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dottory/CIOh/6364
|
..........................................................................................................................................................................
청나라나 남명조(이조=대한제국)는...
당시 강한 쇄국정책 기조였었기에...또한 풍수지리학 상...본토에 양이들의 침략로인 철도를 거의 허용하질 않았기에...
현재의 중원 서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우루무치에서 북경까지의 라인은...한 참 후인 몇 십년 전에나 개통되게 된 라인일까 합니다.
서양인들이 구한말의 조선과 청나라의 핵심지역인 발해만 연안에 올려면
철도 라인은 유일하게 현재의 시베리아 철도 라인밖엔 없었단 겁니다.
신장지구 우루무치나 타쉬켄트... 쿠차일대가 과거 중요한 천자의 지역이긴 했었겠으나
고원 빙하수량의 대폭 감소로 인한 사막화로...그 문명의 중심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론 양이와 러시아의 팽창으로 급격히 동으로 밀리게 되는 것이고...
선비조선의 전통 지역인 현 내몽골과 북경일대 산동일대에서 다시 꽃을 피운 것이라 사료됩니다.
타클라마칸 일대와 우루무치 쿠차,하미 일대는...당시의 노래가사 그대로...황성옛터~였던게...구한말의 실정였다 봅니다.
최두환 선생님게선...
경봉(북경~봉천)라인이...하얼빈과 시베리아 철도와 이어진 시기가 1911년 이후 부터라...
이는 당시엔 하얼빈역이 현재의 하얼빈에 있지 않았단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셨으나...
경봉(京奉)라인은...나중에 개통되는 건 맞으나...하얼빈에서 대련을 잇는 동청철도(東淸鐵道)라인은...
일찌감치 1908년 전에 완공되는것으로 나옵니다.
이 라인을 청조(&이조?)로 부터 따 내기 위하여...일본과 엄청난 신경전을 버린 끝에...
하얼빈 까지는 이미 러시아가 역사를를 완공한 상태에서...
청조와 동국조선의 경계선을 지나는 송화강 주변을 타는 동청철도를 개통해...
동국과 청나라 국경지 도시 장춘 봉천...대련항의 부동항을 구축하려다가...
이를 견재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입은 왜놈들에게 깨진게 러일전쟁입니다.
일본인들이 후에 이 동청라인을 보수하고...
청의 심장부인 북경으로 이은 라인이 북경과 봉천을 잇는 경봉선일 것이고...
이걸 내몽골을 통해 외몽골 울란바타르까지..
다시, 시베리아 바이칼 노선과 만나기 전의 수흐바타르역까지... 잇던 공사가 만주철도 공사였을까 합니다.
당연히 이 라인은...일제가 강성한 1920년 전후에나 손대는 라인입니다.
그러나 현 하얼빈역까지는...이미 그 한 참 전에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됐던 것이며...러시아의 무역과 군수의 최고 전략요충지였던 겁니다.
또한,최두환 선생님께서는...
블라디 보스톡까지의 라인이 1916년에나 완공될까 말까인 상황을 보건데...
하얼빈역은 현재의 하얼빈에 있지도 않았지 않았을까 예상하십니다만...
이 블라디 보스톡 항은
청조와 동국조선의 경계지인 송화강 물줄기 방향의 동청라인을 통한 대련항까지의 부동항 개척 라인보다 훨 경재&작전성이 없어...
그저 협상이 잘 못 됐을 경우와... 군사적 다변화를 위해 계획해 보류중이였다가...
실제로 일본과 영국 미국의 방해와...결정적인 러일전쟁 참패로 동청라인이 깨지자 나중에 개설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시베리아 철도의 최고 목표는...
역시, 당시의 세계무역의 신 중심지인 북경과 산동 상해 일대로 모스크바에서 직행하기 위한 라인였었으니여...
청조(&이조?)가 러시아에 이 라인을 허락함은...
어짜피 당시의 혼란상황에선...시베리아 자체는 커녕 중원조차 경영이 어려웠기 때문이요...
아무래도 남방 왜잡족들과..그들을 용병으로 부린 서구 연합군들 보단...러시아를 심정적& 역사적 친밀국으로 생각해 선택했다 보여집니다.
하얼빈,즉 하이빈(哈爾濱)의 지명도
현재도 그렇치만...구한말 때도...현 동북 시베리아 일대에 자주 쓰이던 지명으로 보이며...
합(哈)은...올량합(오랑케)"등의 전체 북방민족 비칭과도 통하며
과거 북방족 전체를 칭하던 통칭인...하(夏)란 지명의 또다른 한자 음차글인 듯 하며...
얼...즉, 이(爾)자 지명도 마찬가지로...전체 북방족들을 이르던 글자인 듯 싶은게...
당시 청나라의 핵심인 중원 동부를 제외한 전 아시아 북방을 다스렸던 종족명이...차하르(짜르)요...
그 한자 표기가 찰합이(察哈爾)이기 때문입니다.
밑에 제가 퍼온... 과거의 한자로 된 주기도문엔
하나님 아버지를...과거엔...이(爾)라 불렀고...아버지나라를 이국(爾國)이라 했던 점으로 보면...
구한말 당시의 "이(爾)"란 글자는...과거 이씨조(명)에서 오랑케로도 쓰던 비칭으로 쓰인게 아닌
청조와 차하르몽골의 입장에선...청나라와 차하르몽골의 고유지역(조상국)을 이르는 글자 중 하나였을 수도 있고...
일부는 자신들 자체의 직할지 중 차하르 몽골족들 세력 일대 지명으로도 쓰였었지 않았나 예상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현재로도...내몽골 일대를 찰합이(차하르)라 부르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12환국 중...내몽골과 아랍에 있었던 선비이국(鮮卑爾國)과 "수밀이국'"에도 모두 이(爾)자가 들어감도 그렇습니다.
합(哈)이나...이(爾)란 지명은...현 중앙아 하미.쿠차일대의 고유지명 만이 아닌
차하르 몽골 전체... 타타르(塔塔爾)..즉, 차하르(察哈爾)"=짜르)요...이 차하르 족들 관경의 강 포구가 하얼빈(哈爾濱)인 것이고...
이 하얼빈이 있던 강도... 흑수여진(완안부)의 강이니...흑룡강(하르강)이라 했던 것이며
그 흑룡강의 본류와 하얼빈의 송화강은 큰 물줄기로 이어지며...길림성..백두산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이 라인의 철도부설을 통해...러시아 수군& 육군이 대련항까지만 구축한다면
러시아로선 말그대로 유라시아 전체의 황제국에 등극하는 세계구도가 짜여지니...목숨을 다 건 사업였을 겁니다.
또한 최두환 선생님께서...
카스피해의 어느 포구가 구한말의 하얼빈(哈爾濱)일 것이란 정황으로...현 하얼빈까진 모스크바에서 직항로가 없다란 정황을 대셨으나...
현 카스피해와 볼가강 라인은...러시아가 중앙아와 유럽사이를 통재하는 항공모함도 왔다갔다 할 정도의 거대 라인이지...
구한말의 핵심 무역지인 중원 동부의 경략관 거리가 먼 장소로 보입니다.
오론강(홀혼강)이라 있잖습니까...?
러시아와 몽골에서 하얼빈을 이어 주었단 그 강여...
네.현 흑룡강 입니다.
흑수(黑水)를 의미하는 하라(카라)..아무르(아무다리야등...)의 지명이 중앙아에도 있다 하여
현재의 흑룡강은 지명 이동된 역사왜곡이다"라 속단하기 어려운게...
과거..흑수말갈부(완안부)인 원나라 등의 북방족들 언어론...깊고 푸른 색들은...대게 흑,헙,하르..등으로 발음했으며
구비치는 물결은 영락없는 거대한 룡(龍)이였기에...대부분의 큰 물줄기가 하르룽,헤이롱(팅)..등으로 불리웠던 것이지...
어느 특정 지역만의 지명이 아니였을 거란 겁니다.
퍼팩트한 검정은...하르(하라,카라)가 아니...타스"로 발음했고여...
이 흑룡강의 중류에...현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이 합류하고...그 핵심 러시아 최종기지가 하얼빈이며...
흑룡강의 상류는...계속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선을 정확히 만들며...서쪽으로 이어지고..
현 외몽골 동북부 헨티산맥에서 동으로 나오는 올혼강(원랜 헬르팅강)과 이어지는 겁니다.
원래 올혼강은...바이칼서 몽골 톨강과 이어지는 라인의 이름이고
톨강과 헤를팅강이 헨티에서 잠시 끈어졌다 만나 헤이룽장강인 흑룡강과 만나는 흑룡강인 것이지...
오론강은 지금은...카라코름(하라호름)에서 바이칼로 가는 라인입니다.
헤르딩 강줄기도...현재는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일부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복잡한 농수로 개발로...살짝 끈어지긴 합니다만...
과거 몽골고원의 강줄기 수량들이...30여년 전만 하더라도 현재의 10배 가까이 많았단 기록을 보건데
만만찮을 물줄기였을 겁니다.
물론,항공모함이나 구축함들이 나댕길 수로는 안 되지만...
수로를 타고 러시아 담비가죽무역상등의 무역상들과 군대들이 이동했을 개연성은 많으며...
겨울에 물이 얼면 썰매로 고속도로 내 달리듯 했을 것이며...강줄기가 항시 무역로가 됨은
꼭히, 배를 띄워서 만이 아닌...항상 갈줄기 옆엔...모래나 자갈길등으로 이워진 고도차가 일정한 자연 길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끊어지는 중간 중간에서 편승기지를 만들어 배를 갈아타도 되는 이치고여...
구한말 기록에...러시아 상인들이 항공모함 같이 큰 배로 하얼빈에 교류하러 왔단 기록은 없습니다.
일단 ,바이칼의 "이르추 쿠츠"부근에 모든 물류와 군수가 집결되고...
그저 작은 상선을 바이칼 동쪽 치타 부근에서 띄워 흑룡강 송화강을 타던지...
바이칼에서 몽골 수흐바타르를 거처 올혼강을 거처 톨강...다시,헤를렝(헤란강)을 타고...흑룡...송화강을 탄 라인였던 겁니다.
이 수로 라인은...중간에 고도차가 나고 살짝 끈기기도 했을 것이니...
러시아 무역선이나 구축함이 모스크바에서 직항로로 쓸 순 없으니...이를 보안키 위해 철도가 필수적인 것이였기에
시베리아 라인의 건설이 절실했던 이유인 것이겠고여...
더 재미있는 건 이겁니다.
당시 서양 열강들과 러시아 모두...청나라와 이조(남명)의 직할 영토엔 철도를 건설치 못했단 정황이 보인단 겁니다.
중앙아시아 라인도...사마르칸트 타쉬켄트 까지 잘 와서는...
신장지구를 가로지르지 못하고...
쌩뚱맞게 기수를 확~! 북쪽으로 틀어...북쪽 투멘카나 톰스크로 올라가 시베리아 철도를 번잡하게 갈아 탑니다.
그래도 당시까진 완전힌 죽지 않았던 ...청(&이조)이 양이들의 침략로이자...자국의 풍수를 망칠 철도개통을 허용치 않은 것일 겁니다.
몽골의 라인도 청조 멸망후 나중에나 개통함은 ...외몽골이 청조의 간접영향은 계속 받고 있었고...
몽골족(차하르)들도...그런 풍수개념은 같았던 것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럼...현 동북삼성의 동청철도(東淸鐵道)건설을 묵인한 건 어떻게 된 것이냐고여...?
거긴 청의 직할지가 아니란 반증이지여...조선(동국)과의 국경지대이기에...다분히 조선(동국)의 관할이란 것이져...
송화강 동쪽을 동청(東淸)이라 불렀고...관리도 서로 다른 장군(행정기관)으로 분류했단 기록이 이를 암시합니다.
러시아 철도는...
청의 직할지를 피해...그 부속령 시베리아와 차하르(찰합이)의 경계를 탄 것이며...
다시 동국조선(동청=북간도)과 청조의 경계인 송화강을 탄 겁니다.
부동항 건설도 북경 밑의 천진항이 아닌...대련항에 건설하는 이유도...거기까지가 이조(차이나)령 동국조선(고려)의 땅이였단 반증같습니다.
동국조선(고려)은...이조(남명)이자 구한말 대한제국의 부속령이니...
이미 양이들과 일제에 굴복하고...러시아를 등에 업어 일제를 견제하려 했던 고종황제의 관할였단 것이져..
당시, 민비도 친러파였고... 그를 학살한 일제에 환멸을 느낀 대한제국 황가의 친 러시아적 행보와...
러시아의 동청철도 건설..대련항 건설계획은...서로 연관점이 직결된단 말씀도 됩니다.
그 지역의 허가권은...황제격인 청조엔 상징적으로만 있던 것이고...동국의 직할 정부인 산동일대의 이조(대한제국)에 더 있었을 것이란 겁니다.
실제로...
동청(東淸)지대의 개발엔...현 하북성과 동북삼성 일대 사람들이 아닌...산동성 일대의 사람들이 동원됐다 함은...
양이들이 만들려 했던... 그 만주의 유대 자치주는...바로 이조의 새론 망명지 중 북방지역...난민촌 건설을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밑에,그 증거 지도를 퍼 옵니다.
.........................................................................................................................................................
두만강 이북 '간도는 조선땅'
1909년 日帝제작 地圖서 ‘증거’ 발견
토문강을 두만강 아닌 송화강 지류로 표기… 中주장 뒤집어
1909년 淸·日협약에 따른 간도의 중국 이양은 근거 없어져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일본이 간도(間島)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측이 만든 것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로 주목된다.
이상태(李相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최근 서지학자 고 이종학(李鍾學)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8일 공개한 이 지도는 ‘제9도(第九圖)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라는 제목 아래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과 그 지류의 흐름을 상세히 그려 놓은 것이다.
지도에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 1’이라고 제작연도와 방식을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 직인과 ‘아홉 번째 지도’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일제 통감부나 군부대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다.
<2004. 9. 9.>
첫댓글 역사를 조작한 마당에 근대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중국 만주의 철도 역사의 년대는 재 검토가 필요합니다. 조작의 손길이 미치니 않는 자료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료 중에 소설, 문인의 글 등이 있으며, 공사 맡은 기록 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머지 않아 역사의 진상은 곧 밝혀집니다.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이제 역사의 진상을 인류에게 드러내야 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역사의 자료는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입니다.
이 하얼빈 등지의 동청철도 역사는...조선만이 아닌...러시아나 서구열강 일제의 잇권이 첨예하게 충돌했던 역사이니...아무리 조작할려도..각자의 잇권들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공동으로 조작 합의가 불가함으로...북만주 송화강 동쪽을 대한제국이라 하지 않고...동청이니...유대 새 이주계획지'라 했던 것 빼곤... 별반 조작이 되지 않았다 보입니다...즉,동국과 대한제국에 관한 부분만 심히 왜곡됐단 겁니다.
글 작성 중 급한 일이 있어 인제 마자 쓰면서...교정 시작 들어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을 갖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야후백과>에서 시베리아를 찾아보면, 동시베리아와 서시베리아로 나뉘어 진다는 내용이 나올 뿐입니다. 또한, 비슷한 크기의 국가인 카자흐스탄과 몽골이 신강성을 기점으로 좌우로 나뉘어 진다는 점이 특이하구요...
본 내용이 논쟁의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카스피해 부근 또는 그 좌측에서 구한말의 한국의 지명이 발견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거의 현대사의 해석을 근본적으로 다시해야 하는 부분이므로, 고증의 신중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일제시대 동북아 만주의 기록들이 모두 완벽히 거짓이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하얼빈(합이빈)이라는 명칭은 고종이후 '순종'시대 밖에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명칭으로 생각됩니다. 이 밖에 인터넷 문헌에서는 다음의 기록이 나와있네요...(http://www.hanatour.com/asp/genexh/gateway_frame.asp?gen_exh_code=G2038&target_url=/asp/travelinfo/if-13000.asp?city_code=HRB).
옛날 금과 청 왕조의 발원지였던 하얼빈은 만주족어로 명성, 명예를 뜻하는 "阿勒锦(아러진)"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근대의 하얼빈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흥성기를 보내면서 가장 일찍 서양식 문화에 개방을 하여 가장 앞선 국제화 성격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말 러시아인들이 이곳에 중동철로를 건설하자 30여개 국가의 16만여 외국인 거주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전례없이 번성하여 하얼빈은 당시 동북아의 가장 부유하면서 유명한 국제 상업도시가 되었다. 중국과 서방문화가 이곳에서 연결, 융합하였고 그런 독특한 문화는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하얼빈은 매우 많은 유럽식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어, 중앙대로를 따라 이어진 1400미터의 긴 거리에는 배전정풍, 바로크풍, 르네상스풍 등의 다양한 정교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여전히 늘어 서있다. 이런 풍경으로 하얼빈은 "동방의 작은 파리" , " 동방의 모스크바: 라는 애칭을 갖고 있기도하다...
이 도시는 19세기 에서 20새기 즉, 1800년~1900년 사이에 급속히 발전했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동방의 문화)의 문화와 서방의 문화가 혼재하여 발달하였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곳이구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19세기말, 즉 1800년대 후기에 러시아인들이 이곳에 '중동철도'를 놓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름이 독특합니다. '중동'이라... 중동은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등의 중앙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하얼빈이 금과 청의 발원지였다면, 카스피해의 북쪽, '아스트라한' 지역이라는 논리가 생겨납니다만... 그 도시가 그 도시라는 이야기 인데요...
글을 모으니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되는 군요.
중동철도란 단어 하나만 가지고...하얼빈이 카스피해 터키나 이란 근처로 이동을 한다...?...상당히 무리가 아닐까요...?...중동철도란 명칭은...동청철도를 중화민국 설립이후 청나라에게서 민국정부가 인수하면서 바꾼 이름입니다...중화(민국)의 동쪽 철도란 말이지...영국인들이 정해준 일방적 명칭인 중앙 아시아란 데서 딴게 아닙니다...해방이훈...다시 장춘철도로 바뀌었다네여...
지극히 상식적인 시각으로 저 위의 철도 노선도를 봐 주십시요...카스피해와 흑해사이..아님, 카스피해와 알알해 사이를 열차로 가는게 경제적이겠습니까...아님, 카스피해의 어느 하얼빈(?)이란 항구에서...기차를 배에 싯고 볼가강까지 가서 다시 내려 놓는게 경제적이겠습니까...?...기차에 실린 화물과 승차 인원들은 또 어떻게 하고여...?..그 당시 기술로...열차를 한 량씩 분해해 화물선으로 들어 옮길 크레인이라도 있었단 말씀이신지여...?
더더우기...일제는 당시만 해도 중원 남동부에서 독립군들과 지지고복고...열강들과 잇권다투하기도 군대와 경제력이 빠듯했을 땝니다...일본이 그때 까지도...그 중심이 동남아에 있었다 가정하더라도...중원의 처절한 패권다툼 와중에...터키 근처까지 가서...러시아와 철도 부설권을 놓고 전쟁을 했다는 말씀이신지여...?...아무리 역사가 왜곡 은폐됐다 하더라도...항상 재야는 있는 법...중동의 전 인구는 ...어찌 당시는 엄청난 세기적 대 공사였던 철도 부설과 그에 의한 일본군과 러시아의 전쟁을 단 한명도 전해듣지 못한 걸까여..?...메이슨들의 조종자인 외계 괴물덜이 최면을 걸어서란 답변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열강들의 전통 군사행동과 정복활동은 군함을 통한 해군력이고...물류도 해운이 가장 효과적이였습니다...엄청난 규모의 해운 조건을 갖춘 흑해함대 노선이 있는데...뭐 하러 바닷길로 기차를 분해해서 실었다 내렸다 조립했다 화물과 인력을 다시 내렸다 실었다 한답니까...?...그냥 살짝만 빗겨서 육지로 직행하면 그만인 것을여...?..시베리아 라인은...이 수로가 중간에 살짝 살짝 끈기기에...이를 보완키 위해 철도가 필수였던 것이겠고여.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금과 청의 발원지라는 설명과 함께, 동서양의 융합된 문화가 번영한 곳이다라는 표현에 주목을 한 것입니다. 사실, 현재의 북경과 만주는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번영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그것이 의문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하얼빈은 1800년도 이후의 청나라의 중심지였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료를 좀더 많이 찾아 보아야 하겠으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1800년도 이후의 역사는 사료적 고증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부분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점점더 흥미진진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