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시리즈 C 브리지 라운드를 마친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는 기업가치 1조원을 돌파해 당초 목표액의 2배 이상인 17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처음부터 이처럼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중순부터 올해 초까지 투자시장에서는 8300억원 규모였던 퓨리오사 AI의 기업가치는 매우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분위기 반전의 첫 불씨를 지핀 것은 미국 빅테크의 메타였다. 메타가 퓨리오사 AI를 약 1조 2000억원에 인수하려다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회사에 대한 투자업계의 시선이 달라졌다. 여기에 더 기름을 부은 것은 한국 새 정부의 AI 지원 기조였다. 1호 국정과제로 'AI 3대 강국'을 내세운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 후 국산 AI 반도체 개발, 100조원 규모의 국민펀드 조성 등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AI 기업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이다.
AI 분야에 대규모 정책 지원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AI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시장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AI 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투자자들이 '어떤 정부 정책의 혜택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프리IPO(상장 전 투자유치)를 추진 중인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도 변화하는 시장 반응을 체감하고 있다. 지난해 SK 계열의 AI 반도체 기업 사피온과 합병해 이미 1조 3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리베리온은 더 높은 가치를 목표로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미 삼성을 투자자로 확보했다. 리베리온 관계자는 "이전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의 관심은 상장을 앞둔 AI 스타트업에 쏠리고 있다. 그동안 한국거래소의 엄격한 상장 심사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까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AI 특례상장 제도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놓으며 자세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한 대형 VC 관계자는 "투자자들이 '3년 이내 상장 추진이 가능한지'를 기준으로 회사를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미파이브와 아크릴 등 이미 예비심사를 신청한 AI 스타트업에 대한 승인 기대감도 커졌다. 업계 관계자는 "상장 절차를 시작한 AI 기업 중에는 '예비심사 청구를 2~3개월 미뤄 더 높은 가치를 받을 걸 그랬다'고 억울해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투자 열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상장 VC 대표는 "특정 테마에서 갑자기 가치가 크게 올랐다는 것은 언젠가 그만큼 떨어질 수도 있는 것으로 투자자와 기업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이번 기회에 AI 생태계를 뒷받침할 자본시장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학균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은 "개인투자자 중심인 코스닥 시장에 기관투자자 유입 통로를 열어주는 차원에서 정책자금으로 구성된 코스닥 활성화 펀드를 만들어야 한다. 코스닥의 10%(약 30조원)가량을 기관투자가가 움직일 수 있어야 한국에도 나스닥 같은 첨단주 환경이 조성되고 건전한 AI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