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초이님. 늘~~감사드리며 변치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동영상 공부는 듣고 또 들어도 본인한태 약이되고 기술자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항상 사람은 도움을 받고 은혜를 베푸는 분에게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되며 늘~~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57세 젊은이가2번째 글올립니다.
춘천 희망 보육원에서 (이북)분들 가정에 입양되는날 보육원 사무실에서 신상기록을하고 지장찍고 여성원장님께서 가서 말잘듣고 잘 살아라 다시여기오면 않된다. 하시며 그날 양아버지 양어머님 손잡고 시내버스를타고 춘천석사동 현 자택에 도착 하여 목욕시켜주시고 새 식구가왔으니 외식을 하자며 양아버지께서 중국집에 데리고가서 탕수육. 짜장면 시키시고 양아버님께서는 소주를 드시면서 커~~~좋다하시면서 저놈을 튼튼하게 잘키워서 대를 이어야 하는데 하셨다. 그날 (기차표) 고무신 검정색을 사서 처음 신어보라고할때 너무기분좋아 하늘로 날아갈려는 기역 입양된 가정에는 양아버지. 양어머님 두분만 사시고 양어머님께서는 625휴유증으로 아이를 못낳으신다고하셨다.
양아버님께서는 당시 별정직 동사무소.동장을 하시며 자전거뒤에 나를태우시고 논밭을 돌아다니시며 이땅이 모두 앞으로 너것이되니 잘가꾸고 눈여겨 봐도라. 하시면서 논에들어가셔서 잡초도뽑으시고 하던기역
당시 아버님은아침4시에 일어나셔서 소. 되지.닭을 키으시며 냄새는 별로 좋은기역이 나질않으며 니어카에 나를 태우시고 부대 짭밥을 거두어 되지죽을 쓰시고 벼집단을 작두에 잘게썰어 가마솥에 여물을 끓여서 소를 먹였습니다. 달걀은 깨끝이세척 하여 시장에 파시고 나중에 제나이18살때까지 그일은 제가 했습니다. 그래도 양어머님은 달걀후라이해서 양 아버님.아들을 겸상 해서먹이시고 어머님은 꼭 혼자 드시고 아니면 부뚜막에서 혼자 드시곤 하는것을 아버님 어머님도 갔이드셔야지 왜 혼자드시냐고 내가밥그릇을가저와 아버지옆에놓고 그날부터 셋이서갔이 식사했습니다.
어느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되였고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쓰시던 손수건을 내 가슴에 삔으로 달아주시면서 노란색명찰에 (이성재)라고쓰여진 명찰을처음 보았습니다. 어머님께 왜 김성재가아니고 이성재냐고 했더니 아버지 성을 따라간다고햐셨지만. 이혜를 못하고 마냥 학교간다는 줄거운생각에 잠겻습니다.
유년시절 친구도 생기고 짝쿵도 옆에있는 여자아이 지금도연락하는 김0자.짝쿵 학교끝나면 아버님계신 동사무소 가서 아버지 학교다녀왔습니다 . 크게인사하면 좋아하시던 생각. 당시 서기관이 먹지에 볼펜않나오는 펜으로 먹지에써서 등사기에 붓치면 그것을등사 하라고 해서 등사하고나면 5환 주시면서 눈깔사탕 사먹으라고 용돈주시고 그맛에 학교끝나면 친구들하고 동사무소가서 등사하고 나면 손 얼굴 숫검딩이가 되서 서로보고 웃던 추억 집에가면 양어머님한태 혼이나고 숫검딩이가되서 왔다고 아버지한태 전화해서 못오게해야지 매일애가 옷에뭇혀서 지질않는다고 퓨넘하시던 양어머님.
이북분들 특성이 절때 꽁짜는 없다 저는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았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그에대한 혜택을준다 는진리 일하기 싫으면 밥도먹지말라는 아버님 말씀 허세하지말고 무조건아끼고 절약해라 돈나가는 구멍을찾아 막아라 틈틈히 가르처주시는 가훈처럼 당시 이혜는 못했지만 성장하고보니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육였습니다. 나중에는 토시끼고장갑끼고 완전 마스타하고 완료했습니다.
국민학교5학년때 반배치가 다시된는데 짝쿵이 어디서많이본 여자아이 김0자.
점심때 도시락 먹을때면 집에서 먹고온다고 나가더니 학교뒤쪽 눈내리는 처마밑에서 혼자 먼산을 바라보며 점심시간 끝나기를 기다는 것을 보고
세월이 흘러서 잠시잇혀지고 나중에 서로 알았지만 보육원에서 농사짓는 집으로 입양했다가 확대받고 다시 보육원으로 들어왔다고 하기에 고아원에서도 학교보내주냐고 하니 의무교육까지만 보내준다고 나중에알았습니다.
그다음 부터는 양어머니께 도시락이적어 배고프다고하여 많이많이 겨란후라이도2개 싸달라고해서 반은 내가먹고 반은 짝쿵준기역. 김 ㅇ 자
석사초등. 졸업하고 강원성수중입학하면서 한날 아버님께서 너 미래를위해서 신문배달을해라.
하시어 새벽4:30분일어나 한국일보를 고참따라다니면서 120집정도를 신문배달하여 월 3.500원 아버님 통장에 들어오니 한날 강원은행 효자동지점에가서 이성재 이름으로 처음 통장을받고 신이나서 좋아하던시절 나중에 5500원 8500원으로 봉급이올라가 고등하교 졸업할때 용돈. 월급 등등해서 300만원정도 된것을 아버님. 어머님께 드려 대학등록금 내고 면목동 하숙생활 생활비 했습니다. 고등학교졸업하고 대학갈시점 병역통지서 왔다고 연락이와서 춘천병무청 미필판정을받고 3주 군사훈련 받고 병무수첩 이수했습니다.
당시 서울면목6동 서일공전 입학하여 전자공학 플레밍에 왼손법칙 을 기초삼아 1988,2.11 체신부 통신기술 공체로 합격하여 현제 분리된 회사에서 근무하고있쓰며 정년이2년조금넘게 남았습니다
2019.9. 21 대전출장 마치고 서울상경 KTX 안에서 김 문 갑 올립 3탄 . 춘천명동 약사리고개5층 빌딩을 올리다 4탄. 친자소송으로 춘천지방법원 가정과 재판부 출도통지서를 받고 5탄. 여의도KBS,방송국 이산가족찾기 공개홀 아나운서 황인용앵커 인터브 가수 이은아 노래
대표님께서 김문갑님글 1편을 읽어주실때 가슴이찡하여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양부모님 만나서 잘 자라시고 친 부모님까지 만나게되신걸 넘축하드립니다 얼마남지 않은 직장생활 잘 마무리 하시고 퇴직 후에는 주식으로 수익 내셔서 편안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62년생인데 63년 생이시라니 같은 나이대로 더욱더 공감이 가네요
첫댓글 감동적이고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하게하는
인생사 가슴뭉클했습니다
앞으로는 꽃길만 걷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어릴때 어려운 환경속에서 지내온 과거사가 비슷해서 김문갑님의 글에 공감 하면서 저도 그시절 그때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그리워지네요. 이젠 남은 시간 좋은 날로 이어지고 가정에 행복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빌어요
계속 다음 글이 기대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네 . 기대하셔도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 같습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잘살아오셨네요~
3탄도 기대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모두어려윘던 시절이었지만 잘참고 이겨내심을 존경합니다 혼자 드시던 어머니 밥 그릇을 아버지와 같이드시자고 상위로 올 려 놨을 때와 점심굻는 친구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던 따뜻한 마음 가짐이삶에바탕이되어 잘 살아오신듯 합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다음편도 빨리 올려주세요...정말 영화같은 인생스토리입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김문갑님글 1편을 읽어주실때 가슴이찡하여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양부모님 만나서 잘 자라시고
친 부모님까지 만나게되신걸 넘축하드립니다
얼마남지 않은 직장생활
잘 마무리 하시고
퇴직 후에는 주식으로 수익 내셔서 편안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62년생인데
63년 생이시라니
같은 나이대로 더욱더 공감이 가네요
문갑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이젠 꽃길만 걸으시고 수익많이많이내세요
한편의 감동 드라마 보는듯 했습니다.
다음편도 기다리겠습니다.
그 시절엔 대부분 가난하고 여러형제들속에 학교가기도 어렵고 먹는것도 늘 모자라서 힘들었던 시절이였지요
새삼 어린시절 생각나네요 ~ 그때 그시절 다음편 기대됩니다 늘 행복하세요
김문갑님
친부모님 만나신얘기는 은제 올리실건가요?
너무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