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려서 병아리였던 시절 국립박물관 미술관에는 최순우 과장님을 찾아오는 객이 적지 않았다.
1959년께에 이씨 성을 가진 내시출신의 허우대 큰 분이 이따금 들렸다
궁에서 생활한 그분에게 대조전에 용마루가 없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
다
"이봐 여자는 남근이 없지 않아 그래서 용마를 짊지 않았다구, 대조전은 왕비 처소거든"
거침없이 대답이 나왔다
곧이 곧대로 믿고 여러 글에 그렇게 썻었는데 그게 아니였다
경복궁에서 뜯어다 세운 희정당에는 용마루가 있지만 뜯기 전 경복궁 임금님 침전이 강녕전에는 용마루가 없었다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서도 알 수 있다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용마루가 생기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신영훈 님의 "조선의 궁궐"에서) 우선 용마루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서 옮겨 보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용마루가 없는 건물을 쉽게 접할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민가 화장실에 용마루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건축 그것도 왕과 왕비가 주무시는 전용 침전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인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백프로 이거다 하는것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다만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왕은 곧 용인데 또하나의 용이 있을 수 없고
건물 정상에 있는 용마루가 양 과 음이 결합하는 침소에서 천기(天氣)를 받는데 걸림돌이 되기때문에 용마루가 없이 지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의견이나 이또한 아직까지는 실증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은 속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용마루 유무에 대해 너무 필요이상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셔도 무방하다고 봅니다.(제 생각이므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고로 용마루가 없는 건축방법은 용마루가 있는 건물에 비해 더 많은 비용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래는 참고가 되실까 해서 http://www.palace.or.kr (우리궁궐지킴이) 에서 강령전/교태전 에 대해 가져온 내용입니다
강녕전(康寧殿)
강녕전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있다.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이곳 영역은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인 연생전과 연길당이 동쪽에 있고, 경성전과 응지당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이 공간을 침전영역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왕의 침소라는 축소된 의미보다는 '왕의 일상적인 생활 및 업무공간'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왕이 강녕전을 침소로 쓰기도 했지만, 대신들과 만나 일상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거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가족들과 연회를 즐길 때는 강녕전 월대를 중심으로 임시 가설무대를 넓게 설치하여 이곳에서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전은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과 더불어 지어졌으며, 강녕전이란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강녕의 뜻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 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가운데 늘 덕을 쌓고 황극을 세우면 오복을 누리게 되는데, 오복의 가운데가 바로 강녕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후 강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후 1917년 11월 창덕궁 내전 일대가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강녕전을 비롯한 경복궁 내전건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헐려 옮겨진다. 이로써 경복궁은 더욱 황폐해지고 만다.
현재의 강녕전은 각종 옛 기록 등을 토대로, 1995년 12월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녕전은 남쪽에 월대를 두고 정면 3간은 대청마루로 좌우 3간은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둘레에는 방과 마루로 구성된 퇴간을 두었다.
퇴간에 포함된 방에는 지밀상궁들이 왕을 보필하며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강녕전의 외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강녕전의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부분 왕 또는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은 세간에 떠도는 속설(俗說)일 뿐, 문헌적 전거를 따져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곳 강녕전에서 문종(1452)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기도 했다. 정면 11간 측면 5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이다.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하며 강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다.
양의문(兩儀門)을 통해 교태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왕비의 침소 역할이나 혹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갖는 지위와 역할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공식업무 등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로 봐야 할 것이다.
교태전의 뜻은 주역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泰)는 주역의 괘인데 태 괘의 형상은 양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로 가있고, 음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로 가 있는 형상이다.
이는 '하늘로 솟는 양(陽)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陰)의 교합으로 생성(生成)한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공간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교태전을 세웠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교태전이 세워진 것은 세종 22년(1440) 무렵으로 추정된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경복궁전도>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교태전의 모습이 보인다. 교태전과 강녕전이 복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교태전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된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대화재가 나자 일제는 이를 "재건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포함한 경복궁 내전 일대를 헐어버린다.
이때 교태전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을 재건하는데 쓰이게 된다. 그 뒤 교태전은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만 남고 버려져 있다가 1995년 다시 복원된다.
한편 교태전도 용마루가 없는 지붕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는 경우에 용마루가 없는 지붕을 얹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유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까닭을 알기 어렵다.
다만 속설에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실증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정면 9간 측면 4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