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 ~ 1555)는 형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장가이자 서예가였다. 안동부사로 있던 1518년에는 퇴계 이황을 향교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현보는 시문에 능하여 우리말 시가를 비롯하여 다수의 시조작품을 창작하였고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시조작가로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소위 강호가도(江湖歌道)로 불리는 문예활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경상도 예안현 분천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호는 농암(聾巖)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 설빈옹(雪靈翁)이라고도 하였다. 분강촌(汾江村)에 있던 그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로 옮겨진 상태다.
농암의 종택에는 고문서류를 비롯하여 전적, 그림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가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202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유물들 가운데서도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은 세간에서 많이 거론되는 가전(家傳) 화첩이다.
‘애일당(愛日堂)’은 분강촌(汾江村)에 있던 종택의 당호(堂號)이고 ‘구경(具慶)’은 ‘양친(兩親)이 다 살아 계시어 경사(慶事)스럽다’는 뜻이다. 농암의 아들 이숙량(李叔樑)이 '부모(父母)를 위하여 모은 시첩(詩帖)'이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은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 1책은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를 비롯한 세 점의 그림과 함께 관련 시(詩)를 모아 첩장(帖裝)한 것이고, 하권 1책은 이현보의 시에 당대의 명사들이 지은 차운시(次韻詩)를 모은 시첩이다.
세 점의 그림 가운데 첫 번째인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는 중종 3년인 1508년, 무진년(戊辰年) 가을에 이현보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한강 변에서 열린 이현보를 위한 전별 잔치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중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 농암종택]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 우리역사넷>
전별회가 열렸던 장소는 제천정(濟川亭)이다. 제천정은 지금의 서울시 보광동 강가 언덕에 있었고, 고려 때부터 조선 초까지는 한강정으로 불렸던 곳이다. 세종 원년에 태종과 세종이 대마도 정벌군의 삼군 도총수 일행에게 환송연을 베풀었던 곳이고,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접대 차원에서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제공되던 장소이기도 했다. 남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나루터 옆이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이나 정릉에서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려서 쉬기에 적당한 곳이어서 세조 때부터 명종 때에 이르기까지 한강 변의 정자들 중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라고도 한다. 맑은 날 동쪽에서 달이 떠오르며 비추는 한강의 강 색깔이 유달리 아름다워서 일직부터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는 이름으로 한성십영(漢城十詠)의 하나로 손꼽혔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중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 농암종택]
두 번째 그림인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燕圖)>는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년(己卯年) 9월에 당시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농암이 경내(境內)의 노인(老人)들을 불러 부정(府庭), 즉 관아 정원에서 잔치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잔치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대부나 천예(賤隸)를 불문한 남녀 노인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에는 인원수가 다 표현되지는 않은 듯하다. 차일을 친 왼쪽에는 남자 노인들이 자리하고 노부인들을 위한 자리는 오른쪽 기와집에 따로 마련하였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중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宴圖)>, 농암종택]
<분천헌연도>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宴圖)>는 중종 21년인 1526년, 병술년(丙戌年) 9월 9일에 이현보가 고향인 분천에서 양친에게 잔치를 베푸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당시 이현보의 나이는 60이었고 부친은 85세, 어머니는 80세였다. 이현보가 귀향하여 양친을 위한 잔치를 베푼다는 소식을 들은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金希壽)가 수연(壽宴)을 주관하고, 여러 고을 수령들을 함께 불렀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으며 무희와 악공, 화공도 불렀다. 참석자들은 모두 축하시를 남겼고, 이후 이현보는 이것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눌재(訥齋) 박상(朴祥)으로 하여금 그것을 기록하게 하고 그림까지 남겼다.
그림 중앙 상단에 보이는 것이 분강촌에 있던 농암종택이다. 우측 바위에 있는 두 건물이 각각 애일당(愛日堂)과 강각(江閣)이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부모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며, ‘강각’은 이현보가 어부가, 농암가 등 강호가도의 국문 시조를 지은 유서 깊은 문학 현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참고 및 인용 : 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 문화원형백과(한국콘텐츠진흥원).
[출처]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