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悲運)의 사전적 의미는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이다. 은퇴를 눈앞에 뒀거나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은 왕년의 스타에게 흔히 ‘비운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 전· 현직 3명의 투수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고교시절 혹사 때문에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비운의 투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혹사’는 진실이 아닌 진실을 가리기 위한 보호색에 불과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고교시절을 제외하고 한 번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1편 곽재성 전 롯데 투수, 2편 김건덕 전 부경고(구 경남상고) 투수, 3편 이정호 현 우리 히어로즈 투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야구인생이 과연 ‘비운’이었는가 살펴볼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어떤 투수였는가’ 기억을 공유하자는 게 글의 의도다.
고향이 원래 부산인가. 혹시 ‘영도’라고 아나? 왜 영화 <친구>에서 아이들이 수영하는 장면 나오지 않나. 거가 부산 영도구 청학동이라고 내 고향 동네다. 운동은 육상부터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이면 뭐든 좋아했다. 부산 봉학초등학교 다닐 때 육상 투척종목 선수로 뛰었다. 대신초등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내가 투척하는 걸 본 모양이다. 1주일 동안 매일 집에 찾아와가꼬 “쟤는 야구를 시켜야한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야구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부모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때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웠다. 부모님이 가능하면 나나 동생이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술을 워낙 좋아하시다보니까 1주일 동안 매일 소주, 맥주를 사들고 오는 감독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 같다(웃음). 감독님 가고 아버지가 “정말 야구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고개를 끄덕이니까 “이왕 하는 거 열심히 안하면 다시는 안 시킨데이”하셨다. 그길로 대신초교로 전학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어찌 보면 야구를 조금 늦게 시작한 셈이다. 잘난 척 하려는 건 아니고 기존에 야구하던 애들보다 늦게 시작했어도 훨씬 잘했다. 그 애들보다 공도 빨랐고 방망이도 잘 쳐서 금세 투· 타의 중심이 됐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였으니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라. 아버지가 자갈치 수산시장에서 일 하셨다.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월급 가운데 대부분이 술값이셨다고 한다. 어머니께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주셨다. 밖에 나가시면 모든 이들이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집에서는 반대였다. 부모님이 한 번 싸우시면 선풍기 날아가고 뭐 날아가고. (멋쩍은 표정으로) 다음날 어머니가 부서진 가전제품을 사오시면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파손되는 식으로 두 분의 다툼이 잦았다. 때론 그런 환경이 사람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 맞다. 어릴 때부터 ‘난 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해야한다’, ‘야구로 쇼부(승부)를 봐야한다’는 식의 다짐을 끊임없이 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 당시 내겐 야구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음, 어쩌면 내겐 야구가 사법고시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대신중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다. 당시 178cm로 키가 무척 컸다. 체격도 좋았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 같다. 그즈음 던지기 시작한 슬라이더도 꽤 평이 좋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처럼 고교 감독님들이 나만 보면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노히트노런 투수의 등장
경남상고 안병환 감독(사진 맨 왼쪽 등을 보인 사내)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당시 경남상고는 지독한 훈련으로 "선수들 눈빛부터가 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1992년 대신중을 졸업한 뒤 경남상고(현 부경고)에 입학했다. 사실 우리 때 경남상고는 중학교 야구선수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1991년 (곽)재성이형이랑 (차)명주형 있을 때 전국대회 2관왕(청룡기, 대통령배대회)을 차지하면서 이름이 알려졌지 부산고, 경남고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남상고에 입학한 이유가 있다면 뭘까. 경남상고 안병환 감독님이 매일 대신중을 방문하셨고 오실 때마다 내게 야구용품을 주시는 등 많이 아껴주셨다. 무엇보다 부산지역 학교마다 라인이 있다. ‘대신중은 경남상고(부경고)’, ‘부산중은 부산고’, ‘토성중은 경남고’ 하는 식으로 연결이 돼 있었다. 당시 경남상고 동창회 회장님이 아버지를 만나 “(건덕이)야구부 회비 면제에 장학금도 주겠다”며 호의를 베푸시기도 했다. 당시 경남상고는‘애들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엄청난 훈련량을 자랑했다. 경남상고에 진학하고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하루 종일 러닝만 했다. 와, 고마 미치는 줄 알았다. 1주일이 지나 체중계에 올랐더니 몸무게가 6kg나 빠졌지 뭔가. 그래도 예전 선배들 말 들으면 우린 양호한 편이었다. 선배들 말로는 “토하면서 뛰었다”고 하더라(웃음). 아무래도 안병환 감독님 야구철학이 “야구를 잘 하려면 몸부터 제대로 만들어야한다”였으니까 강훈련을 한 게 당연했지 싶다. 당시 경남상고 멤버가 딱히 화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강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경남상고 선수들 가운데 괜찮은 선수는 지금 유신고 코치로 있는 동기생 양종성과 1년 선배였던 전 현대 이학균 선수 정도였다. 저와 (양)종성, 학균 선배 셋이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팀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학년 때부터 투수였나. 간혹 마운드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우익수를 맡았다. 그때는 나나 팀이나 방망이가 무척 좋았다. 1학년 때인가. 대통령배대회에서 군산상고랑 맞붙었을 때 우리가 3, 4, 5, 6번 4타자 연속 홈런을 친 적이 있는데 기억하나.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 6번 타자가 바로 나였다. 2학년이 된 뒤 투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화랑대기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성근(현 SK) 감독님께서 야인이실 때 여기저기 고등학교를 방문하시면서 선수들을 지도하셨다. 안 감독님과도 친분이 돈독해 우리 학교(경남상고)에도 오신 적이 있다. 1주일 동안 지도하셨는데 그때 나도 김 감독님께 투구폼을 교정받았다. 지금도 화랑대기대회를 코앞에 두고 김 감독님이 안 감독님한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뭐라고 했나. “안 감독, 좀 있으면 화랑대기대회 치르지? 쟤 선발로 올리라. 일낼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뜻이었을까. 김 감독님이 보시기에 내 투구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실제 화랑대기대회에선 어땠나. 바로 우승했다(웃음). 우리가 내리 5경기를 이기면서 우승했는데 그 가운데 4승을 내 혼자 거뒀다.
1994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준우승에 오른 뒤 찍은 기념사진. 사진 맨 뒤 중앙에 있는 이가 김건덕이다
정작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1993년 대통령배대회 때부터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당시 대통령배대회 부산지역 예선전은 단판 승부가 아니라 1, 2차 리그전으로 치러졌다. 6개교가 1차 5경기, 2차 5경기씩 총 10경기를 치러 종합성적을 합산해 그 가운데 제일 성적이 좋은 2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내가 10경기 모두 등판해 던졌다. 그 가운데 경남고를 상대로…. 경남고는 예나 지금이나 강호다. 난타라도 당했나.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나이 때 야구선수에겐 패배가 승리의 전주곡이다.괜찮다. 그게 아니라 그때 경남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점 차로 뒤진 경남고의 9회말 공격이었다. 아마 무사 2루였을 거다. 그때까지 안타, 실책 없이 볼넷 2개만 내주고 있었다. 노히트노런 의식을 했냐고? 당연하지 않은가(웃음). 아, 그런데 경남고 타자로 손인호 선배가 나오지 뭔가. 프로에서야 손인호가 ‘투수들의 벗’이 됐지만 아마추어 때만 해도 ‘투수들의 공적’이었다. 맞다. 그즈음 지역신문 기자가 내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느 타자가 가장 상대하게 어렵냐”고. 주저 없이 경남고 손인호 선배를 꼽았다. 진짜 그때는 어디 던질 곳이 없는 완벽한 타자였다. 강타자 손인호를 상대로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던졌을 듯싶다. 그게 화근이었다. 화근이라면 제대로 맞았다는 뜻인데. 슬라이더를 ‘딱’ 던졌는데 손인호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타구가 바로 내 옆을 지나 중견수쪽을 향해 굴러가는데 속으로 ‘아이고, 안타인갑네’했다. 그때였다. 손인호가 1루로 가다 넘어지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라 지금 LG에 있는 채종국 형이 그때 유격수였는데 슬라이딩 캐치로 타구를 잡는 게 아닌가. (송구하는 시늉을 하며) 그리곤 잽싸게 일어나 1루로 던졌는데 간발의 차로 아웃이었다. 사실 손인호 선배는 그때도 다리가 느렸다(웃음). 노히트노런은 중학교 때 이미 달성하지 않았나. 고교 때도 1차례 더 달성했고. 대신중에 다닐 때 상인천중 상대로 1번 했고, 경남고한테 1번 더(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그런 대기록 달성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당신의 슬라이더를 꼽는 이들이 많다. 선동열(삼성 감독)이후 ‘최고의 슬라이더’라는 찬사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손끝의 감각이 좋아선지 슬라이더를 참 잘 던졌다. 슬라이더만 던지면 거의 스트라이크가 됐다. 가끔 ‘백도어 슬라이더’도 던졌는데 그것도 잘 들어갔다. 무엇보다 동기생 포수 양종성 덕이 컸다. 종성이가 블로킹을 참 잘했다. 스트라이크 낫아웃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까. 글마 아니었으면 택도 없었다. 또래 선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슬라이더 말고도 구종이 다양했다고 한다. 싱커도 많이 써먹었다. 안병환 감독님이 가르쳐주셨는데 꽤 효과가 좋았다. 드롭커브도 있었는데 이 구종은 대학교 때 쓸려고 고교 때는 거의 쓰지 않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음, 나중에 써먹지도 못했지만….
선동열은 타고난 재능 이외에도 주변의 지원과 도움을 많이 받았던 국보급 투수였다. 그에 반해 김건덕은 해저에 깊이 가라앉은 고대 유물처럼 자신의 진가를 끝내 드러내지 못했다
1994년 <주간야구>를 보니까 ‘경남상고 에이스, 김건덕’하는 기사가 나오던데. 명실 공히 고 3때는 전국구 투수가 됐다. 기억난다. ‘부산에는 김건덕. 서울은 송신영(우리 히어로즈)’이라는 고교 라이벌 기사가 실리지 않았었나. 부산상고의 서승민, 정원욱도 그때는 부산지역 라이벌 투수들이었다. 그러나 전국구 에이스임에도 전국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랑대기,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치는 등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3학년 때 준우승 2번, 4강 1번, 8강만 2번을 기록했다. 덕수상고에 번번이 덜미를 잡힌 게 컸다. 봉황대기대회 4강,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덕수상고와 만났는데 이상하게 경기가 꼬이게 마련이었다. 당시 덕수상고 1번 타자가 발 빠르고 수비 잘 하고 꽤 똘똘했다. 그게 누구냐? 정수근(롯데)이었다. 그때는 정말 수근이 눈에서 독기가 느껴졌다. 지금은 제 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더라(웃음). 무관이었으니 아쉬움이 컸을 법도 하다. 그래도 첫 번째 목표가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첫 번째 목표라, 그게 뭐였나. 청소년 대표였다. (잠시 침묵하다가) 그해 그걸 이뤘다. ‘브랜든의 기적’ 1994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고교투수 랭킹으로만 따지면 최상위권이었으니 대표팀 발탁은 어렵지 않았을 듯싶다. 그렇지 않다. 대표 선수를 발표하는 날. 부산고와 황금사자기 지역 예선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투수였는데 강습타구에 오른손을 맞고 말았다. 병원에 가니까 오른손 뼈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 (오른손을 내보이며) 14년이 지났는데도 오른손 약손가락 뼈가 튀어나와 있다. 다행이 대표팀에 뽑혔는데 얼마나 손이 퉁퉁 부었는지 안병환 감독님이 “고마 니 안되겠다. 대표팀 포기해라”하실 정도였다. 그때 내가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아나. 글쎄. “안됩니다. 아무도 몬 알아차리게 하고 갈낍니다. 누가 뭐래도 꼭 갔다 올거라예. 감독님, 이해해주이소. 청소년대표팀이 지 인생 첫 목표라예.” 안 감독이야 그렇다손 쳐도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김대권 휘문고 감독은 뭐라 하던가. (오른손이) 아프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김 감독님이 “그래? 그럼 캐치볼도 하지 말고 붕대 감고 있어. 정 미안하면 공이나 주워”하셨다. 결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캐나다 브랜든으로 향했다. 브랜든에 도착해서 계속 오른손에 아이싱을 하면서 붓기를 가라앉혔다. 캐치볼도 살살하기 시작했다. 개막전 첫 상대가 캐나다였는데 우리가 콜드게임(주:7회 11-3)으로 이겼다. 그 경기에서 감독님이 “대타 나갈래?”하시기에 아무 생각 없이 나갔는데 공을 ‘딱’ 치니까 배트가 울려서 다시 손이 붓기 시작하는 거다. 속으로 ‘아, 진짜 안 되겠네’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포기했나. ‘혹시나’하는 마음에 아이싱을 계속 했다. (눈을 크게 뜨며) 와, 그런데 부처님 하느님이 세상에 계시긴 계신 모양이더라. 내가 그렇게 열심히 운동한 걸 아셨는지 다음날 캐치볼을 하는데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2번째 경기가 멕시코전이었는데 선발 김상태(덕수상고)에 이어 4회 주자 2루에서 등판해 9회까지 삼진 10개인가를 잡으면서 무실점으로 막았다. 결국 우리가 멕시코를 2-1로 이기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 그 대회에서 거의 전 경기에 출전해 혼자 3승을 따냈다. 최다승투수, 베스트나인, MVP는 당연히 당신의 몫이었다. 의사가 이렇게 부은 손으로 절대 공을 던져선 안 된다고 했다. 안병환 감독님도 나중에 놀라시더라.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인데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내가 캐나다에 있는 동안 경남상고가 마산고와 화랑대기 결승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 없이 힘들게 뛰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까 대충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 전 8월 1일 미국과 결승에서 우승을 다퉜다. 그날 선발로 나갔는데 이상하게 제구가 잡히지 않아 초반 실점을 허용했다. 지금 생각해도 김대권 감독님께 고마운 게 그때 나를 빼지 않고 우익수로 돌리고 2회부터 김선우(휘문고)가 던지게 한 것이다. 그러다 또 몇 회 지나면 내가 마운드에 오르고 선우가 우익수 자리로 가길 반복했다. 이 경기에선 타자로 더 빛을 냈다. 7회인가까지 우리가 8-10으로 지고 있었다. 그때 미국 투수가 꽤 잘 던지던 친구(스코트 폴크)였는데 운이 좋았는지 8회 내가 동점타를 쳤다. 뒤이어 투수 폭투가 나와 11-10으로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다. 운명의 9회말 김선우에 이어 마운드에 올랐다. 김대권 감독님이 공을 넘겨주시면서 “건덕아, 아무 생각하지 말고 던져라”하면서 어깨를 '툭' 치고 들어가셨다. 연투로 인해 제구가 잘 되지 않았을 듯싶다. 그래서 슬라이더로 밀고 나갔다. 직구 하나 던지고 슬라이더 하나 던지는 식으로 공배합을 했는데 첫 타자는 운 좋게 삼진으로 잡았다. 그런데 볼넷을 연달아 내주며 1사 주자 1, 2루 상황을 만들었다. 2아웃을 간신히 만들었지만 문제는 다음 타자였다. 2사 주자 1, 2루라면 극도로 긴장된 상황인데. 거기다 볼카운트가 투스트라이크 스리볼까지 몰린 상태였다. 벤치에서 무슨 사인이 나오나 싶었는데. 직구였나.(고개를 가로 젓자) 그럼 슬라이더? (고개를 끄덕이며) 슬라이더 사인이 나왔다. 속으로 ‘이 공에 내 인생을 걸어보자’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상대는 투스트라이크 스리볼에서 슬라이더가 오리라곤 상상하지 않았을 거다. 진짜 있는 힘을 다해 슬라이더를 던졌다. 그 나이 때 타자들이라면 당연히 직구를 기다렸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나이 때 투수라면 투스트라이크 스리볼에서 직구를 던지게 마련이고. 슬라이더는 잘 들어갔나. 진짜 잘 들어갔다. 얼마나 크게 공이 꺾였는지 글마가 스윙을 하는데 그게 스윙이 아니라 ‘스윽’하고 허공에다 배트를 긋는 식이었다.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동열, 김건우 등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한 뒤 13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듯한 표정으로) 그때 기분은 지금 말하는데도 짜릿짜릿하다. 귀국하려고 준비하는데 대한야구협회 관계자분이 “너희들 이제 큰일 났다. 한국에 가면 아마 공항을 못 빠져나갈 거다”하고 엄포를 놨다. 우리가 우승해 한국이 난리가 났다는 뜻이었는데 우리야 그때만 해도 다들 순진하지 않았나. 죄다 얼굴 시커멓고 머리 빡빡 민 청소년들이 뭘 알겠나. 귀국하기 전 소감을 미리 준비해두라고 해서 열심히 준비했다. 진짜 김포공항에 도착하니까 카메라 수 십대가 우릴 비추고 있었다. 한 취재진이 나와 이승엽(경북고), 감독님 이렇게 셋을 데리고 따로 인터뷰를 했다. 준비한 소감은 제대로 말했나.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또 기쁩니다.” 준비한 말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쁩니다”만 연발했다. 사실 그때 (이)승엽이도 나처럼 순둥이라 버벅대기는 마찬가지였다(웃음). 참, 전날 벌어진 화랑대기대회 결승전에서 경남상고는 어떻게 됐나. 7-4로 이기고 있다가 마산고 채종범(현 KIA)한테 만루홈런 맞아서 졌다(웃음). 결국 졸업할 때까지 웬만한 국내대회에선 우승을 하지 못했다.
1994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한국 대표팀
20살, 불행이 찾아오다 경남상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롯데 사이에 엄청난 스카우트전이 벌어졌다. 당시 롯데가 계약금으로 2억5천만 원을 준비하는 등 영입에 공을 들였는데. 롯데 김태민 전 스카우트님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부모님은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릴까봐 제주도로 피해 계시지 나는 한양대에 가있지 계약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상대가 없으니 참 힘들었을 거다. (한숨을 쉬며) 한양대는 좋은 학교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 프로에 일찍 갔다면 어땠을까 싶다. 어째서 프로를 마다하고 한양대를 선택했나. 고 3 후반기까지 한양대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만약 대학에 진학한다면 (잠시 머뭇거리다가) 연세대에 가고 싶었다. 왜 연대하면 문동환 선배(한화)가 있지 않았나. 우리 때는 ‘문동환’하면 끔뻑 죽었다. 나뿐만 아니라 승엽이처럼 웬만큼 잘한다 하는 얘들은 그때는 다 연대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럼 연대를 가지 왜 한양대에 입학했나. (조용히 목소리로) 그때 경남상고 야구부 관계자분이 “네가 한양대에 입학하면 장학금 받고 거기다 동기 2명도 데려갈 수 있지만 연대는 아무 조건 없이 너 혼자밖에 입학하지 못 한다”고 했다. 장학금이야 그렇다손 쳐도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서…. 연대 입학조건에 대해서 직접 확인한 바 있나. 없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금 생각해보니까 맞네. 그때 한양대행이 결정됐는갑네.
연대 시절 문동환은 투수를 지망하는 야구소년들에게 롤모델이었다
그때면 언제를 뜻하는 건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돌아와 하루는 구덕야구장을 빌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까 한양대 관계자분과 안 감독님, 아버지하고 어딜 가시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한양대에 입학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면 분명 한양대로 했을 거다. 스카우트 싸움 통에 한양대에 일찍 불려갔다. 경남상고 1년 선배인 (이)학균이형이 한양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하루는 “감독님이 니 델꾸오라카드라”하면서 나를 한양대 숙소로 데리고 왔다. 도착하니까 (이)승엽이, 강의권(부천고, 현 KBS N SPORTS 야구 PD), 최동진(부천고)이 와 있었다. 김건덕, 이승엽, 강의권, 최동진은 모두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들이다. 당시 모 스포츠신문 1면에 “프로팀 스카우트보다 뛰어난 한양대 스카우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웃음). 김건덕과 이승엽의 갈림길 그래 입학 전이었지만 대학에 가보니까 어떻던가. 경남상고 야구부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해선지 대학에 가서도 운동만 하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얼음이 어는 한겨울에 세탁기가 없어서 선배들 유니폼을 전부 손빨래해야 하지 않나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뺑뺑이 돌고 밤에는 팬티차림으로 혼나지 않나. 대학에 회의가 들었다. 그건 승엽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수학능력시험 보러 고향으로 내려가는 새마을호 열차에서 승엽이가 갑자기. 갑자기? “우리 수능 떨어지자” 그러는 거다. 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건덕아, 우리 프로가자. 내는 빨래하고 심부름 하고 뺑뺑이 돌고 그렇게는 못 하겠다”하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알았다. 내도 같이 할께”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한양대 야구부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김창희(삼성)선배가 진짜 좋은 사람이다. 그 형이 유일하게 후배들을 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야구도 오래하는 거다(웃음). 당시 대입특기자 수능 커트라인이 40점이었다. 40점 이상이면 대학에 갈 수가 있고 이하면 대학입학 자격이 쥐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40점 이하를 의도적으로 맞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승엽과 묘책이라도 짜냈나. 그때 승엽이와 짠 게 수능문제 가운데 1번부터 5번 문제까지는 1번, 5번부터 10번까지는 2번 이런 식으로 답안지를 작성하기로 했다(웃음). 시험결과는 어땠나. 수능 끝나고 다음날 스포츠 신문에 난 답안지를 맞춰보니까 (활짝 웃으며) 37점밖에 안 됐다. 승엽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둘 다 수능에 떨어졌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죄송합니다. 지 시험 떨어졌으예”하고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무신 소리고? 건덕아, 니는 실업계라 내신 성적이 반영돼 커트라인은 크게 의미가 없다. 뭐 하노. 후딱 서울로 안 올라가고.” 그럼 이승엽은? 한양대 숙소에서 훈련 마친 다음에 쓸쓸히 TV를 보는데 마침 승엽이가 떡하니 스포츠뉴스에 나왔다. 삼성 유니폼 입고 모자 쓰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게 삼성 입단식 장면이었다. 바로 전화를 했더니 승엽이가 딱 한마디 했다. 뭐라던가. “친구야. 내는 인문계 아이가.” 그렇게 승엽이와 내 인생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승엽이가 그때 대학에 왔으면 지금의 이승엽은 없었을 거다. 승엽인 참 복도 많은 녀석이다(웃음). 그리고 이승엽을 보지 못했나. 봤다. 승엽이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삼성에서 자길 투수로 지명했지만 팔꿈치가 아파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재활여하에 따라 타자로 나설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원래 승엽이가 청소년대회에서도 투수로 뽑혔지만 팔꿈치가 아파 4번 타자로 뛰었다. 어쨌든 승엽이랑 헤어지고 숙소에 돌아와 불꺼진 방에 앉아있는데 ‘난 여기서 죽어야겠고나’하는 생각이 드니까 맥이 딱 풀렸다(웃음).
1995년 20살 이승엽의 앳된 얼굴. 김건덕에 따르면 실력이나 품성이나 이승엽은 당대 최고였다.
식은 어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양대 1학년 때 등판 기록이 거의 없다. 대신 타자 기록은 꽤 있다. 이종락 전 한양대 체육부장님이 내가 고교 때 많이 던질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입학하자마자 이 전 부장님이 “건덕아, 고교 때 혹사했으니까 투수는 1년간 쉬고 방망이만 쳐라”하고 배려하셨다. 혹사라고 했는데 고교 때 얼마나 던졌나. 전국대회 예선전부터 본선까지 모든 경기에 단 1회라도 등판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다못해 학교 간 연습경기에도 매번 나왔다. 고교 때부터 어깨가 아팠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 고교 때는 어깨가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투구도 요령껏 했기 때문에 어깨의 피로도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요령껏 하는 투구란 무엇인가. 고 3이 되니까 경험에 따른 요령이 생겼다. 거기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갔다 오니까 타자 상대하는 눈이 확실히 달라졌다. 당시 마운드 위에서 전력투구하지 않은 경우가 억수로 많았다. 주자 없을 때는 제구로만 아웃카운트 늘리고 주자가 나가면 그제야 전력투구했다. 당시 한양대 마운드가 좋았다. 게다가 동기생 최동진이 있어 1년쯤 쉬는 건 티도 나지 않았을 듯싶다. 그때 한양대 선수층이 정말 두터웠다. (최)동진이 직구가 시속 149km까지 나왔다. 나는 최고 구속이 147km 정도였다. 쉬면서 유연성 훈련에 치중했다. 2학년 때부터 다시 공을 잡았나. 1학년 말이 될 때까지 캐치볼도 하지 않았다. 2학년으로 넘어갈 무렵부터 슬슬 투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깨가 뭉친 느낌이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좀체 안 풀리는 거다. 거기다 어깨 뒤쪽이 고통스러워 한양대 병원에서 CT(컴퓨터단층촬영)와 MRI(자기공명영상법)를 찍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 20번이나 넘게 또 다시 MRI를 찍었다. 역시 의사 소견은 “어깨에 작은 염증이 있으나 문제가 될 건 없다”는 말과 함께 ‘이상 무’였다. 오죽했으면 의사에게 매달려 “제발 어깨수술 좀 시켜 달라”고 졸랐겠나. 너무 아픈데 이상이 없다고 하니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도 안자고 팔굽혀 펴기 2천 번씩을 반복했다. 팔이 부러지기라도 기대했나. 어째서 그토록 팔굽혀 펴기를 많이 한 건가. 의사는 괜찮다고 하는데 팔은 아프지. 차라리 어깨가 다쳐 수술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혹시 1년간 쉰 게 독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10대 때 공을 많이 던진 투수가 성인무대에서 급작스레 투구수를 줄이면 어깨근육이 이상반응 혹은 거부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는 스포츠의학 논문이 있다. 어떤 슬랩(상부 관절와순 손상)은 MRI같은 정밀검사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오래 쉬다보니까 어깨 근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바뀐 투구폼에서 공을 던진 게 부상의 원인이 된 것 같다. 투구폼이 바뀌니까 안 쓰는 근육을 쓰게 되고 그 근육들이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중에 신철인(우리 히어로즈)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어떤 슬랩은 뭘로 찍어도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어깨 통증이 이어졌나. 한겨울에 러닝을 아무리 뛰어도 땀이 나지 않았는데 공 하나만 던져도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 만큼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숙이며) 어쩔 수 없이 지명타자로 경기에 나가야만 했다. 원래 롯데 1차 지명선수였다. 1998년 대학졸업반 때 롯데와 계약을 했어야 하는데. 롯데에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롯데에서 아예 지명권을 포기했다. 나도 나지만 아버지께서 크게 실망하셨는지 술로 사셨다. 그때 충격이 아버지 건강이 악화되는 이유가 됐다. 삼성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나. 삼성 스카우트팀이 불러 가니까 “아직 지명 못 받았지?”하고 물으면서 “네 재능이 아까우니 일단 대구에 있는 경산볼파크에 내려가서 5개월 정도 재활을 해보자”고 제의를 했다. 무척 감사했다. “제가 정말 죽기 살기로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절을 했다. 그런데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게 뭐였나. 어째서 롯데가 날 포기했는지 듣고 싶었다. 스카우트들끼리는 다 아는 사이니까 삼성에서도 이유를 알리라 생각했다. “죄송한데예. 롯데에서 우째 절 지명하지 않았나 억수로 궁금합니다”하고 물었더니. 물었더니? “8개 구단 스카우트들이 김건덕 하면 투수로 기억한데이. 네가 쪼매 못 던져도 계약을 했을끼다. 그런데 니 지금 뭐 잡고 있노. 방망이 아이가”하고 대답하셨다. 한양대에서 4번 타자를 치고 있었지만 프로에 가는 데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경산으로 내려갔나. 경산볼파크에서 삼성 2군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 했는데 (눈을 크게 뜨고선 팔을 올리며) 와, 희한하게 팔이 안 아픈 거다. 거기다 1달 새 몸무게가 20kg이나 줄었다. 그때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싶어 러닝을 엄청나게 하고 정말 훈련도 열심히 했다. 2달 정도 지나니까 삼성 스카우트팀에서 불렀다. 뭐라고 하던가. 삼성 모 스카우트가 “건덕아, 네 몸이 지금 100% 되나?”하고 물었다. 내가 살려면 거기서 “네. 100% 됩니다”했어야 하는데 대학 4년 내내 부상에 시달린 까닭인지 70%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괜히 무리하다 다시 탈이 날까 겁이 났다. 그래서 “아직 70%밖에 안 됩니다”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삼성에서 30%를 채울 때가지 기다려주겠다고 하던가. “그럼 경산 가서 방망이 치고 있어라”했다. 그 말이 내겐 “넌 이제 집에 가라”하는 걸로 들렸다. 나를 위해 애를 많이 써준 고마운 분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길로 경산볼파크에서 나왔나. 아니다. 더 열심히 훈련했다. 3개월 정도 경산에서 몸을 만들다보니까 하루는 롯데 윤동배 전 스카우트가 날 보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대로 2개월만 더 훈련하면 정말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한숨을 길게 내쉬며) 뜬금없이 군대 영장이 날아왔다. 1달 뒤 입대하라고 쪽지가 왔는데 눈앞이 깜깜해졌다. 단국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군 입대를 미룬 터였는데 갑자기 군 입대를 하라니 ‘아,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싶었다. 1주일 동안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더니 몸무게가 갑자기 102kg으로 불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게 너무 아까워서 병무청에 전화를 했다. 불행의 연속 병무청에 전화해서? “몸무게 면제는 우예 됩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키가 우예 되는데예?”하고 묻더라. “187cm에 지금 102kg 나가는데예”했더만 “그 키 정도면 118kg가 돼야 일단 4급이라도 받으예”라고 했다. 군 입대까지 1달 정도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짧은 시간에 16kg을 찌울 수 있나. 매일 친구, 동생들이랑 만나서 술 마시고 자고 몸무게 찌울라꼬 억수로 노력했다. 일단 120kg까지는 금방 됐다. 그런데 불안한 거다. 입대 3일 앞두고 131kg까지 찌웠다. ‘혹시나 더 찌우면 면제가 되지 않을까'싶어서 재신체검사 바로 전 1.5ℓ 이온음료에 계란 한판, 김밥 2줄을 먹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았는데 숨을 못 쉬겠더라(웃음). 병무청 반응은 어떻던가. 내게 맞는 옷이 없다고 팬티만 입고 재검을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다. 병무청 군의관들도 다 모였다. 자기들도 신기했을 거다. 최초 신체검사 때 몸무게가 88kg였는데 131kg가 돼서 왔으니(웃음). 나이 드신 징병관이 자기 방으로 불렀다. 갑자기 살이 불었으니 의심을 할 만도 하다. “살이 그세 그리 많이 붙나?”하고 묻더라. 그래서 “몸이 아파 운동을 그만뒀는데 살이 이렇게 쪘다”면서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장애 2급이시다. 나 아니면 먹여 살릴 사람이 없다”고 애원했다.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나. 뭐라고 하던가. “아, 네가 좀 더 일찍 왔으면 면제인데 법이 바뀌어서 몸무게로 면제되던 시절은 지났다. 아쉽지만 재검결과는 4급 공익이다”라고 했다. (혼잣말로) 참, 운이 없다 없다 해도 군대운까지 없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노. “공익 가느니 차라리 현역 보내주이소. 차라리 군대 가서 총 맞고 죽을 랍니다”하고 떼를 썼지만 그게 어디 번복이 되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현역을 가지 말라도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우리 아버지는 누가 모시나. 결국 2000년 방위산업체에 들어갔다.
고교 야구부 후배이자 인생의 벗인 안태훈 씨(사진 왼쪽)와 함께
새, 날개가 잘리다 공익근무를 마다하고 방위산업체에 들어간 이유가 있나. (옆에 있는 안태훈(부산시생활체육협의회 지원주임)을 가리키며) 경남상고 야구부 후배인 태훈이가 김해에 있는 방위산업체에 다니고 있었다. 마침 그 회사가 별도의 자격증이 없이도 근무할 수 있는 산업체라 이 친구(안태훈) 소개로 들어갔다. 몸은 힘들어도 1달 급여가 120, 130만 원 사이라 공익근무보다 훨씬 나았다. 가사를 책임질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어땠나. 남아 있었나. 일하는 곳이 무척 더웠다. 얼마나 더운지 1달 새 25kg이 빠졌다. 그 덕에 몸이 억수로 가벼워졌다. 주말마다 사회인야구도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페이스를 유지하면 최소한 타자로는 프로 문을 다시 두들길 수 있다’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참…. (말끝을 흐리다 술잔을 비우고는) 술 한 잔 하시라.('인터뷰 중엔 하지 않는다'며 사양하자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손가락이…고마 기계가 손가락을 찧는 바람에 이래 됐다. 손가락이 잘린 건가. 뼈에는 이상이 없는데 살점이 잘려나갔다. (엄지손가락을 만지며)지금 살이 엉덩이살이다. 손가락이 그리 되도록 정신은 어디다 뒀나. 그 손이 어떤 손인데 관리를 그 모양으로 했나. 그때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회사를 결근하기 일쑤였다. (눈시울을 붉히며)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손가락이 다치는 순간에도 아픈 줄 몰랐다. 손가락이 이상하다 싶어 장갑을 벗으니까 손가락에서 피가 물총을 쏘듯 뿜어져나왔다. ‘아, 이제 모든 게 정말 다 끝났다’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술 한잔 달라. 그래 병원에는 빨리 갔나. 나는 생산직이었지만 (안)태훈이는 관리직이라 마침 그때 간부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훈이가 회의를 하다 말고 뛰쳐나왔다. 당시 공장 안에 차가 못 들어왔다. 이 친구가 보기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아쉬웠나 보다. “내 선배가 이렇게 다쳤는데 당신들이 쳐다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소릴 지르면서 차를 공장 안으로 가져와 날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나마 빨리 병원에 가서 신경은 다치지 않았다. 손가락을 다쳤으니 군대로 치면 의가사 제대가 성립되지 않나. 손가락 마디가 완전 절단돼야 한다. 난 손가락 마디가 잘린 게 아니라 뭉개진 거라 해당이 안됐다. 그래서 방위산업체를 나와 공익근무요원으로 처음부터 다시 28개월을 복무해야 했다. 방위산업체는 1년 이내 편입이 해제되면 그전 근무기간은 인정되지 않았다. (다시 한숨을 쉬며) 난 손가락도 어중간이 다치고 1년이 거의 다 될 시점에 다치는 말았으니. 하지만 나라법이 그러면 지켜야 하지 않나. 다시 공익근무라. 4주 기본 군사훈련을 받으러 입소했더니 야구했던 친구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채태인(삼성)이 있었다. “니 메이저리그에 있어야지 여긴 와 왔노? 미국에 있어야 하는 거 아이가?”했더니 (채)태인이가 “아니 행님. 그런 행님은 우짠 일인데예”하는 거다. “아니 뭐”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웃음). 채태인이 대신초등학교 후배 아닌가. 한참 후배다. 훈련소에서 난 1소대, 태인이는 2소대에 있었는데 훈련만 끝나면 우리 소대로 찾아와서 “선배님, 양말 주이소”하고 보챘다. “니 와 그라노?”하면 “선배님, 제가 양말 빨아갔고 올께예”라고 했다. 단체생활이 몸에 베인 친구고 워낙 착한 친구였다. 태인이가 미국에서 야구하는 친구인 걸 조교들이 알아선지 초코파이를 많이 주면서 귀여워했다. 그럼 태인이가 그 초코파이를 다 들고 와서는 “선배님 드십시오”라고 하는데…. 지금도 참 고맙게 생각한다. 공익근무는 언제 끝났나. 그게 또 사연이 깊다. 영도구청에서 자동차세 미납관련 업무를 담당했는데 하루는 민원과에 집안사정을 털어놓으며 지금이라도 군 면제가 되는지 자문을 구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부양해야 했다. 어떤 분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하면서 서류가 무려 20가지가 넘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많은 서류를 다 준비했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서울 올라와서 졸업증명서 떼고 뭐하고 하다보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구청에서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무단이탈한 걸로 됐으니까. 그 많은 서류 떼고 알아보느라 나도 깜빡했던 거다. 병무청에 서류를 제출했나. 병무청에서 “0월 0일 아침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최종결과가 통보될 겁니다”라고 했다. 그날 아침 8시인가 ‘딩동’하고 문자메시지가 왔다. ‘생계곤란으로 제 2국민역으로 편입됐다’는 메시지가 떴다. 공익근무를 시작한 지 10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잠깐 ‘생계곤란’이라면 그 전에도 면제 사유로 충분하지 않았나. (먼산을 바라보며) 그걸 몰랐다. 그 쉬운 걸 그걸….
부경고 코치 김건덕이 1학년 투수 김동준을 코칭하고 있다
행복한 투수를 만들고 싶다 그 뒤 어떻게 살았나. 그즈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 어머니가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나나 동생이나 아버지께 “어머니를 놔 드리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병든 아버지로서는 덜컥 겁이 나신 모양이다. “니 내 안 모실 거 아이가?”하시면서 어머니와 이혼을 안 하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아부지. 지가예. 아부지는 평생 모실 거라예. 걱정하지 마이소.”아버지를 다시 잘 모시기 위해 유통회사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셨을 듯싶다. 유통회사는 다닐 만 했나. 잘 다니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 부도가 났다. 그리고….(눈시울을 붉히며) 아버지께서도…돌아가셨다. 여기 술잔도 비었다. 그 뒤는? 야구용품업체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주로 방망이 파는 회사였는데 양손에 한가득 방망이를 쥔 채 열심히 뛰어다녔다. 롯데 선수들이야 다 아니까 “(이)대호야 하나 팔아도.” “(정)수근아 하나 팔아도”하면서 스폰도 해주면서 열심히 영업했다.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으니 즐겁게 일했을 듯싶다. 내가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영업하다보면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한테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마지막 남은 거라곤 자존심인데…. 좋은 배트를 파는 것도 값진 일이지만 다시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은 김에 어린 후배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곳도 해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해 간 곳이 춘천고였나. 춘천고에 한양대 3년 선배 오규택 코치님이 계셨다. 오 선배가 전화가 와서는 "니 뭐하노? 이리 와서 같이 애들 좀 가르치자"해서 갔다. 지난 1월에 춘천고 야구부가 해체되지 않았나. …. 부경고는 언제 왔나. 춘천고 해체되고 그달에 왔다. 모교 코치라서 그런지 몰라도 친정에 온 기분이다(웃음). 아이들은 가르칠만 한가. 내가 고교 때는 새벽, 오전, 오후, 저녁 이렇게 하루 훈련만 4탕(4번)을 뛰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권두조 감독님은 야구부원들도 오전수업을 꼭 듣도록 하고 대회를 앞두고는 컨디션 점검차원에서 오전 훈련만 하도록 한다. 야구부원도 부족하고 투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투수 로테이션도 엄격하게 지킨다.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지도자 생활을 계속 할 생각인가. 권 감독 밑에서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상태다. 야구계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프로 입단을 해본 적이 없어선가 한 번쯤 프로 구단에서 일해보고도 싶다. 무엇보다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 자신이 불행했다고 생각하나. (손을 가로 저으며) 택도 없으예. 내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꼬. 다만 그런 생각은 간혹 하지예. 지도자로서 내보다 훌륭한, 아니 내보다 행복한 투수를 만들고 싶다고.
김건덕 (金建悳)
생년월일 : 1976년 6월 17일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이력 : 경남상고-한양대-춘천고 코치-현 부경고 코치 경력 : 1993년 화랑대기 우수수투상 1994년 봉황대기 우수투수상 황금사자기 감투상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최다승, 베스트나인, 최우수선수 1994년 이영민 타격상
첫댓글 옛날생각 많이나네요. 건덕이가 경남고에 노히트노런했을때 차명주부친께서 건덕이에게 금일봉을 하사하던 모습등...그때는 학부형들과 소주도 많이 마셨느데.. 건덕이 부친은 벌써 고인이 되었다니.. 건덕아! 힘내라 지도자로서 다시한번 명성을 떨쳐봐라!
가슴이 찡하네...건덕이 아버님이 내하고 죽이 잘 맞아서 소주도 자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