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월턴 워커(Walton Walker) 중장의 성(姓)은 보행자라는 뜻의 평범한 성이다. 그리고 두 여중생은 보행자가 이용해서는 안되는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첫째, 장갑차 부대 훈련 중에는 민간인이 이용해서는 안되는 도로였으며, 둘째 본래 인도가 없이 갓길만 있는 길어었기에 더욱이나 장갑차 부대 훈련 중에는 보행자가 잠시 보행을 멈추고 옆에 비켜있어야 하는 도로였다.
그러나 워커 중장은 찝차를 타고 가던 중 참변을 당하였다. 중공군이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오는 중에도 전방의 유엔군 장병들의 사기를 복돋아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흥남에서는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민간인 십만 명과 유엔군 십만 명의 해상 대철수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육로로는 12월 중순에 중공군과 북한군이 이미 38도선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행히 성탄 주간에는 전투가 없었으므로 장군은 자기 아들 쌤 워어커 대위에게 줄 은성훈장을 포함하여 몇 개의 훈장을 장병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전선의 수여식장으로 가고 있었다.
언덕과 밭을 배경으로 평상시 평화로워 보이는 이 도로는 교통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고갯길을 돌자마자 언덕이 나타나며 좁은 양방향 단선 차로에 갓길이 없고, 사람이 차도로 다녀야 하며, 유사시 피할 공간이 없다. 찻길 바로 옆이 경사져서 비킬 틈도 없는 그런 열악한 도로이다. 그 날 아침 10시경 미2사단 44공병대가 인민군 장갑차 방어 훈련 겸 한국군 장비 지원 훈련을 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 두 여중생이 그 도로에서 보행하고 있었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윤화사고가 발생하였다.
워커 중장을 순직케 하였던 윤화사고 역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그날 워커 중장에게는 전방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만국경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미9사단 사령관에게 “장병들에게 말하게. 압록강까지만 가면 모두 고향에 돌아갈 수있다고. 크리스마스 디너는 모두 집에서 먹게 하겠다는 나의 약속을 지키고싶네"라고 말한 것이 꼭 한달 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서 본국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38도선까지 후퇴하였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군 장병들의 사기가 필요하던 때였다. 그래서 워커 중장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전방 부대를 방문하던 길이었으며, 그 선물은 몇 개의 은성훈장이었다.
워커 중장에게 아마 개인적으로도 길을 서둘러야 했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인에게 12월 23일은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날이다. 미국 축구 서포터즈의 명칭이 Uncle Sam인데 장군의 아들 이름도 Sam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두 주역을 자처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모두 한국 전쟁 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난지 삼주 만에 미8군 사령관과 유엔군 사령관의 중책을 맡고 한국에 달려온 워커 중장은 자기 샘 워커 대위를 최전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는 미8군 사령관으로서 그리고 아들은 최전방 장교로서 한국을 위해 공산군과 싸우다가 모처럼 만나려던 참이었다.
한국전쟁 때 한국을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미군 장성들 중 맥아더 장군 못지 않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워커 중장이다. 당시 한국은 한국 민간인보다 미군에게 더 위험한 나라였다. 피난민을 제외한 후방의 민간인들 중에는 전쟁을 그다지 피부로 못느꼈던 이들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전방의 미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대학생들이 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간 전투 때 수만 명의 미군이 전사하면서 부산을 사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사흘 만에 한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후퇴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싸웠다.
딘 소장이 북한군에 포로로 체포당했던 한국은 워커 중장에게도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엔안보리가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승인한 날이 7월 8일이었으며, 동일 맥아더 장군은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을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아직 워커 중장에게 수하 병력은 없었고 유일한 병력은 장군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한 24보병사단이었다. 24사단은 본래 일본에서 군정 업무를 보던 행정병들이었다. 그럼에도 북한군 대군이 쳐들어오던 7월 중순의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이 권총으로 적의 탱크를 맞아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던 것은 워커 중장이 딘 소장에게 대전 사수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한국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몹시 컸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 장관이었다. 해방 직후 아직 정부가 없었으며 식량 등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했던 우리나라는 경제에도 건국 준비에도 딘 소장의 군정 장관으로서의 역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고 그는 한국 지형을 아는 유일한 미군 지휘관이었다. 북한군 4개 사단에 포위되어 고전하다가 7월 20일 마침내 대전이 함락되기까지 후퇴를 거부하고 그가 권총들고 북한군 탱크 부대에 대항한 데는 그가 건국에 일조하였던 대한민국 및 그 초대 정부 보호에 남다른 애착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만일 사랑의 배신감이 증오로 변한다면 딘 소장에게는 몇 명의 한국인을 증오할 이유가 분명 있었다. 대전이 함락되던 날 제일 나중에 빠져나오던 딘 소장은 길을 잃고 행방불명이 된다. 대덕 금산 무주 진안의 산 속을 36일간 헤매던 그는 사흘에 보리밥 한끼니씩 12끼니를 얻어먹으며 버티었다. 군정 3년간 미국이 지원한 식량을 한국민에 배급하였던 그가 사흘에 보리밥 한끼니씩 구걸해 먹기를 36일간 계속하는 동안 평소 90㎏이었던 그의 체중은 50㎏으로 줄었다. 그리고 진안에서 두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에 체포된 그는 이미 공산 치하가 된 전주교도소로 이송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전주교도소 소장은 그가 군정청 장관시절 이곳을 시찰했을 때 수감됐던 정치범이었다. 이후 북한으로 이송된 그는 3년간 투옥 생활을 하였다.
대전에서 용맹스럽게 싸운 결과로 3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였다. 미국 의회가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던 날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나는 훈장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I wouldn't have awarded myself a wooden star for what I did as a commander)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53년9월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승만 대통령께 탄원하여 3년전 진안의 산속에서 그를 북한군에 밀고했던 두 주민의 생명을 구해준 일이었다. 딘 소장 그는 자기를 적에게 밀고하여 인생을 망가뜨린 한국인까지도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던 진정한 한국인의 벗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수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삼만 육천 명보다 훨씬 많았는데 그 중에 딘소장 구출대가 있었다. 구출 작전에는 희생이 따르는 바 이 실패한 작전에 큰 희생이 있었다. 경부선의 대전에서 옥천의 중간지점의 故 金在鉉 기관사의 순직비가 이 애환 많은 사연을 증언한다. 실종된 딘 소장이 산속에서 방랑한 일자 수도 36인데, 실종된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열차작전」에 투입된 인원수도 36이었다. 그 중 세 명은 한국 민간인 기관조사 김재현씨와 황남호씨 그리고 생존하여 이 열차작전 증언을 한 현재영씨이다. 그리고 이 비운의 「열차작전」을 위해 동원된 열차는 낡은 기관차 '미카219호'였다.
대전 전투에서 병력 삼분의 일을 잃고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7월 18일 김천으로 영동으로 후퇴하였던 미24사단은 김천에서 아주 난감하게 되었다. 대전에 홀로 머물러 충남도청 3층에서 무전으로 작전 지시를 하던 딘 소장과의 교신이 5분 전에 끊어지자 그를 구출하기 위한 「열차작전」이 바로 시작되었다. 대전에서 방금 피난온 김재현씨와 황남호씨와 현재영씨는 미군 구조대 수송을 위해 다시 대전으로 가달라는 미군측의 요청에 섬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생사를 건 모험에 동참하기로 동의하였으며, 33명의 미군이 '덴다'(석탄 싣는 기관차 부속차)에 이미 승차해 있었다.
그 당시 미군 모병은 지원제가 아니라 징병제였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인은 아무 대학에나 등록하면 징집이 면제되었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은 대학 다니다가도 징집되어 한국전에 투입되던 때였다. 그리고 여기 이 33인의 미군 병사들은 불과 일주일전만 해도 일본 군정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근무하던 자들이었다. 석탄 실은 '덴다'를 기관차 앞쪽에 달고 열차가 달림에 따라 이들은 석탄 가루를 뒤집어 쓰고 석탄 위에 있어야 했다. 그곳은 몸의 중심만 잃어버려도 열차 바깥으로 굴러떨어지는 곳이었다. 거기 앉아 세천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편안한 여행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터널을 앞두고 양쪽 언덕에서 북한군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들었으며 달리는 덴다의 석탄 위에 앉은 미군들에게는 총알을 막을 수단이나 피할 곳이 없었다. 총알에 맞은 미군 병사들이 하나 둘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 구출대를 태운 열차는 그대로 돌진하여 오후 4시 20분 경에 대전 역에 도착하였다. 미군이 내려서 역 구내 일대를 약 1시간 동안 수색했지만 '딘' 소장의 행방은 알길이 없었다. 그 사이 철도 폭파 예정 시간을 알고 있던 세 명의 한국인 기관조사들은 철도가 폭파되기 전에 빨리 되돌아가야 한다고 손짓발짓으로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미군이 한국말을 알아들을리 만무였다. 김천으로 되돌아갈 때는 '덴다'를 뒤에 달고 전속력으로 남하하는데. 이번에도 세천 터넬 주변에 매복한 적의 맹사격을 받았다. 김재헌씨는 즉사했으며, 이 증언을 한 현재영씨는 관통상을 입고 실신하였으나, 또 한 명의 기관조사 황남호씨가 결사적으로 기관차를 몰고 적의 포위를 탈출하여 옥천까지 왔다. 함께 탄 33명의 미군 중 옥천까지 돌아온 병사는 단 한 명 뿐이었다. 미군이 이토록 많은 피를 흘리면 필사적으로 구출하려 했던 딘 소장을 진안의 두 주민은 돈 몇 푼을 위해 북한군에 밀고하였다.
이렇듯 미24사단이 병력 삼분의 일을 상실한데다 사단장까지 실종되어 전투력을 상실하자 워커 중장은 21일 일본에서 도착한 미1기병사단을 당일로 노근리가 그 전략적 요충지였던 영동 전선에 배치하였다. 7월 21일 미군과 국군 차량이 노근리 주민들에게 대피 안내 방송을 하고 7월 23일부터 전개된 노근리 전투는 대전에 이어 제2의 임시 수도 대구를 보호하는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빨치산과 유격대와 남로당원들 및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후방에서 미군과 국군을 공격했던 때였기에 북한군의 게릴라 전술에는 전후방이 따로 없었다. 만일 군정청 장관 시절 빨치산 토벌 경험이 있던 딘 소장이 있었더라면 피난민 복장을 한 인민군으로부터 순수 양민을 보호하는 좀 더 현명한 방법이 강구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7월 26일 워커 중장은 피난민의 영동 전선 통과를 저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제2의 수도 대구에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 병력이 침투하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7월 25일 이전에 피난하지 못한 주민들 중 백여명이 미군들과 함께 희생되었던 노근리 전투는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전투였다.
하사관은 커녕 고참병마저 없었던 미1기병사단 7연대가 구식 소총으로 북한군의 탱크 부대를 막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7월 29일 영동 전선도 무너졌다. 그럼에도 미1기병사단 7연대가 노근리기 그 전략적 요충지였던 영동전선을 일주일이나마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워커 중장에게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호기를 주었다. 미24사단과 미1기병사단은 일본 군정 사무실의 행정병들이었던 데 비해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기 전에 미국 본토의 전투병력과 유엔회원국 파병 부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워커 장군의“목숨을 걸고 사수하라"는 명령을 지켰던 유엔군은 한국전 사활이 걸린 낙동강 전선을 45일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만일 워커 장군이 낙동강 전선을 목숨을 걸고 사수하지 않았더라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하였을 것이요, 따라서 한국인의 운명도 크게 달라질 뻔하였었다.
한국전을 총지휘하던 워커 장군 그는 정말로 한국에 필요한 인물이었다. 한일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훈련을 엄격하게 시키면서도 때로 선수들을 친근하게 대했던 것처럼 워커 장군에게도 낙동간 전선 전투 때 "목숨을 걸고 사수하라"는 자기 명령을 지키기 위해 수만 명이 전사하고 수십 만명이 부상당한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12월 23일이었다. 유엔 지상군 사령관의 전방 행차였으면 당연히 호송 차량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워커 중장은 찝차 운전병만 데리고 전선의 수여식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52년 후 두 여중생 윤화사고가 발생한 그 좁은 도로에서 서행하는 한국 군용트럭 대열이 장군의 찝차를 가로막자 장군은 운전병에게 트럭을 추월하라고 명령했다. 운전병이 차를 왼쪽으로 빼자 한국군 트럭 하나가 찝차를 향해 질주해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찝차가 도로 밖으로 급선회하여 논두렁에 추락하면서 워어커 장군은 즉사했으니 그의 향년 61세였다.
한시도 야전사령부를 떠나지 않으면서 작전지휘를 했던 워커 장군은 분명 한국을 구한 인물이었으며, 중공군과의 또 하나의 결전을 앞두고 한국 국방을 위해 몹시 소중한 분이었다. 그러나 영국 다이애너비를 피해가지 않았으며, 한국 두 여중생을 피해가지 않았던 이 윤화사고는 워커 중장을 피해가지 않았다. 두 여중생이 친구 생일에 늦지 않으려다 변을 당하였던 것처럼 워커 중장도 전방 부대 행사에 늦지 않으려다 참변을 당하였다. 유엔지상군을 호령하던 장군도 한국의 좁은 시골도로에서 발생하는 윤화사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혹자는 그 운전병이 장군의 추월 명령을 어겨야 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상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은 미군의 미덕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지 열흘 만에 적이 궤멸되자 맥아더 장군은 28일 이승만 대통령을 모시고 서울에서 수복 기념식을 가질 계획을 참도들에게 발표했다. 한 참모가 "각하, 그런데 한강 철교는 6월 28일에 폭파되었습니다"라고 말하자 맥아더 장군은 "없으면 하나 만들어"(Make one)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지시했다. 그리고 52년 후 두 여중생 윤화사고를 당한 미2사단 44공병대는 이틀 동안 철야 작업을 하여 한강 철교를 복구하는 기적을 이루어내었다. 이렇게 명령에 대한 복종이 군대 사회에서 중요할진대 우리는 그 운전병이 워커 장군의 추월 명령을 어기지 않았음을 탓할 수만은 없다.
당시 한국군의 모든 병참은 미군이 지원했었다. 즉, 미군이 지원해준 트럭을 피하려다 미군 장성이 사고를 당한 꼴이다. 그렇다면 만일 한국군 트럭 운전병이 먼저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법 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 윤화사고의 책임을 미군 찝차 운전병이나 한국군 트럭 운전병의 과실로 몰고가지 않았다. 즉 아무리 워커 장군을 잃은 슬픔이 커도 불가항력의 상황을 미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두 여중생을 잃은 슬픔이 커도 불가항력의 상황을 한국인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두 여중생을 추모한답시며 반미 촛불 시위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것이 워커 장군과 딘 소장처럼 목숨 바쳐 우리나라를 지켰던 미군들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미국인들의 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미는 또 다시 북한의 남침이 있을 때 미국이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달려온 주한미군 장성들이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고 있다. 이때 콧배기도 안보이던 좌익 정치인들과 좌파 집단들이.뒤늦게 나타나 두 여중생의 이름을 정략적 목적으로 팔며 반미촛불시위를 선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