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꽃 피는 봄날 송광사에서 노닐다.
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금산사나 선운사 또는 내소사와 실상사에 가려 그윽히 숨어있는 절 송광사는 전주에서 진안 가는 길 옆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 아래에 있다.
신라 경문왕 7년 도의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고 그 뒤 폐허가 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 송광사의 내력을 기록한「송광사 개창비」에는 이러한 내용의 쓰여져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짓고자 하였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정성을 다해 오연하니 뭇사람들이 그림자 좆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가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 하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절이 창건된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보조국사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이 아니라 고려 때의 지눌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광해군 14년 운전, 승령, 덕림 등이 전주에 사는 이극용의 희사로 절을 중창하고 벽암대사를 초청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어 시주를 하였으므로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큰 공사를 벌려서 대가람을 이룩하였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선종 대가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종 대가람으로 시호를 받다
그 당시 대웅전은 부여 무량사의 대웅전처럼 이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남쪽 3km, 만수교 앞 나들이라는 곳에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절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남아있는 절 건물은 철종 8년에 지어진 대웅전(보물 제 1243호)과 천왕문(보물 제 1255호), 십자각이라고 부르고 있는 송광사 종루(보물 제1244호)와 더불어 명부전, 응진전, 약사전, 관음전, 칠성각, 금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매표소 앞에 차를 세우자 눈앞에 나타나는 일주문은 통도사나 가까운 곳 변산에 개암사의 육중한 기둥들과는 달리 가냘프기 짝이 없어 “지붕이 하늘에 떠있는 듯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금강문을 넘어서면 사천왕문에 이른다. 흙으로 빚어 만든 이 사천왕상은 4m가 넘는 거대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광목천왕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순치 기축 육년 칠월 일필”이라는 먹 글씨가 남아있어 1649년에 이 사천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송광사 사천왕상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던 소조사천왕상의 기준을 얻게 된 것이다.
소설가 최명희는 대하소설 <혼불>에서 이 송광사 사천왕을 도환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삼십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면 넓 다란 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대웅전이 우람한 실체를 드러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인 이 대웅전은 절이 창건될 당시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대웅전 천장 가운데 3칸은 우물반차를 치고 나머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운궁 형 보개를 씌웠고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게, 거북, 자라 등 여러 물고기 등이 장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가는 자라와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치는 거북이 보인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빗천장에 천장화로 그려진 비천도일 것이고 그것을 전문가들은 송광사가 민중예술을 끌어안았던 사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벽화들은 천상계에 있으며 춤사위와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의 민화풍의 불화로 대다수의 많은 사찰들이 주악비천도 1,2점이 그려져 있지만 이처럼 11점이 대웅전 천장에 그려져 있는 경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 아래의 세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가운데에 석가세존과 동쪽에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석가세존이 5.5m이고 협시불은 5.2m의 거대한 불상들이다. 나라 안에 소조불로 가장 큰 이 불상은 워낙 크기 때문에 법당 안이 오히려 협소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무량사처럼 2층 법당이 있으면 몰라도 1층 법당으로는 무리지 않을까 싶은 이 불상은 나라 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고 또 하나 이 불상이 도난을 입는 와중에서 복장유물이 수습이 되었으며 그때 세 불상에서 똑같은 내용의「불상조성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이 불상을 만드는 공력으로 주상 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을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억불숭유정책 속에서 대다수의 절들의 선비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시절 병자호란으로 인해 붙잡혀간 사도세자와 봉림대군을 속히 돌아오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제작된 이 불상은 세월 속에 한 역할을 담당했었고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이 땅에 민중들의 맺힌 한과 기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웅전의 수미단 위에는 전패 또는 원패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 세 개가 서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 패로서 세 개 모두 2m가 넘고 구름 속에서 화염을 날리며 꿈틀거리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조각된 앞면은 매우 절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송광사 종루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십자각인데 십자각이라는 이름은 건물의 평면구성이 十자 모양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2개의 기둥을 사용하며 2층 누각 형태를 갖춘 건물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42)에 주조된 범종과 법고 목어 등이 있다.
이제는 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온갖 풍경들은 마음의 상자 안에 차곡차곡 쟁여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돌아갈 나의 집은 고개 너머 저쪽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결 사이로 <혼불>의 한 구절이 들리는 듯 했다.
“서러운 세상의 애끓는 애愛, 오(惡). 욕(欲)과 희로애락喜怒哀樂 굽이굽이 몸부림치며 우는 하소연, 지그시 듣고 계시는 것인가.
내 다 들어 주마. 내 다 들어 주마. 피 토하고 우는 사연, 내 다 들어주리니
2021년 4월 21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