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어느 정도 강도 있는 한국교회 비판을 외치면 사뭇 그 반감이 대단했었다. 그런데 이제 목사님나라를 외면하는
현상이 매우 두드러져 가고 있다. 하나님나라와 목사님나라 중의 선택은 엄밀히 따지면 양들의 몫인데 그 속에서 판단력이 상실된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지만 진실한 복음(福音; Good News)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 속 깊이 예
리한 칼날을 들이대어 수술을 감행하신다.
1. Good News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의 특징은 시대에 반하는 현상을 가져온다. 복된 소리, 소리란 Wave 로서 파장을 수반한다. 빛이 Wave 로서 지구
이쪽 까지 도달하듯 소리도 파장이되고, 입자가 되고, 에너지가되고, 실체가 되어 없던 것에서 출발하려니와 종래는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선언이 얼마나 실효적임을 과학적으로 방증하는 양자물리
적 이론을 입증하는 빌미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말씀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WAVE 다.
WAVE가 전우주적 발원의 빅뱅을 연출한다면 복음 또한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선배들이 이것으로 증거를 얻었다(히 11장)
복음, 복된 소리가 시작될 때에는 작은 울림이지만 이것이 파장이 일고, 공명되고, 확산되면서 '살아 운동력이 생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간다. 세례 요한의 외침,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이들이 외치던 것은
소리 였고 그것을 성경은 일컬어 복음이라고 한다. 복음의 결정판은 "돌이켜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목전에서 시작되고
있노라"는 예수님의 외침이다.
왜 복이 있는 소리일까? 이 시대에도 복음이 있을까?
선지자들의 외침은 곧잘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었다. 유대교의 종교 착취적 프레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음
할 때 하나님의 의도는 실종되는가 싶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빛으로 나타난다. 지금 시대도 같다.
지금은 개신교의 거대한 암흑기다. 노아의 때, 이집트 애굽에서, 광야에서, 유대민족의 포로생활, 요한의 빈 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예수님의 시험, 유대교의 견고한 종교 착취적 구조, 카토릭의 암흑 ......그리고 지금은 개신교적 암흑기
가 도래했다. 지금의 복음은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소망해야 한다.
2. 짝퉁교회
사탄 마귀의 주요 공격대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며 그것을 잘못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담의 왕권(다스리는) 행사는
하와의 배신으로 보기 좋게 빗나갔으며, 아벨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한 의로운 제사는 '먹을 것'을 요란스
레 진열한 잘못된 예배의 주인공인 가인에 의해 어긋났다. 제사장 나라로 삼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선민
사상에 물든 유대교의 오만으로 흘러갔고, 예수님의 제자로 시작된 사도적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으로 교회 패권
이 바뀌었으며 카토릭의 미사는 예수님이 바라던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역사로 흘러갔다.
이제 개신교 500년이 흘렀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것이다'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외침이 마틴 루터의 뇌리를 강타했
고 그것이 교회의 숨통을 다시 터 놓았다. 그 개신교의 암흑이 지금 전성기다. 복음은 항상 새로운 시대를 견인한다.
짝퉁교회라는 타이틀은 매우 자극적이고 이단적 소지가 있는 위험한 소재다. 그러나 내 안에 복음이 있으니 그것을 말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다. 지금 성령의 탄식이 요란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와 본질에 목말라 하고 있다.
전에 몇번 언급했던 내용인데 '무엇이 교회인가?'라는 것에 대하여 저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알 것이다. '교회', church,
에클레시아는 그동안 개신교적 프레임에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에 대해 해석하
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적 토대 위에 누구나 예수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운
다라고 해석하여 예배당 건물을 짓고 그 속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돈 몇 푼 들여 부동산을 임대하거나, 수백억원을 들여 예배당을 짓거나해서 종교의식을 집행할 장소를 마련하는
그 패턴을 교회의 전형으로 우리는 잘못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와는 얼마나 다른가?
액면 그대로의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는 것"으로서 마태복음 16장에서 NOW가 아닌 I will build의 '세우리니'이다. 베드로
의 고백이 교회로서 기능한다면 지금 세워져야 하는데 왜 Will build 일까? 미래의 어느 시점이란 말인가?
그렇다. 예수님의 교회는 미래의 어느 시점,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묻기를 "이 때니이까?"라고 했던 시점, 아니다 아직
기다려라 약속한 것을 보내겠다 라고 한 시점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그들에게 임했다.
그것을 맞이하고자 그들은 전혀 힘써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교회)이 왔다. 불같은 것이 그들에게 임했다. 하늘
로부터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WAVE)'가 있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다. 성령이 오신 것이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 그것이 교회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주가 내 안에, 내가 주안에가 성취된 것이다. 그것이 교회다. 성령 시대가 된 것이다. 임마
누엘하시겠다 한 약속이 이루어졌고 세우시겠다고 한 교회가 성취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교회는 따로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목사가
세운 교회는 목사의 교회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다. 조용귀의 교회, 오정헌의 교회, 김혼도의 교회....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산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듯, 은혜로 부어졌듯, 교회라는 것은 수동적(사람 편에서 보았을 때)으로 입혀지는 은혜이지 그것
을 우리가 세운다거나 개척한다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혜사로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보내진
'내주의 언약'을 이루신 증표이다. 교회 설립의 주체는 오직 예수님이며 단회적인 사건이다. 교회는 이미 세워졌다.
이 교회가 오늘날 우리가 피상적으로 마주한 교회인가? 현재의 개신교가 예수님이 꿈꾸던 바로 그 교회의 전형인가?
여러분은 짝퉁교회에 앉아 짝퉁예배에 열심하고 있다.
3. 짝퉁예배
예배란 무엇인가? 준비찬양,...준비기도,...개회선언....대표기도....설교....헌금....축도등 일정한 순서를 갖는 행위를
그동안 우리는 예배라고 불러왔다.
잘못된 예배의 전형에 대한 기원은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예배였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다는 측면에서 아벨은 죽
을 수 밖에 없는 고백으로 자신의 존재적 가엾음을 희생의 제물로 드렸고 가인은 땀과 노동으로 얼룩진 결과물로서의
곡식을 하나님에 자랑스럽게 진열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생활의 곤궁함 가운데 수고하며 애써서 얻은 것을 가인처럼 드린
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땅의 소산을 기원한다. 그것을 목사는 요란하게 축복하며 대신 기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신다. 땅의 소산을 기원하고 바라는 것은 짐승의 우상에게 하는 것이다.
짐승은 이성적인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가 소망하는 것은 '먹을 것'이며 그 먹을 것을 주는 주인을 따르고
좋아한다. 어쩌면 가인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로 정직하게 얻어진 땅의 소산을 기뻐하고 안심했으며 풍성한 수
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 것이었다. 보라 오늘 우리가 하는 예배는 얼마나 가인의 예배를 닮았는가?
가인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엄청난 에덴동산의 흔적을 추억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다. 자신의 식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땅의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하도록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땅의 소산
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동생 아벨은 밑도 끝도 없이 동물의 피흘린 사체를 가져다 놓고 하나님께 제사를 했다
.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았고 자신의 것은 외면을 한 것이다.
가인의 분노는 급기야 아벨을 살해하도록 이르렀다. 아벨만 생각하면 밉고 짜증나고 죽도록 싫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종교적 질투심으로 아벨을 죽인 것이다.
아벨을 살해한 가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묻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질문과 동일하다.
네 형제 아벨(이웃)이 어디 있느냐?
가인의 제사 코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하는 종교성 코드와 매우 유사하다.
4. 참 예배(제사)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은 아벨의 사건 이후에 사람들에게 각인 되었고 그것에 대한 상징적 사건은
야곱과 이삭의 모리아산 번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은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얼마나 기막힌 것인가? 지금 자기의 몸으로 나은 자녀를 불에 태워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자기 자식보다 사랑하는 진실한 사람이거나 사이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희대의 사건이 바로 모리아산 사건이다. 그 사건의 교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분이 온 인류의 희생 제물로서 오신것이다.
그 예수님이 마침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예배의 진리를 설파하고 계신다. 대제사장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율법학자도 아닌 시골 촌구석대기의 아낙에게 그것도 남편을 다섯번이나 바꿔야 했던 사회적으로 어쩌면
따돌림을 받는 여인네에게 건네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일생 일대의 깨달음을 얻는다.
"동네 사람들, 이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산 위에 있는 산당에 가지 않아도 된데요.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데요!"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얼마나 기가막힌 일인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진실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니 이게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진 짐승과 우양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정치가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인정한 제사 지내는 장소에
서 합법적인 제사를 해 왔는데 이제는 직접 하나님께서 찾아 다니신다니 이게 얼마나 기막힌 일이란 말인가?
그러면 그 제사의 시효가 끝났다는 말인가? 번거로운 번제의식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해석은 우리 믿는자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참 제사의 풀이를 이미 던져 놓았다.
"너희 몸을 이웃을 위해 거룩한 산 제사의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진실한 영적 예배다"(롬 12)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이웃을 위해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려 버린다(?) 이야말로 발상의
대 전환이 아닌가? 이것이 참 예배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바 되는 십자가 제사는 아벨의 제사가 그림자이고 기원이며
우리가 종교식 기원을 행하는 땅의 소산을 위한 예배는 가인의 제사가 그 기원이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묻고 계신다.
네 이웃, 네 형제, 너희중 지극히 작은자, 곧 그들 속에 숨어있는 예수님, 가인이 죽여버린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우리가 종교적 가인의 예배에 몰두할 때에 우리가 외면한 아벨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은 언제나 묻고 계셨던 것이다.
짝퉁교회에서 짝퉁예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왕적 제사장의 복음을 언제나 받아들일 것인가?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첫댓글 가인의 제사가 지금의 예배형식과 흡사하다는말씀이 확 와닿는느낌이네요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가인의 제사와 가장 비슷한 제사가 바로 추수감사절 아닐까요? 좀 무섭습니다.
그러네요. 공감합니다.
@iDeaRush 그래서 몇년째 추수감사절을 피하고 있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사랑♡* 사실 모든절기가 필요없지요. ㅠㅠ 먹사들의 생계일터가 되었기에~~~
예수그리스도가 화목제물로서 완벽하심을 우리 스스로가 허물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 아버지하나님께서 무앗이 곤궁하셔서 내게 요구하시는것이 있을까요??(목사들이 직업군이 되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것이지 하나님이 사용하실일은 전혀없지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인이 아닌 삶을 살아내는 무리들아닐까요?
(이제 아버지께 드릴 것은 찬양과 감사 죄스러움이구요
물질은 주님이 그토록 사랑 하시는 소자에게나 베푸심이 어떠한지요?? )
예수님이 스스로 보인 화목 제물의 본, 곧 제사장적 모범을 보이신 것인데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희생과 봉사와 사랑이 필요한 구석지고 그늘진 곳에 몸 소 찾아가셨지요.
제사장이란 곧 봉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일진대
우리에게 당연하게 요구된 것은 그러한 살아서 제물 되는 것이겠지요.
@iDeaRush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이 사랑하시는 거듭난 지체들의 연약함을 돌보고
주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그 분의 사랑을 소개해야겠지요. 샬롬
성경을 요약하면 "사랑" 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나님께 바친다는 그많은 각종헌금과 십일조는
어디에 갔을까요...
그 생각없는 결과가 지금 무엇을 남겼나요???
먹사교 병신도 분들은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된것 같습니다...
성령님 임하시옵소서...
"네 형제 아벨(이웃)이 어디 있느냐?...."
내가 35년 다니던 교회를 출석 안하는 이유임.
헐......35년이나 투자를 했으면 본전 생각에 관두기 어려웠을터인디, 고생 많으셨습니다.
@iDeaRush 저보다 현명하신 분입니다
저는 45년 걸렸습니다ㅠㅠ
공감하며 잘읽었습니다 하늘의 평강으로 승리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파잇팅!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예배...참 좋습니다.
삶 자체가 예배이며 기도입니다.
삶에서 가인이 간과 한 것이 있습니다.
첫 째, 아버지인 아담의 교훈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하느님과의 관계
둘 째,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하느님 사랑
셋 째, 아우인 아벨을 시기해죽였습니다.=>형제간의 우애, 이웃 사랑
그럼에도 하느님은 가인을 용서하십니다.
가인은 살았지만 주검의 DNA가 되었고,
아벨은 죽었지만 믿음 안에서 영원한 삶의 DNA가 되어 살아있습니다.
메일 고맙습니다. 좀 전에 답장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