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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은 희미하게 웃는 귀신을 바라본다. 순도 높은 귀신의 면상에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귀신이라 더 이상 향기가 안 나네요. 맡아보고 싶었는데, 후작이 반한 그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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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삭막해도 사랑은 피어나기 마련이죠. 청춘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장미처럼 져버리는 게 문제지만."
귀신은 처연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아 친다.
"‘How silver-sweet sound lovers' tongues by night,
Like softest music to attending ears!’"
무대에 선 연극 배우가 독백하듯 손 동작을 취한 알렌은 키득거리다 담배를 문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감정일 뿐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틋할수록 끊기는 게 태반이죠. ‘Is love a tender thing? It is too rough, too rude, too boisterous; and it pricks like thorn.’"
이 일을 하면서 귀 아닌 눈에 딱지 붙을 만큼 봐온 게 비극적인 사랑 놀음이다. 사회, 지위, 돈, 신분, 건강, 정부… 분홍빛 구슬이 송두리째 깨지는 사유는 제각기 다양하지만. 소탈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필터를 잘근잘근 씹다 질문한다.
"정황으로 봐선 마담이 버림 받으신 쪽 같은데. 그럼에도 후작이 보고 싶으십니까?"
귀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보기보다 순정파시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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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과거이긴 하지만 제가 보는 동안 후작 얼굴 실컷 감상하십쇼. 그럼 일편단심 민들레님,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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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릭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남자였다. 최근에 발행된 웨스스민스터의 다위니즘을 신성 모독이 아닌 논리 정연한 과학이라 여기는, 신 보다는 스스로의 강성함을 믿는 자였다. 그러나 목사가 늘 달고 다닐 정도로 독실한 형을 둔 탓에 매주 일요일 교회에 끌려갔다. 엘러릭도 달변가였지만 사업의 대가라 칭송 받는 에드먼드에겐 맥을 못 추고 지곤 했다.
신나게 파티를 벌이거나 술자리를 열 수 있는 황금 같은 주말에 몇 시간씩 목사의 지도를 듣는 건 엘러릭에게 고역이었다. 낙관론자라고 생각되는 자신이 교회 벽에 걸린 거대한 십자가를 보는 순간 비관론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문화가 문화인지라 기본적인 기도는 거르지 않고 하는 편이었지만 신앙심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성부와 예수에 의지할 의욕이 노력해봐도 생기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개과천선이 덜 돼 그런 거라고, 마의 작용을 일으키는 사탄을 버리라 했지만 생기지 않는 건 생기지 않는 거였다. 신념은 억지로 만든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삐뚤어졌다 해도 하는 수 없다. 이 종교가 가짜가 아니라는 물질적인 증거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담으로 내놓는 ‘기적’들. 전부 우연이라 생각했다. 종교는 원래 그런 거다. 기도한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과 정성이 부족했던 것이고 이루어지면 그게 그저 운이었다 해도 신의 도움이다. 엘러릭에겐 신교도뿐만이 아닌 모든 종교가 모순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현실과 현재의 쾌락. 지옥 갈 지도 모르지만 사후 세계 없이 끝일 수도 있다.
게다가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역사가 피칠갑을 했는가? 십자가 전쟁 일화들을 읽으면 ‘신에 미친 반편 같은 것들’이란 말 밖에 안 나왔다. 인간은 인간이지 신이고 지옥이고 뭐고. 신이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어떻다고. 튜더 왕가부터 흑사병 당시의 히스테리까지. 신이 있다면 왜 고생하는 좌절 속의 인간들이 이리 수두룩한가? 시험이라고? 벌이라고? 전생의 업보라고? 개소리. 기억도 안 나는 전생의 일로 왜 현세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지. 세상은 쾌락. 그것 하나로만 돌아간다. 그것 하나면 족하다. 인생이 즐거우면 그걸로 되는데 숭고한 임무다, 책임이다… 자진해서 힘든 길을 가는 게 선행인가.
가식이다. 앞뒤 안 맞는 것들. 종교가 아닌 정치적인 고삐일 뿐이다. 핑계일 뿐이다. 나라를 주무르고 사람들을 조종하는. 레베카는 자신의 편지를 받았을까? 속히 집으로 가 답장이 왔는지 보고 싶다. 그는 답답해져 엄청난 방자함이란 걸 알면서도 예배 도중 일어섰다. 에드먼드가 식겁하며 붙잡았지만 털어냈다.
"오기 싫다고 했잖아. 그러게 누가 끌고 오래."
"너 미쳤어?"
"먼저 갈게. 잔소리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엘러릭!"
예배 중이라 웅성거리진 못해도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저런 몰상식한 죄인이 있나 엘러릭을 째려봤다. 예배당 나가는 동생을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애타게 부른 에드먼드는 황급히 목사와 신에게 사죄를 올렸다.
"성부… 성자… 성령… …큭-"
후작은 천사와 세인트 조각상들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 반 비웃음 반을 날렸다. 돌계단을 내려와 거리를 걷다 보니 본의 아니게 모퉁이를 도는 금발을 빤히 쳐다봤다. 야단 났군. 금발만 봐도 그녀인가 싶으니. 실소를 짓다 반신반의하며 금발의 여인을 쫓았다. 그녀라면 마차를 탔지 걸어서 어딜 갈 리가 없는데… 나부끼는 금발. 숨을 앗아가는 자태. 매료되는, 이미 매료되어 버린 향기.
"레베카?"
"…? 베드로 후작님?"
그만의 방향제.
가공할만한 우연이었다. 또 다른. 이걸로 몇 번째지? 그는 매한가지로 놀라는 그녀에게 황당하단 피식거림을 냈다. 그녀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만남을 실없는 웃음으로 맞았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당신이야말로. 교회 가는 길인가?"
"아뇨. 성당에요."
레베카는 들고 있는 성서를 열어 페이지 사이에 껴있는 로자리오를 보였다.
"신교도일 줄 알았는데, 당신 천주교도였나?"
"문제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머니께서 천주교도셨어요. 종교 개혁(Protestant Reformation)에 의한 반(反)가톨릭 운동에도 끝까지 지켜내신 신앙이 궁금해서 어렸을 때 입도했어요. 오빠는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었지만. 페이펄 어그래션(Papal Aggression) 때는 끔찍했죠."
"그렇군…"
그녀는 세상을 등진 혈육을 언급할 때 서글프게 웃었다.
"편지 잘 받았어요. 나도 그대가 보고 싶었는데 이리 보게 되니까 좋네요."
"괜찮다면 따라가도 되나?"
"그대는 신교도 아닌가요?"
"난 그런 거 안 따지거든."
"그대는 세례 받은 몸이 아니라 맨 뒤쪽 좌석에 앉아야 할 거에요."
"걱정도 팔자군. 좀 뒤에 앉았다고 기분 상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졸장부로 보이나?"
-풋-
"난 당신이 자주 웃어서 좋아. 아름답거든."
"고마워요."
"근데 마차는 어쩌고 혼자 걷고 있는 거지? 대낮이라지만 위험하지 않나?"
"바람 쐬고 싶어서 마다했어요. 성당이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성당 이름이?"
"홀리 트리니티."
"정말 가깝군."
산책하고 싶어서도 있지만 아버지의 감시가 지긋지긋해서였다. 저만치서 확대되는 웅장한 성당을 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엘러릭은 모자를 벗었다. 대기실에 모여 도란도란 있던 사람들은 후작의 등장에 수확이 휘둥그레졌다. 레이디 얼낫이 베드로 후작의 새 애인? 게다가 베드로 가는 알아주는 신교도 집안인데? 쑥덕쑥덕 술렁임이 일었다. 마룻바닥을 지나 카펫. 견고한 대리석. 화강암. 또각또각, 뚜벅뚜벅. 예배의 홀은 시원스레 뻥 뚫린 공간이었다. 엘러릭은 눈치껏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 있기만 해도 돼요.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 이런 것도 다 색다른 경험이니까. 형 귀에만 안 들어간다면."
그녀는 세 줄 앞에 가 앉았다. 미사보를 쓰고 십자가를 쥔 채 고개를 경건히 숙였다. 성모 마리아 석상이 자애롭게 내려다봤다. 고결하게 반짝이는 착색 유리. 장엄한 오르간과 성악대의 노래. 높은 천장 아래 메아리 친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알맞은 좌석을 찾았다. 신부의 묵주 기도 성호경으로 예배가 발을 내딛고 수녀와 신도들은 사도신경을 외웠다. 로자리오를 쥐고 주님께 기도. 예의를 차리기 위해 다른 신도들과 함께 성호경을 한 엘러릭은 눈을 감고 성모송을 묵상하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응망했다. 묵주 기도의 절차를 모르는지라 그녀가 영광송을 하고 구원경 바치는 걸 멀뚱히 구경했다.
"아멘."
긴 묵주 기도가 종지부를 찍을 무렵 레베카는 그를 뒤돌아봤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기도에 그가 포함되어 있을 지.
"후작님은 교회 안 가시나요?"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질문 공세 퍼붓기 전 일찌감치 빠져나온 그들은 정처 없이 거닐었다.
"갔었는데 중간에 나왔어."
"한동안 시끄럽겠네요."
"미미한 일이라 별로."
"신을 믿지 않나요?"
"있다고 믿기엔 이해가 가질 않아. 인간을 돕지 않는 건 신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돕고 싶지 않아서일까?”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죠."
"…당신, 신자 아닌가?"
"제겐 종교보다는 어머니께서 남기신 일종의 유산이에요."
그의 자행을 따끔히 꾸짖을 줄 알았는데 담담하게 한 술 더 뜬다.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한 종자다. 그는 호쾌하게 웃어버렸다. 입가의 늘씬한 호를 지우지 않고 담배를 꺼내 꼬아물었다. 아, 숙녀에게 실례인가. 이미 그녀가 현존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운 전적이 있음에도 새삼스레 자각해냈다. 그가 동선을 바꾸자 그녀가 말했다.
"피셔도 되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그래요?"
거짓말 해도 다 안다는 얼굴이다. 엘러릭은 멋쩍게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썼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 하건 상관 없는데 형이 어떻게 나올까 꺼려져."
"베드로 공작님 말씀하시는 거군요."
"형을 아나?"
"공작님을 모르면 영국 사람이 아니죠."
"말 되는군. 아무튼 형은 날 죽이려 들 거야. 엄청 독실하거든. 목 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신이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악을 쓰겠지."
그는 절로 일그러진 미간으로 짜증을 표출했다. 벌써부터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듯 하다. 레베카는 초조해하는 그의 표정이 재밌는지 후후거렸다. 온화한 봄의 기온. 그녀는 성서 표지를 내려다보다 말문을 열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정의하는 것도 인간. 죄를 용서하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에요."
"……"
"독실하시다면 폭언 좀 하시겠지만 공작님께서는 결국 용서하실 거에요."
"과연 그럴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동생을 사랑하고 계실 태니까."
"……저번처럼 공원에서 좀 걷지."
너울거린다. 요동치는 고동 속, 감정의 파도가. 뭉근한 불처럼. 타오르듯. 얽매일 듯 치열한 뜨거움이 심장을 좀먹는다.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뿌리치거나 빼지 않았다. 그를 받아들이는 무언의 허락 같았다.
그녀는 한결같이 웃는다. 한번도 침범 당한 적 없는 영역이… 어쩌면… 항복 당한 것일 지도.
“…오빠의 이름이 루퍼스(Rufus)라고 했나?”
“네.”
“…어떤… 사람이었지?”
그녀는 엷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불똥은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작렬했다. 분가해 따로 살림을 장만한 후작이지만 집사가 공작을 안면박대했을 리 없다. 그가 대문을 넘자마자 이 갈고 있던 에드먼드가 다짜고짜 손을 날렸다.
-짝!-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후작의 턱이 돌아갔다. 전력을 싣지 않아 입가는 안 터졌으나 얼얼했다. 부어오르는 뺨에도 무표정을 유지한 엘러릭은 핏발 선 형을 바라보았다. 냉정한 눈빛이 채찍처럼 공작을 후려쳤다. 에드먼드는 평정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영악하나 서글서글한 공작을 돌변시키는 건 종교, 돈 둘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가문 망신까지 당했으니. 공작은 다음주 교회 동지들과 목사님을 어떤 면목으로 뵐지 막막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신성 모독! 당장 무릎 꿇고 예수님께 빌어!"
"죄를 용서하는 건 신이 아니라 인간."
"뭐?"
"…라고 누가 그러더군."
후작은 또다시 날아오는 손을 붙잡았다. 공작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잡았다.
"분풀이로 맞는 건 한번뿐이야."
"엘러릭 하웍 베드로!"
"목사님껜 사과문 보낼게."
"너 지옥 가고 싶어 환장했어?!"
"지옥이 고통뿐일지 어떻게 알아? 애욕이라도 쾌락만 있으면 낙원이야."
"엘러릭─!"
"천국이란 게 예배 참가하는 걸로 가는 거라면 엿 먹으라 그래."
길길이 고함치던 에드먼드는 혈압 상승에 의해 휘청거렸다. 후작은 즉시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에구머니 공작을 부축했다.
"위안 받고 싶으면 형수님한테나 구해. 집사람, 자식들하고 가면 될 걸 왜 날 고집하는지 모르겠어."
"너, 너─"
"구세주 노릇 할거면 딴 데 가서 알아봐. 집까지 모셔다 드려. 필요하면 주치의 붙여드리고."
벙긋거리는 형을 무시하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담배를 물고 성냥을 붙이자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차피 지옥이야."
망연히 매캐한 연기를 봤다.
"형은 나보다 신과 돈을 더 사랑해, 레베카…"
용서? …개나 주라지. 받아봤자 내 선택은 번복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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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말한 "How sweet... ...ears!" 와 "Is love... ...like thorn"은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나온 대사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부러우면 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