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년의 2차 코사크 반란에 이어 1655년 러시아 군대가 뒤네부르크를 점령하자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브 10세는 리블란트 지방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권이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툼스도르프 휴전 협정(1635년)이 만료되기도 전에 폴란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역사에서 일명 '유혈의 대홍수(Bloody Deluge)'라고 불리는 전란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자누츠 라지비우(Janusz Radziwill)
크지쉬토프 오팔린스키(Krzysztof Opalinski)
당시 폴란드의 지배층은 분열되어 있었고, 내정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대귀족이며 프로테스탄트 교도인 라지비우(Radziwill)와 대(大)폴란드 지방의 대귀족 오팔린스키(Opalinski) 는 반왕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폴란드 왕의 측근으로 있다가 개인적인 사유로 폴란드를 떠나 스웨덴으로 망명한 후 스웨덴 국왕의 고문으로 재직했던 라지예요프스키도 스웨덴이 폴란드를 공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란드 국왕 얀 카지미에스(Jan Kazimierz)
4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대는 2개 부대로 나뉘어서 리투아니아와 대 폴란드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 폴란드의 오팔린스키와 리투아니아의 라지비우는 저항하지 않고 구스타브 군에 항복했다. 라지비우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은 해체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바르샤바는 9월에, 크라코프는 10월에 함락되었다. 폴란드 국왕 얀 카지미에스는 이미 9월 말에 실롱크스로 피신했다. 폴란드 군은 도처에서 저항없이 무너졌다.
폴란드군의 패배 원인은 무엇보다도 지배계층의 이기심과 분열에서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폴란드 귀족들은 스웨덴이 모스크바를 물리칠 경우 모스크바 공국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스웨덴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폴란드가 패배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정치적 목표가 달성되자 폴란드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귀중한 예술품과 도서 등 수많은 문화재가 스웨덴으로 넘어갔다. 도시와 농촌은 극도로 황폐해졌고 폴란드 국민들은 전 국토가 프로테스탄트인 스웨덴에 의해 유린되어 감에 따라, 더욱 카톨릭에 집착하게 되었다.
한편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 국가와 민족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혀졌다. 그러나 위기가 국민들을 뭉치게 했다. 1655년 말부터 폴란드 국민들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스웨덴과의 전투에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크리미아라면, 몽골계 크림 칸국을 말하는 거군요. 1502년에 킵차크 칸국을 병합하고 1571년에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정도로 강성했다가 1783년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합병되었죠. 그리고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바투의 동생 베르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첫댓글 항상 값진 정보를 올려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福 많이 받으시길 _()_.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저 시대의 tatar는 어느 국가를 지칭하는 것인가요?
크리미아, 노가이 타타르를 가리키며, 타타르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습니다.
크리미아, 노가이 타타르. 음... 찾아봐야겠다 ㅎㅎ; 답변 감사합니다~
크리미아라면, 몽골계 크림 칸국을 말하는 거군요. 1502년에 킵차크 칸국을 병합하고 1571년에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정도로 강성했다가 1783년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합병되었죠. 그리고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바투의 동생 베르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아~
노가이는 한 때 킵차크 칸국의 실권자였다가, 우즈벡 칸(혹은 마마이 칸?)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살해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최후의 몽골 유목제국을 참조해야겠군요.
저기요..실례지만 좀 퍼가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