나오고 웃음 속에 눈물이 섞여 나온다. 벽시계 추처럼 울고 나면 웃을 일이 웃고 나면 울 일이 생긴다.눈물과 웃음은 사랑 속에선 함께 피어나는 꽃이요 치유하는 약이다.
꽃잎에 맺힌 이슬의 아름다움에 취해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연꽃잎에 떨어진 빗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 너무도 아름다워 나의 혼을 빼앗긴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흘리는 눈물만큼이나 아름다울 수는 없다.
내 가슴에서 시작된 눈물은 은혜다. 진정 울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슬픈 현장에서 할 말을 잃고 그저 함께 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슬픔이 내 가슴에서 녹아지고 그 아픔이 녹아지고 그 기쁨이 녹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 그 눈물을 기억한다. 은혜의 샘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이슬보다 빗물보다 꽃보다 아름다운 눈물 한줄기 어둠을 비추는 빛이다. 조금씩 나이가 더해 갈 수록이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손등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젠 제법 산다는 것에 어울릴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눈물 종종 흐른다. 내가 어리긴 많이 어린가 보다.
그리스도인의 지혜
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Sermo 95,6-8: PL 54,464-465)
그 다음 주님은 덧붙여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림”은 육신적 주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목마름도 물질적 음료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충족을 옳은 일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갖 신비의 심부에까지 들어가 주님 자신으로 충만되기를 욕구합니다.
정의의 양식을 탐하고 그런 음료를 목말라 하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가 이미 조금이라도 그 감미로움을 맛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욕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하는 말씀을 듣고 천상 감미로움의 한 몫을 취하고 지극히 순수한 이 욕망으로 불타올라 현세적인 모든 것을 멸시하고 정의를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망으로 심취해 있을 뿐 아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가는 계명의 진리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뒤따르는 것처럼, 여기서는 옳은 일에 주리는 복됨에 자비의 덕행이 뒤따릅니다. 주님은 이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신 지혜의 위엄을 인식하여, 어떤 가르침과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떤 상급으로 부름 받았는지 생각하십시오. 자비 자체이신 분은 당신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고, 정의 자체이신 분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창조주께서는 피조물에 반사되시고 하느님 모상은 하느님 자신의 모상대로 조성된 인간의 마음에 거울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의 신앙은 굳건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욕구들이 성취되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영구히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애긍 시사함으로써 당신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복락에 도달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형제 여러분, 그렇게도 위대한 상급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위에서 말한 덕행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 이것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행복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누가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 본성이 변모될 때 이 목적을 달성하여 하느님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가 아니고, 그분의 얼굴을 맞대어”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그러한 식으로 볼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은 영원한 관조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거센 바람이
나뭇잎을 마구
떨어뜨립니다.
세상 모든 소유는
떨어지는 잎들처럼
분명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하나
버려본 적없는
우리들을 반성합니다.
내어드려야 할
삶이며
떠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여정이란
이와같이
머물다 떠나고
사라지고 되돌아갈
삶입니다.
삶의 무게가
있기에 주님을
찾게됩니다.
삶의 무게가
무겁기에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내려놓는 것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우리의 목숨까지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기꺼이 다 내려놓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내려놓고
버리는 삶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센 바람에
나뭇잎이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사람들이 제게 일중독이 아니냐는 말씀들을 종종 하십니다. 일을 너무 만든다면서 조금 여유 있게 쉬면서 하라고 합니다. 솔직히 요즘의 제 일정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될까 라고 할 정도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옛날의 제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걱정과 두려움이 먼저 앞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보다는 이것을 해내고 난 뒤의 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기쁜 일, 좋은 일 등을 떠올리다보니 일이 무섭다기보다는 제게 또 하나의 선물이 주어지는 기회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계속 제 곁을 떠나지 않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사실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괜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후회할 뿐입니다. 어차피 맞이할 일과 시간이라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지에 있다 보면 큰 병에 걸렸다면서 안수기도를 청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 드리고 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거든요. 열심히 살았고, 봉사도 하면서 잘 산 것 같은데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린거죠?”
그런데 똑같은 병인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신부님, 그래도 빨리 병이 발견되어서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1년 뒤에 발견되었으면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누가 더 지금을 더 행복하게 살까요?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현재를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다가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제대로 걷는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짐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짐과 같은 십자가 짊어지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짊어져야 할까요? ‘아~~ 힘들어’만을 외치면서 짊어질까요? 아니면 ‘내가 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거야?’라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까요? 이런 상태로는 제대로 들 수가 없습니다. 얼마 못가서 분명히 이 십자가를 어디다 버릴까만을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즉 피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 순간을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이고 모여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행복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졌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에서 기분 좋은 시간이 길어지면 행복한 것이다(카네만).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옛날에 한 산골에 부지런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예쁜 오두막집도 짓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런데 이런 행복을 시기한 것일까요? 어느 날 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글쎄 오두막이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하염없이 불타고 있는 집을 보고 아내는 “아이고~~ 우리 집. 어떻게 해...”를 외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 나무꾼은 아내에게 이렇게 위로를 했답니다.
“여보, 울지 마! 다 타도 우리에게는 도끼가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도끼가 있으니 나무를 해 올 수 있고, 이를 통해 돈을 벌어 다시 집을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없어진 것만을 바라보니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없어진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어떨까요? 어떤 고통과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제자 되려면 가족을 미워하라고요?
주수욱 신부님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 가운데 곧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을 미워하라니요?
여기서 미워하라고 표현한 이유는, 구약성경의 히브리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신자들 가운데도 간혹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낯선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더 완벽한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 합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듯이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 덕분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값진 것입니까? 인간이 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간과 하나가 되시어 이제는 그분의 부활에 우리를 동참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즉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호한 태도로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 외에는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한 가치를 가진 제자 됨의 삶을 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많은 신자가 그 모범을 보여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서로 화목하고 정의롭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죄는 인간을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죄는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제 새롭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살기 시작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호함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기꺼이 나누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기 시작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대해서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면서 잘 식별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라.
염철호 신부님
성경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곧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그분의 뜻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창조주요 모든 사물에 이치를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혜 자체이시고 하느님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의 지혜서는 인간 가운데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혜를 깨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보잘 것 없으며, 속마음은 변덕스럽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아무리 많이 깨치고 있는 현자라도 인간인 이상 스스로 하늘과 땅의 모든 이치를 깨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지혜를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지혜로워질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지혜를 온전히 알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실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지혜 자체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지혜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6)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니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복음에 눈을 뜬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임을 압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마저 내어놓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루카 14,33도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자기 목숨 등을 “자기 소유”라고 바꾸어 표현하며 그것을 모두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려고 하며, 그것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하느님의 지혜를 깨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물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의도적으로 자기 가족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삶을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가족들 안에서 분란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다만,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며 그 소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목숨이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니,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바라시는 대로 나를, 또 나의 가족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오래갈 것들
서진영 미카엘 신부님
세상엔 참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도, 곱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참 많습니다.
사랑, 우정, 희망 같은 아름다운 어휘들과 이를 위한 약속, 계획, 실천 같은 단어들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감사, 성취, 보람 등이죠. 이 조합들이 특정 상황에서 우리를 미소 짓게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그 자체로 묵묵히 살아갈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라는 희망에서 참으로 좋은 말들을 많이도 하고, 많이도 퍼 나릅니다.“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영화‘중경삼림’에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오래 살 자신이 없어서.
어떤 이가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죠.”“성가 423장에 그렇다고 하더구나.”“하느님, 그럼 천억도 주님 보시기엔 그저 1원 정도겠죠?”“그 정도겠네.”“그럼 그 1원 저에게 주시면 안 돼요?”“그래. 내일 줄게.” 이제 기쁘게 천년을 기다려야겠지요. 그래도 유통기간‘만년’보다는 짧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기다릴 자신도 능력도 없습니다.“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 41)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아쉽게도, 생각하는 것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계획은 쉽게 세우지만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렵고, 특히 오랫동안 지켜가기는 너무나 허약합니다.
복음에 나오는‘탑 짓는 이들’처럼 시작은 했으나 끝을 보지 못하는 성급함이 우리 대부분의 결점입니다. 물자와 자본이 넘치는 호황기에 시작해서 정작 완성될 때는 낭패를 보게 되는‘마천루의 저주’가 예사 이야기 아닌 고민해야 할 현실이 된 상황에서 우리는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말 한마디 먼저 했다고 해서, 그 약속이 좀 더 크다고 해서, 그 범위가 더 넓다고 해서 아름답거나 특별히 더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천년만년’은 아니지만 이 짧은‘백 년’을 두고, 더 오래가고 아름다울 봉헌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할지, 얼마나 충실해야 할지 주님 앞에서 셈해 보았으면 합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려는 사람은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우리가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들입니다. 유대인들의 화법에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뜻이고,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혈연과 자기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고, 초기 신앙인들도 그런 정신으로 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초기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이나 당신 자신에게 집착하였으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였으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며,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을 위해 큰 희생도 각오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망대를 짓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계획성 있게 행동한다는 말과, 전쟁터에 나가는 임금은 치밀한 준비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일시적 기분이나 충동으로 처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어려움을 무릅쓰며 하는 헌신(獻身)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인간이면 당연히 애착하는 인연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인연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초기 신앙인들이 하던 실천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하던 실천을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족을 당연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만 집착하면, 그는 큰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모에게만 집착하는 아동은 학교에 가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직업인으로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창세기는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창세 2, 24)고 선언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 그리고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모두 불행합니다. 태아가 성숙하고도 모태(母胎)를 떠나지 않으면,살아남지 못합니다. 모태를 떠나 자기가 살 세상을 만나고, 거기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면서 그 생명은 자라고 성숙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 29-37)를 우리는 압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본, 사제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사제로서 또 레위로서 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인연들을 잠시 잊고,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 곧 강도 맞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미 가진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자기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연에 몰두합니다. 과거의 인연에만 집착하면, 인간으로서 성숙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 앞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에게 용서를 선포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베짜다 못가의 병든 이를 고쳐놓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과거의 인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인연에 충실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나 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기(利己)적 행복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가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의 생존을 베푸신 분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바다와 같이 출렁이십니다.
가족과의 인연은 좋은 것이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베풀어진 인연들이고 또한 버팀목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명이 바다와 같이 내 안에 출렁이면, 휩쓸려 버릴 수도 있는 버팀목들입니다. 부모님도 떠나가시고, 선배들도 떠나고,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어느 날 나도 떠나면서 내 생존을 위해 버티어 주던 모든 것이 나와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바다와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이 당신 안에 파도가 되어 출렁이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다이신 하느님이 당신 안에 파도를 일으키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버티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例話)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야 할 인연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명과의 인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버리고 떠날 것에 집착하며 삽니다. 가족과의 인연에 갇히고, 재물에 발목을 잡혀 제자리걸음만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물만 알지,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미 주어진 인연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작은 파도가 되어 출렁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리는 작은 파도들이 우리 주변에 출렁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감사는 신앙인의 기본이요 건강과 행복의 비법이다'
박영식 신부님
‘스탠리 탠’이라는 미국의 실업가는 대기업을 세워 돈을 많이 벌었다. 불행히 1976년에 갑자기 척추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척추암은 수술로도 약물로도 고치기 힘든 병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절망 속에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그가 병상에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출근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어떻게 병이 낫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스탠리 탠은 “아, 네, 나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다 나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병들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병들어 죽게 되어도 감사합니다. 하느님, 저는 죽음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살려 주시면 살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느님, 무조건 감사합니다.’ 이처럼 매순간마다 감사하고 감사했더니 암세포는 없어졌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은 감사 때문이었다.
요즈음 미국의 많은 정신병원에서는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약물치료 보다 ‘감사 치유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환자들이 자기의 삶에서 감사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게 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돕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감사치유법이 약물치료보다 훨씬 더 효과가 뛰어남이 드러났다. 이 치료법은 단지 정신과 치료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탠리 탠 박사 경우처럼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데에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스탠리 탠 박사 경우와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일본 해군 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 씨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와서 날마다 사는 것이 짜증이 나고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뤼게릭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때에 그는 정신 치료가인 후찌다 씨를 만나게 되었다. 후찌다 씨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만 번씩 하세요.”라고 처방했다.
기이찌 씨는 자리에 누운 채로 매일 밤 계속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계속했다. 날마다 “고맙습니다.” 했기 때문에 감사라는 말이 몸에 배일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아들이 감 두 개를 사와서 “아버지, 감 잡수세요.”라고 말했다. 아들에게 ‘고마워’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차츰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던 목도 움직이게 되었단다. 말로만 하던 감사가 실제 감사가 되었고 불치병도 깨끗이 낫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제 목숨과 가족관계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르셨다(루카 14,26-27).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당신 목숨을 희생하셨음을 고마워해야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그분의 존재와 공로와 은덕을 인정한다. 감사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자기 삶을 결정하시는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처럼 고마워하는 마음이라야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제 재산을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 믿음과 불신은 감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달렸다. 또한 하느님이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감사한다. 이웃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감사할 줄 모른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정서적으로나 심적으로 안정되고 내적 평화를 누린다. 이는 육체와 마음의 건강과 행복을 누리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 감사는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부모에게 감사할 때 부모는 더 많은 것을 주려하고, 친구에게 감사할 때 그 친구는 더 많은 우정을 나누려 하며, 이웃에게 감사할 때 그는 더 많은 온정을 베풀려고 한다. 이처럼 감사는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을 증가시켜준다. 행복은 결국 감사에 비례한다. 이것이 감사의 힘이다. 감사는 역경을 벗어나는 인생의 출구다. 그저 감사하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가 생기고,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난이 온다. 감사하는 마음은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열어 준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해 준다. 늘 모든 일에 감사하면 우리의 근심도 사라진다.”(J. 템플턴)
감사하기는커녕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그 불평의 열매를 따먹게 마련이다. 사람의 병은 대부분 스트레스에서 온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마음의 상처와 부정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모든 스트레스와 병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감사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면역계를 강화하고, 에너지를 높이고, 치유를 촉진한다. 늘 감사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정서를 가져 혈압도 떨어지고, 소화 작용도 촉진되기도 한다. 우리가 1분 기뻐하여 웃고 감사하면, 우리 신체에 24시간 면역체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1분 성을 내면 6시간 면역 체계가 떨어진단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 약’을 먹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가 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감사하는 데 습관이 되어야 하겠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조심하라. 불평의 문으로 행복이 새나간다.’”(서양 속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내주는 숙제는 두 가지란다. 첫째, 날마다 8시간 자고오기, 둘째, 날마다 다섯 가지씩 감사하기. 감사는 가장 아름다운 예의요 훌륭한 교양의 열매이다. 내 주위에 이웃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웃이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나를 이기심과 세속의 허영에서 구원하여 당신을 닮게 해주시는 그리스도께 고마워하자. 또한 지금 옆에 있는 가족들과 동료들에게 감사하자. 그들이 있기에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탈무드)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不狂不及)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두 분은 오랜 냉담을 끝내고 온 분이고 미사의 맛을 잃은 고등학생 남자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두 분이 왜 냉담을 했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한 분은 본당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너무 예의 없게 하는 것이 싫어 점점 나가지 않게 되었다가 오랜 냉담으로 이어졌습니다. 돌아오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다가 누군가의 권유로 어렵지 않게 신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매우 이성적인 분이라 성경 처음 창세기부터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그렇게 참 진리를 찾기 위해 다른 종교들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꿈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고는 맘이 돌아섰고 지금은 이해되지 않던 것까지도 신앙으로 더 쉽게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어쩌면 냉담했던 이유가 당연했다고 느낄 수도 있는 위 두 분에게 그것은 당연할 수 없는 핑계임을 알려주려는 의도로 고등학생에게 바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넌 왜 냉담하려고 해?”
그는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엄마가 저에게 그렇게 말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춘기를 넘어서는 나이에 성당에 잘 나오는 게 더 이상하다고 믿어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사춘기에는 모든 욕망이 커져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고 육체적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을 찾고 세상의 인기나 돈을 더 좋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바라면 하느님은 덜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그는 주저하며 “운동하고 게임하는 게 더 재밌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각자 냉담이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그 냉담을 절대로 정당화 해 줄 수 없습니다. 그 학생이나 더 고급스러운 이유일 것 같은 두 자매님이나 결국 하느님보다는 자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의 욕망들을 하나하나 끊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욕망은 그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한쪽을 더 욕망하면 다른 쪽은 덜 욕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미치지 않으면 다다를(미칠) 수 없다’고 하며 어떤 일에서 성공하고 싶거든 그 일에 온통 몰두해야만 함을 가르칩니다. 몰두하지 못했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고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성공하고 싶었다면 몰두 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몰두란 말은 다른 것은 버리고 오직 그 생각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에서 유명한 광고천재로 알려지게 된 이제석씨는 환경오염 광고를 위해 공장굴뚝 밑에 총을 그려 넣어 하늘로 총을 쏘고 난 후 나는 연기가 굴뚝으로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든가, 전쟁 반대 포스터를 그릴 때 비행기가 미사일을 쏘는 장면을 기둥에 둥글게 말아 그 미사일이 결국 자신을 향하여 오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던가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이디어들을 내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책이 ‘광고천재 이제석’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천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대학 다닐 때 냈던 학교 광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홍보하는 광고에 그는 그저 화장실의 휴지, 식판 위에 깔린 종이, 냅킨 등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화장실의 휴지에도 공책처럼 줄이 그어져있고 냅킨이나 식판 종이 위에도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도 한 생각을 하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디에서든 그 아이디어를 적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광고 천재가 아니라 천재가 되기 위해 다른 모든 생각들을 끊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것에 미칠 수 있어야 세상에서도 정상에 오르는데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만큼 주님께 몰입해서 살아가는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당신께 오면서 세상 애정이나 자기 자신까지 미워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시작도 안 하는 것이 낫겠다는 듯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집을 짓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바에야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께 몰입하기 위해 세상 모든 애정을 끊을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욥이 이 세상의 모든 애정, 즉 자녀들, 아내의 존경, 친구들, 자신의 건강, 모든 재산까지 다 잃고도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애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애인과 헤어졌거나 자녀가 일찍 사망했거나 사업이 실패하는 등의 불행이 닥치면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라톤과 같고 오랜 순례와 같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만큼 끝까지 가기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운전병이고 말년이기 때문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후배들에게 본보기를 보인다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보통 행군은 너무 힘이 들어 어떤 이들은 총을 가볍게 하기 위해 노리쇠를 빼기도 합니다. 근데 그렇게 요령을 피는 사람들이 나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선배이기 때문에 이 후배들을 끝까지 데리고 들어와야 하는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총을 다 들어주다가 결국 제 무릎 양쪽 인대가 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갑자기 운동하면 한번 늘어난 고무줄이 또 늘어나기가 쉬운 것처럼 인대가 쉽게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그때 과연 내가 했던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나?’를 고민해봅니다.
내가 들어주지 않았어도 그들이 끝까지 책임감 있게 들고 들어왔어도 되었는데 어쩌면 내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들의 것까지 필요이상으로 도와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들어주지 않았어도 어찌 되었건 행군은 잘 끝났을 것입니다. 여기엔 저의 명예욕도 들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좋은 이미지로 제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을 알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모든 것,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고 끊지 않으면 점점 내가 무거워져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거절을 잘 못하는 이유도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산티아고길 순례를 40일가량 하시고 나서 그 소감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처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발할 때는 짐이 많은데 도착할 즈음에는 아주 최소한의 짐만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양말이 두 개면 번갈아 신을 수 있고, 그것은 속옷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무게가 나가는 것을 하나하나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버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결국 나의 짐이 되고 나를 괴롭히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옵니다. 게임만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 게임 때문에 행복해 보입니까? 우리는 압니다. 그도 언젠가는 그 게임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알 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과감히 그것을 끊어버리게 될 것임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길도 우리 모든 애정을 버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9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가톨릭 용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순(殉)이란 죽은 자의 뒤를 이어 10일 이내에 따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순교란 자신이 신봉하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에는 이를 치명(致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준 믿음, 즉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은 사람을 말합니다. ‘순교자 성월’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박해를 받고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뜨거운 신앙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굳센 믿음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구청 식당의 게시판에는 병원에 계신 신부님들의 명단이 붙어있습니다. 10년 이상 병상에 누워계신 신부님, 투석을 해야 하는 신부님, 암 치료를 받으시는 신부님, 골절로 입원하신 신부님이 계십니다. 요양 중이신 신부님도 계십니다. 신자들과 함께 사목의 현장에 계시면 좋겠지만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아픔과 고통의 바람에 흔들리시는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투병 중에 있는 신부님들이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요양 중에 있는 신부님들이 다시금 신자들과 함께 사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보름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열병 때문에 잘 먹지도 못했고, 얼굴도 부었었고, 중환자실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다리의 골절 때문에 수술을 하기도 했고, 목발에 의지해서 걷기도 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그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건강이 더욱 감사하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칠 정도로 고통이 크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주었던 베로니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던 빌라도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도망갔던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참으로 따라야 할 가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것과 하느님이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참된 지혜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의 ‘십자가’를 생각하였습니다. 1997년도 IMF 당시에 형은 사업에 실패를 하였고, 그 때부터 제가 부모님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당연한 도리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아름다운 사람, -자비의 아이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의 일반신문의 정치란이나 사회란을 볼 때의 어둡고 답답한 마음이 싹 개는 기분이었습니다. 역시 교회 신문에는 밝은 빛이 있습니다.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 즉 신망애의 빛입니다. 이런 영적 빛들이 우리를 위무慰撫하고 평화를 줍니다.
바로 세 가지 기사였습니다. 평화신문 1면의 1/4을 채운 사람 얼굴 가득한 사진이었습니다.
자녀 18명을 낳아 키운 스페인 로사 피크씨 부부가 남은 자녀 15명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명동 성당 앞에서 활짝 웃는 꽃같은 얼굴로 찍은 사진입니다. 피크씨는 16남매, 로사씨는 14남매 출신이랍니다. 이런 부부는 두말 할 것 없이 성인입니다. 피크씨는 특히 가정에서의 부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교육의 첫 번째 책임은 부모에게 있고, 교육은 가정이라는 학교에서 출발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참된 인성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에 평화로운 가정의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어 두 번 째 기쁜 소식은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로 불린 ‘자비의 아이콘’ 마더레레사가 바로 오늘 9월4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희년(2015.12월 8일~2016년 11월 20일)에, 시성되는 87년 생애를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며 불꽃처럼 산 성녀 마더데레사였습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아름다운 사람’-자비의 아이콘-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이어 세 번째 기쁜 소식은 바티칸에서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하는 전현직 베네딕도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님 사진과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다음 언급도 신선했습니다.
“내 인생의 동반자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와 13세기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1221-1274)입니다. 두 성인은 내 영혼의 스승입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해외 사목방문을 다녀오면 항상 내게 찾아와 인사한다. 그의 친절은 내 인생 종반부의 특별한 은총이다. 그의 환경 회칙 ‘찬미받으소서’도 훌륭하다. 그는 녹색(Green) 교황이다.”
두분 교황님들 역시 아름답고 거룩한, 또 자비로운 성인같은 분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녹색綠色 교황이란 칭호가 참 좋습니다. 하느님 색깔을 닮은 성인들의 색깔 역시 녹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로사 피크 부부, 마더데레사,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과 프란치스코 현재 교황님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이자 자비의 아이콘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사람, 자비의 아이콘이 될 수 있겠는지요?
결론하여 부단히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더 자세히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빠진 인간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다음 말씀에 공감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그의 속마음을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천막의 육신은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심한 병이나 노환으로 고통을 겪는 누구나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구원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가 필레몬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이라 고백하는 바오로의 주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입니다.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주님 사랑의 반영입니다.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 보냅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대거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둘째, 사람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아무리 사랑하는 이들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중심에는 늘 주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나 애착이 없는 순수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집착의 눈먼 맹목적 사랑은 서로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여 따를 때 사람들에 대한 집착도 사라져 집착이 없는 깨끗한 사랑, 눈 밝은 사랑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아름다운 사람, 자비의 아이콘으로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없습니다. 내 주어진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참 단호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외없이 누구나 짊어지고 가야할 제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아니고 타인의 십자가도 아니고 바로 내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결코 이웃과 비교할 수 없는 내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없이는 사람이 되는 길도, 구원을 받는 길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내 십자가도 잘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 십자가의 무게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내 운명의 십자가를, 내 책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우리를 한없이 겸허하게, 거룩하게 하며, 아름다운 사람이, 자비의 아이콘이 되게합니다.
넷째, 안팎의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존재냐 소유냐 하는 논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소유하여 노예화하는 것이 소유물입니다. 재물에 소유되어 자기 존재를 잊고, 잃고 헛개비가 되어 껍데기를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알맹이의 실속있는 삶이 아니라 알맹이가 빠져버린 껍데기의 삶입니다. 이래서 삶이 공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바로 존재인 하느님이, 참 내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텅 빈 허무의 소유의 쾌락이라면, 텅 빈 충만의 존재의 기쁨입니다. 소유의 쾌락을 존재의 기쁨으로 착각하여 살 때 어김없이 따라오는 삶의 공허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말그대로 무소유가 아니라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맛에, 소유의 맛에 빠져 중독되지 말고 하느님 맛으로, 무소유의 맑은 정신으로, 무욕의 지혜로 살라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안팎으로 부단히 버려가며 살라는 것입니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삶이 아니라 갈수록 가벼워지는 삶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아름다운 사람, 자비의 아이콘으로 살 수 있습니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생각납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기인하기에 집착을 멸하면 구원의 도에 이른다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집착에서의 이탈이요 초연한 자유입니다.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부단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버림의 여정, 비움의 여정, 떠남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사람들에 대한 집착, 소유물들에 대한 집착,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인생여정에 충실할 때 아름다운 사람, 자비의 아이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항구히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고집과 소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 받는다고 했는데 귀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그만한 책임이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준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가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이제 놓아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남모르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 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을 놓고 결정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십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복숭아 농사를 지면서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적과를 하게 되는데 욕심이 생겨 하나라도 더 얻으려 그냥 모든 것을 방치한다면 그해의 수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깝게 생각되더라도 과감하게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맞갖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떠남과 버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와 단호함을 되풀이해서 강조합니다(9,23-27; 9,57-62). 아마도 루카가 바라본 초기 공동체가 예수님을 따르려는 결단이 미흡했거나, 박해 상황에서 단호한 신앙의 결단이 요청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 여정은 적대자들에 의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분께서 자신들이 그리는 세상의 왕국을 세우러 가시는 것으로 착각하며 부귀영화를 꿈꾸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몇 가지 요건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자기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14,26). 어법상 자신의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자신의 십자가보다 더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늘 주님을 첫 자리에 두고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가족, 특히 아내와 자식은 소유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소유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삶의 중심을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두는 ‘존재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아와 자신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으니 각성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14,27). 누구든 행복을 바란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고통을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다가온 고통에 짓눌려 거기에 주저앉아버리는 것, 그 고난을 자기 힘으로만 어떻게 해보려는 것 또한 소유의 일종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끝으로, 제자가 되려면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14,33).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하늘 나라는 저 먼 창공 위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과 해방, 인간다운 삶의 상태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려면 ‘무소유’의 상태가 되어야만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부르시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떠남’과 ‘버림’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받으려면 ‘나’로부터 떠나야 하고, 소유로부터 떠나야 하며, 하느님을 가리는 혈연, 학연, 지연 등 인연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이신 주님께 내 삶의 맡겨드리며,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내 삶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행복한 제자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비의 해 정점을 찍는 특별한 이벤트가 내일(9월 4일)로 다가왔습니다. 가난한 이웃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이웃들의 따뜻한 어머니로 사셨던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1910~1997)의 시성식이 바티칸 광장에서 거행됩니다.
지난 한 세기를 살아간 여성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여성의 이름을 적으라는 설문 조사 때마다 첫 자리는 언제나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일컬어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에 지나지 않는다며 극구 자신의 선행을 감추었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막사이상, 슈바이처상, 요한 23세 평화상,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업적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1997년 9월 5일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 인도 정부는 국장으로 타계를 애도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시 사후 5년이 지난 후에야 시복절차를 추진하는 관례를 깨고 선종 6년만인 2003년 10월 19일에 그녀를 복녀품에 올렸습니다.
평생에 걸친 사도직의 모토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임종자의 집, 나환우 치료센터, 무료급식소, 결핵요양소, 에이즈 치료센터와 같이 너무 힘들어 기존 수도회들이 꺼리던 사도직,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만인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영성생활의 정점을 찍은 살아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던 무거운 십자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생애 내내 짙게 드리웠던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서한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자주 자신이 겪은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시복시성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더 큰 놀라움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계속되는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하느님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영적지도자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고통스런 내적 경험들이 위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녀의 영적생활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욱 더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고 특히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분과 하나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가난한 이웃들인 콜카타의 빈민가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했습니다. “빈민가를 걸어가거나 어둡고 누추한 곳에 들어설 때 주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그 결과 연옥체험과도 같은 혹독한 영적 시련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로 그 위대한 사랑의 사도직을 계속해나간 것입니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그녀 내면의 심연의 고통을 감추었고 내면의 골고타를 감추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는 영적지도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성녀가 된다면 분명 ‘어둠의 성녀’일 것입니다. 언제나 어둠에 빛을 밝히러 세상에 내려가 있을 테니 천국에는 없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짙은 영적 어둠과 심연의 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 인생의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미워해야 사랑할 수 있다!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나요?
정말 신기하게도 날씨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식을 것 같지 않았던 무더위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영혼까지 시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인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듣게 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중에서도 부모를 특별히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며 혼인은 풀 수 없는 인연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봅니다.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정을 버려야겠는데 그러면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하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한정된 말씀이리라.
혹시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해당된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특별한 삶을 살고자하는 수도자나 성직자들에게 한정해서 하시는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시니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님,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시
“옳지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매일 바가지를 긁어 대서 미워죽겠는데 오늘 집에 가서 예수님께서 미워하라고 하셨으니까 실컷 욕하고 때려주자.”
혹은
“내 남편은 돈은 쥐꼬리만큼 벌어오면서 매일 술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니 미워죽겠는데, 마침 예수님이 미워하라고 했으니까 욕이나 실컷 해주자.”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면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평화가 아니라 가정마다 불화를 가져다주게 되니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복음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워한다”는 말의 뜻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셈족 말의 표현에서 “미워한다(μισεω)”는 말은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하게 여긴다.' 는 뜻입니다.
곧 제자가 되려고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 미루어 놓고 예수님을 모든 것보다 앞세워서 모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앞에서 선물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내가 선물을 가장 먼저 주고 싶은 사람이 저 뒤에 있다면 “여기 앞으로 와!”라고 불러서 먼저 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너는 저 뒤에 가서 다시 줄 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무엇을 주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식사하기 전에 “아! 예수님께 먼저 감사를 드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식사 전 기도를 드리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방해되는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고집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 곧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기 위해서 다른 것을 다 뒤로 밀쳐야 한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의무이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보답하는 당연한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용기가 생기죠?
그런데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면 우리는 더 큰 용기를 갖고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 용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분열과 갈등과 미움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즉,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기된 결과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과 미움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그 예를 오늘의 제2독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로 그분을 철저히 본받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모든 것 위에 예수님을 모셨고 또 그분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선입견이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이런 사랑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러기에 필레몬에게서 도망친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종으로 대하지 말고 귀중한 형제처럼, 마치 바오로 자신을 대하듯 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세상사람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자신의 가족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 가정은 전보다도 더 화목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내 모든 것의 첫자리에 모실 때 우리는 더욱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단순히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새롭게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것은 앞세우기이고, 뒤로 밀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해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이 온전히 이해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3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가진 것이 많습니까?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들이겠지요.
그리고 내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물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런 것들도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네요.
너무하시는 것 아녜요!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소유가 집착이 되면
사랑에서 멀어진다는 경고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부모 형제 자녀가 내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들이지요.
이렇게 여기는 사람은
그들을 참으로 감사한 존재로 사랑하되
내 소유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지 않게 되지요.
내가 가진 모든 물건도
알고 보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것과
내 것으로 집착하며 소유하는 것은
아주 다르답니다.
오늘 저를
만인의 연인이 되기 위해
사제가 되게 하시고
만인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오늘 귀한 부부의 인연을 맺는
신랑신부도 서로를 내 것이라 소유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가까운 반려자요
가장 귀한 선물로 여기며
평생을 해로하길 빌어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사람들 한분한분 떠올리며
작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 어떨까요?
<예수님 따름을 위한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 앞에 서서 세상의 논리로
예수님을 가르치려는
교만한 거짓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님 옆에 서서 방관자가 되어
제 갈 길에만 여념 없는
허울 좋은 빈껍데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수님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다른 이 밟고서 더 높이 오르려는
마음 속 가득한 탐욕 내던지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기 비움으로
저를 채우게 하소서.
벗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제 배 채우려는
피눈물 말라버린 게걸스러움 씻어내고
온 세상 배불리신
주님의 거룩한 먹힘 본받아
저를 세상의 밥으로 내어놓게 하소서.
자기 살기 위해
벗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무자비한 경쟁 놀음을 즐기지 않으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생명 보듬는 주님의 십자가를
제 몸과 마음으로 지고 가게 하소서.
예수님을 닮는 만큼
그만큼 참 그리스도인임을 깨달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버려야 할 것.<루카, 14/25-3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쓰레기처럼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 안에 본능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온갖 욕망, 자기 갈 곳으로 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데 장애 요소, 마음속에 받은 상처, 모든 부정적 요서를 버려야 자유와 평화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불림을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주님의 제자로 살기위하여 시간, 장소에 따라서 자기소유를 버려야 할 일이 생겨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려면 어떤 조건 환경 안에서도 원칙은 가진바 모두를 버려야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비유 속에 하느님의 초대에 어떤 이는 소를 보러 가야하고 밭을 보러가야 하고 장가를 들어 부인을 보러가야 한다고 거절하는 사람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고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선택으로 행동 방향을 정합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여러 갈레의 길을 다 선택하지 못합니다. 정의 길, 불의 길, 진실의 길, 거짓의 길, 행복의 길, 불행의 길, 하나의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가 행복의 길을 따라 가려면 마태복음 행복선언과 같이 첫 번째 선언 같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려는 사람은 가난한 마음이 없으면 새로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지만 부자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에 가득 찬 것들이 발목을 잡아 깨끗한 마음을 가지지 못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묵은 술에 맛들인 사람은 새 술을 먹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우리 수도원 아빠스님의 감탄스러운 해설은 보수는 진보의 새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은다고 한탄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헌 신발을 벗어던지고 새 신발을 신는 것처럼 버려야 할 것은 낡은 생각입니다.
새 날 새 아침을 맞이하여 오늘 새 날을 새롭게 살려면 어제 일을 다 잊거나 버려야합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제자로 새롭게 태어나 살려고 어제의 나의 공적, 나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오늘에 더 자유를 누리고 평화와 기쁨 중에 사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 사는 길입니다. 버리는 것이 얻은 길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 다 버리고 새 창조, 새 인간, 새로운 하느님과의 관계로 살아가도록 모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이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묶고
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은
소유에 있지 않고
오히려 버림에
있습니다.
소유를
다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소유를
버려야 생명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이란
여긴 착각의 소유는
실은 하느님 곁에
잏어야 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도
빠듯한 우리의
시간입니다.
버려야
주님께로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여정이란
버림의 여정입니다.
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임을
삶의 스승들은
잘 가르쳐줍니다.
생명의
두 주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진실로
의탁할 분은
오직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은
더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믿음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참된 버림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언제나 우리의
뜻입니다.
저는 일정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러 곳에 저의 일정을 남겨둡니다.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컴퓨터에도 똑같은 일정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들고 다니는 수첩에도 그리고 사무실 칠판에도 일정표가 적혀 있습니다. 무려 4군데에다가 똑같은 일정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예전에 어떤 본당에서 강의를 하기로 했다가 일정을 적지 않아 펑크를 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혹시라도 약속을 펑크 내지 않을까 싶어서 여러 곳에 일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표를 이용하다보니 일을 훨씬 계획성 있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시간 가는대로 일을 한다면 어떨까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실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획성 있게 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시간이 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만 할 뿐입니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이렇게 계획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신부님, 요즘 너무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갔어요. 그런데 이제 좀 한가해지니까 열심히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양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한 작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탑의 비유, 적과 맞서고 있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용의주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준비보다는 앞선 형제님처럼 순간적인 기분만을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철저한 계획과 노력을 통해서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 번째에는 하느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윗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준비와 노력들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고단함만 선물할지라도 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삶에 더욱 분발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가 됩니다(박성철).
나의 단점들
나의 단점들,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게으르기도 하고, 또한 뒤로 미루는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는 단점도 있네요. 아무튼 너무나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단점들을 단 번에 고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맞나요? 그렇다면 불가능하다고 단점을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요? 괜한 곳에 헛힘 쓸 수 있다고 그냥 대충 살아가야 할까요?
그 수많은 단점들을 한 번에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중에서 딱 하나만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즉, 오늘 하루를 살면서, 그 많은 단점 중에서 딱 하나만 고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단점을 고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일 년을 보내게 된다면 어떨까요? 나의 단점 365개를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 그 자체로 우리는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단점이 너무 많아서 틀렸어.’하면서 포기한다면? ‘이 모든 단점들을 언제 다 고칠 수 있겠어?’라며 포기한다면?
아마 나의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연말에, 단 하나의 단점도 고치지 못한 나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신대원 신부님
연중 제23주일이다. 요즈음의 시류(時流)가 심상치 않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무력을 강화하고, 정의를 말하면서도 모두 나눠가져야 할 소득마저 분배하지 않고, 민주를 말하면서도 전제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미래를 말하면서도 암울했던 과거로 회귀한다. 진실을 말하자면서도 은폐나 조작이나 사기를 일삼고,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차별을 조장하고, 화해를 부르짖으면서도 갈등과 긴장을 일으키며, 공동체를 주장하면서도 개인주의를 외친다. 또 사람의 행복이나 복지를 운운하면서도 타인의 행복을 빼앗고 복지의 폐해만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칫 우리 신앙인들마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을까 매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은 요즈음 시류,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대단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주님의 이 말씀은 실제로 부모나 형제자매를 모두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마저도 주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선물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개인적 이기심이나 탐욕을 조장하는 도구로 삼지 말라는 말씀일 것이다. 부모나 형제나 주변 지인들을 자신의 이기심이나 탐욕을 조장하는 도구로 삼는 사람은 결국 그들을 자신의 전유물로 삼는 것이고, 그들을 살인하는 것이며, 그들을 멍청이로 여기는 자다. 이럴 경우 주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강한 어조로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결국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자신은 지려고 하지 않고, 만만해 보이는 주변의 사람에게 대신 지고 가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타인의 짐을 자기가 대신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듦에 대해서는 마땅히 자신이 지고 헤쳐 나가야 할 짐일 수는 있지만 십자가는 아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타인의 어려움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대신 지고 가는 태도다. 그래서 십자가는 곧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그 십자가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지고 갈 수도 있다. 내가 나에게 오는 십자가를 외면할 경우다. 주님께서 지고 가신 바로 그 십자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또 순교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주님이나 순교자들은 스스로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은 곧 가슴 속에 사랑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사랑이 없기에 남의 어려운 사정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짐마저 벗어 넘겨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야윈 어깨를 짓누르려고 한다. 타인은 낮아지게 만들고 자신은 높아지려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이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지기 위해 얼마 남지 않는 타인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 자다. 자신만은 하느님 나라에 가고 남들은 지옥으로 빠져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자의 가슴엔 피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으니 사랑은 더욱 없을 것이고, 사랑이 없으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고 하셨다. 소유(所有) 곧 가진 것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함께 해당한다. 부모나 형제자매, 그리고 처자식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행위, 돈과 권력과 학벌과 명예만을 존중하고 그 외의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 자신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에게만 잘해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태도, 자신의 주장은 모두 옳고 남의 이야기는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환경을 마구 파괴하거나 여린 생명을 짓밟는 태도 등은 모두 오시고 사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매우 어정쩡한 태도, 이중 잣대를 갖고 신앙을 살아가지는 않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버림과 따름' 사이에서 버릴 것은 버리지 못하고 따라야 할 분에 대해서는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는 우리다. 무엇 때문에 입으로는 그분을 따른다고 하면서 행실로는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한쪽으로는 주님을 모신다고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주님을 팔아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함이 아니겠는가? 주님 제자임을 내세워 주님을 팔아먹는 되먹지 못한 소인배임을 자임하는 자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우진 신부님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되돌아 내려올 것을 헤아려서, 발길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람이 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유명 산악인의 인터뷰로 오랜 등반을 통해 얻은 지혜로운 한마디입니다. 가야 할 때, 서야 할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일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산악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을 밟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비단 등산뿐만 아니라 세상만사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재력가가 자신의 재력을 뽐내기 위해 탑을 지으려 하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권력으로 전쟁에 나가 맞서 싸우고 싶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요. 이 십자가가 신앙인의 지혜로움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두 가지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그크신 뜻보다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요,
둘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함을 신뢰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모세의 응답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은 시작되지만 그런 기적 같은 체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가나안을 차지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40년 동안을 가나안에 들
어가지 못하고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민수 14).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것만은 안됩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바로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물이 채워진 잔 속에 포도주를 따를 수 없듯이, 하느님의 뜻을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 뜻을 비워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비워야 할 마음의 묵은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비워진 마음속에 주님의 뜻을 잘 새겨나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올바른 기도생활
전영준 신부님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 기도생활은 가장 기본이고 기도생활을 잘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드렸는데, 그 응답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더더욱 기도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혹시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가 생각하는 시점에, 내가 생각하는 장소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닌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시점에,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장소에서,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이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내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고 해도 하느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초세기 유다인 철학자 필론은 하느님이야말로 알 수 없는 분이시라는 ‘불가지성’(不可知性)을 주장했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지혜 9,13)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선택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 독서에서 필레몬의 집을 도망친 하인 오네시모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당부를 전합니다.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필레 8-9)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당시 만연했던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도 않았고, 사도의 권위로 필레몬에게 교인이 된 오네시모를 선처하라고 강권하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고 풀어가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애덕(愛德) 실천에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11,1-4 참조). 혹시 여러분은 입술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나의 뜻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보십시오. 나의 뜻과는 사뭇 다른 의 뜻을 헤아려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박병규 신부님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에 나타난 ‘미움’은 서로가 갈라서는 배척이 아니다. 또다른 관계로 나아감이다. 내게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관계 정립을 통해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라는 뜻이 미움이라는 말마디에 숨어있다.
그래서 미움은 타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에게 익숙한 것, 그중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을 먼저 버리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단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얻어 누리기 위한 것이다. 버릴 때는 많이 아프다. 십자가의 고통이 그것이다. 십자가는 무엇을 견디어 내는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한 내 삶의 노력이고 투쟁이다.
오늘 비유인 탑과 전쟁의 이야기가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예수님을 위한 탑을 쌓으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얻어야 한다. 싸움에 이기려면 내가 가진 모든 군사를 내어놓아야 한다. 내 것만을 지키면서 남을 이길 수는 없다. 내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탑이 저절로 올라가지 않는 법이다. 희생을 어려워하거나 내가 내려놓은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 못한다. 나를 미워하는 것, 그것은 나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소금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미움’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지게 된다.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 짠맛을 낸다. 소금만을 취하는 사람은 없다. 소금을 통해 음식을 더 맛있게, 더 싱싱하게 얻고자 한다. 소금은 그 다른 것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소금은 자신을 미워하되 다른 이를 더욱 희생적인 사랑으로 껴안는 최고의 이타적 상징물이다.
묵상(Meditatio)
신앙생활을 산수로 따져보자면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 가깝다. 더하면 더할수록 내 덕을 닦고 수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남은 자신을 비워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신을 위해 보태어 놓은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가면 갈수록 세상은 각자의 행복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감사를 늘 외치면서 자신의 마음이 더 사랑스럽게, 평화롭게, 감사롭게 다듬어질 수 있도록 염원한다. 그런 이들의 한계는 자신이 아플 때, 힘들 때, 슬플 때에 쉽게 무너지는 데 있다. 자신을 미워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익숙한 틀 안에서만 사랑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갈망하며 감사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건과 상황 앞에서 힘겨운 미움의 시간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 자신을 내어놓고 상대를 생각하는 일에는 게을렀기 때문이다.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인데 인간은 늘 혼자를 꿈꾼다. 욕심도 이런 욕심이 없다. 나에 대한 미움이 필요한 세대다.
기도(Oratio)
인간은 한낱 그림자로 지나가는데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며 쌓아둡니다.(시편 39,7)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루카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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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섭리(攝理)라는 말과 함께 개인적인 고백을 해보련다.
참으로 많은 계획들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실천한 계획과 실천하지 않거나 못한 계획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물론 계획의 내용에도 경중(輕重)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에게도 관대한 점수를 매기지 못할 것 같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를 넘어선 지금,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니, 스스로 세운 계획보다는 그분의 뜻에 의해 움직여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향을 떠나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선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오게 되었고, 삼십 개국이 넘는 국적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
그분의 섭리였다는 고백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왜 나름대로, 삶의 방향에 대한 계획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분께서는 나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주셨다.
사실 한 번도 내가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나의 계획에는 늘 인간적인 욕심이 섞여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이 옳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꺾어주셨음을 체험한다.
앞으로도 어떤 방향으로 나의 삶이 전개될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분께서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할 뿐이다.
어떨 때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형편이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다.
그분의 섭리, 그분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삶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물론, 섭리에 대한 이해는 늘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즉 지난 후에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잘 살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에 대한 노력이 있는 한, 그분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뒤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는 오래 전 작고한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사랑하려면, 먼저 미워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정신과 의사 이무석씨 책 ‘30년 만의 휴식’(101-7쪽)에, 캐나다 멕길대학 정신과 교수인 다반루 박사가 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환자는 30대 회사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고 못나보여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소심하고 복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와 이야기 할 때도 머리를 항상 내리깔고 바닥만 보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목소리도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회생활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반루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를 쳐다보지 못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몹시 당황하다가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 선생님을 마주 쳐다보는 것은 건방진 행동이에요. 선생님은 화가 나서 저를 ‘버릇없는 놈’이라고 소리 지르실 거예요.”
“그리고요?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잠시 뒤 울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상상을 말합니다.
“저도 화가 나요. 의자로 선생님을 후려쳐 버려요. 선생님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골이 흘러 나와요. 선생님의 눈도 튀어나왔어요.”
그 때 박사가 다시 묻습니다.
“눈은 무슨 색이지요?”
“초록색이요. ... 아! 그런데 선생님의 눈은 초록색이 아니군요. ...”
그는 비로소 초록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초록색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색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엄한 분이셔서 동생과 싸우면 항상 자신만 야단쳤고 몸이 약한 어머니를 무시하고 자주 때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힘이 생기면 아버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서재에 불러놓고 한 시간씩 설교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이 초록색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환자는 자신이 증오하지만 죄책감으로 자신 속에 묻어 둔 아버지의 모습을 이 의사에게 투영시켜 그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전이되어 누구와도 편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에 증오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의 비늘이 씌워져 모든 것들을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탓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 화살을 돌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이 환자는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습니다. 다반루 박사가 환자를 5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고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 반드시 또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완전하지 않고 완전으로 가는 도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란 영화가 있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고 남한에 파견돼 바보역할을 하며 임무를 기다리는 김수현이 주인공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당장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2년 동안 슈퍼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갑니다. 특히 무뚝뚝하고 짠순이인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바보 동구(김수현)를 친 아들처럼 여기며 몰래 장가갈 밑천까지 조금씩 저금을 해 놓습니다.
‘바보’, 그 역할은 세상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거를 지닌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조금씩 변화되게 되는 것이고, 온전한 관계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이 간첩들이 필요하게 되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정에 끌려버린 김수현과 동료들은 죽기를 거부합니다. 과거가 죽으니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결국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만 쇠뇌 당해왔던 공작원 마음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을 살아있는 샘물로 만드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에 모세가 나뭇가지를 넣어 달게 만들었다는 마라의 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바로 십자가를 상징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아있는 생명수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죽은 물에 소금을 넣어 생명의 샘으로 변화시킵니다. 소금 또한 누군가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희생이 있어야만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남파공작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북어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수현에게 그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슈퍼 주인아주머니의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떠나야합니다.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그 사랑의 원천에서 내가 과거를 털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만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의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떠나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없지만 희망의 전도사로 활약 중인 닉부이치치의 결혼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불구는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멸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어림도 없는 미녀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이치치는 밀어붙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우리 서로 연락을 하지 맙시다. 이메일도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맙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뜻으로 알고 함께 합시다.”
1년이 지나도 그들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이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부이치치는 먼저 하느님께 다가갈 줄 알았고, 또 모든 인연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았습니다. 먼저 떠날 줄 알 때야만, 먼저 하느님께 향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야만, 참다운 관계, 영원한 사랑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생활, 봉헌생활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수도생활 하면 즉시 떠오르는 단어들이 세상과의 결별, 고행, 극기, 보속, 기도 등등이었습니다. 약간은 울적한 회색빛깔을 지닌 삶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현대의 봉헌생활에서 더 강조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친교, 기쁨, 형제애, 세상에 대한 가치 부여, 세상을 위한 적극적인 헌신 등등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들에 대한 생각도 이젠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회 입회하면 이제 가족과는 끝이구나 생각들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보다 더 굳은 영적 유대 속에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도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이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형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극단적인 말씀, 어떻게 생각하면 예의도 뭣도 없는 사람의 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 강조점은 다른데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보다 많은 우선권을 두라는 강조말씀입니다.
이 시대 사방을 둘러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한 가지는 하느님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점 역사 뒤로,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서구의 경우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많은 학교 교실에서 십자가를 떼라 마라 계속 논란중입니다. 너무나 편안히 그어오던 성호 한번 긋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수도자들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하느님 이야기, 신앙 이야기가 점점 사라져만 갑니다. 하루 가운데 하느님을 생각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 하느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삶의 태도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생활방식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지으신 피조물들입니다. 하느님 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될 대상들입니다.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삶을 지향한다면 꼭 우리가 취해야 할 필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포기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 더 큰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할 태도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과감한 포기입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작은 시냇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크고 맛있는 사과를 쥐고 싶다면 그 전에 쥐고 있는 작은 사과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생활, 수도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포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과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포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므로 정말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때로 무서울 정도로 질투하시고 우리에 대한 욕심이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와 욕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 우리 삶의 아름다운 결론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질투요 욕심인 것입니다.
적당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을 추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절대’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바로 사제요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는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방향입니다.
십자가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행동과 실천입니다.
낡은 것을 부수어야 새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깨뜨려야 주님의
새 빛을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숨어 있어 있는 우리를
십자가는 하느님께로 나오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주신
우리 자신을 위한 살아있는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생기 넘치는 성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십자가를 통해 매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지금껏 우리의 삶이
거짓 자아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는 빠져나와
살아있는 십자가와 함께 그리스도의 삶에
기쁘게 참여하는 평화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비우라고
주님께서는 날마다 은총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신앙인의 참된 힘은 자신의 미약함에 "
홍승모 신부님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돌아보시며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제안하십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마지막으로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행복과 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좀 더' 모으고 벌어야지 하며 살아간다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마저도 버려야 하고 더구나 십자가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제안하십니다. 그러니 제자의 여정, 아니 신앙의 여정이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 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비유에 나오는 탑이란 세상 사람들이 그 안에 계속 쌓아두고 지키고 싶어하는 부와 행복을 나타냅니다. 인간 역사란 하늘에 까지 닿는 가장 높은 탑의 건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탑에 자신의 소유 뿐 아니라 하느님도 가둬버립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세상 권력과 소유의 도구들을 얻기 위한 탑을 쌓으려 세상과 경합을 벌이는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뿌리에는 항상 좋은 의미의 선한 사용과 효율적인 복음 선교라는 명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유일한 힘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때로는 잊어버리고 헛된 가치들을 얻으려고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에 주님 십자가를 증거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 세속적 능력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것을 쌓는 가치 기준이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거절하셨던 그 유혹들(루카 4,1-13)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가치들을 이용할 때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 항상 깊이 식별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작한 신앙의 여정은 이해타산을 헤아려 그만 둘 수는 없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께서 소유에 대한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인은 소유욕이 강한 어느 수도자에게 수도생활을 올바르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 윗옷을 벗고 맨 몸에 생고기를 매단 채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라고 충고했답니다. 수도자는 성인이 시킨대로 하고 마을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자 등 뒤에 매달린 생고기 냄새에 마을의 온 개떼들이 수도자를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후에 돌아 온 수도자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로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안토니오 성인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셨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부를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한다면, 사탄이 그것으로 분열과 시기의 전쟁을 일으켜 영적인 마음을 이렇게 모두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두 임금이란 서로 대립하는 하느님과 사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평화협정은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7)하는 말을 기억하게 합니다. 강력한 임금처럼 보이는 사탄은 사람들이 탑 안에 축적하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섬기는 임금인 주님의 종과 같은 삶은 너무나도 미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미약해 보이는 약한 삶에서 주님의 놀라운 힘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9-10).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거룩한 영을(지혜 9,17) 받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 아니 이 세상일조차도 잘 알 수 없는 미약하고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참된 힘은 자신의 미약함에 있습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믿기에 주님을 믿고 의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손용환신부님
시성제와 십자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이 뭘까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것이 같습니다. 불교의 핵심교리 중에 사성제(四聖諦)가 있습니다. 사성제의 출발점은 고통입니다.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만남도, 헤어짐도, 성취하지 못함도 고통이요, 만사가 고통이란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渴愛), 살아남으려는 갈애, 삶에서 떠나고자 하는 갈애 등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멸(滅) 하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수행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정진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집중하면 도(道)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을 옳게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고통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의 출발점도 고통입니다. 고통의 극치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서, 최고의 고통인 죽음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자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자기 자신을 얽매게 하는 모든 집착을 버려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여기에 비움의 참 의미가 있습니다.
비움은 자기의 욕망과 소유를 모두 버리는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까지도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순히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기만 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에서의 비움은 비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한 비움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듯 자기를 완전히 비우면 깨달음을 얻게 되어 남에게 큰 도움을 주겠지만,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 그렇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작은 부분이라도 지금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누고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리고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쉽게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생활을 하지 않고 구원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작은 십자가라도 짊어져야 합니다.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고, 좋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작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을 좋게 살리고, 좋은 기도를 하고, 좋은 것을 기억하고, 좋은 것에만 모든 힘을 쓰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꽉 채우는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해 넉넉하게 비우는 십자가의 삶이길 빕니다.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는 누구인가?
최승정 님신부
오늘의 독서인 필레몬서는 바오로 서간 중에서는 가장 짧은 서간입니다.
바오로 서간은 일반적으로 어느 특정 지역의 공동체를 그 수신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서간만큼은 필레몬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중심 내용은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쓸모있는 자”)라고 하는 노예를 잘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입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본래 필레몬의 노예였다가 어떤 연유로 도주하여 바오로에게 왔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는 이 서간과 함께 그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개인적 친서인 필레몬서는 다른 바오로 서간보다 사도 바오로의 부드러운 인품을 보여줍니다.
필레몬에 대한 신뢰 가득한 바오로의 편지는 마지막까지 그의 신뢰가 말에 그치는 포장이 아님을 견지합니다.
바오로는 어떤 구체적 지시를 내리기보다 오네시모에 대한 결정을 필레몬에게 맡깁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바오로의 한 문장 한 문장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쉽이 지녀야 할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역사 이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힘센 인간과 약한 인간, 가진 인간과 없는 인간, 배운 인간과 못 배운 인간… 그 갈등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밑바닥을 흐르는 기저의 긴장감이었고, 인류는 그 갈등 앞에서 노예제도와 같은 손쉬운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이 쓰이기 전부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인간평등에 대한 생각을 펼쳐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옳지 않음을 이미 비판적으로 지적해 왔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한 구체적 저항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는 필레몬서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다는 갈라 3,28의 말씀은 사회 제도와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그 내적인 변화를 통한 실제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제도와 틀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오늘날 여러 전문가들 역시 지적합니다.
바오로는 필레몬이 새로운 복음의 의식으로 오네시모를 만날 것을 권고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만나려 할 때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사도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가르칩니다.
오네시모는 그 어떤 (인간이하의) “종”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형제”라는 것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몇 년 전 상영된 어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의 제목 역시 필레몬서가 던지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킵니다.
“종”이나 “폭도” 또는 “철거민”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인간임이 부정된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의 시선이 아님을 사도 바오로는 천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좌빨”이나 “수구꼴통”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비록 서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법은 다를 지라도 모두 “사랑스러운 형제”임을 필레몬서는 확신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당시 신학생들 사이에서는 녹차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학생 방에 놀러 가면 커피 대신 녹차를 주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느 날 동창의 방에 놀러갔다가 멋진 다기 세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기 세트의 아름다움이 남달랐습니다. 품위도 있어 보이고, 그 다기 세트에다 차를 마시니 그 맛이 더욱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동창에게 어디서 구입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인사동이라고 합니다. 저는 외출 날 곧바로 인사동에 들려 똑같은 다기 세트를 구입했습니다. 약간 비싸기는 했지만,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데 이 정도의 투자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 다기 세트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모릅니다. 닦을 때에도 혹시 깨지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지요.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까 이 다기 세트에 점점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와는 달리 녹차를 마시는 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거든요. 그리고 커피를 워낙 좋아했던 저로써는 녹차를 마시는 것보다는 커피 마시는 횟수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다기 세트가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어졌습니다. 제가 잘못된 다기 세트를 샀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남이 갖고 있으니 나 역시 갖겠다는 욕심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사용되어야 할 다기 세트를 나의 욕심으로 인해 그 용도를 다할 수 없게 만든 것이지요.
그 어떤 것도 욕심을 통해서는 진정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는 자신의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은 남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 남의 십자가를 짊어지려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가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딱 맞는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래서 나를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주님께 불평과 불만을 던질 때가 더 많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무겁고 큰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를 던져 주셨냐면서 힘들어 합니다. 바로 남의 십자가를 탐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에는 욕심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가족,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욕심 없는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주님의 멋진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고통을 감추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슬픔을 감춘다(공자).
유쾌한 기내 방송(은진슬,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중에서)
오랜 비행 뒤라 매우 지쳐서 침대에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피닉스행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기에 탑승해서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목소리 멋진 남자 승무원이 마이크를 잡고 안내 방송을 했다. 그런데 이 승무원, 마치 친근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듯 기내 방송 정규 멘트 외에 이것저것 참견하고 농담도 하는 거다. 그 남자가 마이크를 들 때마다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나도 차차 귀를 기울였는데, 이를테면 이런 말이었다.
“현재 피닉스의 기온은 110도(섭씨 45도 정도)로 맑습니다. 이 정도면 오븐 속에서 구워지는 느낌인데, 이런 여름에 피닉스에 간다는 것은 참 불운한 일입니다.”
“잠시 뒤 피닉스 공항에 도착합니다. 오늘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선택해 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저희 회사가 부도로 어려움을 겪는 때인지라 더욱더 감사드립니다. 머리 위 선반이나 좌석 밑에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주시고, 혹시 두고 내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보석이나 지갑 등 되도록 값나가는 물건을 두고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하시고, 피닉스에서 타죽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경직된 업무 분위기상 승무원이 이런 방송을 했다가는 시말서를 써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예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무척 신선했다.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위트 있는 기내 방송 덕택에 생기를 되찾고, 피닉스에 도착할 때는 피로도 가셨기 때문이다.
군중에서 제자의 단계로 업그레이드 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군중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입니다. 그 중에는 친구들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고,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서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먹을 걸주니까.. 기적을 일으키시니까.. 신기해서 예수님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이유로든지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께 불러들이시고 관심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한 군중의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첫 번째 형태인데, 예수님은 우리가 군중으로 남아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군중에서 제자의 단계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기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두기로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복음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누구보다도 주님이 내 삶에 중심에 계셔야 하고, 내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주님이 아닌 다른 분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교사회 피정과 다른 어떤 단체의 피정에 들어가, 참여한 분들에게 이런 작업을 시켜보았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분 다섯 분의 이름을 적고, 다 적은 후에 한 사람씩 버리게 했습니다. 교리 교사들에게 그 작업을 해 보라고 했을 때, ‘아...’ 하는 한 숨 소리가 간간히 들렸는데, 제 추측으로는 하느님과 여자친구 또는 하느님과 부모님을 두고 그렇게 고민하고 한 숨을 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단체의 어떤 어머니는 자신의 막내딸 아이를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은 소중합니다. 물론 친구도 소중하고 이웃들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분은 그분들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가장 사랑하시며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생의 글에서 그가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결정적 계기된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 대략 이런 글귀였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을 네가 찾을 수 있겠느냐...’ 라는 글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보다 더 중요한 분이 계시지 않음을 깨달아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말씀이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순위가 되는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고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마태오 복음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말씀대로 주님께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두 번째는 더 큰 헌신과 봉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27절과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너희 가운데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요구에 따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헌신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어부 네 사람과 세리 마태오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자캐오도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도 자신의 모든 지위와 신념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초기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도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고 함께 쓰고 함께 생활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더 큰 헌신과 봉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주님께서 더 큰 상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 19,27-30)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요한 3, 37-3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0-11)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 나의 삶을 봉헌하는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받아 누리고 더 큰 기쁨과 사랑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의 끝에 우리가 정말 희망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군중과 같다면, 조금 더 큰 헌신과 봉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만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면, 평일에 한 번 더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기도 한다면, 한 시간 더 기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단체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면, 단체에 들어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와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밖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군중의 삶이 아니라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곧 내 삶의 자리에서 헌신과 봉헌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아이가 비둘기에게 빵을 주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아이에게 말했다.
“학생, 아프리카 소말리아에는 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네.
그런데도 저런 새들에게 빵을 주고 싶나?“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멀리까지는 던지지 못해요.”
신앙의 고통
정희완 신부
신앙은 분명 기쁨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의 기쁨만큼 고통과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신앙의 길은 때때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은 때때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요구합니다. 이기적인 우리 인간이 자기의 욕망과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고통입니다. 신앙은 거친 세파의 현실 속에서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슬기로움과 끈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탑을 세우려고 하지만 경비를 계산할 줄 몰라 시작은 했어도 마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어리석은 우리들 역시 신앙의 경비를 계산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시작은 화려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대부분 우리의 이기적 욕심으로 채우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참신앙은 신앙 그 자체에 대한 욕심마저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만 명의 군사로 이만 명의 군사를 대적하려는 어리석은 임금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참신앙은 자신의 영성적 분수도 모르고 거창한 욕심만 내는 것을 경계하도록 요구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자기희생과 포기를, 신앙적 슬기로움과 끈기를, 영성적 욕심마저도 버릴 줄 아는 미덕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분명 때로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의 복음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독서에서는 먼저 하느님의 뜻이 인간이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지혜에 기대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자신도 미워하지 않으면 될 수 없고, 소유를 버려야지만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가 새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며 희생이며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렇기에 구원의 상징도 됩니다. 그럼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통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지치고 힘들어 당장이라도 놓고 싶은 피로 얼룩진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으로 짊어지신 십가가를 생각한다면 또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표지가 되는 십자가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위대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중심에 고통만이 있다면 고통의 십자가이고 우리 자신의 부모, 아내, 자녀, 나아가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하느님께 향하는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해야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정신을 바로 가진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소유로 인해 우리가 거기에 사로잡혀 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해 있다면 소유의 대상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위한 나눔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중심의 생각들에서 벋어나 과연 하느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느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피고 묵상해서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 바로 크리스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겨울 밤, 양치기 소년이 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바로 다음날, 기적처럼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왔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상애 온통 캄캄해졌을 때, 저쪽 산에서 다른 양치기의 불빛이 반짝였어요. 저는 그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집에 돌아갈 생각만 했지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밤이 있으며,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절망이 있습니다. 이 순간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건너편 산의 불빛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우리 자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불빛을 찾고 있으며, 다른 꿈을 꾸고 있으며, 다른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불빛을 주님께서는 이미 주셨습니다. 그 불빛은 바로 세례 때,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아마 이런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이 아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마태복음 6장 21절의 말씀처럼 점점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시는 예수님께 그저 고마웠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순수한 마음이 바뀝니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소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소원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단순한 마음이 차츰 퇴색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주님께서는 다시금 핵심을 찍어서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요? 그 핵심만을 쫓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혹시 세속적인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을 줄 모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원숭이를 잡을 때, 항아리 안에다 사과, 바나나 같은 과일을 집어넣고 기다린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간신이 손이 들어가지만 그 항아리 안에서 물건을 잡았을 때는 손을 빼지 못하는 작은 입구를 가지고 있죠. 항아리 덧을 설치하고 조금 있으면 원숭이들이 그 항아리에 있는 과일을 먹으려고 손을 집어넣게 되고, 그 때 사냥꾼들이 들이쳐도 원숭이는 자기가 잡은 과일을 놓지 않으려고 손을 빼지 않아 결국 사냥꾼에게 잡히고 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놓아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대신 세상의 헛된 것들만 보일 뿐입니다. 헛된 쪽으로만 시선을 맞추다보니 하느님이 나를 불러도, 하느님이 내 옆에 계셔도 우리들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처음 알게 되면서 가졌던 첫 마음을 다시금 떠올렸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겠다는 다짐들,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들... 그 마음들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세례 때의 마음, 첫영성체 때의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 봅시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미국 장애인 협회 회관에 걸려 있는 글'중에서)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절박함
김인한 신부님
순교자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신앙의 선조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바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채워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잃더라도 주님을 잃을 수는 없다는 그 절박함으로 말입니다.
어찌 보면 신앙의 선조들은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택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포기한다고 하지만, 진정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을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하지 못해서 이기적이 되고, 다른 이에게 아픔을 입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기적이 되고, 다른 이에게 아픔을 안기고 , 그리고 자유롭지 못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비워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지 못하는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내 안에 가득 채움으로써 주님 도구로서의 삶이 되길 기도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정원순 신부님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는 세계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옛날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에서 자주 다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친정 가정에서 배운 태도나 규칙들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해가 되는 옛것들은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만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4,25-33)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덜 사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추종할 때는 예수님을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앞자리에 모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제베대오의 아들 야보고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놔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 1,16-20). 게다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관원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28).
그러나 내려놓지 못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특히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마음이 가는 것만 보이고, 마음이 가는 쪽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 학력, 더 나아가 교만함, 질투심, 욕심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 자신에게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걷어 내어 홀가분하게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이기양 신부님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익숙하지만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은 낯설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도대체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유다인에게 있어서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말의 의미와는 달리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서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나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둘째 자리에 놓고 첫째 자리에는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을 많이 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의 첫째 자리에는 자식이나 재물, 때로는 관심사인 음악이나 미술이 놓여 있어도 안 되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오직 예수님만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던 해에 하느님 은총으로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으나 어느 날 하느님께로부터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받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아브라함은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며 일생을 살아왔기에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을 넘어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바다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축복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재물과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재물을 첫 자리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영원히 구원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회적 상황으로 가장이 갑자기 실업자가 될 수도 있고, 건강하게 잘 살다가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자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 부부간에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지요. 이것을 원망하고 비관하며 끝내 이런 아픔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기쁨에 동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알게 된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청춘 남녀가 꿈에 부풀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뇌성마비에 걸린 아기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 가정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는 남편을 원망했으며 아무도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삶의 희망이 다 사라졌지요.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던 남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정관수술을 받고 왔습니다. 이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6~7년 세월이 흘러 예기치 않게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수술한 자리가 풀려서 둘째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새 생명을 낳으면서 이 부부는 장애아인 첫째 아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부모마저 부끄럽게 여긴다면 아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에 생각이 미치면서 아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려웠지만 한 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미사를 나가면서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수시로 방문을 해 기도를 해 주고 태어난 둘째 아이도 형을 그렇게 좋아하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십여 년을 지옥같이 지냈던 가정에 새롭게 온기가 피어나고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지요.
누구에게나 다 어려움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 할수록 혼란과 고통은 가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난관도 받아들일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예수님 가르침은 억압이 아닌 자유에로의 초대임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지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즉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도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골로 1,18),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그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배인호 신부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그 뜻은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쟁에 임하던 임전훈(臨戰訓)이라고 합니다. 몇해 전인가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다가 결전을 앞둔 이순신의 방에 있는 글귀였던 기억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이순신 장군의 당시 마음 이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앞두고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혈연의 인연을 끊고 자신의 위치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입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전장에 임했기에 결국 우리 민족을 일본침략의 칼 아래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척의 배로 300여척의 일본 전함을 상대해서 대승을 거둔 것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뒤집고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 덕이기도 하겠지만,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 이순신을 비롯한 모든 장병에게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내 가족과 나의 행복과 생명을 민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까요? 나와 내 가족의 행복과 평화가 아니라 더 큰 가치, 즉 민족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오늘날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웃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일이 우리사회에서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국가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 물질적인 손해를 입힌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우리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참으로 참담한 각종 사고와 사건의 현장을 손 놓고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욕심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과 가족,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주고 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6~27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이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 임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세운 임전훈과 비슷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결국 비우고 버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걱정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식, 친지에 대한 걱정, 인간적으로 누리고 싶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비우고 버릴 때 참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내 욕심과 걱정의 틀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우리는 그 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언제나 새로운 일을 함에 있어서 발목을 잡혀 결단의 순간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모두 개인적인 욕심과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데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결국 개인의 욕심과 인간적인 걱정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가족, 타인과 사회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산다는 의미이고,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더욱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와 가족, 타인을 파멸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욕심과 걱정을 비우고 포기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도 살고 내 가족, 이웃을 상생의 길, 즉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길에 우리는 늘 놓여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실천할 것인지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한 주간의 화두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홍금표 신부님
"감정에 흔들리는 연약한 신앙 반성해야"
인간의 행동에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만 여기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본능 감정 기분 습관이란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만 실제 쓰여 질 때는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말들입니다.
예를 들면 「본능적인 행동」 혹은 「감정적인 반응」 「습관적인 행동」 등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가지는 말들입니다만 이러한 말들이 어떤 대상에 적용될 때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인간의 본능이 선보다는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일 것이고(원죄교리도 첫 인간 아담과 이브의 죄를 우리가 전해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 악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본능과 습관에 따른 행동들은 힘들여 배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는 행동, 인간의 지고의 가치인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행동들은 행동할 당시에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결과는 후회와 죄책감을 낳거나 아니면 우리가 소망하는 바람직한 결과와는 동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주의할 점은 본능과 감정 습관 등을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능과 습관 등 이러한 요소들은 육체적 생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특히 가족과 같은 1차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본능과 감정을 넘어서는 행위가 본능에 따른 행동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추종을 위한 2개의 단절어와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 비유를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 추종을 위한 두 개의 단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먼저 「미워하다」란 말은 오늘의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란 의미를 종종 「미워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야 한다는 비교적인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
물론 루가는 자기 십자가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란 형벌의 도구이기에 목숨 바침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할 사실은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행동들, 이 모두는 우리의 본능이나 감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니 본능과는 정반대 편에 놓여 있는 행동들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본능은 가족과 자신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애정을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명 있는 존재면 무엇이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인데 이를 예수님이 부정한다는 사실은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능을 넘어서는 의지적인 선택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망대구축과 전쟁수행의 이중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기분이나 감정에 얽매여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결국 끝내지 못할 것이고, 끝내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가 주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자됨의 길은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먼저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재물과 같은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오늘의 또 다른 이스라엘인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가 이러한 말씀들이 가지는 의미인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 본능에 흔들리는 나의 연약한 신앙을 반성해봅니다.
우리는 결국 버리고 떠나야 할 것에 애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배광하 신부님
인숙이 이야기
교구 사제단 피정 때에 지도를 해주신 신부님의 체험담이 떠오릅니다.
전라도 광주에 천주의 성요한 의료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지원에 인숙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나이는 스물이 넘은 아가씨지만 정신 연령은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 수준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 수사님들께서 장애인 방에 간식을 넣어 주고 인숙이 방을 나오는데, 갑자기 인숙이가 죽겠다며 소리를 치더랍니다. 황급히 인숙이 방으로 수사님들께서 달려가 보았더니, 방금 나누어준 인숙이 간식을 다른 장애인들이 먹으려 하자 인숙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간식을 한 입에 털어 넣다가 그만 목에 걸려 숨을 못 쉬고 캑캑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급히 간식을 토하게 하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너무도 이상한 것이 숨을 못 쉬는 상황에서도 인숙이는 한 손은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잠시 숨을 쉬게 하고는 팔을 강제로 벌려 옷을 젖혀 허리춤을 보았더니 며칠 전 복지원 식당에서 닭 요리를 하고 버린 닭 내장을 인숙이가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몰래 건져 허리에 매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연령이 낮은 인숙이 눈에는 닭 창자가 울긋불긋 한 것이 먹음직스러웠나 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인숙이야 정신 연령이 낮은 장애를 가졌으니 이해 되지만 정상인이며 어른인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리에 매달고 있는 썩은 닭 창자가 무엇인지 만져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썩은 닭 창자를 잘라 버리면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악취를 풍기지 않고 너 나 할 것 없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되질 않아 악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라 버리지 않는 썩은 닭 창자는 ‘교만’ ‘이기심’ ‘자존심’ ‘썩은 냄새나는 고집’ 등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진정 버리기 어려운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자존심, 교만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려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뼈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 위에 다시 비상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역시 천상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의 비상은 자신을 수없이 버리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뚱뚱한 상태로는 날아서 하늘나라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도 성 바오로의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되었는데, 얼마 동안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원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를 용서해 주고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씁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그저 물건에 해당될 만큼 재산의 일부인 별것 아닌 존재로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를 아들로, 심장과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레몬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9, 16)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만큼 자신에게 있는 자존심과 명예까지도 버리며 스스로를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스승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지다’는 ‘십자가를 소중한 보물로 알고 품에 안고 따라야 한다’로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십자가가 마지막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보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는 이겨내고 받아들이며 안고 나아갈 때 분명 공로가 되는 것이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대에서 천국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흔적 앞에 홀로 선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아이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엄마는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와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군가'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이 멘 할머니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른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했노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니 고통 앞에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틈에서 할머니는 그나마 힘겹게 밥을 몇 숟갈 뜨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니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아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왜 하필 나에게만 유독 큰 십자가입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십자가를 보내십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지난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입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 그 사이에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인 삶의 일부를 넘어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평생 친구처럼 여기고 끌어안고 가야할 삶의 동반자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웃들 삶에 우리 온기가 전해지는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많은 것을 포기함은 큰사랑의 증거이다.
유영봉 신부님
1.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교리반에 나오는 예비신자 부부와, 그 사람을 교리반에 안내한 신자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예비신자 자매가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 내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신자 자매가 먼저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거야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하자, 예비신자도 이해가 간다는 듯이 "목사님들은 가족이 있으니까 신자들의 부담도 많고, 일반인들도 신부님들을 목사들과는 다르게 본다."며 맞장구를 친다. 정작 신부인 나는 그 이야기에 끼어 들 겨를도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의 생각도 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에 100%동의할 수는 없다. 수녀나 수사들이 독신을 지키는 것과 사제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이유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면 수도자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 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제들의 독신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2.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사랑의 증거이다.
한 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의 성 추문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클린튼의 추문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에는 높은 점수를 주었음도 사실이다. 직무수행 능력과 도덕성과는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닐 것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수도자나 사제가 아니라도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님들이나 수도자들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하여 거기에 전념하여 투신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정열을 바치다 보면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은 더 큰 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사도 바오로는 "세상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하셨다.(필리3,8)
3. 버리고 비운만큼 채워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집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집을 완성할 힘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고, 전쟁에 이길 가망이 없으면 먼저 화평을 청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기에 그것을 알고 미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확신도 없이 섣불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어설픈 태도를 경계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 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따라오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오는 십자가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겐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별하는 고통이 큰 것이라고 한다. 세상 것에 많은 애착을 가진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이고 시간 속에 사라져갈 세상 것들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은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일상의 생활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M.E주말 교육에서는 "사랑은 결심이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의지를 실어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바치는 것이 참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10,29-30).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님
꿈이 있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영을 내리시리라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3,1)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예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지금은 그 꿈의 완성을 위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은 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치는 능력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말씀의 위력에 끌려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빵의 기적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줄 수 있으려니 하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모두 가니까 덩달아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멋있어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소망을 기대하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가긴 하지만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아셨는지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예수께서 가족 간의 불화를 일으키고,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을 유도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苦)를 낳는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혈연에, 물질적인 것에, 심지어 자신의 목숨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한 수도자는 물질에 대한 소유를 포기한다는 ‘가난서원’을, 혈연과 육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정결서원’을,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포기하는 ‘순명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각기 자신의 처지에 맞갖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난·정결·순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는 돌발적인 물음에 무척 당황하지 않았던가요?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이 부모와 집과 아내와 토지를 버렸으니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했지만 자기 목숨까지는 쉽게 버릴 수 없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요? 현세의 한자리를 꿈꾸는 그들과 예수님과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특별한 계층이나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따를 수 있지만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조건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반쯤 따르며 완전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한 카시아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들의 전통과 거룩한 책들의 권위에 따르면 포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대는 모든 열성을 다해 이 세 가지 포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 포기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포기는 그대의 옛 삶의 방식, 곧 악행과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격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포기는 미래의 삶만을 관조하고 또 보이지 않는 삶만을 갈망하기 위해서 모든 현세적이고 보이는 삶에서 그대의 정신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포기는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대로 말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먼저 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이 세상의 재산과 땅의 풍요로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친족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삶의 모든 방식, 곧 과거의 습관과 악행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세적인 기억, 집착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열렬한 신앙으로 첫 번째 포기를 실천했더라도 두 번째 포기를 같은 열성과 성의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포기를 실천하고 난 뒤에 세 번째 포기로 넘어감으로써 그대는 옛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옛 인간에 따른 아버지라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천상적이고 비육체적 삶에 주의력을 집중한 결과 그대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이 연약한 육체와 특수한 장소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면 밭갈이가 엉망이 되고 진도도 나가지 않겠지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이렇게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행과 추종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장사의 논리(論理)로 살아간다. 실제로 장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장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장사의 논리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들도 많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데 목적이 있다. 밑지는 장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은 투자로 몇 배, 몇 십 배의 이윤을 남기고, 가장 싸게 구입해서 가장 비싸게 파는 일은 모든 장사꾼의 바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장사의 논리로 산다는 말은 내가 이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크게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때로는 수고 없이 공짜를 바라는 수도 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는 어떤가? 여기도 장사의 논리가 적용될까? 그렇다. 적용된다. 하느님과 세상의 재물을 놓고 늘 갈등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하느님을 믿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열심히 사는 신자들도 많고,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충 그리고 약간의 신앙생활로 세상과 하느님을 절충하는 타협형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나라 행(行) 열차를 탈 수만 있다면 구석자리도 좋고, 아니면 입석(立席)이라도 괜찮다는 태평형의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건데 몽땅 내어놓으라는 것인가?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동행의 의미는 곧 추종의 의미로 그 정도가 다소 약화된다. 동행(同行)은 예수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나, 추종(追從)은 예수를 따르는 것, 즉 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추종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공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공통과 선택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조건인 자기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 만의 군사로 이 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勝算)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화평(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추종의 기본정신은 자기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정신인 자기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예수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무엇이라도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추종의 맛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그릇을 비로소 비울 때 그 빈 곳에 예수추종의 기쁨이 채워질 것이다. 그 기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친 예수께서 맛보신 기쁨이며,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여학생들이 장래 남편감에 대해 내세우는 조건은 이렇다고 합니다.
나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은 남자, 돈을 많이 버는 남자, 유머 감각이 풍부한 남자, 가사 일을 즐겨 하는 남자, 두말없이 우리 부모님을 부양하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내 독립적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남자, 애 잘 키우는 남자,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요리하고 집 안을 치우는 남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주는 남자, 내 잘못을 이해해 주는 남자, 더러운 버릇이 없는 남자, 나의 사교 생활을 이해해 주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서 내 핸드백 들고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
이밖에도 장래 남편감에 대한 조건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조건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이 조건에 합당한지를 따져보았습니다. 저는 조건 이하의 남성이더군요. 그렇다면 반대로 남자들은 어떨까요? 무조건 사랑만 하면 장래 아내로 합당하다고 그럴까요? 남자들 역시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면상의 한계 때문에 남자들의 조건들은 여기서 빼도록 하겠습니다(솔직히 저도 남자지만 이렇게 까다로울까 싶습니다). 하긴 전에 어떤 자매님의 이러한 푸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달랐던 것 같아요.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제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이 사람과 계속해서 함께 살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나의 기대만을 채워주길 원해서 결혼한다면, 굳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줄 하인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비록 내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방이 하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사랑의 관계는 더욱 더 두터워집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떠올리면서 주님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과 두터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무조건 다 해달라고 청하고, 주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면 과연 사랑의 관계가 과연 형성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앞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처럼 나를 주님 앞에 낮추고 대신 주님을 들어 올릴 때 비로소 주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가 두텁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낮추는 사랑.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어 주님과 함께 진정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과 기쁨이 있는 곳에는 탐욕도 인색함도 없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결단을 요청하는 신앙
정희완 신부님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 안에 아픔과 기쁨이 늘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생 그 자체가 고통이면서 동시에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 안에 언제나 슬픔과 기쁨, 고통과 행복이 동시에 교차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안에도 축복과 고통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양면을 지니듯이, 우리의 신앙도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신앙은 우리에게 욕심을 포기하고 희생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기쁨이며 동시에 어떤 결단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신앙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신앙의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건네듯이, 신앙의 고통은 언제나 신앙의 기쁨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신앙 덕분에 참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결단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조용히 성찰해 볼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오늘 복음 말씀은 무엇보다, 신앙의 결단에 게으른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질책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성경에 ‘버림과 따름’ 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이는 예수님 가르침의 내용을 압축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을 때는 복음관상을 할 것이 아니라 묵상을 할 일입니다.
먼저 당신의 제자가 될 사람의 자격으로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각자 처한 상황에서 깊이 알아들어야 합니다. 당장 걸려 들어오는 것이, 부모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계속 교육을 받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표면상으로는 정면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를 비롯해 자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좀 더 깊은 차원의 이해로 이끌고 계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대목을 묵상할 때 특히 각자가 평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뒤집어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교육 받은 것이 정말 참되고 올바르고 좋은 것인가 ? 이 의문이 우리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의미도 더 깊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고통이나 십자가가 지닌 긍정적 의미 내지 창조적 의미를 읽어 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하나 깊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현실 감각에 대한 구체적 인식의 필요성입니다. 공사비를 계산해 보고 병력을 따져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저 천진난만한 낭만적 소년 소녀로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지혜로운 현자로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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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애착하는 것과 가장 싫어하는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을 따르지 않는 제자가 있습니까?
스승을 따를 생각도 없이 제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도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뒤 따르지는 않으면서 제자 되려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문제는 뒤 따르는 것의 이해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제자가 생각하는 뒤따름과 스승이 생각하는 뒤따름의 차이.
제자는 스승을 소풍가듯 뒤따르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스승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버리고 대신 제 십자가를 지고 뒤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건물을 짓기 전에 다 지을 수 있을지 따지듯,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 미리 따지듯 잘 따져보고 제자의 길을 나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따름의 조건은 다 버림과 자기 십자가 짊어짊 두 가지입니다.
다 버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 버려야 합니다.
다 버리고 한 가지를 못 버려도 안 됩니다.
못 버리는 한 가지가 사실은 내가 가장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마지막 부제 반 수업 중에 선배 신부님의 사목 체험 강의가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납니다.
연세 드시어 친구 사제의 죽음들을 보면서 신부가 노욕을 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래서 그 길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와서 보니 책상 위에 담배 한 보루가 있었답니다.
이 까짓 것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니 그대로 놔두자고 하였는데 가만히 보니 그것이 자기가 가장 애착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문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쉽고,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좋아하는 것은 다 포기ㅜ하였는데도 마지막으로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나환자만은 피해 다녔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피할 수 없도록 외길에서 마주치게 하셨고 기도와 더불어 용기를 내어 그 나환자를 껴안았을 때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껴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결정적인 회개의 은총으로 회고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가 가장 애착하는 것은 버려야 하고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껴안아야 합니다.
오늘,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가장 애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독서> : 참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세상의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순교를 예견했다. 그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립비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열정에 가득하여 필립비 교우들의 믿음을 북돋운다. 참 행복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받는 것이므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느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을 하던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므로,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간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재림)에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는 기꺼이 순교할 것이며, 오히려 이를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필립비 교우들에게 슬픔과 좌절을 안기기보다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마태 17,1-13),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씀드린다.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얼마나 컸으면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높은 산, 사람이 살기 어려운 높은 산에서 지내기를 원할까? 그만큼 주님 체험은 기쁨과 환희, 행복을 가져다준다. 주님 체험을 통해 얻는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크고 소중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을 체험한 다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겼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겼다.”(필립 3,7-8참조) 그만큼 그의 주님 체험은 컸다. 그는 주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온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주님 체험을 통해 참 행복을 알았기에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에 힘쓰며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다.
오늘, 주님만이 참 행복의 근원이시며, 주님만이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자.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자.
오늘 오전에 인천교구 답동성당에서는 장례미사가 있습니다. 인천교구의 한 젊은 사제의 장례미사이지요. 이제 서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신부, 그런데 아쉽게도 주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신부와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제가 보좌신부 때 신학생으로 함께 캠프 갔던 일, 수영장 다니던 일, 청년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일들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신부가 직접 로스팅해서 내린 커피를 함께 마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면서 후회도 참 많이 듭니다. 그때 내가 왜 더 따뜻한 말을 못해줬을까? 그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등등…….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어제 아침 답동성당에서 문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주례와 강론을 해주신 원로 신부님께서 죽은 그 신부를 향해 “이 못된 놈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원로 신부님이 바로 죽은 신부가 신학교 들어갈 때 추천서를 써주신 아버지 신부님이거든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아들이라 못된 놈이고, 한 명의 사제를 만들기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데 본전도 뽑지 못한 채 죽었다고 못된 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신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셨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후회하게 됩니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음을,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를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 후회할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겉으로 보이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본래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에 사랑과 희생을 간직하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이 길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후회할 일을 줄여나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가득 찬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외면하였던 사람,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아니 줄여라도 나가겠다고 주님께 다짐하여 봅니다.
주님, 사제 유시명(도미니코)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비록 상대가 어리석다 하더라도 그의 말속에서 무엇을 듣고자 하는 이가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다.(존 러스킨)
제자 되기
장동현 신부님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로 표현한 사례가 잦습니다. 그러니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에 움찔했던 분들은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며 효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었던 모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루카 11,?28)
또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나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혈연관계보다 ‘따름’을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의 사도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생과 봉사만 남기고 다 버린 삶은 참으로 힘에 겨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 희생과 봉사, 제자 되기, 사도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더 힘듭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경우도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힘겨운 나날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딛고 가족을 떠난 제자들에게 종말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30)[200주년 신약성서주해(분도출판사) 참조]
제자는 아무나 되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가 양성을 하면서 성소 책임도 잠시 겸할 때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수도원에 들어오겠다는 것이 반갑고 그를 덥석 받아들이고 싶지만 오히려 담금질을 합니다.
들어오려는 너의 의도는 순수하냐?
네가 들어와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 하냐?
네가 이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하냐?
이렇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얘기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회를 유보시킵니다.
전술상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는 사실 저희의 삶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뽑으신 사람만이 하는 것이며, 그에 합당한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 즉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격은 명문 대학을 나오면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저러한 자격증을 많이 가진 것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격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성취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많은 제자들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가 되는 이유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름이 아니라 영광과 환호를 받으려는 것이고,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은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시기 위함인데 제자들은 영광스런 왼 자리와 오른 자리를 차지하려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자격은 주님을 따르려는 목적의 순수성과 십자가를 지려는 자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님 그분 자신이 따르는 이유의 전부가 되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이런 것이고 그 목적이 이런 것이라면 이제 복음에서 주님이 비유를 드신 것처럼 먼저 앉아서 잘 계산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세가 제대로 된 자세인지 따져야 함은 물론이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 해도 정말 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지, 정말 그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지, 어떻게 그 십자가를 질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시자 마실 수 있다고 대답을 하지만 결국은 도망친 그런 제자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발목 잡는 집착,,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원숭이가 많은 지역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단단히 매여 있는 둥근 통에 원숭이의 손이 들어가 먹이를 하나 간신히 꺼낼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통 안에는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를 많이 넣어둔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둥근 통 가까이 와서 먹이 냄새를 맡고 구멍 안에 가득 들어있는 맛있는 먹이를 보고는 그 통 주변을 한없이 뱅뱅 돈다고 합니다. 다른 데는 볼 겨를도 없이 뱅뱅 돕니다. 그러다가 손을 그 구멍으로 넣어 적은 부스러기 먹이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어 보고는 그만 환장을 합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손을 깊숙이 넣어 손을 가지고 잡을 수 있는 만큼 먹이를 잡습니다. 그리고 손을 빼려니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왜 손이 통에서 빠지지 않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손을 먹이통에 넣은 채 뱅글뱅글 돕니다. 덫을 놓았던 사람이 이것을 보고 걸렸다 생각하고 좇아오면 원숭이는 도망을 쳐야겠는데 손이 걸려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원숭이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손에 잡고 있는 먹이를 포기하면 쉽게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는 그것을 하지 못해서 뱅뱅 돌다가 눈이 말똥말똥한 채로 잡히고 만다고 합니다. 결국 집착이 발목을 잡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전파를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한 달 이상 성지순례를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엔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많이 챙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걷다가보면 아주 작은 무게도 크게 지장을 받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하나하나 버려나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짐이 많이 준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 순례를 끝마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무게 때문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으면서 또 사제가 되어서 성소의 길을 포기하는 많은 경우를 접했습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성소의 길에 들어설 때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것들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자신이 가정을 살려야겠다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 발목을 잡게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께서 찾아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
결국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랐던 것처럼 어떤 집착에도 매이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 중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사람의 애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라!’고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함께 나와 공부하는 어떤 신부님들은 어머니께서 홀로 한국에 계십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한국에 들어가 효도를 하고 싶지만 한국에도 못 들어가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여기서 사는 것도 힘들고 한국에 계신 어머니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온전히 버린다면 주님께서 어머니를 대신 잘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큼 성모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성모님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분들은 다만 아버지의 뜻을 위해 애정에 매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분들의 사랑을 끊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발목을 잡지 않으셨기 때문에 두 분은 하느님도 갖고 애정도 잃지 않게 되신 것입니다.
독수리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발에 실을 묶어 놓기만 하면 날 수 없습니다. 집착이 이런 것입니다. 무엇에 집착하면 그것도 가질 수 없지만 집착을 끊으면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사실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집착들이 끌려오는 것입니다. 결국 갖지 못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버려 주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얻도록 해야겠습니다.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중국 음식점에 들어설 때마다 늘 느끼는 갈등이 한가지 있습니다. 쫄깃쫄깃한 짜장면 곱빼기를 시킬 것인가? 아니면 국물이 얼큰한 짬뽕을 시킬 것인가? 하는 갈등입니다.
이런 갈등은 저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들어간 한 아이는 홀서빙하는 분이 오셔서 주문 받는 그 짧은 순간(1분도 채 안 되는)에도 마음이 서너 번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창피하게 한 사람이 한꺼번에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 두 그릇을 모두 시켜 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쉽지만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세상사는 기본 이치인 듯합니다. 이번에 짜장면 특유의 쫄깃쫄깃하고 구수한 맛을 보고 싶다면 짬뽕은 포기를 해야 하지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지극히 충만하신 분,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당신 자비로 채워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전체를 원하시는 분,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갈라져서 이쪽에 몇%, 저쪽에 몇%, 하느님께 몇% 같은 신앙, 당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 더욱 마음이 쏠리는 신앙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매사에 확실하신 분,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적당 주의를 원치 않으십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탐탁지 않게 여기십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원하십니다. 적당함이 아닌 확실함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살 전체를 당신께 투자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 한 구절을 통해서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기억하십시오! 크게 버리면 반드시 크게 얻을 것입니다. 전부를 걸면 전부를 얻을 것입니다. 크게 비우면 크게 느낄 것입니다. 크게 포기하면 크게 채워질 것입니다.
세상의 달콤한 맛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입니다. 한번에 짜장면 곱빼기와 짬뽕을 다 먹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큰 가치관이자, 보다 우선적 대상인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세상의 쾌락과 유희-에 대한 포기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포기도 적당한 포기, 잔머리 굴리며 하는 포기가 아니라 완전한 포기, 100% 포기가 중요합니다.
크게 포기한 만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것입니다. 크게 비운만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선물은 더욱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미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의 맛을 안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이 세상 그 어떤 달콤한 쾌락도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한 외팔이가 있었습니다. 평생토록 외팔이라고 놀림 받았던 그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양팔이 없는 사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갑자기 궁금해진 그가 춤을 추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아니, 팔이 하나밖에 없는 나도 괴로워서 죽고 싶은데, 당신은 양팔이 없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춤을 추고 있습니까?”
그러자 양팔이 없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너도 똥꼬 한번 간지러워봐라. 임마.”
팔이 하나뿐인 남자는 그 순간 번쩍 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제 한 팔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한 팔이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언제나 찡그릴 수밖에 없지만,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우리는 언제나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욕심도 대단하겠지요. 즉, 많은 이들이 자기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욕심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 3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미워하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워하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하게 여긴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항상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자기 소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던 경우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 성녀께서 이 길을 걸으셨고,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욕심을 버리는 용기와 결단만이 참 행복의 길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가난 부인
이재성 수사님
참으로 버려야 할 나의 소유란 무엇일까요? 물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명예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나의 이웃 사람이나 주변 상황에 대한 나의 불만과 평가와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주변 상황이나 이웃에게 늘 못마땅하다는 말은 곧 그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바람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만일 끊임없이 바라던 것이 개선되어 드디어 이루어졌다 합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또다시 부족함과 함께 또 다른 바람이 생길 것입니다. 바람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평화가 머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허리가 펴지는 편안함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하는 ‘가난 부인’입니다. 그러나 정말 버리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바람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들을 통해 이루려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자신의 손에서 내려놓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나선 길에서는 자신의 가장 큰 욕심을 버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며, ‘가난 부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빈 무덤
김은배 수녀님
제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를 선택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살고자 했던 것은 그 당시 본당 사목이 아닌 임종자들을 돌보는 특수 사도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임지가 본당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던지 못 가겠다고 감히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본당에 갔습니다.
그곳은 저를 자꾸만 작게 만들었습니다. 실수는 일상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운 마음에 또 너무 잘하려다 보니 미사 준비를 해도 막상 미사 때는 빠진 것이 생각나 얼굴은 빨개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늘 긴장과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은 저를 압박했고 결국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잘 견디며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본당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건강을 이유로 수련소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생한 저를 질책하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짐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중에 저를 잘 아시는 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빈 무덤에서 무얼 찾고 있느냐?"고 하시며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씁니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며칠을 성당에서 울고불고 매일 성체조배를 하면서 제 자신을 내려놓는것이 이렇게 힘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첫 서원만 하면 나의 삶이 아닌 예수님의 삶으로 변화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첫 서원을 하고 사도직에 나갔을 때 제 모습은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고 오히려 제 안에 수도자의 상을 탑처럼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제 안에 들어 앉아 있던 수도자 상이 무너지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기까지 모든 이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은 그분의 사랑이 가느다란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작은 욕심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면서 저는 비어 있던 제 무덤을 조금씩 채우고 있습니다.
사랑의 의지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았던 바로 그때이다.
가장 불행한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함부로 하는 얘긴지 모르지만 자기 인생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포자기한 인생이 아닐까?
우리는 자기를 집착하고 고집하는 나는 포기해야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 나, 이웃을 사랑할 나, 모든 것을 유의미케 할 나는 사랑해야 하고 나의 삶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살까지 가지는 않아도 삶의 의지를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내가 너무 싫어서. 나의 삶이 너무 구차해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새롭게 사랑하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보입니다.
큰 것을 욕심내서 의지를 꺾지 않고 작은 것도 사랑하며 그 것을 실천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합니다.
실패가 끝인 사람과 실패가 새로운 시작인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실패하는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어서도록 늘 사랑의 의지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 방에 놀러갔다가 노래 한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래를 틀어주면서 가사를 한번 귀담아서 잘 들어보라고 당부했지요. 저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서 가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죽이지. 가사가 정말로 끝내주지 않니?”
그런데 저는 솔직히 가사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었고,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께서는 약간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도한 표현까지 쓰면서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고 있는 신부님께 “그 노래 형편없는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동조를 했지요.
“와~~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노래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사실 ** 신부님 알지? 그 신부님 방에 가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정말로 좋더라고. 그래서 음반을 사서 이렇게 들어보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선배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신부님은 많은 후배신부들이 존경하는 신부님으로 선배 신부님께서도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지요. 이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다보니 신부님께서 듣는 노래도 듣기 좋은 것이고,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듣다보니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저도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들으니 그 노래가 좋아지더군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나 역시도 좋아지지요. 심지어 그 사람의 단점과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장점과 긍정적으로 바꿔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고백한다면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좋아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요? 주님께 대한 갖은 불평과 불만들. 이 모습이 과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히 여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든 것보다도 먼저 즉,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었지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주님의 활동에 대한 불평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은 이제 그만~~
제자됨의 시작
서현승 신부님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지요.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수고로움임을 삶의 깊은 체험에서 통찰한 표현입니다. 고통에 대한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수많은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구나 원하지만 그것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마땅히 그에 따르는 수고가 있을 것이고, 노력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련이나 아픔 자체가 행복을 자동적으로 가져다주는 담보는 더 더욱 될 수 없을 테고요. 그런데 고통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따라오는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고통이나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때 겪게 될 고통 또한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아픔 없는 기쁨을 원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적인 바람일 테지만 참된 행복이나 평화, 기쁨을 맛보기까지는 가망 없어 보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해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참된 가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십자가요 고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됨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상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십자가에서부터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지고 가려 하는 십자가에까지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모아질 수 있습니다.
냉정(?)하신 예수님
김광태 신부님
예수께서 가족을 대하시는 모습은 유별났다. 어머니를 가리켜 ‘여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마르 3,33) 하고 반문하시며 마치 혈육을 부정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또 당신을 따르는 조건의 첫 번째가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마르 10,29)를 버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태도는 가족에게만이 아니다. 베드로한테는 다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씀을 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어찌 이리 냉정하실까?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카나의 혼인잔치(2,112)에서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을 앞질러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스도의 때를 앞당기도록 요청할 때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혼인잔치의 기쁨이 사라지고 신랑 신부는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것을 염려한 성모님의 모성이 예수님의 때를 앞당기신 것이고 예수님은 그 요청을 따르셨다. 두 번째는 십자가 아래서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성모님을 당신의 어머니로만 남겨두지 않으신다. 당신의 어머니를 인류의 어머니로 세상에 내어 주며 ‘㈏科?繭箚?부르신다(9,25-27).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어떤 태도를 보였어야 할까? 신앙인으로야 놓아드리는 게 도리겠지만,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가 그분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붙드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가차 없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베드로에 대한 꾸지람인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세상의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순교를 예견했다. 그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립비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열정에 가득하여 필립비 교우들의 믿음을 북돋운다. 참 행복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곧 구원받는 것이므로,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느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을 하던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므로, 악하고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간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재림)에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는 기꺼이 순교할 것이며, 오히려 이를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필립비 교우들에게 슬픔과 좌절을 안기기보다 기쁨과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마태 17,1-13),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하고 말씀드린다.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얼마나 컸으면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높은 산, 사람이 살기 어려운 높은 산에서 지내기를 원할까? 그만큼 주님 체험은 기쁨과 환희, 행복을 가져다준다. 주님 체험을 통해 얻는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이 크고 소중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주님을 체험한 다음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겼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겼다.”(필립 3,7-8참조) 그만큼 그의 주님 체험은 컸다. 그는 주님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었고, 그래서 그의 삶은 온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주님 체험을 통해 참 행복을 알았기에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에 힘쓰며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다.
오늘, 주님만이 참 행복의 근원이시며, 주님만이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굳게 믿자.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자.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상윤 신부님
오늘 복음인 루카 14장 25절의 앞부분인 14장 전반부에 ‘예수님께서는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의 일이다(Lk 14, 1).’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초대받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여러 비유를 통하여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Lk 14, 15).’라고 까지 말합니다. 그러한 감동의 자리가 오늘 복음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자리에서 나오셔서 많은 군중과 함께 길을 가면서 또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Lk 14, 26).’
입으로는 주님, 주님 외치는 분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 나아가면서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놓아버리고 따른다는 것이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알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Lk 14, 27).’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제일 크다고 여기듯이’라는 생활성가 가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체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그 십자가를 짊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하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를 찾아야합니다. 이 십자가를 찾아 우리도 기꺼이 그분의 뒤를 따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고통의 상징으로만 시련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십자가의 사랑과 영광을 느껴야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인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를 상기하며 이 말씀을 내 삶으로 초대하여 살아내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삶이 자신의 것을 온전히 버리며 주님의 참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4,25-33]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있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향해 가시고 있는 길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내다보고 걸으시는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걷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가는 것으로 여겼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즉, 가능한한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하고, 현세에서 예수를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귀한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와 당신이 지시고자 하시는 십자가를 지는 수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할 부모나 처자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말마디대로 미워하라고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육정으로 맺어진 것들과의 사랑까지도 희생하며, 예수를 따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보다 큰 영원을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한다는 것은 의례히 요구되는 일이라 하겠다. 한 예로 전쟁에서 적과 싸우고자하는 병사가 따뜻한 방에서 동시에 안락하게 지낼 수 없겠고, 유흥을 즐기면서 영예의 합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온전히 좀더 가까이 따르는 생활을 하자면, 의례히 현세적인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또한 그러한 생활은 준비없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포도원을 지키는 망대를 짓기 전에 계획과 설계, 비용 등을 사전에 계산할 줄 알듯이, 우리 각자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천국의 집을 건설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준비를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천국을 위해 자신을 바친 이들은 복음삼덕인 정결, 청빈, 순명을 지키는 수도자의 삶안에서 나타난다.
정결은 사랑 중에 최대의 사랑으로서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청빈은 최대의 부요함으로서 하느님의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난한 마음이다.
순명은 최대의 자유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로서의 자유이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최대의 자유와, 최고의 영적인 부요함과 최대의 사랑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으로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
이성원 신부님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을 위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신부님, 오늘은 재수 더럽게 없는 날입니다. 요새처럼 불경기에 팔면 얼마나 남는다고 물건 가져갈 때는 금방 돈 부쳐준다고 해놓고선 그냥 날라버렸습니다.” 그분은 그냥 술이나 한잔하러 가겠다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맘이 많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수고한 값을 못 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살이에서 이처럼 값을 치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영적 독서도 하고, 기도도 하며 정성된 마음과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잃는 것이 있어야 얻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살이입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가 뛰고 소리를 지르자 어르신 한 분이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왜 남의 아이 기죽이세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엄마에게서 남에 대한 배려는 제대로 배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같은 예로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가 “후지산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야단치고 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전철 안의 사람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이 엄마라고 자기 아이가 예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산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오늘 성서를 보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되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값을 치르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한 번쯤, 아니 자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영적 풍요를 위해, 더불어 살기 위해.
“이끌어 주시기에 오늘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갑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시면서 말씀을 이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워해야만 한다'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너무하시다 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언어권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부모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내 제자가 죌 수 없다.'는 어구(語句)를 '부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온전한 포기를 요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포기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고 계산해 보지만, 자신이 없고 무력함만 느낍니다.
이토록,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나약하고 무력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에 좀더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드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끝없이 의지하고 맡기면서 있는 힘을 다할 뿐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며 힘을 다하는 저를 이끌어 주시기에, 오늘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갑니다.
평화 협정
장재봉 신부님
어제 대장이신 예수님을 소개했더니 마침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함께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이익인지 손해인지 따지는 것조차 시간 낭비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에든 무조건 순명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오로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아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이르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이라고 밝혀주신 그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내가 가진 능력도, 힘도, 자신감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분께 항복의 백기를 높이 들고 나아갑시다.
주님께 항복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백기는 자만, 사악, 오만, 거짓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탁으로만, 그분으로부터 오는 힘으로만 단단해집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전부를 따갑게 뜯어내고, 내 안의 것을 몽땅 비워내고, 그분께 평화 협정을 청하도록 합시다.
진정한 그분의 군사로 거듭날 때 우리의 삶은 하늘을 비추는 별처럼 빛이 날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확실한 이익입니다.
약혼자보다 반지?
김희자 수녀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자기 소유를 버릴 것을 강조하신다. 바로 예수님이 참된 보물이시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약혼자보다 반지를 더 좋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재물과 그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한쪽으로 접어두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놓아버리셨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활동적으로 일하시면서도 그분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림은 곧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수도자들은 수도생활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까지 익숙했던 곳을 떠난다. 이 떠남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에서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의미를 주었던 모든 곳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가족·고향·관계·재산·명예,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 의미와 힘을 주고 나의 약함을 보호해 주며 안전을 보장해 주던 것들로부터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도자들은 이 여정을 선택한다.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눌 수 있는 것이 내 안에도 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고 나누어준다면 그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순금(純金)을 집었으니 18K는 내려놓으시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추종을 위해 부모나 형제자매를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잘 새겨서 들으셔야 할 말씀 같습니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가 성경에 대한 편협된 접근방식으로 인한 오류이지요.
오늘 우리 손에 들려있는 성경의 시대적 배경은 우리 시대와 수 천 년이나 되는 격차가 있습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가치관도 다릅니다. 표현법도 다릅니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구체적인 환경이나 상황도 다릅니다. 청중도 다릅니다.
성경을 바라볼 때는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본문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주석서나 참고서도 곁들어 읽으면 금상첨화입니다.
가장 중요한 성경 봉독의 지침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의 최종적인 요약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프리즘을 통해 성경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하느님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이 묘사되고 있는가 하면 분노로 이글거리는 진노하시는 하느님의 얼굴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 과격한 언행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때로 너무 지나친 요구로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우리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자식이 멸망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면, 부모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말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혼도 내기도 하고, 언성도 높이고, 눈물로 하소연하기도 하고 마침내 강제력도 동원할 것입니다.
뛰어난 머리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자녀, 그래서 장밋빛 미래가 눈에 선한 자녀가 노력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하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갈 것입니다. 욕도 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표현도 자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청 높은 목표를 정해 자녀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던지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부담스런 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길을 나선 사람들, 안 그래도 힘들어죽겠는데, 점점 더 코너로 몰고 가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 추종을 위해 부모님을 미워하라고요? 형제나 자매와도 원수처럼 지내라고요?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부모형제는 걸림돌이라는 말씀인가요? 이웃사랑도 하느님 사랑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셔놓고, 당신을 따르기 위해 가족들을 미워하라니 모순되는 말씀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보다 큰 보물을 발견했으니, 작은 보물들을 손에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순금을 집었으니 18K는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최우선적 가치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성직에 접어든 사람들, 수도생활에 투신한 사람들, 비록 물리적으로 부모형제를 떠난 사람들이지만, 영적으로는 주님 안에 더욱 굳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항상 이루어지는 사람에게 있어 부모를 향한 사랑, 형제간의 우애가 예수님 추종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재주가 많아서 죽은 사람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현대의 위기 중 가장 심각한 위기가 가정의 파괴라 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복음 말씀대로 정말 부모님과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씀일까요?
단연코 아닙니다.
십계명중, 이웃사랑의 첫째인 4계명에서 알려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형제에게 미친 놈 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성가정을 본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스승을 배신했지만, 배신한 그 죄보다도 스승을 배신했다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죄책감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유다에게 “그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형제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은 미워하라고...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 나설 뿐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두 시간 넘게 ‘검색’창을 휘집고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나름대로 ‘재주가 많아서 죽은 사람’ 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남 보다 많은 재주가 있어 그 재주를 뽐내며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은 유일한 재주가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납니다.
재주가 없는 사람은 ‘이크 곰이다. 빨리 나무위로 올라가야지...’ 라며 나무위로 올라가 곰을 피합니다.
그러나, 재주가 많은 사람은 ‘아.. 내가 곰을 피하기 위한 많은 방법을 알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저 곰을 피할까? 죽은 적을 할까? 나무위로 올라갈까? 벽을 탈까?...’ 등 자신의 재주를 생각하다가, 결국 곰을 피하지 못하고 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단순한 예화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꺼리를 남겨 줍니다.
곰에게 생명을 건진 사람은 할줄 아는 것이 많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고는 나무에 올라가는 것뿐인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위험이 닥쳐오자 자신이 할 줄 아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위험을 모면합니다.
그러나, 가진 재능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어떤 방법을 쓸까?’ 생각만 하다가 곰에게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쩌면 생각해야할 문제가 좀 좁혀진 것 같습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곧 부모와 아내, 자녀 형제자매, 자기 자신 이모든 것이 자신에게 있는 여러 재능,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실제 그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교만함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은 참되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겸손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집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로다.’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주님께 매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참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삶을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냥 대충 하지 뭐.’ 식의 표현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교만함과 거만한, 다른 것으로 기울어지는 욕망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 잘못에 있어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많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 이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욕망과 욕심대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기 보다는, 자꾸 주위를 둘러보고 뒤를 돌아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욕망, 거만함 등을 버리라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만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많은 재능이 있다는 거만함에 스스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이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많은 위험들을 피하며 구원에 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이런 노력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기양 신부님
입시철이 다가온 모양입니다. 성당 마당의 성모님 앞 촛불이 연일 빈틈 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들의 모습도 자주 뵙게 됩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입시철이 되면 부모들은 자녀가 최선을 다해서 능력 이상의 결실을 맺기를 기도하고 좋은 점수를 얻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를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6-27)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는 즉시 이렇게 반응할지 모릅니다.
“아이고, 주님, 버릴 수 없습니다. 좋은 점수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원하는 대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하십니까?”
아마 예수님의 말씀이 아예 귀에 안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조바심을 내고 또 수많은 희비가 교차됩니다. 시험을 잘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에 따라 감정의 폭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하느님을 믿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희로애락, 또 번뇌와 희비는 대부분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는 고난의 길을 향해 가고 계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향해 묵묵히 가고 계시는데 그 옆에서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나는 이 자리를 차지하고, 베드로는 제일 높은 자리를, 또 누구는 둘째, 셋째 자리를…하면서 완전히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코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통에 말없이 힘들어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야단치시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나를 따르고자 하면 세상의 모든 명예와 영광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안 되며, 부모와 처자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제인 저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면서 진정 풍요로운 축복을 원한다면 나의 뜻은 접어야 합니다. 내 뜻을 접지 않으면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 끝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 욕구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힘들게 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뜻을 꺾는 것인데 우리는 오히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고집하며 항상 그 수준에 머물러서 스스로 갈등을 만들어내고 힘들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접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의 뜻을 접는 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완전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는 전혀 없이 성공만 계속되고 좋은 일만 이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이어질 수가 없지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생각보다 못한 결실, 빈약한 결실이 맺어졌을 때 자녀들은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닥칠 때 삶의 경험이 풍부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참다운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앞에서 더 화를 내며 실망하는 부모가 되지 말고, 더욱 노력하여 시련을 극복했을 때 보다 더 성장할 수 있고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어려움과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나 실패를 맞고 겪으며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게 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시몬 베드로 역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똑같이 배반의 길을 간 것이지요. 그러나 후에 시몬 베드로는 모든 것을 뉘우치고 다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수제자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배반이라는 시련을 놓고 다시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결말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바탕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욕심과 내 뜻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론은 항상 나락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좋은 결과를 맺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럴 때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자녀들의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자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행(同行)의 의미와 추종(追從)의 의미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24)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기쁨과 보람, 고통과 슬픔, 수고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동행자들 중에서 당신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추종자들을 얻으려 하시는 것이다. 동행(同行)의 사전적 의미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길을 함께 간다고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종(追從)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뒤나 그 뜻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종은 길을 함께 가는 동행의 뜻을 가지면서 선행자(先行者)의 뜻을 끝까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끝까지 가는 것이며, 예수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종은 동행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어려운지는 복음의 말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공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공통(共通)과 선택(選擇)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조건인 자기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라는 말은 같지만 그 십자가의 내용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 만의 군사로 이 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勝算)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화평(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추종의 기본정신은 자기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정신인 자기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할 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달고 예수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자유롭게, 그리고 각자 나름의 십자가를 지고 진정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누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가? 많은 군중 속에 나도 끼여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마르 3, 14) 위함이었기 때문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늘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1,17)하신 이유가 바로 늘 당신과 함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로마에서 공부할 때였다. 친구인 갈멜 신부와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내가 버스를 탈을 때 버스표 두 장을 내었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자기와 예수님의 것과 함께 내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그 친구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멋 적게 웃는다.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의식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곧 관상생활이요, 예수님의 현존 속에 지내는 것이다.
과연 나는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시고 내가 알아야할 진리이시고 내가 먹어야할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걸어가지 않으면 아버지께 가는 길이 아닌 길을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닌 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진리이신 예수님한테 배우지 않으면 아버지께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지 못하고 헤메이게 될 것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지 않으면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어둠 속에 헤메이지 않고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며 죽음의 길을 걷지 생명의 길을 걷을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야할 길을 걷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미워하다."는 말은 정말 미워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느데 장애가 된다면 미워하라는 말이다. 사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형제 자매 라고 하더라도 그 분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따라 가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내가 따라 가야할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갈려고 나섰다면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분도 따라 가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분도 어떤 것도 예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따라가야 할 분이시다. 내가 따라가야 할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자기 십자가를 남에게 대신 지워지게 하고 나 혼자 홀가분하게 가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가 없는 쉽고 편한 길이 아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는 길이다."(루가 9,58)
왜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가? 십자가는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코전 1,18. 22) 라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지혜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바로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구원의 수단인 나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늘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그냥 덜렁 덜렁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나의 십자가는 나 몰라라 내팽개쳐 놓고 나만 잘 살겠다고 따라 나서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죄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제는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어야하고 아울러서 나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몫까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 세 번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고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고 입어야할 예복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과 늘 함께 길을 가는 것이요,
둘째,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따라 가면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반드시 지고 따라가야 한다.
넷째,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 사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은 버려야 한다.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이 네 가지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혼인 예식에 참석하는 예복을 입은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이 네 가지 조건 중 몇 가지나 실천하고 있는가? 이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한가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네 가지 중 한 가지만이라도 빠진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아니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보듯이 또는 이만 명을 거느리고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듯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유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게 하는
낙엽의 계절입니다.
소유할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자연의 빛깔입니다.
이와같이 자연은
버리고 비우기에
온전히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소유와 집착은
언제나 삶에 대한
상실과 분노로 되돌아옵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유와 집착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성과 감사로
우리의 생명은 풍요로워집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입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인생의 끝모습은
언제나 무소유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비울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게 됩니다.
소유를 버렸기에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이하루는
우리가 버리고 비워내야 할
집착과 소유를
기쁘게 주님께 봉헌하는
무집착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버리고 놓아주어야
모두 제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행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노래를 해서 행복해진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노래를 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즉, 저절로 행복이라는 것이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내 자신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행복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열이면 열이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고, 그 행복이 저절로 내게 다가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행복해져야 주님을 믿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주님을 믿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데 말이지요.
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시계만을 계속 바라보는 사람들이 계십니다. 미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도 봅니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도 큰 인심 쓴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성당 안에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밖에서는 심지어 식사전후 기도도 바치지 않습니다. 봉사와 희생은 시간 많은 사람이 해야 할 몫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항상 시간이 없다고만 말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나에 대한 사랑에만 온 힘을 쏟습니다. 이해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불평불만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주님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너무 많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한 예들만을 철저하게 쫓고 있었던 나는 아니었을까요? 과거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이 먼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참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위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단순히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래서 가족까지도 미워하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행복해지고 싶은 여러분. 나는 이제까지 무엇이 먼저였는가를 그리고 이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보십시오.
오늘을 잡아라! 그리고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으로 믿어라(호레이스).
병원에서...
몇 달 전, 종합검진 결과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간단한 검사니까 다시 검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검사를 마치고 다시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종합병원이라 그런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긴 줄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 일도 많은데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잠시 뒤, 저는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기실에서 가장 온전한 몸으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들 안 좋은 안색을 보이고 있었고, 너무나 힘들어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 한 군데 아픈데 없으면서 내 차례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던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불평불만들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말이지요.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은데, 불평불만으로 인해 감사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것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통해서 행복도 내게 조금씩 다가올 것입니다.
여학생들이 장래 남편감에 대해 내세우는 조건은 이렇다고 합니다.
나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은 남자, 돈을 많이 버는 남자, 유머 감각이 풍부한 남자, 가사 일을 즐겨 하는 남자, 두말없이 우리 부모님을 부양하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내 독립적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남자, 애 잘 키우는 남자,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요리하고 집 안을 치우는 남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주는 남자, 내 잘못을 이해해 주는 남자, 더러운 버릇이 없는 남자, 나의 사교 생활을 이해해 주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서 내 핸드백 들고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
이밖에도 장래 남편감에 대한 조건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조건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이 조건에 합당한지를 따져보았습니다. 저는 조건 이하의 남성이더군요. 그렇다면 반대로 남자들은 어떨까요? 무조건 사랑만 하면 장래 아내로 합당하다고 그럴까요? 남자들 역시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면상의 한계 때문에 남자들의 조건들은 여기서 빼도록 하겠습니다(솔직히 저도 남자지만 이렇게 까다로울까 싶습니다). 하긴 전에 어떤 자매님의 이러한 푸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달랐던 것 같아요.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제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이 사람과 계속해서 함께 살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나의 기대만을 채워주길 원해서 결혼한다면, 굳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줄 하인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비록 내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방이 하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사랑의 관계는 더욱 더 두터워집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떠올리면서 주님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과 두터운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무조건 다 해달라고 청하고, 주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면 과연 사랑의 관계가 과연 형성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앞서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처럼 나를 주님 앞에 낮추고 대신 주님을 들어 올릴 때 비로소 주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가 두텁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낮추는 사랑.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 모두 한 형제자매가 되어 주님과 함께 진정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과 기쁨이 있는 곳에는 탐욕도 인색함도 없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인생찬가(H.K.롱펠로우)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영혼은 죽는 게
아니고 잠드는 것이니 만물의 본체는 외양대로만은 아니란다.
인생이란 실재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우리의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본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인생이니라.
예술은 길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니, 우리 가슴이
설령 튼튼하고 용감하더라도, 마치 천으로 감싸진 북과 같이
둔탁하게 무덤을 향한 장송곡을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지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억척같이 싸워 이기는 영웅이 되라.
미래를 믿지 말라, 비록 그것이 즐거울지라도!
죽은 과거는 죽은 채로 묻어두라!
행동하라, 살고 있는 현재에서 행동하라!
가슴속에는 용기를, 머리위에는 신을!
위인들의 모든 생애는 말해 주나니,
우리도 위대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이 세상 떠날 때는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아마도 후일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외롭게 난파한
그 어떤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그런 발자국을,
자, 우리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자.
그 어떠한 운명도 헤쳐 나갈 정신으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일하고 기다리기를 함께 배우자.
요즘 갑자기 일이 많아졌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들이,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제게 다가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바쁘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제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니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바쁘면 바쁘다고 불평이고, 한가하면 또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요즘에는 E-Mail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E-Mail을 많은 분들이 보내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늦게라도 꼭 답장해 드릴게요.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러다보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다가오면 괜히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네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원어치의 고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이 사람에게 고철을 가지고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 기술을 배우는 값은 공짜입니다. 기술을 배우겠다는 열정과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람은 바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만 배우면 만원어치의 고철을 십만 원의 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시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로는 만원어치의 고철을 백만 원의 가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컴퓨터의 중요 칩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이 기술로는 만원어치의 고철을 1억의 가치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술을 배우겠어요? 물어 볼 필요도 없겠지요? 당연히 최고의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컴퓨터의 중요 칩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소중한 것보다도 최고의 가치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가치를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바쁘다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바쁨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나에게만 왜 이렇게 고통과 시련을 주고 있느냐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최선의 노력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바쁘다고 말을 합니다.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많다보니, 해야 할 일도 많은 법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활하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온 E-Mail에 대한 답장을 합시다.
우리 배낭에 든 재미난 것은('좋은 글' 중에서)
게리 스콧이라는 유명한 등산가이드가 있습니다. 알래스카의 최고봉 맥킨리를 18시간 30분만에 단독 등정한 세계 기록 보유자입니다. 이 분이 산에 처음 오르는 사람들을 눈여겨 봤더니 너나없이 엄청난 짐을 챙겨오더랍니다.
"언제 어떻게 필요할 지 모르잖아? 일단 짊어지고 가자."
결국 이들은 산행 내내 짐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보따리를 수백번 풀었다 다시 싸는 수고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짐이 많을 수록 정상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몸이 안좋아서, 잠을 잘 못자서, 폭풍우 때문에... 핑계는 많지만 진짜 이유는 너무 무거운 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짐을 줄이는 대신 힘과 기술을 키우면 됩니다.
게리의 짐 챙기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일단 짐을 모두 펼쳐놓습니다. 앞으로의 등반 과정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때 확실히 쓸 것들을 한쪽으로 모아놓습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생명과 관련된 것, 즉 안전에 필요한 장비들은 가장 먼저 챙겨야 합니다. 펼쳐놓은 짐의 절반만 챙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때 한가지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10g짜리 약병조차 들었다 놓았다 고민하지만 마지막으로 눈 질끈 감고 챙기는 게 있습니다. 즐길 것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답니다. 조그만 게임기나 소설책 한권만 있으면 눈보라치는 무서운 밤에도 긴장과 스트레스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목표와 과정이 분명하면 짐을 크게 덜 수 있고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짐에 의존하지 말고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챙길 것은 생명, 즉 안전과 건강입니다. 그리고 인생이나 등산이나 재미가 있어야겠지요.
당신의 인생 배낭 속에는 어떤 재미난 것이 들어있습니까?
오늘 오전에 인천교구 답동성당에서는 장례미사가 있습니다. 인천교구의 한 젊은 사제의 장례미사이지요. 이제 서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신부, 그런데 아쉽게도 주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신부와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제가 보좌신부 때 신학생으로 함께 캠프 갔던 일, 수영장 다니던 일, 청년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일들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얼마 전, 신부가 직접 로스팅해서 내린 커피를 함께 마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면서 후회도 참 많이 듭니다. 그때 내가 왜 더 따뜻한 말을 못해줬을까? 그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등등…….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어제 아침 답동성당에서 문상을 하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주례와 강론을 해주신 원로 신부님께서 죽은 그 신부를 향해 “이 못된 놈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원로 신부님이 바로 죽은 신부가 신학교 들어갈 때 추천서를 써주신 아버지 신부님이거든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아들이라 못된 놈이고, 한 명의 사제를 만들기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데 본전도 뽑지 못한 채 죽었다고 못된 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신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주님께서 필요하시니 부르셨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후회하게 됩니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음을,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를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그 후회할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겉으로 보이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본래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에 사랑과 희생을 간직하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이 길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후회할 일을 줄여나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가득 찬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외면하였던 사람,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아니 줄여라도 나가겠다고 주님께 다짐하여 봅니다.
주님, 사제 유시명(도미니코)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비록 상대가 어리석다 하더라도 그의 말속에서 무엇을 듣고자 하는 이가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다.(존 러스킨)
뚝딱뚝딱, 망치 소리로 남은 사람(‘좋은생각’ 중에서)
1935년 미국 몽고메리의 극빈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은 백만장자를 꿈꿨다. 여섯 살 때 통통하게 잘 키운 돼지 한 마리를 11달러에 판 것을 시작으로 대학에 입학해서는 친구와 유통회사를 차려 연간 1만 5천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뒤에도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휴일도, 가족도 잊은 채 일에 매진했다. 스물아홉, 드디어 그는 백만장자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서른이 되던 해 아내가 결별을 선언했다. 돈만 쫓는 무의미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호화 저택, 최고급 승용차, 근사한 별장, 사랑스런 두 아이까지……. 모든 걸 갖췄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아내와 진지한 대화 끝에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하고, 살 집을 뺀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즈음 유년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한 노부부의 허름한 오두막을 고쳐 주고 뿌듯해하던 아버지, 그리고 말끔히 고쳐진 오두막을 보고 환하게 웃던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그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비가 새는 낡은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 다리 밑에서 생을 이어 가는 노숙자, 쇠똥으로 지은 집에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 등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그리고 1976년 ‘보금자리’란 뜻의 해비타트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펼쳤다.
백만장자의 삶을 버리고 사랑의 보금자리 백만 채를 짓는 아름다운 꿈에 도전한 사람, 그는 바로 밀러드 풀러다. 그는 직접 망치를 들고 15평 남짓의 작은 집을 지어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물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터전 삼아 무너진 가정을 세우고, 그들 역시 이웃의 집을 짓는데 참여해 수백 시간씩 땀을 흘렸다. 그렇게 국적,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집짓기 운동에 동참했고 개인과 기업 등이 후원하는 가운데 지난 30여 년간 해비타트 이름으로 95개국에 무려 30만 채에 이르는 집이 세워졌다.
2005년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루이지애나에서 어린 두 딸과 사는 엄마에게 집을 지어 주고 그는 말했다. “이 소녀들이 훗날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금자리가 생겼으니 그들의 생은 보다 나은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파괴와 분열의 상징일 수도 있는 ‘망치’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 짓고 모든 경계를 허무는 사랑의 도구로 바꾼 풀러. 지난 2월,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짓기 시작한 사랑의 집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24분마다 한 채씩 서고 있다. 뚝딱뚝딱, 그 망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한 외팔이가 있었습니다. 평생토록 외팔이라고 놀림 받았던 그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고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양팔이 없는 사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갑자기 궁금해진 그가 춤을 추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아니, 팔이 하나밖에 없는 나도 괴로워서 죽고 싶은데, 당신은 양팔이 없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춤을 추고 있습니까?”
그러자 양팔이 없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너도 똥꼬 한번 간지러워봐라. 임마.”
팔이 하나뿐인 남자는 그 순간 번쩍 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제 한 팔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한 팔이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언제나 찡그릴 수밖에 없지만,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우리는 언제나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욕심도 대단하겠지요. 즉, 많은 이들이 자기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욕심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 3가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항상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미워하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워하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하게 여긴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항상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자기 소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던 경우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정말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인 성녀께서 이 길을 걸으셨고,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욕심을 버리는 용기와 결단만이 참 행복의 길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엄마는 강하다(‘좋은 생각’ 중에서)
2002년, 제36회 세계체조선수권대회 여자 뜀틀 경기에서 동메달을 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옥사나 추소비티나. 한데 그는 아들에게 꼭 금메달을 선물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10대 선수들이 메달을 휩쓸어 가는 체조에서 스물일곱 살은 고령으로 통한다. 그럼에도 옥사나는 놀라운 실력을 뽐내며 많은 이의 우려를 단번에 깼다. 하지만 아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그의 아들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완치하는 데 드는 치료비가 무려 1억 원. 가난한 나라의 체조 선수에게 그 돈은 너무 큰 금액이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상금이 우리 돈으로 약 3백만 원. 그나마 금메달을 따서 광고 모델이라도 한다면 조금 더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국내외 체조 경기에 나가며 금메달을 목표로 삼았다.
날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체조 연습을 한 끝에 이번 베이징올림픽 여자 체조 도마 결승에서 당당히 은메달을 딴 옥사나. 1992년 바로셀로나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올림픽에서는 두 번째 메달이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 도마에서만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를 획득해 역대 여자 선수 중 한 종목 최다 메달 기록을 갖고 있다.
비록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조 선수로서는 많은 서른세 살이란 나이에도 여전히 선수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들이 있었기에 더욱 뛰어난 체조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 방에 놀러갔다가 노래 한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래를 틀어주면서 가사를 한번 귀담아서 잘 들어보라고 당부했지요. 저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서 가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세요.
“죽이지. 가사가 정말로 끝내주지 않니?”
그런데 저는 솔직히 가사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었고,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께서는 약간 오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도한 표현까지 쓰면서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칭찬하고 있는 신부님께 “그 노래 형편없는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동조를 했지요.
“와~~ 정말로 좋은 노래네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노래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사실 ** 신부님 알지? 그 신부님 방에 가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인데 정말로 좋더라고. 그래서 음반을 사서 이렇게 들어보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선배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신부님은 많은 후배신부들이 존경하는 신부님으로 선배 신부님께서도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지요. 이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다보니 신부님께서 듣는 노래도 듣기 좋은 것이고,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듣다보니 그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저도 그 신부님을 연상하면서 들으니 그 노래가 좋아지더군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나 역시도 좋아지지요. 심지어 그 사람의 단점과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장점과 긍정적으로 바꿔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고백한다면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 좋아야 할 텐데, 과연 그런가요? 주님께 대한 갖은 불평과 불만들. 이 모습이 과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조금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극단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 소홀히 여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든 것보다도 먼저 즉,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었지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주님의 활동에 대한 불평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은 이제 그만~~
공부를 하는 까닭(‘좋은 생각’ 중에서)
자로가 하루는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힘든 공부를 해야 하나요?”
공자가 대답했다. “공부는 태평할 때 군인이 칼을 가는 것과 같다. 태평할 때 칼을 갈아 두지 않으면 갑자기 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당할 수 없다. 공부도 앞으로 닥칠 세상살이에 미리 슬기롭게 대처하자는 것이다.”
공자는 말을 이었다. “공부는 농부가 농사철이 닥치기 전에 우물을 파고 둑을 쌓고 농기구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한가한 겨울철에 우물을 파 놓으면 가물어도 논밭에 물을 대고 짐승도 먹일 수 있다. 또 강가에 둑을 튼튼히 쌓으면 장마가 닥쳐도 걱정이 없다. 농기구를 미리 준비하면 봄에 삽과 괭이로 논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호미로 김을 매고 낫으로 곡식을 거두어 큰 풍작을 맞을 수 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어릴 때 기회를 놓치면 돌이키기 어렵다.”
흔히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부모는 많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부모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처럼 공부란 앞으로 살날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우리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본질이다. 공자는 “소년은 늙기는 쉽지만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한 치의 시간도 가벼이 하지 말라. 연못가 봄풀의 꿈이 깨기 전에 뜰 앞 오동잎이 가을을 알린다.”라고 말하며 어릴 적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 공자의 가르침을 마음속애 새겨 주는 것이 어떨까?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 성공은 세상의 것에 기준을 두고 있지요. 돈을 많이 버는 회사의 CEO나 부자, 세상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대통령, 과학자, 예술가, 연예인 등등이 될 때 성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이루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삭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어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의 기준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 경쟁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저 사람을 누르고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성공, 이런 성공을 해서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세상의 경쟁과 다툼이 아닌, 사랑과 일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일치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마을에 두 강아지가 있었지요. 이 두 강아지 중의 한 마리가 마을 안에 천 개의 거울이 있는 집에 호기심에 들어갔습니다. 들어서자 천 마리의 강아지가 자신을 보고 반기는 것입니다. 이 강아지는 너무나 신 나서 “정말로 멋진 집이구나. 앞으로 자주 와야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자기 친구 강아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강아지 역시 그 천개의 거울이 있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천 마리의 강아지들이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것입니다. 그는 얼른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생각했지요.
“우와! 정말 무서운 곳이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누구에게는 가장 멋진 곳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장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다른 곳일까요? 아닙니다. 똑같은 곳이지만,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곳이 될 수도, 또 가장 무서운 곳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에 갇혀 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고, 반대로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그래서 사랑하며 산다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가지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세상의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해야지만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강조하듯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 주님을 무조건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한 삶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받는 자로 만드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무라카미 하루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
어떤 책에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 모두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똑같은 상황에서, 감옥은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감사할 일들을 계속해서 찾습니다. 하루라는 소중한 시간을 주심에, 또한 하루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심에... 그러다보니 감옥과 달리 행복을 쉽게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시 하나의 감옥을 만들 수도 있고 수도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불평불만 속에 산다면 반드시 나가야 할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기뻐한다면 수도원에서 행복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골탕 먹으라고 보낸 감옥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행복하라고 보낸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곳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한 학생이 교리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죽는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그거야 몇 분이면 되겠지 뭐...”하고 선생님께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천당 가는 준비를 하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도 몇 분이면 되겠지.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잠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러자 그 학생은 “그렇다면 괜찮겠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해요.
“선생님. 저는 이제부터 즐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 믿을래요.”
그리고는 교리수업을 받는 그 자리를 뜨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은 학생을 불러 앉히고는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한 마디만 물어볼게. 너는 네가 언제 죽을 지 알고 있니?”
“그야 모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야. 천당 가는 준비는 사실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내가 언제 죽을 지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런데도 지금부터 놀겠다고?”
그렇지요? 분명히 천당을 가는데 있어서는 약간의 준비만 있어도 될 듯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언제 천당으로 가느냐는 것이지요. 그 누구도 그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준비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시간을 스스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직도 멀었겠지?’하면서 그 준비를 계속 뒤로 미루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사는 것, 자기 편한 데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이기적으로만 살아가는 것,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이 세상의 물질을 섬기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를 뒤로만 미루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아직 그 때를 모르고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나 아쉬워하실까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서 당신을 찾아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었는지요? 혹시 아직도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이 세상 일에만 집중함으로써 주님을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바로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것이며,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성찰을 30분 이상 합시다.
서로 가슴을 줘라(이정하,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중에서)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태를 보다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을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랑이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