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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탄진 장날....갑천 따라 신탄진 철교까지...... 걸으며 생각하며....내 취미생활입니다. 이 노래도 제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저는 글보다 음악을 더 좋아합니다. 어느 포크음악 모임에서 음악을 듣다 기고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글쓰기 시초였습니다..... 제가 애타게 찾는 그 시절, 책으로 내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한국문화출판 등등에 응모해서 선택이 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실력이 없어서겠지요...그간 2번 혜택을 보기는 했는데 그게 전부죠.... 묘안이 없을까요...
내년 환갑기념으로 책을 만들어 글을 사랑하는 안양사람들이라면 다 나누어 주고싶은데 말이죠..며칠전은 같은 동네에 살던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만난지 50년도 더 지났는데 말이죠... 아버지와 같이 연구소에 다녔던 분인데 건국대 수의학교수를 하시다가 퇴직을 하시고 다시 안양에 와 산다고 ...그 아들이 나보다 3살 어린데 아주대 의대 교수하다가 지금은 분당에서 개업을 했다고 하는군요... 아마 황우는 알텐데.... 그 분 성함이 김순재씨고 아들이 어릴 적에는 철수였는데 이름을 한수로 바꿨지요.....너무 반가웠습니다..... 퇴직하려면 3년하고 4개월 남았는데 10년전만해도 다시 안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자식들이 다 여기서 태어나 성장해서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네요...마누라도 철저히 반대고.....안양에 사는 엄마만 대찬성.
하기야 늙어서 돌아가 봐야 예전 안양도 아니고 ...여기서 지지고 볶으며 산 지란지교같은 사람들, 정때문에 그들과 헤어지는 것 또한 쉽지 않겠지요....내가 안양을 여전히 그리듯 내 글을 현숙이도 숙희도 옥이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여전히 그 생각을 합니다. 한 때 내 마음에 머문 여인이었고 모두 안양사람들이니.....아무튼 책을 낼 묘안이 없을까... 오늘도 고민중입니다... 그럼 지금 바로 걷겠습니다.... 3과 8일 들어가는 날은 신탄진 장날인데 번데기와 묵을 먹을 좋은 기회지요...아니 그 시절 새시장을 걷는 기분이 꼭 들기 때문이죠.
라면 이야기
몇 해 전 스위스 융프라우라는 설산에 오른 적이 있다. 눈 덮인 산꼭대기 관광을 마치자 일시에 추위가 기습을 했다. 추위를 녹여줄 그 무엇 하며 전망대 휴게실을 쳐다보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우리의 김치라면이 판매장 한가운데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들 상술이 놀라웠지만 마음 한편 우리의 라면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나는 해외여행을 갈 때 라면 한 두 봉지는 꼭 챙겨 간다. 입맛이 텁텁할 때 원기를 북돋우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그쯤의 라면은 보양식이다.
라면은 그 시절을 떠올리는 여릿한 향수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번성하고 발전하는 현재의 간식이며 가난한 누구에게는 주식으로서 미래의 희망이기도 한 알짜배기 영양식이다. 배고팠던 60년대, 5원짜리 '꿀꿀이죽’ 대신 사먹던 국민 구호식품 라면이 출시 50년 만에 일본을 제치고 전 세계로 진출한 글로벌 한류식품이 됐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제2의 주식’이라던 라면은 이제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식품으로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
지난해 한국 라면은 1억 달러가 넘는 사상 최대의 수출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국 라면은 일본 라면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중국이 가장 아끼는 한국 명품 셋을 꼽자면 "신라면, 제주도, 엑소라고 한다. 그 밖에도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광동제약 비타500, LG생활건강 죽염 치약 등 18종이 높은 지지를 얻어 생필품과 건강상품 등에서 한국제품 신뢰도가 높았다.
내구재 부문에서는 성주디앤디의 MCM, 쿠쿠전자의 쿠쿠 밥솥,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 LG전자 휘센에어컨 등 10종이 선정됐다. 서비스 부문에서는 가수 EXO, 제주특별자치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커피전문점 카페베네 등 14종이 선정돼 한류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중 가격은 제일 싸지만 그들의 입맛을 사로 잡고 있는 신라면, 중국13억 인구가 모두 찾는다면 ...그런 한국 라면의 성공 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나라에 라면을 소개한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삼양식품의 전중윤회장이다.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마주한 라면, 식량대용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방을 하루에 최소한 70g은 먹어야 하는데 5g도 못 먹는 상황. 기아로부터 국민을 구하겠다고 5.16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대통령과 그 측근들. 김종필씨는 전중윤회장의 라면사업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당시 쌀은 귀하고 먹을 것은 부족하던 터에 밀가루는 그나마 충분해서 수제비와 칼국수같은 음식이 국민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고 있었다.
전중윤회장은 김종필씨에게 라면이 가진 장점을 설득했다고 회고록에서 말한다. 밀가루 200g으로는 얻을 수 없는 500칼로리와 18그램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을 라면 200g 한봉지로 가능하다는 말에 김종필씨는 라면 시제품을 먹어보고 두말 않고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문제는 정부에 10만 달러라는 외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설마 그 정도일까 싶은 단돈 10만 불이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가까스로 미 농무부가 지원해 주기로 한 10만달러 가운데 5만 달러를 전중윤 회장에게 불하해줬다.
하지만 난리가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실을 알고 대노했다. 그 까짓 튀김국수 만드는 기계에 국가가 가진 달러를 쓴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도 라면에 대한 이야기와 시식을 해보고는 적극 라면사업을 지원하기로 결심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전중윤회장이 일본에 건너가 라면기계를 사오는 과정에서 묘조식품 오쿠이 회장을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일본 기업의 입장에서 자신의 라면기술을 한국에 전수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묘조식품 오쿠이 회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잘나가던 보험회사 사장까지 하던 전중윤 회장은 일본에서 라면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견습공으로 일했다. 돌아오던 날 수프의 비법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는데 오쿠이 회장은 봉투에 그 비법을 적어 전회장에게 넘겨 주었다. 1963년, 한국에서 라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금융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아무도 해보지 않은 라면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중국 고사에 식족평천(食足平天), 먹는 게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는 말이 있어. 중국 제왕들도 그렇게 말했고,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어느 나라 국민이나 마찬가지예요. 먹는 게 제일이야. 내가 동방생명을 만들고 나중에 제일생명도 운영하다가 넘겼지만, 생명보험이라는 게 뭐요? 1년에 사람이 얼마나 태어나고 몇 살 때 얼마나 죽고, 또 평균 수령이 어떻게 된다 하는 숫자가 나와 그것을 보험료 산출 근거로 삼는데,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1960년대가 돼도 식량이 모자라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어요. 그게 우리나라 실정이었어”(전중윤 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당시 우리는 쌀이 부족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농지들이 유실되고 수리시설이 부족해서 홍수나 가뭄이 흉작을 불러 오곤 했다. 반면 미국으로부터 원조식량으로 들어온 밀가루는 시중에 풍족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밀가루로 칼국수나 수제비등을 해 먹었다. 문제는 밀가루 반죽만을 삶아서 끓여 먹는 것으로는 한 끼에 필요한 열량과 지방, 단백질을 얻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전중윤 회장은 같은 밀가루 국수 200g에 비해 기름에 튀긴 라면 한 봉지 200g이 훨씬 열량이 높고 단백질과 지방도 많이 섭취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꿀꿀이죽은 한 그릇에 5원이었고 짜장면은 40-50원이었다. 전중윤 회장은 라면의 가격을 10원으로 정했다. 서민들로서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계산해 보니 라면 한 개에 5전이 남는 장사였다. 그렇다면 무조건 많이 팔아야만 했다. 박리다매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1963년 처음 삼양라면이 출시되었을 때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라면이라는 식품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꼬불꼬불한 모양 때문에 섬유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딱딱함 때문에 플라스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중윤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거의 1년간 곳곳에서 무료시식을 열었다. 식품은 먹어봐야 맛을 안다. 결국 삼양라면은 이듬해부터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먹어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삼양라면은 빠르게 시장에 진출했다.
출시 3년 만인 1966년 11월까지 삼양라면의 누적 판매량은 240만 봉지를 넘어섰다. 1969년에는 월 1,500만 봉지가 팔리는 등 명실공이 대한민국 대표 먹거리로 우뚝 섰다. 당시 급증하는 출하량을 맞추기 위해 매년 제조설비 증설에 나섰다. 1969년 엔 국내 업계 최초로 베트남 시장에 라면을 수출하면서 '라면 강국 코리아’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라면에 대한 인기가 늘고 수요가 늘어서 사실 가격을 올리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처음 가격 10원을 고수했다. 그러자 다른 라면 사업자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시장 점유율 90%대에 달하는 선도기업의 제품이 10원인데 다른 신제품들이 그 가격보다 많이 받아서는 팔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변화가 왔다. 1971년, 롯데는 삼양라면의 닭고기 수프와 차별하기 위해 '소고기라면’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했고 대히트를 쳤다. 롯데는 단숨에 삼양라면이 차지하던 95%대의 시장점유율에서 무려 25%를 얻어냈다. 이러한 결과는 롯데가 삼양라면의 저가경쟁을 제품과 기술로 극복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삼양라면과 같은 가격에서 만족할 만한 다른 라면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이러한 삼양라면의 초기 성공의 역사는 그러나 1993년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우지(牛脂)라고 불리는, 라면을 튀기는 쇠기름이 '식용이 아니라 공업용 기름’이라는 검찰의 수사로 인해 삼양라면과 전중윤회장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이 사건은 1989년 11월3일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삼양식품을 비롯한 식품 관련 5개사 대표 등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과 언론은 2등급 우지(쇠기름)를 '가공해야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공업용’이라고 몰아부쳤다.2등급 우지는 이미 일본에서도 라면에 쓰였고 마아가린에도 쓰였던 식용이었다. 삼양라면은 1993년 우지파동으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법정관리로까지 가야했다. 1000여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전중윤회장은 자신의 사재와 공장들을 팔아 부도를 막아야 했다. 40%를 넘던 시장 점유율은 5%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6년을 끈 소송에서 삼양라면은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미 삼양라면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떨어졌다. 전중윤 회장은 80세가 넘었던 시절,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가장 섭섭했던 것은 제 아들이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 제가 화를 낸다는 루머였습니다. 저는 매일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합니다.”세계라면협회(WINA)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연평균 라면 섭취량은 74.1개로 전 세계 국가 중 1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라면 마니아들인 것이다. 한국의 라면은 세계 8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나라별로 한국의 라면을 먹는 방법이 특화돼 있다는 점이다. 롯데식품이 파악한 각국의 라면요리의 형태를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도시락 라면에 마요네즈를 풀어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홍콩인들은 한국 라면에 치즈를 넣어 먹는 것을 즐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매운 컵라면을 즐긴다는 보고도 있다.
한국에서 라면은 일본보다 4년 늦게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일본라면보다 비싸게 팔려나가고 있다. 나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절대 신임하지 않지만 일본의 기업가 정신은 높이 산다. 오쿠이와 전중윤이 있었기에 오늘의 라면역사가 있다. 그 원천은 국민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려는 순수한 마음의 열정에서 비롯했다. 단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인류 행복에 이바지 한다는 열정과 사명감이 우선 했다.나는 그들의 기업가 정신에 무한한 감사와 감동 그리고 경의를 표한다.
흔한 라면, 그 뿌리에 그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두는 것은 윤택한 마음의 거울로서도 향기로운 삶을 영위하는 한 방편으로서도 소중한 가치라고 여긴다. 사실 내가 느낌이 훈훈해지는 라면과 친해진 것은 60년대를 지나고 70년대 중반쯤이다. 라면 맛이 어때서가 아니라 어릴 적에는 돈이 없었기에 엄마가 끓여주는 수제비만을 즐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몰래 라면을 사서 동생하고 생 것으로 먹고는 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비로소 시중에서 라면이 활개를 친 것은 가스 불로 누구나 독립적으로 식사를 할 처지가 될 무렵부터가 아닐까. 기억들 하는지 모르겠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임춘애'육상선수를. 이제는 우리들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일상뿐 아니라 비상식량으로도 그만인 라면, 특히 춥고 썰렁한 날엔 따뜻한 라면이 그야말로 제격이다. 라면만으론 부족타 하는 사람들에겐 부대찌게나 매운탕에 라면을 곁들이면 또한 일품이 아닌가. 동자개나 메기에 곁들인 라면 맛, 이때는 라면이 오히려 갑질을 하는 격이다.
젊을 적 공부 한답시고 밤늦게 버텨 앉았을 때 출출하면 후딱 먹어치운 게 바로 그 소고기 라면 아닌가. 외국 출장 갈 때 꼭 끼워 가지고 가 느끼하고 맛이 정말 으스스 할 때 입맛을 바꾸는 회복제로 지금도 쓰고 있다. 일상의 라면인지라 맛의 비법은 또한 제각기 다르다. 팔팔 끓는 물에 라면을 하나 넣고 스프도 넣고, 물은 약간 적게 잡아 짭짤하도록 하여 계란도 김치도 야채 스프도 그 무엇도 더 이상은 넣지 말고 단지 라면 건데기와 짭짤한 국물만 살짝 익히는 정도로... 이는 내가 즐기는 방법으로 양이 적어 좋다.
숙취가 심한 경우 콩나물을 듬뿍 넣고 '시원한' 라면을 끓여 먹는다. 고추 가루도 듬뿍 넣고 끓이면 국물이 속을 아주 편안하게 해준다. 라면 하나만으로 조금 부족할 것 같은 시간엔 감자 하나와, 양파 반개를 썰어 놓고, 양을 늘린다. 어떤 경우는 라면을 한 개 반 푹 삶아서 국물은 하나도 안 먹고 면발만을 밥 먹듯 김치 얹어서 먹는 것도 괜찮다. 라면 가격이 저렴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경우 물을 잘못 맞춰서 수프의 짭짤함만으론 간이 안 맞춰질 경우 냉장고에 남아있는 밑반찬을 총 동원해도 괜찮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짠 반찬일수록 아주 잘게 썰어 넣어서 입맛의 거부감과 반찬 수프간의 괴리감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밀가루 맛 바로 가신 꼬들꼬들 만을 즐기시든 다 끓인 라면에 참기름을 한 방울 튕기든 치즐 살짝 올려놓든 연탄불에 양은 냄비로 해 먹어야 직성이 풀리든 맘 내키는 대로다.
때로는 라면을 중심으로 한 전골을 끓여 먹는 것도 권할 만하다. 추운 겨울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음식이다. 야채와 소고기도 준비하여 간장도 조금 부어가며 끓인다. 물론 소주도 한 잔 해야 한다. 다 익힌 면발에 따로 장만한 하이라이스 수프나 카레수프를 얹어 먹어도 웬만한 외식꺼리보다 맛이 기가 막히고 경제적이다. 겨울철 부산 오뎅도 구미를 당긴다. 그런데 다시마 국물도 멸치도 없다 한다면 어찌 국물 맛을 금방 내겠는가.
‘생생면 ’이라 하는 국물에 첨벙첨벙 오뎅을 집어넣고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주면 이 맛도 제 맛에서 빠지지 않는다. 가난하고 볼품 적은 라면으로 취급 받는 현실이지만 여전히 나는 라면을 사랑한다. 그 시절 독서실 옆 간식 집에 들러 파 듬성듬성 썰어 넣은 풋내 나는 라면을 먹으면서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늘인 눈이 큰 여학생 눈빛을 살피던 그 산뜻함이 여전히 라면의 면발 속에 들어 있다.
가난과 대적을 했던 10원으로서 가치 있던 라면, 무공훈장감이 되고도 남는 식사대용의 라면은 이제는 서민뿐 아니라 맛의 풍미로 당당하게 국민 모두를 상대로 제 몫을 하는 음식이다. 군대 간 아들 녀석이 휴가를 나오면 제일 먼저 찾는 음식이 짜장면 그리고 라면이었다. 라면은 당당한 한국의 토종으로서 오늘도 만방에 열심히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를 빛내고 있음이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은 안도 모모후쿠라는 대만계 일본 기업가에 의해 발명됐다. 1910년 대만 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2차대전 종전 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1948년 닛신식품을 설립했다. 이렇게 해서 58년 그가 개발한 것이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 라면’이다.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그렇게 탄생한 일본의 라면은 서민들에게 행복을 안겨줬다. 우리와 인연이 깊은 묘조식품의 오쿠이회장 역시 라면에 대한 철학이 있었던 사람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