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떡
우리 마을은 역사가 500년이 넘는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100여호쯤 되는데 지금이야 그 의미가 없어졌지만 불과50년전만 하더래도 계급차가 엄격히 존재했던 곳이지요.
서울떡은 그중 몰락한 양반댁 종부입니다.
서울 종로 태생으로 손에 물한방울 안묻히고 곱게 자라다 시집오셨지만 어르신은 후생도 남기지 못하고 30년전쯤 폐결핵으로 타계하셨습니다.
그러나 맘이 비단결처럼 고운 아줌니는 정신 지체아와 장애아들을 네명씩이나 거두어 키우고 있고 이미 키워서 장성한 자식이 8명이나 있습니다.
청상에서 지금까지 조그만 땅덩어리에 의지해서 그 많은 자식들을 모두 키워냈지요.
절로 존경이 가는 분인데 60이 다된 지금도 웃으실땐 손으로 입을 가리는 수줍음이 더 아름다운 분입니다.
*배미떡
어렸을 때 마을 앞 칠보산-마지막 파르티잔이었던 이 현상 선생이 암약했던-에서 굴러 바위에 머리를 다쳤습니다.
그 후 맑은 정신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힘이 천하장사이기도 한데 작년 가을, 바쁜 수확철에 나락 한가마를 가볍게 들어 트럭에 옮겨 실더군요.
그때 그 분의 팔뚝에 생기는 굵은 힘줄...(음메, 기죽어!!)
자녀를 열하나 두었는데 그 중 아홉이 성혼하여 잘 살고 있어 아줌니의 표현으론 "나가 대한민국서 질루 팔자 존 할매다"
`며느리 밑닦게`란 풀이 있습니다.
손바닥처럼 생겼는데, 이파리와 줄기에 가는 가시가 아주 많아서 손등에 문지르면 엄청 따갑고 벌겋게 부어 오르는 풀입니다.
그 옛날 종이가 귀하던 시절,뒷간 갈때 `이쁜 딸에게는 콩잎을 주고 미운 며느리에게는 이 풀을 준다`고 했지요.
어디서 이말을 들은 배미떡 아줌니,과수원에서 일하다 갑자기 뒤가 급해지자 무작정 숲으로 뛰어갔습니다.
근데 너무 급하게 오느라 휴지를 못챙겼지요.
제가 과수원에 있어 남사스럽게 큰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마음만 급해진 배미떡 눈앞에 지천으로 깔린 며느리 밑닦게가 이런 때 쓰이는 풀이라고 언뜻 들은것 같기도 하여 과감하고 신속하게 뒤처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원 끝쪽에서 열씨미 일하는데 실용리떡 아줌니가 목청껏 불러 뛰어 가보니
"미루 아빠, 야 좀 싸게 병원에 데려가소."
"왜요?"
"남정네헌티 말허긴 쪼매 뭣헝께로 그냥 병원에 가서 으사아피다 밀어 넣고 피가 많아 난다고 혀. 그럼 지가 알어서 헐팅께."
"근디요, 병원도 내과가 있고 외과가 잇는디, 어디로 갈까라?"
"염병, 아 아무디고 가란 말여. 그냥 종삼의원(정읍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에 데려가소, 싸게."
사실 이렇게 쓰다보니 우리 마을이 궁벽한 산골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정읍 시내에서 승용차로 불과 5분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삼병원에 허걱대고 갔더니 잠시 배미떡 아줌니의 말을 듣던 의사가 하는 말,
"저.. 항장외과로 가야겠는데요."
느~~~~~~~을바람님, 떡이 왜 붙냐면요. 서울댁, 배미댁 할때 그 댁을 우리 마을선 그렇게 발음 허는디요.
그라고 여긴 전북 정읍, 다 아시지라? 내장산과 갈재(가을 고개-장승과 북으로 유명), 망부상과 정읍詞歌, 칠보산과 수청리 맑은물, 전봉준 선생과 황토현, 그 피맺힌 함성, 함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