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초리 40년
김홍도의 풍속화‘서당’은 위쪽에 위치한 훈장을 중심으로 아홉 명의 아이들이 원형 구도로 빙글 둘러앉았다. 한 아이가 훈장에게 꾸지람을 들었는지 아니면 종아리를 맞았는지 훈장을 바라보지 못하고 뒤돌아 대님을 다시 묶으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 아이를 쳐다보며 키득거리는 다른 아이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훈장도 지긋이 웃음을 머금고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앞서 언급한 그림에서는 각각 인물들의 감정이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그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과 분위기를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대표하는 김홍도가 남긴 그림은 200여 점이 전한다. 강세황의 문하생인 그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 어진과 왕세자 초상화를 그렸고 청풍 현감으로도 나갔다. 자란 곳이 경기 안산이라 그의 호를 딴 행정구역 단원구가 그곳이다.
뜬금없이 김홍도 서당 얘기를 꺼냄은 그림 속에 나온 회초리를 언급하고 싶어서다. 말 그대로 교편(敎鞭)이다. 그림을 확대해 볼 수 없어 자세하게 구분되지 않으나 그 재질이 싸리이거나 대나무 가지인 듯하다. 예전에 싸리나 대나무로는 바구니나 삼태기 등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던 재료이다. 무게는 가벼워도 종아리나 손바닥에 맞으면 따끔하게 아파 회초리로 안성맞춤이었다.
교직을 다르게 표현에서 교편생활이라 한다. 여기서 편(鞭)이 바로 그 회초리다. 회초리는 흑판의 판서 내용을 짚어주는 지시봉 기능도 함께 했다. 내가 교직 입문 당시는 교편생활이나 회초리라는 말을 흔히 썼는데 세월 따라 용어도 사라진 느낌이다. 학교에서도 체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은 가정에서 자녀 양육에도 부모의 체벌은 법으로 엄격히 규제할 만큼 시대가 달라졌다.
나는 동기생들보다 서너 살 더한 늦깎이로 교육대학을 마쳐 40년 전 밀양 얼음골 아래 초등학교가 첫 부임지였다. 교직 말년은 거제섬으로 건너가 조선소 유입 인구로 학생 수가 증가한 고등학교에서 끝냈다. 내가 다녔던 교육대학은 2년제로 그해 400명 입학 동기 가운데 남학생은 36명뿐이었다. 그 가운데 8명이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1박 2일로 모이는데 그 이름이 ‘회초리회’다.
친구들이 자란 고향 본가를 순회하며 모임을 시작해 결혼 이후 처자식을 거느리고 산골 학교 운동장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했다. 온천장이나 주말농장으로 가꾸는 친구의 산방에서도 보냈다. 8명 가운데 통영의 한 친구가 조기 퇴직해 자영업을 하고 나머지는 근년에 교장 2명이 명예퇴직했다. 정년까지 이르기는 내가 유일한데 동기들과 달리 중등으로 옮겨 평교사로 마쳤다.
아직 현직인 회원이 절반인데 둘은 교장이고 교감과 교사가 각 한 명이다. 이들도 정년을 맞을 날이 멀지 않다. 근년 들어 대학 동기들의 회초리 모임은 코로나 여파로 몇 차례 걸렀다. 그러다가 지난해 여름에 함양에서 얼굴을 봤다. 죽염으로 알려진 인산가 호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상림 숲을 거닐고 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겨울 모임 때 뵙자면서 각자 생활권으로 흩어졌다.
울산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한 동기는 아내 병간호를 위해 정년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연전에 명예퇴직했다. 교직에 몸담은 그의 아내는 병으로 교단에서 먼저 내려와 병실과 요양 생활로 증세가 일시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모임은 나오지 못했더랬다. 생활권 울산에서 다소 먼 경기도 가평 숲속에서 치병 생활을 보낸다는데 이번 겨울 모임에도 참석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회초리회 이번 겨울 모임은 새해 첫 주말을 앞두고 쪽빛 바다가 드러난 통영 펜션에서 갖는다는 통보가 왔다. 참석이 여의치 못하다는 연락이 온 북한강 청평 호반에서 요양 생활하는 동기 내외 근황이 궁금하다. 나도 지난여름에 이어 아내가 동행할 여건이 못 되어 다른 회원들에게 둘러댈 명분이 궁색해졌다.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음은 현실로 받아들인다. 23.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