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나 客地
고향땅을 떠난 이들에게 外邦이나 내 나라의 外地는 모두 객지이다.
고고지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와 태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젖을 물며 자라 열 살쯤 성장했다면 고향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며, 학업이나 성장 후의 여러 사정으로 그 땅을 떠난 지 오래일수록 짙은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와류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까지 자랐으며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외갓집 모양은 꽤 선명히 눈앞에 떠오른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우선 맨 먼저 오른쪽에 외양간과 소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고 그쪽으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의 우물과 뒤꼍으로 가는 길이 이어졌으며 앞마당 왼편의 별채로 쓰이는 광(곡식 창고)과 마당 건너 본채와 오른편 사랑채.
여섯 살에 삯꾼의 등에 업혀 칠흑의 38선을 넘어와 서대문 국숫집 앞 적산가옥에 단지 몇 해를 머물다가
6.25 동란과 1.4 후퇴의 격동기를 맞아 雪寒의 엄동에 경북 선산의 낙동강변까지 식구들과 함께 생사를 건 피난길을 헤매었으니 고향의 기억을 간직할 만한 곳이 없다.
그나마 피난 간 그 두해 동안 선산군 高牙面의 고아국민학교를 다닌 세월이 내게는 고향처럼 떠오를까, 이어지는 거의 모든 생애를 객지에서 산 것이다.
어릴 적 열몇 살쯤 될 때까지 한 곳에 살아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억에 선명한 일이란 불에 타 재가 된 집에 아버지의 양복 재단용 큰 가위 하나가 마당에 남아 있던 엄청난 악몽과 몇 년 더 소급해서 별명 ' 닭 모가지 ' 아저씨 등에 업혀 산속의 밤길을 넘어온 무서운 기억이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었으니.
祖國이 가장 불행한 시기였으며 지금은 자세한 기억마저 흐려진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아버지 어머니와 3형제가 生死를 건 避難의 방황을 한 것이 무엇 보다도 간절한 鄕愁가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애틋하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한 苦難이라서?.
그래서 그런지 객지라는 언어는 늘 서글프고 그리우며 현재의 생애와 과거가 함께하는 복합적 時制로 내 주변을 떠도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해 뜨는 과수원길을 걸으며 가로수 하나하나가 새롭게 눈에 들고 찻길에 밝혀지는 신호등 마저 곱고 반가운 것은 객지의 過客이 되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까, 무엇일까.
나그네.
꿈속에서나 짙푸른 새벽의 산책길에서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어느 쪽인지 늘 찻길의 신호등을 눈여겨본다.
붉은 신호등은 루비,
건너가라는 푸른 신호등은 사파이어처럼 곱지만...
다음의 도착지는 객지가 될까 고향이 될까 .
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