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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의 의미
롬 6:1-5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1-5 /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침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를 베푸실 수 있게 하려고 계속 죄를 저질러야 하겠습니까? 2-3)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도 살게 해주셨는데 계속 죄를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침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었을 때 이미 우리를 지배하던 죄의 세력은 부서져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산산이 부서진 것입니다. 4) 죄를 사랑하던 우리는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서 그분과 더불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그분의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된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고 장차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에 대하여 구체적인 교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세례를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1-3) 1절의 말씀은 로마서 5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2).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단정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고 합니다(3). 이는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성경이 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고, 함께 죽은 것입니다. 바울 다른 서신에서 이를 더욱 쉽게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0:1-2).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상황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아울러 전에 속한 공동체와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세상과의 단절, 죄와의 단절이 세례였습니다.
연합한 자(4-5) 세례는 세상과의 단절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죽음과 부활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전가되었다는 확신입니다. 이를 골로새서에서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고 믿음을 강조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반드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세례와 믿음이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 없이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현대교회의 상황입니다.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세례와 믿음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이 세례를 받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 가운데 사는 큰 목적을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4).
적용: 첫 세례의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때와 지금 당신의 신앙을 비교해 볼 때 당신은 세상과 단절됨을 지속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여전히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깡패 조직에 몸담고 있다가 절교를 선언하고 빠져나오면 그 조직이 그를 그냥 놔둘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조직에 몸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기대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할 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은혜를 더 하려고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선언해야 합니다. 용서의 은혜에 머물지 않고 은혜위의 은혜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는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6:2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죄에 대하여...
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6:4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6: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 )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 )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 설 교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로마서 6:1-11 / 이규현 목사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죄’입니다. 왜 성경 중에 로마서가 중요하고, 로마서에서는 끊임없이 ‘죄’를 이야기합니까? 그런데 ‘죄’라는 말과 함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인류를 황폐하게 하고 저주 아래 있게 한 죄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모든 영역에서 우리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죄 문제를 온전하게 들여다보고 해결하기 전에는 삶의 모든 문제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 근본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문제 해결이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아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방책은 은혜입니다.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질문을 하고 2절은 대답을 하는데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이 말씀은 로마서 5장 20절의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게 하려고 내가 더 많은 죄를 지을 수도 있지 않냐는 말입니다. 과거에 타락했다가 예수를 믿은 분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의 폭이 큽니다. 그런 분의 간증을 들으면 큰 감동이 되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 인생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막 살아볼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이런 생각이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은혜를 부각시키려고 죄를 짓겠는가 하고 질문하자, 2절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은혜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지만,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이지,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죄를 지어봐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확인하기 위해서 죄를 짓겠다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라는 미명 아래 덮어버리려는 잘못된 것입니다. ‘죄를 좀 더 짓자, 그래야 은혜를 더 체험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은혜로 주어진 신자의 자유를 오해한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 이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를 방종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들은 쉽게 죄를 짓고 쉽게 회개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 콧물 빼면서 회개하는 것 같은데 사는 것에는 변화가 없으니 회개를 왜 하느냐고 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이런 경향이 상당합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죄를 덮어주시니 우리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죄를 지으려고 하고, 죄에 대해 느슨한 마음이 내면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오인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것은 죄를 너무 가볍고,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방종의 생활도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쉽게 회개하고 태연하게 죄를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와서 몇 번 훌쩍이면 끝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급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죄를 반복해서 지으며 살아가는 것은 첫째, 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관점이 굉장히 희미해져서 죄를 실수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죄와 실수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실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심각성을 잘 모르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너무 느슨한 것입니다. “다 그렇게 사는데 뭘” “직분자도, 목사님도 저런데”라며 죄를 합리화합니다.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성경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비교 대상도 항상 만만한 사람이라서 그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둘째, 회개에 대한 오해입니다. 온전한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기준도 희미해졌을 뿐 아니라 온전한 회개도 없어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태도 없이는 사실, 회개도 잘 따라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기도를 하지만 “미안해요 하나님.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기도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당당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셔야지요. 용서해주시는 분인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회개가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회개의 핵심은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입니다. ‘회’는 ‘뉘우치다’의 의미이고 ‘개’는 ‘바꾸다’인데, 요즘에는 ‘회’는 있는데 ‘개’가 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뉘우침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돌이키는 의지적인 변화가 삶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벗는 날까지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다면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 없습니다. 비슷해 보여도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은 다릅니다. 이전에 지은 죄와 지금 지은 죄는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는 굉장히 발달되어 있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진정한 회개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적으로도 이런 분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 교회에는 깊은 회개가 있었고, 성경 어디에서나 보아도 진정한 회개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서도 ‘회개 없는 구원이 가능한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죄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주목할 할 단어가 ‘죄에 거하겠느냐’입니다. 한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속에 계속 머물러 있겠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죄의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2절도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느냐, 반복해서 그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죄의 몸이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죄에 대하여 모든 것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죄 안에 살아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라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주관하는 나라를 떠났다면 어떻게 그곳에 있는 옛집에서 여전히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과거와 현재의 분명한 선을 긋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노숙하며 돼지가 먹는 것을 먹고 밑바닥까지 갔던 그가 다시 아버지의 아들의 신분을 획득했습니다. 새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고 아버지의 아들로 환대를 받았는데 며칠 있다가 다시 그 더러운 옷을 뒤집어쓰고 예전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떠난다면 과연 진정한 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3절의 세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의 세례는 우리가 흔히 받는 물세례보다는 성령세례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세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의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나는 분리될 수 없는 한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그 사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죽으실 때 나도 동일하게 죽었고 그분이 사셨을 때 나도 다시 살아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3절 이후부터 ‘합하여’와 ‘함께’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합한다’는 말은 ‘함께 지어져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아담과 연합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매 순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려주는 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한번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지금 그분이 내 안에서 함께 동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 이제 그리스도와 합한 자의 삶이 어떤가를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긴다고 했는데 이 ‘여긴다’는 말은 우리의 신분의 변화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더 이상 육체로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사신 예수가 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여!’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 삶을 이끄는 주체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주도해가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이고, 신이고,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가 되어 내 마음대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내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시원하게 못 짓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여기에 옛 사람은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자아중심적 삶입니다. 죄의 종 노릇 하는 것은 죄의 힘에 끌려서 노예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죄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이 너무 커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몸이 죽고,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 죄의 영향력이 발휘될 수 없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가 무엇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은혜가 와서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너무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죄의 권세를 능히 이기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죄의 권세보다 훨씬 더 큽니다. 죄와 마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때가 다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속수무책이었지만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이 은혜의 힘, 그 생명의 능력이 왕 노릇하여 우리에게 죄가 힘을 못쓰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아래 살면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죄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가 우리 마음을 당기면 당겼고, 끌려가 즐겼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죄의 권세는 이제 힘이 없습니다. 죄가 대단해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너덜너덜한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졌을 때 조금 끌려갈 뿐이지 은혜의 힘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사람은 죄 속에 빠져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수준이 아니고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살아갈 은혜가 임했습니다. 분명한 변화는 이제 죄를 의도적으로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를 짓는데 거리낌이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거리낌도 없고 가슴이 답답하지도 않고 마음이 개운하십니까? 신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죄에 거하겠느냐?” 한두 번 실수할 수 있고, 죄에 넘어질 수 있지만, 죄에 머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죽게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약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인 다윗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왕이었고 아내도 많았으니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시편 32편을 보면 “주의 손이 주야를 나를 누르시오니”, “내 뼈가 썩는 것 같고,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름 같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짓눌려 반쯤 죽은 것 같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밤잠을 못 자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 한 것입니다. 신자는 죄짓고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 눈을 가려서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게 하고, 탐닉하면 망할 때까지 가게 합니다. 완전히 죄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역사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어서 죄를 마음대로 못 짓게 할 뿐 아니라, 그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 앞으로 나오도록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곁길로 빠졌다가도 멀리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곁길로 안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아와 회복되지만, 돌아오는 길이 험해서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죄는 순간적이고 짜릿한 쾌감은 있지만 긴 고통이 있습니다. 죄가 판단력을 잃게 해서 영원할 것 같은 것에 속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잠시 교회에 왔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사는 것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힘입니다. 교회에 오면 죄, 심판, 저주 이야기만 하고, 죄를 지적하는 것이 듣기 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지적하면 회개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는 죄를 이야기하는 목사님에게 총을 쏘았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 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있는 상태가 편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힘에 끌려 죄를 지었다고 해도 더 강력한 은혜의 힘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면 못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대로 살려고 애를 써도 안 됩니다. 더 이상 이전의 죄의 향수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어떤 모양이라도 죄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죄가 멋져 보였지만 이제는 죄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 것인가를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성령이 찾아오신 후에는 그 관계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된 상태 속에는 어떤 경우에도 죄의 문제로 우리의 구원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되기 때문에 반드시 죄 가운데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령 속에 죄에 대한 각성과 후회, 안타까움, 불안, 두려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밀려와서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죄의 통치는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는 세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운명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할 일은 이제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살아갈 때입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까? 세상에 무엇이 남은 것 같아 돌아가려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에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문제 때문에 몸부림 칠 필요가 없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때 그 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돌려 하나님을 위해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고, 그것에 매달리다 보면 죄의 세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매진할 때 죄는 우리의 안중에 없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여러분의 생애에 작동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값 – 분명한 경제성
어느 삼부자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죽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한참 아래 낭떠러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셋이 함께 뛰어 내렸는데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고 큰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었고, 작은 아들은 덜 떨어진 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덜떨어졌다는 말은 덜 성숙하고 중심이 불분명하고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덜 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생각도 태도도 분명치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 받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말씀의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 인생이 영적인생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오늘부터 내 인생의 소속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귀속된다는 대내외적인 선언입니다. 이미 세례받은 분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세례를 받았으면 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내가 신앙인으로서 좀 불분명했던 부분, 내 위치가 덜 떨어진 사람처럼 불분명한 내 신앙 자질이 꼭지가 똑 떨어지듯 분명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체성 혼란시대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대는 확실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더 불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 하고 질문을 던지면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외국에 일찍 이민을 간 청소년들은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외모는 동양인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생각이나 문화는 모두 외국인입니다. 외국에서 오랜시간 동안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청소년이 조금 성장하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나는 외국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하게 “너는 한국인이다. 그러니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한국말과 생각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면 아이가 성장해서도 정체성의 혼란이 적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는 한국말을 하면 영어 발음이 나빠진다고 해서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면 성장해서도 한국말을 전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떤 현상에 내 몰리게 될까요. 그 아이가 자기 모습과 같은 한국 아이들 속으로 찾아갔는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언어가 같은 미국 아이들 속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말은 통하는데 외모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性)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 몸은 분명 남자인데 내 속에서는 자꾸 여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겉은 여자인데 내 속에서는 남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라는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혼란 속에서 힘들어 하다가 결단해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나 내 신앙고백이 불분명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똑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중심있는 고백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자주 빠지고 어쩌다가 교회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자신있게 고백하기가 어려질 것입니다. 이 불분명함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할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은혜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시대는 지나가고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은혜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신앙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복음에 대해서 모호함을 느끼고 혼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나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부름을 받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주의자들은 아직도 율법이 유효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인가? 율법인가?” 하고 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강조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는 명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5장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흔들리게 되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도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정체성이 분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무엇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줄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가운데 착한 행실이 열매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내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확신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
그래서 사도바울은 3절에서 이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백성이다” 라는 점을 세상에 과시하는 방법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고 다시 사는 뜻입니다. 세례란 내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완전히 잠기게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침례입니다. 침례는 내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물에 내가 완전히 잠기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이전의 옛사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로 다시 나오는 것은 죽었던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나는 새 사람이고 예수와 연합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입니다.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의미는 “내가 이제부터 예수께 완전히 잠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께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잠긴다는 말이고, 내가 예수의 부활에 완전히 잠긴다는 말입니다. 이 의식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 안에 완전히 잠겨서 나는 사라지고 예수의 체질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녹슨 쇠붙이를 용광로 속에 넣으면 쇠붙이가 완전히 녹아서 새로 정화된 쇳물이 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께 완전히 잠기게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모두 다 빼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을 간직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나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8절에서 연속으로 “예수와 함께”, “합하여”, “연합하여” 라는 말들을 8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와 함께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례는 예수와 연합하고 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내가 예수안에 깊숙이 빠져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례받은 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똑같이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례받음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내가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내 인생이 변화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날마다 살아나도록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세례는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 편에 소속됩니다.” 즉, “나는 이제부터 내 영혼, 내 인생, 내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위탁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거듭남”(1-15)이라고 표현합니다.
세례 후의 삶
“내가 오늘 세례를 받는다” 라는 말은 나의 삶이 오늘부터 달라진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또 다른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면 몸은 한국인이지만 속은 미국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고민이 길어지게 됩니다. 그 때는 내가 미국인이 되든지 한국인이 되든지 빨리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분명하게 표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그리스도인인 상태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이 길어지게 되고 모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때는 빨리 결정할수록 좋습니다. 그 결정이 세례받는 일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나는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결단이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세례는 이미 전에 내 마음이 결단하고 다짐되었다는 표시이고 선언입니다. 고로 내가 오늘 세례받음은 내 인생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로서 안정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은혜를 입게 되고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는 은혜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비로서 성령께서 내 삶을 인도하고 도우시며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몇일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마지막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정말 행복할까, 아닐까?’ 하는 고민입니다. 그 고민은 결혼식 전날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그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혼식과 동시에 내 소속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때가 갈등이 가장 심할 때입니다. 이 집을 살까 말까 할 때가 갈등이 심할 때입니다. 그때 빨리 결단을 내리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된다” 라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고백이고 선포이고 내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자녀로 또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은 “나는 오늘부터 분명히 하나님께 소속한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 보십시요. 덜 떨어진 사람처럼 어중간하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값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삼이 왜 귀하고 비쌉니까? 그것은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삼은 스스로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삼입니다. 그러면 인삼은 심은지 얼마 후에 캐야 최고의 효능을 가진 안삼입니까. 인삼은 심은지 6년째 되었을 때 캐야 합니다. 그 인삼을 6년근이라고 해서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다. 그렇다면 산삼은 언제 캐야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까. 산삼은 보는 즉시 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값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다른 사람이 금방 캐 갑니다. 그만큼 스스로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값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산삼의 정체성은 이 탁월한 효능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값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값을 유지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중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삶
로마서 6:1-14 / 피영민 목사
서 론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던 일입니다. 부활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특별히 기념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날이지만, 사실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찬송해야 하는 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이 원래 안식일인 토요일이었는데, 일요일로 바뀐 이유는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예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성도들의 삶과 어떤 실제적인 연관이 있는지 로마서 6장에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로마서 6장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당연히 죄 용서함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 말을 조금만 바꾸면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많은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 죄를 많이 짓지 않은 사람은 죄 용서함을 조금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은혜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이신득의의 진리를 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받으려면 더 많은 죄를 지어야겠구나!” 이처럼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을 통해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더 많은 은혜를 받으려고 더 많은 죄를 짓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By no means!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Ⅱ.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먼저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일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진리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서 6장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2장에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라는 문구는 한 마디로 ‘연합’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진리가 많은 성도들에게 쉽게 잊혀지는 교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머레이라는 목사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고 말했고, 17세기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 굿윈이라는 목사님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두 거인의 비유’로 빗대어 설명하며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거인’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실 때 두 거인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이는 두 명의 대표자를 일컫습니다. 한 거인은 아담이고, 또 다른 한 거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을 대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대하시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허리에 걸려 있든지 그리스도의 허리에 걸려 있든지, 모두 고리로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허리에 고리로 연결이 되어 태어납니다. 이 말은 아담이 가는 곳에 우리도 같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 했을 때, 우리도 그의 허리에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허리에 걸려 있던 모든 인간이 범죄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죄를 아담 개인의 죄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정죄를 받아 영생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우리도 영생을 잃어버렸고 고통과 사망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자연 상태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무엇일까요? 구원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아담의 허리에 걸려 있는 고리를 풀어 예수 그리스도의 허리에 걸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허리에 고리를 걸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리도 거기 같이 있었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도,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도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고리에 걸려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또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고리에 걸려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파송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르실 때 우리도 모두 치른 것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의도 우리의 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예수님의 허리에 걸린 사람은 절대로 아담의 허리에 다시 걸릴 수 없습니다. 지옥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 예수님 허리의 고리에 연결된 사람은 다시 풀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얻었다가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상실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입니다. 성경은 이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내주하신다고 하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기 위해 더 많은 죄를 범하는 어리석은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창기와 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악랄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가 아내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런데 한 능력 있는 신성한 존재가 그 여자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준 남자인 현재 남편을 떠나 그 옛날 자기를 때려죽인 악랄한 전 남편에게 찾아가 다시 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더 지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왜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Ⅲ.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많은 면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우선 로마서 6장은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적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연합되어 같이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영적인 부활을 하고, 육신적인 부활은 나중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도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육신적인 부활입니다. 영적인 부활을 먼저 했고, 육신적인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죽었고, 또 예수님과 합하여 부활했습니다.
침례교회가 물을 찍어 바르는 약식 세례를 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고집하는 이유는 침례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살아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침례식을 한 번 행하기 위해서는 탕에 물을 열다섯 시간 이상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온도를 맞춰야 합니다. 수고롭고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침례를 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고, 그와 함께 다시 산 자가 된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식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성도는 침례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 분이실까요? 원래 하늘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한 몸에 신성이 인성을 다 지니신 독특한 분으로 사셨습니다. 인간이면서도 하나님이신 분이셨습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고,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내신 분이십니다.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독특하신 분, 신성과 인성을 한 분에 가지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죄의 지배영역 가운데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지배영역이고, 세상은 죄의 지배영역입니다. 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죄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죄의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죄의 3대 영역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죄인들의 미움을 받으셨고, 온갖 고초를 겪으셨고, 피조물에게 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10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죄의 지배영역에서 벗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셨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영역으로 돌아가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실 일이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수난 당하실 일도 없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해코지해봐야 자기만 괴로운 일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 분을 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죄로부터 시험을 당하지 않으시고, 죗값을 치르실 일도 없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죽으셨기 때문에 한 번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장사된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내용이 6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성도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옛 사람이 죽은 이상 누구도 송사할 수 없습니다. 죄가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귀는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죄가 다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불륜이나 마약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상이 우리를 유혹해도 불륜을 저지르던 옛 사람, 마약에 중독되었던 옛 사람, 우상숭배 하던 옛 사람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죽으셨고,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9절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기록되어 있고, 10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부활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을 몸, 영원하고 완전성을 가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영역으로 돌아가셨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된 성도 역시 하나님의 지배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인데 전자는 영적인 부활을 가리키고, 후자는 육신적인 부활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아직 죽을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적인 부활은 미래의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들은 영적인 부활(중생)을 경험하게 되고, 영적인 새 생명을 가진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개과천선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조금 나은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를 바꾼다는 차원의 의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고 영생을 가진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4절 후반에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부활을 얻었습니다. 영적인 부활은 중생, 거듭남이라고도 합니다. 영적인 부활을 한 성도는 장차 미래에 일어날 육신적인 부활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5절 후반에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래시제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었다는 의미가 육신적인 부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영적인 부활과 육신적인 부활이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살아나리라는 것은 영적인 부활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그 어떤 설교를 들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경 한 구절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생명의 부활이 바로 육신적인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예수님이 부르시면 성도들은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은 꼭 한 번 죽어야 합니다. 나방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 육신도 한 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껍데기 붙잡고 살지 마시고, 영생의 몸,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고대하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허리에 걸려 있어서 육신의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활을 한 사람만이 육신의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활을 해야 둘째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활을 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영한 지옥 불에 떨어지는 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 론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부활을 한 이후, 육신적인 부활을 기다리는 사이에 우리는 죽을 몸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몸은 원래 예전에 죄짓던 그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에는 죄의 성품, 옛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이 되었지만, 옛 성품이 남아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성품을 가진 새 사람이 되었어도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몸 안에 여전히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죄의 유혹을 이기고 물리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옛 성품을 죽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두 가지 중요한 영역입니다. ‘죄 죽이기’(Mortification)와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Vivification)입니다. 죄가 부르면 옛 사람 죽었다고 선포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아멘하고 순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죄를 이기는 비결
로마서 6:1-14 / 김만식 목사
오늘은 죄의 권세를 이기고 성령의 인도아래 승리하는 비결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2,15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계속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며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죄의 세력을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6,7절에서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고 죄의 지배를 받는 옛 사람이 살아 있으면 계속 죄의 권세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그 옛 사람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겐 죄의 권세도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세력을 파괴시켰다는 뜻입니다. 암을 치료할 때 암세포를 방사선으로 파괴시킵니다. 암세포가 죽으면 암도 함께 소멸됩니다.
죽음은 죄의 세력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살인죄를 짓고 도망다니던 사람도 죽으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납니다. 죄를 진 사람이 죽었으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은 원리로 믿음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도 과거의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말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3절부터 5절에 침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침례를 언급하는 이유 예수 믿는 사람이죄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침례의식은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도 거짓말로 속이면서 계속 죄를 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16절부터 23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본질상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연약하여 실수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곧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누가 봐도 잘못한 것인데도 말재주를 부려 잘못한 게 없다고 우기며 거짓말로 속이고 계속 나쁜 습관 속에 살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런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일 것입니다. 교회 다니며 그런다면 생명 없는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이겠죠.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만든 신앙생활지침을 무시하고 자기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생각해서도 교회를 생각해서도 자기 양심으로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1,2절에서 말하는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인 속에 남아 있는 ‘악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죄악된 성품에 굴복해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인데, 죽음으로 죄의 세력이 파괴되고 다시 살아날 때 주님의 성품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죄악된 성품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고 거듭날 때 그 사람을 악한 성품으로부터 분리시켜주십니다. 분리시켰다는 말은 더 이상 죄의 지배력을 받지 않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악한 성품을 모두 제거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내적 자아 속에는 악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참고, 요일1:8-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거짓말 하는 것)
여기서 중간요약을 하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다음과 같은 3중 장치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장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번 죽음으로써 나에게 왕노릇하던 죄의 지배력이 깨진 것입니다. 둘째 장치는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셋째 장치는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며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악한 성품이 내적 자아에 남아 있더라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삼중장치가 있어서 습관적으로 죄악된 행동 속에 살 수 없게 만듭니다.
6절을 보면, 옛 사람, 죄의 몸, 종노릇 이런 말이 나옵니다. 죄인된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기 전에는 죄에게 종노릇하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인격적으로 성인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마음 속엔 죄의 지배력이 작용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악한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매우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도 있고, 돈에 너무 욕심 있는 사람이 있고, 술에 빠져사는 사람도 있고, 위선자도 있고, 혈기를 부리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가 심한 사람도 있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아무튼 셀 수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은 옛 사람이 죄의 지배력에 휘둘려 종 노릇할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옛 사람’은 단지 시간적으로 옛 것이란 뜻이 아닙니다. 옛의 뜻을 가진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알카이오스’와 ‘팔라이오스’인데, 알카이오스는 시간적으로 옛날 것이라는 뜻이고 팔라이오스는 용도가 쓸모 없게 된 옛 것이라는 뜻인데, ‘옛 사람’에선 팔라이오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옛 사람’의 뜻은 범죄하고 부패하여 하나님께 쓸모 없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의 몸’은 죄의 지배력을 받으며 악한 성품 때문에 계속 죄를 범하며 멸망할 상태에 처한 거듭나기 전의 육신으로 자기 의지가 없는 종처럼 죄의 욕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을 때 이 옛 사람,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 죄의 몸은 이미 멸해졌습니다. 6절의 ‘멸하여’의 헬라어는 καταργηθη인데, ‘카타르게오’는 무기력하게 하다. 쓸모없게 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동력전달 체인이 바퀴와 붙어 있는 체인에서 벗어져 분리되어 힘이 전달되지 않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은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 외에도 믿는 사람의 삶 속에 내주하는 죄의 세력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이 죄를 이기도록 이렇게 만드신 영적 승리의 시스템이 잘 작동하려면 먼저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죄의 세력이 무력해지고 파괴됩니다. 그 다음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몸에 이식된 신적 성품, 즉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성품이 작동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대신 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죄악된 욕망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악한 성품에서 나옵니다. 몸이 죄의 욕망을 따르면 죄를 짓는 불의의 병기가 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의의 병기가 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의 작용원리와 죄를 이기는 비밀을 깨달았습니까? 거듭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학벌과 인품과 상관없이 죄에게 종노릇하며 일생을 보냅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죄의 지배를 받는 옛 사람의 몸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나도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몸을 무력하게 만들어 죄의 지배에서 분리시키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차원에서 보면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 죄를 싫어하고 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심령으로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며 살면 결코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영적 진리를 깨닫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는 질문
로마서 6:1-14 / 김영준 목사
중세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적인 공헌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을 두 종류로 구별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법적인 의로움과 실제적인 어려움, 이 두 종류. 법적인 의로움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 섰을 때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통할 의로움,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원래 이 의로움은 예수님의 의로움인데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음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덧입혀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반대로 실제적인 의로움이란 우리의 실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을 말합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말하기를, 이 두 종류의 의로움은 서로 다른 것이고 사람이 법적인 의로움을 소유할지라도 실제적인 의로움을 결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소위 라틴어로, “유스투스 시물 베가토(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개념입니다. 그 말은 의인이고 동시에 죄인이다, 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위치적으로는, 법적으로는 의인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는 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 하는 것인데 이 말은 일리가 없는 말이 아니에요. 그들이 잘못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그 속에 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갭은 법적인 의로움과 실제적인 의로움 간의 갭이에요. 왜냐하면 법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잘못 본 게 아닙니다. 바로 본 것입니다. 다만 세상이 그 말을 할 때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하여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3면에 제가 인용한 사도행전의 9절처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 “No condemnation for those in Christ Jesus(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말은 우리에게 아무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할 권한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다고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속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은 후에도 왜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느냐?
두 가지 목적이 있어요. 첫째는, 이 진리를 깨닫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고,둘째는 우리 안에 법적인 의로움과 실제적인 의로움 간의 갭을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이라고 아무렇게나 죄를 짓고 살게 되면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식이 망나니처럼 산다고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자식입니다. 미운 자식이죠. 밉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사랑은 하는데 슬픈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철이 나서 부모를 위할 줄도 알고 부모의 말을 따를 때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믿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전에 행하던 악한 일과 죄를 모두 버렸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도 유익하고 하나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이룰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세 가지 방법은 첫째는, 여기라는 것이고, 둘째는, 버리라는 것이고, 셋째는, 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라, 이것은 인식의 변화를 말합니다. 간주하다, 그렇게 생각하다, 생각을 일치시키다, 동의하다, consider,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사도 바울의 특유의 어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한 문장에 단숨에 어려운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문법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 귀중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합니다. 여기에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냐? 언제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의 죽음에 합하고 예수님의 생명에 합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가 느끼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제가 주보 3면에 2가지 개념을 비교해놓은 것을 여러분이 참조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들은 법적이고, 위치적이고, 잠재적이고,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근거를 얻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법적인 것이 실제적인 차원으로 옮겨오고,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차원으로 옮겨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옛 사람이 못 박혀 죽은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살 때 그 때 이루어진 영적인 변화가 현실적인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것은 한국어의 한계요, 언어의 한계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려 함이니. 또 신약 성경에 어떻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죄의 몸은 이미 멸했어요.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려 함이니라, 라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을 말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보장된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보장된 개런티를 말하는 거에요. 그렇게 읽어야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냥 이론, 하나님의 의도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죽었고, 죄의 몸은 멸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마귀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숨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전까지는 마귀의 말을 믿습니다. 나는 아직도 옛 버릇이 남아있어. 나는 아직 변하지 못했어. 왜 이렇게 힘들어. 죄가 나를 주장해. 아, 나는 못 살겠네. 마귀의 말을 곧이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해버릇 해야 됩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기셨다.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이미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여기고 입으로 시인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11절 말씀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간주하다, 그렇게 생각하다. 생각을 일치시키다, 얼마나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진리를 표현하는데 미숙한가를 이런데서 봅니다. 언어의 한계. 언어의 연약함.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것을 표현할 어휘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여기는 법을 배울 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잠재적인 차원에서 현실적인 차원, 위치적인 데에서 실제적인 차원, 보이지 않는 데에서 보이는 차원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할이에요.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고 했어요. 없는 것을 무엇처럼?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지만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더니 죽은 자가 나옵니다. 아직 병자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했더니 일어난 것입니다. 아직 어둡지만 빛이 있어라, 하니까 빛이 있었던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할이에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원리와 우리가 위치적이고 안 보이는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보이는 차원으로 옮기는 것은 같은 원리입니다.
둘째로, 버려야 됩니다.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비결은 버리는 것입니다. 안 쓰는 것, 먼지. 버려야 됩니다. 버림. 12절 말씀에,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에 사역을 순종치 말고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고.“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짓죠. 그러나 죄가 왕노릇 하는 건 아니에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도,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믿기 이전에는 죄가 왕이었어요. 죄가 폭군이었어요. 죄가 명하는대로 쫓아갔어요.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죄가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적인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 죄의 반복, 죄의 생각, 죄의 행태, 이것을 의도적으로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의도와는 별도로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새 생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나빠서가 아니고 습관에 의해서 욕을 한다던가, 습관에 의해서 흉을 본다던가, 습관에 의해서 거친 생각을 한다던가,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습관.
옛날에 조형기 목사님의 책에 사람이 신발끈을 맬 때 오른 신발끈을 먼저 매던 사람이 습관을 바꾸어서 왼쪽 신발을 먼저 매는 습관으로 옮기는데 걸리는 시간이 3주다라는 그런 그 자료를 인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러분, 마귀가 떠나갔을지라도 마귀의 흔적, 마귀가 버리고 간 배설물, 마귀가 심고 간 씨앗, 이런 것을 우리가 제거하기 위하여 거룩함이라던가, 경건이라던가, 성화 과정이라던가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고, 마귀가 떠나갔지만 그냥 떠나간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놓고 갔어요. 배설물을 그냥 놓고 떠나갔어요. 이제 그것을 처리해야 되요. 버려야 되요. 깨끗하게 해야 되요. 흔적을 지워버려야 되요. 그 목소리를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버려야 되요. 그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즐겨 가던 곳에 가지 말고, 즐겨 보던 곳을 보지 말고, 즐겨 먹던 것을 먹지 말고, 즐겨 하던 말을 하지 말고, 뭔가 버리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성령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저는 총기 매니아, 라고도 부를 수도 있는데 남자들이 그렇죠. 총을 좋아하고, 총쏘는 것을 좋아하고, 대한민국에서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죠. 그래서 사격장에 가서 거기 가면 진짜 권총을 쏠 수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한번 사격장에 가서 진짜 총을 쏴봤는데 아마 제가 총잡이가 되면 잘했을 거에요. 그런데 총을 쏘는데 마음 속에 성령님이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느꼈어요. 총을 쏘고 나니까 기분이 안 좋더라구요. 아마 사람을 쐈으면 더 안 좋았을 거에요. 아, 성령이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성령은 사람 죽이는 일, 사람 해치는 일을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느꼈어요. 여러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세 번째는, 드려야 됩니다. 드려야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그냥 여기는 데서 끝나는 관념적인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금지하고 버리는 부정적인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드리고 행하고 실천하는, 여기에 신앙생활의 묘미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그 말은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얘깁니다. 여기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가까이 해 본 후에 인생이 변하는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큰 사고를 당했다던가, 병으로 죽음 가까이 가봤다던가, 그런 사람들이그 경험을 한 다음에 신앙을 갖는다거나, 인생의 목적을 바꾼다거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게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라는 말. 내가 그대로 죽었다면 지옥 갔겠구나, 내가 그대로 죽었다면 얼마나 허무했을까?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으니, 이제 내 삶의 방법을 바꿔야 되겠구나. 그런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맹장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다보니까 세상의 싸우는 일, 다투는 일, 갈등, 이런데 동참하는 것이 참 허무하다, 참 헛되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일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이미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결과로 이 모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완전히 이루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에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에요. 그러기 때문에 지속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손해 에요. 자기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많은 것들이 잠재적이고, 위치적이고, 영적이고, 법적인 차원에만 존재할 뿐, 그것을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누리 못하면서 살기 때문이에요. 어음을 받았다면 그것을 현금으로 바꿔야 되는 것처럼, 선물권이 있다면 그것을 물건으로 바꿔야 되는 것처럼,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다면 그 땅에 들어가 살아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선한 것이 있을지라도, 내가 적극적인 믿음으로 그것이 그냥 위치적이고, 법적인 데만 머무는 게 아니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고, 내 것이고, 지금 누리고, 지금 풍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역할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고
로마서 6:1-11 / 이윤재 목사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은혜안에 사셨습니까? 지난 주 저는 “은혜가 이긴다”. “세상을 이기게 한 힘은 은혜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항상 은혜안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난 월요일, 저의 집사람과 함께 현대백화점 CGV를 갔습니다. 시간이 있어서 잠시 영화를 보러 갔는 데 매표소 여직원이 저를 보며 말합니다. “우대자시죠?” 그러면서 제 이름을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영화보는 데 이름도 쓰나?” 하고 무심코 이름을 썻습니다. 그런데 영화비를 두 사람 합해서 8천원만 받는 것입니다. 8천원씩이니까 반값입니다. “왜 이렇게 영화가 싸지?” 하고 생각하고 표를 받고 영화를 보는 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제가 65세 이상 노인인줄 알고 경로 우대표를 준 것이었습니다. 머리가 희면 가끔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그랬으면 영화본 이후에라도 매표소에 가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데 미쳐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기도하는 데 “야, 네가 노인이냐? 65세도 아니면서 경로우대를 받아? 돈 몇 푼 때문에 양심을 속여?” 내면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달려갔습니다. 갔더니 직원이 바뀌었습니다. 상황을 이야기하고 8천원을 냈더니 직원이 말합니다. “저희들은 매일 정산을 하거든요. 어제 정산이 끝나서 안내셔도 되는데요”. “그래도 받으세요” 하고 제가 돈을 내 밀었더니 직원이 “안 내셔도 되는데. 그러면 이름을 쓰세요” 제가 또 한번 이름을 썻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제가 사장님께 말씀드릴께요”. 제가 얼른 돈을 주고 나오는 데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저를 속인 것이 회개가 되면서 이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제가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목사인 제가 이 정로도 사는 데, 우리가 은혜안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입버릇처럼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안에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자책하는 데 하필 오늘 설교 본문이 롬6장입니다. 롬6:1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1-3장에서 죄를 말한 바울은 3:2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 5장에서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의 축복을 말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 죄와 은혜의 관계를 말합니다. 롬5:20절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는 심판을 가져오지만 죄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결국 죄는 은혜를 가져온다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6장으로 넘어오면 바울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많이 받으려고 계속 죄를 짓겠느냐?”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절, 롬6:2, “그럴 수 없으니라”. 죄가 결국 은혜를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죄를 더 지을 수는 없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2절입니다. 롬6:2, 그럴 수 없으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그 이유를 아주 본질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 말씀은 죄와 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최고의 주제인 죄와 은혜의 문제에 대해 바울은 최고의 신학적 설명으로 복음의 진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 “죽었다”는 말의 문법적 형태는 “부정과거동사”입니다. 이 말은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그것은 다시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고 노력해서 죽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점차 죽을 것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과 기도로 죄와 싸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우리도 모르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2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도 나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장사되었다“. 이미 무덤속에 매장된 것입니다. 8절,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었으면”, 11절에 또 나옵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이미 죽었습니다”. 로마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죽었습니다”.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죽었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죽었습니다”. 딤후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죽었습니다”. 성경에 너무 자주 나오는 이 “우리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고 자주 말할까?
우선 우리는 우리가 죽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한 수도원에서 한 젊은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기도하며 살아온 노인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의 육신이 떠나가기 까지는 너무 자신만만하지 마시오. 형제는 형제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아직 사탄은 죽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사탄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죄를 이겼다든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말은 우리의 경험과 무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는 죽었다” 말할 때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쁜 감정, 연약한 양심, 악한 행실, 그대로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부부싸움했습니다.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 데 성경이 나보고 “너 죽었다” 하니까 “나는 안 죽었는데?”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죽었다”고 할 때 죄를 짓지 않았다거나 죄질 욕망조차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과 무관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손자 하고 이야기하다 깨달았습니다. 세 살먹은 손자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하삐 죽었다”. 그랬더니 손자 피식 웃습니다. “안죽었다”. 그러면서 다음에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삐, 어디 가?” 세살 먹은 아이에게 죽는다는 말은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세살먹은 아이에게 “사람은 죽는다” 하면 그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아이는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 살뿐 아니라 초등학생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람은 죽는다” 하면 감정상, 경험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듣습니까? 설명할 수 없을 때는 따라 하게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따라 해봐. 사람은 죽는다“. 이 말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전혀 감동도, 이해도 안되지만 때가 되면 깨닫습니다. ”언젠가 깨달을 때가 오겠지“ 하고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비울이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너는 죽었다. 너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분명 지금 내가 살아 있고 죄도 짓고 있는 데 ”너는 죽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말이 틀린 말입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언이니까 우리가 할 일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긴다“는 말입니다. 롬6:10-11,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다같이 “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감정상, 경험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되지만 언젠가 이해될 것으로 믿고 그 말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여기라”. “여기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 자체를 없앴다거나 죄의 근원인 사단을 완전정복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죄의 지배,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자체는 우리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일3:9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슴이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가 죄짓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죄질 욕망이나 유혹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는 그대로 있는 데 그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죄의 세력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로 마음이 조금 상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나중에라도 알았으면 즉시 가서 말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살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도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니 제가 한심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예화를 읽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여기 등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은 높고 험한 데 중턱을 넘어 잘 올라갔습니다. 한 2/3은 올라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지가 저기 보이는 데 삐끗하다가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조금만 올라가면 되먼 데 그것도 못 올라가고 넘어졌으니“. 그때 절망하지 말고 잠시 냉정을 되찾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산아래서 넘어진 것과 산 중턱에서 넘어진 것이 같으냐 하는 것입니다. 산아래서 넘어진 것은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3쯤 올라가다 넘어졌으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올라가는 데 최선을 다했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니까 다시 일어나 올라가면 됩니다. 믿는 사람도 죄짓고 실수하지만 그 죄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한번 더 죄짓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자주 넘어집니다. 또 실수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그때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저 산밑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아닙니까?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실수도 죄도 유혹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롬6:6 현대어 번역입니다.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절입니다. 롬6: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감옥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무기수가 됩니다. 무기수는 감옥에서 평생 사는 것입니다. 무기수로 감옥에 있어도 죄를 생각, 미운 생각, 죄의 유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육신은 살아 있지만 자아는 이미 죽었습니다. 여전히 죄속에 살지만 죄가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죄의 욕구가 있지만 높은 담과 간수의 통제 때문에 실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6절 볼까요?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8절입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공통적인 말이 ”함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우리가”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씀도 어렵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2천년전에 이스라엘에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때 살지 않았고 더구나 이스라엘에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인 큰 갭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유명한 갈2:20도 어떻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여기도 ”함께“가 나옵니다. 여기서 ”함께“는 무엇입니까? 산 시간과 공간이 다른 데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살고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함께”는 시간과 공간이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연결을 말합니다. 2천년 신학에서 이 “연합”의 교리만큼 신비한 교리도 없습니다. 한편 이 “연합”의 교리만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교리도 없습니다. 매우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연리지라는 나무가 있습니다(1. 그림). 뿌리가 다른 데 하나가 된 나무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뿌리가 다른데 어떻게 한 나무가 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을 “연리지 사랑”이라고 합니다. “연합”의 신비입니다. 고염나무를 아십니까? (2. 그림). 고염나무를 잘라 감나무를 접붙이면 감이 열립니다. 참 신기합니다, 뿌리는 고염나무인데 열매는 감입니다. “연합”의 신비입니다. 바다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수많은 강들의 연합입니다. 우리 나라 서해는 우리 나라 대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이 흘러 들어 갑니다. 중국의 황허강, 양자강도 흘러갑니다. 그래서 큰 바다가 되지만 일단 바다가 되면 서해의 어느 부분이 한강이고 어느 부분이 양자강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 그 속에 강이 있지만 강을 보이지 않고 바다만 보입니다(3. 그림) “연합”의 신비입니다. 자연은 말없이 “연합”의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자연만 “연합”을 가르칩니까? 이번에 세월호가 인양되었습니다. 3년동안 모든 국민들의 가슴을 울렸던 세월호, 여전히 부모들은 마르지 않은 눈물로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3년동안 하루 한시도 빠짐없이 부모들은 세월호와 함께 했습니다. 자식들은 죽었지만 죽은 자식들과 부모들은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세월호와 함께 있었습니다. “연합”입니다.
성경은 이 “연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양이나 소를 잡았습니다. 매년 유월절마다 대제사장이 두 마리의 양을 잡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는 백성을 위하여 잡습니다. 먼저 자기를 위하여 한 마리를 잡을 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여호아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때 양은 대제사장의 죄를 뒤집어 씁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양이 죽는 순간 대제사장의 죄도 함께 죽습니다. 또 한 마리를 잡습니다. 또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여호아여, 백성들의 모든 죄를 이 양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양을 멀리 광야로 내쫓습니다. 양이 멀리 사라지는 순간, 백성들의 죄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사라졌습니다. 분명 죄는 사람이 지었는 데 양이 죽었습니다. 양의 죽음이 사람의 죄를 대신했습니다.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양이 죽을 때 죄인이 용서받았습니다. 양이 죽을 때 죄인도 함께 죽고 양의 피흘릴 때 죄인도 함께 살았습니다. “연합”의 원리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바라바가 나옵니다. 바라바는 강도이며 살인자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예수님과 함께 백성앞에 섰습니다. 유월절에 두 사람을 세워놓고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이 둘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바라바요, 바라바는 놓고 예수는 죽이시요”.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으로 바라바가 살았습니다. 본래 바라바가 졌어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짊으로서 예수님은 죽고 바라바는 살았습니다.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함께”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고 오른쪽 강도는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 강도에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때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강도가 살아났습니다. 교환되었습니다. 강도의 운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맞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함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믿음과 “예수님이 나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고 믿음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죽었다고 믿음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이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이 믿음이 성화의 시작입니다. 1910년 8월 29일, 이완용이 일본과 한일합방문서에 조인할 때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1945. 8.15, 일본이 항복할 때 우리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이완용이때 우리가 안살았어도 우리는 그때 나라를 잃었고, 1945년에 내가 없었어도 우리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완용의 매국행위에 아무리 반대해도 우리가 한국사람이면 그때 나라를 잃었습니다. 1945년 우리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도 우리가 한국사람인 한 우리는 그때 해방을 얻었습니다. “연합”입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 연합을 말합니다. 고전15:22,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과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대표한 존재입니다. 아담은 우리와 죄로 연합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와 용서로 연합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시대에 안 살았어도 아담이 범죄할 때 ”함께“ 범죄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시대 안 살았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순간, 우리도 살아 났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할 때 우리도 범죄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우리도 못박혔습니다. ”함께 범죄하고,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신비로운 연합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
“연합”의 원리는 나쁜 것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도 함께 합니다. 8절을 보세요.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두 가지의 ”함께“ 가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 신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즘 박대통령, 최순실 사건을 말하면서 검찰이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썻습니다. 적어도 주머니에 있어서는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퍼뜩 ”아, 우리도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구나“ 생각했습니다. 공동체란 말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인 기형아가 태어납니다. 둘인지 하나인지 알아보려면 머리를 ”땅“ 때려서 두 몸이 동시에 ”아야“하면 한 몸이고, 하나는 아픈데 다른 하나는 안 아프다고 하면 두 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운명을 같이 하니 나쁜 일, 좋은 일, 다 같이 겪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때 우리는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의지하여 사셨으니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며 삽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했으니 우리도 예수님 재림할 때 휴거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다스리시니 우리도 주와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으니 우리도 고난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이기고 최후 승리했으니 우리도 최후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몸이요 운명공동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산 것을 교회에서 고백하는 예식이 세례입니다. 이스라엘 요단강 세례터입니다(영상). 여기에 세계 각처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크게 둘로 되어 있습니다. 물로 들어가고 물에서 나오고. 물로 들어갈 때 옷을 벗습니다. 물에서 나올 때 옷을 입습니다. 세례는 단지 물속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들어갈 때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물에서 나올 때 “나는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 내가 죽고 물에서 나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롬6:10의 재현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골2:12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러분은 우리와 예수님이 “함께”의 운명을 짊어진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까?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두고 두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선수 11명이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을 차례로 이겼습니다. 11명 선수가 이길 때 대한민국 전체가 환호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게 질 때 대한민국 전체가 탄식했습니다. 11명 선수 따로 있고 대한민국 국민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1명이 곧 대한민국이었습니다. 11명이 이길 때 대한민국이 함께 이기고 11명이 질 때 대한민국이 함께 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요 운명공동체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사실 우리에게 아무 고민이나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고난당합니까? 예수님이 고난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합니다. 우리가 고난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승리합니다. 조금도 힘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5절이 중요합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이것은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우리의 현재 신분입니다. “너희도 그의 부활한 것처럼 부활하리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저는 이번주에 성경 읽다가 히12:15을 읽고 은혜받았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여기서 쓴 뿌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독초입니다. 왜 우리 마음에 독초가 있습니까? 은혜없는 종교는 독초를 만들어 냅니다. 은혜없이 믿으면 믿기는 믿는 데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쓴 뿌리가 있고 어떻게 없앱니까? 15절 앞 부분,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잘 살고 사업 잘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롬6:8이 최종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혜, 그 은혜가 있어야 우리속에 쓴 뿌리, 독초 사라집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의 값 – 분명한 정체성
롬 6장 1~5, 11절 / 이정익목사
어느 삼부자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죽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한참 아래 낭떠러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셋이 함께 뛰어 내렸는데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고 큰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었고, 작은 아들은 덜 떨어진 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덜떨어졌다는 말은 덜 성숙하고 중심이 불분명하고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덜 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생각도 태도도 분명치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 받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말씀의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 인생이 영적인생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오늘부터 내 인생의 소속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귀속된다는 대내외적인 선언입니다. 이미 세례받은 분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세례를 받았으면 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내가 신앙인으로서 좀 불분명했던 부분, 내 위치가 덜 떨어진 사람처럼 불분명한 내 신앙 자질이 꼭지가 똑 떨어지듯 분명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체성 혼란시대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대는 확실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더 불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 하고 질문을 던지면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외국에 일찍 이민을 간 청소년들은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외모는 동양인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생각이나 문화는 모두 외국인입니다. 외국에서 오랜시간 동안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청소년이 조금 성장하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나는 외국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하게 “너는 한국인이다. 그러니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한국말과 생각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면 아이가 성장해서도 정체성의 혼란이 적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는 한국말을 하면 영어 발음이 나빠진다고 해서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면 성장해서도 한국말을 전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떤 현상에 내 몰리게 될까요. 그 아이가 자기 모습과 같은 한국 아이들 속으로 찾아갔는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언어가 같은 미국 아이들 속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말은 통하는데 외모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性)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 몸은 분명 남자인데 내 속에서는 자꾸 여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겉은 여자인데 내 속에서는 남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라는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혼란 속에서 힘들어 하다가 결단해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나 내 신앙고백이 불분명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똑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중심있는 고백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자주 빠지고 어쩌다가 교회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자신있게 고백하기가 어려질 것입니다. 이 불분명함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할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은혜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시대는 지나가고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은혜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신앙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복음에 대해서 모호함을 느끼고 혼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나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부름을 받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주의자들은 아직도 율법이 유효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인가? 율법인가?” 하고 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강조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는 명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5장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흔들리게 되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도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정체성이 분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무엇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줄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가운데 착한 행실이 열매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내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확신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
그래서 사도바울은 3절에서 이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백성이다” 라는 점을 세상에 과시하는 방법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고 다시 사는 뜻입니다. 세례란 내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완전히 잠기게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침례입니다. 침례는 내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물에 내가 완전히 잠기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이전의 옛사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로 다시 나오는 것은 죽었던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나는 새 사람이고 예수와 연합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입니다.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의미는 “내가 이제부터 예수께 완전히 잠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께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잠긴다는 말이고, 내가 예수의 부활에 완전히 잠긴다는 말입니다. 이 의식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 안에 완전히 잠겨서 나는 사라지고 예수의 체질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녹슨 쇠붙이를 용광로 속에 넣으면 쇠붙이가 완전히 녹아서 새로 정화된 쇳물이 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께 완전히 잠기게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모두 다 빼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을 간직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나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8절에서 연속으로 “예수와 함께”, “합하여”, “연합하여” 라는 말들을 8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와 함께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례는 예수와 연합하고 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내가 예수안에 깊숙이 빠져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례받은 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똑같이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례받음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내가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내 인생이 변화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날마다 살아나도록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세례는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 편에 소속됩니다.” 즉, “나는 이제부터 내 영혼, 내 인생, 내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위탁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거듭남”(1-15)이라고 표현합니다.
세례 후의 삶
“내가 오늘 세례를 받는다” 라는 말은 나의 삶이 오늘부터 달라진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또 다른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면 몸은 한국인이지만 속은 미국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고민이 길어지게 됩니다. 그 때는 내가 미국인이 되든지 한국인이 되든지 빨리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분명하게 표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그리스도인인 상태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이 길어지게 되고 모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때는 빨리 결정할수록 좋습니다. 그 결정이 세례받는 일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나는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결단이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세례는 이미 전에 내 마음이 결단하고 다짐되었다는 표시이고 선언입니다. 고로 내가 오늘 세례받음은 내 인생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로서 안정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은혜를 입게 되고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는 은혜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비로서 성령께서 내 삶을 인도하고 도우시며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몇일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마지막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정말 행복할까, 아닐까?’ 하는 고민입니다. 그 고민은 결혼식 전날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그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혼식과 동시에 내 소속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때가 갈등이 가장 심할 때입니다. 이 집을 살까 말까 할 때가 갈등이 심할 때입니다. 그때 빨리 결단을 내리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된다” 라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고백이고 선포이고 내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자녀로 또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은 “나는 오늘부터 분명히 하나님께 소속한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 보십시요. 덜 떨어진 사람처럼 어중간하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값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삼이 왜 귀하고 비쌉니까? 그것은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삼은 스스로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삼입니다. 그러면 인삼은 심은지 얼마 후에 캐야 최고의 효능을 가진 안삼입니까. 인삼은 심은지 6년째 되었을 때 캐야 합니다. 그 인삼을 6년근이라고 해서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다. 그렇다면 산삼은 언제 캐야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까. 산삼은 보는 즉시 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값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다른 사람이 금방 캐 갑니다. 그만큼 스스로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값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산삼의 정체성은 이 탁월한 효능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값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값을 유지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중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성화된 성도가 되려면
롬 6장 1~5절 / 송기성목사
오늘은 루터의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정신이 많이 흐려졌습니다. 개혁된 교회야말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간과하지 말고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그 거룩한 기능과 사명을 상실한 채 도퇴 되고 말 것입니다.
학자들은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중의 로마서는 바로 로마서 6~8장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6~8장은 로마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성도의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의 성화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성도는 그 몸이 성령의 전으로서 성화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화되지 않은 성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되지 않은 성도가 성화되는 것이 개혁되지 않는 교회가 개혁되는 길이며 내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한 한국 교회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라면서 복음의 은혜를 강조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곡해하여 죄를 짓는 것이 도리어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는 것이라고 왜곡하는 자들도 생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Certainly not!)라며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근거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속죄의 죽으심으로써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된 성도가 되는 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지 않는 사람은 다만 명목상의 교인일 뿐이지 성화된 성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지 않는 명목상의 세례 교인이 많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성화된 성도가 적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주일을 맞은 한국 교회와 우리가 개혁해야 할 개혁의 과제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그의 제자가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 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어.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라고 생각하셔서 나를 선택해 주신거야.”
성경학자 토마스 버나드 박사는 “죄의식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에 정비례 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죄의식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습니다. 그리고 성화된 성도로서 더욱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로마서 6:6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는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성화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답게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음으로써 성화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세례의 의미와 복음의 은혜를 곡해하는 로마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런 권능으로(by glorious power of the Father)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된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 않는 사람 곧 의에 대하여 살지 않는 사람은 다만 명목상의 교인일 뿐이지 성화된 성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살지 않는 명목상의 세례 교인이 많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성도가 적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주일을 맞은 한국 교회와 우리가 개혁해야 할 개혁의 과제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 1902~1974) 대위의 이야기입니다. 1927년 그는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뉴욕을 떠나 파리까지 장장 5815km나 되는 먼 거리를 무착륙으로 비행하였습니다. 고도계와 계기판도 없는 단발기로 오직 자신의 감각만으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 루이스’(Spirit of St. Louis)라는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33시간 32분 동안 비행하여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후에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린드버그씨,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89년 전에 5만 달라는 대단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찰스 린드버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크리스천입니다.”
이 말은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말을 들은 당시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큰 감동을 받고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후원금으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트루먼드 목사는 “가장 불행해질 수 있는 조건은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세상, 하나님과 재물,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두 마음을 품고 오락가락 하는 교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찾으시는 그리스도인은 반쪽자리 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성도를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로마서 6:13에 사도 바울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성화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성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답게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살아감으로써 성화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에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한국선교 130주년과 우리 교회 창립 130주년을 맞아 ‘밀알’을 뜻하는 ‘시토스’(Sitos, a grain of wheat) 창작 칸타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17일부터 찬양대원 60여 명이 미국에 가서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배출한 드류대학교와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출신 교회인 랭캐스터제일연합감리교회에 가서 보은감사 연주회를 가졌으며, 동상을 기념비적으로 설치하고 돌아왔습니다.
드류대학교의 메어리 앤 배닝저(Mary Ann Baenninger) 총장님과 신학대학의 하비에르 비에라 학장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과 랭캐스터교회의 켄트 크뢸러 원로목사님과 조 디파울로 담임목사님, 뉴저지연회의 존 쇼울 감독님과 피터 위버 주재 감독님,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후손 6명(John Huyler 부부외)과 연노하신 교우님들, 그들의 기쁨과 감격을 다 전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비록 미국 교회 성도들이 고령화 되었습니다만 저는 그들의 모습에서 성화된 성도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성화된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습니다. 성화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화된 성도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거룩한 감동과 영향을 끼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로마서 6:1-11 / 황의봉목사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있던 일입니다. 네 사람의 상인들이 똑같이 돈을 투자하여 목화를 사다가 창고에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는 쥐가 많아 목화를 못쓰게 만들고 있으므로 고양이 한 마리를 사 놓기로 하였습니다. 원래 돈에는 인색한 장사꾼들인지라 고양이 값을 똑같이 내기로 하였습니다. 즉 고양이 한 마리 값을 4등분 하여 고양이 다리 하나씩을 맡기로 하였습니다.
어느날, 고양이가 왼쪽 앞다리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그 다리의 주인은 다리를 싸매주었는데 그만 기름 묻은 헝겊으로 감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고양이가 난로에 너무 가까이 갔다가 기름 묻은 붕대에 불이 붙고 말았습니다. 다리에 불이 붙자 고양이는 미친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목화더미 위에 뒹굴어 목화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다른 상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헝겊을 감아준 고양이 앞다리의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의 네 다리 중 앞다리가 목화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인이 책임지라는 것이지요. 고소의 내용을 다 들은 재판관은 조용히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고양이 다리에 불이 붙었을 때 그 고양이가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이끌고 목화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게 한 것은 다친 다리가 아니라 성한 다리였으므로 죄는 다친 다리의 주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움직이게 한 나머지 세 다리의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결국 혹을 떼려다 붙인 결과가 되고 말았지요.
성경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곳은 안디옥교회(행 11:26)였습니다. 이것은 성도들 스스로가 부르기 시작한 호칭이 아닙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제자들(행 2:41), 형제들(행 15:32), 성도들(고전 1:2)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의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비유(요 15장)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하셔서 성도와 그리스도는 한 몸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과 지체라는 말로 설명하면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신자는 한 나무와 같고 한 몸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나타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세례가 가진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 받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초창기의 세례는 보통 온몸이 다 잠기는 전신침수 세례였습니다. 여기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상장하는 것입니다.
첫째,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 즉 주님과 함께 붙어 있으니 주님이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갈라디아 2:20에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무엇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6절을 보세요. 옛 사람입니다. 세례 받기 이전의 옛 사람, 세상 풍속이나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나 따라다니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몸이란 결코 죄 많은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 자체가 악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죄에 의해 조종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몸이란 죄가 지배하는 몸을 말합니다. 이것이 죽었으니 이제 죄의 종이 아니며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는 주님의 부활하심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에 완전히 잠김으로써 인간의 모든 호흡은 정지 됩니다. 즉 과거의 나의 모든 호흡은 이제 끝이 나고 다시 물에 올라올 때는 새롭게 거듭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나 혼자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인간적 결단이 될 뿐이지 진실로 부활한 실재의 몸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비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그와 함께 죽는 사람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서 그가 죽으면 우리도 죽고 그가 살아나면 우리도 새 몸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4절)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으니 주님이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리라”(5절). 어떤 사람으로 다시 살았습니까? 새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했습니다. 이 새 사람은 ①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엡 4:24)이며 ②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을 되찾은 사람(골 3:10)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말하는 것이 전과 다릅니다. 행동이 전과 다르고 삶의 목표나 삶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2. 신자는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식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유월절 식사라고 불렀고 해마다 기념하여 지켜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애굽 땅에서 430년이나 고생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왕의 손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십니다. 아홉 가지의 재앙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을 잡아 유월절 식사를 은밀히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두려움과 긴장 그리고 설렘 속에서 그들은 음식을 준비했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잡은 채 식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애굽을 떠나기 직전에 가진 유월절 식사였으니 이는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식사였고 하나님과 그 백성이 연합하는 식사였습니다. 그 식사의 중심은 어린 양이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잊지 못할 식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 만찬 혹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고 2000년 간 지켜옵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날(마 26:26-29), 그 날은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고, 또 포도주 잔을 주시며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제자들을 하나로 묶고 주님과 연합하는 식사였습니다.
첫째,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찢기신 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채찍에 맞아 찢기시고 못 박혀 찢기신 주님의 살을 기억하면서 내 손으로 떡을 떼는 것입니다. 그 떡을 먹으므로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함께 계심을 생각합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둘째, 잔을 받아 마시는 것은 주님의 흘리신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 잔을 마시므로 내 핏줄 속에 주님의 피가 섞여 있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살과 피로 내 안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러면 성찬에 참여한 자의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① 먼저 이 예식을 행할 때 마다 나를 위해 주님께서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② 이 예식을 통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기억하고 그분이 승리의 주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③ 또한 이 성찬에 참예하는 자는 모두 한 가족이요 한 형제인 줄 알아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신앙은 그것 자체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의 공로로 이룬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아니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분명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였음을 고백하고 표시하는 것이 세례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그 하나 됨을 확인하는 자리가 성찬식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은혜의 체험을 통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도와줍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잡착해왔던 것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미래 속으로 나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빌 3:13) 오직 그리스도에게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①먼저 내 옛 사람은 주와 함께 죽어 장사지냈으며 새 사람으로 부활했음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느낌이나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는 것입니다. ②이제 내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③그리고 우리 몸(지체)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용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는 과연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가? 과연 나의 삶은 거듭난 삶인가? 나에게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있는가? 그분의 은혜를 느끼고 살고 있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그 후에 달라진 것이 있는가? 지금까지 내가 집착했던 많은 것들, 고민케 했던 많은 것들을 돌이켜 보면서 그것이 진정 나의 삶에 그토록 중요했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우리가 왜 그토록 이웃과의 삶에 인색했는지, 우리가 왜 남의 이목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겸허히 머리 숙여 주님을 영접할 시간을 가집시다.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나 자신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거듭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복된 연합
로마서 6장 / 김준범목사
사도 바울은 로마서 6-8장에서 성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중요한 주제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신자의 구원을 설명하는 영광스러운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구원 서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성화(sanctification)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뿌리로부터 오는 양분을 공급 받지 못하여 살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연합되어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혜택들(benefits)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하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말로 표현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세 가지 단어(개념)를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Covenant)
첫째,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약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언약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언약은 복음이 담겨있는 틀이고 신학 전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틀입니다. 16-17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파 신학자들은 신학의 전체 체계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고 하는 두 개의 언약을 축으로 하여 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 신학(reformed theology)”을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복된 선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위 언약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행위 언약에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된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었으며, 죄와 함께 사망도 왔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서 행위 언약으로는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번째 언약을 세워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 언약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3항). 이 언약이 은혜 언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에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구원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적 부패함과 무능함을 아시고, 이 모든 구원의 일들을 친히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로 되기 때문에 이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언약을 세워주신 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대표(Representative)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언약 개념과 함께 “대표(representative)” 또는 “머리(head)”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대표 원리에 의해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에는 각각 대표(머리)가 있습니다. 행위 언약의 대표는 아담이고, 은혜 언약의 대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아담과 그리스도는 언약의 대표라는 사실은 아는 데에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로서 인류의 자연적 대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맺으셨을 때에는 아담과만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언약을 맺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약이라는 체계(시스템) 속에서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담 외에 또 다른 언약의 대표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친히 세워주신 은혜 언약의 대표이자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창세 전에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될 모든 죄인들의 대표이며, 능하고 강하신 우리의 대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연합(Union)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연합”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연합”은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언약신학을 “연합신학(또는 연방신학, federal theolog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라틴어 foedus는 “조약, 협정, 계약”이라는 뜻과 함께 “연맹, 동맹(league), 연방(federation), 결연(alliance)”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연방신학”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언약적 관계에 의해서 언약의 머리와 연합하고 결연됩니다. 우리는 행위 언약 아래에서 출생에 의해서 나면서부터 아담과 함께 언약적으로, 법정적으로, 영적으로 연합하여, 실제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대표를 우리의 구원자로 보내주실 것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아담과의 연합과 동맹을 깨뜨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구원하실 자를 보내주실 것이 구약시대 내내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선포되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은혜 언약” 또는 “복음 약속”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은혜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결혼, 접붙여짐, 그리스도의 것이 됨, 그리스도 안에 거함)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아담과의 동맹과 결연을 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결연하고 결혼하라는 복된 초청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실체가 없는 막연한 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신념이나 최면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혼자 우리의 마음으로 주관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은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복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덕들을 받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 연결이 되고 접붙여지고 속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복된 은혜 언약을 세워주신 것에 감사합시다. 또한 우리에게 은혜 언약의 강력한 대표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세워주신 것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합될 수 있도록 해주신 놀라운 은혜에 깊이 감사합시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로마서 6:1~14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다루고 있는 이 중요한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
첫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8절).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과 관련된 동사나 명사, 또는 죽음을 다르게 묘사하는 표현들을 16회나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로(8절),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로 묘사했습니다(6절).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6절). “옛 사람”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3번만 사용된 독특한 표현입니다(롬 6:6; 엡 4:22; 골 3:9). “옛 사람”이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 “옛날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옛 사람” 또는 “새 사람”을 말할 때에 그것은 언약적 관계에 있는 인간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으며, 각 언약은 대표 원리에 의해 작동되므로, 우리는 바로 이런 언약적 관계에 의해서 언약의 대표와 연합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에게 속하여 있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아담에게 속해 있는 사람을 가리켜 “옛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란 “아담에게 속해 있던 나” 또는 “죄 아래 있는 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합니다(6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거기에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함께 못 박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이런 일이 법정적으로, 언약적으로, 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신 대속의 죽음이요 특별한 죽음입니다. 실제로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의 대표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약적, 영적 연합을 이루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모든 효력과 혜택에 참여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와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언약적으로, 영적으로 연합되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으로 실제로 간주해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롬 8:10, 갈 5:24, 6:14, 골 3:3-4 참조). 우리는 이전에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니고 완전하게 영화롭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분과 소속과 정체성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자가 되고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우리
둘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5,8,11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도 연합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명과 관련된 동사나 명사가 총 10번 사용되었습니다(2,4,5,8,9,10,11,13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옛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은 받은 나는 “새 사람”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새 사람”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새 사람”이 등장합니다(엡 4:24; 골 3:10 참조). 새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나”입니다. 우리는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듭남으로, 그리고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은혜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아담에게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아담에게서(from) 나와서 그리스도 안으로(into)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던 “옛 사람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새 사람 나”가 되었습니다(14절).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도 우리를 위한 부활이므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약적, 영적 연합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든 효력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와 함께 죽고 장사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4절).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11절).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셋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곧 성화의 당위성과 방향성을 알려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야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고, 죄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마귀의 종 노릇하며 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며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1-3).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러한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우리의 소속과 신분과 정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새 사람이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우리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새 사람답게 우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12-13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도 연합시켜 주신 것은 바로 이 목적, 곧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몸의 사욕에 이끌려서 살지 않고, 새 생명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4,6,11-13절).
연합의 신비
롬 6장 1~11절 / 이강웅목사
서론: 그동안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많이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의 대상이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율법 없이 사는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와 신앙행위를 의지하려는 율법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행이나 행위가 아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율법 없이 살아왔던 우리도 태생적으로 자기 의의 신봉자이기에) 바울은 한사코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셨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예상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거룩한 계명으로 주신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니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하고 펄쩍 뛸 것입니다. 여러분도 율법이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많아지게 한다니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전에 몰랐던 것들이 죄로 분명하게 진단되기에 죄가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서 거짓말을 죄라고 규정하니까 이제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율법을 통해서 정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로 규정한 율법이 없어서 죄로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이 죄로 규정하니까 죄가 더해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우리의 악한 본성, 반항심을 자극해서 오히려 죄를 촉발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청개구리처럼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반항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고 말합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은혜는 그 어떤 죄보다 더욱더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세력을 이기며 극복하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은혜의 교리에 대한 반론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다니’고 말하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율법도 더 이상 필요 없고,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짓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 가운데 살아도 되겠네.’라고 주장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실에 라스푸틴이라는 종교담당 고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왕가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로마서 5장 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구절을 인용해서 “성경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보통 죄인이면 하나님께 보통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인 이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니 반복해서 계속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니 괜찮습니다.”라며 왕실의 죄를 합리화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썩어빠진 신앙적 조언을 받던 제정 러시아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민중 봉기가 일어나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라스푸틴의 말은 전형적인 무율법주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도 이는 은혜를 더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우리는 라스푸틴처럼 극단적 무율법주의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지만 실제 우리 삶과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별반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된 것이지 내 신앙행위로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기 때문에 다 덮어질 것이고, 결국 천국에는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적 나태함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무율법주의자들의 논리 또한 배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를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네이게토, 절대 그럴 수 없는니라!’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끝난 죽음이지 매일매일 죽는 그런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를 들어 말합니다.
2. 세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침례, Baptism)는 물 속에 들어가거나 (물 뿌림) 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행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는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은유적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됨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와 접목 되어 은혜의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예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안(印)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신앙 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순간에 성령께서 신비롭게 역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도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기에 그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우리도 죄와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죽어 장사 되었기에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더 이상 권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주님과 연합한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도록 살려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영역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어둠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미 생명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제 죄와 죄의 세력이 우리를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3. 이미와 아직
물론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기에 죄로 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는데도 현실은 눅눅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영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땅에 도래하여 완성을 바라보며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완성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긴장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세계2차 대전을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될 때 나치 독일은 영국과 소련을 제외하고 전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세를 완전히 뒤엎는 작전이 있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암호명 D-day에 실시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던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나치 독일은 결정적으로 패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퇴각하는 독일군들이 곳곳에서 저항하며 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5월 7일 V-day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할 때 비로소 전투는 끝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D-day와 V-day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사단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이미 승리는 분명하지만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단이 아직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단을 결박하고, 죄와 사망을 불못에 집어 던짐으로써 최후 승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안에서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영의 욕망과 죄의 쾌락을 즐기고 싶은 육의 욕망이 우리 안에서 충돌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 죄와의 일대일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원하는 바 선을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자기 모순 앞에서 절망하며 부르짖지 않습니까?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런데 이 절망의 자리에 설 때 오히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비로소 더 이상 추락하지 않은 든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 절망의 외침을 뛰어 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롬 7:25)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 우리는 장사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권세를 부리지 못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의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롬 6:8-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단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이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복된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었습니다. (고후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빛이 비취지 않으면 우리는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는 우리를 사단의 먹이감으로 삼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 1863년에 선포된 노예해방 선언으로 미국 땅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종식되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이제 모든 노예들이 자유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부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살아왔던 대로 주인에게 예속 되어서 노예처럼 살아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노예선언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졌어도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리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노예해방을 한 남북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까? 마침내 노예해방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은 농장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처럼 매여 살아갔습니다. 막상 자유인으로 살려니까 앞날이 불확실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출발을 하지 못하고 농장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죄로 부터 자유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권세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지 않습니다. 의와 생명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흑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된 소식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을 알지 못하느뇨”,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9절에서 “앎이로라”고 반복해야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의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제물처럼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10,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길지어다”는 원문에서‘여기라’는 명령문입니다. ‘그대로 믿으라, 기정 사실로 받아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고, 또 자기 자신을 보고 평가할 문제도 아닙니다. 또 느낌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신분), 어디에 있으며(소속),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알게 해 줍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우리처럼 이미 믿고 구원받은 로마 신자들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들려 주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날 죄의 욕심에 따라 구습을 쫓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연합의 신비를 우리가 믿는다면 더 이상 예전에 죄의 노예가 되어 종노릇하던 옛사람처럼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가 무효가 되는 것 아닙니다. 더 이상 우리는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롬 5:17).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우리 삶과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영광의 복음을 가진 자는 쉽게 죄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계속 살지 않습니다. 설령 잠시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죄를 자백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 확신을 결코 흔들어 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며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답게 다시 일어나 담대히 나아갑시다.
십자가로 가까이
롬 6:1-11 / 박진수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일상 속에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참 어수선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대통령의 계엄선포로 촉발된 범국가적인 혼란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 사이 유난히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많더니, 최근 경북 의성지역을 시작으로 일어난 초대형 산불로 우리 사회는 큰 아픔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에서는 새차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 되었습니다. 자기는 새차만 했다 하면 비가 오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차를 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듣기에 따라 시시하고 우스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런 마음들이 함께 국난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서로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들이 모이고, 아주 작은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을 통해 어려움도 슬픔도 함께 견디고 넘겨내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에 김종순목사님께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말씀 자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마음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다 보면, 이 슬프고 아픈 일들도 잘 흘려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사회의 혼란을 마음 아파하며, 산불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 슬픔을 함께 느끼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요즘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마침 우리교회는 오늘과 내일 부흥회와 작정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할 때에 기도의 계절을 만났습니다. 어렵고 혼란한 때를 만나,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또 어려운 이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고단한 시간들을 잘 흘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 오늘 설교를 두고 기도할 때면 반복적으로 떠오르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부활과 영생에도 이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죽음은 싫어하고, 부활과 영광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롬 6:3-5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모두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삼켜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며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부활과 영생, 그 영광에 이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애쓰고 수고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주는 이의 마음입니다. 받는 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하나가 될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과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꾸만 주님의 십자가, 그 험한 십자가를 자꾸만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부활과 영생에 이를 수는 없지만, 자꾸만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의 주님, 그 마음 그 뜻을 따르려고 애쓸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애쓸 때 우리 속에도 부활과 영생이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 합하여 일치를 이룸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영생에도 참여하게 되는 말씀을 하게되는 배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본문 1-2입니다.
롬 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탄식하듯 말합니다. 아니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를 짓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를 짓는다는 은혜와 죄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요?이 말씀은 앞선 5:20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음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움을 덧입는 칭의의 교리입니다. 조금 전 우리는 감리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5번째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대속의 은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여 의롭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대속의 은혜가 우리 속에 역사하여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는 은혜로구나!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이나, 큰 죄를 지은 사람이나 차별이 없이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구나!
그러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은혜가 더 크겠네! 작은 죄를 지은 사람보다 큰 죄를 용서받는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받겠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죄를 지으면 되겠구나! 아주 큰 은혜를 받으려면, 아주 큰 죄를 지으면 되겠구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생각, 이런 말들을 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를 더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죄 가운데 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장차 자신에게 돌아올 몫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동안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 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탕자를 탓하기는 커녕, 아주 기뻐하며 환대하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탕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서 다시 이 집의 아들로 지위를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이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지만, 탕자는 돌아온 아버지 집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지난 상처와 잘못을 치유하고 회복시켜며 열심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때때로 다시 자신을 받아 준 아버지께 감사를 느끼며, 형과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지내는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탕자는 다시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집이 안정되었으니, 다시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 집을 떠나 볼까? 유산을 달라고 고집부려서 다만 얼마라도 받아서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고 돈 떨어지면 또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와 회개하면 되지! 여러분 어떠신가요? 이게 말이 될까요?
상상도 못할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그 사랑과 희생을 안다면 이런 탕자 같은 짓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생은 연약하기에 쉽게 죄에 대하여 미혹되고 넘어집니다. 바울도 자신의 실존을 이렇게 탄식합니다.
롬 7:22-24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바울도 죄의 어두움과 무서움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이 결심한다고 단번에 죄의 유혹을 끊어내고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무뎌질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고, 대속의 은혜를 구하고 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있고, 그러면 어차피 구원은 따놓은 당상 아닌가! 이렇게 나태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무뎌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무시한채 살다가, 입버릇처럼, 그저 습관처럼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회개를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나쁜 일입니다.
탕자가 어차피 아버지는 나를 받아 주실 걸 하면서 수시로 아버지를 떠나고 탕자로 살다가 또 돌아오고 이것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사랑과 은혜를 가벼운 것으로, 우스운 것으로 값싼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대한 경각심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무겁고 엄중한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그저 죄와 회개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이용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 그 영광을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생을 향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직 십자가가 길입니다. 우리가 부활과 영생, 그 생명과 영광을 소망한다면 십자가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 안식 얻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면서 함께 부를 노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자기를 비우고 주와 함께 고난 받으면, 주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도 이를 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생명을 봅니다. 죽음이 곧 생명인 역설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롬 6:8-9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우리 모두는 어떤 모습이든지 죽음으로 끝이 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느끼든, 또 멀리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생의 끝이 죽음인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시간과 자리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때때로는 우리는 너무도 느닷없는 죽음 앞에서, 너무도 빨리 찾아온 죽음 앞에서,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황망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이의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건강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해도,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인생에는 끝이 있습니다. 내 인생 끝나는 날에 운동을 많이 한 것이,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은 일이, 재산을 많이 쌓아두고, 공부를 많이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에 삼킨 바 되면, 우리의 인생은 불멸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며, 주와 죽으면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죽음을 가까이 둔 믿음 좋은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초승달이 뜬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하던 중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책상 옆에 멈춰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상아, 흠 없는 책상아, 너는 내가 적절하게 먹고,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쳤다고 나를 위해 증언해주겠지?" 며칠 후 그는 사람들에게 그 책상으로 자기 관을 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도사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살았기에 역설적으로 죽음은 그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한계를 알아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11절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고 자꾸만 되뇌어야 합니다.
롬 6:12-14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꾸만 우리 삶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기울여야 합니다. 사순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귀한 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와 합하여
롬 6장 1~11절 / 신성종목사
바울은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큰 죄는 기억하기가 쉽고 구체적으로 회개하기가 쉽지만 작은 죄는 기억하기도 어렵고, 회개하기도 기억이 안 나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은혜 반대론자들이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는 죄를 더 지어야 한다고. 1절을 봅시다. 그 반박이 1절에 나옵니다.[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이것은 바울의 은혜의 원리를 반박하는 자들의 질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렇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영향을 못 줍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죽은 김일성이가 지배하는 세계에 유래 없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면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의로울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까?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이 세상에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전가 받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리고 그런 성도는 의롭게 사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먼저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여 줍니다. 3절 이하는 세례를 예로 들어서 왜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지만 일단 죄에 대하여 죽은 뒤에는 죄는 우리를 지배할 권리도 없고 또 우리가 죄를 섬길 의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그것은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란 주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내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에 과거의 나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세례 받을 때에 우리가 문답을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그러면서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 세례를 한 번 밖에 안 받습니다. 육신도 한 번밖엔 안 죽듯이 영적으로도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 화
논산훈련소에서 한 번에 4200명의 세례를 주었다. 이 때 세례를 다섯 번째 받는 군 세례자(야 이놈아 많이 받을수록 좋지 않냐하고).
우리가 잘 알듯이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절에 [예수와 합하여], 오늘의 설교제목인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과 합하고 연결되고,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옛 사람,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장례식이 바로 세례식입니다. 우리가 장례식을 지내고 나서도 그 사람이 호적이 있다면, 살아있는 것처럼 의식을 행한다면 이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미친 짓을 지금 계속하고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전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물론 세례식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실제적인 죄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기 전에는 죄가 독재를 했습니다. 하는 일마다 죄였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러나 세례를 받은 뒤부터는 나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선도 행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이것은 차이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짓고 있다면 이것은 내 의지입니다. 죄의 지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기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지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밖에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례는 에수님과 십자가에서 죽는 장례식만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의 시작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옛사람은 죽고 지금 사는 것은 주님과 함께 부활한 새 사람입니다.그러므로 옛 사람의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옛 사람의 습관도 청산해야 합니다.
예 화
목욕하고 나서 땀내 나는 헌옷을 입지 않는 것과 같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것은 마치 임금을 받지 않고 옛날의 직장에 다시 가서 계속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새 직장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아직도 옛날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정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7절은 지금의 우리의 신분을 말씀해줍니다. 크게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믿습니까? 그러면 다 같이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8절과 9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는 주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나의 죄 됨을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자입니다. 다 의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첫째로 사망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9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2)둘째로 10-1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일, 즉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은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롬 6장 1~11절 / 성홍모목사
성지순례 때에 이집트의 룩소르에 갔었는데, 룩소르에는 ‘왕가의 계곡’(와디 알무르크)이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카르나크신전과 룩소르신전이 있고, 나일강 서편, 깊은 광야의 골짜기에는 왕족의 암굴 묘들이 있는데, 약60여개의 암굴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전은 동편에 건축하고, 묘소-장지는 해지는 편 서쪽에 두었습니다. 나일강 동편은 신들이 사는 세계이고, 서편은 인간이 사후세계에서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일강 서쪽에는 왕들의 암굴 묘와 장례와 제사를 지내는 장제전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주전1400년 전에 일어난 18왕조에서 20왕조까지의 왕들은 사후 세계를 위하여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계곡을 깊이 파고 들어가다가 왕이 죽으면 그 자리를 정리하여 시신을 안장하였습니다. 왕이 생전에 사용하던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건, 그리고 섬기던 종들까지도 함께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무덤이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나오는 통로를 묻어버렸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왕가의 계곡의 어떤 무덤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왕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하여 벽면에는 상형문자로 가득하게 새겨놓았는데, 한쪽에 주후 3-4세기의 성도들이 피신하여 들어가 예배하면서 헬라어와 콥틱어로 성경구절을 새겨놓은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에 들어간 기독교도인 콥틱교회의 성도들이 환난을 피하며 왕가의 무덤에 들어가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들어가기 싫어하는 무덤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회는 목숨을 찾는 박해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생각한 것이 어떤 사람도 들어가지 않는 지하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하 묘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지켜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찾기 싫어하는 공동묘지에 가서도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최고의 전도자요, 목회자요, 신학자는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배교를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려고 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12제자들을 보면 어부가 변하여 제자가 되고, 세리가 변하여 사도가 되었지만, 정말 극적인 변화는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놀라운 진리를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된 것입니까? 우리는 수준에 의하여 구원받은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1-2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습니다.
오늘 죄를 무서워하고, 죄는 절대로 짓지 않겠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정말 죄를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은, 자포 자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래도 죄인이고, 저래도 죄인이고,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역시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타협의 명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구원의 감격이 오히려 죄에 대하여 저항력을 떨어뜨리고, 죄에 대하여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후에도 죄라는 문제를 놓고,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회개하면 되지, 이래도 죄인이고, 저래도 죄인이 아니냐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므로,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변적이고, 논리적이고, 화석화되어버린 교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교인이 되었으면서도 도덕적으로 매우 무감각하고,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가 되었고, 윤리의식이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빛을 잃었고, 소금이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지, 잘 믿고 잘 살아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헌신적으로 섬겼다 하여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은혜 받으려고 하여 죄를 더 지을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그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찌하여 죄 가운데 더 살 것입니까? 수준이 있어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수준에 미달하는 성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 대장부와 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다짐하고 결심하였어도 죄악 세상에 또 다시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왜 이렇게 결심이 약한 것입니까? 우리는 죄와 타협하는데 명수입니다. 죄는 우리의 체면을 잘 살려줍니다. 적당한 명분도 주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습니다. 죄를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 죄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오랫동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정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언제나 과제입니다. 누구를 미워할 것도 없고, 시기하고 질투할 것도 없고, 모두 다 사랑할 사람이요, 다 함께 기뻐할 사람들이요,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족하고, 지금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고,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감격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도 없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다 내어주고, 다 바쳐도 감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벽기도할 때에 생각하고 기도한 대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입니까? 도대체 나 중심에서 벗어나고,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날은 언제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사시는 우리 주님이 하시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4절 말씀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우리는 예수와 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합하여”라는 말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5절 말씀에서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는데,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영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연합하시고, 합하여 하나되었는데, 우리 안에 평안하게 거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은 “함께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 자리에 떠날 수 없는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심겨진 자리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우리 주님이 함께 있는 자리요, 내가 가는 곳은 우리 주님이 함께 가시는 곳입니다. 연합이란 함께, 합하여, 하나 되었다는 말이요, 같은 자리요, 같은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자리에서 함께 죽었고,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받은 그것으로 그친다고 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요, 이것은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요, 함께 장사된 사람이요,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가장 큰 주제가 되고, 기독교를 지탱해주는 두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얻었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례란 무슨 진리가 있습니까? 세례를 정의해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일생에 단 한번 받는데, 우리는 뒤 따라 세례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께 동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는 정말 중요합니다. 절대로 세례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 칼빈 선생님은 세례를 설명하면서 “세례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신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출발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칼빈의 세례에 대한 정의는 아주 고전적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세례 받으신 성도들은 거룩하게 인침을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고,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죽을 뻔하였는데, 지금 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감격, 병원에서 죽을 것 같았는데, 퇴원하여 다시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떤 성도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그 후에 집에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에 오시고 싶었으면 먼저 교회로 나오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감격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 아직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바랄 것도 없고, 욕망도 없고, 미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살기를 원하지 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더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욕을 먹으면 영광이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갈5:24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탐심도 못박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죄를 끌어들이고, 죄와 타협하고,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살겠다는 과도한 욕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은 척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었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여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였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여기서 “여길지어다”라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로기제스데”라고 하는데 “로기조마이”라는 말은 간주한다. 결론짓다,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교인들은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미신을 섬긴다느니, 사교라느니 하면서 오해도 살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암호가 있었는데, 그것이 물고기 상징입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땅 바닥에 낙서하는 것처럼 물고기 형상을 그리는데, 알아보는 사람은 교인이고, 전혀 몰라보는 사람은 불신자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고기 형상의 그림이 카타콤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물고기라는 말이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합니다. 물고기 즉 익투스(ΙΧΘΥΣ)는 정말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글자를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리아스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연결시키면 물고기라는 ‘익투스’가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이렇습니다.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첫 글자만 연결하면 익투스(ΙΧΘΥΣ. 물고기)가 됩니다.
이런 익투스라는 말이 로마의 카타콤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타콤은 로마의 외곽지대에 거미줄 같이 연결된 지하 묘소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에 석회암 지대를 깊이 파고 들어가서 지하 통로를 만들고, 양 옆으로 관이 들어갈 수 있게 파내고, 시신을 넣어두었습니다. 지하 통로가 몇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수십 리 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산한 묘지가 기독교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누구도 들어가려고 아니하는 지하 묘소에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은 1901년 평양에서 개교하여 1907년에 7명의 목사를 배출하였고,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서울 남산의 신궁터에서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에 광장동에 있는 광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아차산에 기슭에 이전하였습니다. 이전할 때에는 겨우 학교 본 건물 하나만 세우고 옮겼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천호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힘들게 다녀야 했습니다. 60년대에 다니던 학생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산을 깎아내어 운동장을 만들고, 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야 했습니다. 전학생들이 노력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운동장에서는 수많은 유골들이 나왔습니다. 학교 앞에는 신비한 약수가 흘렀는데, 사형장의 약수는 약효가 많다고 하여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약수를 받아갔다고 합니다. 주변의 어딘가에 사형장이 있었고, 학교 운동장 주변에 큰 구덩이 파고 수없는 시신을 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음산한 바람, 더욱 사형이라는 처절함, 그런 무서운 바람은 맞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사형장이요, 처절한 무덤이 변하여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는 선지동산이 되었습니다. 우리 장로회신학대학은 1907년에 1회 졸업생을 내면서 작년에 100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무려 3만 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결정짓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죄 짓는 나는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있어 중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생을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속적인 관심 속에 살지 말고, 거룩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사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죽는 이유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사는 이유가 되시고, 우리의 죽는 이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나
롬 6장 1~11절 / 김철현목사
미국의 16대 대통령[아브라함 링컨]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업적에 못지않게 먼저 그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주목해야합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자기 구두를 손수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날마다 자기 구두를 닦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보좌관이 넌지시 직언을 했습니다. “각하, 대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구두를 손수 닦으십니까?”하면서 말려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 [링컨]은 능청맞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니, 그럼 미국 대통령이 남의 구두를 닦아 줍니까?”라는 대답으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농담 속에서 링컨의 겸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늘 겸손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거만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심이 깊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게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기본의식에서부터 모든 인격이 하나하나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내가 알려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체면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거짓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알려면 좀 더 나아가서 끝없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무엇이 되어야 하겠다. 더 가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시기나 질투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져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욕심을 버리고 깨끗하게 나를 보고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나 혼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만이 나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이“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 한 지식이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릅니다. 흔히 살아가다가 허무한 일을 만나거나 그런 사람들을 볼 때“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의미에 동조하십니까?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볼 때나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을 보면 무상이 맞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라면 충분히 이러한 탄식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니“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교만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요. 불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 그야말로 무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죽은 나>와<살아 있는 나>로 설명을 합니다. 그 결론적인 말씀이 11절의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자, 그럼 보십시다.
먼저 죽은 나에 대해서 밝힙니다. 그 사실을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은 옛사람으로서의 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와 사망과 정욕과 진노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옛 사람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은혜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정말 하찮은 존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 옛사람의 생각에 마냥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여기에서 판가름 납니다. 신앙의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겸손으로 결과를 맺지만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교만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내가 지금 뭘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전직이 무엇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직 회장, 전직 사장, 전직 교수, 전직 장관...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러니 어쩌란 얘깁니까? 오늘 나를 소개하면서 전직엔 내가 이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 달라는 속셈이거든요. 여러분, 과거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잘 됐던 못 됐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옛 사람에 무슨 미련이 이렇게도 남아 있습니까? 이것에서 깨끗이 떠나야 교만하지도 않고 은혜를 잊지도 않습니다.
[A.W. 토저]라는 신학자가<내 자아를 버려라(WHO PUT JESUS ON THE CROSS)>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첫 번째 챕터에서<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라고 하는 우상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면서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옛 자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자아라는 옛 생명에 헝겊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구원 받은 자로 불사조의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느냐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인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이해가 가십니까?
옛날 어릴 때 제가 자랐던 시골에는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제 또래의 아이들이 새 옷을 한 벌 얻어 입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설날이라든가 추석, 아니면 소풍가는 날 내지는 수학여행 가는 날이나 되어야 새 옷 한 벌 얻어 입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이 형님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서 입습니다. 다행히 형님이 적으면 그나마 새 옷 같은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보통 아이들을 생기는 대로 나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그 옷이 얼마나 질겨서 몇 사람씩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옷은 얼마입지 않으면 구멍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특히 무릎이나 팔꿈치에 어머님이 헝겊을 대고 기워줍니다. 그러면 그 옷을 좋다고 또 며칠을 거뜬하게 입고 돌아다녔던 또래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헝겊조각을 대고 기워도 그것은 헌 옷일 뿐입니다. 새 옷하고는 여러 가지에서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금방 헐어져버릴 옷이지만 임시방편으로 그럴싸하게 기워 입히시던 어머니들의 손길이 생각나곤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딴 동네이야기로 알아듣지 자기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하여간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헝겊조각을 대고 적당히 기워 입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분명한 이야기를 [A.W. 토저]가 그 책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모습이란 완전히 죽어져 없어져야 함을 이야기함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의 또 하나는 현재의 모습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 있는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직 은혜 안에 있는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유인이요, 은혜 안에서 사명을 받은 나라는 사실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 볼 때는 쓸모없지만 하나님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하시고자 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기회이자 사명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현실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는 옛사람인 나 자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됩니다. 내 과거, 내 신분, 내 업적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하는 것과 정말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까? 그게 힘이 듭니다. 내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워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바로“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입니다. 8절에 보십시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죄를 향하여 죽었고, 정욕을 향하여 죽었고, 나의 증오와 시기 욕심 다 십자가 밑에 묻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 답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두 가지를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나 자신의 죄인 됨을 계시해 줍니다. 내 죄는 십자가에 죽을 만큼 큰 죄요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의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구원할 만한 존재라는 겁니다. 나는 아니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러한 정체감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정말 귀한 고백으로 들려줍니다. 고전15:10절을 기억하십니까?“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한 자의 고백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 왕이 사울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울이 죽고 각고 끝에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정말 어려움을 겪을 때 비록 자기를 괴롭힌 사울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곁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요나단을 생각하고는 그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핏줄이 없나 살펴보았더니[므비보셋]이라는 절름발이 하나가 붙들려왔습니다. 족보를 따지면 자기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손자이니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의 손자로서가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왕자처럼 궁궐에서 함께 살고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때에 [므비보셋]이 한 말이 정말 가슴을 파헤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개만도 못하게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은 친구인 요나단을 보고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곧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입니다. 사울을 향한 마음은 옛 사람으로 이미 죽어버렸고 요나단을 향하여는 은혜의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복수의 마음은 죽어 없어지고 은혜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죽어야 할 것에 마땅히 죽어지고 살아야 할 것에 마땅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죽어지지 못한 것이 있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법을 택하시고 살아나야 할 것이 아직도 살아나지 못하여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서 은혜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나 된 모습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롬 6장 1~11절 / 김홍도목사
신앙 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고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또 부흥회 같은 데서는 큰 은혜도 받고 체험도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고 굳은 결심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다시 죄를 짓게 되고 따라서 낙심도 되고 회의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지난 주간에 부흥성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지금 말씀드린대로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혈기를 내지 아니하고 불평, 불만도 하지 아니하고 죄와 멀리하고 잘 살아 보리라 마음 먹었으나 또 다시 죄를 짓고 쓰러져서 안타까워 하는 분들이 여기에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토록 죄를 지은 다음에 자복하게 하고 또 눈물 흘리며 회개하면 용서를 해주는, 그러한 일만 되풀이하게 하시고 근본적으로 죄와는 상관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방법과 능력을 안 주시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많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든지 죄를 안 질 수도 있게 하셨지만 우리가 그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말씀 로마서 6장 6절에 보면 "우리도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한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에 때로는 불안하고, 불쾌하고, 시기 질투가 일어나고, 교만해지는 옛 사람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에게는 더 없는 마음의 기쁨과 평안함이 생겨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6장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거듭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 성품과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죄의 본질이 나타나려 할 때마다 우리는 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의식을 철저히 갖게 될 때에, 그리고 마음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게 될 때 그 죄의 문제는 사라지고 또 그 죄에 대하여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는 어떤 조그마한 악의 세력도 항거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깨닫고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나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면, 우리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죄성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받는 것까지는 아는데, 죄를 안 짓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십자가에 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6장 11절 끝부분에 보면 "…여길지어다"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그렇게 인정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옆에 놓고 아무리 욕을 하고 때린다 하더라도 그 죽은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었다는 의식만 철저히 갖고 인정만 한다면 그 누구가 욕을 하고, 무시를 하더라도, 하나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 각자가 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며 살아나갈 때 어떤 죄성의 문제라도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중에 하나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옛 사람은 죽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내용 가운데 중요한 교훈은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를 들어서, 사과나무가 있다면 그 사과 나무가 사과 열매를 맺기 때문에 사과 나무가 아니고, 사과 나무이기 때문에 사과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같이 나도 그 안에서 다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행하는 죄"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죄는 그것이 살인죄이든, 간음죄이든 상관없이 내가 죄인인 것만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면 그 순간 다 씻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행위의 문제는 예수의 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지만 우리의 근본 존재가 죄를 짓는 사람으로 태어난 옛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행하는 죄를 해결해 주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죄를 이기며, 어떤 죄성과도 대결하여 승리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믿으며, 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게 맡기게 될 때에 쉽게 이길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더 쉬운 예를 든다면, 작은 고염 나무가 더 큰 감나무 열매를 맺으려고 하면 그 나무를 잘라서 감나무와 접을 붙히게 될 때에 바라는 큰 감을 열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염 나무와 같이 죄의 종으로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제 2의 아담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나도 그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맡기게 될 때에 우리의 죄성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다시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알게 될 때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좋은 라디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이알을 맞추고 스윗치를 올려야 되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죄의 몸을 멸하여 의롭게 살도록 해주셨어도 그 사실을 믿음으로 내 마음 속에 영접하며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다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다는 사실을 믿고 맡기지 아니하면 그 능력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 나가는 동안에 어떤 때는 화가 나고, 불안해지기도 하고, 따라서 죄를 짓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XX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인정하고 맡기게 될 때에 십자가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서 어떤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음을 믿고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6장 3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했고, 계속해서 11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모든 사실에 대하여 알고, 믿고, 인정하며 나가야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믿고 인정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안 되고 우리가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마음대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의 전폭을 맡기게 될 때에 그 가운데서 희한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2절에서 14절까지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순종치 말고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드리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병기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듣고도 죄를 다시 짓는다고 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맡기지 않기 때문에 죄성이 나타나는 것이지, 이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맡기게 되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6장 10절에도 보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은 과거입니다. 앞으로 죽게 된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미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있고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는 황해도 안악 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습니다. 어느 하루도 술 안 마시는 날이 없었고 사람들과 안 싸우는 날이 없고 또 그에게 괴로움을 안 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그 일대에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죄를 참회하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김익두는 쫛월 쫛일 쫛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하고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그때에 그 부고장을 받아든 사람은 모두 기뻐하고 시원해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청년 김익두는 과거의 김익두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믿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과거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세례받는 날이 되어 그는 교회에 갔다 오는데 동네 사람들은 김익두라는 사람이 정말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죽기는 커녕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습니다. "김익두씨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고 부고가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게 될 때에 그는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오늘 장사지내고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 김익두가 아닙니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받아 중생의 체험을 하고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해서 한 번도 실수가 없느냐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기만 하면 그 순간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 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날 때에도 "나는 이미 죽었다"고 외쳐 보십시요. 그 외에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험한 죄의 물결이 노도같이 밀려 오더라도 "아무리 나를 건드려 봐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게 될 때에 그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자 어거스틴은 원래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변화받은 다음부터는 그 전에 짓던 죄를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참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옛날에 같이 지내던 창녀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이 어거스틴이 아닙니까? 왜 요사이는 놀러 오지 않습니까?"하며 물을 때,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아니하고 "네가 전에 부르던 그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다"고 대답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함이니…"라는 말씀과 11절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는 말씀을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심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먼저 이 모든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내 죄에서 역사하여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 알아야 하고, ② 믿고 인정해야 되고, ③ 맡기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죄성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의 비결은 "나는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요 내가 지금 산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는 의식 속에 살 때에 그런 사람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임을 믿고 실천해 나가시는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럴 수는 없느니라
롬 6장 1~11절 / 백장흠목사
우리 주변에서 복권을 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대박이 터질 것을 기대하고 삽니다. 그러나 다 당첨이 되어 몇 억을 받게 되던가요? 복권을 사는 사람마다 대박이 터진다면 누가 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몇 백만 분지 1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고 사 보지만 헛일입니다.
자동자를 소유하신 분들 보험 드셨지요? 왜 보험에 듭니까? 사고 나면 처리해 달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보험에 들었다고 자동차 사고 나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5:20을 보아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더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 봅니다. 모태 신앙이었고 거기에다가 제 성품은 내성적입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 일은 있어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순수하게 자랐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많은 상이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부흥강사가 되어 집회 인도하는 중에 팔 하나는 쭉 뽑아 걸어놓고 “나는 전에 주먹세계에서 놀았고 군에서 몸을 상한 상이용사인데 지금은 부흥강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지난날을 간증하는데 스릴도 있고 대단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도 한번쯤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목회하여 볼까? 그러면 나도 저런 인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범죄하지 않고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여 목회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할렐루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1.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1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기에 은행을 털어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면 잘 한 겁니까?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은 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전혀 투쟁하지 아니하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세상과는 이미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면 성결하게 살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평소에 건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벌써 병원에 초만원을 이루고 있답니다. 왜? 감기 예방접종 하느라고 그런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항상 죄에 대하여 알아야 조심하여야 합니다. 모르면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답니다.
첫째가, 공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공부입니다. 바둑을 두는데 바둑3단을 두는 친구가 바둑 잘 못 두는 친구를 구박합니다. 바둑도 잘 두지 못하는 게 나하고 무슨 친구를 하겠느냐는 식입니다. 그 말을 듣던 친구가 아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였답니다. 친구는 바둑 둔 지가 10년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부합니다. 책을 보고 연구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답니다. 1년 만에 바둑 잘 두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공부한 이를 당해내지 못하더랍니다. 배워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성결되게 살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론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어느 집에서 고부간에 같이 사는데 며느리는 빨래를 하여도 시어머니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한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깨끗합니다. 며느리가 그렇게 문질러도 그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빨래하는 모습을 보아도 자기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머니 빨래는 내가 한 것 보다 더 깨끗하냐고 물었더니 다음에 가르쳐 준다고 미룹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몸이 쇠약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다급하게 “어머니, 빨래”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마지막 하는 말, “꼬옥 짜거라.”
며느리의 빨래보다 깨끗했던 이유는 바로 꼭 짜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끝까지 견디는 인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감정대로 살 수도 없고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데 편리하고 좋게 해 주겠다면서 유혹합니다. 그때 “그럴 수는 없다”라는 단호한 거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야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음덩어리 위에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나르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순간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그때에 신속하게 날아오르려고 날개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질적인 혜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와 투쟁하여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살지 아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성결 운동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 인들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멸하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음을 지적합니다(히12:1-4). 운동 경기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으로 죄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방법은 죄를 멀리하는 겁니다. 내가 비록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으면 자연히 닮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화를 입게 됩니다. 잠언5:7-9을 보면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데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면 네 수 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죄 짓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설득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살아가라 나는 그리스도 인이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인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불란서 파리를 여행하던 미국 사람이 파리시내의 장신구점에서 중고품 호박목걸이를 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공항에서 너무 많은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그것을 들고 보석 상에 가서 감정의뢰를 하였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그것을 2만5천불에 사겠답니다. 다른 보석상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만5천불을 주겠다고 합니다. 깜작 놀란 주인이 “아니, 이게 고물인데 왜 이렇게 값이 나갑니까?” 권위 있는 보석감정사는 현미경 앞으로 인도하고 “자, 이것을 보세요.” 그 현미경을 들여다 보자 그 사람의 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프롬 나폴레옹 바나파트 투 조세핀”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준 선물의 목걸이였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가치가 나가는 겁니다”라고 말해 주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아무렇게나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값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내게 육신적으로 아무리 큰 유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 같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입니다.
2. 그럴 수는 없느니라. 죄의 종 노릇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에 종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종 노릇할 수 있습니까? 종은 무엇합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우리가 왜 자꾸 범죄하게 됩니까? ‘내가 이러한 죄를 져야 하겠다’라고 다짐하면서 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번씩이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범죄하게 되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종이 되면 벗어나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술의 종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퍽 좋습니다. 자상하고 정다운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렇게 못될 수가 없습니다. 술이 깬 다음에 무어라고 말합니까? ‘그까짓 술 다시는 하지 않는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시 술에 취하여 큰 실수를 범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게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이것 없이는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 안하면 미칩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놀음이라고 합니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을 보세요. 기차 안에서도 합니다. 적은 자동차 안에서도 합니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도 합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네 가지 즉 여자, 술, 마약, 그리고 놀음 중에서 제일은 도박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아내의 머리를 잘라 팔아서도 도박을 했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왜 그것을 못 끊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끊을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쉽게 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죄의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종이라도 죽으면 종이 아닙니다. 종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빚은 갚지 않을 수 없는데 채무자가 죽었습니다. 빚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활동 중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화가 생겼습니다. 답답한 사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이 말이 맞는 말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 화가 난다,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죽기가 어렵지요. 내 성질이 죽으면 화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원망하고 비난합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자 그녀가 말합니다.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가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소리도 없고 전혀 냄새가 안 나거든요.” 잠시동안 진찰을 한 후 의사는 ‘하루에 한 알씩 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여 주면서 몇일 후에 다시 오도록 하였습니다. 몇일 후 그 여성이 다시 의사에게로 왔습니다. 그 때 의사가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처방하여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게서 나오는 가스는 너무 냄새가 지독하거든요.” 그때 의사는 말하기를 “그 약은 당신의 코를 치료하는 약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근본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김익두’라는 깡패가 예수 믿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마침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는데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기차는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앞의 노인이 담뱃대를 김익두 앞에 대고 피웁니다. 피하면 따라가서 피웁니다. 연기를 코에 대고 훅하고 내 품습니다. 화가 난 김익두 부흥강사가 담뱃대를 낚아 체고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김익두가 죽었나 했더니 역시 살아 있구먼” 그럽니다. 가슴이 아찔하게 느꼈던 김익두는 다음 역에서 내려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김익두가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죽여주시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역사해 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기도하는데 누가 등을 두드립니다. 아까 그 노인입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 교회 영수입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 김익두가 그 때 죽었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성질하나 죽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언제 죽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롬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란 연합으로 설명합니다. 극기가 아닙니다. 망각상태에 들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와 함께 세례 받은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라고 한다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신지가 오랜 시간이 되신 분에게 “세례 받으셔야지요” 그러면 “아는 게 있어야 세례 받지요” 그럽니다. 세례는 알아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 있다는 싸인입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 합니다. 사랑하려고 결혼하는 겁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겁니까? 결혼식을 하여야 부부입니까? 같이 살면 부부입니까?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같이 살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는 게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같이 살고 있으면 부부입니다. 세례는 “이미 나는 주님과 일치되어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라고 선포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여자가 옛날 애인을 생각합니다. 그를 그리워 합니다. 남편 모르게 자꾸 만납니다. 이건 잘못된 결혼입니다. 결혼식과 함께 예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례란 ‘바로 예전 것은 지나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의 종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3. 사망의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9절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죽었다고 한다면 사망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세례에 대하여 말해 봅니다. 세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요단 강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다. 세례를 주는 요한도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3:13-15)” 예수께서 세례받는 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시려고 하면 인간들과 같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즉, 물속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물속에 잠길 때에 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물에서 올라올 때에 다시 살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로마6:8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다시 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 할 줄을 앎이로라’ 죽었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죽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두움의 삶은 죽은 겁니다.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숯 장수 집 곁으로 세탁소가 이사 왔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외롭게 살던 숯 장수는 이웃에 세탁소가 온 것에 대하여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같이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때 세탁소 주인은 무어라 하였는가 하면, “자네의 호의는 알겠지만 생각해 보게. 나는 검은 것을 희게 하는 일을 하는데 자네는 흰 것도 검게 하는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나?”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 되는 것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 가계 죽었어” 그럽니다. 이 말은 그 사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업이 살아야 합니다. 건강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 있는 삶이란 빛 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직장에서 혼자만이 예수 믿는데 외로움을 느끼던 자매의 간증입니다. 그녀는 믿음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마음이 좁다는 비난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의욕을 상실하여 그 직장을 그만 두려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사람들은 등불을 어디에 두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자매의 직장은 빛이 필요한 어두운 곳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매는 직장에 계속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사원 중에 1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만들었답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같이 있어 어두운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죄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관계없이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죽었으나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성도입니다. 이제는 생명 있는 삶을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