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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 시조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
고운 최치원 선생 초상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신라의 불교).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최치원의 생애와 사상
♤ 목 차 ♤
Ⅰ. 머 리 말
Ⅱ. 최치원의 생애
Ⅲ. 최치원의 유교적 정치사상
Ⅳ.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종교관
Ⅴ.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신라말 고려초(羅襪麗初)는 정치‧사회적으로 커다란 전환기였다. 이러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학자이며 문장가로는 최치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진 그의 명성에 비해서 사상사적인 측면에서의 최치원의 위치와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최치원의 개인적 사상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동향과 양상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가 처한 정치적 여건을 비롯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사상의 기복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최치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우선 파악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선 최치원의 생애를 당시의 시대상황과 연관지어 살펴본 후 그의 정치관, 역사관, 종교관을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Ⅱ.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이 생존하였던 시대는 신라 하대에 속하는 시기로서 중대의 전제왕권이 무너지고 잦은 왕위쟁탈로 인한 혼란의 시기였다. 특히 그가 당에서 귀국한 다음해(886)에 헌강왕에 이어 정강왕이 즉위하였으나 1년만에 죽게되자 정강왕의 유조를 받아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써 헌강왕의 사치와 방탕으로 그렇지 않아도 와해되어 가고 있던 왕정은 진성여왕을 고비로 해서 더욱 쇠망의 길로 기울어져 가게되었다.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궁예와 백제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견훤(진훤이라고도 함)의 반란등으로 진성여왕이 즉위한 후 백성의 유랑은 날로 늘어가게 되었고, 왕실 또한 대내적으론 군사력과 행정력의 상실. 대외적으론 수륙양편이 막힘으로써, 조세징수나 대당외교의 길이 어려워져 신라는 사실상 경주 중심의 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미약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혼란이 극도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골품귀족의 지배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모순은 극복되지 못하였고 병부령(兵部令)을 둘러싼 귀족간의 권력항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며,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개인주의적인 수양을 강조하고 신라왕실의 전통적 권위에 도전한 선종(禪宗)이 호족 혹은 낙향한 귀족세력과 결합함으로서 사회혼란은 가중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의 당왕조는 안사의 난 이후 찬란한 문화로 세계제국으로까지 불리던 번영은 이미 사라지고 번진(藩鎭)의 할거로 통일국가의 체모를 잃게 되었으며, 중앙에서도 환관의 전횡과 관료들의 당쟁으로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로 말미암아 사상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켜 고원(高遠)한 철학체계보다는 생생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사색을 중시, 선종이 매우 융성하게 되었다.
아울러 정치이론으로서의 유학은 유가 경전의 훈고(訓詁)에 치중하고 있었으며 관학으로서의 기반도 서서히 굳혀가고 있었다. 또한 도교는 노자의 성(姓)이 당 황실과 동성이라는 이유로 황실의 비호를 받아 성황을 이루었는데, 특히 당황제들이 장생을 희구하였기 때문에 도사들이 크게 세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당말의 사상체계는 유‧불‧도의 삼교(三敎)가 혼합적으로 존재하였는데, 이는 최치원에게도 특별한 영향을 주게된다.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 1년(857)에 태어나 경문왕 8년(868)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경문왕 14년(874)에 급제하여 선주(宣州)표수(漂水)의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는데 치적이 우수한 까닭으로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으며, 황소의 반란때 도통 고변의 종사순관이 되었다. 헌강왕 10년(884)에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오는 도중, 폭풍을 만나 해안에서 겨울을 지내고 헌강왕 11년(885)에 본국에 도착. 시독겸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헌강왕12년에 헌강왕이 죽자, 조정에서 시기질투하는 자가 많아 태산군 태수로 좌천되었다. 효공왕 7년(903)에 부성군 서산태수가 되었으나 조정에서 하정사(賀正使)로 임명했는데 도중에 도적이 많아 가지 못했다. 효공왕 8년(904)에 「시무10여조」를 올리고 아찬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최치원은 난세를 만나게 된 것을 한탄하여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간에 노닐며 풍월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위에서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과 그의 간단한 생애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한 시대에 살았던, 그러나 당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던 최치원의 정치사상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Ⅲ. 최치원의 유교적 정치사상
최치원은 유교적 이상정치를 강렬하게 희구하였다. 6두품 출신인 그가 골품제도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체제개혁적인 유교적 정치사상을 가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최치원은 다른 여느 유자(儒者)들과 마찬가지로 ‘요순시대의 정치’를 강렬히 염원하였는데, 다음의 여러 글들을 통해 이같은 그의 경향을 알아볼 수 있다.
ꋯ 儒童菩薩의 좋은 가르침을 거양하여 기린이 때를 잃지 않게 함으로써, 上古(堯舜을 가 르킴)의 풍도를 잘 일으키고 大同의 化를 영원히 이루도록 한다.
ꋯ 반드시 요순을 前驅로 하고 禹湯을 後軍으로 하며, 五岳을 정원으로 하고 四海를 연못 으로 삼았으니, 성할진저! 아름다울진저!
ꋯ 요순의 다스림을 체험하여 능히 모두 좇도록 하고, 우탕의 興起를 본받아 틀림없이 勃 然하게 한다.
ꋯ 蠻夷를 바로잡아 堯舜의 風으로 돌아오게 한다.
ꋯ 현명한 신하는 그 임금이 요순의 정치를 이룩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 桂苑筆耕集 卷 1~19
이러한 최치원의 복고적 성향은 단순히 상고 때의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당시 극도로 혼란했던 당나라와 신라의 정치현실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요순시대의 건전하고 소박하고 정직한 정치로 돌아가자는 그의 爲國愛民의 유교사상의 발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大崇福寺碑序」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ꋯ 王者가 祖宗의 德을 기본으로 하여, 후손을 위한 계책을 준엄히 할 적에 정치는 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禮敎는 孝로써 우선을 삼는다 하니, 인으로써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보이고, 효로써 어버이를 높이는 典禮를 거행하며, 洪範에서 치우침이 없는것(無偏)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周詩에서 효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어야한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닦음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없애고,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듦에 있어, 하찮은 際儒라도 정결히 올림으로써, 두터운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젖게 하며,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치도록 한다.
이는 유교에서 이른바 ‘治人’의 요체가 ‘仁政’과 ‘禮敎’에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즉, 仁政은 대중을 구제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治者가 공평과 中正을 지켜 조금도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요, 禮敎는 인간 질서의 기본이므로 모름지기 孝로써 우선을 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효’사상에 입각한 정치를 무엇보다도 중시하여 ‘孝理’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孝治’야 말로 가장 기본적이고도 이상적인 정치였다.
또한, 최치원은 道를 실현하는 주체는 사람이고, 도는 정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역사의 추진 주체로서의 인간과 실현 방법으로서의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최치원은 사람이 天道를 받들고 이를 실천하여 道義社會를 구현함으로써, 인간 스스로 존귀하게 되는 경지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곧 도를 실천함으로써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도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천민합일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인간 스스로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물질에 다른 가치기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다분한 현대인들에게는 큰 시사를 던지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최치원은 분명한 유학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 보고자 하는 강한 포부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신라 말의 정치현실에 대해 염증을 느낄 정도로 몹시 실망하면서도, 끝내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은 다름아닌 ‘정치’라는 행위자체가 한 사회의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의 척도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이와같은 정치적 사상은 그가 제시한 「시무십여조」에 집약되어있다. 그러나 이 시무십여조는 현재까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허나 그것이 당시의 혼란한 신라를 개혁하고자 한 내용이었음은 능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시무책에 집약된 최치원의 정치적 개혁사상은 당세에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뒷날 고려 건국 과정에서 이념적 방향을 제시하고 지성인 집단의 사상적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고려 전기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실패한 정치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최치원은 仁政과 德治로서 그의 도덕적 정치관을 구체화시키면서 군주의 전횡과 무능을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간주하며 당시 유약에 빠진 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6두품이기 때문에 반진골적 성향으로 이러한 사상을 표출하였다기 보다는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갈망하며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고대했던 ‘군주론’에서의 마키아벨리와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정치체계의 구축을 강렬히 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국왕의 강력한 통치하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국가 사회의 난국을 극복하려 한 충정이었지 그들 자신의 입지기반을 확고히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방랑으로 일생을 마칠 지언정 지방의 호족세력과 결탁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고려후기의 급진개혁파와 같은 체제붕괴적 혁명이 아니라 관료제의 강화와 제도적 개편을 통한 합리적 해결책을 통해 신라를 구원해 보고자 하였고, 끝내 반신라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강한 지조를 지닌 철저한 국가의식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최치원을 통해 신라하대 유교지성의 일반적인 사상경향을 알아볼 수 있는데, 당시 6두품 지식인 상당수는 유교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무너져가는 신라를 붙들어 일으켜 국세를 회복하고자 하는 충정으로 지조를 저버리지 않고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현실에 대한 강한 애착심으로 護國濟民의 굳건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물론 일부 6두품은 반신라세력에 가담하였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6두품 지식인들이 반신라세력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당시 유교사상이 반신라적 지성을 배출하는 온상의 기능만을 한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Ⅳ.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종교관
앞에서 최치원의 정치사상을 살펴보았는데, 그는 또한 여러권의 역사서를 남긴 당시의 대역사가였다. 어떤 한 사람의 정치사상은 그의 역사관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치원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있는 일이다.
최치원은 유학자로서 經史一致의 학문적 경향과 장기간의 당나라 생활에서 얻은 역사서술체제와 그 방법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그는 신라말의 정치‧사회의 파탄에 대한 현실극복과 호족의 발호나 농민반란에 의한 왕권몰락에 대한 정치복원의 필요성에서 정치개혁의 바탕으로서 역사서술을 제시한 것이다.
최치원은 劉勰의 역사인식이나 그 서술방법을 기준으로 역사를 春秋의 예에 따라 ‘述而不作’의 정신과 후세의 교훈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전제는 중국 전통사학의 기본 방향이기 때문에 그 역시 복고적인 尙古主義를 통해 요순시대를 이상국가로 파악하였다. 나아가서 역사의 순환론에 따라 백제‧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도덕타락에 따른 ‘필연성’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의 혼란과 파탄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그 문제를 제기하고 시무책과 같은 개혁안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최치원은 그가 지은「제왕연대력」을 통해 한국사의 체계적 서술을 꾀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를 하나의 틀속에 묶어 신라사를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한 신라의 고유왕명(거서간, 차차웅 등)은 중국에 대한 신라인의 긍지와 東人意識의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한「현수전」이나「부석존자전」등을 통해 역사에 있어서 개인역할을 중시하는 동시에 개인전 서술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 속에서 최치원은 유교의 덕목과 예의를 통해 혼란극복의 정신적 근거로 삼으려 했으며, 화엄종의 포용의 정신을 통해 사회통합의 근거를 마련하려 하였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역할을 역사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왕‧신하‧백성간의 상호작용을 주요 역사서술의 내용으로 하였으며, ‘개인과 사회전체와의 상관관계’의 의미를 중요하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통일 신라중심의 역사를 체계화하는데 있어서 마한-고구려설을 주장하였으나,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로 이어진 당위성 위에서 한국사의 체계를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失德한 고구려를 정벌한 신라는 역사적으로 정당한 계승자라고 본 것이다.
특히 최치원은 한국사의 범위를 발해까지 넓혔으며, 역사서술체제나 방법을 제시하여 한국전통사학의 정착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그의 교훈론과 역사순환론과 같은 역사인식은 그대로 고려의 김부식으로 이어져 역사가 정치수단이라는 전통사학의 위상을 정립시켰는데, 이로써 그는 한국사학사의 한 위치를 당당히 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치원은 유교사상뿐 아니라 불교, 도교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다. 그 가운데 특히 화엄에 대한 이해가 심원했다. 법장화상전의 序에서 법장화상의 행적을 10개의 과목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화엄삼매관에 나오는 직심(直心)의 십의(十義) 즉, 광대심(廣大心), 심심심(甚深心), 방편심(方便心), 견고심(堅固心), 무간심(無間心), 절복심(折伏心), 선교심(善巧心), 불이심(不二心), 무애심(無碍心), 원명심(圓明心)에 맞춘 것이다. 논리적인 학문을 해온 그가 불교 사상의 핵심적인 논리를 보여주는 화엄경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화엄경이라는 교종에만 얽매이지 않았고 禪의 실천적인 면도 중시했다. ‘禪은 담박하여 맛이 없으나 모름지기 힘써서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다른 사람이 마신 술이 나를 취하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낭혜화상(朗慧和尙)의 말을 빌어 禪은 자득(自得), 자증(自證)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최치원은 智證大師碑序에서 남종선의 종취(宗趣)를 "수행하고 수행했으나 수행함이 없고, 증득하고 증득했으나 증득함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는 心心相印, 不立文字란 禪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도교에 대한 그의 깊은 식견은 "道는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진실로 탁마(琢磨)의 이치를 끊은 것이다"라는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진리의 본질이 언제나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면에서 至道를 알기 위해서는 성실성과 경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至道를 부지런히 행하는 자는 적고, 玄門을 닫는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유불도의 사상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실천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의 고유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가치를 세상에 언표했다는 점이다. 그가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풍류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설명한 데에는 그의 민족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는 東人意識이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을 했으면서도 외국 문화에 물들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 갖는 가치를 오히려 발견해 냈다. 동방이라는 방위가 갖는 의미, 그 동방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과 그 우수성, 동방에서 동방인이 세운 나라가 갖는 아름다운 명칭 등을 밝히고 언급함으로써 그 스스로 투철한 동방인의 의식 즉 주체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동방을 움츠려렸던 것이 다시 살아나고 새로운 싹이 무성하게 뻗어나와 생성, 변화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방위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천성이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고 부드럽고 유순하며, 서로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지적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조건이 어울려 우리나라가 군자의 나라, 어진이가 사는 곳, 太平勝地 등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러한 선민의식의 바탕이 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풍류도가 갖는 가치를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라에 玄妙한 도가 있으니 이를 風流라고 한다. 이 敎를 설치한 근원에 대해서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제로 三敎를 다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들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예컨대 집에 들어오면 집안 어른께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였으니 이는 孔子의 가르침이요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의 鸞郞碑序文에 나오는 이런 내용은 풍류도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최치원은 풍류도가 三敎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하여 우리의 고유한 사상 속에는 이미 삼교의 사상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풍류도의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을 보면 우리의 고유한 풍류도는 외래적인 삼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삼교와 일치되는 사상이 내재된, 독자적으로 형성된 고유한 사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충효적인 요소, 無爲, 不言의 요소, 爲善去惡의 요소가 풍류도에 모두 내포된 것이라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 갖는 선진성과 원융성을 찾아 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알게 된 상호 이질적인 사상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된 질서와 체계를 가진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로써, 정치‧사상‧종교라는 상호 다른 분야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유불도의 이념을 풍류도 하나로 묶을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은 '眞鑑禪師碑序'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사람이 다른 나라는 없다(道不遠人 人無異國)’는 발언을 하여 사상이나 진리의 보편성을 인간 본연의 바탕에서 찾았다.
이와 같이 최치원은 우리 사상이 갖는 원융성, 보편성, 그리고 다양성을 정확히 발견하고 그 우수성을 널리 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시 혼란한 신라말에서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관을 평가할 수 있다.
Ⅴ. 맺 음 말
역사를 바라 보는 입장이 단순히 옛것을 숭상하고 맹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12세의 어린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는 점은 신분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자기 개발에 그가 얼마나 투철했으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얼마나 숙고했는지를 말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자기 개발을 위해서 성실했던 자세, 우리 민족의 문예적인 우수성을 몸소 보여준 최치원의 역량을 우리는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하겠다. 특히 오랫동안 유학을 했으면서도 외국 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 사상의 우수성과 특징적인 체계를 찾아냈다는 점은 매우 중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고 현란한 문화와 사상일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구체적인 삶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풍류도라는 우리의 사상에 대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어 그 우수성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그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최치원은 우리 사상이 갖는 원융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일찌기 증명하여 우리가 세계문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예견하였다. 현대 우리 민족은 종교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의 각종 종교사상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념적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대립적인 두 사상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실정인데 장차 이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창조함으로써 인류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최치원이 보여준 주체적인 사상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움은 물론 세계적, 인류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정치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최치원은 거기에 맞게 대응하였다. 외국에 나가서는 이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물론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귀국해서는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하여 선정을 펴고 정무를 처리했다. 정치 현실에 나아가서는 현실의 개혁을 위하여 애썼고 물러나와서도 자기 스스로의 독선적 세계를 흔들리지 않고 견지해 나갔다. 결국 최치원은 자기가 처한 시간적 상황, 공간적 상황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몰두하기만 하다가 삶이라는 전체의 균형을 상실하는 현대인에게는 최치원의 균형잡힌 삶 자체가 하나의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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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 『최치원의 사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90.
이재운, 『崔致遠 硏究』 백산자료원, 1999.
한우근, 『韓國通史』 을유문화사, 1994.
이기백, 『韓國史新論 新修版』일조각, 1994.
조준하外, 『한국인물유학사 1권』 한길사, 1996.
한국사학회,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주류성, 2001.
출처 http://cafe.daum.net/law2000/51tf/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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