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a et labora(2)
이왕 성 베네딕도 수도회 얘기가 나왔으니 6년 전 내가 쓴 ‘남성피정’에서 약간 언급한 이 수도회와 관련된 마리더스 수사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지금 본원이 왜관에 있고 1909년에 독일 수사들이 북한 덕원과 만주 연길 등에 세운 100년이 넘은 수도원인데 한국전쟁 중 역사적인 사건과 주인공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2001년에 재정난으로 어려운 미국 뉴저지의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을 인수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애초에 왜관수도원은 미국의 수도원까지 인수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 거절하려고 했으나 일단 탐사 차 간 수사들이 그곳에서 늙은 수사 한 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80대 중반의 그 분(마리너스 수사)이 바로 나중에 책이나(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 등) 영화나 드라마(영화 ‘국제시장’ 등)로 많이 소개된 흥남철수작전의 주인공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Leonard LaRue 선장이었다. 마리너스 수사는 뜻한 바 있어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고 왜관에서 파견된 수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아 인수제안을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리너스 수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한국전쟁이 터진 그 해 겨울에 레너드 라루 선장의 7,600톤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흥남에서 해군에게 연료를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0년 12월 19일 흥남에 정박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운명, 그리고 만사천여명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어쩌면 한국의 인물지형을 바꾸어 놓는 운명을 만난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 p72)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라루선장은 영하 20도의 추위에 흥남부두에 몰려있는 피난민들을 목격하고 정원이 10여명에 불과한 작은 화물선에서 모든 장비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우기로 결정한다. 선원 10여명이 먹을 식량밖에 없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라루선장은 그냥 출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살려달라고 애타게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냥 출항할 수 없었고, 어쩌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배안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기뢰나 어뢰폭침으로 침몰하거나 하중으로 인해 그냥 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매우 무모한 행위를 감행했다. 12월 22일 저녁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14,000여명을 태운 것이다.
화물선은 지하 5층 구조로, 한 층에 피난민을 다 채우면 뚜껑을 덮고 다시 한 층을 채우고 그렇게 14,000명을 태웠는데 8000톤에 이르는 강철로 만들어진 배가 마치 ‘고무처럼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화장실이 없어 그대로 서서 용변을 봤고 불빛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이 사흘 동안 항해해서 거제에 도착했는데 뚜껑을 열었을 때 단 한명도 사상자나 아사자가 없었다고 한다. 약탈, 아사, 동사, 전염병, 살인 등 여러 가지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거제에 도착했을 때는 그사이에 신생아가 5명이 태어나 피난민 숫자가 더 늘어났다.
거제에 도착해서도 하선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노약자들에게 먼저 하선을 양보하는 것을 본 라루선장은 “팔꿈치로 밀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들은 난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품위를 간직한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했다. 흥남철수 작전 때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탈출하게 되는데 그중 한 화물선이 14,000명을 구출한 이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전쟁 중 최대의 인명을 살려낸 (2004년 9월 기네스북 등제) 기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거제에 도착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 역사적인 일이 있은 후에 라루선장은 매우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병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간 라루선장은 병원에서 베네딕도회 수사님들의 봉사활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뉴저지의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에 입회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12월 25일 마리더스 수사가 되어 2001년 10월 14일 생을 마칠 때까지 47년간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봉쇄수도원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외출할 수가 있었는데 평생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고 미국과 한국 정부가 훈장을 주기 위해 겨우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갔을 때 비로소 그가 전쟁영웅이란 것을 주변에서 알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찾아간 수사님들을 만난 그는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고 그해(2001년) 12월 한국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정식으로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였다. 라루선장(마리더스 수사)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뉴튼 수도원을 인수한 계기가 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고 나는 어떤 묘한 연관성 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 분께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물론 그 분의 용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헌사이지만 그래도 그 분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첨언하자면 내가 6년 전에 ‘남성피정’을 동창회 사이트에 게제 했을 때 뉴욕에 사는 장진곤 동창이 뉴튼 수도원과의 인연을 댓글로 달았고 흥남철수작전 당시 기적의 배 ‘매러더스 빅토리’호에는 내 친구인 대전의 착한 빵집 ‘성심당’의 김영진 대표의 부모님께서 타고 계셨다. 또한 흥남철수 작전의 도화선이 된 ‘장진호 전투’를 실감 있게 그린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은 고교 1년 후배인 임상균이 2004년 번역 출판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국 군인들과 한국 군인들을 ‘Chosin Few’라고 하는데 ‘Chosin’은 장진長津의 일본어로, 그때까지 모든 영어지도가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어 長津을 ‘초신’이라 부른 것이고 얼마나 살아남기가 어려웠으면 ‘Few’라고 했을까 상상해 본다. 미국에서는 이제 노인이 된 ’Chosin Few’들이 지금도 해마다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한다. 지금은 모두 노병이 되었지만 이국만리 타향에서 젊은 시절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했던 그들에게는 그때의 처절했던 기억이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유엔군으로 파견되어 온 ‘강뉴Kagnew부대’는 또 어떠한가? 대부분 황실근위대 출신으로 참전국 중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253전 253승) 그들은 그들 나라에 돌아가서 얼마 되지 않아 공산화가 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노병(약300여명)들을 지금은 여러 단체에서 도와주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의 헌신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 중 사망한 유엔군(대부분 미군)은 54,000명이다.
첫댓글 참으로 감동적인 글이로구나. 선장님이 원래 신앙심이 깊었다고 보아야겠네. 역시 신앙의 힘은 위대하구나. ('장진'의 '진'은 '나루 진'자를 써. '긴 나루'라는 말이지. 선친 고향이라서 내가 알아.)
나루 津으로 바꿨다. 라루선장이 원래 신앙심이 깊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여간 우리의 역사 속 한 장면으로 기억해야지.
좋은 글, 많이 배웠다. 그 선장이 그 신부님이셨네. "그들은 품위를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이 대목 무~지 인상적이다. 이런 감동적인 얘기가 왜 풀스토리로 소개 안됐지? 기훈이 수고했다^^
귀한 내용을 잘 정리하신 염교수 감사^^
라루선장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듯~
감동적 글 잘 읽었네. 기훈교수 고마워~
기도하면서 쓰시는 글 몇회 연재하시는가? 전철 타고 일하면서 읽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