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게임=서형욱] 2005년 5월 5일 새벽. 아마도 대한민국의 유럽축구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박지성이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AC밀란을 상대로 골을 터뜨린 그 장면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이 경기에서 박지성과 이영표(그리고 히딩크)가 속한 PSV 에인트호번은 승리를 거뒀지만 원정골 우선 원칙에 의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상대 미드필더 암브로지니에게 만회골을 내준 것이 뼈아팠다. (당시 PSV를 제치고 결승에 오른 AC밀란은 아마도 축구사에 영원히기억될 '이스탄불의 기적'이 일부가 됐다. 결승전에서 AC밀란은 전반을 3-0으로 앞선 채 마치고도 후반 '마의 7분'에 3골을 내주더니 결국 승부차기에서 리버풀에 석패했다.)
당시 박지성의 골이 유럽축구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전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상대가 AC밀란이었다는 것.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던 유럽 최고의 명문팀, 그게 바로 AC밀란이 품은 이미지였다.
베를루스코니의 AC밀란 31년
이탈리아를 너머 유럽, 아니 세계 최고의 명문 클럽들 중 하나로 꼽히는 AC밀란의 소유주가 중국 자본으로 바뀌었다. 재정난에 빠진 AC밀란은 매각 대상이 된 지 오래였고, 관심을 가진 중국 자본이 등장해 인수 합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러던 어제, 최종적으로 인수 계약이 마무리됐다. 이미 중국 자본에 편입된 인터밀란에 이어, 이른바 '양대 밀란'이 이탈리아인들이 아닌 중국인들의 소유가 된 셈이다. 이로써 AC밀란은 긴 시간 팀을 소유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결별하게 됐다.
지난 1986년 AC밀란을 인수해 무려 31년 동안 오너십을 가졌던 베를루스코니는 오랫동안 AC밀란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세계 188위의 재력가(2016년 '포브스' 발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언론재벌이자, 세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수상을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한 베를루스코니는 위기의 AC밀란을 인수해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인물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인수할 당시, AC밀란은 재정난으로 정상적인 팀 운영이 어려운 상태에서 세리에A(1부)와 B(2부)를 오가는 팀이었다.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세리에B로 강등된 뒤 좀처럼 예전의 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막대한 부와 축구에 대한 열정(또는정치적 야욕을 위한 전략)을 과시한 베를루스코니 회장의 저돌성은 AC밀란을 단숨에 이탈리아 정상권의 팀으로 되돌려놨다.
1986년 2월, AC밀란을 인수한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리그 중상위권을 맴돌던 팀을 2시즌만에 이탈리아 챔피언으로 탈바꿈시켰다. 1988년, 디에고 마라도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나폴리를 제치고 9년만에 리그 정상에 복귀한 것이다.
인수 첫 두 시즌(1985/86, 86/87)을 7위와 5위라는 어정쩡한 순위로 마친 뒤, AC밀란은 베를루스코니의 자금을 앞세워 적극적인 영입에 나섰다. 나중에 '튤립 3총사'로 기억될 환상의 3인조가 AC밀란에 합류한 것도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였다. 1987년 마르코 판 바스턴을 시작으로, 이듬해 뤼트 훌리트와 프랑크 레이카르트까지 영입한 AC밀란은 이 3명의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들을 앞장 세워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밀란
첫번째 전성기 with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이렇듯 발빠른 상승세의 원동력은 베를루스코니의 정력적인 투자와 열의라 볼 수 있는데, 이른바 '베를루스코니스모(Berlusconismo)'라는 별칭까지 얻은 AC밀란의 저돌적인 선수 영입 정책은 당시로선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를테면, PSV 소속의 뤼트 훌리트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기존 급여의 3배를 보장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이 무렵 베를루스코니가 단순한 '물주'가 아닌 '축구 클럽 회장'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선수가 아닌 감독이었다. 1987년, 베를루스코니와 AC밀란은 당시로선 무명에 가까운 지도자인 아리고 사키를 감독 자리에 앉히는 용단을 내렸다. 프로 선수 경력이 없다시피한사키는 베를루스코니에 의해 AC밀란 지휘봉을 잡기 이전까지 세리에B 파르마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파르마를 3부에서 2부로 끌어올리며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긴 했지만 리그 최고 명문 중 하나인 AC밀란의 감독직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도자로 보였다. 현지 언론들도 "제대로 된 선수 경력도 없는 사람은 감독으로 성공할 수 없다"며 베를루스코니의 결정을 비난했다.
하지만 컵 대회에서 파르마에게 0-1로 패한 경기를 보며 사키 감독에게 푹 빠진 베를루스코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키는 부임 첫 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AC밀란을 이탈리아 정상에 올려놓으며 베를루스코니의 선택에 보답했다. "경마 기수가 되기 위해 먼저 경주마가 될 필요는 없다"던 사키의 호언장담이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AC밀란의 베를루스코니 시대는 이처럼 긍정적인 기운 속에 출발했다. '튤립 3총사'를 앞세운 사키의 밀란은, 적극적인 압박 축구로 이탈리아를 너머 유럽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사키 감독 체제의 AC밀란은, 그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직을 맡기 위해 팀을 떠난 1991년 여름까지 4년 동안 리그, 슈퍼컵,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유럽 슈퍼컵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특히 유러피언컵에서는 89년과 90년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클럽 자리에 올랐다.
사키의 뒤를 이은 것은 파비오 카펠로였다. 선수 시절 뛰어난 미드필더였던 카펠로는 사키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AC밀란 전성시대를 이어 나갔다. 카펠로는 58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비롯, 리그 3회 연속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빼어난 성과를 올렸다.
베를루스코니의 밀란
두번째 전성기 with 카를로 안첼로티
베를루스코니 체제에서 또 한 번의 전성기는 21세기와 함께 찾아왓다. 사키 감독 시절 미드필드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안첼로티가 부임한 2001년, AC밀란은 몇 해 간의 부진을 딛고 다시 정상을 향해 발돋움한다. 베를루스코니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안첼로티는 선수들과 구단 수뇌부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고, 세대교체 실패로 지지부진하던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수선하던 스쿼드를 재정비하고 셰브첸코와 인자기 콤비로 공격을 일신한 AC밀란은 2003년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유벤투스를 꺾고 우승하며 9년만에 유럽 정상에 재등극한다. 그리고, 이듬해 브라질에서 카카를 영입해 이번에는 이탈리아 리그 정상에 오르며 또 한 번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카카가 합류한 뒤 AC밀란은 더욱 강해졌다. 피를로와 가투소가 중원을 장악하고 카푸의 오버래핑을 빛을 발하던 무렵, AC밀란은 단연 유럽 최강자로 꼽혔다. 2005년 5월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리버풀의 극적인 승리로 끝나며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렸던 것은 당시 AC밀란의 위상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윙어가 없는 4-3-3 또는 4-3-2-1 포메이션으로 강력한 축구를 보여준 AC밀란은, 2007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꺾고 5년만에 유럽정상에 올랐다. 안첼로티의 AC밀란은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가 유럽을 제패하기 이전 가장 강력한 팀으로 기억된다.
베를루스코니와 AC밀란, 그 애증의 관계
최근의 AC밀란은 과거의 위용을 잃어버린 상태다. 2011년 리그 우승 이후 점점 내리막길을 걷는 밀란의 성적은 선수단에 대한 투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뒤인 2013년 이후 급전직하해 이제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조차 버거운 중위권 클럽으로 전락했다. 재정난으로 매각이 결정될 정도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2014년 8위, 2015년 10위까지 떨어졌던 AC밀란의 리그 성적은 지난해 7위를 거쳐 올 시즌 현재 6위에 머물러 있다.
베를루스코니가 오너십을 갖고 있던 지난 31년 동안, AC밀란과 베를루스코니의 관계는 순수한 '축구'만으로 맺어졌다고 보기 힘든 사이였다. 축구단을 인수한 뒤 정계에 진출해 정점인 수상까지 역임했던 베를루스코니에게 AC밀란은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이자 대중의 마음을 얻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AC밀란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정치인 베를루스코니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축구단에 대한 투자의 리듬이 절묘하게 일치했던 것, 그리고 정치 생명이 사실상 끝난 이후 최근까지 AC밀란에 별다른 애정을 쏟지 않은 것은 그러한 견해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AC밀란이 유럽 축구사에 그은 큰 획 중 여럿이 베를루스코니 덕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중동과 중국의 엄청난 자금이 쏟아들어오기 이전, 베를루스코니는 부유한 개인의 영향력이 기반을 갖춘 축구팀과 만났을 때 달성 가능한 많은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축구팬들에게 축구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수 많은 정치적 실수나 몰염치, 축구단을 정치에 이용한 여러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AC밀란 팬들에게 그는 한마디로 애증의 대상인 것이다.
베를루스코니가 떠난 이후의 AC밀란이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와 동일시되었던 AC밀란에게, 소유권 변경은 분명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축구사에 굵직한 기억들을 남긴 AC밀란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