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퇴직동기 아홉이서 찾아간 아홉산숲은 아홉산 자락에 위치하여 붙은 이름이다. 보통 산 이름은 봉우리를 기준하여 짓지만 아홉산은 달랐다. 골짜기가 아홉 개였다. 아홉산은 야트막하지만 오목조목한 산세에다 금정산 주능선과 회동수원지 전경을 감상하면서 숲길을 걸을 수 있어 부산뿐 아니라 가까운 울산과 양산 등지에서도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근년 들어서는 아홉산보다 아홉산숲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도 선진국처럼 숲을 통한 치유가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이 숲으로 몰리는 것이다.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에서 묻어나는 숲의 향기에다 새소리까지 직접 들을 수 있으니 이곳에선 그야말로 사계절을 오감으로 느낄 수가 있다.
이름마저도 순우리말로 아름다운 아홉산숲이 위치한 곳은 부산이지만 내가 양산지역에 근무하던 1990년대만 해도 양산에 속했고 울산에서 접근하기도 용이한 편이다. 대도시 근교에 이처럼 굵고 미끈한 소나무와 참나무 거목들이 하늘을 찌르고 삼나무 편백나무 대나무 숲이 빼곡하니 심신의 치유를 위해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남평문씨 일파인 미동문씨 집안에서 9대에 걸쳐 관리해온 때문에 숲은 일제의 수탈과 6.25동란의 참화 그리고 땔감을 구하려는 사람들로부터도 지켜냈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숲을 3백년 넘게 가꾸어오면서 쏟은 정성의 결과지만 남모르는 고충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지극정성으로 가꾼 덕분에 숲다운 숲이 되면서 수많은 생명체들까지 깃든 것은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산토끼나 고라니 꿩 딱따구리가 우거진 숲과 대밭에 둥지를 틀었고 족제비와 오소리 반딧불이도 이끼와 버섯들과 이웃하며 살아가고 있다.
봄이면 층층나무 꽃이 흐드러진 아래로 맹종죽과 왕대나무에서 죽순까지 돋아나면서 향기가 온 산을 휘감는다. 산주 일가의 종택으로 고사리조차 귀하게 본다는 뜻을 가진 관미헌觀薇軒은 아홉산숲 생명공동체 대표를 맡은 종손이 살고 있는 한옥으로 60여 년 역사를 지녔다. 집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뒷산 나무로만 지었고 나무를 때는 아궁이와 함께 지금도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이다. 집 마당엔 1925년 심은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버티고 섰다. 산주의 할머니가 시집오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란다. 마당가엔 대나무마디가 거북 등껍질을 닮은 희귀한 구갑죽도 있다. 나무의 오목한 마디는 실을 정성들여 지그재그로 묶은 것 같아 사람들의 손길을 유혹한다.
숲에 아름드리 울진 금강송 종인 이삼백 년생 소나무가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관리한 사람의 손길 덕분이란다.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참나무나 서어나무에 밀려났을 것이라는 것. 그런 연유로 이곳 숲은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오랜 기간 가장 모범적으로 가꾼 본보기로 평가받는다.
나무를 땔감으로만 사용하던 시절엔 산에서 좋은 나무부터 잘려져 나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는 말처럼 좋은 형질의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하기에도 그만큼 편리했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도 그래서 생겨났을 터이다. 이곳 숲은 열등인자를 솎아내고 토양유기물 층을 꾸준히 관리해온 결과 임목육종에 필수적인 훌륭한 유전자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가슴 높이 직경이 70센티미터에 이르는 대형 상수리나무가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인가 근처에서 이처럼 곧고 상처 하나 없는 참나무 거목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간혹 오래된 사찰주변에서도 대형 참나무를 만날 수 있으나 그 대부분은 도토리를 따기 위해 메로 친 부위가 볼썽사납다. 숲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군락 외에도 편백나무나 삼나무 맹종죽 왕대 서어나무가 무리지어 자란다. 14년 전 정밀조사에서 주왕산국립공원과 비슷한 529종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숲에 임도가 만들어진 것은 1950년대였고 그때 이미 우거진 숲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임도가 생기고도 대나무와 히말라야시다가 더욱 뻗어나면서 하늘을 덮어 터널을 이루었다. 울창해진 숲은 관리상 어려운 문제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세력을 너무 뻗쳐 소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성장속도가 빠르면서 햇빛 경쟁에서도 우세한 대나무가 땅속줄기를 확장해나가면 어느 나무도 견디지 못한다.
과거엔 해마다 대나무를 솎아내 김발재료 등으로 판매하고 얻은 수입으로 숲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제 정월대보름행사 때 달집 만드느라 몇 개 팔려나가는 게 매출의 전부가 되었다. 숲에서 나오는 소득이 거의 없는데도 해마다 유지관리에 수천만 원이나 들어간다니 그 고충이 오죽할까.
대나무는 공기 속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고정하는 능력이 뛰어나므로 기후변화를 막는 수종으로 주목받고 있다. 1980년대까지 대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쓰임이 많아 생활용품이나 공예품재료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널리 보급되면서 대나무 수요가 급격히 줄어 그 용도는 죽순이나 숯, 대통밥, 술, 공예품에 한정되고 말았다.
거꾸로 이곳 숲에선 대나무가 너무 번성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단다. 이 지역이 상수원보호구역과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관리가 거의 불가능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대나무를 베었다고 검찰에서 조사받은 적도 있었고 연간 벨 수 있는 한도가 편백나무는 2.5그루, 소나무는 0.5그루인 상황에서 숲 관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5세 이상이면 균일하게 5천 원씩 입장료를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블로그에 오른 탐방기 중 입장료는 3천원이면 적당할 것 같다는 의견은 이런 사정을 깊이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유림이지만 이처럼 잘 가꾼 숲은 길이 보존해야하니 국고나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해 보인다.
지금 숲을 지키는 종손이 16년 전 결성했다는 숲사랑시민모임에서 내건 "숲은 미래다. 숲 없이는 인류에게 미래도 없다"는 슬로건도 경영악화를 에둘러 호소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곳에선 오랜 세월 지켜온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사전 예약한 인원만 입장가능하고 놀이공원이나 유원지와 다르게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만 탐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른뿐 아니라 어린 꼬마들에게도 숲속 체험은 필요하다. 어린이를 위한 놀이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숲 해설까지 들을 수 있으니 오히려 적극 권장해야 좋을 것 같았다. 평탄한 숲길은 꼬마들도 쉽게 걸을 수 있으니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겐 색다른 경험도 될 수 있을 터이다.
일행이 코스를 끝내고 내려오자 숲 탐방을 마친 유치원 여교사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인사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처 따라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인지 교사는 반복해서 여러 차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헤어지기 전 새싹들에게 가르치는 예법교육은 그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숲 탐방을 끝낸 우리는 보리밥과 칼국수에 동동주를 놓고 둘러앉았다. 땀방울이 송송 맺힌 얼굴에다 대부분은 숲 기운을 받아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직장에서 만나 은퇴 후까지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면 형제간이나 친척보다 더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 일행과 함께한 세월은 56년이다. 모두들 1998년 외환위기 한파에 밀려 정년보다 앞서 직장을 떠나와야만 했었다. 직장생활 마지막을 쫓겨나듯 떠나온 그 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고 거리엔 노숙자들이 넘쳐났었다. 우린 33명이 만났지만 21년 세월에 절반 이상 떠나고 이제 15명 남았다. 여든 고개를 못 넘기고 떠난 이들이 태반이다. 한때 매스컴이 앞장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백세시대는 어쩌면 공허한 수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숲길을 걸으면서도 일행은 아무도 인생 마지막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죽음은 너나없이 그만큼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아홉산 숲 잘 보았습니다
山 지명이 우리말 드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