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까지 15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한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말한다. 부처님오신날 등 가끔 특별한 날에 해인사에서 장경 수장고를 안냐하큰 설명역을 맡은 승려가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7이라는 숫자에 상징적 의미가 있듯이, 불교에서 '8만 4천'은 매우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가령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인도 곳곳에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부처들이 설한 온갖 법문들을 모두 가리켜 '8만 4천 법문'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 함은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모았다는 자신감에 찬 표현이다.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동기는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이후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 인경본만이 전한다..쓰시마 섬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난당했다. 이 밖에도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초조대장경이 상당히 많이 남았고,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행 한국사 교육에서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가르치지만,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외적의 침공이라는 국난 앞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던 고려 조정의 나약함과 무능한 모습만을 주목하는 꼴이 된다.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1924년에 발표한 논문 〈고려의 대장경〉에서 팔만대장경이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국방능력이 없었던 고려 군신들의 종교상 미신의 결과물"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12~13세기 문신 이규보도 "전에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거란이 알아서 물러갔으므로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 더욱 쉬운 면도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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