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아버지의 집 전윤희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죽으면서 내게 유산을 남겼다고 했다. 이복동생이라는 젊은 남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키가 180센티미터는 족히 됨직한 그는 입 언저리가 내 아들과 닮아있었다. 그는 나보다 열 살 가량 어려 보였다. 벽을 훤하게 튼 유리창이 투명한 카페에서였다. 유월 햇살의 세밀한 결까지 다 보일 듯했다. 한 무더기의 햇살이 그 남자의 얼굴에서 부서졌고 그 위에 다시 햇살이 쏟아졌다. 스피커에선 비틀스의 ‘헤이 쥬드’가 들렸다. 헤이, 쥬드.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구……. 여느 때 같으면 흥얼거렸을 익숙한 곡이다. 하지만 지독히도 어색한 시간이었다. 그는 오렌지 주스가 들어있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내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라는 듯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밝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음에도 그의 까칠한 얼굴은 초췌했다. 가평에 있어요. 아버지가 재혼하시기 전이라니까 아마 아실 텐데요. 젊은 남자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 가물가물하다는 표정으로 응답했다. 실제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가평에 아버지가 땅을 샀었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 땅에 집을 지었다고? 나는 한동안 혼자 골똘했다. 저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그가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며 흘리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성역이라도 되는 양, 그 곳엔 늘 혼자 가셨죠.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성역처럼 지켜 온 가평 집을 내게 물려준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은 것일까? 그가 내다보는 창 너머로 연초록의 신록이 눈부셨다. 카페가 면한 공원에는 몇 무리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펄럭이는 스커트 속의 두 다리에 힘을 팍팍 줘가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여자 애들. 미니 자동차를 하나 빌려서는 서로 타겠다고 밀쳐대는 어린 남매. 벤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 밖은 한없이 경쾌해보였다. 오직 그와 내가 자리한 탁자 위의 공기만 지구만큼 무거웠다. 이번엔 내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의 눈치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이상할 만큼 그 남자에 대해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먼 타인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엔 분명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눠져 있을 텐데, 나는 조금의 친밀감도 조금의 질투심도 느끼지 않았다. 아마도 내 속에 흐르던 아버지의 피가 다 말라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남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남편에게 먼저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가 내놓은 은빛 열쇠꾸러미와 주소가 적힌 종이가 난감했다. 양평 이모 집에 살고 있는 엄마에게 알리는 것은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두 노인네가 손바닥만한 텃밭을 메며 모자랄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는 듯 이루어낸 척박한 평화를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행선지도 정하지 못한 채 내 앞에 정차한 택시에 올랐다. 삼성동이요, 아니 사당동이요, 아니 삼성……. 어딜 가냐고 운전사가 두 번째 물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과 신경질이 뒤섞여있었다. 나는 무안한 듯 과천이요, 하고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여느 때 같으면 남편과 점심을 먹으며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은 그럴만한 문제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나 자신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그에게 불쑥 들이밀 수는 없었다. 묵직한 열쇠꾸러미와 낯선 주소와 함께. 영주의 작업실은 과천 정부종합청사 근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근처 어느 오래된 건물 지하에 있었다. 어둡고 눅눅한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는 시커먼 물체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만한 생쥐였다. 소름이 살갗에 파르르 일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속이 메스꺼웠다. 집으로 곧바로 가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무난한 집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남편보단 가난하고 난폭한 부모 밑에서 어두운 유년을 보낸 영주가 이럴 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너를 버린 아버지가 너한테 집을 남겨주고 죽었단 말이지? 횡설수설 비슷하게 그 남자를 만났던 일을 찔끔찔끔 흘렸는데 영주는 단칼로 자르듯 한마디로 정리했다. 나는 나를 버렸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간단하네. 팔아버려! 그녀의 ‘팔아버려’는 너무도 쉽고 힘이 넘쳤다. 팔아서 너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진우 먹고 싶은 거 사주고 다 써버려.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 본래 영주는 거침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영주는 그리던 만화를 계속 그렸고 나는 주전자에 물을 받아 브루스타에서 끓여냈다.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가 내 몸속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널브러져있는 커피 믹스로 두 잔의 커피를 만들었다. 영주가 일하고 있는 책상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어댔다. 안 그래도 바지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꾸러미 때문에 가슴까지 묵직했다. 어째 이 여자 애 슬퍼 보인다. 나는 영주가 그린 눈만 덩그렇게 큰 여자 아이를 보며 말했다. 여느 만화에서처럼 아이는 얼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인공이 아닌지 예쁜 느낌은 없었다. 글쎄. 요만한 여자 애가 슬프다면 어느 정도 사연이면 되는 거지? 영주는 책상 위를 손으로 더듬어 무언가를 찾았다. 책상이 하도 어수선해서 뭘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 뭉치며 볼펜이며 사인펜 등을 한 번 더 흩어버리더니 영주는 책상서랍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도 담배생각이 났으나 자제했다. 7년 동안 지켜 온 금연을 깰 수는 없었다. 대신 커피를 조금씩 홀짝거렸다. 괜히 네 마음이 뒤숭숭하니까 온갖 게 다 그렇게 보이는 거야. 이제 와서 네가 감상에 젖을 필요가 뭐있냐? 네가 아버지가 없어서 특별히 안 된 것도 잘된 것도 없잖아. 그냥 편하게 생각해. 돈 없는데 이게 웬 횡재냐 생각하고 팔아서 쓰면 되지. 아버지한테 손해 본 기분이 든다면 이걸로 샘샘이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담배를 빨아대는 동작과 말을 내뱉는 동작이 얽혀 영주의 목소리가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영주는 다시 작업을 했다. 내 시선은 그녀의 크고 거친 손이 슥슥 그어대는 선을 의미 없이 따라다녔다. 만화 속 여자 아이의 커다란 눈에선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열 한 살쯤이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났다. 아버지와 엄마는 언제나 극적으로 싸우고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들의 싸움은 무섭고 불안하고 지긋지긋했지만 그 끝자락엔 화해를 위한 기발한 이벤트가 준비되어있었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날 밤에도 그들은 그렇게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 전처럼 또 화해를 할 것이라 믿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설렜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떠난 아침, 나는 늦잠을 잤다. 뒤늦게 일어나보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엄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회사에 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밤이 되면 다시 술 취한 벌건 얼굴로 돌아와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아팠다. 자꾸만 늦잠을 자서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이불을 들추고 왜 안 깨웠냐고 떼를 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불 속의 엄마가 동굴 속의 사자처럼 무서웠다. 오후가 한참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사실은 위장이 비었을 텐데 마음이 텅텅 빈 것처럼 쓰라렸다. 인형의 갈색 머리를 빗고 또 빗으면서 마음대로 땋아지지 않는다고 머리채를 잡고는 몇 번이나 휙 던져버렸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는 막막함에 늙은이처럼 한숨을 쉬어댔다. 그날 나는 한없이 나 자신만 원망했다. 눈치 없이 늦잠을 잤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떠나간 후, 나는 한동안 옥수수통조림과 식빵만 먹어야했다. 엄마는 우유를 사다놓는 것도 잊었다. 식빵은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가 생겼다.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앉은 식빵조각을 엄마는 덤덤히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박스채로 들여놓은 옥수수통조림은 먹어도 먹어도 다시 상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하얀 사기그릇 안에 담겨진 노란 옥수수 알갱이들은 애벌레들처럼 징그러웠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헤어진 남편에 대한 욕지기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몹시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엄마와 사는 한, 금기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내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으나 그건 같은 여자로서 엄마에 대한 배려거나 혹은 생존과 관련된 자기 보호 본능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서 조차도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대학 1학년 교양영어 시간이었다. 초록색 눈의 영어강사가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굴 더 좋아하냐고 물었다. 유치원 아이에게나 어울림직한 물음이 내 중간고사 인터뷰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같은 물음을 다른 학생에게 던졌더라면 위트 있게 넘겼을 텐데, 나는 사뭇 진지하고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를 사랑한다. 하지만 엄마를 이해한다.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이 나를 더 당황스럽게 했다. 나는 왜 엄마가 아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을까? 아버지 없이 자란 내 형편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무의식속에 자라고 있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그날따라 유독 나를 잡아끌기라도 한 걸까? 그 착잡하고 혼돈된 기분을 떨어내기 위해 나는 그날 밤 좋아하지도 않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박자도 맞지 않는 춤을 추었다. 그 무렵 나는 엄마의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골초였던 엄마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만은 지독히도 싫어했지만 나는 결혼 전까지 몰래몰래 피워댔다. 그렇게 떨어낸 아버지의 기억을 그 젊은 남자가 강요하듯 쥐어주고 갔다. 묵직한 열쇠꾸러미와 낯선 주소와 함께. 치사하게.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갑자기 영주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팔기 전에 한번 가볼까? 애들도 데리고. 그녀는 소풍이라도 가려는 사람처럼 생글거렸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주의 작업실을 나오는데 영주가 그린 만화 속 슬픈 여자 아이가 나를 따라붙었다. 떨쳐버리려는 듯 나는 어깨며 팔을 툭툭 훑어 내렸다. 그런데도 잔영처럼 머릿속 한구석에 들러붙었다. 나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가평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을 팔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열쇠를 되돌려주기 위해 그 남자를 다시 만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열쇠를 수장시켜버릴 것이다. 없었던 것처럼. 그 집도 그 남자를 만난 기억도 잊어버릴 것이다. 남편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게. 이제 와서 아버지로 인해 내 삶이 흔들릴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 남자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진우가 오줌을 싼 이불을 베란다에 널고 있었다. 전화벨이 일곱 번 울린 다음에야 나는 겨우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는 막 끊어지려는 참이었는지 여자의 목소리가 엇박자처럼 들려왔다. 오빠를 만나셨다구요. 가평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대해 들으셨겠지요? 오빠는 아버지가 당신에게 그걸 물려줬다고 얘기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요. 분명히 제 몫도 있으니까요. 나보다 열 살 가량 어릴 여자는 당돌했다. 여자는 날카롭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뱉어놓곤 시치미를 떼듯 한동안 잠잠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의 숨소리도 그렇게 들릴까봐 나는 일부러 숨을 죽였다. 갑작스런 그녀의 전화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먹구름 한 조각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 구름이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가까이 번져가는 것을 조금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맑을 줄 알았던 하늘에 불시에 나타난 먹구름만큼이나 여자의 목소리는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잘못 걸려 온 전화를 어쩔 수 없이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마지못해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나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어요. 아버지의 그 알량한 집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어요. 당신이 그 집을 송두리째 가져가게 내가 놔둘 것 같아요? 나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남겼다는 집도, 그 아버지에게 쌍둥이 남매가 있다는 것도, 그들이 차례로 내게 접촉해온 것도 다 먼 나라 얘기 같았다. 당신이 끝까지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법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지요. 여자는 성난 사람처럼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아니, 몹시 성이 나있었다. 뚜뚜뚜뚜 하는 신호음이 시끄럽게 이어졌다. 나는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수화기를 든 팔이 저려오면서 서서히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의 책상 서랍을 뒤졌다. 서랍 안쪽에 담배가 두 개비 들어있는 담뱃갑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뽑아 물곤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자 식도로 매운 연기가 퍼져오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몽롱했다. 창밖으로 마침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베란다엔 이불이 널려있었다. 하지만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나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베란다가 아닌 안방으로 갔다. 옷장 문을 열었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을 뒤적거리며 젊은 남자를 만났던 날 입었던 베이지색 바지를 찾았다. 그 주머니 안에 열쇠와 주소가 적힌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남자가 주고 간 사각으로 두 번 접힌 종이를 처음으로 펼쳐 보았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309번지. 나는 그 생경한 주소를 오래토록 노려보았다. 그날 밤 나는 영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평에 갈 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차가 공장에 들어가 수리중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차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시 내가 말했다. 차가 나오는 날 가평엘 가자. 나는 낮에 하지 못한 말을 다 해버리겠다는 듯, 화풀이 하듯이 영주를 다그쳤다. 영주는 잠이 덜 깼는지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러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계집애야, 미쳤어? 다 늦게 왜 전화질이야.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죽은 네 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대? 탁자 위의 시계는 새벽 두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며칠이 평소처럼 지나갔다.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그랬다. 나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진우를 유치원에 보내고 청소를 했다. 저녁에는 조기를 굽고 콩나물을 무치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남편은 내가 좀 날카롭다고 느꼈을 것이나 그건 배란주기에 접어든 까닭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이 엄마가 한번 전화했다. 나는 엄마의 건강에 대해서만 묻고 남편과 진우의 안부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는 대부분의 에너지는 그 여자가 내뱉은 ‘권리’라는 단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단어는 한 번도 아버지가 참석한 적이 없었던 네 번의 졸업식을 떠올렸다. 가장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집을 비워야했던 엄마를 기억시켰다.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어스름한 저녁의 고독하고 불안했던 시간을 상기시켰다. 그 단어는 나뭇잎을 갉아먹는 송충이처럼 나를 갉아먹었다. 식도의 막을 갉아먹어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쓰라렸고 위액을 농축시켜 명치끝이 단단하게 조여 왔다. 송충이들은 뇌 속에도 침투했다. 나는 시도 때도 없는 편두통에 시달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지겹도록 먹었던 옥수수 알갱이들이 애벌레로 변하여 내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담배를 사다 피기 시작했다. 첫 날은 한 개비. 그 다음 날은 두 개비. 그 다음부턴 숫자를 세는 대신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방향제를 뿌리고 환기를 시키는 것에 신경을 썼다. 나는 인터넷에서 찾은 가평소재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평당 시세를 물어보고 매매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아봤다. 영주에게 전화를 걸어 가평에 갈 수 있는 시간을 비우라고 닦달했다. 영주는 가평집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하냐고 구시렁거렸다. 나는 영주의 차가 공장에서 나오는 대로 가평에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주의 차가 나오기로 한 날, 영주는 술병에 걸려 꼼짝을 못했다. 일부러 진우를 유치원에 보내지도 않고 영주의 전화만 기다리던 나는 진이 빠져버렸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은 것을 그날 처음으로 후회했다. 나는 허탈감에 망연히 앉아있었다. 그 때였다. 그 남자의 전화가 온 것이. 남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제 동생이…… 전화를……드렸다고…… 이제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 집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지요. 나와 함께 가보겠어요? 그 남자와 나, 진우 이렇게 세 사람이 가평 집에 간 날은 한차례의 여름 장마가 지난 후였다. 우리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정체된 도로를 지나갔고, 유원지 가는 길답게 줄줄이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을 지나갔다. 진우는 잠이 들었고 그는 말없이 운전을 했으며 나는 창밖으로 호수를, 시골길을 바라보았다. 중간 중간 나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나와 동행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실은 내가 그 곳을 서둘러 가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당장 가평 집을 팔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제 맘대로 전화를 걸어 나를 휘저어놓은 여자에게 벌을 주고 싶었을까. 어쩌면 언젠가처럼 아버지의 유전자가 나를 잡아끌었는지도 몰랐다. 위태롭고 좁다란 다리를 건너면서 차가 몹시 흔들렸고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폐교가 된 시골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 한참을 간 후에야 아버지의 집이 나타났다. 아버지가 죽은 건 6개월 전이라고 했는데 가평에 있는 집은 엊그제 다녀 간 것처럼 깔끔했다. 문이 꼭꼭 잠겨있어서인지 손으로 훑어보았으나 손끝에 먼지가 묻지 않았다. 외관도 멀쩡했다. 주황색 기와지붕은 방금 물감을 칠한 수채화처럼 산뜻했다. 아버지 혼자 관리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층으로 된 집은 단아했다. 선홍색 칸나가 집채를 둘러싸고 있었고 키가 큰 밤나무 두 그루와 대추나무 세 그루가 마당의 경계에 서있었다. 밤나무에는 푸른 밤송이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있었다. 진우가 집 앞에서 빈 새장을 발견했다. 철제 새장은 분홍색 페인트가 칠해져있었다. 그 안엔 나무로 만든 새집이 있었다. 진우는 혹시 새가 들어 있을까봐 엉덩이를 쳐들고 고개를 숙이곤 새집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흔적은 없었다. 깃털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조금 작은 방이 하나, 그리고 조그만 부엌과 커다란 마루가 있었다. 작은 방에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진우가 기다란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 위에는 바다 속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가오리, 상어, 해파리, 문어……. 수없이 많은 화려한 색을 입은 바다생물체들이 유영하는 짙은 바다. 우연인 것처럼 나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했다. 거기엔 내 열 살적 생일이 들어있었다. 여느 때처럼 술이 건하게 취하여 들어온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선물. 아버지는 술을 마신 뒤에 선물을 골랐을까? 선물을 고른 뒤에 술을 마셨을까? 여든 여덟 개의 조각으로 된 퍼즐은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메이드 인 유에스 에이였다. 진우가 상자 속의 퍼즐 조각을 엎어버렸다. 순식간에 마루 한편이 복잡해졌다. 퍼즐의 현란한 색깔은 아이의 눈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는 퍼즐은 간단치 않았다. 진우는 미궁에 빠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때 그랬을까? 그런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을까? 나는 술 냄새 나는 얼굴로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연구에 들어갔을 아버지를 그려보았다. 남자가 진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상자 뚜껑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몇몇 조각들이 엮여졌다. 남자와 진우는 퍼즐 맞추는 일에 점점 빠져들었다. 나는 뒤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집 뒤편으로 흐르는 개울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마가 지나간 개울은 물이 풍성했다. 그 위로 때를 만난 잠자리들이 여유롭게 날아다녔다. 개울가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매미는 쉬지 않고 울어댔고, 차고 넘칠만한 물이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흘렀다. 저 쿨럭이는 소리가 멈춘 적도 있었을까. 진우가 달려와 말했다. 물놀이해도 돼? 물이 깊어서 안 돼. 수영도 못하잖아. 저기 튜브도 있던데? 아저씨가 같이 놀아준다고 했어. 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칭얼대며 졸라댔다. 조금만 하고 와. 진우와 남자가 떠난 자리에 물고기들이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상어는 배가 뻥 뚫어진 채였고, 해파리도 한 귀퉁이를 찾지 못한 채, 전체를 이루는 큰 덩어리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얼추 바다 속 풍경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남아 있는 퍼즐조각을 몇 개 더 맞췄다. 문어 한마리가 빨판이 툭툭 튀어나온 여덟 개의 다리를 흉물스럽게 꿈지럭거렸다. 붉은색의 산호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는 진우와 남자가 물싸움 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들 옆에 튜브가 놓여있었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는 튜브엔 주황색 빨랫줄이 묶여 있었다. 지나간 화면처럼 어느 여름날의 오후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나를 튜브에 태우곤 빨랫줄로 묶어서 물위에 둥둥 띄웠다. 물살이 세서 떠내려 갈까봐 빨랫줄 한쪽이 아버지의 손에 칭칭 감겨져 있었다. 어린 내가 질러대는 소리가 물소리에 묻혀 아득했다. 어느새 젊은 엄마가 튜브에 앉아있었다. 엄마는 고개를 젖혀 머리를 물속에 담그곤 눈을 감았다. 엄마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물결을 따라 흘렀다. 엄마의 나긋한 표정이 왠지 도도해 보였다. 엄마는 한여름의 오후를 다 차지한 것 같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두 손 가득 물을 담아선 엄마의 얼굴에 뿌렸다. 엄마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그들의 격렬한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옆에서 단발머리 아이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오려다 나는 벽 한 편에 붙어 있는 그림을 보았다. 16절지 종합장을 북 뜯어서 그렸는지, 스프링에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들쑥날쑥한 홈이 팬 종이가 너덜너덜하게 남아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 속에는 주황색 지붕에 붉은 벽돌을 한 가평 집이 그려져 있었다. 집 앞으로 빨간색 꽃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고 이름도 모를 나무들이 정확히 다섯 그루 서있는. 그 나무 하나에 분홍색 새장이 걸려있었다. 그 속엔 노란색 새 세 마리가 부리를 한껏 벌리고 있었다. 어쩐지 그 새가 부르는 신비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던 그 막막했던 아침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알갱이를 먹어야 했던 지겨운 날들처럼. 아버지의 책상 위에 있는 구형 오디오의 뚜껑을 열었다. 선반에서 아무 레코드나 하나 뽑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렴풋이 귀에 익은 음악이 흘렀다. 헝가리 무곡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한쪽 벽면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였다. 그 빛은 처연하고도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우는 내내 잠을 잤다. 어둡고 낯선 길을 찾아가느라 남자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게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차가 몹시 밀렸다. 점심식사로 먹은 샌드위치가 소화가 안 되었는지 속이 또 울렁거렸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그에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자고 했다. 그도 몹시 지쳐보였다. 휴게소 의자에 앉아서도 진우는 꾸벅꾸벅 졸았다. 낮 시간 동안의 물놀이가 힘들었던 게다.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았다. 휴게소 안은 우동과 김밥으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식욕에서 왕성한 생기가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등지고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종이컵을 하나씩 들곤 멀뚱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휴가를 다녀오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창밖으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들이 점점이 빛났다.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그의 모습이 차츰 내 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간 말고 다시 하려다간 말았다. 그때마다 달싹거리는 입술로 컵을 가져다댔다. 마침내 그의 컵에 커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애, 제 동생 말입니다. 불쌍한 애에요. 우린 2분 간격으로 태어났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려서 많이 아팠어요. 여기 심장이. 수술도 몇 번 했다나 봐요. 그래서 그 앤 바닷가 외할머니 집에서 일곱 살까지 자라야했어요. 여덟 살 생일에 그 애는 외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엄마는 그 애 앞에 초콜릿 케이크와 화려한 마론 인형을 펼쳐놓았지요. 어린 제 눈에도 참 현란해보였어요. 하지만 그 애는 아주 잠깐만 기뻐하더라고요. 할머니가 그 낯선 곳에 저만 두고 갈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나 봐요. 결국 그 애가 잠든 사이에 할머니가 가버린 것을 알았을 때, 자지러지게 울어댔어요. 그런데 그 울음이 좀처럼 그치질 않았어요. 한번은 밥상머리에서 훌쩍거리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어요. 그 후론 후미진 곳을 찾아 혼자서 서럽게 울곤 했지요. 하지만 그 아이가 어디서 울건 집안엔 늘 울음소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 끈질긴 울음 때문에 아버진 그 애에게 좀처럼 정을 주지 못했는가 봐요. 언젠가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그 애의 울음이 그치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림을 시작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것도 느닷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이상하게 절박해보였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애에게 돈이 없다고 하셨어요. 너한테 모험을 할 돈은 없다고. 그 애가 아버지에게 대들었지요. 집이 있지 않냐고. 가평에 있는 집은 뭐하려고 모셔 두냐고. 아버지는 그건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지요. 아버지가 닫아버린 방문이 이상할 만큼 완강해보였어요. 그 후로 아버지와 그 앤 늘 남남 같았죠. 그 애는 아버질 자극하고 싶었었나 봐요. 그럭저럭 들어간 일반대학 대신 홍대 앞 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곤 거기서 만난 남자와 사귀었죠. 나이가 열한 살이나 더 많은 남자였죠. 그 앤 뒷머리를 말총처럼 묶고 양복도 아닌 허름한 캐주얼복장의 그 남자를 아버지 앞에 데리고 왔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진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한마디 대꾸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셨어요. 다음 날 그 앤 짐을 싸서 나가 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갔죠. 한동안 연락도 없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쯤 전에 전화가 왔었어요. 마침 아버지가 받으셨죠. 술이 많이 취해서는 아버지에게 몹시 화를 내는 것 같았어요. 지금 그 애가 독하게 구는 건,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히 그의 손만 바라보았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습관인지 종이컵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나는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명치끝에 걸려있던 단단한 것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프냐고 그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왜 나는 영주가 그린 눈만 덩그렇게 컸던 만화 속 여자 아이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슬픔이 가득했던 얼굴이 꼭 후미진 곳을 찾아 혼자서 서럽게 울었다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을 닮았을 것만 같았다. 그와 나 사이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진우도 잠이 덜 깼는지 말이 없었다. 진우 손에 들려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요를 깬 것은 탁자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의 요란한 벨소리였다. 폴더를 열자마자 영주의 고함이 들려왔다. 야, 이 계집애야, 하루만 더 기다리지, 그샐 못 참고 혼자 갔냐? 운전도 못하면서 거길 어떻게 갔대? 하여튼 재주도 좋아. 영주는 술병에서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바람이 몸에 와 부딪혔다. 비가 온 후라 바람은 적당히 촉촉하고 적당히 서늘하였다. 하늘엔 여름 구름이 가득했다. 비가 올 것 같진 않으나 알 수 없었다. 장마라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쏟아질 수도 있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 내리쬘 수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비 개인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통유리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바깥쪽에 부착된 스피커에선 다시 비틀스의 ‘헤이 쥬드’가 흘러나왔다. 나는 여느 때처럼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헤이. 쥬드.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진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구. 그녀를 네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그러면 더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거야……. 10분 후에 아버지의 아들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동행한 진우가 옆에서 칭얼대었다. 모기가 다리에 달라붙을까봐 빨리 가자고 성화였다. 아이의 다리는 이미 가평의 크고 새카만 모기가 문 자국으로 퉁퉁 부어있었다. 벌레를 싫어하는 아이는 유독 벌레만 바라봤다. 바닥에 떨어진 콜라국물로 몰려든 대여섯 마리의 파리새끼들이 혹 자기에게 날아 붙을까봐 아이는 다리를 계속 흔들어댔다. 가평에 다녀온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여자가 한없이 불쌍해보였다. 그 아이도 한없이 불쌍했다.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진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용서하고 남편을 보내주었다. 꿈을 꾸면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하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꿈을 꾸고 난 아침,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버지 왜 보내줬어? 엄마는 웬 뜬금없는 얘기냐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왜 한 번도 다시 안 만났는데? 나는 다시 다그쳤다. 엄마는 나의 갑작스런 반응에 당황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옅은 한숨만 바람처럼 지나갔다. 네 아버지 뒷모습이 그렇게 측은하더라. 그리곤 다시 긴 한숨이 들려왔다. 엄마의 한숨소리에 실려 양평에서 보았던 촛대가 떠올랐다. 지난 봄, 찻잔을 꺼내기 위해 찬장 문을 열었을 때 촛대가 눈에 들어왔다. 원목받침 위로 주석으로 만들어진 촛대기둥이 꽈배기처럼 꼬여있었다. 촛대기둥 끝에는 세 개의 받침이 있었고 그 위에 주홍색 유리그릇이 담겨져 있었다. 타다만 초가 하나씩 유리그릇 안에 남아있었다. 나는 한동안 찻잔을 꺼낼 생각도 잊고 촛대만 응시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화해의 선물로 촛대와 케이크를 사왔다. 아버지는 식탁에 촛대를 놓고 그 안에 노란색 초를 끼웠다. 그리곤 불을 붙였다. 주홍색 유리그릇 안의 초에서는 은은한 오렌지색 불빛이 퍼져 나왔다. 나는 그 빛을 보며 이렇게 예쁜 색도 있구나 감탄했다. 실제로 그것이 향초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렌지 향도 맡았다. 나는 그 불빛을 보느라 케이크도 먹지 못했다. 그때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 기분에 취해 엄마의 표정을 살필 생각도 못했다. 엄마가 살고 있는 양평집 부엌 찬장 한쪽에 그 촛대가 그대로 있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색도 바라지 않고 먼지도 끼어있지 않았다. 나는 불빛이 사라진 촛대에 다시 오렌지색 불빛을 밝히고 싶었다. 저만치서 젊은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팔뚝의 시계를 한번 보더니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보며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궁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는 저 남자처럼 키가 크지도 않았고 저렇게 비쩍 마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저 남자는 자신의 엄마를 닮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저 마른 남자에게 푹 고은 뽀얀 설렁탕을 먹이고 싶었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함께 설렁탕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은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소리 나게 빨아들였다. 유리잔엔 얼음만 남아있었다. 그가 노천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밝게 웃었다. 그의 얼떨떨하게 상기된 얼굴이 따라서 웃으려하나 헐레벌떡 달려온 그의 얼굴은 이지러지고 말았다. 그가 엉거주춤 앉으려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 앞장서서 걸었다. 당황한 그에게 나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찻값을 지불했다. 지갑을 찾는 손끝으로 열쇠가 부딪혔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설렁탕을 맛있게 먹고 열쇠를 줘야지. 그리고 말해야지. 아버지의 집에서 가져온 새장을 베란다에 놓고 진우가 카나리아를 키우고 있다고. 그 옆에 가평 집과 똑같은 집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붙여놓았다고. 그러니 열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그리곤 그의 손에 열쇠꾸러미를 쥐어줘야지. 치사하게. 그는 무방비상태일 테지. |
심사평 마지막까지 책상에 남은 작품은 다섯이었다. 그 가운데 이현수의 '고풍을 찾아서'는 관념적인 문장, 부정확한 어휘 같은 것들 때문에, 은승완의 '금서 클럽'은 어색한 비유와 주제가 모호하다는 점 때문에 비교적 일찍 제외되었다. 문장은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치 못한 문장으로 온전한 소설이 쓰여질 수는 없다. 황시운의 '사마귀'는 문장도 단정하고 묘사력도 좋으나 인물 관계가 다소 상투적이고 억지스럽다는 지적이 있었다. 인물 관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아닌가. 박숙희 '개복숭아 나무'는 안정적인 문장으로 소녀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미순이와의 관계를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호감을 주었다. 특히 소녀와 미순이 사이의 관계가 재미있었다.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여러 장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에 관한 흥미롭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기도 한 탐색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마지막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전윤희의 '아버지의 집'은 크게 새롭다 할 것은 없으나, 먼저 침착하고 단정한 문장이 작가에 대하여 신뢰를 품게 했고, 적절히 자리잡은 매력적인 비유가 호감을 주었다. 재혼으로 일찍 헤어져 임종할 기회도 없었던 아버지, 그후 돌연 나타난 이복동생 남매들,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을 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과장 없이 잔잔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묘사나 이야기 전개가 실감나고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큰 어려움 없이 '아버지의 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소설은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지만 거기 담기는 것은 단순한 문장이나 이야기 이상의 것, 즉 작가의 생각이다. 문장이나 이야기의 새로움도 중요하겠으나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작가의 생각, 그 생각의 새로움일 것이다.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김 지 연·최 인 석 |
당선소감 나는 한 청년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갸름한 얼굴에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스물 셋, 어린 나이에 그는 의료사고로 실명하였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박 2일 교회 세미나에서였다. 그 세미나의 이름은 ‘인카운터’였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의미였다.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늘 그의 양 팔을 붙들고 그가 어디를 가든지 동행했다. 분명 그는 지독한 슬픔을 안고 그곳에 왔을 것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를 또 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천상의 미소였다. 주위를 둘러보면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없다. 미워해서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도, 어쩌면 너무 사랑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내가 쓴 글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진 못하겠지만, 순간일지라도 그 청년의 얼굴에 머금었던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참 행복할 것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소설쓰기의 기초부터 가르쳐주신 구효서 선생님과 정찬 선생님,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셨던 안혜성 선배님, 재능을 물려주신 아버지, 희생으로 키워주신 어머니, 사랑하는 자매들과 가장 고맙고 소중한 사람, 남편에게 감사드린다. 겨울 햇살이 나른한 오후에 당선 전화를 받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나의 손은 부끄럽게도 빈손이었다. 지금부터 조금씩 채워가겠다. 전윤희 학력:성심여자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영문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 주소: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정발마을 건영빌라 303-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