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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내가 부임하는 날 부터 전력화를 위한 환기훈련이 8전단 주관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부천함의 양해를 얻어 부임전부터 221호정으로 출근하며 일을 하였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였다. 교육훈련을 책임지는 배의 부장이 훈련시작하는 날 부임하도록 인사명령을 내는 것이 어디에 있고, 심지어는 주요 부사관들조차 훈련시작하는 날 충원이 되지 않았으니...
일반적으로 해군에서 새로운 배를 건조하여 전력화를 시킬때는 정예의 인원들을 배로 보낸다. 수병이든, 부사관이든, 장교든간에... 하지만 우리 221호정의 인원구성은 그 반대였던것같다. 당시 함께 배를 탔던 전우들이 이 글을 보면 기분 나쁠지는 모르지만, 곧 전역할 부사관, 다른 배에서 쫒겨온 부사관등 인원구성을 최악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중에 알았지만 웬만큼 똑똑한 부사관이나 장교들은 제가 갈 배나 부서를 골라 간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하지만 어청도 고속정은 누구도 가고싶어 하지 않는 그야말로 해군의 무덤이었다. 관리대기함 새로 정비하고 환기훈련하고 나서도 또 어청도 가서 고생할 것을 알면서 이 배로 올 사람이 누가 있는가? 정말 숙련된 뱃사람(Skilled Crew)가 필요한 배이고 시기였지만 해군은 조그마한 고속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Top
위치? 내가 섬에서 나올때는 쾌속선이 다녀서 2~3시간 거리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군산에서 배를 타고 5~6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서해 중부해상의 끝섬이다. 볼거리라고는 거의 없으나 낚시꾼들에게는 바위낚시 장소로 잘 알려져 종종 낚시꾼들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정말 꾼이 아니고서야 5~6시간 배를 타고 섬에 들어올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섬의 크기? 글쎄 매우 작은섬이었다. 산 하나에 항구를 둘러싼 마을하나, 초등학교 하나 있고, 우체국 하나 있고, 슈퍼마켓 3~4군데, 교회 둘, 보건소 하나, 식당 몇개, 공중전화 단 2대... 아! 그리고 우리들이 굉장히 애용하던 중국집 만리장성! 나머지는 온통 다방뿐이었다.
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지만 어청도는 고래잡이가 금지되기 전까지는 동해의 장승포항과 더불어 고래잡이의 전초기지로서 굉장히 흥청대던 섬이었고, 내가 근무할 당시도 예전만 못하더라도 외딴섬 답지않게 물때가 좋을때면 많은 어선들이 찾아와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그러니 자연히 많아지는 것은 술집과 여자이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 했지만 어청도에는 술집이 없었다. 다만 많은 다방만 있을뿐... 이 다방들은 낮에는 손님들에게 차를 파는 찻집이지만, 밤만되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단란주점으로 변한다. 당시 맥주 작은병 한 박스가 12만원 하다가, 내가 섬에서 나오던 '97년쯤은 15만원까지 올랐으니, 결코 싼 술값은 아니었다. 고기가 잡히지 않고 배가 없을때면 이 다방(?)들은 조용하지만 항구에 고깃배가 들어오고 산고배-어물운반선, 어청도나 주변 해상 어선에서 갓잡은 생선을 사서 군산이나 장항어시장에 내다 파는 중간상인배-를 만나 흥정이 끝나는 날이면 항구의 다방들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어청도 산에 오르면 봉화대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전에 서해상으로 들어오는 왜구나 적군을 감시하던 곳인듯하다. 동쪽에 있는 연도와 연결되는 봉화라고 한다. 그리고 어청도에 가면 꼭 들러야 할곳이 있다. 항구에서 마을과 초등학교를 지나 조그마한 언덕을 넘으면 보기에도 외로운 등대 하나와 관리소가 있는데, 참 그곳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내가 야간 항해나 경비때에도 애 타게 찾던 어청도 등대... 서해를 지나는 많은 상선과 어선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준다.
어려운 야간경비지만 이렇게 야간경비만 하면 그래도 견딜만 하겠지만, 중국에서 밀입국 선박이 들어온다는 첩보가 있을때면 특별경비라 하여 2교대로 하루 12시간 이상 바다에 떠있어야 했다. 특별경비가 적을때는 한달에 열흘 정도 많을때는 25일까지 있었으니 섬에서의 나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배가 정박하던 바지에서 식당과 숙소가 있는 기지 까지는 산길을 헉헉거리며 한참을 올라가야 있어 밥먹으러 갈때나 화장실 한번 가려면 여간 힘든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너무나 많은 경비와 긴급출항으로 정장님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은 배에서 지냈으니 밀입국이다... 함대 기동훈련이다... 바쁘고, 날이 가물어 기지에 물이 없어 제한급수를 할 때에는 일 주일간을 씻지 못하고 지낸적도 있고, 하루종일 컵라면만 먹고 지난적도 있다. 우리배의 어느 부사관은 양치질할 물이 없자 슈퍼에서 물을 사가지고 양치질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2달을 지내야 4주일간의 수리와 재박훈련을 위하여 인천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때 절실히 느낀것이지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사람일수록 자신의 이익과 편안만을 생각하지 자신이 거느린 조직의 말단 조직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먹고 있는지 통관심이 없었던것 같다. 못먹고 못자던 시절... 그러나 함대와 전대에서는 끊임없이 경비하고, 검색하고, 훈련하기만을 지시하였다. 항상 피곤하고, 배고프고, 스트레스 받고, 뭍의 사람들이 그리운,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Top
환기훈련
재미있는 단어선택인것 같다. 환기훈련... 환기훈련은 단위함정훈련의 기본 훈련이다. 당시 2주간 진행되었던 훈련은 각 상황별 인원구성을 하는 Station Bill 작성부터 시작하여 각종 육상,해상훈련을 진해항과 진해만 해상에서 실시하였다. 11~12월의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정신없는 전투배치, 인명구조, 사격, 소화방수, 화생방, 정밀검색, 퇴함훈련까지 함정으로 있을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새삼 느낀것이지만 부천함에서 전투정보관으로 근무하며 많은 재박훈련과 해상경험으로 얻은 지식과 Know-how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강하고 많은것을 알고 있는 장교만이 강한 배, 싸워서 이길수 있는 부하들을 만들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힘든 훈련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배운것을 비록 배의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부정장으로서 교육훈련 담당관으로서 부하들과 배의 전투력 향상을 위하여 쓸수 있다는것이 기뻤다. ▲Top
진해에서 인천까지 뱃길로
환기 훈련과 2주간의 마무리 수리를 마친 우리배는 '95년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인천항을 향해 진해항을 출항하게 되었다. 내가 지리산 청학동에서 출발하여 세석산장에서 자고 천왕봉을 오른 크리스마스가 이때였다. 26일 출발 예정 이었으나 날이 좋지않아 27일 아침에 출발하였다. 부천함 시절 진해항과 인천항사이 뱃길을 많이 다녔으나, 그때는 먼 바닷길로 돌아 다녔고 이번 항해는 남해, 서해의 섬사이를 거쳐가는 위험한 뱃길이었다. 물론 하루면 갈 길도 아니고 취사능력도 없는 배로서 야간항해를 할 수 도 없어 흑산도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다. 진해에서 흑산도까지의 뱃길은 무난하였다. 미리 해도를 보고 수로를 충분히 연구하고 항로선을 해도상에 그어 두었기에 계획된 대로 항해하면 될 일이었는데, 문제는 흑산도에 입항하여 하루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또 파도가 높아져 배가 흑산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하긴 조그마한 고속정으로 이런 겨울에 항해 가능한 날이 얼마나 될까? 하루, 이틀, 나흘... 이틀이면 올라갈 뱃길이 점점 늦어져 그만 흑산도에서 '96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내일은 갈 수 있을까? 할 일 없이 하루 하루 보내던 흑산도 생활... 앞으로 다가올 어청도 생활의 불안감으로 흑산도의 하루 하루는 정말 괴롭고 길었다. 흑산도 들어온지 8일째되던 96년 1월 4일 드디어 날씨가 좋아지고 흑산도를 출항하여 인천항으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들은 8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96년 1월 4일 오후 드디어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Top
어청도
於靑島. 아! 푸르른 섬 어청도여...
어떤 이야기 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청도에 대하여...
밀입국과 특별경비
IMF이후 부터는 뜸해졌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기는 호황이었고, 이에 편승하여 한 몫 잡아보겠다고 중국에서 몰래 밀입국하던 조선족 동포가 많았다. 낡은 고깃배의 좁은 어창-잡은 생선을 보관하는 배의 창고-에 몇 수십명씩 몸을 숨키고 서해안에 몰래 들어오거나 해상에서 우리 어선을 만나 옮겨 타고는 하였는데, 본래 밀입국 어선을 단속하는 것은 해경의 소임이지만 밀입국을 가장한 불순세력의 잠입또한 간과할 수 없고, 바다에서 확인되지 않은 선박이 육지로 들어가는것을 두고 볼수 없는 일이라 밀입국 선박을 잡는 일에 해군은 열심이었다. 그래서, 7,80년대에 시행되던 고속정 야간 경비가 우리배가 어청도로 들어가기 얼마 전부터 다시 시행되어 밤 9시가 넘어 출항하여 바다에서 경비하다 동틀녘이 되어서야 섬으로 돌아와 쉬고는 하였다. 전에 근무하던 부천함과 달리 고속정은 너무도 작고, 인원도 적어 오랜시간 당직교대근무가 불가능하고,숙식시설 또한 취약하여 바다에서 오랜시간 작전을 할 수가 없다.
아름다운 조국 - 지는 해를 보며 눈물 흘린적이 있는가?
그렇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견딜수 있던것은 동거동락 하며 힘든 섬생활을 잘견디며 자신의 임무를 너무나 충실히 수행해 주던 우리 천진난만한 수병들과 '부장님 부장님' 하며 잘따라 주던 부사관들과 함께 있어서였던것 같다. 그리고 또하나 조국의 바다를 내가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또한 나를 견디게 하였다. 그때도 특별경비와 훈련이 겹쳐있던 때였던것 같다. 경비와 훈련을 마친 우리 참수리 221정은 어청도로 입항하려고 가진서를 통과하여 방파제 근처에서 잠시 대기 하고 있었다. 함교 Open Bridge에서 정장님이던 효식선배와 함께 Headset을 쓰고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가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돌려 바라본 석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바다에 걸린 노란 태양 주위로 붉게 불타는 하늘과 검푸른 바다... 순간 가슴속이 뭉클하더니 눈가에 뜨거운것이 괴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조국이다." 혼자 조용히 속삭였다. ▲Top
보신탕 사건
기지에는 진돗개 혈통이 섞인듯한 하얀색의 숫놈 개 한마리가 있었는데, 비록 잡종이지만 부대에서 키우는 놈이라 그런지 제법 늠름한 구석이 있었다. 들리던 일설에 의하면 섬의 모든 암캐들을 평정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확인된 말은 아니고.. 하여간 '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는 좋은 숫캐일 뿐이지만 '탕'을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우리 전대장님이 보시기에는 놈은 좋은 음식재료에 지나지 않았나보다.
기지를 순시하시다 놈을 목격하신 전대장님은 개주인인 기지장 O준위에게 모종의 제의를 하였지만, 역시 놈을 아끼던 기지장은 정중히 거절을 하였고, 전대장님은 입맛만 다시며 전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전대장님은 기지장을 불러 다정한 얼굴로 말씀 하셨단다. "기지장 휴가 다녀온지 얼마나 되었지, 휴가 한번 다녀와."하고 전에 없던 호의를 베푸셨다. 감격한 기지장은 즐거운 마음으로 섬을 나섰으나 휴가에서 돌아왔을때 햐얀색의 놈은 이미 이세상의 견(犬)이 아니었다. 기지장을 섬밖으로 내보낸 다음날 전대장님은 조리장을 불러 놈을 해치운것이다. 맛있게...
'탕'을 먹고 배를 타면 부정타서 배가 고장이 잘난다는 설이 해군에 있는데, 전대장님이 '탕'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배가 낡고 가동시간이 많아서인지 어청도 고속정은 유난히 고장이 많았다. ▲Top
▶▶ 당시 전대 보급관이던 이재완 동기생의 반론
>> 보신탕 사건은 사실과 다르다.
2002-04-15 오전 12:20:39 이재완 (방명록 번호 175)
나보다 전대장님과 더 가까이에 있던 재완이의 말이 옳을것이다. 난 직접본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임준위와 주변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니까... (임준위와 난 화학대에서 또 함께 근무하였다.) 임준위는 내게 직접 '어떻게 사람을 휴가보내놓고 개를 잡을수 있나' 하고 화학대 근무시절 옛이야기를 털어 놓았었고, 전대장님도 그렇게 犬의 肉에 관심이 물론 있으셨으니 전대주임이나 LCM정장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닐까?
하여간 그것은 중요한것이 아니고....
'작전수행능력은 전대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반도 못 따라왔고...'
함정으로 갈 부식들이 육상근무하는 전대대원들 아파트에서 굴러다니고, 그 귀한 물을 전대와 기지는 풍족히 쓰는 반면 우리 대원들은 제대로 못씻고, 기지 부식은 어디로 다 가서 함정대원들의 식사는 늘 엉망이고(그것들이 어디로 다 갔는지 넌 알지?)...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들은 한번도 측방해역을 뚫린적이 없었고, 전투전단과의 기동훈련, 상륙훈련지원, 공군사격훈련지원, 함포사격지원등 수 많은 훈련과 지원을 모두 성공적으로 해냈었다. 훈련 종료후 NET에서 들려오던 상대방의 격려 Message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을 훈훈하게 하여준다.
'특히 상황실 당직사관들이 엄청 고생했다.'
당시 당직사관들의 문제점은 함정과 장교이면서 함정경험이 없거나, 적다는것이었다. 그래서 해상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고 늘 무리한 요구를 했지... 검색 지시해 놓고, 실제 접근하기도 전에 또 다른 검색지시하고, 전대 레이다 손실되었다가 다시 접촉한 배를 검색시키고, 미숙한 통신망 운영, 부족한 육군/해경과의 합동작전, 바다 날씨를 완전히 무시한 함기동 지시 등!
오랫만에 어청도시절의 아픈기억들이 생각나는군... 늘 좋은 추억만 생각하고 싶지만, 잘 안된다. 2002년 4월 15일 월요일 오전 1:28:32 혁준 |
이제는 어망을 치우는 일이 문제다. 전대에는 잠수사가 없고 함대에서 내려오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섬의 잠수부를 사서 어망을 제거하고 나머지 부분까지 건져올려 바지에 늘어 놓았더니 도교를 지나 육상까지 이어지는 장장 200여 미터의 폐어망이었다. 이놈이 수면 아래 1미터쯤 떠 있으니 어찌 보름달이 밝다한들 이를 볼 수 있겠나... 전대나 함대에서도 사고의 불가항력을 알고 질책이 없었다. 우리는 수백만원 한다는 어망을 관리 못하고 잃어버린 어부만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망을 제거하고 시운전결과 배의 진동이 심하다. 아무래도 스크류의 Blade에 손상이 온것 같다. 그 날 오후인가, 다음날 아침인가 우리배는 인천으로 긴급수리차 올라왔고, 난 인천도착후 바로 동해로 전출차 이함 하였다. ▲Top
소위때보는 1단계는 항해,기관,정박,정신전력,일반보수,분대장 모두 6과목이었고,중위때와 1,2급함 부서장이 보는 2단계는 전술과 함통제 2과목이었는데 함대나 작전사령부에서 PQS 조기합격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함정장과 부장들의 압력이 심하였다.
분명 전비지침서 규정에는 1회 시험후 불합격시 2주후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군대에서 하는 말로 좀 끝발있다는 1급함 근무 장교들은 시험후 바로 채점해 달라고 서있거나 불합격하면 다음날 다시 시험보러 오고는 하였다. 물론 어청도 근무시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인맥과 변칙으로 일을 처리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힘없고 권력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가를 몸소 절실히 느낀 나는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고 따끔한 훈계와 함께 바로 돌아보냈다. 그럼 얼마후 배에서 전화가 내게 걸려온다. 처음에는 대위 Level에서 전화가 와서 왜 시험을 못보게 하느냐고 따진다. 그럼 난 또다시 규정과 이를 어길때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이야기 하고 통화를 끝내면 잠시후는 소령이나 중령 Level에서 전화가 온다. 심한경우는 욕설부터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굴할 수 는 없었다. 부천함과 어청도 고속정에서 강하고 많이 아는 장교만이 부하를 훌륭히 지휘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고, 규정과 절차를 지키지 않고 일을 처리하면 그 당사자는 편하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느낀나는 절대 굴할수 없었다. 아마 내가 장기복무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못했을지 모른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니... 전화를 끊고나면 잠시후 이번에는 참모님 한테 인터폰이 온다. '야, 그 OO함 말이야. 그거 해줘!' 늘 그런식이다. 두분의 참모를 모셨는데 첫 참모님은 늘 그런식이었고, 두번째 참모님은 '야, 작전관 니가 알아서 해!'하고 내편이 되어 주셨다.
후배들도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왜 규정과 절차를 지켜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장교가 공부를 해야하는지 이야기 하면 그들은 이해하고 나를 따라주었다. 참, 나도 고지식 했던것 같지만 후회는 안한다. 아니 참 잘한 일인것 같다. 1년쯤 지났을까 느닷없이 8전단에서 PQS확인 검열을 올라왔는데, 규정대로 PQS를 집행하고 있는지, 합격장교들의 실력이 정말 합격수준인지 검열하였다. Excel File로 모든 시험 응시현황, 점수, 합력현황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장교들의 실력도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의 노력이 보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Top
항모 '인디'는 섬이었다. 거친 바다였지만 항모는 거의 미동도 않아 여기가 배인지 섬인지 모르겠다. 훈련 몇일째인가 한국군 육군 4성 장군과 미 7함대 사령관이 배를 방문하였고, 미 7함대 소속 함정과 함재기들의 시범훈련이 있었다. 항공기의 이착륙, 공중사격, 공중급유... '인디'관제탑에서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데 좌현 함미쪽에서 배 두척이 온다. 한 척은 미함 DD나 FF였고, 한척은 우리 고속정인 듯 했다. '아 우리 고속정이 이 먼바다까지 나오다니!'하고 감격하고 있는데, 잠시후 가까이 다가온 두척은 미함과 우리 해군의 주력함 한국형 구축함 -전남함이었던듯하다-이었다. 당시 광개토대왕함이 나오기전까지는 강원함 Class와 함께 해군의 주력함이 었지만, 미함과 나란히 항해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속정이었다. 항모는 전혀 미동도 않고 미함은 약간 출렁이지만 대한민국 해군의 주력함은 난리도 아니다. 출렁출렁~ 잠시후 두척의 군함에서 함포 사격시범을 하였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미군 장교가 내게 "Oh! Korea navy top gun!" 하며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비아냥거린다. 정말 우리해군이 사격을 잘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함포전의 시대는 갔는데 아직 함포가 주력무기냐는 뜻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아무말없이 웃고 말았지만 참 씁쓸했다.
'인디'에는 5천명이 넘는 군인들이 승조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함정사람이고, 나머지 절반이 비행단 사람이었다. 배에는 많은 침실과 식당, PX, 우체국, 병원이 있어 하나의 조그마한 도시였다. Flight-deck이라 불리는 비행갑판이 main갑판이줄 알았더니 3~4층의 O3인가 04 deck였고, 함재기를 수리하고, 격납해두던 Hanger bay가 main deck였다. Hanger bay에서는 수백명의 군인들이 비행기를 정비중이고 Flight deck에서는 무기를 적재하고, 출격준비를 하고, 점검하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수 백명의 사람들과 수 십대의 비행기가 Hanger bay와 Flight deck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였다. 이를 위하여 지휘부에서는 매일 정교한 비행계획과 일과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난 미항모 전단과 한국해군의 연락임무를 맡아 전단의 지휘부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들은 조기경보기를 이용하여 조그마한 어선을 포함한 동해상의 모든 선박의 정보를 수집하고 위성통신을 이용하여 본국 및 한국에 파견된 연락장교와 바로 전화통화 및 mail 송수신을 하였다. 정말 대단한 정보 수집력과 장비들이었다. 새삼 한국해군이 아직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었다.
미군의 사회도 철저한 계급조직이어서 계급별로 생활 Sector가 철저히 구분되어 있었다.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침실, 화장실, 식당이 구분되어 있었다. 나를 비롯한 파견장교들과 교환근무장교들은 항모전단 지휘부 장교들과 함께 전단장 Moore제독- Commander, Carrier Group FIVE, RADM(해군소장)-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주방장이 백악관 조리실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음식솜씨가 일품이었다. 매 저녁식사는 촛불을 켜고 하는 정식 만찬으로 나를 비롯한 위관장교들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때면 배의 일반 장교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거기서 미 해군에 근무중인 교포 2세들을 몇 만날수 있었으며, 이들에게 항모생활에 대하여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몇몇 군데를 안내 받아 더 구경할 수 있었으나, 내가 보고싶던 기관실만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항모 어디를 가도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임무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할로윈데이가 지난 11월 1일 아침... 우리들은 항모'인디'에 들어올때 타고왔던 C-2수송기를 타고 부산 김해공항으로 나왔다. 파견근무가 끝난것이다. 이륙을 위하여 안전밸트를 매자 함재기는 천천히 이동하였다. 아마 캐터펄트(Catapult)에 함재기가 끼워지나보다. 100m도 안되는 짧은 거리에서 이륙하기 위하여 항모는 이륙시 풍상쪽으로 항해 하고, 비행기는 캐터펄트에 끼워져 1~2초의 짧은 시간에 이륙에 필요한 속도(165KTS; 시속 약300km/h)까지 증속되었다. 캐터펄트는 항모 갑판에 부착되어 강한 증기압으로 순간 높은 속도로 비행기를 항모 앞쪽으로 밀어낸다. 그때의 순간 충격은 대단한것이었다. C-2수송기의 좌석은 비행방향 뒷편을 보도록 놓여져 있었는데 X모양으로 안전밸트를 매지 않았으면 아마 내 몸은 비행기 뒷편에 달라 붙었을 것이다. 함재기의 제트 엔진 소음이 점점높아지더니 순간 앞으로 달려나가 어느새 하늘을 날고 있었다. ▲Top
미항모 인디펜던스에 함재기를 타고 들어가다.
해군 복무하며 많은 훈련을 다녔다. 특히 109전대 작전관 시절에는 연간 훈련파견일수가 2개월 가량 되었다. War Game, 해상훈련관찰, 호국,을지훈련... 그중에서 특히 기억이 남는것이 '97년 10월 27일 부터 11월 1일까지 동해에서 Foal-eagle 훈련중이던 항공모함 CV-62 인디펜던스함에 한국해군 연락장교로 파견간 것이다. 26일 자정경 동해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부산가는 야간 시외버스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갔다. 거기서 함께 항모로 들어갈 장교 2명을 더 만나 '인디'의 함재기인 C-2 수송기를 타고 부산을 이륙하였다. 수송기 창가에 앉은 나는 -나올때 알았지만 수송기의 창문은 2군데 밖에 없었다.- 그림같이 펼쳐지는 동해를 볼수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저 밑에 점같이 보이는 항모를 선회하던 C-2기는 고도를 낮추더니 가벼운 충격과 함께 급정지한다. 창밖 풍경은 바다와 하늘이 아닌 인디의 갑판상으로 여러대의 전투기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2001.6.5. 화학대 앞에서 대원들과... 화학대 차고에 보관중이던 돌에 우리 대원들이 직접 글을 새겨 화학대 표지석을 만들었다. 이 날 우리들은 10년 후의 자신에게 전하는 영상편지와 물건을 넣은 'Time capsule'을 묻었고, 2011년 6월 5일 일요일 13시에 이 장소에서 만나 Capsule을 열어보기로 하였다. |
"화학대장님 산불났습니다."우리측에서는 나를 포함 중대장과 통제관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미군측에 양해를 구하고 중대장이 회의 주관토록한 후 급히 뛰쳐나왔다. 내차를 끌고 산불이 났다는 부대입구 야산쪽으로 향하며 부대에 전화를 했다. "부대입구 원정삼거리 주변에 산불났다. 소방차 모두 출동해!" 현장에 도착했을때 산불은 북서풍을 타고 계속 번지고 있고 논에서 일하던 몇몇 농부들이 불길을 잡지 못해 애쓰고 있었다. 우선 현장파악이 급했다. 발화점과 불의 확산방향을 파악하고 지형을 파악해야 한다. 잠시후 우리 대원들이 소방차 3대에 나누어 타고 현장에 도착하였고 불머리 옆에서 우선 민가쪽으로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불을 잡아들어갔다. 어느정도 삼거리 민가 뒷쪽의 불이 잡히고 평택소방서 소방차도 하나둘 도착하였다. 이제 불머리를 잡아야 겠다는 생각에 2대의 소방차를 끌고 화두쪽으로 향했으나 민가와 산사이에서 진입로를 찾을수 없었다. 연기를 보아서는 서평택휴게소 뒷편인데... 마침 지나던 주민에게 입구를 물었더니 급히 가르쳐주었고, 소방서 소방차와 우리 소방차 2대가 그쪽으로 진입하였더니 불은 좁은 밭을 건너 휴게소 뒷편산으로 올라 붙고 있고, 내 눈에 휴게소의 주유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저 불을 잡아!" 급히 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우리 소방차와 대원들은 휴게소쪽으로 오르는 불을 잡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불을 더 크게 번질뻔 했던것이다. 그리고 반대편의 불을 잡아나갔다.
그 바쁜 와중에 내 휴대전화는 계속 울린다. 함대 상황실, 당직실, 전대당직실, 작전사 상황실, 이사람 저사람...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와 지시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기 하면 좋으련만, 워키토키 하나 없이, 메가폰 없이 현장지휘하며 전화도 받자니 정말 목이 아프다. 이래서 통신침묵-해군은 상황발생시 다른 부서의 망 개입을 금하고 있다.-이 필요한가 보다. 잠시후 소방헬기가 나타나 물을 뿌리며 지나가자 불길은 급속히 죽어갔고, 함대 수병들도 버스를 타고 본부대장님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여 잔불정리에 참가하였다. 잔불정리는 참 중요하였다. 모든 불이 꺼진줄 알고 물러나고 있을때 우리 화학대 대원들이 갑자기 삽을 들고 뛰어 가길래 따라가 보았더니 산 중턱에서 다시 빨갛게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급히 삽으로 불을 끄고 잔불 확인후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화려한 토요일 오후였다. ▲Top
꿈같던, 결코 흐르지 않을것 같았던 7년의 세월도 쏘아놓은 화살마냥 흘러 어느덧 제대날이 되었다. 6월 10일이 일요일이라 2001년 6월 9일 토요일 아침 평택전대님께 전역신고를 드렸다. "필승! 신고합니다. 대위 장혁준은 2001년 6월 10일부로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이것으로 나의 7년 해군생활이 끝났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