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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의 후예 주영숙
한국현대문학작가 2018년 10월 15일 발행. 320~339쪽
출혈이 멈추질 않았다. 수혈이 불가피했지만, 나의 혈액형은 너무도 희귀한 RH-AB형인 거였다. 병원에는 RH-AB의 혈액이 한 방울도 없었고, 그가 나서서 인터넷을 뒤지는 등 사방팔방 구조요청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이 바보야. 왜 미리 말하질 않았니?”
“알았으면 오빠가 그 피를 구할 수 있었겠어? 애 쓰지 마. 내 운명이야.”
내가 상끗 웃거나 말거나 그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빠, 우리아기 좀 보여줘. 딸이지?”
간호사가 얼른 나가서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그녀는 눈물 글썽글썽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어주는 거였고, 오빠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어주고 있었다.
“공주님이다. 소원을 푼 거야. 딸을 낳고 싶었지? 그치?”
“아들이어도 상관없었어.”
아기의 손가락을 좍 펴고 내 손가락을 쥐어주니 작고 앙증스러운 그 손에서 제법 힘이 느껴졌다. 나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손가락이 길쭉길쭉한 게 예술가 쪽인가 봐.”
‘너처럼?’
“응, 나보다 훨씬 뛰어난······.”
순간 그가 흠칫 놀라는 거였다.
“너, 누구니?······”
“······?”
“옛날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야. 너, 누구냐고. 어떻게 남의 속엣 말을 알아들어?”
“하아, 들켰구나. 오빠, 난 아틀란티스의 후예야. 혈액형 보고도 몰라?”
“장난치지 말고······ 너, 혹시 전생을 아는 능력?”
‘난 암사마귀의 운명을 타고 난 여자······.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게 나아요.······’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불행하게도 그 이상은 몰라. 정말이야. 난 어릴 때부터 남의 마음속을 잘 보곤, 아니 잘 듣곤 했었지만 그런 능력이 성가셨어. 하지만 내 소설에선 곧잘 써먹어. 그 소설 있잖아? <왕의 남자>. 최혜수가 지귀를 만났는데, 지귀와 서로 마음속 말을 주고받는 대목 말이야. 오빠, 까마득한 마고시대엔 말이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대. 그런데 그 능력이 차츰 퇴화되었다고 하거든. ······아유, 이런 말 그만 하자. 시간이 없어.······ 부탁이 있어.”
나는 그의 눈 깊숙한 곳에 도사린 마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리 아기, 오빠 호적에 넣어줄 수 있지? 그치?”
‘유언이니? 넌 죽지 않아. 그런 유언은 할 필요 없어. 멈출 거야. 지혈될 거라고.’
“아냐······. 이대로 하얗게 백지 한 장으로 남으면, 나는 그 백지 위에 시를 적을 거야.”
“영원히 남을 걸작 시?”
“아니, 오빠만 알아볼 그런 시······ 우리 아기······ 오빠 딸로 해줄 거지?”
‘넌 안 죽어!’
하더니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 딸을 내가 그냥 버려둘 것 같아? 염려 마!”
“······”
“안 돼! 넌 죽을 수 없어. 내 허락 없인 못 죽어! 죽지 마! 명령이야!”
‘히힛! 내 허락 없인 못 죽어! 죽지 마! 명령이야······ 이 대목, 어디서 봤더라?’
또다시 흐느끼는 그를, 나는 잔잔한 웃음으로 맞받았다.
“죽는다는 건 끝이 아니야.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그런 이별 ······십년 뒤에 또 만나면 되잖아?”
“그럴까? 만나기로 약속할까?”
우리는 손가락을 걸었다.
“그렇지만 굉장히 불편할 걸? 저승사람하고 이승사람하곤 서로 보이지도 않을 거고 말도 안 통할 텐데? ······전화는 어떻게 하지? 오빠 보고 싶음 어떻게 할까? 아, 오빠! 어떻게 만나지?”
나는 시간에게 쫓기고 있었다.
점점 더 탈색되는 얼굴로 억지만 쓰고 있는 나를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그것도 약속하자. 네가 폰으로 신호를 보내기로. 그래, 카톡 보내줘.”
그가 쥐어준 핸드폰을 왼손으로 힘껏 쥔 채 나는 핏기 없는 오른손가락으로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누가 귓밥을 슬쩍 잡아당기는 느낌이거든 바로 난줄 아세요······.”
“······”
“오빠, 또 아프면 안 돼! 그리고 난 결코 얼음이 아니야. 내 속엔 얼음이 없어. 그래서 죽는 거야. 오빠하고 떨어져 있으면 분명 식어야 하는데, 그게 안 돼.”
“그래, 넌 불꽃이다. 지귀처럼······.”
“맞아. 지귀처럼······ 오빠, 나······ 이쁘······”
오빠가 기어이 내 입술을 막았다. 언제나 향기롭고 달착지근한 오빠의 혀를 나는 생명수인양 핥아먹고 있었다.
기나긴 이별식 막바지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또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 단······, 하나의······ 사랑······이었어요.”
◇◇◇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춤추고 있는 여인들 안에서 술래가 되어있던 나는 불현 듯 그들을 헤집고 원을 빠져나왔다. 갈 곳이 정해진 것 마냥 나는 부지런히 해변을 걷다가, 자꾸만 발에 차이는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춤추던 여인들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는지 저 멀리 은비늘 무수한 몸을 요리조리 뒤채며 바다가 빛살 같은 갈채를 보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거북바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웬 남자가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그는 거북바위에 퍼질러 앉은 채로 돌을 쪼아 갈닦이를 하면서 무슨 주문을 외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신성한 바람이 내 몸을 툭툭 치며 산들산들 말을 걸어오는데, 올라오면서 쌓인 피로감이 저만치 달아나며 꼬리를 감추고 있다.
‘언젠가 그대가 다녀간 뒤로는 날마다 기다렸는데······.’
‘나를 기다렸다구요? 도대체 뉘신가요?’
‘나? 나 말이오?······ 아아, 나를 모르시다니······’
나는 끌리듯이 다가가서 남자를 살폈다. 그는 연신 돌을 쪼며 갈며 계속 주문처럼 말을 하고 있었는데, 움쩍거릴 때마다 왼쪽 손목에서 금팔찌 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반짝이는 거였다.
“거기서 뭘 하세요?”
나의 목소리가 온 계곡을 메아리 되어 물결치자 그제야 남자가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보는데, 순간, 금팔찌가 찌르는 듯 빛을 뿜어대더니 그의 온몸이 활활 타올랐다.
“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 새 불꽃은 금방 꺼졌다. 사내도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내 소설 그대로인가······. 그러면 저 팔찌는 선덕여왕께서 내리신 팔찌 아닌가.······ 앗! 지귀?’
‘지귀······.’
그의 눈은 아직도 불타는 중이었고, 그 시선이 내 몸에 가득 번져서 순간적인 신열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제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아. 누구지?’
어디서 본 듯한 그 남자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별자리지요. 하늘로 가는 문이랍니다.’
그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거였는데, 나는 금방 알아들었다.
남자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라 나를 삼킬 것만 같았다.
‘이 금팔찌는 사실 세 개였는데, 하나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또 하나는 발해를 세우게 된 대조영이 지니게 되지요.’
‘앗! 역시 내 소설을 읽으신······? 아, 아니군요.’
‘하핫! 진정한 소설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소? 그대가 <영웅, 스케치하다>라는 소설을 쓰면서 연개소문의 첫 여자 하란을 어디론가 사라지도록 설정하지 않았소? 그때 이미 대조영에게 갈 금팔찌가 정해진 것이었지요.’
‘그렇죠. 금팔찌 세 개의 원 소유자는 연개소문의 스승 을지문덕이었죠. 그가 눈을 감기 직전, 연개소문에게 금팔찌를 남기면서 한 개는 신라의 여왕, 한 개는 바로 하란에게 주었다고 말한 것이었죠.’
‘그렇소. 신라의 여왕인 그대 선덕은 그 팔찌를 내게 주시었고, 남몰래 연개소문의 딸을 낳았던 하란은 자기 외손인 대조영에게 그 팔찌를 준 것이었소.’
‘아아, 그 금팔찌를 합천박물관에서 보았었지요.’
나는 어느새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그에게 안겼다. 안긴 채 몸을 돌려 그의 눈 주변을 어루만졌다. 수정처럼 투명한 눈물이 그의 눈에서 뚝 뚝 떨어져 내 손등에 구르는 것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와락 그의 목을 껴안고는 그의 눈물을 핥아 삼키다가 이윽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었다. 참으로 묘한 말을,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한 말을, 그는 나를 안은 채로 후후 귀밑머리를 불며 속삭이고 있었다. 입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는 거였다.
‘지금 이곳이 신라이거나 다라가야이거나 또 백제이거나, 아무튼 첨성대를 만들었는데도 공을 치하받기는커녕 두 눈이 지져지는 형벌을 받고서 나는······ 영묘사에서 불붙었던 그때처럼 우시산국, 지금의 울산 앞바다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지금의 이곳 남해인 낙노국까지 헤엄쳐 와서는 거북바위에 가을하늘 별자리 신화를 새겼던 거라오.’
그가 빙긋이 웃는데, 입술에 진달래빛깔이 감돌았다.
문득 두고두고 잊지못할 오빠의 얼굴과 그의 말이 떠올랐다.
‘망국의 비분으로 진나라를 탈출하는 서불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 스스로의 흔적을 각석할 까닭이 없질 않았겠어?’
“그 사람은 기억하시면서?”
마치 내 기억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그가 빙그레 웃으며 입으로 말했다.
‘앗! 오빠······.’
나는 너무 놀라서 마구 눈을 비볐다. 그러고 보니 지중해빛깔 눈동자와 주변의 화상자국만 아니면 흡사 그의 얼굴이 아닌가. 유별스레 키가 커서 ‘싱겁이’라는 별명까지 지녔던 오빠.
‘맞아요. 당신은 그 사람의 전생이시군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그대의 전생이 선덕여왕이었듯이.’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알천장군이 불로 지졌다는 그 눈으로, 불을 이겼기에 더더욱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웃기게도 이것이 진시황 시대 서불이란 사람이 다녀가면서 새긴 서불과차라고 소문 난 모양입디다만, 21세기의 2003년 시월에 개관된 제주도 서복전시관 광장에도, 2010년 3월에는 정방폭포 석벽에도, 남해 양아리 거북바위에 새긴 내 하늘문 자리를 베껴다가 판각한 모양이더라만······ 나는 분명히 여기에 하늘 천(天)까지 새겼다오.’
오빠가 내게 쥐어주었던 스마트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나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면서 정말 있었을법한 기억을 향하여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아, 다라가야에 채널을 맞추었구려. 그렇지. 그 역시 그대의 전생이니까······. 헌데, 그대는 <문학으로 만나는 한국역사> 담당교수이질 않소?’
그가 팔짱을 끼고는 빙긋이 웃더니 뜬금없는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
642년······. 당나라 태종 16년, 신라 선덕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 그리고 고구려로선 영류왕 25년이면서 보장왕 원년······. 한 동안 잠잠했던 백제가 신라의 서쪽 변경을 폭풍처럼 유린했었소. 7월에 시작된 이 대규모 공격으로 서쪽 변경의 40여 성들이 함락, 8월에는 고구려까지 남하해서는 백제를 도와 당항성(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을 위협했었지요. 헌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백제의 장군 윤충이 이끄는 1만의 병력이 신라 서쪽 변경의 핵심 거점인 대야성(현 경상남도 합천군 남부)을 포위했던 겁니다. 그 옛날, 대가야에 속했던 대야성이 신라 땅이 되어버린 시점은 신라 진흥왕 시기였는데, 이후 백제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야성은 옛 가야지역을 총괄하는 거점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죠. 아무튼 642년 7월에 백제가 함락시킨 40여 성들은 대야성의 관할 아래에 있던 가야지역 대부분을 포함한 것이었소.
도대체 역사 이야기란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지점에서 끊어야 할지 늘 곤혹스럽지만, 어쨌든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 신라의 대야성이 함락된 바로 그해 시월 고구려에서 일어났던 일부터 이야기해보겠소.
그날, 연개소문의 집 넓은 전각은 쓸고 닦고 다듬어 손님 맞을 준비를 깔끔하게 마쳤지요. 술과 더불어 상다리가 휘어지게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관기들까지 죄 동원되었었다오. 고구려 시대에 ‘관기’라니, 좀 언어도단인감? 화선이니 유녀니, 그런 명칭을 쓰긴 했는데······. 그냥 말하기 편하게 관기라 하고 넘어갑시다. 아무튼 장내는 이른바 범국가적인 잔치 분위기가 연출되었지요. 금상첨화로 영류태왕까지 납시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소. 영류태왕은 중앙의 높다란 자리에 좌정하였고, 그 좌우엔 여러 문무대신과 각부 총관을 위시한 벼슬아치들이 차례차례 줄 지어 자리에 앉는 등 장내가 정돈되자, 국왕이 낮은 기침을 하는 것을 신호로 ‘짜자잔~’ 대 연회의 막이 올랐소. 바로 그때, 영류태왕 옆에 시립하고 있던 어림군(임금의 신변보호를 담당한 군대) 총관 소익환이 왕에게 속닥거립디다.
“성상마마, 대취시킨 연후에 처치함이 상책일 것으로 아룁니다.”
“오호라, 맨 정신으로 있을 땐 잡을 확률이 희박한 호랑이다, 그 말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더 낮은 가락의 옥음을 굴리시는 영류태왕.
“만약 경의 말대로 되어 처치해버리면, 그러면, 요동 출병은 어찌하는가?”
“성상마마, 그리 되면 소신이 출병하여 반군을 평정하겠사옵니다.”
‘에잉······. 요동 출병 그거······. 안하고 말지!’
태왕마마는 엄청 같잖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고서 짐짓 “흐음, 경의 계책이 절묘하도다. 자, 경도 한 잔 드시오!” 하시며 앞에 놓인 잔을 소익환에게 내미시는 거였소. 소익환 역시 왕이야 ‘저자만 처치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갈 것만 같소!’ 라는 속엣 말을 곱씹거나 말거나 낯간지러운 간사를 떨더군요.
“성상마마! 망극하옵니다!”
소익환이 관기가 가려주는 부채 뒤에서 어주를 받아 벌떡벌떡 황감하게 들이켜는 동안, 태왕께옵서는 시치미를 딱 떼시고서 아주 근엄하게 맞은편을 바라보고 계시었소. 바로 연개소문이었지요.
그런데, 당시 연개소문의 차림새를 그려보자면 이러하오. 언제 어느 싸움터에서 눈알이 빠지기라도 했는지 왼쪽 눈은 두툼한 안대로 덮였고, 또 오른 팔은 반도막 났는지 마비되었는지 붕대를 아예 대각선으로 친친 감고 불편하게 앉아있는 모양새······. 태왕이 보시기에 아주 가관 아니었을까 싶소. 아무리 예쁘게 보자 해도 끔찍하고 징그러운 한편으로 측은지심까지 우러났겠지요. ‘저 꼴에 요동출병이라? 아주 기세등등하다 싶었더니 괜히 겁먹었구먼. 에이그······. 제아무리 뛰고 솟구치면 무슨 소용? 제 무덤을 파겠다고? 풍전등화의 몰골이로고······.’ 태왕은 속으로 혀를 찼소만, 그러나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소? 아마도 그런 심정으로 연개소문에게도 술잔을 내렸을 거요.
“경도 이 술잔을 받으라.”
“성상마마, 황공하옵니다.”
일단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연개소문은 관기가 받쳐주는 어주를 한 손으로 받았지요. 팔이 한쪽 밖에 없으니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으나 짐짓 시건방진 태도 아니겠소······. 어쨌거나 연개소문이 단번에 술잔을 비우자, 태왕께서는 사뭇 측은한 눈길로 마주보는 거였소. 연개소문이 그 눈길을 넙죽 받았느냐고? 아이고, 그 눈길 스리슬쩍 외면하더군요. 그 판에 뜬금없이 소익환도 덩달아 연개소문에게 잔을 권하는데, 눈치 빠른 옆의 관기가 대뜸 주전자를 들어 찰찰 넘치게 잔을 채워서는 연개소문에게 내밉디다.
“총관대감, 감사하오이다.”
또 다시 정중하게 술잔을 받아 마신 연개소문이 소익환에게 술잔을 돌렸소. 그런데, 하아, 그런데 말이오. 연개소문을 대취하게 만들어 쉽사리 잡으려던 소익환이 깜박깜박 대의명분을 까먹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술 도가니로 빠져드는 꼬락서니라니······. 몇 순배나 돌았는지 알 수 없는 술잔과 함께 날도 차차 기울어갈 즈음, 상 위엔 아직도 술과 안주들이 즐비하게 남아있었으나 조신들은 저마다 취하여 횡설수설 엉망진창이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 휘딱 장막을 걷고 들어서는 한 여인이 있었다오. 흡사 그대의 젊은 날처럼 한창 풋풋한 꽃송이 표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홍화꽃빛 저고리와 반물빛 치마 안에서 언뜻 언뜻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데,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엇갈리는 엉덩이의 물결이 잘록한 허리 곡선과 더불어 팽그르르 도는 것이 참, 형언키 어렵구려. 그도 그럴 것이, 별안간 영류태왕을 위시한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술에서 깨어나 푸르르 머리들을 흔드는데······. 아마도 모두들 여우한테 홀린 기분이었을 거요. 내가 그대에게 홀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겠으나······ 파리가 들락거릴 정도로 입을 아 벌리고는 다물 줄을 모르다니, 참 가관이었소. 장내는 침 넘어가는 소리도 없이 투명한 고요가 살랑살랑 꼬리치며 흐르는데······ 이리 삐딱, 저리 삐딱,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온 소 총관. 문득 한 군관을 부르더니 뭐라 뭐라고 속닥하다 말고 입을 딱 벌리더라고요. 그렇게 한동안 벌린 채로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끔벅! 그러고서야 다시 입을 열어 한탄하지 뭡니까.
“그럴 수가? 저 계집이 바로?”
총관이 상당히 놀란 기색을 하자 군관은 사뭇 우쭐거리며 나머지 정보를 나불대기 시작하는데,
“원래 여 검객이었다고 하던뎁쇼. ······어디 싸움터에서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요. 아참! 전에 돌궐에 갔을 때에 만났다던가, 그런 소문이 있는뎁쇼. 와우······. 칼춤이 고수 실력이라 하옵니다. 이 주연에서 칼춤을 출 것이라고 하던뎁쇼?”
“무어야? 칼춤이라고? 검무······. 자객이란 말인가?”
그 순간, 찝찝한 예감이 총관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게 선연하게 보입디다. 아니나 다를까, 소익환이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하나 불순분자의 싹을 점찍기 시작하는데, 그의 취한 눈에는 저놈이 그놈 같았고, 그놈이 또 이놈 같아서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던 모양,
‘아이고, 고민하지 말자. 내가 고르고 골라 우리 편만 데리고 왔는데 우리 편이 아닐 수는 없지. 아암, 아니고말고.’
태왕은 관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기도 모르게 체신머리를 놓치며 무아지경에서 허우적거리는 참이었고, 다른 신하들도 끼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 연개소문 역시 술에 걸신이라도 들린 듯 쉴 새 없이 술잔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 뭐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판단한 소익환.
‘허허 참, 부질없는 걱정, 쓸데없이 뭔 걱정······.’
소 총관이 거의 자기최면을 걸다시피 하며 마음을 놓는데,
‘어디까지나, 내 쪽이 갑이야. 나는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은밀히 측근을 불렀었거든. 정예병 수백 명으로 이 연회장을 포위하라고 지시를 해둔 거라, 이 말씀이야.’
그랬죠. 소익환은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여 연개소문 일파를 남김없이 주살할 계획이었고, 영류태왕으로부터는 이미 윤허를 받아놓은 터이기도 했죠.
‘흐흐흐, 거사를 진행할 꼬투리만 잡혀라!’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떠들썩하던 장내가 별안간 조용해졌지 뭡니까. 여 검객이라던가 ······바로 그대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그 여자가 양손에 번쩍번쩍한 장검 두 자루를 나눠쥐고는 날렵한 걸음걸이로 다다다, 다다다 다다~ 연회장 한 가운데로 달려들고 있었거든요. 초승달처럼 예리하고 긴 칼이 휘딱휘딱 날을 세우며 사람 간담을 오그라뜨리는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여인의 칼춤을 주시하던 소 총관이 얼른 영류태왕의 뒤로 다가가더니 무슨 귓속말을 했고, 태왕의 입술에 음흉한 미소가 흘렀지요. 무슨 말이냐고요? 그야 뭐, ‘저 여자가 바로 그녀랍니다.’ 그런 식의 말이었다고 해두죠. 그 정체 미리 토설한다면 별 재미가 없을 테니까. 아무튼, 태왕이야 자기 가신하고 속닥거리거나 말거나, 여인은 장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검무에 열중하는데,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북, 장구, 해금, 피리, 날라리 한 쌍의 음률에 맞추어 칼춤을 추고 있는데, 눈 깜짝할 새 음률이 그녀의 칼춤을 따라잡아 요리조리 허공을 조물조물 주름잡았다 폈다 노닐다가, 한 순간 음률을 저 혼자 노닐게 해놓고, 여인은 사뿐사뿐 발을 떼어놓으며 화르르 옷자락을 날리며 온 몸 비비꼬다가는 파르르 뛰어오르는 순간순간 쟁강 쟁강 칼을 부딪치다가, 두 개의 칼로 현란한 돌개바람을 만들어 보이다가, 앉았다가 섰다가······, 도대체, 잠시잠깐이라도 관객이 한눈파는 짬을 허용하질 않는 여인의 몸놀림. 아니, 날갯짓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뭇 시선들을 사로잡아 제멋대로 요리하는 칼춤이었다고나 할까······. 숨소리조차도 몰수당한 장내에, 오로지 삼현육각 음률과 더불어 쟁강 쟁강, 쟁, 쟁, 부딪치는 장검소리만이 득세하고 있더니, 점점 가락이 빨라지며 그녀의 검무도 가속도를 붙여 열정적인 호흡으로 돌아갔는데, 춤이 차츰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여인의 걸음걸이는 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 차라리 날아다닌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걸음새로 장내를 한 바퀴 휘돌아간 여인은 그런데 눈 깜짝할 순간 영류태왕 앞에 탁 멈추었소. 확 숨을 거두어들이며 기겁하는, 아니면 황홀감에 겨워하는 왕 앞에서, 감히 장검이 섬광을 그으며 허공을 쪼개더니, 그렇게 한 마리의 새처럼 아슴아슴 멀어지고, 멀어졌는가 싶었다가 금세 태왕의 눈앞에다 강렬한 빛살을 쏘아대고······. 그럴 때마다 왕은 등줄기가 섬뜩, 간담이 오그라들었겠으나,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그래, 태왕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요. 십중팔구, 칼춤이 무서워 꽁무니를 뺀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었던 거요. 아차차 잘못했다간 임금님 체통에 금이 가고 말 일. 한편 칼춤에 몰입한 여인의 얼굴엔 내내 웃음이 퍼져 있는데, 어찌 보면 지극히 상냥한 웃음, 어찌 보면 감히 임금을 조롱하는 웃음, 또 어찌 보면 ‘아주 재미나 죽겠네.’ 하는 깨소금표 웃음이라······. 어쨌거나 화난 표정보다는 웃는 표정이 여자를 더 아름답게 치장하는 법. 드디어 태왕께오서 결심하신 모양이었는데, 그런데 그의 마음을 슬쩍 읽었더니 아주 몰염치하고 비겁한 다짐을 하고 계셨소. 무슨 다짐이었느냐고? ‘흐흐흐, 내 기필코 놈을 죽여 없애리라.’ 그거였소. 믿거나 말거나······. 태왕이 턱 잡으려는데 어느덧 저만치 물러서서 뱅뱅 돌고 있는 여인! 또 다시 눈 깜짝할 새에 바로 코앞으로 그녀의 칼이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라 태왕의 용안이 바짝 질렸는데, 하지만 배포 큰 영류태왕이 한낱 계집에게 휘둘려서야 아니 될 말. 태왕은 은근히 여인이 다가올 찰나를 기다렸다오.
‘쉽사리 잡혀버린다면 그 또한 재미없을 터······.’
한동안 느려졌던 가락이 다시 급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영류태왕의 바로 뒤에서 양손에 장검을 휘두르며 나서는 자가 있었지 뭐요. 소익환······. 언제 술이 깼다는 말인지, 그는 아주 당당한 걸음새로 나오고 있었소. 하기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검무실력을 지닌 소 총관. 여기저기서 짝, 짝, 짜자작. 하나 둘 시작한 박수소리가 어느새 우레 소리로 둔갑하여 터져 나오는 중에, 슬쩍 길을 열어주다가는 막아버리고, 막아버렸다가는 다시 좍 열어주면서, 황홀한 쌍검무가 펼쳐지는데, 그러다 소익환은 여인의 칼을 피하는척하면서 성큼 연개소문 앞으로 접근하는데, 살의와 열망에 가득 차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그의 칼날은 금시라도 연개소문의 머리를 내려칠 듯이 작열하기 시작했소. 장내는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오. 영류태왕 또한 용안조차도 벌개졌는데, 신하들의 눈엔 과음 때문에 붉어졌다고 보여서인지 용안의 변화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아무튼 왕의 기분은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정도로 급상승하는 중이었소. 그 순간, 연개소문의 머리 위에서 어지러이 춤추던 소익환의 칼이 섬광을 그으며 아래로 떨어지는데, 아, 그런데, 어느새 창~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더불어 칼이 허공에서 멈춰버리질 않겠소. 여인의 칼이 소익환의 칼을 막고는 그대로 허공중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그 말씀. 하마터면 내가 뛰어들 뻔 했지만 나는 꾹 눌러 참았소.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그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꼼짝 없이 자리를 지켜라,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내 소임이니까요. 모든 조신들 또한 손에 땀을 쥔 채로 숨을 죽이는 그 순간. 소익환의 속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 미치고 ‘뒤비티리질’ 노릇이라 잠시 물러갔던 술기운마저 확 올라서 온통 홍시빛깔이 된 얼굴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이윽고 장내가 수런거렸소. 뭔가 살벌한 분위기.
검무는 계속되는데, 소익환 그는 칼이 아닌 완력으로 여인을 밀어붙이며 성큼 성큼, 또 다시 연개소문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음률도 검무도 점점, 점점, 휙휙, 휙! 휙! 숨이 가빠졌고, 여인이나 소 총관이나 땀을 비 오듯이 흘렸고, 그리고 찰나. 쨍강! 와르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연개소문 바로 앞의 상이 쩍! 두 동강 나는 그 순간, 소익환의 칼도 엎어지는 상과 함께 떨어졌는데, 그런데 연개소문은 이미 뒤로 물러 앉아 있었소. 하마터면 자기 머리통이 쩍 갈라졌을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는데도, 막상 장본인은 눈도 깜짝하질 않고 있었던 거죠. 여인은 칼을 치켜든 채 연개소문을 호위하고, 소익환은 마치 실수라도 했다는 식의 몸짓으로 허우적허우적, 과잉변명의 과도한 몸짓.
“소 총관! 그대의 검무는 천하제일이라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소? 사람이나 잡을 망나니의 칼춤이던가? 으하하하하! 대단히 무섭구먼! ······. 아웅~ 에고 무서버라······.”
연개소문이 비아냥거리자, 소 총관은 칼을 집느라고 비스듬히 엎드린 채로 으르렁, 으르렁.
“무도한 연개소문아! 네 감히 성상마마를 행차하시라 해놓고서 불장난을 꾸몄으렷다!”
“허허허! 내 할 말 네가 하는구나! 너야말로 극악무도한 놈! 이 많은 사람들이 개소문의 머리통 대신 상이 반도막 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거늘!”
“네 이놈! 살아남지 못하리라!”
연개소문과 소익환이 대판 시시비비를 따지고 나오자 장내의 조신들도 안절부절못하고, 영류태왕도 분노에 가득 찬 용안으로 파르르 수염을 떨어대면서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는데,
‘저 병신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하고서! 쯧쯔 쯔쯔쯔······. 경이 바로 병신인 게야!’
드디어 태왕께오서 앞에 놓인 수랏상을 탕탕 두드리시며 호령하시었소.
“소 총관은 대체 뭣 하는고? 어서 저 무도한 역적 놈을 잡아 대령하지 못할까!”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 소 총관이 왕 앞에 부복하였소. 역적이라니, 연개소문은?······. 그야 뭐 멀뚱멀뚱하게 ‘구경이나 하며 떡이나 먹자’ 하는 태도로 가만 앉아있었죠.
“성상마마······.”
“성상이고 나발이고, 뭘 우물쭈물하시오? 어서, 아, 어서 저, 저, 역적이나 잡아 대령하지 못할까!”
호령하는 영류태왕의 목소리가 은밀히 떨려나오고, 벙하니 연개소문을 바라보던 소익환의 몸은 더더욱 와들와들 떨리는데, 섣불리 어째 볼 위인이 아닌 연개소문. 팔 한쪽과 눈 한쪽을 잃은 몸이지만 그의 외눈에선 웬 살기가 빛다발처럼 뻗쳐 나오고 있었소. 하지만 지엄하신 태왕마마의 명령에, 소익환은 주춤주춤 연개소문에게로 다가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잔뜩 실어서 외치는데, 별로 크게 나오질 못합디다.
“연개소문! 그대는 정녕 성상마마의 분부를 못 들었는가?······ 어서, 냉큼, 마마 앞에 부복하지 않으면······. 사, 살아남지 못할 터!”
“와하하! 살아남지 못한다? 하하하하! 으 하하하하!”
연개소문이 또 미친 듯이 웃어대자, 섬뜩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소 총관.
‘저 자가 도대체 무얼 믿고?’
하기야, 소름이 쪽 돋았을 것이오. 그는 반사적으로 긴 칼을 집어 들어 연개소문에게 겨누었고,
칼날이 번쩍이고 있었지만 연개소문은 여전히 하나짜리 눈으로 빛살을 쏘며 꼼짝을 안 하는데,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빨리 이 자를 포박하라!”
그런데 거듭거듭 소리쳐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아직 알아차리질 못한 소 총관, 별안간 칼을 잡은 그의 손이 중풍 환자처럼 떨어대는데, 연개소문은 말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소 총관의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소.
“이놈들아!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라! 어서! 이 역적 놈을 잡아라!”
발악에 가까운 소 총관의 호령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마침내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왔소.
“허허허, 그럼 그렇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소익환은 그제야 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소. 그런데, 아아 그런데······. 기고만장해서 호기롭게 두리번거리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소총관. 그는 푸르르 머리를 흔들었소. 완연 탈색된 얼굴로 힘없이 칼부터 떨어뜨린 소익환은, 철퍼덕! 자기가 지린 오줌을 깔고 앉아버렸소.
◇◇◇
“그만, 그 정도면 되었어요. 다음 이야기는 제가 쓰겠어요.”
나는 끝도 한도 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하아, 영웅스케치, 그런 제목으로?”
“그럼요. 바로 그 제목으로요.”
“헌데, 누구에게 빙의될 작정이오?”
“생각나는 작가가 있어요.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소설편>을 쓴 작가······ 연암전집을 집필하다가 출판사 사정으로 좌절됐나 보던데, 그 작가에게 또 다시 열정을 쏟게 하려고요.”
“그럼 좋소. 그 소설의 끄트머리쯤엔 최금지, 이 지귀를 등장시키시오.”
“최금지···. 정말이군요. 당신이 바로 양아리 거북바위에 가을하늘 별자리를 새긴 그 분이군요. 맞았군요.”
“그대를 그리면서······.”
그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는데, 거무스레한 눈가가 너무 애처로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거, 쓰시겠어요?”
내 손엔 어느새 선글라스가 들려있었다.
“아, 오빠······.”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은 완연 내 사랑 오빠였다.
3D영상을 촤르르 걷어버린 그는 여전히 열변을 토하였다.
“선덕여왕이고 히미코이고 간에, 차라리 우리 고향별에서 불렀던 대로 마고라 부르는 게 좋겠구려······. 역사의 여명기인 황하문명시대에 우리 천손은 동이라는 이름으로 그 문명을 열어갔고, 동이라는 종족이 생겨나기 전에는 구려가 있었고, 구려가 생겨나기 전에는 풍이가 있었고, 풍이가 생겨나기 전에는 마고 그대가 있었지요······. 마고여, 마고여, 그러나 천지창조의 주인공은 율려입니다. 율려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이 나타났고, 우주의 어머니 마고를 잉태했던 거지요.”
그러고서 사내의 말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고 있었다. 판소리장단의 순서적인 속도,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몰이에서 곧잘 이탈하거나 추월하거나 역행하며, 휘몰이→중모리→자진모리→진양조→진양조→휘몰이→중중모리 등등을 구사하고 있는 거였다.
“마고는 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고,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과 후천의 정을 받아 결혼하지 아니하고 네 천인과 네 천녀를 낳았지요. 율려가 다시 부활하여 지상에 육지와 바다가 생겼는데, 기(氣)‧화(火)‧수(水)‧토(土)가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루더니 풀과 나무, 새와 짐승들이 태어났지요. 마고여, 기억나지 않으시오? 그대는 율려를 타고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고, 천인과 천녀들은 하늘의 본음本音으로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네 천인 네 천녀는 마고 그대의 뜻에 따라 서로 결혼하여 각각 3남 3녀를 낳았고, 그들이 또 서로 결혼하여 몇 대를 지나는 사이 1만 2천 명의 무리가 되었지요.”
“그들은 무얼 먹고 살았나요?”
‘굶지는 않았습니다.’
남자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휘몰이장단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장내를 포위한 군사는 소익환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어림군의 군사들이 아니었던 거요. 놀랍게도 그들은 서슬 시퍼런 동부총관부의 군사들로서, 와르르, 수백 명이 쏟아져 들어와 장내를 순식간에 포위하였지요. 이윽고 연개소문이 서서히 중앙으로 나섭디다.
“소 총관은 들으라! 그대는 태왕을 받들어 나라의 정사를 돌봄에 있어서 국가의 기강을 흐리게 하고 무고한 백성과 뜻있는 충신을 살해하여, 자신과 일족의 부귀영화만을 연장하려고 급급하였으니 그 어찌된 연고이더냐? 오늘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 불구의 몸을 출정토록 흉계를 꾸며서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 몸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많은 어림군을 동원해온 그 악랄한 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수많은 창칼이 저녁햇살에 번쩍이며 영류태왕과 그 조신들을 포위하였고, 연개소문의 외눈은 탁, 탁, 불꽃이 튈 것처럼 이글거렸지요.
“듣거라! 무도한 왕을 비롯하여 대소 관원,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두 포박하라!”
연개소문의 군령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이 지체 없이 달려들어 포박 작업을 시작했지요. 아 물론, 영류태왕과 모든 대소 관원들이 일체의 반항도 못하고 거친 군사의 손에 가차 없이 포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진 장내엔 거룩하기조차 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병신이 육갑을 하는구나······. 네 이노옴!’
연개소문을 잡으려다 오히려 잡힌 꼴이 된 영류태왕은 분통하고 창피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이 헐떡거렸고, 그 앞에 뚜벅뚜벅 연개소문이 다가섰는데, 병신이 육갑을 한다느니 병신한테 당했으니 창피하기 짝이 없다느니, 그런 일말의 느낌은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오. 영류태왕과 대소 관원들은 모두 포박당한 채로 공포에 가득 찬 눈길로 연개소문의 일거수일투족만 주시하고 ······ 그리고 말입니다. 아 글쎄, 연개소문이 한 가운데 우뚝 섰는데, 그런데, ‘확!’ 한 손으로 눈과 팔을 붙들어 맸던 붕대를 풀어버리지 뭡니까. 놀랍게도, 그는 빛살 넘치는 두 눈을 연신 끔벅거려보이며 영류태왕을 위시한 대소관원들을 두루 훑었소. 팔은? 아 물론 두 팔이 마치 날개 한쌍인양 펄쩍 펄쩍 오므렸다 펼쳐보였다, 별의별 날갯짓을 다 해보이더니, 이윽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감히 태왕에게 소리치기 시작하더군요.
“이 어리석은 건무(建武)야! 네 눈이 있거든 나를 똑똑히 보아라! 과연 사라졌던 눈과 팔이 어디서 생겼는지, 자세히 보란 말이다! 네 얼마나 나를 죽이려고 시시때때 흉계를 꾸며댔으면 내가 이렇게 병신 꼴을 했겠느냐? 이제는 내가 병신 꼴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네 스스로 깨달았을 터!”
하하핫! 연개소문의 웃음소리가 끝 모르게 허공중을 치달아오르는 그 순간, 여인이 새로운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오.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그녀가 누구냐고요? 이미 아시잖소? 그의 둘도없는 연인. 계은비라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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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숙 : 경남 거제 출생.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장편소설). 경기신인문학상(단편소설), 시조시학 신인상(시조), 월간문학 신인상(동화), 한국문학예술 신인상(평론).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국무총리상(2017). ▷중앙대학교 문학석사. 경기대학교 문학박사. 시집 : 가을시인에게 등 다수. 시조집 손톱끝에 울음이… 등, 소설집 황진이 돌아오다 등 다수. 교양도서 :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소설편(2012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도서) 등. 한국현대소설에 드러나는 사설시조 형식(한국연구재단 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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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는데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와우!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선생님의 추리력은 어디에서 생성 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