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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리라.>
▥ 요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22-24.26ㄱㄴㄷ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23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24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26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리라.>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3-16
나 요한은
13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14 내가 또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우리가 한껏 배불리 먹고,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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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토마스 사도가 인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공과 건축에 뛰어난 기술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임금이 자신을 위한 새 왕궁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돈도 다 지불하였지만 토마스는 그 돈을 임금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임금은 토마스 사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그때 임금의 동생이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형님, 어제 꿈에 제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제가 살 집은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큰 궁궐을 보았는데 천사는 그것이 형님의 것이고 토마스 사도라는 인물이 지어 준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우리는 집을 사기도 하고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집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집을 하늘 나라에 짓고, 비신앙인은 땅에 짓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지은 집은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지만 하늘에 지은 집은 영원히 남게 됩니다.오늘 예수님께서 곳간을 넓히려는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큰 집을 짓던 사람입니다. 지상에 큰 집을 지으려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롭지 못하게 되면 하느님 앞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한가위에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추수한 것들이 많아 기쁜 날입니다. 이 추수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내가 부유하게 살 집을 짓는 건축 자재들입니다. 이것들을 이 짧은 생애를 위하여 소진해 버릴 것인지 영원히 지속되는 집을 짓는 데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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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예로부터 한가위 밤이면 보름달을 보고 소망을 빌곤 하였습니다. 달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처럼 차고 기울고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나오지 않습니까? 달은 마치 탄생, 성장, 쇠퇴, 죽음, 그리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종교성을 띠게 됩니다. 아울러 한가위에는 한 해의 결실에 감사드리곤 했지요. 우리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보름달이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밝게 비춰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가위에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만나려고 고향으로 갑니다. 이는 새로운 힘을 받기 위함이지요. 신앙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품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우리 삶의 근원과 최종 목적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또한, 한가위에는 돌아가신 이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 추억만을 회상하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서 되살려 내는 것이지요. 그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끔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상을 비롯하여 먼저 가신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동시에 온 집안을 한 식구로 묶는 구심점도 되는 것이지요. 비록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들이 피운 꽃에 이어 지금 우리가 꽃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를 대신해서 꽃을 피울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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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가위 명절에 우리 선조들이 표현한 풍요로움과 감사의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해 정성껏 가꾸어 거둔 곡식을 함께 기뻐하며, 이 곡식을 얻기까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함께 나누고 즐기는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무엇보다 먼저 받은 것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만족과 기쁨이 없다면, 내가 드리는 감사도 의미가 반감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오로지 나 혼자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으로, 그리고 주변에서 함께해 준 모든 이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감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 몫도 함께 나누어야 하고, 그 나눔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감사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부자는 인간의 욕심이 무한함을 보여 줍니다. 그 욕심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교만에서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에서 옵니다.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곡식을 보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곳간을 지으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바벨탑이며 하느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며, 이것이 또한 탐욕의 출발점입니다. 한가위 명절에 추수한 것을 함께 나누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며, 이웃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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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는 음력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며 달빛이 가장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가을에 지내는 큰 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송편과 토란국, 운이 좋으면 송이로 만든 전과 산채 나물을 먹는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표현이 나왔나 봅니다.
한가위는 고대 농경 시대부터 내려와 신라 시대에 국가의 명절로 자리 잡았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추수의 기쁨을 나누며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산업화 이후 농촌 사회가 축소되면서 창조주를 섬기는 옛 전통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오곡백과를 내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냅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형제들과 우애를 나눕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후유증이 있지만, 그래도 한가위는 우리에게 소중한 명절입니다. 추석은 개인의 탐욕을 버리고 가족 사랑을 확인하며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전통과 미풍양속을 잇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한가위 명절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아름다운 희생과 사랑의 열매를 바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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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되풀이되는 질문들 때문입니다. “대학은 어디 갈 거야?” “연봉은 얼마나 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는 어느 학교에 들어갔어.” “○○네는 이번에 고급 아파트 장만했더구먼.” “○○는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하더라.”
이렇게 비교하고 또 자랑을 늘어놓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너는 잘 사는 게 아니야. 분발해야지.’ 하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 같아 속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부자는 부지런히 살았고, 땅에서 소출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잘 보관해 두고는 먹고 즐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출을 많이 거두어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생명은 이미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이러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그 생명이 풍요로워지려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에서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은, 땅의 소출이 아니라 사랑의 소출을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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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유함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곧,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는 그가 매일 만날 정도로 절친하였습니다. 그다음으로 친한 친구는 그가 아주 소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첫 번째 친구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 대해서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앞의 두 친구와 만나는 바람에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친한 첫 번째 친구는 죽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도 그의 무덤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는 그가 죽는 순간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인도되는 순간에도 함께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는 돈이고, 두 번째는 가족이며, 세 번째는 선행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친구가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함께해 주기를 바랄 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삶이 제대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보장되지 않는 것이 많을뿐더러 돈 때문에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아니, 참된 삶은 돈이 아니라 또 다른 가치로 보장됩니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가치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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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는 멀리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력 7월 보름부터 서라벌 여인들이 편을 갈라서 길쌈놀이를 하다가 8월 대보름이 되면, 길쌈을 거두어 서로 견주어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면서 축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날의 절정은 동산 위에 크고 둥근 달이 떠오를 무렵, 임금이 문무백관들과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의 은덕을 기렸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맨 먼저 천지신명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고, 그다음으로 선조에게 감사를 드렸으며,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이 서로 함께 기쁨의 축제를 보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미풍양속은 점차 사라져 가고, 오늘날에는 개인주의와 못된 탐욕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조상 제사라는 의무감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가친지들과 주변의 이웃들과 서로 기쁨과 생활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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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과 ‘잘 못 사는 것’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삶이 될지는 몰라도, ‘잘 사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대개는 잘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 ‘잘 사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재물을 모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육체는 할 일이 많았지만, 영혼은 억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영과 육의 균형’이 맞을 리 없습니다. 결과는 불안과 허무입니다. 영혼이 보내는 ‘목마름’의 신호인 것이지요.
잘 사는 삶이란 ‘감사드리는 삶’입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축복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불평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잘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와 비교해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잘생긴 용모인데도, ‘어느 누구’와 비교해 못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지는 모습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극복됩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추석 명절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감사드리게 했습니다. 감사만이 하늘의 기운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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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진정 풍요로운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마음을 채우는 날이기도 하지만 맛깔스럽고 푸짐한 추석상에 둘러앉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누는 가족의 정담은 한 해의 시름을 잊게 합니다.
이 민족의 명절에 덴마크의 소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두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던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소설 『바베트의 만찬』입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원숙한 성찰, 그리고 여성의 섬세함이 잘 조화된 작품입니다.
주인공 바베트는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노르웨이의 시골 마을로 몸을 피한 프랑스의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착하게 살아가는 어느 두 자매의 하녀이자 요리사로 지냅니다. 알 수 없는 베네트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충실함과 깊은 인품은 점점 바닷가 작은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자아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인 1만 프랑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축하하면서도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슬퍼합니다.
바베트는 ‘열두 명’의 이웃을 위하여 ‘마지막 만찬’을 준비합니다. 그날의 식탁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황홀한 음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사실 프랑스 제일의 식당 ‘카페 앙글레’의 일급 요리사였던 것입니다. 혁명의 와중에 가족도, 친구도, 명예도 잃고 무명의 망명객이 된 바베트는 이제 자신을 환대한 이들에게 일생의 만찬을 대접합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만찬이 끝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이제 떠나는지 묻습니다. 베네트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은 프랑스에서 이미 다 사라졌을뿐더러 1만 프랑을 이번 만찬에 다 썼기에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또한 그 큰돈을 어찌 다 쓸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합니다. “카페 앙글레에서는 12인분 저녁 식사 재료비가 1만 프랑이에요.”
바베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 그날의 저녁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가위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우리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입니다. 자비만이 죽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 것도 아닌 우리, 먼지요 티끌 같은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끽하라고 초대해 주신 하느님과 조상들을 기억하고 깊이 감사드리는 명절입니다.
어린 시절, 선친께서 주도하시는 명절 제사에 온 가족이 정성껏 예를 올리고, 수십 번도 더 절을 반복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계속하고, 마치 조상님들이 제삿상 앞에 앉아계시는 듯, 술잔을 올려드리고, 젓가락을 이곳 저곳 옮겨드리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조상들의 혼백이 들어오실수 있도록 대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든지, 제사가 끝난 뒤에는 객귀(客鬼)들을 위해 대문 앞에 객귀밥을 내놓던 것을 보고서는 속으로 엄청 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돌아보니 그런 제사 풍습은 우리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전달해 주신 조상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는 참으로 정겨운 풍습입니다. 마치 살아 생전 조상님을 대하듯, 따뜻하고 살갑게 지극정성으로 밥 한끼 지어 올리는, 참으로 마음 훈훈한 전통입니다.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중한 무언가를 내게 남겨둔 채 떠나가거나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떼어내 가져갑니다. 한 사람을 향해 줄달음치던 감정은 생물과 같아서, 그 사람이 사라지거나 사랑이 소멸해도 곧장 죽지 않습니다.(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달)
잠시 우리 보다 먼저 떠나간 사람들, 때로 가슴 후벼 파도록 보고 싶지만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 사람...그러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님 자비의 품안에 편히 쉬고 있을테니, 허전하고 아쉽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주님 은총 안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희망하며, 쓸쓸한 마음조차 주님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과하지 않고 소박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수고를 분담하면서 제사상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제사 준비 문제로 서로 마음 불편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끼리 안부를 묻고, 조상님들과의 인연과 추억을 회상하고, 좋았던 모습들을 기억하는, 따뜻하고 정겨운 명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재물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자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단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운명을 달리하게 될 부자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부자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세상의 제물 축척하기 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만간 닥쳐올 노화, 죽음, 영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없이 살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스타일의 삶을 추구하는 부자에게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자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년 열두 달, 하루 온종일, 게으름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 결과가 엄청난 부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재물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모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웃들의 곤궁함을 외면했습니다. 넘쳐나는 재화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에 눈이 멀어 영적인 눈, 지혜의 눈이 감겨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꽤나 평범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자주 잊고 삽니다. 어떤 사람들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고도 없이, 우리 측의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나셔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듭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지상의 유산이 아니라 불멸의 유산입니다.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입니다. 자비만이 죽은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의 거처로 인도합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추석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어릴 때 추석이면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돼지고기, 소고기를 신문지에 쌓아 놓으셨습니다. 고모님 댁, 외삼촌 댁에 갖다 드렸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추석만큼은 배불리 먹으려는 어머니의 배려였습니다. 고모님도, 외숙모님도 제게 작은 것이라도 주셨습니다. 추석은 둥근 달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 추석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저녁이기도 하지만 추석은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진 것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제는 추석의 풍속도 많이 변했습니다. 긴 연휴를 이용해서 여행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이 막히니 부모님이 서울로 오기도 합니다.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택배가 내 마음을 전해 주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우리의 삶도 변하지만, 추석 본연의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거둔 결실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 이웃과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하고, 나도 한때는 힘든 적이 있었음을 생각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경주의 최 부자 집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내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여러 가지이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될 때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려고 마음은 먹지만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곧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작심삼일인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지금 자신이 있게끔 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간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풍요로움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추수할 것이 많아 기쁜 날이고, 그 기쁨을 가족과 조상님과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에게 원두커피 한 봉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방에 들어와 커피 봉투를 열자 진한 커피 냄새가 너무 좋았습니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셔야겠다 싶어서 원두커피를 분쇄기로 갈고 물을 끓여서 커피를 내렸습니다. 진한 향기를 내는 커피가 제 앞에 놓였습니다. 기분이 좋았고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다가 그만 실수로 손으로 커피잔을 쓰러뜨렸고 책 위에 커피를 쏟은 것입니다. 얼른 책 위의 커피를 종이로 닦았지만 누런 커피 자국이 선명합니다. 짜증이 밀려듭니다. 조금 전까지 커피 한 잔에 큰 기쁨을 얻었지만, 잠시 뒤 커피 한 잔에 짜증과 화가 밀려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내게 행복을 주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것이 잠시 뒤에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생명은 어떻겠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마음을 위해 하늘의 보물을 얻는 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현재의 것들에 만족하여 “먹을 것이 많으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라는 마음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길, 지금 현재를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의 삶은 짧고, 누구나 예고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아서는 안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본디 우리 것이 아닙니다. 덕행만이 죽은 자의 동반자입니다.”
인생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황이 변화할 것을 기대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변화인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는 미치지 못한다(비트겐슈타인).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자.
결혼 생활을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명히 결혼 전에는 서로가 너무 좋아서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는 서로가 자신의 원수라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요. 제 남편이 결혼 전에는 별로였거든요. 별 볼 일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이 남자에게 과연 나의 미래를 걸어야 할지 참으로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지금의 제 남편이 과거의 제 남편 모습보다 훨씬 더 좋아요. 만약 10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지금의 제 남편을 선택할 거예요.”
대부분이 과거에는 정말로 잘 해 주던 배우자가 결혼 후에는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하시지요. 그런데 이 자매님은 거꾸로입니다. 하긴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이 부부는 잘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고 죽을 둥 살 둥 허우적거리는데도,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거나 오히려 뒤로만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 정말로 힘들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서로서로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이로써 좀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이 거두어들인 수확을 모아두기 위해 더 큰 곳간을 짓지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곧 자신만을 위해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자신의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며, 다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재산, 내 생명 등등 어느 하나도 내 스스로 내 힘만으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감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소유물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자신의 힘만으로 쟁취한 것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그것이 영원히 자신이 소유할 것처럼 어리석게 집착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예화겠지만 우산장사와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는 두 아들의 상반된 장사 업종 때문에 매일매일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갔습니다. 날이 개이고 햇볕이 쬐는 날이면 큰 아들의 장사가 안 되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짚신을 파는 작은 아들의 장사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곧 그 어머니는 해가 떠도 걱정, 비가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해가 뜨면 작은 아들의 장사가 잘 되는 것에 감사하고, 비가 오면 큰 아들의 장사가 잘되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렇게 감사를 드리기 시작하니까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파우스트의 저자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감사할 것은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12,19)
곽승룡 비오 신부님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늘 확실함을 찾고 있지만, 그 한계가 역시 있는 법이다. 다리를 건설할 때 옮길 수 있는 무게가 얼마나 될까하는 것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제한된 중량에 관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곧 은행 안의 돈, 농장 안에 수확물, 연금 등... 이 모든 것은 정치 또는 경제적 위기로부터 그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이 붕괴되거나 휩쓸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참으로 유일한 확실함은 하느님의 섭리인 듯싶다. 그래서일까 교회의 교부들은 금전들을 우상들과 비유하여 말하곤 한다.
이것들은 신성의 이미지들이고 또한 예술가들의 최고작품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순간적이고 아주 작은 부분에서 그 금과 정교한 예술로 표현된 엄청난 가치의 돌들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다.
바로 하느님의 섭리이고 신성의 이미지인 대단한 돈과 금이 바로 우리를 파멸시킬 이방인들의 우상으로 넘어질 수 있다는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순간을 위해 은행에 돈을 맡긴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돈들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게 그리고 갑자기 필요한 것이 내 인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곳간을 헐어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다가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 겠다."(루카 12,18)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가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그래서일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유일한 확실함이다.” 곡식과 재화를 나눠 쓰라고 주님은 초대하신다.
죽음너머에서 세상 보며 하신 인생안내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8~21)”
돈 돈하면서 돌은 사람 돈에 목숨 걸고 돈에 미쳐죽는 사람 많습니다.
그간 죽어간 사람들이 말하면 인간자유 없어질 까봐 말 못하고있어요.
대신 예수님이 죽음 너머에서 세상 보며 하신 인생안내는 있잖습니까.
꼭 죽을 사람이라면 죽음 이후 세계가 어떤지 꼭 알아야하지 않나요?
죽음이후 생각지 않고 사니 이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떠난 조상 벗 천사들 악마들 이 세상 보며 깔깔거리거나 속 터지겠죠.
존엄한 인간이 자유롭다보니 목숨까지 재물에 질질 끌려 살고 있네요.
이럴 때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늘 뜻대로 살려는 신앙인들 참 훌륭해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추석 한가위를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오늘 부모님과 조상님들과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해주신 사회 각계각층의 의사와 열사들의 은덕을 기리는 이 추석 한가위에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조상님들께 제사를 드릴 때, 우리 조상님들이 우리 가문을 부흥시키고 커다랗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 공을 기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인 면에서 볼 때, 완벽하고 훌륭하셔서 그분들을 공경하고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경하고 감사의 정을 표하며 떨어져 있는 이 순간에도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착하고 공부를 잘하고 능력이 특출 나며 사회에 헌신적으로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귀여워하고 아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맡기셨고, 우리 또한 열 달 배 아파하면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우리 부부가, 우리 가정이 꼭 존경할만하고, 꼭 도움이 되며, 꼭 자랑스러워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주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우리가 선택하여 가꾼 가족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고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면서 성가정을 만들어 나갑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우리 가정을 이 지상 생애 동안 내 안식처요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함께 대화하며 고안해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갑시다.
이 추석 한가위에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다같이 주 하느님께 청해봅시다.
우리 본당 신자 가정이 모두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가정의 모범이신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 예수님이 서로 믿어주고 아껴주며 덮어주고 지지해주었듯이, 우리 가정도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다른 한 쪽 배우자가 희생해 주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함께 짐을 짊어지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가 다른 가정과 다른 배우자들을 바라보며 비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서로 감사드리며 살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에게 고치라고 요구하기보다 부족해 보이는 점을 채워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의 자기 계발과 인격 성숙을 위해 자발적으로 배려하며 기여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가정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며 지지해주고, 한마음으로 함께하면서 헤쳐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를 본받아, 부부가 예기치 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자기 가족에게 주어진 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명하여 가족을 지키고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어린 예수의 인생을 인정하고 따랐듯이, 부모가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며 자녀의 부족해 보이는 결정도 지켜봐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듯이, 자녀가 실패하여 배울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끌어주고 함께하며 밀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감싸 안고 보호하여 가정의 병풍이 되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세상의 수많은 여인들 중에 자신의 아내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주 그 사실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아내와 가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가 인생의 동반자임을 인정하여, 가정사를 아내와 함께 나누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와 가족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며 지지하고 감싸 안아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참 보호자요 담보자로서의 남편이요 가장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언제나 가족을 용서하고 받아주며, 조건 없이 믿어주고 지지하여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노동자 성 요셉처럼 인생의 선배로서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며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는 모범을 드러낼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을 본받아 아내와 자녀의 어려움을 지켜봐 주며 기다려주고, 지지하고 북돋아주며, 변치 않는 가족의 뒷배가 되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버지 성 요셉을 본받아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넓은 아량과 깊은 포용력을 갖추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가 남편의 사랑하는 평생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하여, 남편을 굳게 믿고 존경하며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뜻대로 뜯어고치려고 하기보다 채워주려는 마음으로 함께 가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모님을 닮은 인자하신 어머니로서 온갖 궂은일과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언제나 남편과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을 품어 안아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를 본받아 남편과 가족이 사회에서 겪는 모든 피로와 어려움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가정의 귀염둥이요 자랑이 되어 가정이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불완전한 부모의 부족함과 결점을 보고 알면서도 부모를 사랑하고 잘 따를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죄악에 때묻지 않고 맑고 활기차게 자라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허상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히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적절한 방법으로 쉽게 얻고 누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땀 흘려서 갈고 닦아 이루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위치에서 사회에 기여할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주 예수님께서 비춰주신 복음의 길을 충실히 밟아, 교회를 지키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주님, 우리 가정이 이 땅에서 주님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나감으로써, 마침내 마지막 날 주님 나라에서 우리 가족이 부모님들과 조상님들과 주님의 사랑받는 많은 영혼들과 다 같이,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광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행복하려면 탐욕을 버려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탐욕은 탐식, 욕망, 오만, 명예, 분노, 욕심, 질투와 연관되는 단어이다.
모두 다 내려놓고 살라 하신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병자들에게
병 때문에 의기 소침해지고 박스 안에 갇혀 오만가지 생각하고 자학하고 걷지 못한다고 마음도 걷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 찾아주지 않는다고 외로워 하고 비관하고, 밥맛없다 먹지않고 겨우 먹는 것이 먹기좋다 면류만 먹고 .....
오늘은 추석명절인데 마음의 날개를 달고 귀향을 하면 어떨가요? 고향친구들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만나서 담소도 하고, 함께 뒷동산도 오르고 들판의 풍성함고 떠올리며 환하게 웃어 보이고 차례상 물리고 한상 앞에 받아 놓고 마음으로 풍성한 음식을 먹어 보아요.
병은 나을 거라는 생각, 낫지 않으면 오늘 즐겁게 지내자 하고, 죽을 것이라면 한점 부끄럼없이 오늘을 준비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요! 주님 만나서 소풍 잘 끝내도 귀천하게 되었다며 기뻐해야지요!
병원에서, 불치병 앓고 있는 환우들, 힘내세요. 모두가 나에게 유보되어 있어요.내가 할 탓이고 마음에 달려있지요. 그러면 낫는 것입니다. 즐거운 명절 되도록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유한성'(루카 12장 15~2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이 많은 ~ 수확한 것을 어떻게 하나?'
오늘 예수님은 수확의 때를 맞이한 우리에게 쌓아두지 말고 나누라고 하십니다.
더 큰 창고 더 큰 금고에 축적하는 기쁨이 무너지는 생명의 유한성을 자각하라 하십니다.
며칠전 마을 농부집에 포도를 갖다주러 갔는데 왜 그리 힘없고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지 ~
한켠에 양파가 수북하여 팔지도 못하는 심정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오늘, 가족이나 이웃이 슬픔과 외로움으로 지내지 않도록 마음 쓴다면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흡족한 오늘이길 바랍니다.'
"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Be cautious and wary of all avarice. For a person’s life is not found in the abundance of the things that he possesses.”)
김웅태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은 추석명절 한가위 입니다. 일 년 중 가장 풍요롭고 여유 있는 날이지요.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고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가을 추수의 풍요롭고 풍성하고 주님의 은혜 가득한 결실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요일 2, 22~26)에서는
"타작 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요엘 2, 24. 26) 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의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 14, 13)
그러면서 성령께서는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묵시 14, 13) 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루카 12, 15~21)에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추석명절을 맞아서 전례 안에서 봉독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결실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결실이라는 것은 선행의 결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행으로 가득 찬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며, 선행은 없고 악행만 가득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참된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의 결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선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 선행은 주님께 대한 믿음의 외적 실천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은혜로 풍성한 결실을 거든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는 모든 소출을 자기 것으로만 생각해서, 큰 창고를 지어 저장해서 오랫동안 혼자서만 그 결실의 행복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인색한 부자의 이기적인 심보를 보시면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소출과 재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하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 21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출과 축복과 재산을 없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눈 것은 선이 되는 것이고, 나의 재산과 소출이 적어지는 만큼 내 마음의 기쁨 공간은 그만큼 더욱 커지는 것이며, 내가 하늘나라에서 차지할 공간도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오늘 추석 한가위를 맞이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고, 또 나의 나눔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눔을 통해서 얻어지는 행복을 공유하는 그런 삶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았습니까?
• 나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눔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나눔의 행복< 루카, 12/15/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추석 4일간의 연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어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온 상담자가 멀지 사과 밭에서 사과 따는 봉사를 하고 얻어온 사과 열 개를 들고 왔다. 나누기 위해서 s도 받아들고 나오다가 잘 아는 손님으로 오신분 만나 삼위일채의 뜻을 담아 세 개를 주고 문간 수사님에게 하나이신 하느님을 뜻하는 마음에서 한 개를 들이고 또 이층에 선교사무실에 들려 세 개 주고 방으로 올라오니 세 개 가 남았다. 이렇게 추석을 맞이하도록 은총주신 하느님에게 감사들이며 기쁜 추석을 맞이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재산에 대한 불평등을 놓고 불평 불만 이지만 이런 이유는 오늘 복음에 부자가 자기 것만 챙기는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부자가 참 행복한 부자가 되려면 가진바를 어떻게 나눌까? 생각이 먼저 앞서야 합니다. 아니 재산을 모으면서 어떻게 나누어야 할 것인줄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피땀 흘리며 번 돈이라 애착을 가지고 나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하면 거기에 마가 따릅니다. 도적도 들고, 슬데 없는 곳에 사용하면서 죄를 짖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도 되고 미움을 받게 됩니다. 부자가 갑질을 하면서 저주를 받고 부자인 것을 자랑하면서 시비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옵니다.
하느님이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이 공편하게 나누어 주듯이 나눔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추석은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설날은 북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나누지만 추석인사는 한가위를 즐겁게 지내세요. 라고 줄거운 한가위라 칭합니다. 전라도 지방의 추석 민속노리인 강강 수래는 다 함께 즐겁게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공동체적 즐거움 함께 즐겁게 지내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의 기쁨은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어제 수도원의 지인과 단체들이 나누어 주는 물품을 계시하는 내용을 보면서 간단한 화살 기도하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저녁식사 시간에 푸짐한 음식은 먹으면서 나누어 주신 분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추석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든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찬미 받으소서. 좋은 날씨 땅에 물을 넘치게 주시 풍요로운 한가위를 맞아하게 하신 주님! 이런 날 모두 배부르게 먹고 마시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지키며 모두 행복한 삶을 살도록 즐기차게 기도합니다.
<한가위에 바치는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풍요로운 수확의 때
오늘 한가위에는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값진 결실을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곱게 보듬어 품에 안게 하소서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놓기 위해서
커다란 결실뿐만 아니라
미미한 그것까지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기게 하소서
기쁨의 결실은
환한 웃음과 더불어
벗들에게 기쁨으로 되돌리고
슬픔의 결실은
같은 슬픔을 겪는 벗들에게
연민과 위로로 내놓게 하소서
나보다 배고픈 벗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나보다 낮은 벗들에게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외로운 벗들에게
따스한 품이 되어주고
웅크린 벗들에게
힘센 두 팔이 되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벗과 나의 것임을 깨달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놓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또 다시 정성껏 일구어낼
모든 것으로 곱게 채울 수 있게
나를 비우고 비우며
마침내 나마저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한 육신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주교의 강론에서(Oratio 5, de Resurrectione Christi, 6-7. 9: PG 89,1358-1359. 1361-1362)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분이 다스리시는 죽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이 그들을 다스리시니,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다시 죽지 않으시는 것처럼, 이제는 그들도 살아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여 부패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에 참여하셨듯이 후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영원히 잠겨 있는 청동 성문을 두드려 부수고 쇠 빗장을 부러뜨리며 노예 신세 대신에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 생명을 부패에서 구하여 당신께로 끌어올리시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죽고 육신은 썩고 있으므로 이 같은 구원 계획이 미완성인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이 배신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어디선가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말한 모든 은혜 외에 우리보다 먼저 가신 분들을 통해서 보증을 받았으며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 있고 우리를 당신과 함께 높이 들어 올리신 그분과 함께 한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우리가 유치함을 버리고 완전한 어른이 되면 구원 계획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기를 지배하시는 성부의 계획대로 한번 받은 은혜는 변할 수 없으니 다시 우리 정신이 유치하게 되어 단죄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영적인 몸이 부활하였으므로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 육신에 대하여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다.” 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앞서가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닮는다는 뜻이니 더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 당신이 알고 계신 대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시어 당신의 빛나는 몸과 같아지게 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인류가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닮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천한 것으로 묻혔지만” 영광으로 변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성의 첫 열매를 성부께로 이미 인도하셨으니 전인류를 인도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높이 달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끌어당기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수확과 안식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본당 미사에 어르신들이 많이 오십니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고, 아프신 분들도 많습니다. 주름과 병고는 고생스런 일생의 증표입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으면서도, 여전히 자녀들, 손주들 걱정이 가득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 여생을 위해 사용하면 좋으련만,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뿐입니다. 때에 맞춰 연미사를 봉헌하고 자식들을 위해 미사지향도 자주 넣으십니다. 조상들을 기억하고, 후손들을 아끼는 마음이 늘 엿보입니다. 명절이 되면 수도권으로 나간 자녀들이 늙으신 부모를 찾아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얼굴에는 윤기가 돌고, 교양과 자신감도 넘쳐흐릅니다. 어르신들의 주름, 병고가 자녀들을 윤택하게 했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한가위 위령미사를 드리는 성전은 어르신들과 후손들로 가득합니다. 3대가 함께 꽃을 피우는 듯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은 일생 헌신하고 희생하며 큰 수확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을 키우고, 신앙을 전수하고, 사회발전을 일으키고, 죽은 조상들을 위해 기도하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랑을 살아오셨습니다. 인생의 수확은 사랑으로 거둔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주시는 분들이십니다. 한가위 명절, 본당의 보배인 어르신들이 충만하고 평안하게 여생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5-21)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예로부터 한가위 밤이면 보름달을 보고 소망을 빌곤 하였습니다. 달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처럼 차고 기울고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나오지 않습니까? 달은 마치 탄생, 성장, 쇠퇴, 죽음, 그리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종교성을 띠게 됩니다. 아울러 한가위에는 한 해의 결실에 감사드리곤 했지요. 우리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보름달이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밝게 비춰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가위에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만나려고 고향으로 갑니다. 이는 새로운 힘을 받기 위함이지요. 신앙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품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우리 삶의 근원과 최종 목적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또한, 한가위에는 돌아가신 이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 추억만을 회상하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서 되살려 내는 것이지요. 그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끔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상을 비롯하여 먼저 가신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동시에 온 집안을 한 식구로 묶는 구심점도 되는 것이지요. 비록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들이 피운 꽃에 이어 지금 우리가 꽃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를 대신해서 꽃을 피울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지혜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자 특징은 전례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한가위 추석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도 찬미가도 참 아름답고 은혜로웠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어서 와 조배드리세”-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계절의 움직임에 조화이루어
어느새 곡식들이 무르익어서/추수한 첫 열매를 봉헌하도다
올해도 우리일손 축복하여서/이모든 곡식들을 거두어들여
우리 삶 이어가게 힘을 주시는/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세
마음을 곱게곱게 가다듬어서/이 세상 열매들을 추수하면서
천상의 주님잔치 참여하는날/고운 옷 차려입게 보살피소서”-
새벽기도때 비로소 아름다운 초대송과 찬미가를 발견하고 널리 나누고 싶어 다시 불야불야 강론 서두에 집어 넣었습니다. 가을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하고 어지럽지만 계절의 순환은 정확합니다. 어김없이 올해도 추석을 맞이했고 가을 철되어 열매도 익어 수확했습니다. 자주 피정자들에게 인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인생사계人生四季, 과연 나는 인생여정중 계절로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중 어디에 속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 가을이 되어도 열매 부실한 삶이라면 참으로 허전할 것입니다. 엊그제 피정왔다 떠난 40대 중반의 눈빛 맑은 형제를 잊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도 피정왔던 분인데 이번에도 부부가 다섯 아이를 데리고 1박2일 피정을 왔다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 아침기도가 끝나자 마자 성전에 앉아 있는 형제와 네 꼬마 아이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마침 부인은 어린 애기와 함께 피정집에 있다 했습니다. 즉시 사진과 더불어 메시지를 전송했고 형제의 답신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지상천국의 아름답고 행복한 성가정 이루어 성인처럼 사시기 바라며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아침에 뵙게 되어 반갑고 영광스러웠습니다.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중년의 형제인지요! 40대 중반에 5명의 꼬마 아이들! 흔치 않을 것입니다. 분위기를 볼 때 사랑 가득 담아 키우는 참으로 신심깊은 부부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가을 초반에 들어선 성공 인생처럼 느껴졌습니다. 흡사 아이들이 부부의 풍성한 인생 가을 열매들을 상징하는 듯 생각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성공적 인생 여정입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울수록 필히 살펴 보고 점검해야 할 바 내 삶의 중심이요 내 삶의 제자리입니다. 하느님 삶의 중심을 잡고 하루하루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풍요로운 인생 가을을 보장합니다.
요즘 수도원길 하늘길을 걸을 때 마다 자주 눈길이 가는 가로수 옆 사과 나무와 그 열매들입니다. 거의가 익어갈수록 썩어가는 사과 열매들이었습니다. 끝까지 온전히 익은 열매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과연 내 인생 영적 열매들은 썩지 않고 잘 익어가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썩지 않고 잘 익어가는 신망애信望愛, 즉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들일 것입니다. 이런 영적 열매들이 빈약한 인생 가을이라면 참 허전, 허무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열매 풍성한 지혜로운, 성공적 인생 여정을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 좋은 한가위 추석날에 참 적절한 물음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첫째, 기뻐하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기쁨입니다.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은 너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 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친다.”
하느님 중심의 풍요로운 인생 가을 축제를 연상케 합니다. 넘치도록 주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이런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하느님 중심의 삶도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둘째,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십시오.
바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꽃피는 봄이 있으면 열매를 수확하는 가을이 있습니다. 영원한 지상 삶이 아니라 언젠가는 분명 죽음이 있고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이를 염두에 둘 때 깨어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게 됩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있어 삶이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물론 분도 성인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래야 선물 인생 낭비하지 않고 알뜰히 살 수 있습니다. 영적 삶에 참으로 잊지 말고 늘 기억해야 할 것 둘은 ‘하느님’이자 ‘죽음’입니다.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은 선종의 죽음과 마지막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즉시 하느님 말씀에 화답한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갈 것이다.”-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런 행복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의식하며 오늘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실히 하루하루 살았을 때, 주님의 은총으로 죽음을 통한 참된 자유와 안식의 실현입니다. 또 천사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사람의 아들 같은 분께 소리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 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보실 때 잘 무르 익어가고 있는 우리 삶의 열매들인지 살펴 보게 됩니다. 주님은 어김없이 우리의 죽음을 통해 우리 영적 삶의 열매를 수확해 가실 것입니다. 또 아침기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 주님의 말씀도 저에겐 큰 위로였습니다.
“내게 맡긴 사람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날에 모두 살리리라.”
고진감래苦盡甘來입니다. 하루하루 눈물겹게 충실히 치열히 살았던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 시편을 노래할 것입니다.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가던 우리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셋째, 지혜로우십시오.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입니다. 무지의 사람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숙명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앎으로 겸손과 지혜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참된 기도도 회개도 겸손도 지혜도 기쁨도 행복도 감사도 없습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날 길도 사람이 될 길도 없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 악마, 괴물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완전히 무지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모습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문이 없고 온통 벽뿐인 고립단절의 붙통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워야 겠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을 하는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하느님의 답입니다.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흡사 어리석은 자가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꿈을 꿨다면 분명 어리석은 부자도 구두쇠 스쿠루지 영감처럼 꿈에서 깨어난후 회개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는 복음을 듣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재산이 우리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한 번 뿐이 없는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부단한 선행의 자비행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을 때 참행복입니다.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자 책임이 행복한 삶입니다. 무지의 불행에 대한 답도 행복의 하느님 한분 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참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물론 모든 사도들, 예언자들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십시오. 바로 1.기쁘게, 2.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며, 3.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끝으로 이 좋은 한가위 추석날,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우리의 한가위입니다.
명절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옛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의 수확은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곡식을 수확하시듯
우리의 행복을
무르익게 하시는 분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탐욕을 내려놓게
하시는 순리를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탐욕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모든 생명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겸손한
생명입니다.
더 많은 재산과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에
기뻐하는 한가위
명절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욕심과 기대감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부유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시간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리또한
무의미하고
우리의 수확또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생명과 기쁨의
한가위 축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분들 모두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용기를
되찾는 한가위
되십시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안전에로 인도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우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만일 이렇다면, 주님 앞에, 후손들 앞에 얼마나 창피할 것입니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로 수전노였어. 그저 뭐든 태산처럼 쌓을 줄만 알았지, 10원 한푼 나누지를 않았지. 그 천문학적 재산, 어려운 사람들 위해 좀 나눴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을 때, 단 한푼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그 많은 돈 놔두고 떠나려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고 죽었을까?”
반면 우리들이 사후에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큰 영예이겠습니까?
“그분은 정말이지 의롭고 존경받은 부자였어. 열심히, 정직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기업을 운영한 CEO로서도 모델이었지. 피말리는 경쟁 사회, 하루 앞을 예측 못할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회사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늘 연구하시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지. 직원들과 함께 창출한 이윤을 통크게 나눌 줄도 아셨고, 직원 복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어. 연말연시나 명절이면, 남모르게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기부에도 열심이셨지.”
오늘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부의 극단적 불균형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나라 보다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불명예스런 현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 위화감과 좌절감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적 재산을 축척한 이 땅의 재벌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와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의 축척 과정에서 건강함과 건전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들이나 소규모 영세업자들을 배려하는 상생 정신의 결핍이 눈에 띕니다.
이런 사회 현실 앞에 우리 교회에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가교(架橋) 역할입니다.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일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묶여있지 않고, 활발히 돌아다닐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극단적 생활고 속에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나서야겠습니다. 어려운 처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구체적 지원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부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야겠습니다. 부의 올바른 사용이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있는 일인지를 알려줘야겠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부를 복음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해줘야겠습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부자들을 구원에로 이끄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한 부자에 대한 비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엄청난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나봅니다. 얼마나 큰 풍작이었던지, 수확물을 저장해둘 창고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팔고 또 팔아 엄청난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흡족해진 부자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스스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복음 12장 19절)
그러나 부자의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부자가 재물의 안정적 기반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순간, 그 안정성을 순식간에 허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재물과 곡식과 창고를 그냥 내버려둔 채, 빈손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복음 12장 20절)
오늘 우리 시대 부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참 큰 비유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안전은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 초월하고 영원한 대상을 망각하고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큰 어리석음입니다. 유한한 대상을 위해 존재 전체를 거는 것은 참으로 위험스럽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안전에로 인도하십니다.
<인간구실 하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즘만큼 통일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예전에 한 스님에 의해 예언되었던 적이 있어서 더욱 놀랍기도 합니다. 조선일보에 나왔던 탄허 스님(1913-1983)의 예언입니다.
“월악산 영봉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후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할 당시 70년대에는 월악산 자락에는 달이 비칠 호수가 없었고 당시 여자 임금이 나온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1983년 충주댐이 건설되어 월악산 영봉 위로 뜬 달빛이 비칠 수 있는 호수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30년 후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3~4년이면 길게 잡아 2018년인데, 희한하리만치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남북철도와 도로 등의 건설을 올해 내에 추진하며 정전선언까지 올해 내에 끝내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것이 북한과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맞물리면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리가 왜 그 어마어마한 통일비용을 감당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 없이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합니다.
통일비용이란 남북한이 경제적 불균형으로 갈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북한도 어느 수준까지 잘 살게 만들기 위해 남한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입니다. 사실 형제간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어도 자신의 재산 반을 떼어 나누어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살기도 힘든 마당에 우리 세금이 북한으로 다 가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하였는데 사죄하는 마음이 없는데도 또 속아서 친하게 대해주어야 하는 것도 힘든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요즘 인간 구실 못해서...”, 혹은 “저건 인간 구실하겠나?”라는 식의 말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 ‘인간구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돈이 있어야 인간구실 좀 하며 살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 돈 자랑 하는 것이 인간구실은 아닐 것입니다. 그 돈으로 남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야 인간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하느님이라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번영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타인을 더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구실은 누군가를 인간으로 만드는 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인간구실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였습니다. 돈으로 치자면 부모님이 나를 위해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인간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나를 인간으로 키우기보다는 돈을 아까워하였다면 나는 덜 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인간으로 만들 기회가 있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주님께 축복받는 일이고 우리 건국이념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까? 내가 아끼면 누군가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용서 못하면 누군가는 죽습니다. 포용력이 사랑이고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구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분단을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통일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보다 훨씬 적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한 반에 60명 있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3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30년 더 지나면 15명으로 줄 것입니다. 나라에 사람이 부족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수시장이 수출을 위한 밑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럽 선진국들처럼 7~8천만은 돼야 더욱 세상을 이롭게 하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단된 채 전쟁걱정하며 살아가는 스트레스는 돈으로는 환산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통일이 되면 러시아로부터 값싼 기름이 송유관을 통해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북한에 조금 비용을 지불하기는 하겠지만 배로 실어오는 것보다 기름 값이 상당히 내려갈 것입니다. 이것의 경제적 효과는 계산이 어려울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노동력과 지하자원 또한 엄청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철도와 도로가 놓이면 일본과 중국을 잇는 물류의 통로가 되어 얻는 이익도 상당히 클 것입니다. 군대 복무기간이 더 단축될 것이고 군사비용으로 들어가던 막대한 돈이 일자리 창출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신앙을 가져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사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한가위는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추수철과 맞물려있습니다. 이 풍요로움이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포함한 조상들이 잘 키워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처럼 부자로 머물려고만 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사람구실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북한 앞에서 남한이 이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통일은 다음 세대에나 하라고 한다든가, 옛 잘못만을 따지며 그들이 무릎 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부자로 살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곡간을 늘리려하지만 그 날이 제삿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구실 할 수 있었는데, 인간이 되지 못한 채 심판을 받아야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누군가를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추석입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추석에는 다들 가족이 있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사랑과 정을 나누는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추석을 지내기 위해서 제주에서 의정부로 올라왔습니다. 형님도 이천에서 의정부로 올라올 것입니다. 동생 수녀님은 밀양에서 의정부로 올라올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조상들을 위해 연도를 할 것입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동생 수녀님이나, 저는 혼자 살기 때문에 추석에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 차례를 본당에서 지내고 갔지만 교구청에 있을 때와 지금은 추석 전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동생 수녀님도 명례 성지에서 소임을 하고 있어서 이번 추석에는 함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 추석에는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밝은 빛을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몸이 아팠고 휠체어를 타야만 했던 분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장애인은 판사가 될 수 없다고 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판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변호사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나 믿어 주셨던 어머니가 있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했던 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고, 안경이 깨져서 칠판의 글을 읽기 어려웠지만 보증금을 내준 집주인도 있었고, 안경을 맞추라고 돈을 주신 학원 옆자리 아저씨도 있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육체의 장애가 있었지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육체의 장애는 불편하지만 그것이 불행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불편하지만 그것이 곧 불행은 아닙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가톨릭 다이제스트 10월호를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초고층 빌딩에는 예외 없이 건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조물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구조물을 직접 본적이 있습니다. 건물의 최상부에 660톤이 넘는 둥근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초고층 빌딩은 바람이 불면, 특히 태풍이 불면 건물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 중심을 잡아주는 구조물은 건물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합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바람을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은 스스로는 바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밑에서 연줄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연이 줄을 거부하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중심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튼튼한 구조물인 ‘가정’이 흔들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다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가족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지만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참례하지만 기도의 기쁨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나의 말과 행동이 내 이웃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침판이 되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때, 제 위의 형님과 함께 부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학생이라 재정적인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용산역에서 ‘비둘기호’를 타고서 부산까지 갔습니다. 한 10시간이 걸렸는데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서울에서 KTX(Korea Train Express, 초고속 열차)를 타면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KTX가 생긴다고 했을 때, ‘손바닥만 한 이 나라에 고속열차가 과연 필요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속열차 덕분에 편하게 부산까지 강의를 하고 그날로 올라올 수도 있더군요. 강의 등의 일로 먼 곳에 가게 될 때 발달한 교통의 혜택을 받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제가 많이 하는 강의만을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교통이 편하다 하더라도 강의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요? 부족한 강의라도 잘 들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강의를 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또한 강의를 할 때에 사용하는 마이크, 노트북, 프로젝트 등 역시 너무나도 감사한 도구들입니다. 마이크나 노트북, 프로젝트 등은 제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발명한 도구들로 인해서 편하게 그리고 효과 있는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이렇게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감사의 마음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마치 제 자신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주는 그 많은 것들을 배제했을 때 내 자신은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다른 말로는 추석이라고 하지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달구경하는 날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내 자신이 이 자리에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날이고,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드리기보다는 불평과 원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받은 것보다는 받지 않은 것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기에 많은 것을 갖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만 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주님의 이 말씀에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때 우리는 매순간 감사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 사명입니다(오프라 윈프리).
57 계산 주교좌 성당
계산 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입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메르 신부는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합니다.
신나무골에서 사목하던 김보록 신부가 대구 본당을 설정하고 1899년에 한옥 성당을 봉헌했는데, 이것이 곧 현재의 계산 주교좌성당의 전신입니다. 그 뒤 이 한옥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고딕식 성당 건물이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면서 종탑을 높였고, 그 뒤에도 몇 차례의 부분적인 보수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입니다.
주교좌성당답게 신자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는데 신학문 교육 기관인 성립학교의 여자부는 대구지역 여성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며, 후에 효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초등 교육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1909년에는 가톨릭 청년회의 효시인 성립학우회가, 1912년에는 명도회를 발족해 교회 주보를 창간했습니다. 1990년부터 활동해 온 연령회는 천주교의 이웃 사랑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유물관에는 초기에 사용했던 촛대, 동방 박사상 등 귀한 유물이 많은데, 그 가운데 ‘십자가 보목’은 파리 주교관의 보물 보관소에 있던 것을 아멜리 추기경이 1912년에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에게 보낸 것입니다.
주소는 대구시 중구 서성로 10이고, 전화는 053-254-2300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그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들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 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참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그분들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 드리자.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 -찬양, 죽음, 탐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바로 지혜요 겸손입니다. 그 유명한 코엘렛의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코헬3,1-8)는 구절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어찌 이뿐입니까? 예를 들면 끝이 없습니다. 봄의 꽃필 때가 있으면 가을의 열매의 때가 있습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열매 향기는 더욱 깊고 푸근하고 따뜻하고 넉넉합니다. 가을 노년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계절에 맞는 아름다움과 향기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맞이하는 추석 한가위, 민족의 대명절입니다. ‘추석만 같아라.’ 누구나의 바램일 것입니다. 추석 전후로 들어오는 선물이 꽤 있습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포장입니다. 과일, 양말, 빵, 과자, 술, 옷 등 모두 포장으로 인한 낭비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 또한 허영, 허례, 허식입니다. 화려한 포장을 보다 내용을 보면 실망할 때가 참 많습니다. 결코 이런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포장은 화려한 데 내용은 보잘 것 없이 작고 초라한 인생말입니다.
가을이 되면 필히 따르는 열매입니다. 과연 내 인생 열매는, 특히 믿는 이들의 경우,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 즉 신망애의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 지 살펴 보게 합니다. 또 참된 열매, 착함의 열매, 아름다움의 열매, 즉 진선미의 열매 역시 잘 익어가고 있는 지 살펴보게 됩니다.
열매 실자가 들어가는 낱말들이 떠오릅니다. 성실誠實, 충실忠實, 진실眞實, 신실信實, 실력實力 등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열매 실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꽃은 화려하고 잎들은 무성했는데 인생 가을 노년에 접어들어도 열매들 빈약한 인생이라면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하여 제가 피정자들에게 참 자주 예로 드는 예화가 있습니다. “강물같이,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는 세월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광야순례여정중에 있다. 우리 인생을 일년사계로 압축해 본다면 과연 어느 계절에 와 있겠는가?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시간은, 죽음은 얼마나 남았겠는가? 과연 내 인생 열매들은 잘 알익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하여 저는 죽음준비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준비라 부르곤 합니다. 이런 자각의 깨달음이 선물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하루하루 알뜰히 실속있게 살게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며 선물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나눕니다.
첫째, 찬양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의 삶이 아름답고 지혜롭습니다. 찬미의 종교, 찬양의 종교인 우리 그리스도교에 찬미의 사람, 찬양의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에 찬양의 기쁨, 찬양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찬미의 맛, 찬양의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공동성무일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맛이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세상 맛으로부터 초연하게 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느님 찬양의 맛입니다. 우리 모두 찬양으로 초대하는 요엘 예언자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 흐르리라. 너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 찬양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듭니다. 인생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하느님 찬양뿐입니다. 하여 이렇게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추석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늘 죽음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 진짜 지혜로운 삶의 첩경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분도 성인은 물론 사막교부들이 이구동성으로 권한 말입니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습니다. 죽음 앞에 사라지는 헛된 환상들이요 삶의 본질만 남습니다. 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 없는 투명한 본질적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라틴어 잠언 둘입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입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 ‘지금 여기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인생입니다.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고생 끝에 안식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 기도가, 또 한결같은 주님 믿음이 이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합니다. 언젠가 갑자기 행복한 죽음의 우연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찬양으로, 하느님 믿음으로 사는 이들에게 죽음의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매불망 기다려온 주님 집으로의 귀가 날이자 참 안식을 누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셋째, 모든 탐욕을 경계하는 삶입니다.
탐욕이 아닌 무욕의 삶이 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탐욕의 집착에 있습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탐욕이 우리를 눈멀어 어리석게 합니다. 똑똑한 바보가 되게 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탐진치, 탐욕, 성냄, 어리석음 모두가 무지의 자식들입니다. 교만 역시 무지의 자식들입니다. 끝없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런 부자들 오늘 날도 많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탐욕에 눈멀면 누구나 어리석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를 보십시오. 시야가 완전 차단된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탐욕이 눈머니 완전 불통의 사람이, 고립단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불통, 이웃과의 불통, 자연과의 불통, 나와의 불통입니다. 이 불통의 주범이 바로 탐욕의 어리석음입니다.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말씀이 실감있게 전달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이런 어리석은 부자의 착각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하늘의 소리, 회개의 촉구같은 말씀이 들려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합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입니까? 자신을 위해 땅에 보물을 쌓는 탐욕의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는 선행과 자선, 정의와 공정의 실천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무욕의 사람, 소통의 사람이 실로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추석미사 강론을 통해 주님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의 비결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1.찬양의 삶입니다.
2.죽음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3.탐욕을 경계하는 삶입니다.
셋은 분리된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이 깨어 죽음을 기억하며 환상 없는 영원한 오늘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이 탐욕의 병을 치유하여 무욕의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진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한가위에 바치는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풍요로운 수확의 때
오늘 한가위에는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값진 결실을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곱게 보듬어 품에 안게 하소서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놓기 위해서
커다란 결실뿐만 아니라
미미한 그것까지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기게 하소서
기쁨의 결실은
환한 웃음과 더불어
벗들에게 기쁨으로 되돌리고
슬픔의 결실은
같은 슬픔을 겪는 벗들에게
연민과 위로로 내놓게 하소서
나보다 배고픈 벗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나보다 낮은 벗들에게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외로운 벗들에게
따스한 품이 되어주고
웅크린 벗들에게
힘센 두 팔이 되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벗과 나의 것임을 깨달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놓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또 다시 정성껏 일구어낼
모든 것으로 곱게 채울 수 있게
나를 비우고 비우며
마침내 나마저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모든 탐욕을 경계 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이 거두어들인 수확을 모아두기 위해 더 큰 곳간을 짓지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곧 자신만을 위해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자신의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며, 다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재산, 내 생명 등등 어느 하나도 내 스스로 내 힘만으로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감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소유물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자신의 힘만으로 쟁취한 것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그것이 영원히 자신이 소유할 것처럼 어리석게 집착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현자의 이야기 중에 하느님께서는 작은 불빛을 보고 감사드리는 이에게 별빛을 허락하시고, 별빛을 보고 감사드리는 이에게 햇빛을, 그리고 빛이 비추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을 허락하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곧 매사에 감사드리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위 명절의 참 의미는 바로 감사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늘 바쁘고 조급했던 생활 속에서 미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바로 오늘 한가위 추석명절, 아니 앞으로의 매 순간도 오늘처럼 감사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멋지고,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는 <입당송>으로 시작하여,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ㄹ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제1 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 26)라고 하고, <화답송>은 <입당송>을 반복합니다. 나아가 <제2 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면서 <제2 독서>와 <복음>을 비추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보은지정의 감사).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존재론적 감사).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종말론적 감사).
사실, 그리스도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전례>는 이 모든 은혜를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 곧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 쓸모없고 사라지고 말 것인지, 그 ‘헛됨’을 구체적으로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는 그의 수확이 하느님이 하신 일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의 수확인 양,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 21 참조)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재물을 나눔과 사랑으로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 33)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곧 주님이 자신의 전부임을 알게 되고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올 유산의 몫을 따지기보다, 내가 누구에게 건네져야 할 유산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시작되기 전에 군중가운데 어떤 사람이 했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 13)라는 청을 “저를 당신의 유산으로 내어주게 해 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한가위를 맞이하여,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 안에 꽉 차오르길 바랍니다. 아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합니다. 부모와 이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지와 환경이 어떠하든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니 만큼 찬미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다”(제134조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명절을 통한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방법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가족 서로 간에 성숙한 사랑이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우리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균관’에서 명예학위를 받게 되셨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공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신자는 죽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주 문제입니다. 신주는 밤나무로 만들었는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신주에는 조상의 혼이 마물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혼백(넋)의 갈림길이라고 믿었고, 이 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데 떠돌아 다니게 그냥 두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혼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처를 만들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주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는 바로 그 신주를 모셨습니다. 신주를 모신 것은 돌아가신 이를 섬기기 위해서는 볼 수 있는 상이 필요했고 신주는 바로 돌아가신 이의 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돌아가신 이를 만나는 하나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9,27) 그리하여 천국이나 지옥, 아니면 연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대치됩니다. 만약 죽은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하느님의 권능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주를 모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번은 제대 앞에 기억하는 분들의 이름을 달지 않았습니다. 바로 신주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제사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음식을 잡수시러 온다는 사상과 조상들을 잘 공경하면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은 바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가신 분들이 음식을 잡수러 오시기 때문에 음식을 차렸다면 신앙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음식을 잡숫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못해드린 음식을 차려 대접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이지 조상이 와서 잡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고 안 주고는 조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을 부르고 음식을 차리고 거기에 복을 기원하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들이 천상에 들지 않았다면 천상에 오르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천상에 계시다면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사의 핵심은 효요, 웃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나라에 갈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참고로 불교의 49재를 말씀 드립니다. 49재는 한마디로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 즉 불공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25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한 후 득도하여 48년간 설법을 하셨고 49년째에 세상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49라는 숫자가 중요하고 또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재를 치르는 날 사이의 기간을 ‘중유’라고 하여 이 기간에 생전의 업에 따라서 다음세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즉 모든 중생은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싸우다),아귀(다툼),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며 이 가운데 아수라, 아귀, 지옥을 ‘삼악도’라 하여 고통과 지옥으로 가득찬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49재는 죽은 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공입니다. 49일째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날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명절귀신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다.
“설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 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아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프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았나?”
“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
ㅎㅎㅎ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아무쪼록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먼저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실천하여 싸움보다는 웃음이 피어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우리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풍성하다는 의미는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를 짓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풍성한 한가위는 ‘곡식이나 과일의 수확이 가득하길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즉, 풍년 기원 인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돈벌이를 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인사말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풍성한 한가위’라는 것은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이 때만큼은 먹고 살 걱정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배불리 먹는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엘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4.26) 오늘날에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집에서 자길 바라며, 그렇게 되면 저는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 잘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먹는 것을 넘어서 모두 집이 있어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음식걱정, 집 걱정이 없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잘 살기 위한 바탕, 풍성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음식이 많은데 넘쳐나서 쓰레기가 되면 풍성하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집이 큰데 사람이 오가지 않으면 이 또한 풍성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풍성한 한가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잘 살기 위한 바탕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루카 12,16)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가진 곳간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헐고 더 큰 것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재화만 늘리고, 자신만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려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가 재화는 있지만, 부유하다고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가 가진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하느님에게 온 것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잊으면 내 주위가 황폐해지고, 기억하면 내 주위는 풍성해 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더 채우려는 욕심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풍성한 한가위가 되는 방법입니다. 단, 우리 중에 누구라도 바탕은 잘 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저 나눔이라는 마음 뿐 아니라,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자비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한가위 명절 연휴에 비단 어려운 사회복지 시설을 꼭 일일이 다 찾아다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홀로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리고 가족 없이 지내는 일가친척들에게라도 인사를 다님으로써, 외로운 예수님을 달래드리기로 합시다. 더 이상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은인들과 은사들에게도 안부 전화라도 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나누기로 합시다. 풍성한 한가위가 되기 위하여 복음의 부자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낫을 휘두르시어 당신의 말씀이 잘 뿌리내린 이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진정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대해 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나눔의 신비 <루카 12, 15-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이것은 내 것이다. 아무도 내 것을 건드리지 말라.” 탐욕은 한이 없습니다. 백만 원 벌면 천만 원, 천만 원 벌면 일억.....한 없이 공을 쳐나가고 싶고 내 힘으로 안 되면 남의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오늘 이런 욕망이 헛된 것을 깨우쳐 주시려고 어느 부유한 사람 땅의 소출을 혼자 소유하려고 창고를 짓고 혼자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려고 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시간을 아무도 모르는데 죽으면 모든 것이 헛됩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 땅에 내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고 해도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으셨으면 씨뿌릴 땅이 어디에 있으며, 하늘의 태양이 힘을 주지 않으면 씨가 자라지 못하고, 하늘과 땅에서 물이 흐르지 않으면 땅에 들어가 씨가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가을의 풍요로운 추수는 내 덕이 아니라 하느님의 덕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할 수 없고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취하고 즐기는 것이어서 모든 것은 나에게 소유권이 없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서로 나누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기도하듯이 내 창고, 내 주머니, 내 통장, 내 금고에 있는 것을 다 내 것이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대로 내가 가진 것은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수도자는 내 것은 없고 모두 우리 것으로 생각하고 살기에 책 한 권이라도 우리 것이라 표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한 마디로 가진 것에 대한 인색, 깍쟁이, 욕망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이자 없이 꾸어 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손을 벌려 가져가게 하고, 풍성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가 어느 날 국가에서 관리하는 학교에서 특강을 하다가 강의 중 나눔이란 제목으로 진정한 나눔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제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지만 나보다 시계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시계를 내줄 수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 나오세요.” 하니 어떤 학생이 나와서 시계를 달라고 하기에 주었습니다. 그다음 이 말을 들은 선생님들이 다투어 시계를 저에게 선물하여 10개 이상 받게 되어 또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늘 풍요로운 추석날 자기들만 즐기기 말고 가난한 이들 송편 하나라도 필요한 사람과 나누며 즐거운 추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눌수록 더 풍요롭게 됩니다.
아직 끝이 남았을 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뉴스를 통해 올해 농사가 아주 흉작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고통도 고통이지만 고통이라는 한 마디 말로는 부족한 아픔, 다 키운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심정과 같은 아픔이 이들에게 있을 것이고, 그래서 올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인사가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에 명절을 맞는 제 마음도 아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 해 농사를 망쳐 수확이 없는 것도 큰 아픔인데 인생 농사가 망치고 자식 농사를 망친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아픔 정도가 아니라 불행이겠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로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내내 행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렸을 때 고생이 많았고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크면서 행복의 길을 찾아 후반 또는 끝이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렸을 때는 고생이 뭔지 모르고 살다 어른이 되어 고통을 겪게 되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 고통이 곧 불행인, 불행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초반의 행복을 택하시겠습니까, 끝이 행복한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끝이 행복한 것을 택하실 겁니다.
왜냐면 현재란 언제나 과거의 끝이고 그러기에 끝이 행복하다는 말은 현재 행복하다는 말과 같고, 권투로 치면 내내 얻어맞다가 마지막에 K.O승 거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끝이 행복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끝은 영원과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말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재산을 많이 긁어모아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도 많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끝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진정 끝이 행복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한 사람이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는 끝이라야 행복한 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오늘 두 번째 독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고생 끝에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갖게 된 것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이것을 또 다른 식으로 얘기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복음은 재산만 부자인 사람과 하느님 앞에서의 부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달리 얘기하면 재물 부자와 인격적 부자의 차이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평생 재산을 많이 모았는데 끝에 가니 내 옆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처럼 가난한 것이 없고 불행이 없듯 평생 재산을 많이 모았지만 인생의 끝자락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것이고, 안식도 없으며 불행하다는 말씀이지요.
이 가을에 거두어들일 아무 열매가 없는 것은 분명 가난이고 불행입니다.
이 가을 그리고 이 명절에 아무도 없는 것은 더 가난이고 더 불행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해의 가난, 한 해의 불행일 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을에 남은 것이 병든 몸뚱이뿐 애써 모은 것 다 날려버려 아무 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면 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그래서 아직 끝이 남았을 때 이제 시작하라고 오늘 주님께선 재촉하십니다.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성심 김연희마리아 수녀님
탐욕을 경계하라는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찰해야합니다.
모든 불화나 마음의 산란함이 탐욕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더 갖고 싶고, 채우고 싶고,
더 나은걸로 바꾸고 싶고, 더 잘 살고 싶고ᆢ
돈이나 부유함이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있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기에 지니려고 노력해야겠지만, 부유하면 잘 사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하며, 부유하면 생명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은 금물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중에 ~
한쪽 눈이 약간 부자연스럽지만 유난히 빛나는 눈을 가진 자매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눈을 다쳐 실명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가 눈을 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나눠주면서 더 큰 기쁨이 생겼고 마음이 부유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눌게 있습니다.
마음이라는게 그렇습니다.
옹졸해지기 시작하면 밴댕이 소갈닦지같이 되버리고 맙니다.
밴댕이는 하도 스트레스에 민감해서 잡아 올리는 순간 몸을 비틀다가 바로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들어갈 틈이 없이 만들어버립니다.
불교에서 열반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번뇌 3가지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눈에도 불이 나고 귀도 코도 입도 마음도 불이 활활 타오른다고 합니다.
자기 욕심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다가 안되면 분노하고 어리석은 행동에까지 이르는게 인간입니다.
나는 늘 마음의 부자입니다.
넉넉하게 나눌게 있고 자신을 위해서는 필요한게 없습니다.
내 소유가 될때는 오직 잠잘때 누운 자리뿐이고 일어나면 그것 또한 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내 창고를 여는것은 비울 마음이 있는 것이며 그 창고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비움이 채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움켜쥐고 내가 관리자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관리하도록 맡기시겠습니까?
탐욕 -> 분노 -> 어리석음으로 전락하지 말고 나눔 -> 풍요 -> 너그러움으로 살아갑시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향집 앞에서
고향집을 바라봅니다.
아팠고 힘 들었던
저의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프고도
따뜻한 곳이
저마다의 고향입니다.
고향에서
제 마음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마음의
여정입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꺼지지 않는
그리움의 빛이
우리 마음을
다시 밝힙니다.
생명은 고향을 향하고
고향은 눈물을 향합니다.
고향은 낡아져 가더라도
꿋꿋하게 지키는
믿음을 닮았습니다.
믿음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기쁨입니다.
이 한가위가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기쁨의 선물이길
기도드립니다.
기쁨의 선물은
주님을 기억하고
서로의 노고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넉넉한 한가위처럼
나눔으로 채워지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오늘도 하느님께로 가는
가난한 사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소중한 사람이며
소중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제 영혼의
현주소를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처럼
한가위의 이름으로
가족과 이웃을
축복합시다.
♣ 기쁨과 감사와 나눔의 축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에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드리고, 서로 기쁨을 나누며 화목하게 지낼 뿐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인 삶의 종말론적 의미를 상기시켜줍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 유배 이후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풍요로운 축복과 결실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요엘 2,23)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26절) 삶이 고달프고 어려워도 끝까지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어 제2독서 묵시록의 말씀은 수확과 공심판을 분명히 연결 짓습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은 행복하다.”(묵시 14,13)고 합니다. 한가위의 진정한 기쁨 또한 성실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또한 한가위는 매년 주어지는 결실을 넘어 영원한 결실을 상기시켜줍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참된 부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자 큰 곡간을 지어 재물을 쌓아두고 안심하지만, 그날로 그 부자의 생명은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비유는 죽음 앞에서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삶의 근본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겠지요. 주님께서는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의 세상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요 기쁨이신 하느님입니다. 참된 부(富)는 재물이 아니라 재물에 담아내야 하는 하느님의 선과 자비입니다.
한가위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겠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려면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생생하게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영혼을 살찌우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지요.
다음으로 우리는 조상들과 부모님의 은덕을 기억하여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조상들께 감사드리며 하느님과 이웃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겠지요. 이것은 단지 죽은 이들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의 표현 그 이상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성실한 삶의 태도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가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결실을 공유하고 함께 나누도록 힘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눔이 없이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 할 때 생명의 강은 메마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미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 것입니다. 이 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실향민들과 이주민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뜻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조상들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주신 크고 작은 열매들을 이웃과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품어 안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소보다 오히려 더 원활한 귀향길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며 기분이 참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더 기분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통행료 면제’라는 안내문이 뜨더군요. 작지만 국민을 위한 국가의 작은 배려가 느껴져 마음이 훈훈해지는 저녁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큰 것,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작고 소소한 것이군요. 이번 명절,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지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뭐 대단한 것이 아니겠지요.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 작은 친절, 작은 위로와 격려의 말로 푸근한 한가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칭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아가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되어야 할 고위 성직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어났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암울한 시절,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대중들 앞에 등장합니다. 지닌 것이라고는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교회와의 정면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집 근처에서 우연히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보드를 타고서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보드 위에서 껑충 뛰는 모습까지 보면서 저 역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용돈으로는 비싼 보드를 살 수 없어서 아쉬움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드만 있다면 저 역시 멋지게 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이러한 저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손재주가 좋은 제 바로 위의 형님께서 나무에 바퀴를 달아서 스케이트보드 비슷하게 만든 것입니다. 집에 보드가 생겼으니 멋지게 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형님이 직접 만든 보드 위에 올라서는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나는 것입니다.
‘과연 잘 탈 수 있을까?’,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까?’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 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올라타면 넘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차마 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만 있다면’ 등의 환경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간직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에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명예, 지위, 환경 등의 탓을 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환경 탓을 하기 전에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 의지가 먼저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 보다는 불평불만의 마음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 마치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필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스스로의 용기인데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더 큰 곳간을 지을 정도로 재화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편안히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할 것 같았지만, 죽음이 찾아오자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 세상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 아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아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남 탓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있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오늘의 명언: 어떤 운명을 타고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행복해질 수 있는 행동을 하면 된다. 행복은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태도’에 있다(가토 다이조).
조심해야 할 사람(최천호)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의 단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간사한 사람은? 타인을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는 사람이다.
가장 나쁜 친구는? 잘못한 일에도 꾸짖지 않는 사람이고, 가장 해로운 사람은? 무조건 칭찬만 해주는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나약한 사람은? 약자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안한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은? 많이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가장 게으른 사람은?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치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고, 가장 우둔한 사람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이며, 가장 큰 망언자는? 부모님께 불효하는 사람이다.
가장 파렴치한 사기꾼은? 아는 사람을 사기 치는 사람이다.
가장 추잡한 사람은? 양심을 팔아먹은 사람이고, 가장 큰 배신자는? 마음을 훔치는 사람이며,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쁜 일인 줄 알면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조심해야 할 사람이 참 많지요? 그런데 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조심해야 할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님
오늘은 오곡백과가 풍성한 한가위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이런 풍성함은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요.
지난여름 휴가 때 진도에 내려 가보니 온통 대파 밭이었는데, 어찌나 가물던지 파밭이 푸른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도 없이 타들어 가는 파만큼이나 농부들의 마음이 바짝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름의 끝자락에 비가 내려 지금은 보기 좋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네요.
무엇 하나 그분의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진데, 사람들은 그저 제 잘난 듯 생각하며 살기가 일수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고 하십니다.
제 잘난 듯 부를 축적하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가 한 순간에 건강을 잃고,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물거품 같은 것일 텐데도 앞도 옆도 안보고 무작정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더 부(富)도 명예도 학식도 아닌 오로지 하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살다 간 분들이 참으로 부럽게 생각되네요.
울님들도 모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애를 쓰고 계시지요?
모두 그렇게 열심히 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한가위인 오늘!
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풍성한 오곡백과와 더불어 가족 모두와 함께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시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귀가歸家준비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 추석 명절이자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이렇게 추석과 프란치스코 축일이 겹치기는 처음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 때는 마침 제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형제들의 축하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처럼 추석이 늦어 배수확한 것을 적절한 시기에 이렇게 많이 판매하기는 처음이라 공동체가 참 홀가분하게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참 좋은 계절에 참 좋은 날입니다.
오늘 강론은 ‘아름다운 귀가준비’로 했습니다. 쉽게 말해 ‘아름다운 죽음준비’입니다.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복음의 이런 부자처럼 평생 땅에 보물을 쌓다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탐욕이 사람의 눈을 가려 어리석게 만듭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보다 아름다운 귀가준비에 좋은 것도 없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이기에 평소 꾸준한 귀가준비가 제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귀가준비를 하며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가난과 겸손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성 프란치스코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삶입니다. 끊임없이 이웃과 나눔으로 자신을 비워가는 가난과 겸손보다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가난과 겸손을 사랑하게 되고 선택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나누고 비움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가난과 겸손의 삶보다 더 좋은 귀가준비도 없습니다.
둘째,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가난과 겸손의 삶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충만한 행복을 살게 합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요엘 예언자도 이 수확의 계절에 맞이하는 오늘 추석날 우리 모두 하느님 찬미에 초대합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이런 큰 축복을 주신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보다 큰 불행과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축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림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우리 인간의 의무입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감사로 끝맺는 삶이라면 참 아름다운 귀가일 것입니다.
셋째,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삶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과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기쁨과 평화입니다. 요엘 예언자도 우리 모두 하느님의 기쁨에 초대합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주님이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선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저절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야 아버지의 집으로의 아름다운 귀가입니다. 아무리 부유한 삶이라도 기쁨과 평화가 없다면 헛된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탐욕이 기쁨과 평화를 질식사窒息死 시켰습니다.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가난과 겸손,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귀가준비를 잘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늘에서 울려오는 다음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너희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너희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너희들이 한 일이 너희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요한묵14,13참조).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귀가준비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도 없습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시편67,7). 아멘.
만남과 나눔은 살아있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추석을 맞이하여 기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추석은 음력 8월15일로 다른 말로는 한가위 라고도 부릅니다.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유래는 잘 몰라도 분명 큰 날은 큰 날입니다. 민족고유의 명절이 되어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니 말입니다. 이 큰 날에 만남과 나눔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옛날, 추워서 추석, 서러워서 설이랍니다. 가을의 넉넉함, 풍요로움을 누려야 하는데 넉넉지 못하니 안타까움이 남고, 하느님과 조상들께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너무 추웠답니다. 그래도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주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마음만큼은 한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명절에 특히 부부 싸움 등 가정불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명절증후근’ 이라는 병도 생겼습니다. 외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속을 보면 어쩔 수 없는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상의 묘를 찾아 예를 갖추는 성묘는 더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가족이 정성껏 가꾸기 보다는 벌초를 해주는 대행업체도 생겨났습니다. 제사음식도 가족이 함께 모여 만들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사면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를 갖추는 것까지 대행을 하게 생겼으니 조상과의 만남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내던 이별은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나 봅니다.
시부모와 장인장모를 차별한다고 불편해 하고, 며느리는 부엌에서 일꾼처럼 부려먹으면서 당신 딸은 친정에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은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위가 청소나 설거지를 돕고 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당신 아들이 하면 사내자식이 부엌을 드나든다고 싫어합니다. 어머니 눈치 봐야죠. 아내 눈치 봐야죠. 정말 남자들도 스트레스 받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명절은 ‘큰 날’이 아니라 ‘큰일 날 날’로 변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큽니다.
한가위 명절은 우리에게 큰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조상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며 형제자매를, 이웃을 만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를 하고 마음을 나누며 우리의 미래를 키워갑니다. 중국사람은 만월을 상징하는 월병을 만들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반달모양의 송편을 만들어 계속 자라나기를 희망했습니다. 풍요로움이 커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송편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사랑과 정을 확인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나눔으로써 두 배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12,15) 고 하십니다. 명절에 탐욕으로 인해 얼굴 붉히는 일 없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혼자 궁리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창고를 늘리는 일이었습니다. 혼자 궁리했기 때문에 결국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혼자 궁리했기에 육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궁리했더라면 영적인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8,5-6).
그러므로 욕심 부리지 말고 만남의 기쁨과 나눔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성 빈첸시오).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만남과 나눔은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조상과 부모형제, 이웃이 서로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며 이런 은혜를 넉넉히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만남 안에 주님의 자리를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쁘고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마음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대국민 추석인사로 페이스 북에 올린 이해인 수녀님의 “달빛 기도”라는 시를 읊어드립니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 나오는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속셈은 탐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예수님께서는 단지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의 “탐욕”(πλεονεξια:더 많은 소유,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허기) 안에는 물질에 대한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질을 통해 얻고자 하는 더 많은 탐욕들이 숨어(인색, 집착, 의존, 허영, 과시, 쾌락, 물신숭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탐욕은 물질이나 재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탐욕도 있고, 명예나 권력에 대한 탐욕도 있고, 학문이나 재능,혹은 정신적, 영적 가치에 대한 탐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탐욕은 진정한 가치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충족시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곧 사라지고 없어질 세속의 가치일 뿐, 영원한 참된 가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탐욕은 우상숭배”(콜로 3,5)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를 깨우쳐주십니다.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자신이 물질의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탐욕의 온상지인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탐욕은 진정한 가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한 데서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 탐욕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탐욕은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이지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따라서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단지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탐욕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곧 비유 안에서,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 쓸모없고 사라지고 말 것인지, 그‘헛됨’을 구체적으로 일깨워줍니다. 그러니 재물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 참조)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나눔과 사랑으로 “하늘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이요, 바로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일 것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자신에게는 가난하고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관리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 누구의 소유인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올 유산의 몫을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건네져야 할 유산인가를 보아야 할입니다. 그래서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저를 당신의 유산으로 내어주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비우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탐욕이 아닌 사랑이, 제 자신이 아닌 주님이,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오늘 한가위를 맞이하여,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이 여러분 안에 꽉 차오르길 바랍니다.
생명을 향한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감사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명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추억이 풍성한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고향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다시 알게됩니다.
생명을 다시
키워주고 지켜주는
우리의
고향입니다.
나누어야 할
사람의 생명입니다.
마음을 나누고
눈물을 나눕니다.
생명의 기억은
믿음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삶의 중심을
지켜주는 것은
언제나
믿음이었습니다.
한가위 명절은
생명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람과 한가위 사이에
고향이 있습니다.
다시 희망을
나누는 한가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생명을 위해
온가슴으로 기도하는
날이 한가위명절입니다.
기쁜 한가위
되십시오.
사람마다 자신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재주, 소유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성격이라든지 생활습관이 부러울 경우가 있지요. 저 역시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늘 책상 위나 책상 서랍 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스케줄 조정을 잘해서 일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 제일 부럽습니다. 저도 한 때 그렇게 해보려고 했었습니다. 바로 작년 안식년 때였지요. 습관을 들이면 분명히 저 역시 깔끔하게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억지로라도 매일 정리와 청소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제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신부님이 원래 이렇게 깔끔하셨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지요. 이런 저였는데, 왜 아직도 정리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쁜 일상이 계속되다보니 정리정돈은 늘 뒷전으로 밀려났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정신없이 난리법석을칩니다. 분명히 1년 동안 연습을 잘 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저의 습관이 되어서 잘 될 것 같았는데 왜 안 될까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작년의 안식년 때에는 일 순위가 정리정돈이었으니 깨끗하게 정리하고 청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성지의 일과 강의가 우선순위에 있으니 다른 것들을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디에 우선순위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생활 자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반드시 해야 할 우선순위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것들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현재 ‘새벽 묵상 글’을 16년째 거의 빠짐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새벽에 힘들게 일어나 기도와 묵상을 하고서 글을 쓰는 것을 뒤로 미루다가 결국은 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라고 하십니다. 물론 세상의 것들이 더 중요해보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 세상을 보다 더 쉽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매어 있다가 정작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을 행하지 못해서 후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까요?
오늘은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이지요. 한가위를 맞이하여 특별히 우리들은 돌아가신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조상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묵상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사람은 삶의 준말이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온다(신영복).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자.
결혼 생활을 잘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명히 결혼 전에는 서로가 너무 좋아서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는 서로가 자신의 원수라면서 으르렁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요. 제 남편이 결혼 전에는 별로였거든요. 별 볼 일 없어 보이기도 했고, 이 남자에게 과연 나의 미래를 걸어야 할지 참으로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지금의 제 남편이 과거의 제 남편 모습보다 훨씬 더 좋아요. 만약 10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지금의 제 남편을 선택할거에요.”
대부분이 과거에는 정말로 잘 해주던 배우자가 결혼 후에는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하시지요. 그런데 이 자매님은 거꾸로 입니다. 하긴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이 부부는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고 죽을 둥 살 둥 허우적거리는데도,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거나 오히려 뒤로만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 정말로 힘들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과거만을 바라보면서 ‘그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사랑의 주님을 초대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에게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이로써 좀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많은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정겨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는 지하철로 가면 되지만, 자가용을 이용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교통체증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조금 힘들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면서 운전을 했지만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지나칠 경우가 있습니다. 의정부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5번이나 길을 놓쳤습니다. 동부간선도로에서 길을 놓쳐서 외곽순환도로를 탔습니다. 송추 쪽으로 가야 하는데 또 잘못해서 별내 방향으로 갔습니다. 북부간선도로를 타야 하는데 이번에도 깜빡해서 구리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돌아서 동부간선도로를 만났습니다. 석관동에서 내부순환도로를 타야 하는데 이것마저 지나쳐서 청량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안으로는 명동 갈 거야’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명동으로 왔으니 참 다행입니다.
어찌 운전만 잘못된 길을 가겠습니까? 바른 인생길을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겨우 다섯 번 길을 놓쳤지만 수도 없이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길인지 알면서도 방향을 돌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금 잘못된 길로 가고 말 거라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근심’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이 사라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로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굳이 단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박해의 상황에서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멀어진 첫 번째 잘못도 교만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커다란 낭패를 보곤 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갑질’이라고 부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당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려고 하십시오.’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 번째는 ‘욕심’입니다. 산에 둥지를 트는 새는 가지 하나면 만족합니다. 사람만이 산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샘에서 물을 먹는 다람쥐는 목을 축이면 미련 없이 길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사람만이 샘을 자기의 것인 양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헐벗음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구별에 넘치도록 풍요로움을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욕심 때문에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이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넓은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황금의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살아갑니다. 분명 황금의 제국은 매력이 있습니다. 돈이 주는 힘과 매력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 멋진 차, 화려한 식탁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집으로만은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멋진 차만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식탁으로만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 나누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둥근 보름달이 태양보다 더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 달은 태양보다 작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화려해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진주를 발견한 농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진주를 산다고 하였습니다. 진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금으로는 얻을 수 없고, 명예로는 가질 수 없으며, 권력으로는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근심, 교만, 욕심’이라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덤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종로의 막걸리 집에 사람들이 글을 벽에다 적어 놓았습니다. 보통은 ‘지연 영철 사랑해, 개똥이 왔다 가다, 왔노라, 마셨노라, 취했노라.’와 같은 글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새로운 십계명’이라는 글을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하긴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알려주신 지2000년이 지났으니 새로운 계명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습니다. 한번 읽어 드릴까요?
1. 일일이 간섭하지 말 것
2. 이말 저말 옮기지 말 것
3. 삼삼오오 모이는 곳에 열심히 참석할 것(구역, 반 모임입니다.)
4. 사력을 다해 싸우지 말 것
5. 오기로 일 그르치지 말 것
6. 육체적 스킨십을 많이 할 것
7. 칠십 퍼센트로 만족할 것
8. 팔팔하게 활동할 것
9. 구구 절절 변명하지 말 것
10. 십 퍼센트는 남을 위해 살 것
저는 그중에서 10번째가 가장 맘에 들었습니다. ‘십 퍼센트는 남을 위해서 살 것!’
여러분은 어떤 계명이 맘에 드셨는지요?
보람 가득한, 후회없는 삶 -찬미, 인내, 자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을 흥겹게, 힘차게 부르며 한가위 하루를 열었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 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름대로 마련한 오곡 백과를 제대상 앞에 차려 놓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성제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인생사계人生四季, 우리 인생의 계절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가을 나이에 접어들었다면 주님께 봉헌할 우리 삶의 열매들은,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 등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은 잘 익어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인생 가을이기도 합니다.
아침기도시 세 후렴 역시 흥겨웠습니다.
“주님의 집 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우리 주 천주께 노래 부르세.”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참 역사가 깊은 한가위 축제입니다. 가을 계절의 한가운데에 속하므로 중추中秋요 명절이기에 중추절仲秋節이라 하여 동양문화권에 속한 중국, 일본, 월남, 태국에서도 이날을 큰 명절로 즐깁니다. 한가위라는 말은 신라시대에 비롯된 우리 고유의 토착어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고려가요와 동국세세시기, 열양세시기 등 한가위에 대한 소상한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한가윗날은 목욕재계, 화려한 옷을 입고 ‘추석부슴’이라 하여 송편, 밤단추, 대추단자. 토란국 같은 것을 먹는다.
이와 같은 둥근 모양의 음식을 먹는 것은 달의 둥근 형상을 상징한 것이다. 추석 5일 전에 조상묘의 벌초를 하고, 추석날 자손들을 이끌어 햇곡으로 만든 음식과 햇과일, 햇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련하여 성묘 차례를 지내는 것은 후손된 도리요 민족의 미풍이다. 낮과 같이 밝은 달아래에서 줄다리기, 돌싸움,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등 여러 가지 오락과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지낸 것은 우리 조상들의 멋과 운치와 여유있는 생활철학과 마음의 자세를 엿볼수 있어 이 겨레됨을 자랑으로 여긴다.”
‘찬미의 노래’ 기도서의 소개된 추석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민족 고유의 최대 축제날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 인생 축제의 날을 살 수는 없을까요? 후회없는, 보람가득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어제 읽은 재미있는 글에서 착안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후회하는 세 가지 '걸'이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참을 걸', 그리고 '좀 더 베풀 걸' 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 세가지를 꼭 기억하고 살면 후회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이 세가지 ’걸’과 말씀을 연관시킨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주님 베풀어 주신 삶에 감사할 때 저절로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기쁨은 없습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바로 찬미의 삶이 저절로 즐겁게 사는 길을 열어줍니다. 바로 오늘 한가위는 가장 하느님을 찬미하여 즐겁게 사는 하루입니다. 우리 조상은 추석을 전후해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음악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져 하나되는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의 경지를 즐겼다 합니다. 참 멋진 조상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가 가을 한가위 축제와 잘 어울립니다. 회개한 이들 위에 한량없이 쏟아지는 축제의 기쁨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얼마나 흥겹고 신바람나는 축제의 현장인지요.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한껏 배불리 먹고,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평생을 하루하루 기쁘고 즐거운 축제의 날을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즐겁게 살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둘째, 인내의 삶입니다.
인내의 덕이 인생가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내는 바로 믿음입니다. 겨울, 봄, 여름의 온갖 풍상고초를 견뎌냈기에 가을의 풍성한 수확입니다. 도대체 인내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견뎌낼 때 구원입니다. 우리 분도수도자들의 정주서원도 결국은 믿음의 서원이자 인내의 서원입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시종여일始終如一의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참을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 묵시록 제2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하늘과 성령의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바로 ‘주님을 믿다가 죽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항구히 인내하며 믿은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절대로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인내와 믿음으로 종말론적 심판의 날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심판의 날을 기뻐할 것이니 바로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없는 인내로 견뎌내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찬미의 기쁜 삶이 인내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참을 걸’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선의 베푸는 삶입니다.
베푸는 자선의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돈이 없어서 베풀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이 없어도 착한 마음,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친절과 선행, 미소로 얼마든지 어떻게든 베풀수 있습니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줘도 건강을 살 수 없고,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인색보다, 탐욕보다 추한 것은 없습니다. 베푸는 무욕의 삶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이기욕의 감옥에 갇혀 베풀줄 모르는 사람보다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자이면서도 인색으로 베풀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은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마련하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부자를 탓하거나 흉보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베풀줄 아는 이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진정 부자들입니다. 가난한 듯 하나 진짜 부자들입니다. 이래야 죽을 때, ‘좀 더 베풀걸’ 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 세가지 후회를 한다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살 걸’
‘좀 더 참을 살 것’
‘좀 더 베푸며 살 것’ 이렇게 3걸의 후회의 삶이 되지 않도록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보람찬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찬미의 삶입니다.
2.인내의 믿음입니다.
3.자선의 베푸는 삶입니다.
이렇게 산 이들의 마지막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유언의 고백은 셋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1.미안합니다.
2.감사합니다.
3.사랑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찬미와 인내, 자선의 보람 가득한,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지금 여기서 나누는 감사와 나눔의 축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자, 땀 흘려 가꾼 땅에서 얻은 첫 소출을 하느님께 바치며 충성과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들은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국땅에서 종살이로 고생했던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자신들도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도 한가위 명절에 생명의 다리가 되어준 조상들을 기억하며 회상하고, 한 해 동안 땀 흘려 가꾸어 거두어들인 소출에 감사드리며, 창조주께서 주신 것을 서로 나눕니다. 이렇듯 회상과 감사의 마음으로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확인하는 이 축제는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성경 말씀들은 이런 축제를 일상 안에서 살아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요엘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이들이 받게 될 하느님의 축복과 기쁨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3-26)
이 말씀은 한가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 있음이 기쁨이요, 그분 안에 살아감이 축복임을 알아차리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으뜸가는 축제는 하느님과 함께 있음의 축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존재이유도 기쁨의 원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가위는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 함께하는 축제여야겠지요.
한가위는 감사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있음 자체로’, 그리고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인 까닭입니다. 감사는 기억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드리고 조상들과 부모님, 그리고 내 인생에 함께해온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며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제2독서 묵시록에서 요한은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외칩니다. 이 한가위에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인 결실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결실에 대해서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삶의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는 날 나는 어떤 열매를 남길게 될까요? 내 인생의 가을에 빈 쭉정이만 남지 않도록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기를 다짐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사실 죽음 앞에서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근본의미, 존재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부란 영원한 삶, 영원한 가치, 하느님 안에서의 구원임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좀더 남을 배려하고 잠시 멈추어 애정어린 눈길로 주변을 살피며 기꺼이 나눌 줄 알아야겠지요.
심장의 묵은 찌꺼기를 날려버릴 것 같은 상큼한 가을바람과 코끝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회개하여 하느님과 함께하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복음의 길을 똑바로 걷는 축제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회상하고 조상들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한가위가 되길 소망합니다.
계절의 정의대로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올해 따라 오늘의 제 1독서 요엘서를 읽다가 다른 해에는 지나쳐간 <정의에 따라>라는 말씀이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비를 주시는 것이 정의에 따라 주시는 거라니 이것이 무슨 뜻일까?
올해는 왜 이 말씀이 유독 내 눈 안에 들어온 것일까?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것은 불의한 사람에게는 안 주신다는 뜻일까요?
불의한 사람에게는 비를 안 주신다면 그것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비를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는 인간의 정의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뜻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기분 내키는 대로 비를 주시기도 하고 안 주시기도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계절의 정의대로 비를 주십니다.
그런데 계절의 정의란 말이 생소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진정 하느님은 계절의 정의대로 은혜를 베푸시어 마침내 가을이 되면 모든 풀과 나무들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대로 하면,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계절의 정의대로 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어주고 올해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이 가을 벼농사를 다 뒤집어엎는답니다.
쌀값이 반으로 뚝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의 북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나라는 재고 쌀이 많아 농민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남는 쌀을 북한이나 가난한 나라에 보내준다면 우리 농민들도 살고 굶주리는 지구촌 사람들도 살게 될 텐데 자기 곳간만 가득 채우려고 하다가 오히려 서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는 결실을 많이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실을 잘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나눔이 더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결실을 거두는 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셔야만 되는 일이지만 결실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계절의 정의대로 풍성하게 거두게 해주시지만 결실을 나누는 것은 우리의 사랑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없이 욕심만 많다면 서로 자기 곳간만 채우려다 모두 빈곤해지지요.
사랑은 모두 풍성하게 하지만 욕심은 모두 가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산해진미와 똑같이 긴 젓가락을 가지고 있지만 지옥에서는 모두 자기 입에만 넣으려다 아무도 먹지 못하지만 천국에서는 서로 상대의 입에 넣어주시기에 모두 배부르다는 얘기대로지요.
많이 거두는 것보다 잘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모두가 깨닫게 되는 올해 한가위 명절이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날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 한가위만 같게 되기를!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민수 21, 4-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나이가 들수록 하느님 나라 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 집니다.
별로 해 놓은 것도 없고 잘 한 일도 많지 않고 이제 남은 날은 그리 많지도 않은데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마음도 편치 않고 작은 일에도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도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쓰잘데 없는 말도 많아집니다.
이 마음의 조급함 때문에 하느님께도 모세에게도 불평불만을 쏟아내뱉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해 보입니다.
이런 불평불만에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시어 징벌을 내리십니다.
사실 불평불만은 스스로를 단죄하고 스스로를 불행으로 내몹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구리뱀을 쳐다보게 하여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놀랍습니다.
여러분도 불평불만이 많으십니까?
그 때문에 괴롭고 불안하고 어둡지요?
어떻게 해야 치유될까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 불평불만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억울하게도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했지 어떻게 우리가 불평불만 한단 말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불평불만의 죄를 씻읍시다.
내 맘 안에 불평불만이 사라질 때 비로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 됩니다.
십자가를 여기저기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불평불만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한낱 장식품일 뿐입니다.
<비움의 기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풍요로운 수확의 때
오늘 한가위에는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값진 결실을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곱게 보듬어 품에 안게 하소서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놓기 위해서
커다란 결실뿐만 아니라
미미한 그것까지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기게 하소서
기쁨의 결실은
환한 웃음과 더불어
벗들에게 기쁨으로 되돌리고
슬픔의 결실은
같은 슬픔을 겪는 벗들에게
연민과 위로로 내놓게 하소서
나보다 배고픈 벗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나보다 낮은 벗들에게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외로운 벗들에게
따스한 품이 되어주고
웅크린 벗들에게
힘센 두 팔이 되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함께 일구어낸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벗과 나의 것임을 깨달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놓게 하소서
주님과 벗들과 내가
또 다시 정성껏 일구어낼
모든 것으로 곱게 채울 수 있게
나를 비우고 비우며
마침내 나마저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루카12/15-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아무리 의술이 능한 사람이 있어도, 아무리 건강식품을 먹고 마서도, 장수 하려고 운동요법을 공들여도,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미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가 생명을 연장 시켜도 생명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세상은 오래 사는 법은 가르쳐 줄 수 있어도 죽지 않은 법은 알려주지 못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알려 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나를 믿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이 살 것이다. 하시고 우리를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죽은 사람에게 먼지 하나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죽은 자가 이룩한 선행 봉사와 나눔과 친교는 살아남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얼마 전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죽은 마더 데레사 성녀을 위한 시성식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수도원 묘지에서 추모식을 주례하고 돌아오면서 선배수사 신부님들이 후배 수사님과 살아있는 우리에게 살아계심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감사와 찬미의 추모사를 드리면서 수도원을 위하여 기도도 부탁드렸습니다.
죽음을 아무것도 보장 하지 못하지만 죽은 사람의 사랑과 진실한 삶은 살아있는 사람 안에 기리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선을 행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고 서로 친교를 통해 사랑만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한 주님의 계명을 지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한 추석 맞이하세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우리의 한가위입니다.
명절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옛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의 수확은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곡식을 수확하시듯
우리의 행복을
무르익게 하시는 분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탐욕을 내려놓게
하시는 순리를
일깨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탐욕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모든 생명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은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겸손한
생명입니다.
더 많은 재산과
재물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에
기뻐하는 한가위
명절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욕심과 기대감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부유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시간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리또한
무의미하고
우리의 수확또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생명과 기쁨의
한가위 축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분들 모두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용기를
되찾는 한가위
되십시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는데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실패했다고 단정 지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실패한 것일까요?
저는 교구청에만 두 번 들어갔습니다. 한 번은 전산홍보실장으로, 또 한 번은 성소국장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지요. 두 번째로 교구청에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조금 원망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본당 주임신부로 정말로 재미있게 지내고 생활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사무 업무를 보는 교구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지내는 본당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두 번의 교구청 생활을 마치고 안식년을 보내면서 생각해보면 교구에 두 번이나 들어가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업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특히 성소국에서 신학생들을 만나면서 후배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함께 많은 신부들이 모여 살다보니 모르던 신부를 알 수 있었고, 교구청 신부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길 역시 좋은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항상 내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길만이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최악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 정말이지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다른 말로는 추석이라고 하지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니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달을 구경하는 날일까요? 그보다는 햇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은혜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있게끔 해준 조상님과 자기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시는 주님께 원망을 드리는 사람도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길만 좋은 길이라는 착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하고 원하는 길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가위 명절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복음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길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그 길을 기쁘게 또 감사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속담처럼 가장 좋은 오늘 내 마음을 바로잡아 주님과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수 있을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해 서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곤 합니다(오프라 윈프리).
오늘을 살다(‘좋은생각’ 중에서)
에드워드 에반스는 신문팔이로 시작해 잡화상의 점원 자리를 전전했다. 이후 한 도서관의 관리 보조가 된 그는 적은 월급에도 일곱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계속했다. 이후 그는 용기 내 사업을 시작했지만 보증 서 준 친구의 파산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게다가 거래하던 은행이 파산하면서 많은 빚을 떠안게 되었다.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길가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의사는 앞으로 2주 정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유서를 쓰고, 침대에 누워 담담히 죽음을 기다렸다.
곧 죽을 거라는 말에 모든 걸 포기하고 복잡한 생각을 접자 그는 매우 홀가분해졌다. 이상하게도 2주가 지나고 몇 주가 흘러도 그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몸 상태가 점차 나아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걷던 그는 두 달 후, 일해도 될 만큼 완쾌됐다.
에반스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건 어제에 대한 고민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마음의 평온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오직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그는 좌우명을 정했다. “과거의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다. 내일 일어날 일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재기에 성공한 그는 에반스 프로덕션의 대표가 되었다. 그린란드에 가면 그의 이름을 딴 ‘에반스 공항’이 있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뜻깊은 시간인지 모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소국 직원들과 함께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대형 버스에 20명이 함께 타고 다녔습니다. 버스에는 좌석의 여유가 있기에 사람들은 같이 앉기 보다는 혼자서 편하게 앉았습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여행을 왔지만 버스의 좌석은 둘이 앉기 보다는 혼자 앉는 것이 편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옆에 누군가 함께 있는 것이 조금은 불편할 것도 같았습니다. 혼자 있어도 손에는 ‘스마트 폰’이 있기에 또 다른 세상과 소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류 시화 시인의 표현처럼 ‘난 네가 내 옆에 있어도 네가 그립다.’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추석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것은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도시의 화려함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은 농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석에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초고층 빌딩에는 예외 없이 건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조물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연수 중에 그런 구조물을 직접 보았습니다. 건물의 최상부에 660톤이 넘는 둥근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초고층 빌딩은 바람이 불면, 특히 태풍이 불면 건물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그럴 때 중심을 잡아주는 구조물은 건물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구조물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바람을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은 스스로는 바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밑에서 연줄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연이 줄을 거부하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중심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수 중에 ‘조정래의 시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의 근 현대사를 느낄 수 있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라는 대하소설을 집필하신 분입니다. 중국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정글만리’를 집필하신 분입니다. 스스로 황홀한 글 감옥에 20년간 갇혀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죽을 각오로 글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작가란 ‘시대의 나침판이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치열한 글쓰기를 느낄 수 있었고, 시대의 나침판이 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문학, 사상, 철학, 종교는 현대 문명의 뿌리입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튼튼한 구조물인 ‘가정’이 흔들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다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가족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지만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참례하지만 기도의 기쁨은 가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나의 말과 행동이 내 이웃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침판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귀가歸家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추석을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혼자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고통 중인데 나혼자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려해도 너무 부정적 어둔 현실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들이, 착하고 약한 사람들이 살기 힘든 나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세대불문 명절 증후군’ 고통 “대화가 배려가 중요”-
-“한국 떠나고 싶다” 젊은층 ‘헬조선’ 증후군-
-“추석 잊은 지 오래예요” 취업 준비생들의 명절나기-
-자살률 1위에 건강마저 하위권, 삶에 지친 대한민국-
-수출, 짙어가는 먹구름-
인터넷 뉴스에서 뽑아본 제목입니다. 또 이어지는 주간지 기사 내용의 요약입니다.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올까? 고군분투,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40대 여성들의 모습, 비정규직, 양극화, 가부장제 등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을 감당하는 40대 여성들의 삶은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아버지는 ‘하늘감옥’에 계셔서 이번 한가위에는 못 오십니다. 가족 모이는 명절에도 못 내려오는 5인, 고공농성 100일을 넘는 세 곳-
어느 석학의 충고도 눈에 띕니다.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낮아도 조화로운 사회를 이뤘듯이, 한국도 4%에 연연하지 말고 2.5%대 성장을 하더라도 안정과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빈부격차가 작아지고 함께 나눠 조화를 이룰수만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정치와 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중요하게 부각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정치이론가 존 던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인터뷰 마지막 두 조언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무엇이 옳은가?’다. 그러나 여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 ‘옳은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해야 한다.-
저절로 오늘 강론 제목은 결정났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참 위태한, 아슬아슬한 현실을 살아갑니다. 우선 각자의 제자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과 연대의 끈을 잡는 것입니다. 삶은 과정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 결론을 내지 않고 활짝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둬야 현실의 희망이 보이고 살아갈 힘도 생깁니다. 희망이 없으면 더욱 절망적이 됩니다. 탐욕을 경계하라 하지만 하느님께 희망을 둬야 비로소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를 보십시오. 재물은 많은데 하늘 희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하늘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 곳간이 아닌 땅 곳간에 재물을 쌓아 둡니다. 함께 사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 하늘 곳간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인데 이를 까맣게 몰랐습니다. 아, 오늘 복음의 부자는 하늘 희망을 잃어 탐욕에 사로잡힌, 내적시야가 완전 차단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 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아, 크나큰 착각입니다. 재물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게 적나라한 이기적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늘 희망을 잃었을 때의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없고 오로지 나 혼자만 있습니다. 희망을 잃으니 자유도 잃어 탐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람인 듯 하지만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도 단절된 풍요속의 지옥입니다.
둘째,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옛 사막 수도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역시 ‘죽음을 날마다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셨습니다. 죽음 묵상이 탐욕의 구름을, 환상의 어둠을 거둬냅니다. 삶의 본질을 직시하게 합니다. 지혜의 눈이 열립니다. ‘이렇게 살아서 되나?’라는 생각에 저절로 회개가 일어납니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歸家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귀가의 여정입니다. 중년을 넘으면 서서히 귀가 준비를, 죽음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여, 또 일년사계에 넣어보면서 어느 귀가 지점에 와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하느님의 조롱입니다. 악몽같지만 어리석은 부자는 물론 우리를 살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길몽입니다. 아마 어리석은 부자는 꿈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며 식은 땀을 흘렸을 것이며 잠을 깬 후 즉시 회개를 실천했으리라는 제 나름대로의 묵상입니다.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인 죽음은 구원 또는 심판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산 자들에게는 구원이겠지만, 세상에 희망을 두고 탐욕에 묻혀 산 자들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부터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이들을 향한 축복의 말씀에 이어 죽음이 심판임을 알리는 천사의 음성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의 때가 되었습니다."
앞서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이런 모든 말씀들이 더욱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삶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의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회개의 완성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길은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와 감사에서 샘솟는 희망, 기쁨, 평화입니다. 특히 오늘 한가위 추석이 그러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조상들과 이웃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입니다. 요엘 예언자의 권고가 한가위 추석에 참 적절합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오늘 하루 이렇게 현재주의자가 되어 ‘신의 한 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니 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의 현재주의자로 살 때 하느님은 희망의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부정적 비관적으로 보면 매사 부정적 비관적 절망의 현실입니다. 반면 긍정적 낙관적으로 보면 매사 긍정적 낙관적 희망의 현실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 인생관을 바꿔 줍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봄의 꽃들은 풍성한 열매들로 드러납니다. 바로 제대 앞에 놓인 가을 열매들이 우리 삶의 열매들을 상징합니다. 꽃은 아름다웠는데 열매들 빈약한 인생 가을이라면 참 쓸쓸할 것입니다. 삶은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시며 신망애信望愛 삶의 열매들을 잘 익어가게 하십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달리,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시편67,2). 아멘.
어쩔 수 없이 슬픈 운명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스승,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슬픈 운명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메시아로 이 땅에 강림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참혹한 십자가형 죽음에 처해질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예수님이셨습니다.
씁쓸하게도 한때 사랑했던 제자의 배반에 의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그것도 무지막지한 악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픈 운명이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좌정하셔야 할 분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닥을 친 다음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가십니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을 통해 원래 계셨던 가장 높은 곳으로 다시 올라가십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인류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영원히 사시면서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실 운명을 지니신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운명은 파노라믹 운명의 끝판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해피엔딩 끝판왕의 운명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요 이정표로 삼고 이 땅위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슬픈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셨기에 이 땅위에서 우리의 운명 역시 슬픈 운명입니다. 그분께서 쓸쓸히 홀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의 운명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은 그분의 그 큰 슬픔, 그 끔찍했던 고통이 오래가지 않아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듯이 오늘은 비록 우리가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지만 이 슬픔과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내하고 희망하다보면 언젠가 마치도 기적처럼 이 슬픔과 고통이 영광의 축제로 바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힘겨워하고 있을지라도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엄청난 박해와 손해를 보고 있다 할지라도 마냥 슬퍼해서만은 안되겠습니다. 때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할지라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머지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인생에도 밀물이 밀려들어올 것입니다. 내 인생에도 반가운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삶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이 지상에서의 축복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치 전쟁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만 그 소나기 같은 총알 사이를 뚫고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불완전함으로 가득 찬 이 육체와 영혼을 지니고 살아가는 한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슬픔을 친구처럼 옆에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나약합니다. 고통과 십자가는 인생의 기본이요 양념입니다. 고통 없는 인생,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기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회상과 감사와 나눔의 축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에는 가족들이 모여 한 해 동안 땀 흘려 수확한 햇곡식과 햇과일로 차례를 드리고 성묘를 하며 조상들을 기억합니다. 한가위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회상과 감사와 기쁨의 감사의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심이로다.”(66,6)라고 노래합니다. 한가위에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자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시고 40년 동안 광야여정에 함께 해주시며,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요엘 예언자는 진정한 회개와 그에 따른 하느님의 축복을 말하면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전합니다. 요엘은 진정한 회개를 하면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단죄의 심판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옷만이 아니라 심장을 찢는 참된 회개를 한 사람만이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요엘 2,23).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요, 주님의 축복을 받는 회개한 이들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따라서 한가위는 회개한 이들 안에서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이 명절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전해준 조상들과 부모님들께 감사드리고 작은 것 하나 하나에도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나아가 마음을 열어 우리집 담장 너머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하고, 가진 바를 기꺼이 나눔으로써 모두가 삶의 의미를 찾는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문화 차이와 편견의 그늘에서 차별을 겪는 이주민들, 부당해고된 노동자들, 각종 국채사업들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이들,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인권을 침해당하고 고통받는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의 위협을 겪는 수많은 실업자들, 고통의 극한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신음소리가 이 한가위에도 그치지 않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참된 부(富)는 눈에 보이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선을 이들과 나누는 것이라 믿습니다.
제2독서 요한묵시록 14장은 종말의 구원과 멸망을 전해줍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순교한 이들은 행복합니다(14,13). 왜냐하면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친 행적 때문에 안식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2,13ㄴ). 주님께서는 순교한 이들을 허무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삶과 인격, 곧 전존재를 거두어가십니다. 자신을 되돌려 주님을 섬기고 이웃과 함께하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한가위 축제를 참 축제가 되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가위 명절을 맞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생명을 전해준 조상들께 감사드리며, 회개와 나눔을 통하여 하느님의 기쁨을 모두가 누렸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이 축제가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 친히 기뻐하시는 참 행복의 축제, 구원의 축제가 되길 희망합니다.
올라갈수록 내려가라
-주원준-
하필 한가위에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주셨으니,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풍성한 수확에 인심도 넉넉한 이때, ‘한가위만 같아라’는 시절에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민족사를 길게 보자면, 사실 지금은 풍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릿고개는 없어졌습니다.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고, 교회도 크게 성장하여 550만 신자 시대가 아닙니까.
이런 시대의 한가위를 맞아,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서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광야 시절의 가난한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난했지만 서로에게 정다웠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북한의 가난한 형제들과 힘들고 지친 이웃 나라들을 돌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가난한 교회가 되라,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되라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재화는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야 합니다.
곳간에 재물을 쌓아 두면 무엇합니까.
당장 주님이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당장에 말입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요엘 2,2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한가위입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모두들 오늘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고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를 드러내 보이시길 축원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하듯이 정말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되도록 서로 덕담을 해주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그런 날이 되어 아무도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비는 모든 사람의 염원과 꿈이 다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다이어트 걱정없이 마음껏 배불리 먹고 많이 웃고 즐기십시오.
그리고 그런 가족 친지들의 밝고 환한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찬양드리십시오.
추석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그냥 감사하는 날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을 중추절 한가위 추석 팔월 대보름날 십오야 등으로 불리 우는 날 동남아 아시아 지방에서 명절로 지냅니다. 이날은 생명에 필요한 곡식과 과일의 수확으로 우선 자연의 뜻에 감사하고 조상들이 애써 가꾼 땅에서 거두어들인 것들을 보며 조상에게 감사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절과도 같습니다.
이날 감사하는 사람들과 감사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해아려 보아야 합니다.
풍요로운 계절 과일 상자 받는 사람과 못 받는 사람이 있고 햇밥을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며 찾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으며, 하여간 오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감사 할 수 없는 날처럼 느껴지지만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는 부활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지금 처한 모든 어려움은 희망을 가지고 내일 더 낳은 삶을 생각하고 그냥 감사합시다.
그래서 오늘 그냥 감사해야 할 날로 생각을 바꾸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돌아가며 이 식당은 다 좋은데 빵을 두 쪽만 주는 것이 불만이라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번에 올 때 웨이터가 빵 내 쪽을 주었는데
그래도 감사하지 않아 다음 날 8쪽을 주었는데도 감사하지 않아 3M 길이 빵을 두 쪽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다시 빵을 두 쪽만 주는 구려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고 풍요로워야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 내가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온 것을 ... 주신 분도 거두어 가신 분도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의 이름이 찬미 찬송 받으소서. ” 오늘 우리는 감사하는 날입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어떤 처지에 있어도 그냥 감사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가 상담을 하면서 저는 돈도 있고 자식도 있고 잘 살고 있는데 마음한 구석에 상처받고 편안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 상처 받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용서의 기도도 하기 싫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알고 있지만 안 되는 것 안타까와 하는 사람에게 저는 긴 이야기 끝에 저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아니십니까? 감사와 찬미 들여야 할 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을 어떻게 즐기고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죽음에 직면해서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면 우리를 살게 하시고 주신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인 것같이 부모님을 원망하면 자기 생명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십시오. 부모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그냥 좋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미사에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서로 모여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 우리주위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형제가 있다는 것, 미우나 고우나 도움이 되나 안 되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수도원 묘지에 잠들어 있는 선배들에게 우리를 여기까지 성장 하도록 지켜주심을 감사하고 이 미사 중에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에게 감사하며 감사의 날, 하루가 모든 이에게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며 살아있음이
정녕 무언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다시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심입니다.
욕심을 고스란히
옮겨놓는 시간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기쁨을
서로의 삶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너와 나의
지나친 욕심이
풍성해야 할
생명의 기쁨을
슬프게 합니다.
다 같이 행복해지는 길은
오늘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할 가족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고픈
우리들을 위해
한가위 명절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가족의 사랑입니다.
가족과 더불어
우리의 고향에서
행복해지는
축복의 한가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나 살아온
고향을 찾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본향이신
하느님을 향하듯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는 넉넉한
한가위 되십시오.
욕심은 서로를
밀어내지만
나눔과 감사는
풍성한 명절이 되게합니다.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
-이찬우 신부님-
즐거운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교우님들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예부터 땀 흘려 일한 후 얻게 되는 오곡백과는 농민들에게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의 결실을 맺도록 태양빛과 비를 내려주신 하늘에 감사드리고, 또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신 조상님들께도 감사드리며, 서로 노동으로 도와준 이웃들과 감사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찾고 조상님들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님과 부모형제에게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감사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새로운 감사할 일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 마음속에는 감사하는 마음과 아울러 고향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이 사셨던 곳 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은 마음의 고향이 됩니다.
추석명절 고향을 찾는 마음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고향인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미래의 시간도 희망해야 합니다. 가을 추수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삶의 결실을 맺고 참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때 우리가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장차 우리가 가 있을 먼 미래로부터 현실을 바라볼 때 물질적인 현실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우리 삶도 새로운 시야를 갖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희망 없는 삶과 세상 탐욕에 사로잡힌 삶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한 한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산을 잘 비축함으로써 삶의 안전을 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날 밤 그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장할 수 없으니 허락된 하루하루의 시간에 감사드리며 자기만을 위해 살지 말고 서로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 하느님과 조상님, 부모 형제들에게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사랑과 정을 나누고 아울러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감사는 십자가
-김종필 신부님-
찬미예수님!
늘 한가위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시름과 걱정을 덜어 놓고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고마움이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인심도 흉흉할까? 언젠가 우리 마음에 고마움이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물질 풍부시대에 우리는 공기와 물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문을 열어주거나, 잡아주거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려 주어도 ‘감사합니다’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 아닌 짐승에게 밥을 주면 ‘식사 전 기도’도 하지 않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급하게 먹습니다. 고마움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고귀한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물이 귀한 줄 모릅니다. 공기가 귀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화생방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그 흔한 공기가 그렇게 고맙게 느껴질 때가 없습니다. 또한 행군을 하다보면 그 물 한 방울이 그렇게 귀한 줄 모릅니다. 한쪽에서는 농약을 치고 있는, 그 논의 물도 엎드려 그냥 먹습니다. 비록 오염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물로 인해 내가 살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그 논물이 고맙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마움을 모릅니다.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말 두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입니다. ‘미안합니다’는 자신을 잘못을 주저 없이 인정하는 멋진 사람임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화해를 불러줍니다. 이러한 말들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특히 오늘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씨를 마음속 깊이 심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마움은 우선 사람과 사람을 소통시켜줍니다. 고마움을 느끼면 무엇인가 나누려 하고 선물하려고 합니다. 선물을 해야 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 그러한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을 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를 내어주신 하느님께도 고마워해야겠습니다. 고마움은 하느님과 나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러기에 감사는 십자가를 닮았습니다. 감사는 사람과 사람의, 사람과 하느님의 연결고리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우리 조상들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풍요의 계절, 달 밝은 날을 택하여,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려 놓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베푸심이 있었기에 후손인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수확한 풍요로움이 은혜롭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설과 한가위, 우리나라의 두 큰 명절을 보면,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신기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 명절에 행해지는 큰 의례가 조상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탈무드라는 이스라엘 랍비들의 문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곳곳에 다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연장하면, 조상들에게 드리는 감사는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집집마다 친인척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합니다.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로 말미암아 맺어진 형제, 자매, 친척들의 인연입니다.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가족과 친인척의 은혜로움도 깨닫게 해줍니다. 한가위에 형제자매와 친인척들이 함께 모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을 기점으로 우리 주변을 다시 보고, 그들의 사랑 안에서 가족과 친척들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베풂의 역사는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베풂의 역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문화권에서 발생한 언어입니다. 아시아의 문화권은 하느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늘이 주신 조상입니다. 그래서 그 문화권은 효(孝)를 삼강오륜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도 씁니다. 하늘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연이라는 말입니다. 효는 그 인연을 은혜로운 것으로 알고 감사드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생연분을 소중히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집안 어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형제자매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효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권이 말하는 효라는 덕목(德目)에는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날 밤 그를 불러 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곡식과 재산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시야(視野)에는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생명의 최대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은혜롭게 베풀어진 자기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수확한 것도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가 가진 모든 인연들도 그에게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공은 베푸심의 흐름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한 사람의 안일(安逸)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소위 무원고립(無援孤立)의 경지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보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이라, 우리는 많은 순간에 그렇게 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눈멀게 하여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한 순간들이 자기에게는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기적인 산택을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들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생각하던 이 계절에, 우리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 주변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셔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생명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베풂과 은혜로움의 흐름에서 일탈(逸脫)하는 우리의 시선을 잠시 멈추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고 가신 분들도 하느님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 모세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포현하였습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탈출 3,15). 돌아가신 어른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이제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아직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먹고 마셔서 기쁘기만 한, 한가위는 아닙니다.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그들을 소중히 바라보는 오늘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오늘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살아계신 집안어른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인연들입니다. 이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을 은혜롭게 보는 그만큼, 하느님을 기점(起點)으로 한 우리의 시야(視野)는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집안의 어른들과 더불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은 오늘도 축복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축복과 그 사랑을 연장하여 우리 주변에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
한가위 황량일취지몽
이창순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러번 생각합니다. 내 생명을 1분 1초도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황량일취지몽黃粱一炊之夢’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조밥 한 번 짓는 동안의 꿈’이란 말입니다.
옛날 노생이라는 사람이 여옹이라는 신선에게 자신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여옹이 노생의 머리에 자신의 청자 베개를 받쳐주며 자라고 권했습니다. 노생은 여옹이 조밥 한 번 짓는 동안에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딸 다섯을 낳고, 재상이 되어 호강하기도 하고, 역적으로 몰려 죽을 뻔하기도 하고, 자녀들을 결혼시켜 손자 손녀를 보는 모든 영욕의 인생을 꿈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깬 노생은 인간의 욕망과 부귀영화가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생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측정할 수 없는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부자로 살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이기심과 욕망의 하수인으로 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으로는 거룩함을 지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갖고, 채울 것인가 고민합니다. 주님을 재판관으로 세우면서도 모든 것을 화려하게 꾸미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과 흥정하고 살아온 지난 삶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내 참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나눌것은 나누면서 슬기롭게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님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곡식과 과일을 열심히 가꾸고 이제 가을이 되어 수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수확하게 될 때가 얼마나 즐겁고 마음이 풍족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으니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속담에도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되어라.’라는 말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즐겁고 풍요로운 날, 우리 선조들은 그저 자기만을 만족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쉬는 날이라고 편안한 하루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석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첫 번째로 한 일이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조상님 산소에 가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묘를 했습니다.
한가위는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단순히 편하게 쉬는 날이 아닙니다. 긴 휴일이라면서 여행을 다녀오는 날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이며, 그 감사의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더욱 더 뜻 깊은 시간을 갖는 날인 것입니다. 특히 조상님뿐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께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전에 알고 있던 청년을 만났을 때, “요즘 어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좋아요. 정말로 즐겁습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있는 반면에, “사는 게 뭐 그렇지요. 지옥 같아요.”라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 둘의 환경 차이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더 잘 살까요? 긍정적으로 말하는 청년이 당연히 행복하게 잘 삽니다.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태도에게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오늘 한가위를 보내면서 지금의 환경과 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내 이웃과 조상님과 더 나아가 주님을 향해서 온갖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조금만 더 긍정적으로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는 사람입니다.
지금 순간의 만족을 위해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재산을 쌓아둘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상님과 주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모범을 기억하면서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추석 명절에 지킬 수칙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추석 고향에서 지킬 수칙’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참조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대로 올려 봅니다. 한번 지켜보도록 하세요. 즐겁고 기쁜 명절이 되지 않을까요?
1. 절대 싸우지 않기
2. 감당 못할 정도로 먹지 않기
3. 부모님 섭섭하게 하지 않기
4. 한 사람만 일하게 하지 않기
5. 과속, 졸음운전 하지 않기
6. 기분 나쁜 질문 하지 않기(예; 너 여태 시집(장가) 못 갔니?/너 왜 갑자기 늙었니?)
7. 고스톱 안치면 좋고, 친다면 판돈 안올리기.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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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한가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일년 중 가장 크고 밝은 모습을 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오랜 역사 동안 이어져 온 희망을 담은 민속 기도이다.
어떤 희망이 담겨있었을까?
먹을 것 귀하던 시절 어린아이들은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에 맛난 음식 먹을 수 있고 동무들과 쥐불놀이를 하며 가을걷이 끝난 논밭을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이런 날이 매일 계속 되었으면 하는 동심의 소망이 깃들여 있었으리라.
농민들과 어민들은 한 해 거두어들인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결실에 대한 자축의 마음,
그리고 다음 해에 대한 희망의 마음을 담고 있었으리라.
늙은 부모들은 제 살길 찾아 흩어져있던 자식들이 모인 기쁨에 마냥 기쁠 수밖에 없는 이런 날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리라.
이처럼 각기 다른 처지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을 머리 앞에 두고 빌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담은 기도를 드려야 할까?
둘.
완벽한 원을 만들고 환하게 비치는 달을 보며 생각한다.
그 보름달도 늘 그랬던 것처럼, 크기를 줄여가며 사라져 갈 것이다.
깜깜한 밤하늘만을 남긴 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크기를 만들어가며 둥근 달로 변해 간다.
문득 우리 인생과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둥근 달을 우리 삶에 대한 만족의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달이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을 우리의 어둠의 시간이라고 하자.
꽉 찬 보름달만을 바라보는 것도 깜깜한 밤하늘만 바라보는 것도 어리석음이다.
보름달에 마냥 기뻐하고 어두운 밤에 마냥 슬퍼하는 것은 너무도 동물적인 반응이다.
달의 움직임을 이해하듯이 신앙은 삶 전체를 읽게 하는 힘이다.
꽉 찬 달은 기울어지다가 사라질 것이고, 다시 모양을 찾아 돌아올 것을 아는 평범한 지혜를 의식하게 한다.
삶의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한다.
삶의 환희에 쌓여있을 때 교만보다는 감사와 타인의 어려움에 마음을 기울인다.
우리 모두 그러한 신앙을 가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셋.
한가위는 가을걷이의 결과에 상관없이 하늘에 감사하고, 먼저 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희망을 갖고 결심을 다지고자 하는 삶의 지혜에서 만들어진 날이다.
이 세 가지 뜻이 이루어지는 오늘이기를 진심으로 청한다.
< 부유한 사람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도에서 선교하던 한 여 선교사가 몇 번이나 전도하려고 했던 힌두교 여인을 어느 날 아침 만났습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그녀의 팔에 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주 잘 생기고 똑똑하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는 침을 흘리고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힌두 여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를 우리 신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강으로 갑니다.”
그 여인은 선교사의 말을 듣지 않고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 여인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여인은 한 명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한 명의 아이를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과 함께 있는 아이는 병약한 아이였습니다. 선교사는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 건강한 아이를 바쳤단 말입니까?”
힌두 여인도 역시 놀란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종교에서는 그렇게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힌두교는 우리 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칩니다.”
성경에서 입타라는 판관이 나옵니다. 그는 무척 힘센 장사였지만, 이복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건달패 두목이 됩니다. 그를 구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를 통해 암몬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에 자신도 만약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자신도 자신을 가장 처음 마중 나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가장 처음에 마중 나온 사람은 자신의 유일한 자녀인 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은총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대가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대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용서를 청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죄의 용서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에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에 용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제물이 요구됩니다. 어디에서 들은 건데 성탄 전 날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가 전쟁 때 싸우러 나가는 군인이 받는 스트레스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돈은 없는데 상대는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계속 만나려면 계속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 피곤해 하고 아끼기 시작하면 상대도 사랑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멀어지려 할 것입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저희 집도 어렸을 때 돈이 없어 라면만 먹어야 할 때에도 제삿날만 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이 차려지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게 그럴 필요까지 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에겐 그 정도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태어나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풍부한 이 때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림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 또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보고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당신께 감사함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듯이 당신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우리들도 아끼며 제물을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실제로는 부유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한없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창고는 크게 넓히려고 하지만 제물은 바치기를 거부하는 구두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에겐 하느님도 똑같이 은총을 부어주시지 않고 거두겠다고 하십니다.
은총을 많이 받고 싶다면 매 순간 제물을 바쳐야합니다. 제물은 살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져야합니다. 이 제물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만큼 큰 제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즉 아버지 뜻을 위해 내 자신의 뜻을 봉헌하는 것이 가장 큰 제물이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물을 바치는 이에게 당신 제물인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드릴 가장 중요한 제물, 그것은 매 순간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유해지는 방법, 그것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뿐입니다.
또 예수님은 부정한 제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이것 또한 사람들 앞에서 구두쇠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같이 풍요로운 날, 절대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이 됩시다.
한 10년 전쯤일까요? 어떤 학생과 성소에 대한 면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면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하느님의 뜻이 어떤 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평소에 보았던 이 학생의 모습으로는 사제가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가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해 보았지요. 그러나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어서 저의 권유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이 학생은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의 예상대로 낙방이었지요. 얘기를 들어보니, 성적뿐만 아니라 인성검사에서도 사제로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답니다. 신학교 불합격 후, 이 친구와 만났는데 크게 실망을 했더군요. 더군다나 성소국장 신부님으로부터 사제로 살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면서,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도 될 수 없다는 생각. 이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지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우리들은 더 큰 찬사를 보내며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오히려 훌륭함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코 건넨 한마디의 말, 별 생각 없이 내미는 따뜻한 손, 스치듯이 짓는 작은 미소 속에 훌륭함이 숨어 있어서 세상을 더욱 더 의미 있는 곳으로 그래서 진정한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훌륭함은 사제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 각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한가위를 맞이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훌륭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주님과 조상님들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의 마음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더 많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적다고 또한 남들에 비해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며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의 일상의 삶 안에서 훌륭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불평불만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 안에서 나의 훌륭함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는 순간, 우리들은 나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를 그래서 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훌륭함 들을 발견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도전하고, 도전하라. 도전하는 자리마다 또 다른 내가 태어난다(나폴레옹).
상속, 복된 상속자
-김수환 신부님-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박 영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재산을 작은 상자에 각각 나누어 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큰아들의 상자에는 집과 전답 문서가, 둘째 아들의 상자에는 은행 통장이, 막내아들의 상자 안에는 내년에 파종할 볍씨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막내아들은 뭔가 다른 게 숨겨져 있을까 뒤져 봤지만 정말 볍씨밖에 없었습니다. 첫째는 집을 처분하여 부동산에 투자해 집을 여러 채로 늘렸고 둘째는 주식으로 돈을 몇 배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막내는 큰형이 조금 떼어 준 땅에서 물려 받은 볍씨로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는 힘들었고 소출은 입에 풀칠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근처를 지나가던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버지는 이런 고생을 제게 물려 주었을까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지. 하지만 성당에 나와서 기도를 해보게. 예수님께서 답해 주실지 누가 아나?”
그는 이튿날부터 어린 아들과 함께 매일 성당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지만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신학교에 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자리에 눕게 된 그는 사제가 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주신 볍씨 때문에 네가 신부님이 된 것 같구나. 그래서 너무 기뻐.”
한가위,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냅니다. 이는 조상님들이 재산을 물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삶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삶의 초대일 때, 우린 그 누구보다 복된 상속자입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박기석 신부님-
한가위 명절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를 바라던 조상들의 소망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임을 확인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 감사드림과 더불어 저 밤하늘의 둥근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 년 중 가장 크고 밝다는 한가위 보름달은 어느 나라에서나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선 월병(月餠)으로 달에 제사를 올리고 일본에서는 가을 풀과 둥근 떡을 차려놓고 달맞이를 합니다. 보름달은 사실 우리에겐 더욱 각별합니다. 고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은 달에서 낙타를, 중국인들은 두꺼비를, 유럽인들은 눈이 찌그러진 사내를 발견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건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지요. 다시 말해 계수나무로 초가삼간 지어 부모님의 천수를 기원하는 애틋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무르익을 대로 익은 자연의 결실 앞에서, 또 밝고 크게 떠 있는 저 달 아래서 복음 속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저는 혼자 중얼거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구나.” 아직도 영혼의 수확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속의 성취가 앞서고 있음에 더욱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을이 주는 풍성한 소출과 수확은 더 이상의 ‘욕심과 채움’이 아닌 ‘겸손과 비움’에 있음을 진정으로 배우라고 숙제를 줍니다. 복음 또한 하느님께 더 많은 것을 내어드리는 부유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공기도 무거워하지 않을 작은 기도를 하느님께 조심스레 바칩니다. 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달을 봅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감사와 나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명절 중에서 한가위 명절은 풍성한 수확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명절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풍성한 수확을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나 반성도 했습니다.
수확을 위해서는 먼저 씨앗을 뿌렸어야 했고, 씨앗을 뿌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꾸기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씨앗을 뿌렸는지, 뿌렸다면 어떤 씨앗을 뿌렸는지, 나는 가꾸기는 했는지, 가꾸었다면 얼마나 열심히 가꾸었는지 돌아봤습니다.
뿌린 것이 없으면 애초에 아무런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데 우선 나는 씨를 뿌렸는지, 어떤 씨를 뿌렸는지 돌아봤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올 초 한 해를 시작하며 제겐 무엇을 수확할지 계획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농사꾼으로 말하면 올 해 무슨 농사를 지을지 깊이 생각지 않은 거지요.
하느님 사랑을 씨 뿌리고, 하느님 말씀을 씨 뿌렸어야 했는데 하느님의 씨를 뿌리지 않으니 육의 씨앗이 자라났습니다.
마치 아무 곡식을 심지 않은 곳에 잡초가 자라듯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이 세상에 씨를 뿌리기 전에 제 안에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이 자라게 했어야 했는데 사랑 대신 미움이, 하느님의 말씀 대신 주장이 자라게 했으며, 하느님께 대한 갈망 대신 세상 욕망이 설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제 안에 사랑을 씨 뿌리시고 말씀을 씨 뿌리셨는데 저는 그 갈망 대신 세상을 욕망하여 육의 씨가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올 한 해 제가 열심히 무엇을 한다고 애 많이 썼지만 결국 잡초를 무성히 가꾼 셈이 되었습니다.
오늘, 한가위 날, 저는 수확할 것 별로 없는 초라한 제 들판을 보면서 그러나 다른 큰 수확을 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수확입니다.
수확을 하려면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요, 씨를 뿌리되 하느님의 씨를 뿌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하느님 씨의 못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깨달음을 수확한 것입니다.
이걸 깨달았으니 봄, 여름 농사 실패했어도 가을, 겨울 농사 잘 지으면 되고, 마음만 먹으면 내년 농사는 한 번 제대로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가위 명절,
어떤 사람은 풍성한 수확에 대해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벼낫가리 하나 없는 빈 들을 보며 깨달음을 얻어 감사하고, 어떤 식으로든 모두 감사하는 명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수확을 같이 기뻐할 사람이 있는 사람은 같이 기뻐할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노숙인들,
철거민들,
수해민들,
새터민들,
독거노인들이 우리 기도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합시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라고 경고조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작은 탐욕이 엄청나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고 있을 때, 길키라는 사람이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 잡혀있던 수감자들의 배급량은 하루에 1,200칼로링 불과할정도로 적었습니다. 빵 여섯 조각, 끊인 물이 전부였습니다. 모든 포로들은 저체중에다 영양 부족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먹을 것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적십자사에서 미국인 포로 200명분, 총200개의 꾸러미를 배편으로 보냈습니다. 미국인 포로들은 금덩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20킬로그램의 꾸러미 하나에는 각각 분유 한 통, 버터 세 캔, 스팸 세 캔, 치즈, 초콜릿, 설탕 한 파운드씩, 그리고 분말커피, 잼, 연어 통조림, 그리고 말린 자두나 건포도 봉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길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주로 빵에다 고기나 기름기는 거의 없고 당분은 물론이고 사실은 아무 맛도 없는 식사만 해왔다. 그러다 입에 넣은 영양 만점의 기름기 많고 맛있는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다.” 꾸러미 안에는 음식 외에도 아쉽기 그지 없던 옷가지가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이 모두 쓰고도 남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분의 음식과 옷가지를 미국인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던 다른 국적의 수감자들에게 관대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6개월 후, 음식은 모두 사라졌고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겨울이 찾아왔고, 수용소 내의 사기는 완전 바닥이었습니다. 성탄절이 지나고 며칠 후, 갑자기 무슨 신기루처럼 수용소 정문 앞에 적십자 꾸러미를 실은 당나귀 행렬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습니다. 일본군 수용소장은 꾸러미 개수를 모두 1,550개로 파악한 후, 1450명의 포로들에게 한 꾸러미씩 분배하고, 200명의 미국인들에게 반꾸러미씩 더 줄 수 있겠다고 계산했습니다. 기쁨과 흥분이 수용소 내에 가득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포로들은 꾸러미를 분배할 수 없다는 공고를 읽고 경악했습니다. 미국인 몇 사람이 수용소 측의 처분에 항의해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선물이니 자신들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주지 말고 미국인 포로 한 명당 7개 반씩의 꾸러미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진저리가 난 수용소장은 본부에 판단을 요청했고, 10일 동안 길키와 다른 미국인들은 다른 국적 포로들의 적개심과 증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길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들 같은 이야기만 했다. 서로가 미국인, 영국인, 백인, 흑인, 유대인,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지내던 공동체가 갑자기 적대적인 민족 집단들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놀라운 성탄절 선물이 남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땅 위의 평화와 정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소중한 꾸러미가 수용소 한가운데 가만히 놓여있는 동안 인간들의 갈등과 악의의 돌풍이 거칠게 불어 닥쳤다.】
이처럼 탐욕은 공동체를 갈라놓고 싸움을 일으키고 불목하게 만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탐욕이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느 날 우체국에서 편지 정리를 하던 한 직원이 우연히 이상한 주소를 보았다.
‘하늘 나라 하느님이 계신 곳’
그래서 그 직원은 호기심에 편지를 뜯어 내용을 읽어 보았다.
“하느님, 갑자기 10만원이 필요합니다.
급히 쓸 데가 있는데 돈은 구할 수 없고...
정말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10만원 좀 아래 주소로 보내 주세요.”
직원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어 다른 직원들과 논의한 끝에 돈을 조금씩 모아 보내 주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주소로 답장이 온 것을 확인하고 열어 보았다.
“하느님, 보내 주신 돈은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10만원의 절반인 5만원 밖에 없더라구요.
나머지 돈은 우체국 놈들이 떼어먹었나 봅니다.
세상말세입니다. 그래도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
-이재순 수녀님-
오곡백과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부귀는 늘 불안하지만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는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늘 자유롭고 영원히 행복합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부유란 무엇일까요?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겸손한, 있는 그대로를 말할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풍요롭게 태어났습니다.
갓난 아기의 평화와 아이들의 순진한 기쁨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으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십니다. 하느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아픔도 고통도 없는 완전한 ‘있음’ 자체이십니다.
세상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부활을 잉태한 산고일 뿐입니다.
감사의 DNA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시인은 종이에서 구름을 본다고 합니다.
그것은 종이에 구름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은 종이가 된 나무를 보고, 나무를 키운 비를 보고, 비를 보낸 구름을 보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러 하다면, 시인이 이렇게 현상 너머의 것들을 본다면, 시인보다 더 관상적이어야 할 우리는 이 가을, 가을의 충만을 가장 성대하게 축제지내는 이 한가위에 곡식의 낟알 하나에서 낟알 하나를 보지 않고, 나무에 달린 과실에서 과실 하나를 보지 않고, 그 하나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보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봅니다.
한가위에 해당되는 서양의 명절이 Thanks giving Day입니다.
모든 것을 주심에 감사드리는 날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올해는 이 한가위에 감사를 드리기에 앞서 저는 저의 불효를 먼저 반성합니다.
저는 우리 형제들 중에 아주 효도를 잘 하는 형제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면 효도를 잘 하는 것이 무엇을 잘 해드리고, 무엇을 많이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를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을 또 보면 감사를 드리는 것도 뭉뚱그려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까지 생각해내서는 그 하나하나를 낱낱이 헤아리며 감사를 드리고, 감사의 마음이 슬쩍 비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촉촉한 상태로 그 마음에 한 동안 머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 가운데 머물 때 감사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감사드리는 그분과의 벅찬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감사는 지난 일에 대한 회상적인 감사가 아니라 현재적인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대한 감사는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 나를 위한 것이고, 그러니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것이 진정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감사 인자, 감사 DNA가 없는 것이겠지요.
불만의 DNA가 감사의 DNA 대신 깊숙이 박혀 있어서 어느 것 하나 감사할 일은 없고 모든 것이 다 욕심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어느 것에서도 모든 것이신 하느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 하나에 하느님 현존이 달린 이유입니다.
하나를 감사하면 하나를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를 통해 모든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오고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데 비해 하나도 감사하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감사의 DNA를 통해서 옆의 형제를 보면 그의 대소변을 내가 쳐 주게 되어도 감사해야 하는데 이렇게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고 죽지 않고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도 감사하고 힘들게 하여 나를 성장케 해 주는 것도 감사하고 실향민이나 새터민들을 보면 한가위 명절을 같이 기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도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과 내일 저는 새터민들과 함께 달도 보고 한가위를 지낼까 합니다.
제가 생활하는 사제관의 문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특히 본당의 청년들에게는 자주 공개를 하지요. 사실 밖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든요. 그래서 사제관에서 함께 밥도 해 먹고, 그러면서 때로는 술도 마실 때가 많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좋은 시간을 가질 수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모임의 시간이 끝난 뒤의 정리입니다. 일반 가게에서 먹으면 당연히 그 가게에서 치우니 정리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사제관에서는 따로 정리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직접 정리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 청년들은 훈련이 되어서인지 정리를 아주 깨끗하게 잘 합니다. 바닥까지 깨끗이 닦으면서 정리정돈을 잘 하지요. 그런데 잘 보면 하는 사람만 설거지를 하고, 하는 사람만 걸레질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뒤에서 잔소리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지요.
한 청년은 매번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단점은 적극적으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즉,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 빈번하지요. 그래도 늘 먼저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또 한 청년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거지 좀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말을 해요.
“신부님, 제가 설거지 하면 그릇 다 깰 거예요. 그릇 깰까봐 설거지를 못하겠어요.”
제가 이 두 청년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할까요? 당연히 그릇을 깨뜨릴지라도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는 청년이겠지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접시를 닦다가 깨뜨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접시를 깨뜨릴까봐 아예 닦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제가 청년 중에서 설거지를 해서 그릇을 깨 먹더라도 적극적으로 일하려는 청년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실수를 많이 하더라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한 해를 마무리 해가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그 절정에 자리한 팔월 한가위를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이제까지의 우리 모습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서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노력하며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둔 수확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칭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요. 이렇게 가장 좋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하면서 주님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으로 생긴 병은 약이 없다. 오로지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는 것만이 유일한 약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 자유의 첫걸음
- 이요한 신부님-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관심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식 · 부동산 등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서점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왜 모두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요? 삶의 여유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자유는 버림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여유과 자유를 주는 것 가운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가전제품입니다.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여가 시간을 자기 개발과 문화생활을 위해 활용한다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텔레비전을 보는 데 사용되고 결국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에 중독되어 가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외모 가꾸기와 영어를 비롯한 경쟁력을 위한 학원 다니기에 소모된다면 결국 우리는 여유로 얻은 시간을 다시 부자 되기 위한 노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편리한 가전제품을 사고 더 좋은 것을 사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남는 것은 우리집 텔레비전은 몇 인치짜리고, 냉장고는 몇 리터라는 식의 초등학생 같은 자랑만 남을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어떤 것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연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일 년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가족과 함께 지금까지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충분히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지금 곁에 있는 가족의 손을 꼭 잡고, 지금 곁에 없는 가족은 마음속에 떠올리며 사랑한다고 말해 봅시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 이루신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명절이 대개 그러하지만 특히 한가위 명절은 명절을 지낼만한 사람에게 명절이지 모든 사람에게 다 명절인 것은 아닙니다.
애쓴 만큼 수확이 풍성한 사람은 그 보람을 사람들과 나눌 때 배가 되기에 명절답게 명절을 지내겠지만 한 해 농사가 쫄딱 망한 사람에게는 한가위가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수확이 풍성하여 명절이 즐거운 사람은 이 명절에 조심해야 합니다.
명절에는 그늘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수확을 앞에 놓고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를 들은 부자처럼 자기가 이룬 것에 대한 자기도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은 세상을 평정한 다음,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인구조사를 통하여 나라가 얼마나 부유해지고 병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한 자신의 통치에 자기만족하고 도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시어 왕이 되고 하느님께서 함께 싸워주시어 모든 적을 물리쳤던 것인데 나이를 먹으니 노망이 들어 하느님이 해주신 것을 깜박 잊고 마치 자기가 다 이룬 것인 양 자기 업적에 도취한 자신 본 것입니다.
저도 자주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창의력을 주시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많은 것을 시도하게 하시고 실패한 것도 많이 있지만 많은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어떤 때 제가 이룬 것인 양 만족해합니다.
언젠가 과거에 있던 본당 40주년 맞이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지속적인 성체조배회가 아직도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성체조배가 본격 시작되기 전 제가 필리핀에 갔다가 영감을 받아 시작한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것을 얘기할 때 제가 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저에게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게 하신 것이지요.
필리핀을 방문하게 하신 것에서부터 그것을 할 마음을 가지게 된 것까지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실상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다 저의 성향 때문인데 이런 성향과 성격을 주신 것이 하느님 아니겠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받으소서, 오! 주여,
나의 모든 자유, 나의 기억, 나의 마음,
그리고 나의 의지, 모든 것을 받으소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당신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지배받기 위해서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라고 기도하셨듯이
저의 능력, 마음, 심지어 의지까지 주님께 받은 것이니
제가 한 모든 것은 제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어머니는 늘 지혜로우십니다.
어떤 때 은근히 당신을 자랑하시기도 하지만 명절 때나 생일잔치 때 당신의 자손이 다 모이면 매우 흐뭇해 하시면서도 꼭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주님께 대한 기도로서 감사드리고 자손들에게도 가르치십니다.
이 한가위 명절,
하느님께서 내 안에 이루신 많은 것들, 나를 통해서 이루신 많은 것들 돌아보고 그 하느님의 모든 업적을 가족이 함께 찬미하게 되기를, 명절날 새벽 저는 대구 외진 곳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풍요와 감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즐거운 추석입니다. 추석은 외국으로 말하면 추수감사절 정도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모든 것이 풍성할 때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전통 같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할 때 그 소출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조상에게 먼저 차례 상에 올려 드리는 것은 아마도 이 모든 축복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조상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들이 조상들 덕이 아니라 하느님의 덕임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에게 한가위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감사와 풍요의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나누지 못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마음 때문에 지구상에 극빈자가 3분의 1이나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돌고 있는 재화나 식량은 세상 모든 인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 양인데 나누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굶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수확을 많이 올려 곡간을 늘려야 할 정도가 되었지만 바로 그 날 밤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그만큼 부자가 되게 해 주셨지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자가 다 일찍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꼭 쥐고 있는 손을 좀 풀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적어도 오늘만은 실천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복음을 한가위 복음으로 넣었을 것입니다.
제가 첫 영성체 받을 때 교리를 가르쳐주시던 수녀님이 하늘나라에는 우리 각자의 이름이 쓰인 창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창고에 돈이 쌓여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재산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아야 할 하늘나라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토마사도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은 매우 부강하여 자신을 위한 큰 왕궁을 짓기를 원했고 기술자를 찾기 위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계시로 알고 있던 토마사도는 그 사신에게 자신이 훌륭한 건축가임을 말하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 큰 건물을 짓겠다는 그의 담대함에 놀란 왕은 궁전 지을 비용으로 많은 양의 금을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았습니다. 토마는 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2년이 지난 뒤 왕이 귀국하여 이 상황을 알자 곧 토마를 잡아 가두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일까 생각하다가 생가죽을 벗기고 화형을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왕의 동생이 죽었다가 나흘이 지난 뒤에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자신이 죽어서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보았더니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궁전이 하나 있더라고 합니다. 그는 그 궁전의 문지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함께 있던 천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이 궁전은 토마사도가 당신의 형을 위해서 지어놓은 것인데 그는 여기에 살 자격이 없으니 원한다면 다시 살려줄 테니 형에게 그 돈을 갚고 영원히 그 궁전을 차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은 토마사도에게 회개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라고 내어 놓았습니다. 토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모릅니까? 하늘에서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신이나 현세에 관계되는 것은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을 잘 사용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가스실에서 죽어야 할 유태인들을 빼냈습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나중에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 앞에 앉아있는데 자신의 차와 시계와 반지 등을 팔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그것들을 팔았으면 10명은 더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큰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도울 수 있는데 돕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우리 옆에서 배고파 쓰러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모른 척 하였다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행을 한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이 부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2주 동안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툭하면 싸우시는데 그 원인이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한 번은 다른 행려자분이 한 행려자분의 신문지를 집어가서 크게 싸움이 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지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이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린 분은 많은 신문지를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못살아서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집착하기 때문에 더 못살게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이었습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즐겨 받으셨고 카인의 제물은 즐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봉헌’엔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감사의 마음을 아벨은 지니고 있었고 카인은 지니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추수 때가 되면 카인은 먹지 못해서 버려야 할 것들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니 남들이 보기에도 가장 아까운 살찐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뻐 보이는 아벨을 더 축복해 주셔서 재물을 더 풍족하게 해 주셨고 카인은 시간이 갈수록 흉년만 들게 되어 더 가난해졌습니다. 누구라도 더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물질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만의 원죄 때문입니다.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담도 다른 모든 것은 먹어도 된다고 허락되었지만 굳이 먹지 말라고 한 것까지 먹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당신 것을 떼어 놓으라고 하시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영역까지도 침범함으로써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데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하며 하느님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 교만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여자!’라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아이!’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내 집!’이라고 하지만 죽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 와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돈!’이라고 모두가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경제는 망하고 맙니다. 돈은 피와 같아서 순환해야 하는데 꼭 쥐고 풀지 않으면 나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듭니다. 물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않아 죽은 바다가 되어버린 사해를 생각하면 집착이 자신도 주위 사람도 죽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목숨!’ 누가 나에게 생명을 주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태어났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목숨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원초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어떤 가난한 집에서 살다가 부잣집으로 시집 간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부자처럼 보이려고 온갖 보석이며 옷을 사고 걸치고 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왜 부자로 보이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우린 부자란다. 남들은 네가 가짜 다이아를 하고 가짜 밍크를 걸쳐도 다 진짜라고 믿는단다.”
그렇습니다. 우린 어쩌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비교해서 더 돈 많은 것처럼 보이려고 돈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을 약속받은 부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걱정은 오늘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시며 필요한 만큼 채워줄 터이니 돈 걱정 하지 말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나에게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기 시작합시다. 그러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줄 알게 되고 그렇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되로 흔들어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재물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보름달처럼 꽉 찬 신앙인일 것입니다.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가 되시길 빕니다. ^ ^*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짝반짝 빛나서? 아니면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니까? 색깔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금보다도 예쁜 색깔이 많으며, 그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꼭 귀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꼭 귀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라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라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라면이 귀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금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금이 세상의 모래처럼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다면 지금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모래가 이 세상에서 아주 적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모래를 금고에 모셔놓고 애지중지할 것이며, 중요한 행사의 경품으로 모래가 나면 사람들은 최고의 경품이라고 말하면서 서로들 그 경품을 타기 위해서 앞 다툴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사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지 않은 것이 흔한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흔하지 않은 것들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흔하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는 높은 격을 부여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왜 높은 격을 부여하지 않을까?”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쌍둥이라 할지라도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고 하지요. 또한 사물들처럼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고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창조 활동을 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사물에만 더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재물에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필요한 보화를 쌓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이렇게 기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가위에 나는 과연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가위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지요. 따라서 먹고 마시면 그만인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지요.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조상님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감사의 제사를 바쳤던 것입니다. 즉, 내가 얻은 그 물질 자체에 소중함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조상님 그리고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더 큰 소중함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명절을 통해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조상님들의 이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들은 한가위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사물인가요? 아니면 사람인가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합시다.
만족을 찾아 헤매지 말라. 그보다는 항상 모든 일에서 만족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존 러스킨)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초에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문간 방 안에는 아주 연세가 많으신 할머님 한분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께도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집 분위기가 약간은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저는 조금 오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반전시켜보려고 그 할머님께 새해인사도 드릴 겸, 농담도 건넬 겸, 큰 소리로 이렇게 인사드렸습니다.
“할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오래 오래 사세요. 그러나 너무 오래 사시지 마시고 100살까지만 사세요.”
그 말을 마친 저는 썰렁했던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려니 했었는데, 분위기가 더 썰렁해졌습니다. 할머니 얼굴도 안 좋아지시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난처해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할머니 올해 연세가 99세였습니다. 99세 할머님께 100살까지만 살라고 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수명이 엄청 높아져서 OECD회원국 평균을 따라잡는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여성들은 80세 남짓, 남성들도 75세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수치입니다.
오늘 추석입니다. 먼저 떠나신 선조들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날들도 헤아려보며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봐야하는 날입니다.
과연 몇 살까지 살다 이 세상 떠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80살까지? 아니면 100살까지? 그도 아니라면 150살까지?
혹시 200살까지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반대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이미 친구들은 다 세상 떠났을 것입니다. 아들들이나 손자들도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새해만 되면 KBS, MBC, SBS, 세계 기네스 협회에서 다들 찾아와 난리들일 것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놀라지 마십니다. 올해 200세를 맞이하시는 어르신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그럼 취재나간 리포터를 연결해보겠습니다.”
그 정도 되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불행입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임종자들을 떠나보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죽음은 해결사입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방황의 세월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 악습의 굴레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죽음이 없다면 이 처절한 소외감, 이 심연의 고독, 이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한없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죽음이 있어 행복합니다. 죽음을 통해 거칠고 험난했던 오랜 여행길을 마칠 수 있습니다. 결국 죽음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군요.
그 오랜 세월, 상처와 고통의 나날을 접고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한 영혼을 바라보며 죽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해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결코 마지막 날, 인생 종치는 날, 밥숟가락 놓는 날, 쫄딱 망하는 날, 무작정 슬퍼할 날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그간 힘겹게 지고 왔던 모든 멍에를 홀가분하게 내려놓은 날, 기쁜 얼굴로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날, 환희와 축제의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먼저 떠난 분들 위해 제사상을 차려놓고 아직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으신 분들도 많으시지요.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경황없이, 잘 있으란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그가 야속하기도 하겠지요. 마음이 허전하고, 싱숭생숭하시겠지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우리보다 훨씬 사정이 낫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원망도 없는 곳에서, 자비하신 주님 품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인한 신부님-
우리말 표현 중에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고마’란 말이 우리나라의 옛말로 땅 신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결국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은 당신이 나의 신이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표현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우리 땅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조상들 덕분에, 그리고 다른 이들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되돌아볼 줄 아는, 우리네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다른 많은 이들의 사랑과 희생의 선물임을 알고 고마워하며 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한민족 전체의 명절로
-변진흥-
추석, 곧 한가위를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부릅니다. 음력 8월은 가을의 정점으로 만물이 성숙하는 좋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가위에 온갖 음식과 과실을 풍성하게 장만하는 것은 그 풍성한 결실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넉넉한 마음과 정서를 보여줍니다.
신라시대에는 8월 보름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길쌈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양편의 길쌈 결과물이 많고 적음을 따져 내기에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이긴 편에게 대접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길쌈놀이를 하며 서로 땀 흘려 거둔 결실을 축복하고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때 노래와 춤을 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풍요로움 속에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밝은 한가위 달과 함께 결실을 노래하는 풍속을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추석은 큰 명절입니다.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귀성 인파는 결코 줄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석은 남쪽에서만 명절입니다. 허리가 잘린 북한에서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녘의 동포들도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풍성한 음식을 나누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한가위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 자신의 탓입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맞는 우리는 북녘 형제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남쪽 사회가 주님께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책망받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추 석
-윤경철 신부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요사이는 달에 우주선이 갔다 오고, 달에 대한 탐사를 넘어 화성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시대라, 별 감흥은 없지만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밝게 떠오른 추석 대보 달을 올려다보며 소망을 간구하고, 마음속으로나마 이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설날이 한 해의 출발을 뜻 깊게 맞으려는 것이라면 추석은 한 해의 맺음을 알차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감사축일입니다. 농업이 우리의 주업이었기에 생활풍속은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한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것을 가을에 수확하는 것에 각별한 뜻을 두어 왔습니다. 그건 땅에 대한 감사요, 하늘에 대한 감사요,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넘겨준 조상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곤 정성어린 식탁을 마련해서 온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며 성묘로 하루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저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추석날을 맞이하면 기쁩니다.
전도서 3장 1절의 표현처럼, “모든 일에 제 때가 있고, 하늘 아래 만사에 제 시기가 있듯이”, 추석명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가신 조상들을 회상하면서 효도의 정신으로 차례를 지내고, 조상 묘를 찾아 인사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미풍양속이라고 했습니다.
‘차례’ 혹은 ‘제사’가 자연적인 효도에서 기인한다면, 우리 교회의 위령미사는 어떠한 성격이겠습니까?
“연옥이 존재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특히 미사성제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트리엔트 공의회 <1545-63녀>의 선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우들이 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지냄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인 지상의 교회인 우리들이 연옥교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한다고 발표하고, 여러번 알려주어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교우 가정이 많다는 점입니다. 미사 예물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든 간에 왜 무관심한가? 만일 신자가정에서 외교인과 같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렇다고 성당에서의 합동 위령미사의 대열에도 끼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현실이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년내내 돌아가신 분을 위해 위령미사 한번 드리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 볼 일이요, 한마디로 악한 표양을 주는 교우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교인들의 제사를 살펴보면, 지금은 가정의례준칙대로 하는지 모르지만 그 격식이 매우 엄하고 정중했습니다. 출타중인 사람을 제외하곤 다 모이는 것으로 빠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가 끝난 다음,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의 부분은 특히 인상이 깊습니다. 음복하는 부분은 우리 교회에서의 영성체 부분에 해당한단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미사참례는 하면서도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일반가정에서 제사에 참석하고서도 그곳 음식을 먹지 않는 결례와 비슷합니다. 감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추석을 맞아 위령미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석 명절에 우리는 불우한 이웃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외된 분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특히 전후방에서 나라를 몸 바쳐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자식인 국군장병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고향산천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지만 추석명절을 맞아도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향도 갈 수 없고, 부모와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향,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부모, 형제, 친척들. 이 국군장병들이 바로 살아있는 나의 자식입니다. 추석명절이 군에 가 있는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모님 같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을 지내는 오늘, 모든 연령에게는 따뜻한 자비가, 모든 교우 분들의 가정에 추석이 주는 그 풍요로움 같이 크나큰 은총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풍성한 은총에 감사를
-김정호 신부님-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서 복을 주심이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명절의 기쁨을 전하면서 인사를 드립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하는 한가위 명절을 맞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조상님들께 차례를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여러분들의 각 가정마다 오곡백과의 풍요로움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항상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갖는 고유한 명절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8월 보름에 월병을 빚어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고,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풍습을 일부 지방에서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민족의 대명절로 지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 민족 고유의 커다란 잔칫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명절을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흔히 秋夕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은 四書五經 중의 하나인 禮記에 나오는 “朝春日 秋夕月”이라는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仲秋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건 가을에 해당하는 3달을 初秋 中秋 終秋라고 하는데,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 “한가위” 혹은 “가윗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그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가운데”라는 말마디와 관련이 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5일은 봄부터 시작해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1년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 달이 가장 둥그렇고 가깝게 보이는 대표적인 명절이기 때문에 한가위라고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명절을 추석이라고 하든, 중추절이라고 하든, 한가위라고 하든, 가윗날이라 하든, 이 모두가 바로 오늘의 이 풍요로움, 이 넉넉함, 이 복스러움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 나온 이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비옥한 땅을 맡겨주시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애써주신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시금 되새기기는 것입니다.
보도를 통해 들어보니까, 이번 명절에도 온 나라가 고향을 찾는 행렬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얼핏 헤아려봐도 1000만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대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 또 친지들을 찾아 전 국민의 1/3가량이 움직이는 모습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그 어디서도 이런 예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로지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런 풍요로움을 허락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는 소출을 많이 얻게된 어떤 부자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마 기후도 좋고 병충해도 없어서 풍년이 들었나 봅니다. 남아넘치는 곡식단을 바라보면서 부자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이 많은 곡식을 어디에 다 보관해야 하나?”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지금 있는 작은 창고를 헐고, 더 크고 튼튼한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꽉꽉 채워놓고, 그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리라” 하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로 그날 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소출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는 인색한 삶을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곡백과의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에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도 만족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명절을 기쁘게 지내게 하시면서 천상 도시의 잔치를 미리 즐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부유함을 즐길 권한을 받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 풍요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만 삼으려 하지 말고,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가짐도 아울러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하느님, 저희 조상과 저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이제 주님께 받은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 세상을 떠난 조상과 부모, 형제, 친척들을 천국에서 만나게 하소서. 아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한 억만장자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 유언인 즉, “내가 죽거든 관 양쪽에 구멍을 내고 나의 양팔을 밖으로 내어 놓은 채 장례를 치러라.”는 것이었다. 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 자녀들은 물론이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이 지나 큰아들이 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털어 자선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는 아버지 유언의 뜻을 깨달았던 것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불교계의 진리와 같은 가르침이다. 누가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땅문서를 손에 쥐고 이 세상에 나왔거나, 돈을 쥐고 나온 사람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을 때면 아무 것도 손에 쥐고 갈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다. 일 센트짜리 동전은 고사하고 지푸라기 하나도 쥐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어떡하든 많이 가지려 애쓰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현대판 금송아지를 인생의 전부이며 목적인양 착각하며 산다. 돈으로 모든 것이 계산되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거의 모든 현대인들의 몸에 베여 있는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은 더러운 것’이라들 말하지만 이 더러운 돈을 사람들은 다 좋아한다.
돈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이런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돈방석에 한 번이라도 앉아 보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죽어도 좋겠네!”라는 말을 일삼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혹자는 “공수래공수거”의 진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물질이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만수래(滿手來)”의 행운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으레 “만수거(滿手去)”하려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며,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그것은 우선 생명이다. 생명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은 덤으로 주어지며, 많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다. 시간, 능력, 건강, 재물, 권력, 명예, 배우자, 자녀 등이 그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즉 육체를 가진 동안에 사람은 이런 소유들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소유한 것에서 손을 떼야하며, 놓아두고 가야한다. 결국 이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루카 12,15-21)에서 보듯이 부자는 밭에서 난 소출을 전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다.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부자의 잘못은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고 한 약속에 있다. 사람이 현재의 소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있겠지만, 누가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감히 한치 앞을 예견하며, 몇 년 앞을 아무 걱정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담하던 바로 그날 밤에 부자의 생명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재산을 부당하게 모은 것도 아니고, 그가 재물을 탐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재물이 자신의 전부이며 생명과 미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물질에 속하는 육체가 없으니 육체와 관계되는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혼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내가 소유한 것이 많고 적고 간에 한가위의 보름달이 더 커지거나 줄어들지 않듯이 모든 것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늘에 보물을 쌓고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마지막 날
김형수 신부님
요즘은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워졌음에도 인심은 더 각박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도 무색해진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린 오늘날, 복음은 한가위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여, 마지막 그날에 제가 꼭 챙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설마 사람들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통장과 패물, 또는 어떤 문서들이 아니길 소원합니다.’
시인 이선관의 문장은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합니다. ‘저승 갈 때 입는 옷 말입니다. 그 옷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물질적인 삶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에 매몰되어 우리가 영원히 가지고 갈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빈손으로 떠나야 할 그때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추석은 앞만 보면서 바쁘게 지내온 삶을 돌아보며 조상님들이 먼저 가 계신 영원한 고향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하늘의 보화’를 쌓기 위해, 명절에도 쓸쓸하게 끼니를 걱정하며 지낼 이웃을 생각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웃과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겸손, 감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떤 부유한 사람이 많은 소출을 거두어서 더 부유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의 많은 재산을 쌓아 두고,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그 부자의 첫 번째 잘못은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가 부유하다는 것과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는 것에 대해서 가장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렸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잘못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잘나서(자기의 능력이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잘못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잘못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했다는 점입니다.
몸만 생각하는 사람은 몸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왕이었습니다(1열왕 10,23).
그러나 그의 지혜와 부귀영화는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1열왕 3,10-14).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버지 다윗이 걸은 것처럼, 내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바르게 걸으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정과 법규를 따르면, 나는 너의 왕좌를 이스라엘 위에 영원히 세워 주겠다(1열왕 9,4-5)."
"그러나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1열왕 9,6-7)."
구약성경에는 솔로몬이 많은 왕비와 후궁들 때문에 타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열왕 11,3-4), 그것보다는 자기의 지혜와 부귀영화에 대해서 교만해진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교만은 하느님의 은혜를 잊게 만드는 법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기는커녕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1열왕 11,5-8).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이었지만 늙어서는 그 지혜를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둔 일이 나중에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1열왕 12장),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됩니다.
결과를 보면 그의 부귀영화는 아주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솔로몬의 영화는 들꽃 한 송이보다 못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루카 12,27).
우리는 흔히 솔로몬을 지혜로운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전체 생애를 생각하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왕입니다.
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경고를 하신 시각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늘 밤'이라는 말은 회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여유를 주셨음을 뜻합니다.
('지금 즉시'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 여유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시간 여유는 회개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는 것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확정된 결과를 예고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말은 사람의 목숨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도 재물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데도 자기가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겸손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일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2코린 9,10-15).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재산의 관리인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재산을 남들보다 더 많이 맡기셨다면, 그것은 남들보다 더 많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탐욕>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어떤 사람이 유산을 독차지하고 동생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이 예수님께 와서 하소연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유산 분배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그런 세속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은 이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루카 9,60).
세속의 일은 세속의 법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동생이 아니라 형을 겨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산을 나누어 받기를 바라는 것이 탐욕이 아니라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 차지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람의 생명은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에 속해 있다.' 라는 뜻인데, 돈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라는 말씀은 하느님보다 돈을 더 믿는 부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난해도 돈만 밝히면 탐욕스러운 부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더 좋은 병원에서 더 좋은 치료를 받아서 더 건강하게 살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약도 못 사고 치료도 못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의 생명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9-20)"
어리석은 부자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으로 즐길 생각을 했다는 것은 자기가 최소한 '여러 해'를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단 하루'의 여유도 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처지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절대 권력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하루살이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의학이 조금 더 발달했고, 평균 수명이 조금 더 늘어났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평균 수명은 평균 수명일 뿐이고, 그게 자기의 수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사는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지금 어떤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의 경우에, 하느님께 다 맡기고 치료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진짜로 잘사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2,21).
또 재산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33)."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또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은 '믿음, 정의, 선,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래도 가난에 쪼들리고 궁상맞게 사는 것보다는 좀 더 품위 있고 여유 있게 살면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인데, '혼자서만'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늘 짝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가난과 궁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함께 배부르든지, 함께 굶든지...)
품위 있고 여유 있게 자기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그 다음에 조금 남은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주면서 생색내는 것은
위선입니다.
-손희송 신부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더운 여름날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비웃지만,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베짱이는 개미네 집에 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부자는 베짱이가 아닌 개미에 비교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나무라십니다. 그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 믿으며”(시편 52,9)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거둔 많은 소출이 하느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것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도록 안배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농사를 예로 들어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씨가 싹트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으려면 적당한 햇살과 비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노력은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이렇게 힘주어 말합니다. “부자들은 열매와 곡식이 자라는 논과 밭을 자기네가 소유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씨앗을 싹 틔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자기 밭에서 나오는 소출을 거기서 일한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궁핍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 부자들의 임무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나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재물이 많아지면 그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이 꼬여들어 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돈 때문에 부부 사이가 갈라지고 자식들이 불목하며 친족 간에 분쟁이 벌어진다면, 그 재산을 모으려고 쏟은 “모든 노고와 노심”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제1독서) 자신이 거둔 결실과 성공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한다면, 가진 바를 기꺼이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제2독서) 신앙인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현세적인 것, 곧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을 버릴 때 가진 바를 흔쾌히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나눔으로 응답하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보다는 돈에 더 희망을 거는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님-
시작기도
주님, 보이는 모든 것의 근본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시고 오직 그 근원에만 신뢰를 두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군 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분배 문제에 개입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는 표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은 더욱 근본적인 대답을 주십니다. 곧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본질에 따른 충만한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이 대답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걸림돌을 탐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보통 탐욕이라 하면 이미 강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는 나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탐욕의 뜻을 살펴보면 의외로 자신과 가까이 있는 무엇임을 깨닫게 됩니다. ‘탐욕 ’이란 그리스어 단어를 어원대로 분석하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탐욕스런 사람 ’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것보다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상태, 자신의 필요나 다른 사람들의 상황에 관계없이 더 많이 얻고 싶어하는 마음, 이것이 탐욕인 것입니다. 여기서 ‘더 많이’의 기준은 자신의 필요와 타인의 상황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한테 참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을 가지기 원한다면 그것이 탐욕이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 또한 탐욕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탐욕에 대해 경계하라고 말씀하시고 곧바로 그 이유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원초적이고 정당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내 생명이 재산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는 생각이 욕구와 연결될 때 탐욕은 참으로 강하고 끈질겨 짐을 예수님은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생명을 보호해 주는 것이 재산이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근본적 욕구를 하느님께로 방향 짓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십니다. 이 방향 짓기에 깨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재산이 내 생명을 보호해 주는 하느님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은 욕심을 넘어서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제 탐욕에 대한 가르침을 심화하기 위해 예수님은 구체적인 비유를 드십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 자기 재산을 모을 새 곳간을 짓는 부유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탐욕을 지닌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사실 재산이 많아져 새 창고를 짓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왜 탐욕스러운가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많은 소출을 거두기 이전에 그는 이미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출을 얻은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이미 부유한 이 사람은 스스로 ‘많은 ’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탐욕의 어원 중 하나인 ‘더 많은’과 동일한 이 단어를 통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탐욕스런 자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재산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쓰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루카 12,16)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땅이 많이 생산했다.’가 됩니다. 첫째 문장에서 부자의 노력이 암시적으로 반영되었다면 둘째 문장은 땅의 생산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땅은 하느님의 것이며 땅의 소출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무엇,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 물론 이 개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유효하고 특별히 농부들은 이것을 더 잘 이해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노력 이전에 하느님의 선물인 땅의 소출을 이 부자는 “내가 수확한 것”(17절)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안중에 하느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이 전부입니다. 이제 이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아마 이 사람은 제1독서에서 코헬렛이 고백하는 그 허무를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며 초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1절)
묵상(Meditatio)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부의 축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만 ‘어떤 부를 소유하고 축적하는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부는 루카복음의 문맥에서 볼 때, 하느님의 선물인 재산을 가난한 자들,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33절) 그리고 오늘 말씀의 문맥에서 볼 때 모든 것인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그분과 일치하는 것(골로 3,10-11)이 참된 부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기도(Oratio)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 1,21)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나이가 젊은 사람의 차이는 시간을 느끼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1년 차이만 나도 엄청난 사이가 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2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똑같은 일 년인데, 네 살짜리 아이에게는 자기 인생의 4분의 1이지만 여든 살 어른에게는 자기 인생의 8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누구나 이렇게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리다고 영원히 어릴 수가 없으며, 또한 나이를 거꾸로 먹어 젊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늙은이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흉볼까봐 그렇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싶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실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만을 생각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심입니다. 이 시선 때문에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시선 때문에 더욱 더 내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탐욕이라는 세상의 기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려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이를 들어가는 것처럼,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누릴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이 하느님의 기준보다 늘 앞에 놓이는 것은 왜 일까요?
몇 해 전에 아주 힘든 일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도저히 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요.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아래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이러한 묵상을 할 수 있었지요.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 아래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그 기준만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 십자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비록 잃은 것도 많지만 아직 남은 것도 많다(알프레드 로드 테니슨).
인디언 계산법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되네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이 아닌, 정말로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기준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요?
백인들이 인디언 땅을 차지하고 미국식 교육을 주입할 때였다. 오지브와족 출신 아이가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들의 교육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교실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어느 날, 덧셈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고깔모자를 쓴 채 창문 너머로 도토리를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를 네 개 가졌는데, 친구에게 한 개를 주면 몇 개 남지?”
늘 묵묵부답이던 아이는 처음으로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줘야 해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갖는 거예요.”
돈이면 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상의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날카롭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의 부(재물)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부(영원한 생명)을 비교 대조시키면서 영원한 생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한국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부익부빈익빈 현상 앞에서 ‘엄청난 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연스럽게 눈이 쏠립니다. 그들의 능력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나 죽기살기로 노력했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부를 축척했을까요? 또 얼마나 아끼고 신경을 썼으면 그렇게 대단한 자금을 모으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해도 남을 부를 일부분이나마 사회로 환원한다거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내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나눔도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시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보니 오로지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아까운 것들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한 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때, 평생 벌 줄만 알았지 쓸 줄 몰랐던 자린고비로 기억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때 중요한 것은 ‘지상의 재물’이 아니라 ‘천상의 재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실 것은 지상에 남겨두고 온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 살 때 또 다른 하느님이었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눈 ‘천상의 재물’인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지상의 재물도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흘러가고, 천상에서는 빈털터리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니 인생 참 서글프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내게 넘치는 부분이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 넘치는 부분을 가난한 이웃과 기쁘게 나누는 그 행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스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탐욕스런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려는 사람입니다. 뭔가 쌓아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쌓아놓은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래서 탐욕스런 사람은 더 큰 것, 더 본질적인 것, 더 중요한 것,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부자들의 결정적으로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돈이면 다’라는 허황된 사고방식입니다. 돈이란 것, 돌고 도는 것,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것이고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대상이 돈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자들은 믿지 못할 돈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을 잊어버립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그 잘난 돈으로 인해 인생 망쳐버립니다.
재물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수도자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재물 대신 대치될 대상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의외로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일중심주의, 자기중심주의, 교만, 아집,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런 또 다른 대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집할 때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05년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란 영화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컴퓨터 그래픽의 힘으로 볼만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은 거리에서 우연히 발굴한 매력적인 여인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와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애드리안 브로디)’과 함께 영화 촬영을 위해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인 해골 섬을 찾아 떠납니다.
해골섬의 원주민들은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바치려고 그들 중 아름다운 앤을 잡아갑니다. 킹콩은 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앤은 도망치려 하고 그 때 거대한 공룡이 그녀를 잡으려 할 때 킹콩이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고 구해줍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감독 ‘덴햄’은 ‘킹콩’이 ‘앤’에게 마음을 빼앗긴 틈을 타 ‘킹콩’을 뉴욕으로 생포해옵니다. 가짜 앤을 만들어 놓고 쇼를 버리는 동안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킹콩’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야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뉴욕 도심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킹콩이 사랑하는 진짜 앤, 앤은 그 앞에 나타나고 군대들은 킹콩에게 빗발치는 공격을 퍼붓습니다. 킹콩은 공격을 피해 ‘앤’을 데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올라가고 결국 앤을 보호하다가 비행기들의 총탄을 맞고 서로의 사랑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떨어져 죽게 됩니다.
앤은 처음에 킹콩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었습니다. 킹콩은 마지막에 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관계엔 제물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기다려지던 날은 아무래도 제삿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가게도 없었고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았지만 제삿날만큼은 먹을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매일 돈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돈이 어디서 나셔서 그 많은 고기와 과일과 과자를 차려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킹콩에게 바쳐진 앤도 이런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킹콩은 그 제물을 받으며 그 제물보다도 자신에게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의 정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혹은 사람을 재물로 바쳤던 수많은 문화권 안에서, 또 우리나라 이무기 시리즈와 같은 것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어떤 동화에서도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떡을 호랑이에게 줍니다. 호랑이는 떡을 먹으면 엄마를 놓아주지만 결국 엄마가 바칠 것이 없을 때는 엄마를 해치게 됩니다.
저는 신학을 하며 바로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를 위해 주시는 ‘제물’이란 사실이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증명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제물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신을 성령을 통해 상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 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가보인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한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 옵니다. 이것이 서로를 위한 제물입니다. 제물은 관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제물이란 것은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게 되었을 때, 특별히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상대를 위해 주게 되었을 때 그 제물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당신 생명을 받습니다. 성체,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물로 봉헌을 하고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더러 부모의 유산을 자기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청해 달라고 합니다.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분명 형이 잘못하는데도 예수님은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이 많이 생기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 사라져가는 지푸라기에 불과하고 또 재물이 많아질수록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재물을 모을 줄 알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제물을 바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물이 없으면 어떤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는 사람은 하느님께나 이웃에게나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도 관계이고 십자가도 예수님께서 관계를 위해 당신을 봉헌한 것이며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미사에 나와 하느님의 제물인 성체를 받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당신의 사랑을 적게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쳐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만큼 바쳐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는 오고가는 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삼위일체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라는 관계를 위한 제물들입니다. 부정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유일한 가치인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그리고 이웃들 앞에서 항상 부유한 사람이어야겠습니다.
명절의 의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천상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명절을 맞이한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혜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명절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만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느님께 나는 언제나 최고의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간, 탈렌트, 지식, 재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이 배어있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그 바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를 생각하며 세상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잘 써야 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이 맑고 밝게 보입니다. 더 큰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두번째는 조상님들을 만납니다. 조상들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합니다.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분들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만나고 본받게 됩니다. 혹시라도 상처받고 힘든 것이 있었다면 용서를 베풀어 자유를 허락해 드리고 부족했던 모든 것에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기억하고 상기하며 어떻게든 갚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나라에 갈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는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자녀의 출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애를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형, 누나, 언니, 삼촌 이라는 말도 머지않아 없어질 처지입니다. 자녀의 출산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이 더욱 확장되어야 합니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삶은 바로 저 출산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행함으로써 형제자매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후황금주북두, 불여생전일배주”라는 말이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술과 안주를 북두칠성까지 쌓아놓는다 해도, 살아생전의 한 잔 술만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살아계신 부모, 웃어른, 친척들에게도 도리를 다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 부모와 친척, 이웃과의 만남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보다 더 친밀한 사랑의 관계형성을 위해 정성을 쏟는 기쁨의 명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명절, 소통과 공감이 함께하는 명절이 되기 바랍니다. 절대, 상처를 주는‘멍절’이 되지 않기를! 사랑합니다.
“정채봉” 시인은 만남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이루고 있습니까? 손수건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며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하겠습니다.
노사연씨의 만남도 있습니다. 노래 한 번 할까요?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다”(제134조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명절을 통한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방법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가족 서로 간에 성숙한 사랑이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나눔으로 관계의 빈곤을 넘어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교구청에 장례미사가 있어 갔다가 오산성당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서울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았습니다. 어떤 보험회사의 어여쁜 아가씨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보험은 관심 없다고 말하고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5천 원짜리 상품권이 당첨되었으니 꼭 이메일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보험 상품 한 가지만 설명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들어보시고 결정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많은 보험을 들어놓아 더 이상 보험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달에 3만 5천원을 내면 다른 보험이 들어있어도 상관없이 모든 질병의 모든 병원비가 지원되고 나중에 원금도 되돌려주고 사망하게 되면 2억 5천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만 부으면 평생 혜택을 볼 수 있고, 특별히 이미 보험을 가입한 사람들도 다른 보험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돈이 지급되기 때문에 보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드는 아주 좋은 상품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워낙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어서 제가 사제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 보험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의료비가 제가 속해 있는 곳에서 다 나온다고 설명을 해 주고 좋은 보험이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들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기에, 그냥 “저는 보험을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보험을 하나도 안 들고 사시는 분이 있느냐고 매우 신기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제가 천주교 신부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매우 끈질기게 개신교 전도사님들도 그 보험에 많이 가입했다고 하면서 성직자들도 미래에 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도사분들은 가족들이 있으니 보험이 필요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은 혼자 살기에 보험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쓸 데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부모님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제가 죽으면 2억 5천이 부모님께 가게 되는데도 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부모님까지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고 살기 때문에 부모님도 주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고, 그런 돈이 없어도 저희 부모님은 부족함 없이 잘 사시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이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 자매와의 대화를 마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가위 미사 때마다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게 됩니다. 부자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서 더 큰 장고에다 곡식과 재물을 모아놓으려고 하지만 사실 오늘이 그 부자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부자는 이미 남들보다 재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물을 모아두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불명확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에 참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것입니다. 지금 삼성 가에서 재산싸움을 하고 있는데 저는 그들도 가난해보입니다. 아직도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우리 책상 서랍을 열어봅시다. 혹은 책장이나 옷장을 열어봅시다.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봅시다. 아마 상당히 많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미래에도 사용될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 사람들이 매우 감사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혹시’라는 생각 하나 때문에 나도 사용하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들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두다가 자신도 사용하지 못하고 남들을 위해 좋은 일도 한 번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미래에 대해 그렇게 불안해하고 자꾸 더 가지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이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사람도 나의 미래를 완전히 책임져줄 수 없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빈곤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인 빈곤감의 근본적 원인은 관계의 빈곤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에서 오히려 재물을 사용하여 관계의 빈곤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관계의 빈곤은 상대를 위해 나의 소유를 나누어가질 때 해결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와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가 가진 것을 봉헌합니다. 모든 관계는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저는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바칠 수 있어야 더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요즘 하느님께 저의 시간 중 졸린 시간만을 바쳐서 성체조배 하면서도 자주 졸았던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같은 명절 때 자녀들이 부모에게 오면서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관계는 주는 것이 없이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일해서 번 돈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는 남편이 아내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나눔으로써 관계의 빈곤을 극복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밑천인 것입니다.
대구교구의 최영배 신부님 강의를 요즘 듣고 있습니다. 그 분은 처음에 길에서 냄새가 나서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는 행려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집에 모시고 와서 씻겨주고 사제관에서 함께 재워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행려자 숙식시설을 만들게 되었고, 지금은 아프리카에도 이런 시설을 계획 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처음 신학교를 들어가시려고 할 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늦게야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고혈압이 있어서 불합격 판정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에 자신이 공장에 나가야 해서 예비신학생 모임에 끝까지 함께 있을 수 없었는데 성소국장 신부님이 출석체크를 해 주고 자신은 빠져나와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합격되었으니 괴롭기도 하면서 자신을 그렇게까지 밀어준 성소국장 신부님께 미안하기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교구청에서 불합격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점심, 저녁도 안 먹고 교구청에서 추위에 떨며 밤 10시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소국장 신부님이 차를 몰고 돌아오실 때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단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신부님 그동안 너무 감사드렸습니다.”
다른 희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직 이 말씀만을 드리기 위해 12시간 정도를 떨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에 감동한 성소국장 신부님은 자신을 데리고 방으로 가서 먹을 것도 주고, 밤에 주교님을 찾아가 잠도 못 자게 하면서 2시간 동안이나 그 학생을 합격시켜 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결국 주교님으로부터 신체검사 재검을 받아오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허락을 받고 자신이 아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주교님께 드리고 합격을 시켜주어서 지금의 신부님이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소국장 신부님은 자신이 낙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2시간이나 자신을 기다렸다가 감사의 말을 해 주었던 그 청년이 도리어 고맙고 미안해서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고생을 하면서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람도 작은 감사의 마음을 주는 것에 대하 그렇게 감동하고 더 많은 복으로 갚아주려는 마음이 있다면 하물며 하느님이야 우리가 감사할 줄 알 때 어떠한 것으로 갚아주시겠습니까?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에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기를 원치 않아 망한 그 소작인들처럼, 혹은 오늘의 부자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만이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대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봉헌할 줄 아는 이에게는 복을 하염없이 내려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같이 풍요로운 한가위 날 감사할 줄 압시다. 감사해서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과 나눌 줄 압시다. 물질로 관계의 풍요로움을 창출합시다. 물질을 위해 관계의 빈곤을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악은 관계의 빈곤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위의 의미는 풍요한 재물을 이용해 관계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때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월, 화, 목, 금요일 묵상은 사제연수 등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없겠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고 풍요로운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