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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자 알렌은 가게를 나선다. 중산모를 쓰고, 빈자들이 애용하는 하운드딧취(Houndditch) 벼룩시장 옷을 입고 있다. 먼지 구덩이에서 나온 것 치고 중고인데도 봐줄 만하다. 아지랑이 같은 연무가 자욱하다. 투덜거리며 지도를 확인한다.
"참 먼~ 곳에도 묻히셨네-"
새벽 장막 걷힌 지 반 식경도 안 된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는 붐빈다. 파티에서 밤샌 상류층을 태운 마차들이 어슬렁거린다. 옥스브리지 로드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출근하는 노동자들이다. 쫓기듯 서둘러 지나치는 그들을 보니 '중간' 없이 부자와 거지로 나뉘는 빈부 격차가 실감난다. 다른 이들 눈엔 나도 허기지고 각박해 보일까. 알렌은 미간을 좁히고 담배를 문다. 이젠 고칠 수 없게 배여 버린 습관이다.
마분의 악취가 역겹다. 추잡한 세상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는 담배를 미친 듯이 피며 킹 윌리엄 C&SLR 역으로 지향한다. 스토크웰 표를 끊고 기차에 탑승한다. 덜컹거리는 삼등석 칸막이 객실에 시민들이 낑겨있다. 바깥 풍경은 칙칙하다. 스토크웰에서 내린 그는 아침 굶은 공복의 ‘꼬르륵’을 무시하고 걷는다.
언덕을 넘어 변두리로 빠진다. 미로처럼 길이 얽혀 지도를 누차 확인해야 했다. 배그뉴 공동묘지는 후미진 달동네 일대에 있는 초라한 공간이다. 흉흉한 공터에 세워져서 그런지 황폐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굴러 다니는 낙엽. 그러고 보니 가을이군. 공동묘지엔 색동옷 입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솟아 있다. 붉은 잎 휘날리며 선혈의 향연을 보는 착각이 든다. 사진 속엔 부잣집 규수의 모습이었는데, 왜 낡고 을씨년스런 이런 곳에…
묘지를 빙 에워싼 철조망이 감옥 철창 같다. 묘비들은 들쑥날쑥. 묘비에 앉아있는 귀신들의 얼굴을 대충 사진과 쭉 비교한다.
그렇다. 알렌은 두 가지 괴이한 능력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과거의 잔상을 읽어내는 것. 다른 하나는 귀신을 볼 수 있는 시야이다. 사람들은 유령이 원한 갚겠다며 설치고 돌아다니는 줄 알지만, 거짓이다. 미련으로 인해 이승에 남은 귀신은 자신의 시신이 묻힌 장소에 결박 당해있다. 해류에 떠밀린 자는 혼이 되면 영영 바다를 헤맨다. 소싯적부터 문학에도 기술에도 재능이 없던 알렌은 사탄의 요술이라고 매장 당하지 않기 위해 암암리에 상류층의 의뢰 들어주는 걸로 생계를 유지한다. 현실과 엮이는 게 귀찮아 최소 15년 전의 과거나 귀신 연루된 의뢰 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뢰 중엔 실종된 가족을 찾는 이도 있고 단순히 고인과의 추억을 기리는 자도 있는데, 어제 신사처럼 과거의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이도 있다.
고인에게 도리는 지켜야지-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긴 알렌은 저벅저벅 낯익은 얼굴에게 다가간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담. 알렌이라고 합니다."
혼에게 말하는 인간이라니. 기품 있게 앉아있던 귀신이 놀란다. 알렌은 마지못해 예를 갖춘다. 노쇠도 그녀의 미모를 퇴화시키지 못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그 안의 다갈색은 다정하다. 그는 천사 조각상 묘비를 곁눈질한다.
‘Rebekah Rosemary Allnatt
January 21, 1841 - September 3, 1895
Beloved Mother’
주로 레베카라 하면 그리스어의 'Rhebekka'를 따 'Rebecca'로 짓는데. 알렌은 특이한 철자라 생각하며 무릎을 구부린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사진을 뽑아 든다. 귀신의 눈이 더욱 커진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는데… 유감입니다."
입을 벙긋거리지만 귀신은 말을 할 수 없다. 알렌은 그녀의 손을 움켜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뿌리치려 하지만 꽉, 아귀힘으로 억압하고 정신을 모은다. 책장 넘기듯 휘리릭 스치는 기억들 중 원하던 것을 찾는다. 귀신은 저항을 멈춘다.
「호사스러운 파티. 으리으리한 저택은 샹들리에와 정교한 인테리어로 입이 벌어진다. 진주가 백 개 달린 코트를 입은 대부 주최자 크리운 씨가 와인 잔을 높이 치켜든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위하여!"
유미주의자들의 건배가 우렁차게 무도회장을 메운다. 참가자들은 남녀 막론하고 어울려 성적 농담을 주고 받는다. 콧대 높고 도도하기로 악명 높은 레이디 노린스- 한달 전 무려 세 번째 이혼을 한 그녀는 워튼 남작과 맥아담 백작이 스캔들과 정치를 토론하게 내버려 두고 목표물을 바꾼다. 무표정으로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에게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접근한다.
"어머, 베드로 후작님~ 오랜만이에요~"
"……"
남자는 무심하게 까딱한다. 무료한 낯은 그가 얼마나 지루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양스레 콧소리 섞는 노린스를 차갑게 응시한다. 무안해진 레이디는 입술을 깨문다. 그가 테이블에 담배 꽁초를 뭉그러뜨리자 식탁보에 동그란 화상이 생성된다. 술엔 손대지 않고 매캐한 연기만 굴뚝처럼 뱉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벌어진다.
"레이디 노린스…"
"네~?”
그녀는 '그럼 그렇지' 의기양양 웃으며 은근슬쩍 달라 붙는다. 남자는 인상을 쓰고 거칠게 그녀를 떼어낸다. 풍만하기만 한 그녀가 추악하고 불결하다. 애교와 요분질로 사내 정기 빨아먹는 계집. 레이디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붉어진다. 그는 싸늘한 눈빛을 누그러뜨리고 누군가를 고갯짓한다.
"혹시 저 숙녀 분 이름이 뭔지 아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레이디의 눈이 질투의 화염으로 이글거린다. 그렇잖아도 라임라이트를 빼앗겨 눈엣가시인데, 꼬리 치려던 그의 관심마저 가져가다니. 자존심에 쩌어억 금이 간다. '빌어먹을 년-' 그녀는 씨근거리며 앙칼지게 답한다.
"레이디 얼낫이라고 얼낫 백작 딸이에요. 이런 공연한 자리, 별로 참석하지 않는데 백작과 크라운 씨의 친분 때문인지 웬일로 참석을 했네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생긴 건 저래도 뒷소문 안 좋은 년이에요."
"이 중 가장 닳은 걸렌 당신 아닌가?"
"뭐, 뭐라구요?"
"아름다운 숙녀들 중 당신이 좋게 말한 여잔 한 명도 없었어. 투기 작작해, 구질구질하니까. 뿌린 향수보단 비싸 보여야 하지 않나?"
호감 있는 여자에겐 느물느물하고 맘에 안 차는 사람에겐 매정하다 못해 잔인하다. 레이디 노린스는 기가 막혀 헛바람을 삼킨다. 파들파들 떠는 그녈 망설임 없이 지나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원한을 가지든 말든. 그를 건들 수 있는 자는 영국에 없다. 왕족조차도.
방금 전까지의 그처럼 레이디 얼낫은 수다에 끼지 않고 멀찍이 서있다. 레이디 노린스처럼 색기 폴폴 풍기는 요염함은 없다. 허나 눈을 뗄 수 없는 절제된 우아함. 동작 하나하나가 시조며 유수 같다. 십대 후반, 이십 대 초반인지 앳되지만 잔잔한 자태는 농익어 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꼬인다. 인기척에 시선을 든 그녀-
"이름이 뭐지?"
"…얼낫."
"성 말고 당신 이름."
"그대는요?"
"내가 먼저 물었어."
그녀는 그를 찬찬히 본다. 무슨 속셈일까 파악하려나 보다. 이윽고 그녀가 말한다.
"레베카에요."
"…레베카라…"
그는 음미하듯 읊조린다. 은은한 향이 주위를 맴돈다. 인공적인 향수 향은 아니고… 체취? 더 맡으려는 듯 천천히 고갤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린다.
"향기가 좋군…"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숨결 닿은 데가 간지러운지 가볍게 웃는다. 뺨에 입술이 닿을 듯 말듯 여운을 남긴 그는 한 발자국 물러서 그녀를 바라본다.
"아름다워."
남자 참가자들은 그를, 여자 참가자들은 그녀를 시샘 역력히 째린다. 그는 등허리까지 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장님이 태양을 처음 본 기분이야."
"베드로 후작님께서도 아름다우셔요.”
"날 아나?"
"글쎄요? 아마 후작님께서 절 아시는 만큼?"
그가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는 근접한 거리다. 포옹하듯 팔꿈치를 잡는 그의 접촉에도 당황하지 않고 싱긋 웃는다. 그 모습이 그의 뇌간에 전달되어 각인된다. 가을… 다갈색 눈망울을 보자 가을이란 단어가 절로 일치한다. 두근- …가지고 싶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마이 레이디."
그는 살며시 그녀의 장갑을 벗기고 손등 위에 입을 맞춘다.」
도로 또렷해진 알렌의 눈이 흘긋. 귀신은 뭐라 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인이시네요. 특히 젊으셨을 적에. 하마터면 반할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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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이러는 거 실례란 거 압니다만… 저도 먹고 살아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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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마저 보겠습니다."
귀신은 대답이 없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뇌에 파장이 일고 알렌의 초점은 영상의 해일에 묻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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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an Era- 1861년]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식기. 별 다섯 개 레스토랑에 일곱 남녀가 교양을 차리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부채 살랑이며 설레 방귀 끼는 여자들에게 반응 없는 건 중앙 의자의 신사뿐이었다. 연령은 20대 중반으로 어림짐작.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양념된 즙이 흐른다. 세 달을 냉동으로 숙성시킨 최고급 스테이크. 살점을 씹는 입술은 동백색이었다.
그는 그리스 조각상을 인간화한 듯 했다. 강인하나 섬세한 얼굴 선은 신이 친히 빚은 걸작이었다. 특히 화살촉 같은 콧날은 손 베일 듯 했고 눈매가 다부졌다. 암회색 스퀘어 숄더 프록코트와 몽환적인 느낌을 내는 아쿠아 블루 눈. 말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배 채우는 데만 몰두하는 그에게 레이디들은 추파를 던졌다. 새내기 레이디 라일라가 눈을 반짝이며 레이디 앤에게 물었다.
"저 남자 대체 누구에요?"
앤은 라일라가 가리키는 사람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꿈도 크지, 네 까짓 게 어딜 넘봐?'라는 비웃음이었다.
"몰라서 물어요? 베드로 후작님이잖아요."
"…세상에…"
"소문대로 외모가 출중하시죠? 아, 저 눈빛에 잠도 설칠 지경이라니까요. 나이도 올해 겨우 스물 넷. 저런 분께 시집을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고 떵떵거리며 호강할 탠데."
"그야말로 인생역전, 팔자 피고 출세하는 거죠. 하지만 관심 떼요. 조만간 앨리스 공주님과 혼인하실 거란 소문이 자자하니."
라임 디핑 오일에 빵을 찍으며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쏘았다. 라일라는 풀이 죽었지만 계속해서 신사를 뜨겁게 바라봤다. 그는 구설수에 가장 많이 오르락 내리는 희대의 스캔들 메이커, 신(新) 쾌락주의 열풍의 주도자, 유미주의의 결정체. 그의 아름다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입에서 침이 나도록 황홀했다.
엘러릭 하웍 베드로(Alerick Howark Bedloe). 유서 깊은 베드로 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11대 2남 중 차남. 그의 형, 제 7대 베드로 공작, 에드먼드는 수완이 대단한 상술 지략가로써 아버지가 남긴 사업을 훌륭히 꾸려내 가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타고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식기 공장 기업은 상상만 하던 재산을 불렸고 공작의 마당발 영향력에 왕가마저 눈치를 보는 실정이었다. 베드로 가의 영토, 윗폴크(Whitfolk)는 길포드의 남부에 위치한 풍옥한 땅으로 무릉도원이라 했다. 전 대에 본가를 런던으로 옮기며 별장이 된 윗폴크의 저택은 엘러릭에게 유증되었다. 전통대로라면 차대 베드로 공작인 에드먼드의 장남, 헨리가 윗폴크를 차지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6대 베드로 공작은 늘그막에 얻은 둘째를 매우 귀여워했고 그의 뜻에 따라 헨리는 영국 북서쪽에 있는 더월(Durwall)의 후작이 되었다.
내로라하는 상원들과 존속한 사이로 검찰은 물론 의회까지 쥐락펴락하는 가문. 엘러릭은 장사에도 정치에도 무신경했지만 후작의 위치, 아버지의 유산, 형의 배경으로 그 역시 거물이었다. 영국 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형제는 막강했다. 엘러릭은 그의 깊은 쾌락주의 사상과 외모로도 저명했다.
금단의 열매, 에덴의 사과. 그것이 엘러릭 베드로 후작.
엘러릭은 내내 상념에 잠겨 있었다. 시계를 이따금 올려다봤다. 포도주를 들이키곤 담배를 물었다. 굳은 살 없는 거미 같은 손가락이 탁자를 두들겼다. 체스 판을 두고 다음 수를 어디에 놓을까 고민하듯-
-툭. 툭. 툭.-
건반처럼 나무 표면을 유린한다.
-툭. 툭. 툭. 툭… 툭……-
그는 다리를 풀고 냅킨을 치웠다. 모자와 코트를 챙기며 그가 일어서자 사람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실례하겠소."
"벌써 가시게요? 아니, 왜 좀 더 있지 않으시고…"
"두 코스와 후식이 아직 남았네만."
"됐습니다."
"그래도…"
엘러릭은 아쉬워하는 레이디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갔다.
점심 나들이에서 곤죽이 되 돌아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레이디 마리아는 만날 때마다 진을 쏙 빼놓는다. 기침했을 땐 해가 진 뒤였다. 어둑어둑함이 태양의 마지막 자취를 쫓아내고 있었다. 몇 시간을 잔 거지… 레베카는 한숨 쉬며 작은 서재로 갔다. 그 곳은 원래 루퍼의 것이었지만 이젠 그녀 전용이었다.
책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북한 편지들. 그녀는 맨 위에 올려진 편지 봉투 봉인을 뜯었지만 내용을 읽기 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달칵-
"무슨 일이에요?"
"새 전보가 당도했습니다."
구김 없고 철두철미한 집사, 도미닉 머시에였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로는 프랑스인보단 독일인에 더 가까웠다. 도미닉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무적인 얼굴로 전보를 건넨 뒤 힁허케 나갔다. 레베카는 편지를 내려놓고 접힌 전보를 펼쳤다.
[4월 30일. 저녁 7시, 코벤트 가든.]
코벤트 가든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별명이었다. 오페라, 연극, 파티, 저녁 만찬에 초대 받는 건 일상사지만 이름도 없는 통보라니. 게다가 4월 30일이면 오늘이다. 그녀는 순간 베드로 후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미닉."
크지 않은 음성이었는데도 도미닉은 즉각 문을 열고 나타나 예우를 갖췄다.
"부르셨습니까."
"지금이 몇 시죠?"
"6시 8분 전입니다."
촉박하지만 늦지 않을 순 있다. 그녀는 비스듬히 미소를 머금었다.
"가 레이디 콜렛께 저녁 만찬에 참석치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하지만 그 전에 마차부터 준비해줄래요?”
"어디로 가십니까?"
"코벤트 가든이요. 아무래도 베드로 후작님께서 다음 심심풀이로 날 지목하신 것 같네요."
도미닉은 눈썹이 꿈틀댔지만 변함없는 기계음을 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흥미로이 전보를 보다 창가에 기댔다. 솔솔 바람에 맡긴 무방비한 모습이 아름다웠다. 도미닉은 명령을 거행하러 가고 레베카는 홀로 남아 저녁 공기를 만끽했다. 청량하고 아득한 기분. 영혼까지 파헤칠 것 같았던 후작의 아쿠아 마린 눈이 아른거리고, 그녀의 입가에 다시금 옅은 곡선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