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사회복지사로서 죽음, 죽음 준비, 사별 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Herman Feifel은 “죽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라고 말했으며, 또 시인 T. S. Elliot는 1955년 죽음교육과 성(性)교육을 함께 실시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 하였다. 아마도 죽음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 비로소 삶은 증진된다고 보는 견해이었으리라.
좀 더 불교적인 입장에서 확장해 논의해 볼 수 있는 과제이다. 즉,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삶에 대한 태도에 반영되며,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삶을 맞이하는 태도를 반영한다는 가정 하에, 필자는 사회복지적인 시각에서 죽음의 의미를 줄곧 생각해 왔다.
차제에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P107-112>편을 읽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첫째, ‘일본불교는 장례불교다’ 라는 측면에서 불교사원의 기능이 장례의식과 죽은 자를 위한 뒤처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냉소적인 관점이 있다.
둘째, 이를 옹호하는 주장에서 장례불교가 된 배경과 관련하여, 민중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별 후의 가족들을 위한 법요나 상담으로 치유적인 역할을 분명히 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일본의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는 닌쇼(忍性)스님은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약재를 백방으로 구하여 아픈 민중을 구해 냈던 예를 비롯하여, 둔세승(遁世僧)들의 보살행은 유명하다. 본 논고에서는 후자의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단가제도(檀家制度)의 유의미성과 불교사회복지적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죽음준비교육의 필요성과 방향을 함께 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일본불교에 있어 죽음의 문제
먼저 일본불교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일본인의 생사관, 종교관, 가치관과 사회적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확장은 지나칠 정도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죽음을 덮어 숨기려 했다. 그리고 ‘생(生)ㆍ사(死)’를 하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生)’과 ‘사(死)’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더욱이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을 추구하여 향락적인 ‘생(生)’ㆍ‘성(性)’만을 추구하여 반세기를 지내왔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를 생각할 때 과학적인 수량적 사고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목, 즉 철학, 종교, 가치관의 문제와의 접근이 중요하다. 특히, 그 나라의 역사, 민족적 전통, 관습, 문화 등이 포함된 문제추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일본 존재방법의 죽음의 문제가 있고, 한국은 한국적 죽음, 죽음준비 교육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여기서 일본적 죽음의 장례의식, 사별과 치유의 과정을 불교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은 역사 속에서 얼마만큼 인간을 잔혹하게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라는 것을 고민하여 에너지와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는 시절이 있었다. 생명에 대한 생각과 규범을 잃어버려 혼란했던 역사를 살아온 그들에게 생사관이 궁금해진다.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본이 왜 장례불교라는 오명을 썼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본불교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와 사후의 정기적인 법요(法要)의 실시라는 것이 있다. 단가제도는 에도(江戶)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로서 특정의 절(菩提寺)에 소속되어 그 절을 경제적으로 의지하며 믿고 각각의 집안과의 ‘가(家)’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고, 현재까지 계속된 관습이다. 일본은 전통적인 가(家)의 존재, 가족제도의 관습이 깊게 남아 있다
여기서 A家의 남편이 죽었다고 가정하고 일련의 흐름을 보면,
(1) A家의 남편이 죽은 것을 친척의 누군가가 절(菩提寺)에 알린다.
(2) 通夜--菩提寺의 승려가 A家에 가서 독경하고 법화(法話)를 한다.
(3) 장의--菩提寺의 승려가 장의에 출석하여 독경하고 법화를 한다.
(4) 中陰--장의 후 49제까지 7일마다 독경하고 법화를 한다.
(5) 일주기, 3주기, 7주기, 13주기, 23주기, 33주기, 50주기…….
(1)―(5)에서 중요한 것은 통야와 장의뿐만 아니라, 약 50일에 걸쳐서 7일마다 독경하고 남겨진 가족에 대해서 법화를 통해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별의 슬픔을 치유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7일마다의 법요, 특히 독경뿐만 아니라 법화의 존재가 중요하다. 법화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남겨진 가족과 승려가 대화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담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가에서 49재 의식과 비슷하지만, 일본불교의 사후 ‘장치 시스템’ 은 전국가적인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본다.
일본불교가 장례불교라고 폄하하는 비판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필자는 사족을 붙이고 있다. 불교가 본래 깨달음의 종교라 하지만 민중의 소리에 외면하면 그 종교는 가치가 없지 않는가? 민중의 고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종교는 힘이 없다. 장례든 혼례든, 삶과 죽음 사이에 치러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일일이 불교가 반응할 필요야 없지만, 민중들이 필요로 할 때는 불교인들은 각각의 몫에 맞게 실천불교를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내 종교, 신앙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세계적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은 그의 저술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신앙에서 깨어나라”하며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며 “신앙은 신앙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버려야 한다”고 날을 세워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이한음 역, 2007: 467-469). 여기서 이 학자가 말하는 것은 꼭 무신론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종교 도그마에 빠져 외연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차라리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대신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끝으로, 일본불교에서 본 죽음의 문제는 장례의식과 사별 후의 남은 가족들을 위한 치유적 상담의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 일본에서는 죽음준비 교육이 2002년부터 포함되었으며, 죽음준비 교육의 연구를 위해 2006년 예산에 400만 달러를 책정했다고 한다(오진탁, 2007: 254).
Ⅲ. 맺는 말
우리는 지금 생명을 만들 수도 있고, 만들지 않을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명은 받는 것,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은 멀어졌다. 그러나 죽음은 생에 수반되는 누구나 필수적인 문제인데, 삶을 이야기하고 자연 생태를 보존하고 살리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논의도 자연스럽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장이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 해서 삶의 효율성과 나아가 죽음을 품위 있게 맞이하게 하는 인간 존엄도 구현하게 된다. 죽음준비에 대한 교육은 개인과 사회로 하여금 필연적인 사건들과 결과들에 대해 준비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후를 맞이해야 한다. 일찍이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의 삶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규정을 하였는데 여기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전병술 역, 2001:46).
21세기 인류사회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고령화의 문제일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인류의 커다란 도약이지만, 궁극적 생명의 시각에서 보면 나날이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정신적 의미를 담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고령화 문제는 특히, 현대인들이 성찰해야 할 죽음의 문제 가운데 하나로 들어오는 것이며, 죽음을 자기 삶의 마지막 과정으로 받아들여 수용적인 태도를 갖느냐, 부정적이냐는 노후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있다(Paul J. Rhudick, 1961, 장미란, 1981, 재인용).
서구사회에서는 죽음교육에 대한 연구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교과목으로 까지 확산되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이영화, 1998: 47). 동양권에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논의가 아직 제도권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지 못한 실정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생(生)만을 좇아가는 여유 없는 빠른 혼돈의 문화가 한 몫 한다. 전통적으로 종교와 교육이 그 해답이 되었지만 현대 문화 안에서는 종교와 교육조차도 그 굴레 속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 대안으로 “죽음교육(Death Education)"의 형식적 교육을 강조하는 바이다.
요즈음 현대는 생명사상, 생명 중심주의, 생태계의 철학, 웰빙 등에서 모든 삶의 근원적 물음을 묻고 답하려는 듯하다. 죽음에 대한 논의는 생략되었다. 이런 주위는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삶의 행복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그런 행복이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을 제어하는 길에 있어서 죽음교육과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불교인들은 무엇을 고민하는가?
<참고문헌>
김태현ㆍ손양숙(1984). "노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 연구". 한국 노년학, 4, PP.3-19
이영화(1998). "죽음준비교육 모형개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
석사 학위청구논문.
오진탁(2004).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 서울: 청림출판사.
오진탁(2007). 『마지막 선물』, 서울: 세종서적.
부위훈(2001). 『죽음, 그 마지막 성장』. 전병술 역, 서울: 청계출판사.
장미란(1981). "노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 논문.
Richard Dawkins(2006).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이한음 역, 서울: 김영사.
John D. Morganㆍ田宮 仁(2003). “캐나다 노인들의 죽음, 죽어감, 그리고 사별” “일본에 있어 죽음의 문제” 한국노인복지학회.
Feifel, Herman(1963). The Meaning of Death, New York: John. Inc.
* 이영순: 현재 원광대학교에서 원석조 교수님 지도하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수학 중이 며, 2006년 『할맥』문학지로 등단하여 詩作활동 하고 있다.
첫댓글 일본불교사 공부방 제5호에 실은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