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걷고 있다]
가을 들판에 앉아 몇 알 달리지도 않은 팥들을 딴다. 약간의 바람은 불지만 가을 햇볕에 등짝이 따사롭다. 올해는 유난히 때 아닌 비가 잦아 농작물의 결실이 시원찮다. 풀 뽑고 애지중지 키운 들깨도 작년보다 서말이나 덜 나왔다. 팥도 마찬가지다. 희한 것은 콩이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 한 번 심어 놓고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는데 아주 다닥다닥 잘도 달려 여물었다. 콩을 베어 말릴 자리로 나르는 걸음이 신이 난다.
사람들 얘기 듣다 보면 인생사도 마찬가지. 많은 돈 들여 공부시키고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자식 제대로 풀리지 않아 속태우고 그냥저냥 키운 자식 성공하여 잘 사는 모습에 흐뭇해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뒤로 하고 서둘러 느즈막한 점심을 먹었다. 오후 성환천 라이딩을 나갈 생각이었다.
성환천을 끼고 천안 성성호수까지 달리다 보면 오늘 같이 청명한 날에는 칠장사를 품은 칠현산에서 시작하여 석남사와 청룡사가 자리잡은 서운산을 거쳐 위례산, 성거산,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완만한 능선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 오게 된다.
금북정맥이 품고 있는 땅들은 넓고 평화롭고 온화하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 안성, 평택, 천안, 아산, 당진, 서산쪽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긴장을 많이 풀게 된다. 거칠지 않고 소박하고 그렇게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인성이 원만한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완만한 산맥이 주는 자연적 영향일지도 모른다.
커피 한잔 하고 소파에 잠시 누운 사이 스르르 잠이 들고 깨어보니 오후 5시다. 오늘 외출은 이미 글렀다.
뒷 베란다로 바깥을 내다보니 삼성전자평택캠퍼스와 고덕신도시가 손에 잡힐듯이 눈에 들어오는데 벌써 서늘해지는 저녁 무렵이다. 까닭은 모르지만 저 멀리 한반도 남단 남파랑길을 홀로 걷고 있는 그 남자가 갑자기 떠오른다.
일기도 변화가 심하고 나이도 많은데 월요일부터 이번 일요일까지 트래킹을 한다고 하니 대단하다. 기차를 이용했나 했더니 승용차로 왔단다. 부부가 함께 하는 줄 알았다. 쓸쓸하지 않느냐고 엊그제 물었더니 “외로워서 인간이다” 라고 다소 그답지 않은 철학적 답을 한다. “괜찮여~” 를 예상한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저녁이 되니 숙소에 들어 왔나, 식사는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하여 연락을 해보니 역시 그는 프로였다. 호텔급모텔에, 점심은 맛집을 검색하여 즐기고 있단다. 오늘은 방문한 맛집에 허탕을 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 사실 아는 사람들의 전화나 안부를 묻기가 쉽지는 않다. 아프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무심결에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괜한 어색함 등등으로 망설임에 압도 당하게 된다.
가을 밤길을 걷다 이런 글을 혼자 쓴 적도 있었다.
[가을 독백]
늙어서
옛사람들 안부를 묻지 마라
죽었다 할까 조심스럽다
늙어서
옛사람들 안부를 묻지 마라
아프다하면
염려와 위로 몇 마디
나도 아픈데 어찌할 것인가
늙어서
옛사람들 안부를 묻지 마라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공허한 약속
돌아서면 허전하다
늙어서
옛사람들 안부를 묻지 마라
무심결에 드러나는
은근한 노년 자랑
내놓을 것 없는 작은 인생
초라하게 흩어진다
아직도 더 늙어야하나
이래도 저래도
언제나 쓸쓸함은 남는다
늙어서 굳이
옛사람들 안부를 물으려 하지 마라
우연히 들려오면
바람처럼 흘려 보내고
억새풀
함께 흔들리는 갈대숲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호~올 홀
가볍게 살다 가거라
…………
어둠의 밤이 걷히고 햇살이 환히 떠오르면 그래도 사람은 사람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나 … 가끔은 연락하고 살아가보자.
그 남자에게 전화하길 잘했다. 항상 새로움을 찾아 느끼고, 감동하고, 탐구하고, 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그의 타고난 도전정신에 감탄하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생생하고 밝고 자신감에 넘쳤다. 부럽다. 통화 중 그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호텔방의 적막한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통화를 마친 내 마음에 외로운 여운이 남지는 않았을거다. 시끌벅적한 선술집 순대국밥이나 생맥주 통닭집 , 아니면 사이키델릭한 시끄런 배경 음악이라도 배경에 깔려 았었더라면…
그는 일상을 무료하게 적어도 무의미하게 지내는 사람은 아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 의사 결정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삶의 보람을 만들고 키워가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다.
칠순이 넘어서도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른다. 언젠가 한 번 부러운 마음을 내 스스로 달래 보려고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맨날 저렇게 돌아다닐까“ 하고 애써 폄훼하는 생각을 지어본 적도 있었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인생은 역시 새로움과 호기심을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그의 열정의 삶에 찬사를 보낸다.
가을 밤길을 걷다가 노년기에 무엇이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다.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첫 째요. 문예 예술 활동으로 자신의 세계를 두텁게 하는 사람이 둘째라. 이도저도 아니면 잘 먹고 잘 살고 잘 노는 것이리라. 아래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인가?
한 때는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일시 이러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긍정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약하고 아주 나쁜 것이 아니었나? 나의 약점, 강점, 기회요인, 위험요인 등을 제대로 알고 학교생활을 잘 하라는 의미였겠지만 한참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에게, 대다수가 힘들고 어렵고 어쩌면 빈한하기 짝이 없는 형편의 아이들에게 너의 환경을 알고 까불지 말고 조용히 지내다가 현실에 맞게 공장에 가고 기술 배워서 먹고 살아라 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중학교만 나와 공장에 다니다 기술 배우고 그에 알맞게 살았으면 삶의 정신적 세계가 더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시각으로 생각하는 나의 정신세계도 문제가 큰 것은 사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그런 생각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 의미가 없다. 건강하게 살면서 항상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열정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인도 문화예술인도 여행작가도 농사꾼도 그 누구도 아무런 우열의 순서가 없다. 열심히 살아가는 나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제야 터득한 듯… 보다 솔직해지자. 순수해지자. 길대밭 숲길을 달리듯 가볍게 가볍게 가을 밤하늘을 걷자.
그 남자가 온 것이다.
남파랑길을 홀로 걸으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그 남자가 오늘은 내게 온 것이다. 나도 밤하늘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누가 내게로 올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