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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혁명, 내전으로 파괴된 경제를 다시 건설해 힘을 키워야한다는 것은 국민적 합의가 맞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이냐는 각자 생각이 달랐죠. 다양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경제를 어떻게하면 가능한 한 빨리 성장시킬 수 있을까? 농업과 공업은 균형을 맞춰야하나? 지금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인가? 좌익, 우익, 다수파들은 정치국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매번 싸웠으며 우익과 다수파가 좌익을 누른 뒤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트로츠키가 패배하고 당내의 합의로 자리 잡은 일국사회주의는 저번에도 언급하였듯이 농업과 공업의 관계를 규정하는 테제가 아니었습니다. 초고속 산업화를 일국에서 할 수도 있는 거고, '농민이라는 늙은 말을 타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일을' 일국에서 할 수도 있는 것이었죠. 당내에서는 이제 구체적인 경제 운용 방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시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당내의 우익들은 초고속 공업화가 농업을 파괴할 것을 심히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 중앙위에서는 농업과 공업의 균형을 파괴할 대규모의 중공업 투자 승인을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위의 이러한 움직임은 갑자기 턱 막히게 되는데 저번 편에서도 언급하였듯 곡물 수급 위기가 닥쳐온 것 때문이었죠. 스탈린은 아주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언급했습니다만 그걸 어느 정도로 언제까지 할지 구체적 정책이 취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안하다 곡물 모으느라 좀 늦었다.
당내의 계획을 담당하는 경제 기구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더 심했습니다. 쿠이븨셰프가 영도하는 베센하는 더더욱 야심찬 계획을 제출하고 있었고, 고스플란과 나르콤핀, 그리고 농업인민위원회(NarKomZem, Narodnyi Komissariat Zemledeliiav, 나르콤젬)는 베센하 계획 다 받아주다가는 나라 들어 엎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기구 간 갈등도 심했지만 이 때 무럭무럭 피어난 더 중요한 갈등은 기구 내의 갈등들이었죠. "소비에트식" 사고방식을 갖춘 당원들과, "부르주아 시대"의 교육을 받은 비당원 전문가들의 갈등 말입니다. 전선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갈등 상황의 존재는 명백했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볼셰비키 체제로의 전환이 새로운 규칙과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파괴하지 못할 요새는 없다"는 스탈린의 말을 끊임없이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를 담당하던 전문가들은 신중한 계산과 예상, 그리고 회의주의적인 계획평가를 하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죠.
우랄에서도 이러한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물론 우랄의 누구나 자신들의 지역이 경제발전을 선도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떻게? 방법론에 대한 시각차이가 대두 되기 시작하고 두 그룹 간의 갈등은 우랄 내에서도 커집니다. 그러나 우랄 주 공산당의 정치 엘리트들의 시각은 명백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우크라이나에 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역 내부의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는 야심찬 우랄이 되는 것에 환영하였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습니다. 왜냐면 생산량을 맞춰야하는 부담도 그들에게 따라왔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선 우랄의 경제에서 필요한 건 사실 대규모 신규 건설사업보다는 있는 산업의 구조조정 및 합리화였습니다. 그리고 몇몇은 이런 무리한 요구들에 반발합니다만, 몇몇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공개적으로 초고속 산업화 흐름에 반대하는 자들의 해임을 요청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중앙과 지방에서 아주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교육과 쌓아온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에서 생산 효율화를 획기적으로 달성하고 엄청난 양의 성장률을 달성한다 이런 건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먼저 해야할 것은 천천히, 과거의 산업 원칙들을 어느 정도 지키고 유지해가며 이것들을 개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야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와 대규모 투자, 즉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 그룹에서 야심가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저번 편에서 잠깐 출연한 스웨덴 유학파 출신 가셀블라트와 같은 사람들이 그 얼마 안 되는 예외였죠. 그는 "전문가 그룹의 다수는, 한 75% 정도는 두려워하고 있고 그저 가장 쉬운 길을 따르고 있다."라며 이들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크라피빈 같이 제국 시절에 높은 수준의 교육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은 야심차고 허황되어 보이는 계획에 종종 경멸을 표하기도 했죠. 갈등은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중앙과 주의 엘리트층이 희망하는 것과는 다르게 효율화, 합리화의 성과가 신통치 않자 이들은 책임자들을 자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자를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이 바이노프 같은 친구들을 살려준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였죠. 소련의 행정 체계에는 현재 사람이 너무 없었습니다. 그들을 자른다면 행정공백이 생겨서 모든 업무가 정지했겠죠. 그렇지만 갈등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소련인들의 미숙련 노동력들은 많은 사고, 이를테면 폭발이나 화재 등을 냈는데 이러한 것들이 주로 기존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시달리면 이들은 비슷한 직책을 다른 장소에서 맡곤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랄 주 당의 제1서기였던 쉬베르니크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도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쉬베르니크에게 맡기면 우랄이 우크라이나에 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쉬베르니크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죠. 쉬베르니크는 이러한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자주 비호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온건파였던 거죠. 이런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오블리스폴콤(주 집행위원회, Oblispolkom) 의장 로카츠코프와 페름 지역 공산당 릐딘 등이 기어올라봅니다. 중앙위에서 우랄의 계획 미달성이 좀 심한데 이거 이유가 뭐냐는 비판이 들어오니 이들은 갑자기 쉬베르니크에게 책임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주 공산당이 중앙위의 힘을 빌려 막는 데 성공하고 로카츠코프 등등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만듭니다. 일단은 쉬베르니크는 자리를 지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참견쟁이 릐코프에게는 별로 상황이 영 좋지 못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중앙에서는 그리고 사뭇 다른 분위기로 사건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늘 그렇듯이 예산 문제에서 계속 싸우던 나르콤핀, 베센하, 고스플란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부르주아 전문가들은 베센하의 야심찬 계획들에 계속 반대를 놓았습니다. 이런 우익기회주의적 책동에 스탈린 동지 마음이 조금 언짢으셨나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서기국이 움직이죠. 이런 경제 기관들에 구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영향력을 점차로 제한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런 거로 끝날 게 아니었죠. 스탈린은 1928년 초에 편지를 한 통 받게 됩니다. 아조프-흑해 크라이에서 올라온 편지였는데, 혁명 전에 활동하던 전문가들이 돈바스 석탄산업에서 사보타주를 저지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하게는 외국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에 봉사하여 소련 연료 산업을 교란시키려 했다는 것이었죠. 스탈린 동지께서는 이 편지를 즉각 정치국에서 공론화시킵니다. 이는 바로 합동국가정치보안부(OGPU, Obyedinyonnoye gosudarstvennoye politicheskoye upravleniye, 오게페우)로도 전해졌고, 중앙위와 중앙통제위원회(Tsentral'naya Kontrol'naya Komissiya, 당통제위원회의 전신, 중국공산당에서는 "당기율검사위원회"에 대응됨)의 최고위급 관료들인 몰로토프, 톰스키, 야로슬랍스키가 돈바스로 파견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샤흐티 재판" 혹은 "샤흐티 사건"입니다. 당시 정치국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 여전히 문서고는 잠긴 자물쇠를 풀고 있지 않습니다.
당통제위원회에서는 4월 초 샤흐티 사건에 대한 토의를 시작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사실상 중앙에서는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던 릐코프도 이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스탈린의 측근들도 이에 동의하며 경제부문의 실무 관리자들에 대한 반혁명적 요소를 엄중히 다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중앙에서 이런 대형 폭풍이 휘몰아치자 지방에서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겠죠? 스탈린은 역시 이번에도 아주 애매모호한 입장을 발표합니다. 경제 관리자들에 대한 감시와 반혁명 분자들을 솎아내는 것도 중요하고, 그들의 생활환경이나 작업조건을 향상시키는 것고 중요하다고 발표하지요. 그러나 지역 지도자들의 눈에는 사실상 앞에 문장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간 눈엣가시 같았던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박살낼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부릅니다. 우크라이나, 우랄 할 것 없이 샤흐티 사건의 후폭풍으로 "야심찬 계획"을 비꼬고 깔보고 수행하지 않으려 했던 구체제의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비판에 굉장히 취약해졌습니다. 하나라도 꼬투리 잡히면 반혁명분자로 몰릴 수 있었습니다.
쉬베르니크가 족친 로카츠코프를 대신해 새로이 오블리스폴콤 의장이 된 사람은 카바코프였습니다. 카바코프는 열정적으로 지역의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갈구기 시작하는데(...) 가장 첫번째 타겟은 바로 지리학자들, 지질학자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이들이 지역지를 펴낼 때 추정해서 내놓는 석탄과 철의 매장량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죠. 그는 중앙통제위원회에 이들을 걸어넣는데 이들이 지역의 금과 백금, 그리고 석탄과 철광석 매장량을 축소발표했다는 게 사유였습니다. 우랄의 지질학자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뜬금없이 놀라게 되지만 곧 우랄 당 관료들의 말을 듣고 사태를 파악합니다. 그들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철광석과 석탄 매장지를 찾으라는 요구를 들었습니다. 왜냐면 지역의 석탄을 찾아야 투자를 받을만한 생산성 합리화를 이뤄낼 수 있는데, 계속 답보상태였거든요. 당시 우랄 지질학자 중 최고 원로였던 볼코프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요구이고 뭔가를 원한다면 한 번 돈하고 시간만 많이 줘봐라. 조사를 해줄 수는 있다 라고 말하지만 카바코프는 이미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카바코프는 우랄국립지질조사부(UGGRU, Ural'skoe gosudarstvennoe geologichesko-razvedivatel'noe upravlenie)의 구성원들을 당원으로 채워놓고, 그들을 자극해 상관들을 비판하도록 만듭니다. 새로운 구성원들은 무라셰프와 같이 과장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할 수 없다는 상관을 몰아내고, 끝내는 기소까지 해버립니다. 물론 이건 너무 적나라하고 극악한 사례긴 하지만 우랄 전 지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를테면 각 공장 단위에서 효율 합리화 달성이 단기간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실무진들도 모조리 모종의 응징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우랄 산업의 잠재력을 깎아먹는 패배주의자들로 묘사되곤 했죠. 당연히 이는 우랄에서만 하던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이 다 이 짓거리를 하고 있었죠.
지방에서 시작된 샤흐티 사건은 중앙으로 돌아와 다시 지방으로 퍼져나갔지만, 그 물결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샤흐티 사건은 이전에 서기국에서 실시한 조직개편과 맞물려 부하린, 릐코프 등의 우익반대파와 궁합이 잘 맞던 고스플란 및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의 영향력을 확실히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눈치볼 것 없이 중공업화 계획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국 내부, 나르콤핀, 나르콤젬, 고스플란의 몇몇 인사들은 이 움직임에 반대를 놓습니다만은 지방과 중앙 양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물러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치국원 부하린과 고스플란 의장 크리지자놉스키는 지금 당신들이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만 베센하에서는 "천박한 현실주의 ㅉㅉ"하면서 역으로 받아칩니다. 반면 지역에서는 통제 수치에 필사적이었습니다. 28-29년의 통제 수치와 달성여부는 5개년 계획에 제출되어 본격적인 투자를 고려할 가장 기본적인 재료가 될 것이었으니까요. 중앙과 지역에서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1928년 10월, 아마도 스탈린의 계획으로 추정되는 일인데, 프라브다에서 본격적으로 "우익 일탈"에 대한 경고를 싣기 시작합니다. 프라브다가 갖는 중요성이란 뭐... 릐코프는 이러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11월 중앙위 회기를 여는 그의 연설에서 굉장히 논조의 수위를 낮춥니다. 그는 우익 일탈이 당에 있음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맹이까지 그가 다 바꾼 건 아니었고, 폭발적 경제성장보다는 지금의 템포를 유지하면서 착실히 가자는 이야기를 또 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에서 이데올로기적 논쟁은 필요하며 그것이 출당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분위기를 읽은 것은 좋았으나 그 분위기의 세기도 파악해야 했죠. 극딜 당합니다.
하여튼 모스크바, 정확히는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이 모든 진행되는 갈등을 풀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행위자들로 하여금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장을 만들어준 것 뿐이죠. 그리고 역시 정치라는 것은 누가 하든 스탈린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우랄에서도 드디어 사태가 좀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28년 가을 동안 지도부의 의견은 확고히 통일 되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을 밀어붙여야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카바코프가 있었습니다. 주바레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쉬베르니크의 온건 노선을 다시금 비판합니다. 로카츠코프는 실패했지만 카바코프는 성공했습니다. 주 공산당의 투표 결과 등등이 정치국으로 전달되어 쉬베르니크는 결국 퇴임하게 되고 그 자리를 카바코프가 차지하게 됩니다. 카바코프는 제1서기로, 주바레프는 제2서기로 임명되고 10일 뒤 우랄에서는 새로운 계획을 제출하는데 이는 투자, 건설, 생산 모든 걸 두 배로 불려버린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 있습니다. 늦은시간에도 집필하시다니 고생 많으시네요...
피시방 알바하면서 짬짬이 하는 공부라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http://durl.me/8w4nvh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PLAY
꾸르잼
꿀꿀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호
@클박클박 호호오
어휴 발암;;
스탈린 빼고는 모두가 인민의 적!
아휴....부처님 손바닥에서 노는 어린아해들....
스탈린님의 드넓은 손바닥
??!
!??
스탈린의 해맑은 미소
자애로우시다
사람이 다급해지니 현실을 부정하는걸 떠나 그 결과를 낸 사람들을 족치다니 ㄷㄷ;;
2차대전까지 버틴게 신기하네요
저러니 2차대전에서 버틴 것 아니겠습니까
합동국가정치보안부OGPU 는 KGB의 전신 아닌가요?
OGPU -> NKVD -> KGB
근데 이 시점에서 저런 신중론을 몰아냈다는건 급진론이 견적이 나온다고 판단해서일텐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나요? 즉, 이 시점에서 급진적 산업화에 대한 평가 같은 부분 말이죠.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순전히 정치적 논쟁의 맥락에서만의 이야기인지라...
뻥..어어어튀기!
성공적이었다던 1차 경제 개발이 저 정도였으니, 소련이 왜 망했는지도 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