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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가측(葬陶家側)
오(吳)나라의 애주가인 정천평(鄭天平)이 임종때 유언하기를 질그릇 굽는 사람의 집 옆에 묻어 달라고 한 일로, 후에 질그릇 굽는 사람이 무덤의 흙을 파서 술병을 만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葬 : 장사지낼 장(艹/9)
陶 : 질그릇 도(阝/8)
家 : 집 가(宀/7)
側 : 곁 측(亻/9)
출전 : 삼국지(三國志) 오주 손권전(吳主孫權傳)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서도 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 한 소원을 의미하는 이 성어는 삼국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신하인 애주가 정천평(鄭天平)의 일화에서 연유한다.
삼국지(三國志) 오주 손권전(吳主孫權傳)의 주(注)에 장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서(吳書)에서 말한다. 정천(鄭泉)의 자는 문연(文淵)이고, 진군(陳郡)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았으며 기이한 뜻을 품고 있었으며, 천성이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吳書曰: 鄭泉字文淵, 陳郡人. 博學有奇志, 而性嗜酒.
그는 틈만 나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맛 좋은 술 500곡(1곡; 10말)를 배에 가득 실어 사시사철 술에 빠져 첨벙거리고, 거기에 잠수하여 마셔대다가 이내 피곤해지면, 그제야 음식을 먹을 것이다. 술이 떨어질 경우 다시 채우면 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其間居每曰: 原得美酒滿五百斛船, 以四時甘脆置兩頭, 反覆沒飲之, 憊即住而啖餚膳. 酒有斗升減, 隨即益之, 不亦快乎.
정천은 임종에 이르러 문중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부디 나를 질그릇 굽는 집 옆에 묻어주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내 몸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잘 되면 그 흙으로 술병을 빚게 될 것이니, 그때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걸세.'
泉臨卒, 謂同類曰: 必葬我陶家之側, 庶百歲之後化而成土, 幸見取為酒壺, 實獲我心矣.
三國志 卷47 吳志 吳主孫權傳
孫權, 字仲謀. 兄策旣定諸郡, 時權年十五, 以爲陽羨長。
손권은 자가 중모(仲謨)이다. 그의 형 손책이 강동의 여러 현을 평정했을 때, 손권은 나이가 15세였는데, 양선현(陽羨賢)의 장(長)으로 임명됐다.
郡察孝廉, 州舉茂才, 行奉義校尉。
그는 군에서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주에서 무재로 천거되었으며, 봉의교위(奉義校尉)를 대행했다.
漢以策遠修職貢, 遣使者劉琬加錫命。
한나라 조정에서는 손책이 멀리 있으면서도 신하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공물을 상납했으므로 사자 유완(劉琬)을 보내 작위와 관복을 주었다.
琬語人曰: 吾觀孫氏兄弟雖各才秀明達, 然皆祿祚不終. 惟中弟孝廉, 形貌奇偉, 骨體不恆, 有大貴之表, 年又最壽. 爾試識之。
유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가 보건대, 손씨(孫氏) 형제는 비록 각기 재능이 출중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효렴(손권)만은 모습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골상(骨相)도 평벙하지 않아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있으며, 수명 또한 가장 깁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시험삼아 기억하십시오.'
○ 建安四年, 從策征廬江太守劉勳. 勳破, 進討黃祖於沙羨。
건안 4년(199), 손권은 손책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을 징벌하러 갔다. 유훈을 격파한 후, 진군하여 사선(沙羨)에서 황조를 토벌했다.
○ 五年. 策薨, 以事授權, 權哭未及息。
5년(200), 손책이 죽게 되자, 대사를 손권에게 맡겼다.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策長史張昭謂權曰: 孝廉, 此寧哭時邪? 且周公立法而伯禽不師, 非欲違父, 時不得行也。
손책의 장사 장소가 손권에게 말했다. '효렴, 이 어찌 울고 있을 때입니까? 더구나 주공(周公)이 상례(喪禮)를 세웠으나 아들 백금(伯禽)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를 거스르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부득이 상례를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況今奸宄競逐, 豺狼滿道, 乃欲哀親戚, 顧禮制, 是猶開門而揖盜, 未可以爲仁也。
하물며 현재 사악한 자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시랑이 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 차 있는데, 오히려 가까이 있는 자(손책)를 애도하려고 상례의 규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을 열고 강도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지, 인(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乃改易權服, 扶令上馬, 使出巡軍。
그리고 손권의 상복을 바꿔 입게 하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도록 했다.
是, 惟有會稽, 吳郡, 丹楊, 豫章, 廬陵, 然深險之地猶未盡從。
이 당시 손권은 오직 회계, 오군, 단양, 예장, 여릉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중 몇몇 군은 멀리 험준한 곳으로서 아직 전부 복속되지는 않았다.
而天下英豪布在州郡, 賓旅寄寓之士以安危去就爲意, 未有君臣之固。
그리고 천하의 영웅과 호걸들이 각 주와 군에 퍼져 있었으며, 빈객으로 의탁하고 있는 선비들도 개인의 안위(安危)로서 자신이 가서 머물 곳을 결정하였으므로, 군주와 신하의 두터운 관계는 없었다.
張昭周瑜等謂權可與共成大業, 故委心而服事焉。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자신들과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맡기고 손권에게 종하여 섬겼다.
曹公表權爲討虜將軍, 領會稽太守, 屯吳, 使丞之郡行文書事。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손권은 오에 주둔하면서 오군의 승(丞)을 회계군으로 보내 문서와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待張昭以師傅之禮, 而周瑜程普呂範等爲將率。
손권은 장소를 태사, 태부의 예로써 대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招延俊秀, 聘求名士, 魯肅諸葛瑾等始爲賓客。
재능이 걸출한 사람들을 부르고, 예로써 명망있는 선비를 초빙하였으므로 노숙(魯肅), 제갈근 등이 비로소 빈객이 되었다.
分部諸將, 鎮撫山越, 討不從命。
손권은 부장들을 각지로 파견해, 산월족(山越族)을 진압하고 어루만졌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했다.
○ 七年, 權母吳氏薨。
7년(202), 손권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세상을 떠났다.
○ 八年, 權西伐黃祖, 破其舟軍, 惟城未克, 而山寇復動。
8년(203), 손권은 서쪽으로 황조를 토벌하러 가서 그의 수군을 격파시켰으나 오직 성만큼은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산월족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還過豫章, 使呂範平鄱陽, 會稽程普討樂安, 太史慈領海昏。
그래서 손권은 군대를 돌려 예장을 지나와서 여범으로 하여금 파양( 陽)을 평정하도록 하고, 정보에게는 악안(樂安)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태사자(太史慈)에게는 해혼(海昏)을 다스리도록 했다.
韓當, 周泰, 呂蒙等爲劇縣令長。
한당, 주태, 여몽 등은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는 여러 현의 현령이나 장으로 임명됐다.
○ 九年, 權弟丹楊太守翊爲左右所害, 以從兄瑜代翊。
9년(204), 손권의 동생인 단양태수 손익이 측근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촌형 손유(孫瑜)가 손익을 대신했다.
○ 十年, 權使賀齊討上饒, 分爲建平縣。
10년(205), 손권은 하제(賀齊)에게 상요(上饒)를 토벌하도록 하고, 상요를 분할하여 건평현(建平縣)을 만들었다.
○ 十二年, 西征黃祖, 虜其人民而還。
12년(207), 서쪽으로 황조를 정벌하여 그의 관리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 十三年春, 權復征黃祖, 祖先遣舟兵拒軍, 都尉呂蒙破其前鋒, 而淩統, 董襲等盡銳攻之, 遂屠其城。
13년(208) 봄, 손권은 또 다시 황조를 정벌하러 갔다. 황조는 먼저 수군을 파견하여 손권의 군대를 막았는데, 도위 여몽이 황조의 선봉을 격파시키고, 능통( 統)과 동습(董襲) 등이 모든 정예부대로 황조를 공격하여 마침내 그의 성을 함락시켰다.
祖挺身亡走, 騎士馮則追梟其首, 虜其男女數萬口。
황조는 혼자 몸으로 달아났지만, 기사 풍칙(馮則)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고, 그의 부하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是歳,使賀齊討黟歙, 分歙爲始新, 新定犂陽休陽縣, 以六縣爲新都郡。
이 해, 하제에게 이현(黟縣),섭현(歙縣)을 토벌하도록 하고, 흡현을 분할하여 시신현(始新縣), 신정현(新定縣), 여양현(犂陽縣), 휴양현(休陽縣)을 만들었으며, 이 여섯 현으로 신도군(新都郡)을 만들었다.
荊州牧劉表死, 魯肅乞奉命弔表二子, 且以觀變。
형주목 유표가 죽자, 노숙이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 아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형주의 변화를 관찰하기를 원했다.
肅未到, 而曹公已臨其境, 表子琮舉眾以降。
노숙이 형주에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이미 변방지역까지 진군해 왔으므로,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은 무리를 바치고 항복했다.
劉備欲南濟江, 肅與相見, 因傳權旨, 爲陳成敗。
유비는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노숙과 만나게 되었다. 노숙은 그 기회에 손권의 뜻을 전달하고, 그를 위해 오늘 이후 일의 성패(成敗)에 대해 진술했다.
備進住夏口, 使諸葛亮詣權, 權遣周瑜程普等行。
유비는 진군하여 하구(夏口)에서 주둔하면서 제갈양을 손권에게 보내 만나도록 했다. 손권은 주유와 정보 등을 유비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是時曹公新得表眾, 形勢甚盛。諸議者皆望風畏懼, 多勸權迎之。
이때 조조는 방금 유표의 병력을 얻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손권의 많은 모사들은 모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 하였으며,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를 맞아들여 항복하도록 권유했다.
惟瑜肅執拒之儀, 意與權同。
오직 주유와 노숙만이 조조에게 저항할 것을 주장하여 손권과 뜻을 같이 했다.
瑜普爲左右督, 各領萬人, 與備俱進, 遇於赤壁, 大破曹公軍。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左右督)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인솔하여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赤壁)에서 맞부딪쳐 조조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公燒其餘船引退, 士卒饑疫, 死者大半。
조조는 남아 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였으므로 죽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備瑜等復追至南郡。
유비와 주유 등은 또 남군(南郡)까지 추격했다.
曹公遂北還, 留曹仁徐晃於江陵, 使樂進守襄陽。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오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時甘寧在夷陵, 爲仁黨所圍, 用呂蒙計, 留淩統以拒仁, 以其半救寧, 軍以勝反。
그 당시 감녕(甘寧)은 이릉(夷陵)에서 조인의 부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써서 능통을 남겨 조인에게 저항하도록 하면서, 그 중 절반의 병력은 감녕을 원조했다. 이 때문에 오나라 군대는 승리하여 돌아왔다.
權自率眾圍合肥, 使張昭攻九江之當塗。
손권은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합비를 포위하고, 장소에게 구강군의 당도현(當塗縣)을 공격하도록 했다.
昭兵不利, 權攻城逾月不能下。
장소의 병력은 불리했는데, 손권은 성을 공격한 지 한달이 넘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曹公自荊州還, 遣張喜將騎赴合肥。
조조는 형주에서 돌아와 장희(張喜)를 보내 기병을 이끌고 합비로 가도록 했다.
未至, 權退。
조조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후퇴했다.
○ 十四年, 瑜仁相守歳餘, 所殺傷甚眾。
14년(209),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여가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仁委城走。權以瑜爲南郡太守。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劉備表權行車騎將軍, 領徐州牧。
備領荊州牧, 屯公安。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유비는 형주목을 맡아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 十五年, 分豫章爲鄱陽郡, 分長沙爲漢昌郡, 以魯肅爲太守, 屯陸口。
15년(210), 예장을 분할하여 파양군( 陽郡)을 만들고, 장사군을 나누어 한창군(漢昌郡)을 두었으며, 노숙을 태수로 임명하여 육구(陸口)에 주둔하도록 했다.
○ 十六年, 權徙治秣陵。
16년(211), 손권이 관소를 말릉( 陵)으로 옮겼다.
明年, 城石頭, 改秣陵爲建業。
다음해, 석두성(石頭城)을 수축하고 말릉을 건업(建業)으로 고쳤다.
聞曹公將來侵, 作濡須塢。
조조가 장차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수오(濡須塢)를 만들었다.
○ 十八年正月, 曹公攻濡須, 權與相拒月餘。
18년(213) 정월, 조조가 유수를 공격해 손권과 한달 남짓 서로 대치했다.
曹公望權軍, 歎其齊肅, 乃退。
조조는 멀리 손권의 군대를 보고 그들의 정제하고 엄숙함을 찬탄하고는 곧 물러갔다.
初, 曹公恐江濱郡縣爲權所略, 徵令內移。
당초에 조조는 장강 북쪽 해안의 군과 현을 손권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지(內地)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民轉相驚, 自廬江九江蘄春廣陵戸十餘萬皆東渡江。江西遂虛, 合肥以南惟有皖城。
백성들은 서로 놀랐으며 여강(廬江), 구강, 기춘(기春), 광릉의 10여 만 호가 모두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 장강 서쪽은 그래서 텅 비게 되어 합비 남쪽으로는 오직 환성( 城)만이 있게 되었다.
○ 十九年五月, 權征皖城。
19년(214) 5월, 손권이 환성을 정벌했다.
閏月, 克之. 獲廬江太守朱光及參軍董和, 男女數萬口。是歳劉備定蜀。
윤달에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태수 주광(朱光)과 참군 동화(董和),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權以備已得益州, 令諸葛瑾從求荊州諸郡。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備不許, 曰: 吾方圖涼州, 涼州定, 乃盡以荊州與吳耳。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
權曰: 此假而不反, 而欲以虛辭引歳。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遂置南三郡長吏, 關羽盡逐之。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權大怒, 乃遣呂蒙督鮮於丹, 徐忠, 孫規等兵二萬取長沙, 零陵, 桂陽三郡;使魯肅以萬人屯巴丘以御關羽。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鮮于丹), 서충(徐忠), 손규(孫規)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權住陸口, 爲諸軍節度。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蒙到, 二郡皆服, 惟零陵太守郝普未下。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郝普)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會備到公安, 使關羽將三萬兵至益陽, 權乃召蒙等使還助肅。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益陽)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蒙使人誘普, 普降。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盡得三郡將守, 因引軍還, 與孫皎潘璋並魯肅兵並進, 拒羽於益陽。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孫皎), 반장(潘璋)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未戰, 會曹公入漢中, 備懼失益州, 使使求和。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강화하도록 했다.
權令諸葛瑾報, 更尋盟好。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遂分荊州長沙江夏桂陽以東屬權, 南郡零陵武陵以西屬備。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江夏),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귀속시키고, 남군, 영릉, 무릉(武陵)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備歸, 而曹公已還。權反自陸口, 遂征合肥。合肥未下, 徹軍還。
손권은 육구로부터 돌아와 바로 합비를 정벌하려고 했다. 합비를 공략할 수 없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려 했다.
兵皆就路, 權與淩統甘寧等在津北爲魏將張遼所襲, 統等以死扞權. 權乘駿馬越津橋得去。
병사들이 모두 길에 올랐을 때, 손권은 능통, 감녕 등과 함께 진(津) 북쪽에서 위나라 장수 장료(張遼)의 습격을 받았다. 능통 등이 죽을 각오로 손권을
방비했다. 그 사이 손권은 준마를 타고 진교(津橋)를 넘어 달아났다.
○ 二十一年冬, 曹公次於居巢, 遂攻濡須。
21년(216) 겨울, 조조는 거소(居巢)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곧이어 유수를 공격했다.
○ 二十二年春, 權令都尉徐詳詣曹公請降, 公報使修好, 誓重結婚。
22년(217) 봄, 손권은 도위 서상(徐詳)을 파견하여 조조를 만나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 화의에 동의한다고 대답하고 새로 결혼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 二十三年十月, 權將如吳, 親乘馬射虎於庱亭. 馬爲虎所傷, 權投以雙戟, 虎卻廢. 常從張世擊以戈, 獲之。
23년(218) 10월, 손권은 장차 오군으로 가서 직접 말을 타고 능정( 亭)에서 호랑이를 쏘려고 했다. 말은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손권은 쌍극(雙戟)을 던졌다. 호랑이가 상처를 입고 물러나자, 항상 따라다니던 장세(張世)가 창으로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 二十四年, 關羽圍曹仁於襄陽, 曹公遣左將軍于禁救之。
24년(219), 관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會漢水暴起, 羽以舟兵盡生虜禁等步騎三萬送江陵, 惟城未拔。
때마침 한수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江陵)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權內憚羽, 外欲以爲己功, 箋與曹公, 乞以討羽自效。
손권은 내심 관우를 두려워했지만, 겉으로는 자신의 공을 알리고 싶은 생각으로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신이 힘을 보태기를 청했다.
曹公且欲使羽與權相持以鬬之, 驛傳權書, 使曹仁以弩射示羽. 羽猶豫不能去。
조조는 이것은 관우와 손권으로 하여금 서로 대치하여 싸우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참(驛站)에게 손권의 편지를 조인이 있는 곳으로 보내 조인이 화살을 쏘아 관우에게 보이도록 했다. 관우는 머뭇머뭇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閏月, 權征羽, 先遣呂蒙襲公安, 獲將軍士仁。
윤달,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士仁)을 붙잡았다.
蒙到南郡, 南郡太守糜芳以城降.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 方)은 성을 바치고 투항했다.
蒙據江陵, 撫其老弱, 釋於禁之囚。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 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陸遜別取宜都, 獲秭歸枝江夷道, 還屯夷陵, 守峽口以備蜀。
육손(陸遜)은 별도로 의도(宜都)를 손에 넣고, 자귀(자歸), 지강(枝江), 이도(夷道)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峽口)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關羽還當陽, 西保麥城。權使誘之。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麥城)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羽偽降, 立幡旗爲像人於城上, 因遁走, 兵皆解散, 尚十餘騎。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을 뿐이었다.
權先使朱然潘璋斷其徑路。
손권은 우선 주연(朱然)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놓았다.
十二月, 璋司馬馬忠獲羽及其子平都督趙累等於章鄉, 遂定荊州。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馬忠)이 장향(章 )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 도독 조루(趙累)를 붙잡았다. 그래서 형주는 평정됐다.
是歳大疫, 盡除荊州民租稅。
이 해, 역병이 성행하였다. 손권은 형주 백성들의 조세를 전부 면제시켜 주었다.
曹公表權爲驃騎將軍, 假節領荊州牧, 封南昌侯。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하고, 가절을 주고 형주목을 겸임하도록 했으며, 남창후(南昌候)로 봉했다.
權遣校尉梁寓奉貢於漢, 及令王惇市馬, 又遣朱光等歸。
손권은 교위 양우(梁寓)를 보내 한황실에 공물을 바치도록 했고, 아울러 왕돈(王惇)에게 명하여 말을 사들이도록 했으며, 또 주광(朱光) 등을 석방하여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보냈다.
○ 二十五年春正月, 曹公薨. 太子丕代爲丞相魏王, 改年爲延康。
25년(220) 봄 정월,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태자 조비가 부친을 대신하여 승상과 위왕이 되었으며,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고쳤다.
秋, 魏將梅敷使張儉求見撫納。
가을, 위나라 장수 매부(梅敷)가 장검(張儉)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몸을 의탁하여 보살핌을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南陽陰, 酇築陽, 山都, 中廬五縣民五千家來附。
남양군의 음(陰), 찬(酇), 축양(筑陽), 산도(山都), 중려(中廬) 다섯 현의 백성 5천 호가 와서 귀속되었다.
冬, 魏嗣王稱尊號, 改元爲黃初。
겨울, 위나라의 사왕(嗣王; 조비)이 존호를 칭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로 바꿨다.
○ 二年四月, 劉備稱帝於蜀。
황초 2년(221) 4월, 유비가 촉에서 제(帝)로 칭했다.
權自公安都鄂, 改名武昌, 以武昌下雉尋陽陽新柴桑, 沙羨六縣爲武昌郡。
손권은 공안(公安)에서 악성(鄂城)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무창(武昌)으로 고쳤으며, 무창, 하치(下雉), 심양(尋陽), 양신(陽新), 시상(柴桑), 사선(沙羨) 여섯 현으로 무창군(武昌郡)을 만들었다.
五月, 建業言甘露降。
5월, 건업(建業)에서 감로(甘露)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八月, 城武昌, 下令諸將曰: 夫存不忘亡, 安必慮危, 古之善教。
8월, 무창성을 수축하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생존할 때는 멸망을 잊지 말며, 안정되었을 때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고대의 유익한 교훈이오.
昔雋不疑漢之名臣, 於安平之世刀劍不離於身, 蓋君子之於武備, 不可以已。
옛날 준불의(雋不疑)는 한나라의 명신인데, 태평스런 세상에서도 칼을 몸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소. 군자는 무비(武備)에 느슨할 수 없소.
況今處身疆畔, 豺狼交接, 而可輕忽不思變難哉.
하물며 현재 우리들의 몸은 변방지역에 있고, 사랑이 같은 악인들과 접하고 있는데, 경솔하게 갑작스런 사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
頃聞諸將出入, 各尚謙約, 不從人兵, 甚非備慮愛身之謂。
최근에 듣기로는, 장수들이 출입할 때 각자 겸손과 절약을 숭상하여 시종과 병사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아끼려고 생각한 행위가 아닌 것이오.
夫保己遺名, 以安君親, 孰與危辱.
자기를 보전하고 명성을 남겨 군주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 어찌 위험에 처하고 치욕을 받는 것이겠소?
宜深警戒, 務祟其大, 副孤意焉。
응당 깊이 경계하고 그 큰 생명을 힘껏 숭상해야만 하며, 이것이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오.'
自魏文帝踐阼, 權使命稱藩, 及遣于禁等還。
위문제가 제위에 오른 후부터, 손권은 사자를 보내 번국(藩國)이 되기를 구했으며, 아울러 우금 등을 돌려보냈다.
十一月, 策命權曰: 蓋聖王之法, 以德設爵, 以功制祿. 勞大者祿厚, 德盛者禮豐。
11월, 위문제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책명을 내렸다. '성스럽고 명석한 군주의 제도에서는 덕행으로 작위를 세우고 공로로 봉록을 제정한다. 공로가 큰 자는 봉록이 후하고, 덕행이 높은 자는 두터운 예우를 받는다.
故叔旦有夾輔之勳, 太公有鷹揚之功, 並啟土宇, 並受備物, 所以表章元功, 殊異賢哲也。
주공단(周公旦)에게는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훈이 있었고, 강태공(姜太公)에게는 상(商)을 멸망시킨 공훈이 있었으므로, 모두 토지(즉 魯와 齊)가 나뉘어 봉해지는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받았다. 이것은 큰 공훈을 표창하는 것이며, 우수한 인물을 특별히 대우한 것이다.
近漢髙祖受命之初, 分裂膏腴以王八姓. 斯則前世之懿事, 后王之元龜也。
가까이로는 한고조가 천명을 받았을 당초에 비옥한 토지를 나누어 여덟 성(姓)의 공신들에게 주어 왕(王)이 되도록 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며, 후세 제왕의 귀감이다.
朕以不德, 承運革命, 君臨萬國, 秉統天機. 思齊先代, 坐而待旦。
짐은 부덕한데도 천명을 받아 한왕실의 황통을 변혁하여 모든 나라에서 군림하고 국가통치의 병권을 잡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성명한 군주에게 제(齊)를 보고 정무를 처리하며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도록 하기를 원한다.
惟君天資忠亮, 命世作佐, 深睹歷數, 達見廢興, 遠遣行人, 浮於潛漢。
경은 선천적으로 충성스럽고 총명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재능으로 제왕을 보좌하고, 천명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며, 국가의 흥망의 이치를 투철하게 보고, 멀리 사자를 보내
잠수(潛水)와 한수(漢水)에 배를 띄웠다.
望風影附, 抗疏稱藩, 兼納纖絺南方之貢, 普遣諸將來還本朝。
소식을 들은 후, 그림자가 형체에 붙듯이 우리 조정에 마음을 의탁하고 상소하여 번속(藩屬)으로 칭하려고 했다. 아울러 비단과 갈포 등 남방의 공물을 바치고, 장수들을 모두 석방하여 우리 왕조로 돌아오도록 했다.
忠肅內發, 款誠外昭, 信著金石, 義蓋山河, 朕甚嘉焉。
충성심과 공경심은 내부에서부터 나오고, 성실함이 행동에 나타나며, 신의는 금이나 돌에 새기고, 대의는 산하를 덮었으니, 짐은 이 점을 매우 칭찬하노라.
今封君爲吳王, 使使持節太常髙平侯貞, 授君璽綬策書, 金虎符第一至第五, 左竹使符第一至第十, 以大將軍使持節督交州, 領荊州牧事。
지금 그대를 봉하여 오왕(吳王)으로 삼고, 사지절(使持節), 태상(太常), 고평후(高平侯) 형정(邢貞)에게 명하여 그대에게 옥새, 수대(綬帶), 책서, 금호부(金虎符)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좌죽사부(左竹使符) 첫째부터 열 번째 것까지를 주도록 하고, 대장군, 사지절, 독교주(督交州)로써 형주목의 직무를 맡도록 할 것이다.
錫君靑土, 苴以白茅, 對揚朕命, 以尹東夏。
청색 흙을 백모(白茅)에 싸서 그대에게 하사하여(옛날에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방향을 나타내는 빛깔. 즉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의 흙으로써 봉역(封域)을 나타냄) 짐의 명령에 응답하여 드날려
동하(東夏; 동중국)를 다스리게 할 것이다.
其上故驃騎將軍南昌侯印綬符策。
표기장군, 남창후(南昌侯)의 인수와 부책(溥策)은 반납하라.
今又加君九錫, 其敬聽後命。
현재 또 그대에게 구석(九錫)의 예품을 더해 줄테니, 공경하게 이후의 명을 들으라.
以君綏安東南, 綱紀江外, 民夷安業, 無或攜貳, 是用錫尹大輅戎輅各一, 玄牡二駟。
그대는 동남쪽 땅을 안정시키고 장강 밖의 토지를 잘 다스려 한족과 이족이 편안히 실업을 하고 어떤 사람도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에게 대락(大輅; 천자가 제사에 나갈 때 타는 수레)과 융락(戎輅; 천자가 진영으로 나갈 때 타는 수레) 각 한 대, 검정말 여덟 필을 주겠다.
君務財勸農, 倉庫盈積, 是用錫君袞冕之服, 赤舄副焉。
그대는 재정에 힘쓰고 농업을 장려하여 창고에는 식량과 물자로 가득하다. 때문에 그대에게 용을 수놓은 예복과 모자를 주고, 홍색 신발을 주겠노라.
君化民以德, 禮教興行, 是用錫君軒縣之樂。
그대는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예교를 성행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당의 삼면의 배치하는 제후의 악대를 주겠노라.
君宣導休風, 懷柔百越, 是用錫君朱戸以居。
그대는 좋은 사회 기풍을 창도하고 백월(百越)을 회유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홍색의 큰 대문이 있는 집을 주어 살도록 하겠다.
君運其才謀,官方任賢, 是用錫君納陛以登。
그대는 자신의 재간과 모략을 운용하여 현명하고 방정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납폐(納陛)를 주어 전에 오르도록 하겠다.
君忠勇並奮, 清除姦慝, 是用錫君虎賁之士百人。
그대는 충성스럽고 용감함을 함께 발휘하여 사악한 자를 말끔히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호분(虎賁)의 병사 백 명을 주겠다.
君振威陵邁, 宣力荊南, 梟滅兇醜, 罪人斯得, 是用錫君鈇鉞各一。
그대는 무위를 먼 곳에까지 떨쳤고 무력을 형남(荊南)에 날렸으며, 흉악한 추물들을 소멸시키고, 죄인들은 처벌을 받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鈇)와 월(鉞)을 각각 하나씩 주겠다.
君文和於內, 武信於外, 是用錫君彤弓一彤矢百玈弓十玈矢千。
그대는 안으로는 문치(文治)로서 화해롭게 하고, 밖으로는 무위로써 신임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동궁(彤弓; 옛날 천자가 공로가 있는 제후에게 하사한 붉게 칠한 활) 열 개, 노시(彤矢) 천 개를 주겠다.
君以忠肅爲基, 恭儉爲德, 是用錫君秬鬯一卣, 圭瓚副焉。
그대는 충성과 정숙함을 기초로 하고, 공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거창(秬鬯; 울창주라고도 하는데 울금초를 쪄서 창주에 섞은 술로써 옛날에 신이 내려올 때 썼다고 한다)한 유(卣; 주로 울창주를 담는 그릇을 지칭함), 규찬(圭瓚; 종묘에서 쓰는 제기로 옥으로 만든 것)을 쪼개 주겠다.
欽哉! 敬敷訓典, 以服朕命, 以勖相我國家, 永終爾顯烈。
존경하노라! 나는 그대가 선양한 선왕의 전적을 신중히 여기고, 나의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 국가를 힘껏 보좌하여 그대의 위대한 공업이 영원히 빛나도록 하겠노라.'
是歳, 劉備師軍來伐, 至巫山秭歸, 使使誘導武陵蠻夷, 假與印傳, 許之封賞。
이 해, 유비가 군대를 인솔하여 손권을 치러 와서 무산(巫山), 자귀( 歸)에 이르자, 사자를 보내 무릉(武陵)의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관인과 부신(符信)을 주었으며 작위와 상을 약속했다.
於是諸縣及五谿民皆反爲蜀。
그래서 여러 현과 오계(五谿)의 백성들은 모두 오를 배반하고 촉에 항복했다.
權以陸遜爲督, 督朱然潘璋等以拒之。
손권은 육손(陸遜)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주연과 반장 등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遣都尉趙咨使魏. 魏帝問曰: 吳王何等主也.
도위 조자를 사자로 하여 위나라로 파견했다. 위문제가 조자에게 질문했다. '오나라 왕은 어떠한 군주인가?'
咨對曰: 聰明仁智, 雄略之主也。
조자가 대답했다. '총명하고 어질며, 지혜롭고 웅대하고 재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帝問其狀, 咨曰: 納魯肅於凡品, 是其聰也。
위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고, 조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 속에서 노숙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입니다.
拔呂蒙於行陳, 是其明也。
보통 병사들 가운데서 여몽을 발탁했는데, 이것은 그의 현명함입니다.
獲於禁而不害, 是其仁也。
우금을 붙잡았지만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의 어짊입니다.
取荊州而兵不血刃, 是其智也。
형주를 취하면서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지혜로움입니다.
據三州虎視於天下, 是其雄也。
세 주를 차지하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보고 있으니, 이는 그의 웅대함입니다.
屈身於陛下, 是其略也。
폐하에게 몸을 굽혔으니, 이것은 그의 재략인 것입니다.'
帝欲封權子登, 權以登年幼, 上書辭封, 重遣西曹掾沈珩陳謝, 並獻方物。
문제는 손권의 아들 손등(孫登)을 작위에 봉하려고 했다.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편지를 올려 작위를 사양하고, 다시 서조연 심형(沈珩)을 보내 사의를 표했으며, 아울러 지방 공물을 바쳤다.
立登爲王太子。
손등을 왕태자(王太子)로 세웠다.
○ 黃武元年春正月, 陸遜部將軍宋謙等攻蜀五屯, 皆破之, 斬其將。
황무 원년(222) 봄 정월, 육손의 부장군 송겸(宋謙) 등이 촉의 주둔지 다섯 곳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
三月, 鄱陽言黃龍見. 蜀軍分據險地, 前後五十餘營, 遜隨輕重以兵應拒, 自正月至閏月, 大破之。
3월, 파양군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촉나라 군대는 험준한 요새에 분산하여 점거하고 앞뒤로 50여 개의 진영을 두었는데, 육손은 상대방 병력의 경중에 따라 병사를 내어 대항하여 정월부터 윤(閏) 6월까지 대대적으로 격파시켰다.
臨陳所斬及投兵降首數萬人. 劉備奔走, 僅以身免。
전쟁터에서 목이 베이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촉나라 병사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달아나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初權外託事魏, 而誠心不款。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며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된 것은 아니었다.
魏欲遣待中辛毗尚書辛毗往與盟誓, 並征任子, 權辭讓不受。
위나라는 시중 신비(辛毗),상서 환계(桓階)를 보내 오나라로 가서 손권과 맹약을 맺게 하고, 아울러 손권의 아들을 불러 임자(任子)로 임명하려고 했다. 손권은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秋九月, 魏乃命曹休張遼臧霸出洞口, 曹仁出濡須, 曹眞夏侯尚張郃徐晃圍南郡。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洞口)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南郡)을 포위하도록 했다.
權遣呂範等督五軍, 以舟軍拒休等, 諸葛瑾潘璋楊粲救南郡, 朱桓以濡須督拒仁。
손권은 여범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時揚越蠻夷多未平集, 內難未弭, 故權卑辭上書, 求自改厲. 若罪在難除, 必不見置, 當奉還土地民人, 乞寄命交州, 以終餘年。
당시 양(楊), 월(越) 땅의 이민족의 대다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내부적으로 환난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손권은 매우 겸허한 언사로 위문제에게 편지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고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일 저의 죄악이 사면되지 못한다면, 응당 토지와 백성들을 봉환(奉還)하고 교주(交州)에 몸을 기탁하고 여생을 끝마치기를 원합니다.'
文帝報曰: 君生於擾攘之際, 本有從橫之志, 降身奉國, 以享茲祚。
위문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대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태어나 본래는 천하를 종횡할 뜻이 있었지만, 신분을 낮춰
위나라를 받들어 현재의 작위에 있게 되었다.
自君策名已來, 貢獻盈路. 討備之功, 國朝仰成。
그대가 오왕으로 책봉된 이래, 바친 공물은 길에 가득했다. 유비를 토벌하는 공업은, 조정에서는 그대에게 의지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埋而掘之, 古人之所恥。
여우처럼 묻었다가 또 파는 것은 옛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朕之與君, 大義已定, 豈樂勞師遠臨江漢.
짐과 그대 사이는 대의로 이미 확정되었는데, 어찌하여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고 멀리 장강과 한수까지 출정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廊廟之議, 王者所不得專. 三公上君過失。
조정의 의론은 군주된 자라도 말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삼공들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
皆有本末朕以不明, 雖有曾母投杼之疑, 猶冀言者不信, 以爲國福。
짐은 밝지 못하고, 비록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북을 던진 의심이 있을지라도 대신들의 말이 진실이 아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써 국가의 복으로 간주하였다.
故先遣使者犒勞, 又遣尚書侍中踐修前言, 以定任子。
때문에 먼저 사자를 보내 수고를 위로하고, 또 상서, 시중을 보내서 이전에 맺은 약속을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그대의 아들을 인질로 삼기로 결정했었다.
君遂設辭, 不欲使進, 議者怪之。
그러나 그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아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여 상의하던 대신들은 그대의 태도를 의아스러워 했다.
又前都尉浩周勸君遣子, 乃實朝臣交謀, 以此卜君。
또 이전에 도위 호주(浩周)가 그대에게 아들을 보내도록 권유했었는데, 그것은 사실 조정의 신하들이 함께 도모한 의견이었으며, 이것으로써 그대의 본심을 추측하였다.
君果有辭, 外引隗囂遣子不終, 內喩竇融守忠而已。
그대는 과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밖으로는 외효가 아들을 광무제(光武帝)에게 보내고 충절을 끝까지 다하지 않은 예를 인용했고, 안으로는 두융(竇融)이 아들을 보내지 않고 충성을 지켰음을 비유했다.
世殊時異, 人各有心。
하지만 세상도 다르고 시대도 변하여 사람들은 각각 마음이 있게 되었다.
浩周之還, 口陳指麾, 益令議者發明眾嫌, 終始之本, 無所據杖, 故遂俛仰從群臣議。
호주가 돌아와 입으로 진술하면서 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논의하는 자들로 하여금 점점 더 그대에게 의심을 더하게 했으며, 그대가 우리 조정을 시종 잘 받든다고 한 것의 기초가 의지할 바를 잃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신하들의 상의에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今省上事, 款誠深至, 心用慨然, 淒愴動容。
현재 그대가 올린 편지를 살펴보니, 깊은 성심이 넘쳐흘러 나는 내심 매우 감개하였으며 애통해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即日下詔, 敕諸軍但深溝髙壘, 不得妄進。
나는 그날 즉시 조서를 내려, 여러 군대에게 단지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을 뿐 경거망동하여 진군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若君必效忠節, 以解疑議, 登身朝到, 夕召兵還. 此言之誠, 有如大江。
만일 그대가 반드시 충의와 정절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회의적인 의론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아침에 손등이 직접 경성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명령을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대강(大江)과 같도다!'
遂改年, 臨江拒守。
그래서 손권은 연호를 바꾸고 장강가에서 저항하며 수비했다.
冬十一月, 大風, 呂範等兵溺死者數千, 餘軍還江南。
겨울 11월, 큰 바람이 불었고, 여범 등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하여, 남은 군사는 장강 남쪽으로 돌아왔다.
曹休使臧霸以輕船五百, 敢死萬人襲攻徐陵, 燒攻城車, 殺略數千人。
조휴가 장패에게 날랜 배 5백 척과 죽음을 각오한 병사 1만 명을 주어 서릉(徐陵)을 습격하도록 하여 성의 수레를 불태우고 수천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將軍全琮徐盛追斬魏將尹盧, 殺獲數百。
장군 전종(全琮),서성(徐盛)은 위나라 장수 윤로(尹盧)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수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十二月, 權使太中大夫鄭泉聘劉備於白帝, 始復通也。
12월, 손권은 태중대부 정천(鄭泉)에게 백제(白帝)에 있는 유비를 방문하도록 하여 비로소 우호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然猶與魏文帝相往來, 至後年乃絶。
그러나 손권은 의연하게 위문제와 서로 왕래하다가 후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절교했다.
是歳, 改夷陵爲西陵。
이 해, 서릉(西陵)으로 고쳤다.
○ 二年春正月, 曹眞分軍據江陵中州。
2년(223)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江陵) 중앙의 사주(沙州)를 점거했다.
是月, 城江夏山。
이 달, 손권은 강하산(江夏山)에 성을 쌓았다.
改四分, 用乾象歷。
사분력(四分曆)을 바꿔 건상력(乾象曆)을 사용했다.
三月, 曹仁遣將軍常彫等, 以兵五千, 乘油船, 晨渡濡須中州。
3월, 조인은 장군 상조(常彫)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仁子泰因引軍急攻朱桓, 桓兵拒之。遣將軍嚴圭等擊破彫等。
조인의 아들 조태(曹泰)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嚴圭)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是月, 魏軍皆退。
이 달, 위나라 군대는 모두 퇴각했다.
夏四月, 權群臣勸即尊號, 權不許。
여름 4월, 손권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유했다.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劉備薨於白帝。
유비가 백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五月, 曲阿言甘露降。先是戲口守將晉宗殺將王直, 以眾叛如魏, 魏以爲蘄春太守, 數犯邊境。
5월, 곡아(曲阿)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희구(戱口)의 수장(守將) 진종(晉宗)이 장수 오왕(王直)을 죽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모반하여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는 그를 기춘( 春)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이후 진종은 변방지역을 여러 차례 침범했다.
六月, 權令將軍賀齊糜芳劉邵等襲蘄春, 邵等生虜宗。
6월, 손권은 장군 하제(賀齊)에게 명하여 미방( 芳)과 유소(劉邵)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하도록 했다. 유소 등이 진종을 생포했다.
冬十一月, 蜀使中郎將鄧芝來聘。
겨울 11월, 촉은 중랑장 등지(鄧芝)를 시켜 오나라를 방문하도록 했다.
○ 三年夏, 遣輔義中郎將張溫聘於蜀。
3년(224) 여름, 손권은 보의중랑장(輔義中郞將) 장온을 파견하여 촉을 방문하도록 했다.
秋八月, 赦死罪。
가을 8월, 사형수들을 사면시켰다.
九月, 魏文帝出廣陵, 望大江, 曰: 彼有人焉, 未可圖也. 乃還。
9월, 위문제는 광릉(廣陵)까지 출병하여 대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는 돌아왔다.
○ 四年夏五月, 丞相孫邵卒。
4년(225) 여름 5월, 승상 손소(孫邵)가 죽었다.
六月, 以太常顧雍爲丞相. 皖口言木連理。
6월, 태상 고옹(顧雍)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환구(皖口)에서 연리지(連理枝; 뿌리가 다른 두 나무 가지결이 서로 이어져 하나가 된 나무로서 상서로운 징조의 하나임)가 있다고 보고했다.
冬十二月, 鄱陽賊彭綺自稱將軍, 攻沒諸縣, 眾數萬人。
겨울 12월, 파양의 적 팽기(彭綺)가 자칭 장군이라고 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병사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是歳地連震。
이 해,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 五年春, 令曰: 軍興日久, 民離農畔, 父子夫婦, 不聽相卹, 孤甚愍之。今北虜縮竄, 方外無事, 其下州郡, 有以寬息。
5년(226) 봄, 손권이 영(令)을 내려 말했다. '군사를 일으킨 지 매우 오래되어 백성들은 경작지를 떠났고,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 도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지금 북쪽의 적은 물러나 움츠리고 숨어 있으며, 중원 밖의 지역에는 전쟁이 없다.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리니, 정책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들을 쉬도록 하라.'
是時, 陸遜以所在少谷, 表令諸將增廣農畝。
이때, 육손은 각지의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농지를 개간하여 확대하도록 표를 올려 명령하도록 했다.
權報曰: 甚善. 今孤父子親自受田, 車中八牛以爲四耦, 雖未及古人, 亦欲與眾均等其勞也。
손권은 이에 대답했다. '매우 좋은 의견이오. 지금 우리 부자도 직접 공전(公田)을 받아 수레를 끌고 온 여덟 필의
말을 넷으로 짝짓도록 하겠소. 비록 고대의 성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백성들과 동등하게 수고를 하려는 것이오.'
秋七月, 權聞魏文帝崩, 征江夏, 圍石陽, 不克而還。
가을 7월, 손권은 위문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江夏)를 치고 석양(石陽)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蒼梧言鳳凰見。
창오(蒼梧)에서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分三郡惡地十縣置東安郡, 以全琮爲太守, 平討山越。
손권은 세 군(丹陽, 吳郡, 會稽)의 열악한 땅 10현을 분할하여 동안군(東安郡)을 설치했다. 전종을 태수로 임명하여 산월(山越)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冬十月, 陸遜陳便宜, 勸以施德緩刑, 寬賦息調。
겨울 10월, 육손이 눈앞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진술하면서 은덕을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징용을 멈출 것을 권유했다.
又云; 忠讜之言, 不能極陳, 求容小臣, 數以利聞。
또 이렇게 말했다. '충성스런 말은 전부 진술할 수 없는데,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사는 잗달은 신하가 자주 이로운 주장으로 당신에게 간언하기를 바랍니다.'
權報曰: 夫法令之設, 欲以遏惡防邪, 儆戒未然也. 焉得不有刑罰以威小人乎。
손권이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법령의 설치는 악함을 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미연에 방비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형벌을 설치하여 소인들을 위협하지 않겠소?
此爲先令後誅, 不欲使有犯者耳. 君以爲太重者, 孤亦何利其然。
이것은 먼저 명령을 내리고, 이후에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지 법을 범하는 자가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但不得已而爲之耳. 今承來意, 當重咨謀, 務從其可。
단지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일 뿐이오. 현재 그대의 의견에 의하면, 응당 신하들에게 새롭게 자문을 구하고 상의하여 힘껏 따라 할 수 있어야만 하오.
且近臣有盡規之諫, 親戚有補察之箴, 所以匡君正主明忠信也。
게다가 가까이 있는 신하들이 바른 길로 나가도록 전부 말하여 간언하고, 친척들이 주군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고 조언함으로써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의 충성스럽고 신실함을 밝히는 것이오.
書載, 予違汝弼, 汝無面從. 孤豈不樂忠言以自裨補邪。
'상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 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굽히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라고 했소. 내가 어찌 충언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소?
而云, 不敢極陳. 何得爲忠讜哉。
그런데 그대는 '감히 전부 진술할 수 없습니다'고 했으니, 어떻게 충성스런 말이라고 할 수 있겠소?
若小臣之中, 有可納用者, 寧得以人廢言而不采擇乎。
만일 지위가 낮은 신하들 중에서 받아들여 쓸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한 자가 있다면, 어찌 사람으로 말을 버리고 채택하지 않을 수 있겠소?
但諂媚取容, 雖闇亦所明識也。
단지 아첨하며 자신을 파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내가 어리석을지라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소.
至於發調者, 徒以天下未定, 事以眾濟。
징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통일의 공업은 여러분들의 지지에 의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소.
若徒守江東, 修崇寬政, 兵自足用, 復用多爲。
만일 강동(江東)을 지키며 너그러운 정치를 행한다면, 병력은 저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인데 또 많이 징용하겠소?
顧坐自守可陋耳. 若不豫調, 恐臨時未可便用也。
단지 앉아서 강남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소. 만일 미리 징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때에 임하여 곧바로 쓸 수 없을 것이오.
又孤與君分義特異, 榮戚實同。
또 나와 그대는 신분과 명분이 현저하게 다르지만,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은 실재로 같소.
來表雲不敢隨眾容身苟免. 此實甘心所望於君也。
그대가 보내온 표에서 말하기를, '감히 여러 사람들을 따라하며 자신을 허용하여 구차하게 재난을 면하지 않겠다'고 했소. 이것은 확실히 내가 만족해 하는 것이며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
於是令有司盡寫科條, 使郎中褚逢齎以就遜及諸葛瑾, 意所不安, 令損益之。
그리고 손권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楮逢)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곳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是歳, 分交州置廣州, 俄復舊。
이 해, 교주를 나누어 광주(廣州)를 설치했으나, 오래지 않아 원래 모양대로 회복시켰다.
○ 六年春正月, 諸將獲彭綺。
6년(227) 봄 정월, 장수들이 팽기를 체포했다.
閏月, 韓當子綜以其眾降魏。
윤 12월, 한당(韓當)의 아들 한종(韓綜)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나라로 투항했다.
○ 七年三月, 封子慮爲建昌侯, 罷東安郡。
7년(228) 봄 3월, 손권은 아들 손려(孫慮)를 건창후(建昌侯)로 봉했으며, 동안군을 없앴다.
夏五月, 鄱陽太守周魴偽叛, 誘魏將曹休。
여름 5월, 파양태수 주방(周방)이 거짓으로 오나라를 배반하여 위나라 장수 조휴를 유인했다.
秋八月, 權至皖口, 使將軍陸遜督諸將大破休於石亭。
가을 8월, 손권이 환구에 도착하여 장군 육손을 파견하여 장수들을 이끌고 석정(石亭)에서 조휴를 크게 격파시켰다.
大司馬呂範卒。
대사마 여범이 죽었다.
是歳, 改合浦爲珠官郡。
이 해, 합포군(合浦郡)을 주관군(珠官郡)으로 바꾸었다.
○ 黃龍元年春, 公卿百司皆勸權正尊號。
황룡 원년(229) 봄, 공경과 백관들이 모두 손권에게 정식으로 제(帝)를 칭하도록 권유했다.
夏四月, 夏口武昌並言黃龍鳳凰見。
여름 4월, 하구와 무창에서 나란히 황룡과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丙申, 南郊即皇帝位, 是日大赦, 改年。
7일,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였으며, 이날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꿨다.
追尊父破虜將軍堅爲武烈皇帝, 母吳氏爲武烈皇后, 兄討逆將軍策爲長沙桓王。
부친 파로장군 손견을 추존하여 무열황제(武烈皇帝)라고 하고, 어머니 오씨(吳氏)를 무열황후(武烈皇后)라고 했으며, 형 토역장군(討逆將軍) 손책을 장사환왕(長沙桓王)이라고 했다.
吳王太子登爲皇太子。
오왕의 태자 손등을 황태자로 삼았다.
將吏皆近爵加賞。
장리(將吏)들은 모두 작위가 올랐으며 상을 받았다.
初, 興平中, 吳中童謠曰: 黃金車, 班蘭耳, 闓昌門, 出天子。
당초, 흥평 연간에 오(吳; 蘇州)에서는 이런 동요가 있었다. '황금 수레에, 아롱진 난초 귀. 창문(昌門)을 열고, 천자가 나온다.'
五月, 使校尉張剛管篤之遼東。
5월, 손권은 교위 장강(張剛)과 관독(管篤)을 사자로 삼아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六月, 蜀遣衞尉陳震慶權踐位。
6월, 촉은 위위 진진(陳震)을 파견하여 손권이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했다.
權乃參分天下, 豫靑徐幽屬吳, 兗冀并涼屬蜀。
손권은 곧 촉나라 협의하여 천하를 나누어서 예주, 청주, 서주, 유주는 오에 속하게 하고, 연주, 기주, 병주, 양주는 촉에 귀속시켰다.
其司州之土, 以函谷關爲界。
사주(司州) 땅은 함곡관을 경계로 삼았다.
造爲盟曰: 天降喪亂, 皇綱失敘, 逆臣乘釁, 劫奪國柄。
맹약의 말을 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환난을 내려 한왕실의 계통은 질서를 잃고, 반역하는 신하들이 이 틈을 타서 국가의 대권을 탈취했다.
始於董卓, 終於曹操, 窮兇極惡, 以覆四海, 至令九州幅裂, 普天無統, 民神痛怨, 靡所戾止。
동탁에서 시작하여 조조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흉악한 무리들이 천하를 파괴하고 중원으로 하여금 분열되게 하여 천하에는 기강이 없어지고 백성들과 신령들은 고통스러워 하고 원망하여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及操子丕, 桀逆遺醜, 薦作奸回, 偷取天位。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이르러서는 역행하여 수많은 흉악한 일을 하고 항상 사악하고 간사한 일을 하여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다.
而睿麽麼, 尋丕兇跡, 阻兵盜土, 未伏厥誅。
그리고 도가 부족한 조예는 조비의 악행을 답습하여 병력에 의지해 토지를 빼앗았는데, 앚익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받지 않았다.
昔共工亂象而髙辛行師, 三苗干度虞舜征焉。
옛날 공공(共工)이 천하를 어지럽혔을 때, 고신(高辛)은 군대를 동원했고, 삼묘(三苗)가 법을 범하자 우순(虞舜)은 정벌을 했다.
今日滅曹, 禽其徒黨, 非蜀漢與東吳, 將復誰任。
오늘 조예를 멸하고 그의 무리를 붙잡는 일은 한과 오가 아니면 장차 또 누가 맡겠는가?
夫討惡翦暴, 必聲其罪, 宜先分裂, 奪其土地, 使士民之心, 各知所歸。
악인을 토벌하고 흉포함을 제거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들의 죄행을 선포하고 응당 먼저 그들의 영토를 분열하여 그 토지를 빼앗아 사인(士人)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각기 돌아갈 바를 알도록 해야 한다.
是以春秋, 晉侯伐衞, 先分其田以畀宋人, 斯其義也。
때문에 '춘추'에서, 진문공(晉文公)이 위(衛)를 토벌하기에 앞서 그의 토지를 나누어 송(宋)나라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은 이런 이치인 것이다.
且古建大事, 必先盟誓, 故周禮有司盟之官, 尚書有告誓之文。
게다가 고대에는 위대한 공업을 세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맹서를 하였기 때문에 '주례'에는 맹약을 주관하는 관리가 있었고, '상서'에는 맹서를 선포하는 문서가 있었다.
漢之與吳, 雖信由中, 然分土裂境, 宜有盟約。
한과 오는 비록 신의가 마음속에서 나왔지만, 토지를 구분하여 경계를 정하고 마땅히 맹약이 있어야 한다.
諸葛亮德威遠著, 翼戴本國, 典戎在外, 信感陰陽, 誠動天地。
제갈승상은 덕망과 위엄을 먼 곳까지 빛냈으며, 본국의 황제를 도와 보필하고, 밖으로는 군대를 지휘했는데, 신의는 음양을 감동시키고 성실함은 천지를 감응시켰다.
重復結盟, 廣誠約誓, 使東西士民咸共聞知。
다시 맹약을 맺어 성의를 확대하고 서약의 말을 준수하여 오와 촉의 사인과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한다.
故立壇殺牲, 昭告神明, 再歃加書, 副之天府。
그래서 단을 세우고 희생을 죽여 신령에게 분명하게 고하고, 한 차례 피를 묻혀 맹세하고 서약서를 희생의 입에 넣고, 그 부본(副本)을 천부(天府; 천자가 쓰는 물품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한다.
天髙聽下, 靈威棐湛, 司愼司盟, 群神群祀, 莫不臨之。
하늘은 높아도 아래쪽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신령의 위력도 위의 성실함을 도와 실현시킬 수 있으며, 사신(司愼), 사맹(司盟)의 신은 여러 신령들과 이곳에 와서 제사를 받지 않지 않는다.
自今日漢吳旣盟之後, 戮力一心, 同討魏賊, 救危恤患, 分災共慶, 好惡齊之, 無或攜貳。
오늘 한과 오가 결맹한 이후에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함께 위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위험을 서로 구하며 재난을 나누고, 기쁨은 함께 하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 하며, 어떤 사람이든 간에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없도록 한다.
若有害漢, 則吳伐之。
若有害吳, 則漢伐之。
만일 어떤 사람이 촉을 위해 한다면 오가 그를 토벌할 것이고, 만일 어떤 사람이 오를 위해 한다면 촉이 그를 토벌할 것이다.
各守分士, 無相侵犯。
傳之後葉, 克終若始。
각각 자기의 봉토를 지키며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 맹약이 후대에 전해져도 시종 이와 같이 한다.
凡百之約, 皆如載書,
信言不艷, 實居於好。
무릇 모든 맹약은 모두 맹서(盟書)에 기재된 것과 같다. 성실한 언사는 화려하지 않으며 그 실질은 우호관계에 있다.
有渝此盟, 創禍先亂。
어떤 사람이 이 맹약을 버린다면 화를 낳고 먼저 내부에 혼란이 있을 것이다.
違貳不協, 慆慢天命, 明神上帝是討是督, 山川百神是糾是殛, 俾墜其師, 無克祚國。
두 마음을 갖고 협력하지 않고 천명에 태만하면, 신령과 상제가 그를 살피고 징벌할 것이며, 산천의 모든 신들은 그를 들어 주살하고, 그 군대를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영원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於爾大神, 其明鑒之。
위대한 신령이시여! 분명하게 살펴 주십시오!'
秋九月, 權遷都建業, 因固府不改館。
가을 9월에 손권은 건업(建業)으로 천도했으나, 원래부터 역소에서 살았으므로 다시 관청을 짓지는 않았다.
徵上大將軍陸遜輔太子登, 掌武昌留事。
상대장군(上大將軍) 육손을 불러 태자 손등을 보좌하도록 하고, 무창의 남은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 二年春正月, 魏作合肥新城。詔立都講祭酒, 以教學諸子。
2년(230) 봄 정월, 위나라는 합비신성(合肥新城)을 지었다. 손권은 조서를 내려 도강좨주(都講祭酒)를 설립하여 제자(諸子)들로 하여금 교육을 받도록 했다.
遣將軍衞溫諸葛直將甲士萬人, 浮海求夷洲及亶洲。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파견하여 무장을 한 사병 1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주(夷洲)와 단주(亶州)를 구하도록 했다.
亶洲在海中, 長老傳言, 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 求蓬萊神山及仙藥, 止此洲不還。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제가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보내 어린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봉래(蓬萊)의 신선과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하였는데, 이 주에 이르러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世相承有數萬家, 其上人民, 時有至會稽貨布, 會稽東縣人海行, 亦有遭風流移至亶洲者。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 수만 호가 되었고, 그 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회계로 와서 베를 샀고, 회계 동쪽 현에 살고 있는 자가 바다를 가다가 또 태풍을 만나 단주까지 표류해 오기도 했다.
所在絶遠, 卒不可得至, 但得夷洲數千人還。
그곳은 매우 먼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위온 등은 결국에는 이를 수 없었다. 단지 이주(夷洲)의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왔을 뿐이다.
○ 三年春二月, 遣太常潘濬率眾五萬, 討武陵蠻夷。
3년(231) 봄 2월, 태상 반준(潘濬)을 파견하여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무릉의 이민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衞溫諸葛直皆以違詔無功, 下獄誅。
위온과 제갈직은 모두 조서를 거스르고 공로가 업었으므로 하옥되어 주살되었다.
夏有野蠶成繭, 大如卵。
여름, 산야에 있는 누에가 고치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마치 알 같았다.
由拳野稻自生, 改爲禾興縣。
야생벼가 저절로 생장하였으므로 유권현(由拳縣)을 화흥현(禾興縣)으로 바꾸었다.
中郎將孫布詐降以誘魏將王淩, 淩以軍迎布。
중랑장 손포(孫布)는 거짓으로 투항하여 위나라 장수 왕릉(王凌)을 유인했다.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손포를 영접하려고 했다.
冬十月, 權以大兵潛伏於阜陵俟之, 淩覺而走. 會稽南始平言嘉禾生。
겨울 10월, 손권은 대군을 부릉(阜陵) 등에 잠복시켜 왕릉을 기다렸는데, 왕릉은 이것을 알고 달아났다. 회계군의 남시평(남始平)에서 벼가 자란다는 보고가 있었다.
十二月丁卯, 大赦, 改明元年也。
12월 29일, 대사면을 시행하고, 다음해 부터 가화 원년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 嘉禾元年春正月, 建昌侯慮卒。
가화 원년(232) 봄 정월, 건창후(建昌侯) 손려가 죽었다.
三月, 遣將軍周賀校尉裴潛乘海之遼東。
3월, 장군 주하(周賀), 교위 배잠(裵潛)을 파견하여 뱃길로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秋九月, 魏將田豫要擊, 斬賀於成山。
가을 9월, 위나라 장수 전예(田豫)가 이들을 맞아 반격했다. 성산(成山)에서 주하의 목을 베었다.
冬十月, 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郎中令孫綜稱藩於權, 並獻貂馬. 權大悅, 加淵爵位。
겨울 10월, 위의 요동태수 공손연이 교위 숙서(宿舒)와 낭중령(낭中令) 손종(孫宗)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번국(藩國)이라고 칭하고, 아울러 모피와 준마를 바쳤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고,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다.
○ 二年春正月, 詔曰: 朕以不德, 肇受元命, 夙夜兢兢, 不遑假寢。
2년(233) 봄 정월, 손권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부덕한데 천명을 받았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걱정하고 근신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수면을 취할 틈이 없다.
思平世難, 救濟黎庶, 上答神祗, 下慰民望。
세상의 환란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여 위로는 신령님의 비호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희망을 위로하기 원한다.
是以眷眷, 勤求俊傑, 將與戮力, 共定海內。
이 때문에 돌아다 보면서 우수한 인물을 열심히 구해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같이 천하를 평정하려 한다.
苟在同心, 與之偕老。
만일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今使持節督幽州領靑州牧遼東太守燕王, 久脅賊虜, 隔在一方, 雖乃心於國, 其路靡緣。
지금 사지절, 독유주(督幽州), 영청주목(領靑州牧), 요동태수, 연왕(燕王; 공손연)은 오랫동안 위나라의 핍박을 받아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어, 비록 우리 나라에 충성을 하려고 해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없다.
今因天命. 遠遣二使, 款誠顯露, 章表殷勤, 朕之得此, 何喜如之。
오늘 그는 천명에 순응하여 멀리서 사자 두 명을 보내왔다. 그의 충성스런 마음은 분명하게 나타나며, 서술한 표에는 심오한 정이 나타나고 있다. 짐이 이것을 얻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는가!
雖湯遇伊尹, 周獲呂望, 世祖未定而得河右, 方之今日。
비록 탕왕이 이윤(伊尹)을 만나고, 주문왕이 여망(呂望)을 얻었으며, 세조(광무제)가 천하를 아직 평정하지 못할 때 하우(河右)를 얻은 것도 오늘 여기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書不云乎, 一人有慶, 兆民賴之。
'상서'에서 '군주 한 명에게 기쁨이 있으면, 만백성은 이것에 의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其大赦天下, 與之更始, 其明下州郡, 咸使聞知。
나는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니,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모두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하라.
特下燕國, 奉宣詔恩, 今普天率土備聞斯慶。
특히 연나라에 조서를 내려 나의 조서와 은덕을 받들어 선양하고,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사를 모두 알도록 하라.'
三月, 遣舒綜還, 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 金寶珍貨, 九錫備物, 乘海授淵。
3월에 숙서와 손종을 귀국시키고, 태상 장미(張彌), 집금오 허안(許晏), 장군 하달(賀達) 등을 사자로 하여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 보물, 진귀한 물건과 구석(九錫)의 모든 물품을 갖고 뱃길로 공손연에게 주었다.
舉朝大臣, 自丞相雍已下皆諫, 以爲淵未可信, 而寵待太厚, 但可遣吏兵數百護送舒綜, 權終不聽。
이에 대해서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은 승상 고옹 이하 모두 간언하여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오히려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단지 관리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 숙서와 손종을 호위하여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손권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淵果斬彌等, 送其首於魏, 沒其兵資。
공손연은 과연 장미 등의 목을 베어 그들의 머리를 위나라로 보내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와 물자를 빼앗았다.
權大怒, 欲自征淵, 尚書僕射薛綜等切諫乃止。
손권은 매우 분노하여 직접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했는데, 상서복야 설종(薛綜) 등이 간절히 간언하여 그만두었다.
是歳, 權嚮合肥新城, 遣將軍全瓊征六安, 皆不克還。
이 해, 손권은 합비신성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육안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 三年春正月, 詔曰: 兵久不輟, 民困於役, 歳或不登, 其寬諸逋, 勿復督課。
3년(234)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전쟁이 장기간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하며, 세금이 간혹 거두어지지도 아니하니, 각종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다시는 재촉하여 징수하지 마라.'
夏五月, 權遣陸遜, 諸葛瑾等屯江夏沔口, 孫韶張承等嚮廣陵淮陽, 權率大眾圍合肥新城。
여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 등을 파견해 강하(江夏), 면구(沔口)에 주둔하도록 하고, 손소(孫韶)와 장승(張承) 등에게는 광릉(廣陵), 회양(淮陽)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인솔하여 합비신성을 포위했다.
是時蜀相諸葛亮出武功, 權謂魏明帝不能遠出。
이 당시, 촉의 재상 제갈양이 무공(武功)까지 병사를 이끌고 나왔으므로, 손권은 위명제가 멀리 나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而帝遣兵助司馬宣王拒亮, 自率水軍東徵。
그렇지만 위명제는 병사를 보내 사마선왕을 원조하여 제갈양에게 대항하고,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 정벌에 올랐다.
未至壽春, 權退還, 孫韶亦罷。
위명제가 수춘에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퇴각하여 돌아왔고, 손소 역시 공격을 멈췄다.
秋八月, 以諸葛恪爲丹楊太守, 討山越。
가을 8월, 제갈각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여 산월을 토벌하도록 했다.
九月朔, 隕霜傷穀。
9월 초하루, 서리가 내려 곡식이 많이 상했다.
冬十一月, 太常潘濬平武陵蠻夷, 事畢, 還武昌。
겨울 11월, 태상 반준은 무릉의 이민족을 평정하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무창으로 돌아갔다.
詔復曲阿爲雲陽, 丹徒爲武進。
조서를 내려 다시 곡아현을 운양현(雲陽縣)이라 하고, 단도현(丹徒縣)을 무진현(武進縣)이라고 했다.
廬陵賊李桓, 羅厲等爲亂。
여릉(廬陵)의 도적 이환(李桓)과 나려(羅厲)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 四年夏, 遣呂岱討桓等。
4년(235) 여름, 여대(呂岱)를 파견하여 이환 등을 토벌하도록 했다.
秋七月, 有雹。
가을 7월, 우박이 내렸다.
魏使以馬求易珠璣翡翠瑇瑁, 權曰: 此皆孤所不用, 而可得馬, 何苦而不聽其交易。
위나라 사자가 말을 진주, 비취, 대모와 교환하기를 구하자, 손권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고, 말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 교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 五年春, 鑄大錢, 一當五百. 詔使吏民輸銅, 計銅畀直. 設盜鑄之科。
5년(236) 봄, 대전(大錢)을 주조 하였는데, 대전 하나가 5백 개의 소전에 상당했다. 조서를 내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동(銅)을 내도록 하고, 그 동을 계산하여 전을 주었다. 화폐 주조에 대한 처벌 조항을 만들었다.
二月, 武昌言甘露降於禮賓殿。
2월, 무창에서 예빈전(禮賓殿)에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輔吳將軍張昭卒。
보오장군(輔吳將軍) 장소(張昭)가 죽었다.
中郎將吾粲獲李桓, 將軍唐咨獲羅厲等。
중랑장 오찬(吾粲)이 이환을 체포했고, 장군 당자가 나려 등을 체포했다.
自十月不雨, 至於夏。
10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여름까지 계속됐다.
冬十月, 彗星見於東方。
겨울 10월,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鄱陽賊彭旦等爲亂。
파양의 도적 팽단(彭旦)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 六年春正月, 詔曰: 夫三年之喪, 天下之達制, 人情之極痛也。
6년(237) 봄 정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3년 상(喪)은 천하에 통행하는 제도로서 사람의 감정이 지극히 애통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賢者割哀以從禮, 不肖者勉而致之。
현명한 사람은 개인의 슬픔을 버리고 국가의 예법을 따르지만,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억지로 3년 상을 고수한다.
世治道泰, 上下無事, 君子不奪人情. 故三年不逮孝子之門。
세상이 태평스럽고 성현의 도가 통하여 아래 위에 일이 없을 때에는 군자는 인간의 감정을 빼앗을 수 없다. 따라서 3년간이라는 기간이 효자의 가문에도 이르지 않는다.
至於有事, 則殺禮以從宜, 要絰而處事. 故聖人製法, 有禮無時則不行。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예절을 간소화 하여 그 당시의 마땅함에 따르고 상복을 입은 대로 국사를 처리한다. 그래서 성인이 법령을 제정할 때도 예절이 있어도 제때가 아니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遭喪不奔非古也, 蓋隨時之宜, 以義斷恩也。
상사를 당하고도 집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은 고대의 예절이 아니지만, 시대의 변화에 순종하여 대의(大義)를 중시하고 사적인 감정을 잘라낸다.
前故設科, 長吏在官, 當須交代, 而故犯之, 雖隨糾坐, 猶已廢曠。
이전에는 이런 이유로 하여 처벌을 정하고, 고급관리는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 상사를 당하면 반드시 교대자가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범하는 자가 있고, 비록 그 과실을 살펴 죄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공무는 여전히 황폐해진다.
方事之殷, 國家多難, 凡在官司, 宜各盡節, 先公後私, 而不恭承, 甚非謂也。
현재는 일이 많을 때이고 국가도 어려움이 많으니, 무릇 관직에 있는 관리들은 응당 각자 충성을 다하고 공적인 것을 앞에 두고 사적인 것을 뒤에 두어야 하며, 이 취지를 삼가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는 일이다.
中外群僚, 其更平議, 務令得中, 詳爲節度。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료들은 다시 이 일에 관해 상의하여 법령을 적당하게 하도록 노력하고 상세하게 조목을 만들도록 하라.'
顧譚議, 以爲奔喪立科, 輕則不足以禁孝子之情, 重則本非應死之罪, 雖嚴刑益設, 違奪必少。
고옹이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례의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에 관한 법을 세움에 있어서 가벼우면 효자의 감정을 금지할 수 없고, 무거워도 본래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죄는 아닙니다. 설사 엄격한 형벌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위반하는 자는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若偶有犯者, 加其刑則恩所不忍, 有減則法廢不行。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처벌을 가중하면 사사로운 감정은 차마 하지 못하고, 처벌을 줄이면 법령이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愚以爲長吏在遠, 苟不告語, 勢不得知。
제 생각으로는 고급관리로서 먼 곳에 있는 자에게는 설령 상사가 있다고 해도 통지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는 반드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比選代之間, 若有傳者, 必加大辟, 則長吏無廢職之負, 孝子無犯重之刑。
대리자를 선발하는 시간에 만일 소식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급관리가 직무를 팽개치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효자가 중형을 범하여 처벌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將軍胡綜議, 以爲喪紀之禮, 雖有典制, 苟無其時, 所不得行。
장군 호종(胡綜)이 의견을 제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상사에 관한 예절은 비록 전장(典章)에 의한 제도가 있다고 해도, 만일 비상 시기에 있지 않으면 집행할 수 없습니다.
方今戎事軍國異容, 而長吏遭喪, 知有科禁, 公敢干突, 苟念聞憂不奔之恥, 不計爲臣犯禁之罪, 此由科防本輕所致。
지금은 마침 전쟁 시기로 군사(軍事)와 일반 정사를 처리하는 상황이 다른데, 고급관리가 상사를 만났을 때 금지하는 조항이 있음을 알면서도 공공연히 과감하게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다면, 설사 효자가 부모의 상사를 듣고 달려가지 않는 치욕은 생각했을지라도 신하된 자가 금지하는 것을 범하는 죄는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법률 금령이 본래 가볍게 만들어진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忠節在國, 孝道立家, 出身爲臣, 焉得兼之. 故爲忠臣不得爲孝子。
신하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도로써 집안을 세우며 벼슬에 나와 신하가 되는데, 어떻게 양자를 모두 가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충신인 자는 효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宜定科文, 示以大辟。
若故違犯, 有罪無赦。
마땅히 법률을 제정하여 사형으로써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만일 고의로 법을 위반한다면, 죄를 범한 것이므로 결코 사면시킬 수 없습니다.
以殺止殺, 行之一人, 其後必絶。
사형을 실시함으로써 죽을 죄를 범하는 자를 막고, 이것으로써 한 사람을 처리한 그 이후에는 후손이 반드시 끊길 것입니다.'
丞相雍奏從大辟。
승상 고옹이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사형을 실시할 것을 주청했다.
其後吳令孟宗喪母奔赴, 已而自拘於武昌以聽刑。
그후 오현(吳縣)의 현령 맹종(孟宗)이 모친상을 당해 달려갔다가 일을 마친 후 직접 이름을 드러내어 무창의 감옥에 구금되어 형벌을 달게 받기를 표명했다.
陸遜陳其素行, 因爲之請, 權乃減宗一等, 後不得以爲比, 因此遂絶。
육손은 그의 평소 행동을 서술하고 그를 위해 부탁을 했다. 손권은 그래서 맹종의 직위를 한 등급 줄여 주었으며, 이후에는 이러한 예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법을 위반하며 상가로 달려가는 일은 근절됐다.
二月, 陸遜討彭旦等, 其年, 皆破之。
2월, 육손이 팽단(彭旦) 등을 토벌하여 그 해에 모두 격파시켰다.
冬十月, 遣衞將軍全琮襲六安, 不克。
겨울 10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六安)을 습격하였지만 공략시키지 못했다.
諸葛恪平山越事畢, 北屯廬江。
제갈각이 산월을 평정하는 일을 마친 후, 북쪽으로 여강(廬江)에 주둔했다.
○ 赤烏元年春, 鑄當千大錢。
적오(赤烏) 원년(238) 봄, 한 개가 1천 소전에 상당하는 대전을 주조했다.
夏, 呂岱討盧陵賊, 畢, 還陸口。
여름, 여대가 여릉(廬陵)의 적을 토벌하고 육구(陸口)로 돌아왔다.
秋八月, 武昌言麒麟見. 有司奏言麒麟者太平之應, 宜改年號。
가을 8월, 무창에서 기린이 출현했다고 한다. 담당관리는 기린은 천하태평의 상징이므로 마땅히 연호를 고쳐야 한다고 상주했다.
詔曰: 間者赤烏集於殿前, 朕所親見. 若神靈以爲嘉祥者, 改年宜以赤烏爲元。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근래 붉은 색 까마귀가 궁전 앞에 모여 있었는데, 짐이 직접 보았다. 만일 이런 신령스런 새가 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연호를 바꾸어 응당 적오(赤烏)를 원년(元年)으로 해야만 한다.'
群臣奏曰: 昔武王伐紂, 有赤烏之祥, 君臣觀之, 遂有天下, 聖人書策載述最詳者. 以爲近事旣嘉, 親見又明也。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상주하여 말했다. '과거 주무왕이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붉은 색 까마귀의 길상이 있었고, 군주와 신하들이 이것을 보아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이 일은 성인이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최근의 일은 길상으로 생각되며, 직접 보았으니 또 명백합니다.'
於是改年。
步夫人卒, 追贈皇后。
그래서 연호를 고쳤다. 보부인(步夫人)이 죽자, 황후로 추증했다.
初, 權信任校事呂壹, 壹性苛慘, 用法深刻. 太子登數諫, 權不納. 大臣由是莫敢言。
당초, 손권은 교사(校事) 여일(呂壹)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後壹姦罪發露伏誅, 權引咎責躬, 乃使中書郎袁禮告謝諸大將, 因問時事所當損益。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주살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袁禮)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禮還, 復有詔責數諸葛瑾步騭朱然, 呂岱等曰: 袁禮還, 雲與子瑜子山義封定公相見, 並以時事當有所先後, 各自以不掌民事, 不肯便有所陳, 悉推之伯言承明。
원례가 돌아오자, 손권은 또 조서를 내려
제갈근, 보즐(普즐), 주연(朱然), 여대 등을 질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례가 돌아와 보고한 것에는, 자유(子瑜; 제갈근), 자산(子山; 보즐), 의봉(義封; 주연), 정공(定公; 여대)과 함께 서로 만나보고, 아울러 그 당시 정사에 있어서 응당 앞뒤로 해야만 되는 일에 관해 질문했더니, 각자 민사(民事)를 관장하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할 수 없다면서 모두 백언(伯言; 육손)과 승명(承明; 반준)에게 미루었다고 했다.
伯言承明見禮, 泣涕懇惻, 辭旨辛苦, 至乃懷執危怖, 有不自安之心。
백언과 승명은 원례를 만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였고, 말하는 취지는 고통스러웠고 마음속으로는 위기와 공포를 갖고 있었으며, 불안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聞此悵然, 深自刻怪. 何者。
이 말을 듣고 매우 실망했으며, 매우 기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인가?
夫惟聖人能無過行, 明者能自見耳。
무릇 성인은 잘못된 행위가 없게 할 수 있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고 본다.
人之舉措, 何能悉中。
사람의 거동이 어떻게 모두 적중할 수 있겠는가?
獨當己有傷拒眾意, 忽不自覺, 故諸君有嫌難耳. 不爾, 何緣乃至於此乎。
내가 여러분의 의견을 함부로 거절하고 경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겠는가?
自孤興軍五十年, 所役賦凡百皆出於民。
내가 군대를 일으킨 지 50년 간, 부세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天下未定, 孼類猶存, 士民勤苦, 誠所貫知。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반역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으며, 사인과 백성들이 수고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확실히 내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然勞百姓, 事不得已耳。
그러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
與諸君從事, 自少至長, 發有二色, 以謂表裡足以明露, 公私分計, 足用相保。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일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여 머리는 희끗희끗하게 되었다. 내심과 행위를 여러분들은 십분 알 수 있으며, 공사(公私)의 감정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서로 충분히 신임할 수 있다.
盡言直諫, 所望諸君, 拾遺補闕, 孤亦望之。
여러분들이 의견을 전부 말하고 직접적으로 간언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완하는 것은 나 역시 희망한다.
昔衞武公年過志壯, 勤求輔弼, 每獨歎責。
과거 위무공(衛武公)은 나이가 많았어도 뜻이 매우 커서 보좌할 신하를 간절하게 구하였으며, 왕왕 혼자 탄식하고 꾸짖었다.
且布衣韋帶, 相與交結, 分成好合, 尚污垢不異。
또 일반 평민과 사귈 때에도 인정과 뜻으로써 합쳐 친구가 되었으며, 여전히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변심하지 않았다.
今日諸君與孤從事, 雖君臣義存, 猶謂骨肉不復是過. 榮福喜戚, 相與共之。
오늘 여러분들은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비록 군주와 신하의 대의명분은 있지만 골육지친도 또 이와 같음을 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예, 행복, 기쁨, 슬픔을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忠不匿情, 智無遺計, 事統是非, 諸君豈得從容而已哉。
충성스런 자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도모함에 있어 남김이 없고 일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함께 책임을 지는데, 여러분들은 어찌 한가롭게 있겠는가!
同船濟水, 將誰與易。
우리들은 같은 배로 물을 건너는 것과 같은데,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겠는가!
齊桓諸侯之霸者耳, 有善管子未嘗不歎, 有過未嘗不諫, 諫而不得, 終諫不止。
제환공은 제후의 패자( 者)였는데, 그에게 선행이 있으면 관자(管子)가 일찍이 찬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에게 허물이 있으면 일찍이 간언하며 그치지 않았었다.
今孤自省無桓公之德, 而諸君諫諍未出於口, 仍執嫌難。
지금 나 자신은 제환공의 덕이 없음을 반성하지만, 여러분들은 간언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여전히 의심과 비난을 품고 있다.
以此言之, 孤於齊桓良優, 未知諸君於管子何如耳。
이 점에서 말하면, 나는 제환공과 비교하여 진실로 우수하지만, 여러분들은 관자와 비교할 때 어떠한지 아직 모른다.
久不相見, 因事當笑。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웃어야 할 것이다.
共定大業, 整齊天下, 當復有誰。
우리들이 함께 대업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시켜야지, 마땅히 또 누가 있겠는가?
凡百事要所當損益, 樂聞異計, 匡所不逮。
모든 일에는 당연히 줄이고 늘림이 있으며, 다른 의견을 즐겁게 들어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으려 한다.'
○ 二年春 三月, 遣使者羊衜鄭冑將軍孫怡之遼東, 擊魏守將遼東髙慮等, 虜得男女。
2년(239) 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衜), 정주(鄭胄), 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守將) 장지(張持), 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
零陵言甘露降。
영릉(零陵)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夏五月, 城沙羨。
여름 5월, 사선(沙羨)에 성벽을 세웠다.
冬十月, 將軍蔣秘南討夷賊。
겨울 10월, 장군 장비(蔣秘)가 남쪽으로 이민족을 토벌했다.
秘所領都督廖式殺臨賀太守嚴綱等, 自稱平南將軍, 與弟潛共攻零陵桂陽, 及搖動交州蒼梧鬱林諸都, 眾數萬人。
장비가 이끄는 도독 요식(廖式)이 임하(臨賀)태수 엄강(嚴綱) 등을 죽이고 자칭 평남장군(平南將軍)이라고 하며, 동생 요잠(廖潛)과 함께 영릉, 계양(桂陽) 및 교주(交州), 창오(蒼梧), 울림(鬱林)의 여러 군을 동요 시켰으며, 병력은 수만 명이나 되었다.
遣將軍呂岱唐咨討之, 歳餘皆破。
장군 여대와 당자를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했는데, 1년여 만에 모두 격파시켰다.
○ 三年春正月, 詔曰: 蓋君非民不立, 民非谷不生。
3년(240)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대체로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국가를 세울 수 없고, 백성은 곡식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頃者以來, 民多徵役, 歳又水旱, 年谷有損, 而吏或不良, 侵奪民時, 以致饑困。
근래 이래로 백성들의 납세와 복역이 너무 많았고, 해마다 또 수재와 한재가 있어 한 해의 곡물 수확량이 감소 하였는데, 관리들 가운데 어떤 자는 좋지 못하여 백성들의 농번기를 빼앗아 굶주림의 고통에 이르게 하고 있다.
自今以來, 督軍郡守, 其謹察非法, 當農桑時, 以役事擾民者, 舉正以聞。
지금 이후로 독군(督軍)과 군수는 관리들의 법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를 삼가 살피고, 농사와 양잠을 해야 할 시기에 부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적벌하여 보고하라.'
夏四月, 大赦, 詔諸郡縣治城郭, 起譙樓, 穿塹發渠, 以備盜賊。
여름 4월,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군과 현에 조서를 내려 성곽을 수리하고 망루를 만들었으며 참호나 굴을 파서 도적들을 대비하도록 했다
冬十一月, 民饑, 詔開倉廩以賑貧窮。
겨울11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발생하자 조서를 내렸다. 창고를 열어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 四年春正月, 大雪平地深三尺, 鳥獸死者大半。
4년(241) 봄 정월, 대설이 내려 평지에도 3척이나 쌓였고, 날짐승과 들짐승 중에서 태반이 죽었다.
夏四月, 遣衞將軍全琮略淮南。決芍陂, 燒安城邸閣, 收其人民。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芍陂)를 무너뜨리고 안성(安城)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威北將軍諸葛恪攻六安。
琮與魏將王淩戰於芍陂, 中即將秦晃等十餘人戰死。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六安)을 공격했다. 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 )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車騎將軍朱然圍樊, 大將軍諸葛瑾取柤中。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사중( 中)을 취했다.
五月, 太子登卒。
是月, 魏太傅司馬宣王救樊。
5월, 태자 손등이 죽었다.
이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六月, 軍還。
閏月, 大將軍瑾卒。
6월, 군대가 돌아왔다.
윤달 6월, 대장군 제갈근이 죽었다.
秋八月, 陸遜城邾。
가을 8월, 육손이 주에 성을 쌓았다.
○ 五年春正月, 立子和爲太子, 大赦, 改禾興爲嘉興。
5년(242) 봄 정월, 아들 손화(孫和)를 세워 태자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화흥(和興)을 가흥(嘉興)으로 고쳤다.
百官奏立皇后及四王, 詔曰: 今天下未定, 民物勞瘁, 且有功者或未錄, 饑寒者尚未恤, 猥割土壤以豐子弟, 祟爵位以寵妃妾, 孤甚不取. 其釋此議。
모든 관리들이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를 함부로 분할하여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혀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그다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三月, 海鹽縣言黃龍見。
3월, 해염현(海鹽縣)에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夏四月, 禁進獻御, 減太官膳。
여름 4월, 진귀한 물품의 헌상을 금지시키고 태관(太官)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양을 줄였다.
秋七月, 遣將軍聶友校尉陸凱以兵三萬討珠崖儋耳。
가을 7월, 장군 섭우(섭友), 교위 육개(陸凱)를 보내 병사 3만 명을 인솔하게 하여
주애(珠崖)와 담이( 耳)를 토벌하도록 했다.
是歳, 大疫, 有司又奏立后及諸王。
이 해, 역병이 크게 유명하였고, 담당 관리들은 또 황후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八月,立子霸爲魯王。
8월, 아들 손패(孫 )를 세워 노왕(魯王)으로 삼았다.
○ 六年春正月, 新都言白虎見。
6년(243) 봄 정월, 신도군(新都郡)에서 백호(白虎)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諸葛恪征六安, 破魏將謝順營, 收其民人。
제갈각이 육안을 정벌하고, 위나라 장수 사순(謝順)의 진영을 격파시켜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冬十一月, 丞相顧雍卒。
겨울 11월, 승상 고옹(顧雍)이 세상을 떠났다.
十二月, 扶南王范旃遣使獻樂人及方物。
12월, 부남왕(扶南王) 범전(范 )이 사자를 보내 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치도록 했다.
是歳, 司馬宣王率軍入舒, 諸葛恪自皖遷於柴桑。
이 해, 사마선왕이 군대를 이끌고 서현(舒縣)에서 가화(嘉禾)가 자랐다는 보고가 있었다.
七年春正月, 以上大將軍陸遜爲丞相。
秋, 宛陵言嘉禾生。
是歳, 步騭朱然等各上疏云: 自蜀還者, 咸言欲背盟與魏交通, 多作舟船, 繕治城郭。
이 해,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又蔣琬守漢中, 聞司馬懿南向, 不出兵乘虛以掎角之, 反委漢中, 還近成都。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事已彰灼, 無所復疑, 宜爲之備。
일은 이미 매우 분명해졌으니 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權揆其不然, 曰: 吾待蜀不薄, 聘享盟誓, 無所負之, 何以致此。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촉을 두텁게 대우하고, 공식적인 사자를 파견하여 맹약을 맺었으며, 촉에게 불성실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소?
又司馬懿前來入舒, 旬日便退, 蜀在萬裏, 何知緩急而便出兵乎。
또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昔魏欲入漢川, 此間始嚴, 亦未舉動, 會聞魏還而止. 蜀寧可復以此有疑邪。
과거 위나라가 한천(漢川)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도, 우리들은 여기에서 삼엄하게 경계하면서 또 거동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어 출병을 멈추었었소. 촉나라가 어찌 또 이
때문에 우리를 의심할 수 있겠소?
又人家治國, 舟船城郭, 何得不護。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今此間治軍, 寧復欲以御蜀邪。
지금 우리가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어찌 또 촉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人言苦不可信, 朕爲諸君破家保之。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짐은 여러분들을 위해 집을 허물어서 보증하겠소.'
蜀競自無謀, 如權所籌。
촉나라는 결국 스스로 도모하는 바가 없었는데, 손권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 八年春二月, 丞相陸遜卒。
8년(245) 봄 2월, 승상 육손이 세상을 떠났다.
夏, 雷霆犯宮門柱, 又擊南津大橋楹. 茶陵縣鴻水溢出, 流漂居民二百餘家。
여름, 우레가 궁궐 문의 기둥에 떨어졌으며, 또 남진(南津) 대교의 기둥을 쳤다. 다릉현(茶陵縣)에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하였으므로 주민들의 가옥 2백여 채가 유실되었다.
秋七月, 將軍馬茂等圖逆, 夷三族。
가을 7월, 장군 마무(馬茂) 등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八月, 大赦。
8월, 대사면을 시행했다.
遣校尉陳勳將屯田及作士三萬人鑿句容中道, 自小其至雲陽西城, 通會市, 作邸閣。
교위 진훈(陳勳)을 파견하여 둔전사병과 장인 3만 명을 데리고 구용(句容) 중도에 운하를 파서 소기(小其)로부터 운양(雲陽) 서쪽 성까지를 연결하여 상인들의 교역 장소를 만들고 식품창고를 만들도록 했다.
○ 九年春二月, 車騎將軍朱然, 征魏柤中, 斬獲千餘。
9년(246) 봄 2월, 거기장군 주연이 위나라의 사중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夏四月, 武昌言甘露降。
여름 4월, 무창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秋九月, 以驃騎步騭爲丞相, 車騎朱然爲左大司馬, 衞將軍全琮爲右大司馬, 鎮南呂岱爲上大將軍, 威北將軍諸葛恪爲大將軍。
가을 9월, 표기장군 보즐이 승상으로, 거기장군 주연이 좌대사마로, 위장군 전종이 우대사마로, 진남장군 여대가 상대장군으로, 위북장군 제갈각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 十年春正月, 右大司馬全琮卒。
10년(247) 봄 정월, 우대사마 전종이 세상을 떠났다.
二月, 權適南宮。
2월, 손권은 남궁(南宮)으로 갔다.
三月, 改作太初宮, 諸將及州郡皆義作。
3월, 태초궁(太初宮)을 개축했고, 여러 장수들과 주군이 모두 노동에 힘썼다.
夏五月, 丞相步騭卒。
여름 5월, 승상 보즐이 세상을 떠났다.
冬十月, 赦死罪。
겨울 10월, 사형수들을 대사면시켰다.
○ 十一年春正月, 朱然城江陵。
11년(248) 봄 정월, 주연이 강릉에 성벽을 쌓았다.
二月, 地仍震。
2월,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三月, 宮成。
3월, 건업궁(建業宮)이 완성됐다.
夏四月, 雨雹, 雲陽言黃龍見。
여름 4월, 우박이 내렸고, 운양에서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五月, 鄱陽言白虎仁。
5월, 파양에서 백호가 나타났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詔曰: 古者聖王積行累善, 修身行道, 以有天下. 故符瑞應之, 所以表德也. 朕以不明, 何以臻茲。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고대의 성황은 선행을 쌓고, 몸을 닦아 도를 행하여 천하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길상의 징조가 내려 인사와 상응 하였으니, 이것은 성왕의 덕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짐은 현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르렀는가?
尚書雲, 雖休勿休. 公卿百司, 其勉修所職, 以匡不逮。
'상서'에서 말하기를, '비록 다른 사람에게
칭송되더라도 미덕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休勿休)'고 했다. 공경 대신들은
힘껏 노력하여 맡은 일을 다하고 짐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 十二年春三月, 左大司馬朱然卒。
12년(249) 봄 3월, 좌대사마 주연이 죽었다.
四月, 有兩烏銜鵲墮東館。
4월, 까마귀 두 마리가 까치를 물어 동관(東館)에 떨어뜨렸다.
丙寅, 驃騎將軍朱據領丞相, 燎鵲以祭。
9월, 표기장군 주거(朱據)가 승상을 대리하고, 까치를 태워 제사를 지냈다.
○ 十三年夏五月, 日至, 熒惑入南斗。
13년(250) 여름 5월, 하짓날에 화성이 남두(南斗) 별자리로 들어갔다.
秋七月, 犯魁第二星而東。
가을 7월, 화성이 또 북두성 두 번째 별을 지나 동쪽으로 운행했다.
八月, 丹陽句容及故鄣寧國諸山崩, 鴻水溢。詔原通責, 給貸種食。
8월, 단양,구룡 및 고장(故鄣),영국(寧國) 지역의 여러 산이 붕괴되었고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했다. 조서를 내려 조세를 면제시키고, 종자와 식량을 빌려 주었다.
廢太子和, 處故鄣。
魯王霸賜死。
태자 손화를 폐위시켜 고장에 배치시켰다. 노왕 손패에게는 자살을 명했다.
冬十月, 魏將文欽偽叛以誘朱異, 權遣呂據就異以迎欽. 異等待重, 欽不敢進。
겨울 10월, 위나라 장수 문흠이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朱異)를 유인했다. 손권은 여거를 파견하여 주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문흠을 영접하도록 했다. 주이 등이 신중하게 행동함으로써 문흠은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十一月, 立子亮爲太子。
11월, 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세웠다.
遣軍十萬,作堂邑塗塘以淹北道。
군사 10만 명을 보내 당읍현(當邑縣)에 도당( 塘)을 만들어 북쪽 통로를 막았다.
十二月, 魏大將軍王昶圍南郡, 荊州刺史王基攻西陵, 遣將軍戴烈陸凱往拒之, 皆引還。
12월, 위나라 대장군 왕창이 남군(南郡)을 포위하고, 형주자사 왕기(王基)가 서릉(西陵)을 공격했으므로, 손권은 장군 대열(戴烈), 육개(陸凱)를 파견하여 가서 막도록 했다. 왕창과 왕기는 모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是歳, 神人授書, 告以改年立后。
이 해, 신인(神人)이 편지를 주어 연호를 바꾸고 황후를 세우라고 말했다.
○ 太元元年夏五月, 立皇后潘氏, 大赦, 改年。
태원(太元) 원년(251) 여름 5월, 황후 반씨(潘氏)를 세웠으며,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初臨海羅陽縣有神, 自稱王表。
당초, 임해군(臨海郡) 나양현(羅陽縣)에는 신이 있었는데, 자칭 왕표(王表)라고 했다.
周旋民間, 語言飲食, 與人無異, 然不見其形. 又有一婢, 名紡績。
그 신은 민간에서 활동하여 언어와 음식이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그의 형체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시녀 한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방적(紡績)이었다.
是月, 遣中書郎李祟齎輔國將軍羅陽王印綬迎表。
이 달, 중서랑 이숭(李崇)을 파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 나양왕(羅陽王)의 인수를 받들어 왕표를 영접하도록 했다.
表隨崇俱出, 與祟及所在郡守令長談論, 祟等無以易, 所歷山川, 輒遣婢與其神相聞。
왕표는 이숭을 따라 함께 나왔다. 왕표는 이숭 및 지나게 된 군수나 현령과 담론하였는데, 이숭 등은 그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다. 산천을 지나면서 왕왕 시녀로 하여금 신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秋七月, 祟與表至. 權於蒼龍門外爲立第舍, 數使近臣齎酒食往。
가을 7월, 이숭은 왕표와 도착했다. 손권은 왕표를 위해 창룡문(蒼龍門) 밖에 진을 만들어 놓고, 측근의 사신을 보내 술과 음식을 여러 차례 갖고 가도록 했다.
表說水旱小事, 往往有驗。
왕표는 수재와 한재와 같은 작은 일에 관해 예언했는데, 왕왕 증험이 있었다.
秋八月朔, 大風, 江海湧溢, 平地深八尺, 吳髙陵松柏斯拔, 郡城南門飛落。
가을 8월 초하루, 태풍이 불어 강과 바다가 범람하여 평지의 물은 깊이가 8척이나 되었고, 오군 고릉(高陵)의 송백이 뽑혔으며, 군의 남쪽 성문이 날려 떨어졌다.
冬十一月, 大赦。
權祭南郊還, 寢疾。
겨울 11월, 대사면을 실시했다.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 질병으로 누워 있었다.
十二月, 驛徵大將軍恪, 拜爲太子太傅。
12월, 역마로 대장군 제갈각을 불러 태자태부로 제수했다.
詔省徭役, 減徵賦, 除民所患苦。
조서를 내려 부역을 줄이고 부세를 감소시켜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제거해 주었다.
○ 二年春正月, 立故太子和爲南陽王, 居長沙。
2년(252) 봄 정월, 이전 태자 손화를 남양왕(南陽王)으로 임명하여 장사에 머물도록 했다.
子奮爲齊王, 居武昌。
子休爲琅邪王, 居虎林。
아들 손분을 제왕(齊王)으로 삼아 무창에 거주하도록 했다. 아들 손휴(孫休)를 낭야왕(琅邪王)으로 임명하여 호림(虎林)에 거주하도록 했다.
二月, 大赦, 改元爲神鳳。
皇后潘氏薨。
諸將吏數詣王表請福, 表亡去。
2월,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연홀르 신봉( 鳳)으로 고쳤다. 황후 반씨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 장수와 관리들이 자주 왕표를 찾아가 복을 구하자, 왕표는 달아났다.
夏四月, 權薨, 時年七十一, 謚曰大皇帝。
여름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71세였고 시호를 대황제(大皇帝)라고 했다.
秋七月, 葬蔣陵。
가을 7월, 장릉(蔣陵)에 안장했다.
▶️ 葬(장사지낼 장)은 ❶회의문자로 塟(장)은 통자(通字)이다. 茻(망; 풀)과 死(사; 죽다)의 합자(合字)이다. 시체를 들에 들고 나가 풀속에 장사지내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葬자는 '장사지내다'나 '매장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葬자는 艹(풀 초)자와 死(죽을 사)자, 廾(받들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서는 총 두 종류의 글자가 '장사지내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나는 관에 누워있는 사람과 그 위로 풀이 심겨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爿(나뭇조각 장)자에 死(죽을 사)자가 결합한 것으로 죽은 사람을 눕혀 장사를 지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전과 해서에서는 두 글자가 결합 되어 지금의 葬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葬자에 쓰인 廾자는 艹자가 변형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葬(장)은 일부 명사(名詞)와 결합(結合)하여 장례식(葬禮式)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장사지내다(葬事---) ②매장하다(埋葬--) ③장사(葬事)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장사지내는 예절을 장례(葬禮), 시체를 묻거나 화장하는 일을 장사(葬事),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를 장가(葬歌), 장사하여 시체를 매장하는 땅을 장지(葬地), 장례에 쓰이는 온갖 기구를 장구(葬具), 송장을 땅에 묻음 또는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하게 함을 매장(埋葬), 무덤을 옮김으로 옮기어 장사 지냄을 이장(移葬), 큰공을 세운 사람이 죽었을 때에 나라에서 지내어 주는 장사 또는 왕실의 장례를 국장(國葬), 편안하게 장사 지냄을 안장(安葬), 죽은 사람을 불에 살라 장사 지냄을 화장(火葬), 남편과 아내를 한 무덤에 장사함을 합장(合葬), 죽은 사람과 가까웠던 사람이나 동물을 딸려 함께 묻는 일을 순장(殉葬), 난정첩을 순장한다는 뜻으로 서화나 도자기 등의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난정순장(蘭亭殉葬), 이름 난 사람의 장례때 사회 인사들이 모여서 통곡하고 장송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거애회장(擧哀會葬), 병이나 나면 돕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 줌을 일컫는 말을 병구사장(病救死葬), 장사 지낸 뒤에 곧 복을 받음을 일컫는 말을 인장묘발(寅葬卯發) 등에 쓰인다.
▶️ 陶(질그릇 도, 사람 이름 요)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좌부변(阝=阜; 언덕)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匋(도)로 이루어졌다. 지명(地名), 음(音)을 빌어 질그릇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陶자는 '질그릇'이나 '도공', '빚어 만들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陶자는 阜(阝:언덕 부)자와 匋(질그릇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匋자는 절구질하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질그릇'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본래 '질그릇'이라는 뜻은 匋자가 먼저 쓰였었다. 陶자의 금문을 보면 절굿공이를 든 사람이 방아질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阜자를 더해지면서 질그릇을 구워내는 '가마'까지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陶(도, 요)는 ①질그릇(잿물을 덮지 아니한,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그릇) ②도공(陶工: 옹기장이) ③달리는 모양 ④(질그릇을)굽다 ⑤빚어 만들다 ⑥기르다 ⑦기뻐하다, 즐거워하다 ⑧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⑨울적(鬱寂)하다 ⑩허망(虛妄)하다 ⑪파다 ⑫성(姓)의 하나, 그리고 ⓐ사람의 이름(요) ⓑ고요(皐陶: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인물)(요) ⓒ뒤따르는 모양(요) ⓓ긴 모양(요) ⓔ따라가다(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기그릇 자(瓷), 질그릇 견(甄)이다. 용례로는 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함을 도취(陶醉), 옹기를 만드는 사람을 도공(陶工), 도기를 만드는 일과 주물을 만드는 일을 도야(陶冶), 도기를 굽는 가마를 도요(陶窯), 질그릇이나 사기그릇의 총칭을 도기(陶器), 도기의 예술을 도예(陶藝), 도기의 제조를 직으로 하는 사람을 도인(陶人), 자기로 만든 벼루를 도연(陶硯), 도자기의 원료로 쓰이는 진흙의 총칭을 도토(陶土),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모양을 도연(陶然), 훌륭한 품성을 갖추도록 잘 가르쳐서 기름을 도용(陶鎔), 잿물은 덮어 씌워서 구워 만든 기와를 도와(陶瓦), 질그릇을 만드는 흙을 재료로 하여 만든 도장을 도인(陶印), 도기에 그리는 그림을 도화(陶畫), 질그릇을 와도(瓦陶), 질그릇 만듦을 제도(製陶), 흰 빛깔의 사기를 백도(白陶), 그릇면이 검고 반들반들하게 간 토기를 흑도(黑陶), 교화하고 훈육하는 것을 훈도(薰陶), 마음이 매우 답답하고 근심스러워 즐겁지 않음을 울도(鬱陶), 흙으로 구워 만든 개와 기와로 만든 닭이라는 뜻으로 외모만 훌륭하고 실속이 없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을 비웃어 하는 말을 도견와계(陶犬瓦鷄), 도주와 의돈과 같은 큰 부자라는 뜻으로 막대한 재산이나 돈이 많은 부자를 이르는 말을 도주의돈(陶走猗頓),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이르는 말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가 어떤 것에 끌려 취하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자아도취(自我陶醉),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이르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등에 쓰인다.
▶️ 家(집 가, 여자 고)는 ❶회의문자로 宊(가)와 동자(同字)이고, 姑(시어미 고)와 통한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안에서 돼지(豕)를 기른다는 뜻을 합(合)하여 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家자는 '집'이나 '가족'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家자는 宀(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예로부터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은 집안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니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돼지우리를 반지하에 두고 그 위로는 사람이 함께 사는 특이한 구조의 집을 지었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은 집안에 돼지를 기르고 있다. 家자는 그러한 가옥의 형태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家(가)는 (1)일부 한자어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 그 방면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일에 능하거나 또는 지식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4)성 다음에 붙어, 그 집안을 나타내는 말 (5)호적상, 한 가(家)로 등록된 친족의 단체 등의 뜻으로 ①집 ②자기(自己) 집 ③가족(家族) ④집안 ⑤문벌(門閥) ⑥지체(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⑦조정 ⑧도성(都城) ⑨전문가 ⑩정통한 사람 ⑪용한이 ⑫학자(學者) ⑬학파(學派) ⑭남편(男便) ⑮아내 ⑯마나님(나이가 많은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 ⑰살림살이 ⑱집을 장만하여 살다 그리고 ⓐ여자(女子)(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집 당(堂), 집 우(宇), 집 택(宅), 집 실(室), 집 궁(宮) 등이 있다. 용례로는 부부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을 가족(家族), 한 가족으로서의 집안을 가정(家庭),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집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음을 가출(家出),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을 가보(家寶), 집안 식구를 가구(家口),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친(家親), 남에게 자기 아들을 이르는 말을 가아(家兒),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의 상태를 가계(家計), 한 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옥(家屋), 집안이나 문중을 가문(家門),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에게 길들여져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가축(家畜),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한 집안의 대대로 이어 온 계통을 가계(家系),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집마다 또는 모든 집을 일컫는 말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석은 한 항아리고 담은 두 항아리의 뜻으로 집에 조금도 없다는 말로 집에 재물의 여유가 조금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무담석(家無擔石), 한 집안에 주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군신의 다름을 이르는 말을 가무이주(家無二主),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타국이나 타향에 살 때는 고향 가족의 편지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의 값이 황금 만 냥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을 가서만금(家書萬金), 집집마다 알려주어 알아듣게 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유호효(家喩戶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물오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일상 흔한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존중함을 비유하는 말을 가계야목(家鷄野鶩),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흔한 것을 멀리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귀한 것을 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가계야치(家鷄野雉),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살기 좋음을 이르는 말을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안이 가난하여 혼백이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실의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가빈낙탁(家貧落魄),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은 벼슬자리라도 얻어서 어버이를 봉양해야 한다는 말을 가빈친로(家貧親老) 등에 쓰인다.
▶️ 側(곁 측)은 ❶형성문자로 侧(측)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기울어지다'의 뜻을 가진 則(즉, 측)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側자는 '곁'이나 '가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側자는 人(사람 인)자와 則(법칙 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側자의 금문을 보면 鼎(솥 정)자 옆으로 두 개의 人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솥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側자는 이렇게 솥 주변에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곁'이나 '가까이'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였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鼎자가 貝(조개 패)자로 바뀌게 되었고 발음을 위해 則자가 쓰이게 되면서 본래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側(측)은 ①곁, 가까이 ②옆, 치우친 곳 ③측면(側面), 가, 언전리 ④예(禮)에 어긋나는 행위(行爲) ⑤혼자, 홀로 ⑥어렴풋이, 아련히 ⑦(귀를)기울이다 ⑧(해, 달이) 기울다 ⑨(한쪽으로) 치우치다, 쏠리다 ⑩외면하다(外面--) ⑪비뚤어지다 ⑫배반하다(背反--) ⑬엎드리다, 숨다 ⑭낮다, 미천하다(微賤--) ⑮어렴풋하다 ⑯아파하다, 슬퍼하다 ⑰다가오다, 닥쳐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곁 방(傍),곁 방(旁)이다. 용례로는 옆에서 들이침을 측공(側攻), 척주가 옆으로 활처럼 굽은 상태를 측만(側彎), 가까운 곁 또는 멀지 않은 바로 옆을 측방(側傍), 측면의 벽을 측벽(側壁), 옆 자리를 측석(側席), 곁에 있는 방을 측실(側室), 원가지에서 돋아난 작은 가지를 측지(側枝), 곁눈질을 함 또는 무섭고 두려워서 바로 보지 못함을 측목(側目), 옆으로 향하여 남을 측생(側生), 곁의 가까운 곳 또는 가까이 친한 사람을 측근(側近), 어렴풋이 들음 또는 옆에서 얻어들음을 측문(側聞), 옆 변두리를 측변(側邊), 치우친 말을 측언(側言), 몸을 옆으로 하여 누움을 측와(側臥), 기울어 넘어짐을 측질(側跌), 양쪽의 옆면을 양측(兩側), 남쪽이나 남극을 가리키는 쪽을 남측(南側), 왼쪽이나 왼쪽의 옆을 좌측(左側), 안쪽으로 안으로 향한 부분이나 안에 있는 부분을 내측(內側), 상대편의 높임말을 귀측(貴側), 시름에 잠기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하여 누워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림 또는 두 마음을 품고 바른 길로 좇지 아니함을 반측(反側), 지극히 간절함 또는 간절하고 측은함을 간측(懇側), 어머니 곁 또는 어머니 슬하를 모측(母側), 기계나 구조물의 측면에서 바라본 상태를 평면적으로 나타낸 도면을 측면도(側面圖), 적의 측면을 치는 공격을 일컫는 말을 측면공격(側面攻擊),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다는 뜻으로 걱정거리로 마음이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함을 이르는 말 또는 원래는 미인을 사모하여 잠을 이루지 못함을 이르는 표현을 전전반측(輾轉反側),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잠불이측(暫不離側), 끊임없이 달라져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변화불측(變化不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