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많이 유통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바이마르 공화국의 인플레이션]
바이마르 공화국의 인플레이션은 ‘돈이 많아질수록 가난해지는’ 역설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숫자 몇 개로 요약하면 간단하다.
전쟁 전 1달러는 약 4.2마르크였는데, 1923년 11월엔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가 됐다. 같은 달 새 화폐 렌텐마르크가 “1렌텐마르크 = 구(종이)마르크 1조”라는 교환비로 도입되었고, 그 즉시 물가상승은 멈췄다. 그러나 이 극단적 변화를 만든 과정은, 전쟁 배상과 정치적 충격, 재정적자의 화폐발행, 심리·행동의 연쇄가 맞물린 전형적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교본이었다.
전쟁 직후 독일 국가는 전쟁채무와 배상금이라는 거대한 고정비용을 떠안았다. 배상은 ‘금마르크’(사실상 금·외화 기준)로 정해졌지만, 세수는 경기침체로 줄어들었다. 정부는 적자를 메우려 국채를 더 발행했고, 이를 중앙은행이 인수하며 통화량이 빠르게 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벨기에의 루르 점령이 결정타였다. 석탄·철강의 심장부가 군사 점령되자 정부는 ‘소극적 저항’—파업과 생산 중단—을 지원금으로 뒷받침했다. 생산이 줄어드는 가운데 임금·보조금·공무원 급여를 계속 주려면 방법은 하나, 돈을 더 찍는 일이었다. ‘재화는 줄고, 돈만 늘어나는’ 비대칭이 만들어지자 가격은 날뛰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행동이 그 불을 키웠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체감하는 가장 쉬운 장면은 ‘임금-가격-시간’의 삼각형이다. 한 예로, 어떤 노동자가 일주일치 임금 1억 마르크를 금요일 오후에 받는다고 하자. 만약 물가가 ‘3일마다 두 배’로 뛴다면, 그는 월요일 아침에 받는 것보다 금요일 오후에 받는 임금의 실질가치가 이미 절반으로 떨어진 상태다. 그래서 1923년 여름부터 많은 사업장은 하루 두 번, 심지어 오전·오후 교대로 임금을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봉투를 받자마자 공장 문 밖의 상점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가치 없는 종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빵집의 하루도 바뀌었다. 아침 7시에 1천만 마르크였던 빵 한 덩이는 점심엔 2천만, 저녁엔 5천만이 됐다. 주인은 하루에 가격표를 여러 번 갈아 끼웠다. 손님들은 가격이 더 오르기 전 사재기를 원했지만, 주인도 밀가루를 내일 더 비싸게 살 것을 알기에 오늘 창고를 비워 팔 이유가 줄어든다. 그렇게 거래 자체가 마비되는 ‘기대 인플레이션의 역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중산층 가정의 저축통장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됐다. 평생 모은 10만 마르크로 자녀의 대학등록금을 계획했던 교수는, 등록 시작일엔 그 돈으로 지하철 한 번 타기도 어려웠다. 연금생활자는 특히 취약했다. 고정 명목소득은 실질가치가 증발했고, 월세 계약은 ‘달력의 시간’이 아니라 ‘물가의 시간’ 속에서 무력해졌다. 그래서 임대인들은 월세를 ‘밀가루 몇 킬로그램’, ‘석탄 몇 포대’처럼 실물 기준으로 바꾸려 했다. 즉 돈이 신뢰를 잃자, 사회는 자연스럽게 물물교환과 ‘실물표시’로 후퇴했다.
화폐의 얼굴도 일상적으로 일그러졌다. 시·군·기업이 자체적으로 찍어낸 ‘노트겔트(Notgeld·긴급화폐)’가 시장을 메웠고, 우표·열차표에는 억·십억 단위로 덧인쇄가 붙었다. 은행은 수레로 가득 실은 지폐를 받아 장부에 ‘구 마르크 몇 조’로 적었고, 강도는 현금 수레보다 수레 자체를 훔치는 게 이득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상점 계산대 뒤에는 계산기는커녕 ‘0을 몇 개 더 붙일지’ 적어둔 칠판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끝판’으로 갔는가. 첫째, 재정의 구조적 적자가 있었다. 배상금과 복지·보조금·공무원 급여는 줄이기 어렵고, 세수는 경기에 민감하다. 둘째, 통화공급 확대가 ‘가격 상승 → 더 빨리 쓰려는 심리 → 화폐유통속도 상승 → 추가 물가상승’의 자기강화 고리에 들어갔다. 셋째, 루르 점령과 정치적 극한 대립이 ‘내일은 더 나쁠 것’이라는 기대를 고착시켰다. 마지막으로, 은행의 단기신용이 명목금액 기준으로 폭증하며 기업이 ‘빚으로 재고를 사서 바로 팔아 차익을 얻는’ 투기형 경영으로 기울었다.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물가상승을 이익원천으로 삼는 경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겼다. 대출을 많이 끼고 공장을 소유한 일부 산업자본가, 해외에 수출해서 외화수입을 벌던 기업, 재고·토지 같은 실물을 가진 이들은 채무를 ‘인플레이션이 갚아주게’ 만들었다. 독일 언론은 당시 이들을 ‘인플레이션의 승자’라 불렀다. 반대로, 임금·연금·저축이라는 ‘명목소득·금융자산’ 중심의 중산층은 가장 크게 무너졌다. 계층 간 불신과 정치적 급진화의 토양이 여기서 생겼다. 다만 나치가 권력을 잡는 결정적 계기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실업 대폭증이라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1923년의 상처가 ‘제도 신뢰의 축적’을 무너뜨린 토대였고, 1929년은 그 폐허 위에 폭풍을 불러온 셈이다.
종말은 의외로 빨랐다. 1923년 11월, 통화개혁의 핵심은 두 줄로 요약된다. 첫째, 렌텐마르크라는 ‘수량 제한된 새 화폐’를 도입했다. 이 화폐는 금 보유가 아니라 ‘토지·공장·철도 등 실물자산에 대한 담보(렌텐·지대 수입)’를 기반으로 발행 총량을 엄격히 묶었다. 둘째, 재정은 보조금·임금 지급을 긴축하고, 중앙은행의 적자 화폐화(국채 직접인수)를 멈췄다. ‘돈을 덜 찍고, 찍을 수 없게 만들며, 찍을 이유(재정적자)도 줄이는’ 삼박자가 맞자, 가격은 놀랍도록 빠르게 멈춰 섰다. 루르에서의 대치 완화, 국제 협조(이듬해 도스 플랜을 통한 배상·차관 조정)도 안정의 외부기둥이 됐다.
이 경험에서 얻는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 인플레이션은 ‘통화량’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대와 제도 신뢰’의 문제다. 같은 돈을 찍어도, 사람들이 내일의 규칙을 믿으면 속도는 통제된다. 둘째, 재정·통화·정치가 서로를 망가뜨리는 고리를 만들면, 기술적 처방만으로는 늦다. 바이마르의 진짜 비극은 숫자보다 ‘국가 약속의 신뢰’가 무너진 일이었다. 셋째, 끝내는 제도가 문제를 해결한다. 발행총량에 대한 단단한 약속, 적자화폐화를 금지하는 규율, 국제적 안전판이 결합되면, 하이퍼인플레이션조차 비교적 짧은 시계로 멈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숫자 하나를 일상어로 번역해 보자. ‘1달러 = 4조 2천억 마르크’라는 말은, “오늘 아침 빵 한 덩이 값이 저녁엔 버스요금도 못 낼지 모른다”는 공포의 다른 표현이다. 돈이 가격표를 따라가지 못할 때, 사람들은 가격표 대신 규칙을 찾는다. 바이마르가 남긴 것은 그래서 ‘돈의 기술’이 아니라 ‘규칙의 정치’였다. 인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의 문제이기 전에, 공동체가 내일을 함께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임을—그 혹독한 실험은 이미 한 번 증명해 주었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