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111) -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작가 ; 오스카 와일도(1854-1900)
초판 발행 ; 1891
“세상에 도덕적인 책도, 비도덕적인 책도 없다. 잘 쓴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이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와일드의 유일한 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잡지에 연재되자 부도덕하고,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아다. 서문에 실린 위의 말은 와일드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도를 넘는 쾌락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악의 위험에 대한 경고로서, 매우 도덕적인 소설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실제의 삶은 향락적이고, 방종의 길을 걷는다. 자신이 이중적인 삶을 신랄하게 반영하였다. 결과로 자신이 붊명예와 수치 속으로 빠져들 것을 예언하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 유미주의를 지향했으며 작품들의 성향도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살로메> 등이 그러하며 그가 창작한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외에도 시, 희곡도 썼다. 형식과 구조를 중요시하며 특유의 위트있고 날카롭게 비꼬는 언어유희와 비유, 그리고 모순과 쾌락으로 점철된 인생 자체가 그의 매력이다
(줄거리)
도리언은 해리에게서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골고루 많이 즐기란 말을 듣고는 그말을 따라서 행동하기에 이르고, 점차 타락하기 시작한다. 한편 바실은 순수한 도리언을 자신의 작품에 그의 얼굴을 담는다. 하지만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는 자신 대신에 초상화가 대신 늙는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가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가 대신 변해 가기 시작하는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도리언 그레이라는 청년이 자신의 초상화에 의해 영원한 젊음을 갖게 되고, 미와 쾌락을 추구하다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당시 유행하던 유미주의적 예술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데, 책 뒤의 해설에서도 지적하듯 고도의 유미주의를 주제로 하는 소설이란 느낌이다.
헨리 워튼경은(친구들에게는 해리라고 불린다) 쾌락주의자이며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어느 날 해리는 그의 친한 친구인 화가 바실 홀워드에게서 그의 예술 작품의 모델이 된 도리언 그레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청년을 만나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의 모델이 되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고, 바질의 화실에서 바질의 친구인 헨리 경을 만난다. 헨리 경의 염세적, 쾌락주의적 세계관에 매료된다. 도리언 그레이는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선 '자신은 늙고 추해질 텐데 이 초상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하고 슬픔에 휩싸인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영원하길 바라는 충동에 '나의 젊음이 영원히 계속되고, 늙고 추해지는 건 이 초상이 되도록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외친다. 도리언은 해리에게서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골고루 많이 즐기란 말을 듣고는 그말을 따라서 행동하기에 이르고, 점차 타락하기 시작한다. 도리언 그레이가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가 대신 변해 가기 시작하였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에게 모진 말을 퍼붓고 집에 돌아오자 초상화가 추하고 사악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초상을 숨기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만, 다음날 연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슬픔을 느끼기는 커녕 자신과는 동떨어진 비현실 속의 비극 같다고 느낀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생의 미와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젊음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고, 헨리 경의 철학을 추종하여 쾌락을 즐기며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타락시킨다. 이러한 도리언의 모습을 쾌락주의자인 헨리 경은 '그는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하였다'라며 만족스럽게 지켜보지만, 헨리와 달리 현실을 초월한 추상적이고 지고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바질은 도리언의 변모를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도리언은 현실의 미와 쾌락을 추구하던 자신과 대립되는 바질을 싫어하며 피한다, 시간이 지나 자신과 초상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에게 참회를 종용하는 바질을 순간적인 증오로 살해하고 만다.
결말부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타락을 실체화하는 초상을 보며 괴로워하다 '과거를 죽이고 자유로워지리라'는 생각으로 초상을 찢으려 하지만,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간 초상화와 쭈글쭈글한 노인의 시체였다.
일체의 도덕 관념을 초월하여 아름다움과 쾌락만 추구하던 도리언 그레이가 결국엔 자신이 깔보던 도덕적 고뇌에 의해 무너진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버린 양심을 상징하던 초상을 찢어 버리려다 도리어 자신이 죽는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과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도덕과 양심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도리언은 나름 작은 선행(솔까말 선행이라고 하기도 힘든 자기도취적 행동)을 하고선 초상이 아름답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기를 기대하고 초상을 보지만, 초상은 오히려 음흉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통해 양심을 이미 버린 도리언 그레이에게 있어서 선행이란 단지 허영심, 호기심, 위선에서 나온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선행은 선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이라 느껴진다.
(독자의 감상문)
읽으면서 전에 감상을 썼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레스타와 도리언 그레이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영원한 젊음을 누리면서 나름의 철학에 따라 미와 쾌락을 추구하고, 그러다 종막에는 후회와 회한으로 무너지는 모습이라든가... 다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뱀파이어들은 살기 위해서 악을 행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미와 쾌락을 옹호하는 반면,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의지로 도덕과 양심을 버리고 젊음과 쾌락을 택했다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결말부의 레스타에겐 동정이 느껴지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경우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 초중반엔 헨리 경 등 등장인물들이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허세를 벌이는 장면이 많아서 좀 지루한 면이 있다. 중후반에 들어서 도리언 그레이의 파멸이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꽤 속도감이 붙지만... 초중반의 장광설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당시 예술 사조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할 듯하다.
첫댓글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일즈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1900년 11월 30일)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소설가, 시인, 단편 작가이자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날카롭고 약삭빠른 재치로 유명하며, 런던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가장 성공한 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진 유명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와일드는 퀸즈베리 사건이라는 유명한 재판으로 인해 극적인 몰락을 겪게 되고, “막중한 풍기문란”으로 감옥에 수감된다. 학자인 H. 몽고메리 하이드는 이 용어가 영국 법정에서 “비역죄”(Buggery Act 1533)에까지 이르지 않은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평생 돌아가지 못했으며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뇌수막염에 걸려 사망했다.
와일드는 더블린의 웨스트랜드 로 21가에서 앵글로계 아일랜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경은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안과와 비과 외과의사이며, 고고학과 민속에 대한 책을 썼다. 또한 그는 박애주의자로, 트리니티 칼리지 뒤에 위치한, 링컨 플레이스 내, 도시 빈민을 위한 무료 진료소로 유명하였다. 그는 현재, 애들레이드 도로에 위치한 더블린 안과 비과 의사의 선구자였다. 그의 어머니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는 성공적인 작가이며, "스페란차'로 유명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1855년 6월 와일드 가는 그당시 유행하던 거주 지역인 1번 에리온 스퀘어로 이사하였다. 와일드의 어머니는 토요일마다 정기적인 오후 살롱을 열었으며, 그 초대객에는 세리던 르 파누, 사무엘 레버, 조지 페트리, 아이삭 버트, 사무엘 퍼거슨 등이 있다. 오스카는 9살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페르마냐, 에이스킬렌에 있는 포토라 왕립 학교에 1864년에서 1871년까지 재학하였으며, 여름 기간 동안 그의 가족과 함께 시골의 웩스포드의 워터포드와 메이요에 있는 윌리엄 경의 가족집에서 지냈다. 와일드의 형제들은 어린 조지 무어와 함께 놀곤 하였다.
포르타를 졸업한 후, 와일드는 1871년부터 1874년까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1874년부터 1878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태만하기로 유명했으나 고전학에서는 발군의 성적을 나타냈다. 1882년에 미국으로 강연여행을 떠나 희곡을 쓰고 이것이 뉴욕에서 상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몇 가지 소설이나 시를 쓰고 또는 비극도 썼으나 와일드의 재능이 발휘된 것은 경묘한 희극의 분야, 즉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시시한 여자>(1893), <이상적(理想的) 남편>(1895) 등으로, 그 정점을 차지하는 것이 <성실하다는 것의 중요성>(1895)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와일드는 왕정복고기의 콩그리프가 이룬 희극 작법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극 <살로메>는 영국에서 상연이 금지되었으며 1894년에 사라 베르나르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1895년에 와일드는 동성애 사건으로 2년간의 노동 금고형 처분을 받았다. 그 후 파리에 나왔으나 건강을 해치고 경제적으로도 파탄내고 뇌수막염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외과의사, 어머니는 작가였다. 9살때까지 가정교육만 받았고 1864년 포토라 왕립학교에 진학, 187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74년까지는 더블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평소 성격이 아주 게으른 것으로 유명했지만 반면에 고전학 성적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쥔 잘나가던 작가도 '퀸즈베리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오스카 와일드는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도 둘이 있었지만, 동성애자이기도 했다.[3]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 라이오넬 존슨[4]의 소개로 퀸즈베리 후작의 막내아들인 알프레드 더글라스 경(일명 보지(Bosie))를 만나게 된다.
잘 나가던 작가와 철 없는 귀족 대학생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더글라스는 오스카에게 거리의 소년을 돈 주고 사는 일종의 매춘을 소개하기도 했다. 문제는 다혈질에 경박한 알프레드 더글러스는 둘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다녔고, 게다가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과 사이가 안 좋았던 알프레드는 오스카 와일드와의 연애를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단쯤으로 여긴 듯 했다.[5]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아들과 아들 애인의 이러한 행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펄펄 뛰었고,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때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 와일드를 수많은 소년들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했고 오스카 와일드 역시 명예훼손죄로 퀸즈베리 후작을 고소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리하게 재판을 이끌어 나갔지만, 자신의 자만심으로 인해 불리하게 만들고 만다. 검사가 오스카에게 더글라스의 어린 하인에게 키스한 적 있냐고 묻자 오스카는 거들먹거리며 그 소년은 너무나 못생겼기에 키스할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 답변을 듣고 왜 외모를 언급했는지 추궁하자 오스카는 궁색한 변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리의 소년 중 하나가 오스카 와일드에게
오스카 와일드는 2년동안 형무소에서 중노동을 해야했는데, 명예는 물론 파산으로 부까지 잃었다. 게다가 형무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다.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련만, 아내 콘스탄체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안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6]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 라난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오스카가 더글라스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며, 오스카는 전 애인이자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에게 부탁해 한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편지는 더글라스에게 전달해주길 요청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더글라스에게 사본편지를 전달했으며,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라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 라는 제목을 붙이게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알프레드 더글라스에 대한 원망과 반성, 참회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레딩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이때 알프레드도 같이 갔으나 이미 깨진 사랑은 되돌리기 어려운 법. 결국 알프레드는 다시 영국으로 왔으나 이쪽 역시 인생이 순탄치 못했다. 결혼한 아내도 나중에 아들과 함께 알프레드를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 역시 1964년에 죽을 때까지 분열 정동정신병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등 이쪽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오스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파리에서 살다가 1900년에 귀에 병이 재발하게 되고, 한 달 뒤 목적이 알려지지 않은 수술을 받게 된다.(아마도 귀에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수술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고, 결국 세균에 감염되어 뇌수막염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인 콘스탄체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고 한다.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는데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 "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큰 아들인 시릴 홀랜드는 1차 대전 참전하여 전사.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프랑스 땅에 묻혔다.[7] 작은 아들인 비비안 홀랜드는 1, 2차 대전에서 각각 포병, BBC 민간 통역가로 활약하였고 그의 외동아들이자 오스카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증손자가 옥스포드대에서 수학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썼던 방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백괴사전에서는 오스카 와일드를 백괴사전의 시조라고 칭한다. 사실 이는 언사이클로피디아 계열 사이트 공통. 하여튼 언사이클로피디아의 시조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무심한 듯 '시크한 면'에서 비롯한 듯. 근데 백괴사전 쪽은 아무래도 미국식 유머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오스카 와일드의 비중은 적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