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가리
안은숙
누구든 주머니를 뒤집을 때가 있다는 듯
공중에 주머니 하나 털리고 있다
세상에 없던 것들
주머니 안에서 자라나고 생겨난다
나는 그것을 줄탁의 건망증이라 부른다
빨래의 뒤 끝
풀풀 날리던 종이의 보풀 같다
꽃을 떨구는 순간, 박주가리는 닫힌다
언제 어느 틈으로 들어갔는지
손톱이 있는 계절이 되어서야 빼내어 보는 속
넣은 기억은 없는데
꺼낸 기억만 있다
넌 나를 기억할까
안부 좀 물어보면 어때서…
바짝 마른 안절부절 같은 내용물들이
문을 열고 나온다
박주가리에서
바람보다 가벼운 여행이 나온다
안착지(安着地)가 보풀에 달라붙고 있다
들판의 풀밭에 총상의 잎겨드랑이가
팔을 흔들던 여름
꼭 자기가 오른 만큼의 높이에서
날아가는 주머니 속 내용물들
연보라색 단추도 떨어지고
닫혔던 문
공중에 마른 주머니 하나가 텅 비어있다
들판의 바람이
쌀쌀하게 여무는 제 씨앗을 키우고 있다
따뜻한 봄에 서로 만날 것이다
우리도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월호 발표
안은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졸업. 201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2017년《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 당선. 시집으로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와 동주문학상 수상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가 있음.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 문학 분야 선정 작가. 제1회 시산맥 시문학상, 제7회 동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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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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