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임마누엘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루디아
십 일 조
서론
-그것으로 실험하여 사실을 입증하라- 성경/말라기 3 : 7 - 12
성경 기록에 의하면 IS 백성의 율법이 레위기에 법제화 되기 훨씬 이전 시대부터 십일조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또는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세속 역사 및 성경 역사에 있어서 10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수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두 개의 두드러진 사례를 찾아보자.
1) 시리아 및 아랍어 역본의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아브람은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드린다. 그러나 문맥에서 볼 수 있는 원래의 의미는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노략물의 10분의 1이다. (창14;20, 히7:2, 6) 2) 야곱은 벧엘에서 환상을 본 후에 자기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서약한다. (창29:22) 이러한 사례들은 모세의 십일조 제도가 수립되기 이전에 고대에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십일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러나 이교 민족들, 즉 로마인들, 카르타고인들, 아라비아인들 가운데서도 전체 소유 또는 노획물, 징발한 재산, 상업적 이익으로부터의 10분의 1을 거룩한 일과 그와 유사한 일을 위하여, 또한 국가를 위하여 드린 무수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렇게 이방 민족들도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러면 이와 같은 이방인의 십일조 규범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이것은 이미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서 가르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도록 그 한계선을 그어 주셨으나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바 믿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잡신을 섬기므로 온전한 십일조의 본질을 왜곡하며 무너뜨린 것이다. 3)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헌물 제사하는 성경상 최초의 기록이다.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창4:4-5) 고 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가인의 제물이 배척된 이유를 십일조와 결부시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제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 칼타고 사람으로 엄격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초대교부, 변증론을 비롯한 많은 신학적 저서가 있으며 라틴신학의 원조)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물리치신 이유는 가인이 그 헌물을 공정하게 분할하지 않고 바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약성경 히11:4 에 보면 "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헬라어 원문성경을 보면 예물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다. (예물: 단수-δωρον;복수-δωροι) 이것을 보면 가인이 정죄된 것은 예물의 정량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아벨이 믿음으로 바쳤다는 것은 순종과 상관성을 가지며 순종이라는 것은 이미 하달된 명령이 건재해 있어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는 것이라 성경이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 두 사람에게 그들이 바쳐야 할 헌물의 정량이 지시되지 않았다면 또는 다소간에 각자의 소원대로 바칠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가인에게서 허물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가인이 범죄하였다고 규정해 놓았으며 그러므로 하나님께 분명히 그들에게 헌물의 종류와 일정량을 엄밀히 명령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레5:15, 27:30) 성경은 분명히 아벨의 제사는 가인과 비교할 때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히11:4) 테이어(Thayer)의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더 나은,,은 질적으로 우수할 뿐 아니라 또한 양적으로도 우수함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모세 때부터는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아 율법으로 제정하심으로 시작된다. 십일조에 관한 최초의 율법 제정은 모든 수확물과 가축의 10분의 1이 여호와께 속하며 그에게 드려져야만 한다는 선언이다. 율법에 제정된 십일조에 관한 법률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다음의 성경을 참고하여 상고해야 할 것이다 (레27:30-33, 민19:21-28, 신12:5-14, 14:22, 26:12-15,말3:7-12)
십일조(Maaser;마아세르, 十一條, Tithes)의 뜻은 말 그대로 '십분의 일(1/10),이다. IS 사회에서 농산물이나 가축이나 전리품 등의 수입에서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 의무이다. 우리는 앞서 모세 이전시대와 모세 이후시대로부터 법제화 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소득 또는 소산물의 1/10이라는 비율이 책정되었는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추정컨대 '모든 것, 혹은 '완전, 을 뜻하는 열(10)에서 '일부분, 혹은'대표'를 뜻하는 하나(1)을 바침으로써, 헌신과 복종의 의미를 포함하기 위함인 듯하다.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규례들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은 십일조의 규례를 3단계로 분류하였다.
“내가 IS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IS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IS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IS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을 대하여 말하기를 IS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제1의 십일조는 매년 토지 소산이나 가축이나 기타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이다. 이것은 토지의 분깃없이 오직 성막을 돌보는 일에만 헌신된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레위인들은 이때 받은 소득의 1/10을 다시금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이처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하여”바치는 십일조를 ‘제1의 십일조’라고 불렀다.
제2의 십일조는 제1의 십일조를 바치고 남은 것 9/10중에서 다시금 1/10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규례이다. 이것은 민족 절기 때에 감사의 축제용으로 주로 사용되었고, 그 성격상‘축제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경상비에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성전의 화로나 부젓가락, 제단등이 낡고 더러워 쓸 수 없는 경우에는 제2의 십일조로 그런 기구들을 구입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매 7년 주기의 안식년을 기준으로 하여, 제3년과 6년에는 둘째 십일조의 비용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않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토록 규정한 십일조 규례이다. 따라서 제3의 십일조는 따로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내용상으로 같은 것으로서, 다만 그 쓰이는 용도만 다르게 규정한 십일조일 뿐이다. 곧 ‘이웃 구제용’십일조이다. 그러나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는 다르게 해석했다. 첫째 십일조는 - 레위인을 위해, 둘째 십일조는 - 절기를 위해, 셋째 십일조는 - 레위인 중 궁핍한 자나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Antiquities 4권)
히브리인은 십일조 이외에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즉, 그들은 곡식과 과일은 물론 양털과 같은 다양한 소득의 처음 것을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바쳤으며 이를 ‘큰 예물’이라 불렀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그것은 소득의 1/40∼1/6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율법은 전체 소득에서 먼저 큰 예물 (1/40∼1/60)을 제하고 그 가운데서 다시 제1의 십일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한 가운데서 다시 제2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때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등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별도의 예물을 바쳤으며 성막 건축 등 특별한 사업을 위해서도 헌금을 드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율법을 통해서 본 십일조의 본질은 모든 소산물의 1/10이 아니라, 2/10라는 사실을 바르게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은 용도의 차이를 구별한 것뿐인데, 본래는 2/10을 드려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 규정은 다른 헌물을 제외한 것이다. 안식일 준수의 명령이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1/7의 요구라고 한다면, 십일조 준수의 명령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1/10의 요구이다. 하지만 이같은 요구는 나머지의 시간과 재물은 인간의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요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중의 일부분만을 대표로 요구하심으로써, 단순히 시간과 재물만이 아니라 인간의 헌신과 감사와 순종을 받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은 단지 규정된 재물만을 형식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바쳐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밭작물의 조그마한 소득까지도 십일조를 바친다고 자랑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보여준다.(마23:23, 눅11:42) 그런즉 십일조는 무엇보다 만물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신앙고백 위에서 드려져야 한다. 즉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자신은 단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인식하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할 때 십일조는 단지 표면적인 1/10의 헌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 고백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일조의 정신인 것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땅위에 재물 쌓는 것을 경고하시기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면 도적이 구멍을 뚫고 들어온다. “구멍을 뚫는다”는 뜻은 팔레스틴에 있는 집들의 담은 대개 돌담이거나 아니면 구운 진흙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적이 얄팍한 흙을 파고 들어오는 경우를 설명한 것이다. 성도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내세에 들어가 썩지 않는 보물을 받으니 복되고 보물보다 귀한 마음이 세상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가 있으니 더욱 복된 것이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22 절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는 설명이다. 여기서“재리의 유혹”은 흠정역(KJV) 영어성경에서는 “재리의 속임수”-the deceitfulness of riches;부를 얻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여 상대방을 속이는 것-로 번역되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재물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탄식을 한 사람들의 수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그래서 다윗 왕도 권고하기를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 (置心:Do not set your heart on them)치 말지어다”(시62:10)라고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IS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7-29) 영어성경(KJV)에는 ‘여러 배’가 ‘백배’(a hundredfold)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 하시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교훈하셨다.(눅12장)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마23:23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바치는데 집뜰의 채소의 극히 적은 수입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리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면서 이것도 저것도 행하여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혹 어떤 목회자나 성도들은 신약시대의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므로 반드시 구약 율법인 십일조 규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십일조나 그밖에 어떤 율법 조문을 지키므로 구원얻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행위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은 우리가 율법 행위보다 더 온전한 경우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제사 제도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미 개혁되었지만, 그외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율례는 아직까지 아니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유효한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정신은 나와 내 재산이 모두 내 것인데 그 중에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선사한다는 식의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나의 소유는 본래 하나님의 것으로 내 맘대로 할 것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으니 내 것같이 쓰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욕심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줄도 모르고 바칠줄도 모르는 인간이 되기 쉽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최저선을 그어주심으로 물질적 탐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셔서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방침에서 나온 하나님의 생각이요, 계산법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IS백성은 제1의 십일조, 제2,3의 십일조 외에도 절기 때에 성전에 올라 갈 때마다 예물(gifts)이나 제물(offering)을 가지고 갔다.(신12:5-28) IS 백성들의 경우 절기는 종교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뜻했다. 각가지 절기를 통해 단합과 동시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강화시켜 나갔는데 속죄일 같은 때는 (레23:2, 24) 금식과 참회도 하였다. 축제일은 대개 그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하여 즐겼으나 거국적인 3대 절기에는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성전에 참여하여야만 했다.(출23:14, 34:23) “너희 중 모든 남자들은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서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신16:16,17)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소, 양 가난한 자들의 경우 비둘기나 곡분(밀가루 종류)을 바칠 수 있었다. IS 백성들은 십일조 외에 제물(오늘의 주일에 해당)이나 예물(오늘의 특별헌금에 해당)을 드렸다. IS의 3대 큰 절기는 유월절(Passover, 출23:5-8, 민28:17-25), 오순절(Pentecost, 출23:16, 34:22, 민28:26-31,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이라고도 함), 그리고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레23:24-36, 신16:13-17,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함) 그외에 소절기로 부림절(에9:21-28), 수전절(요14:22), 나무 드리는 절기(느10:34, 13:31), 그외에 일식과 관련된 절기로는 안식일(출20:11, 31:17), 월삭(New Moon, 민28:11-15), 나팔절(레23:24, 25, 민29:1-6), 안식년(레25:4-6), 희년(레25:8-13)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절기에 성소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고 각기 힘대로 제물을 드렸다. 십일조와 제물과 예물 외에도 서원제물(신12:26), 세금(마17:25, 22:17), 그리고 특별건축 헌금(출35:20-29, 출36:3-17)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굶거나 가난한 백성이 되지 아니 하였다. 오히려 그 자손이 복을 받아 세계의 부국이 되었다. 지금도 도리어 미국 은행가의 유대계인들이 은행 잔고를 잠그면 세계 역사가 정지될 만큼 세계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IS 민족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왕조들이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흉년이나 이기심에서 십일조를 내는데 인색하여 성전봉사의 전권을 맡은 레위인에게 생활의 위협이 오게 되자 레위인이 그 본직인 성전 봉사의 직을 버리고 딴 길로 가므로 성전이 황폐하고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는 제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아니하였을 경우와 악한 왕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인 레위인을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말라는(신12:19)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성전 제사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한 왕이 위에 올라 허물어진 성전을 정돈하고 쫓겨났거나 타직에 봉사하고 있는 레위인을 다시 불러 그 본직에 세우고 백성들에게 명하여 십분의 일을 바쳐 그들의 생활보장을 튼튼히 해주고 그들을 존경하고 성전 제사를 존귀하게 하였을 때 그 나라는 튼튼하였고 그 백성들은 형통한 복을 받았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경은 다음과 같다. (대하30:20-26, 31:2-21) (느10:32-39, 12:44-47, 13:4-22)
마태복음 22:15절 이하에 보면 가이사에게 세(稅)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하던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십일조는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물(私物)이 아니라 성물(聖物)임을 명심해야 한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다.(레27:30) 또 누구든지 성물을 범하였을 경우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려야하고 범한 성물의 오분의 일(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贖)한즉 사함을 얻으리라고 하였다.(레5:5,16)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던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는 일찍이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그이 사업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10만 달러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십일조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이지.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으려고 하는 걸세.” 그는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드린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주님의 일에 앞장서는 인생을 살면서,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금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이 더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반드시 성경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참존화장품의 김광석 회장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신앙인이 되면서 삶이 완전히 바뀐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운명이었다. 성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종로에 피보약국을 경영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유명인이 되었다. 약국은 날로 번창하였고, 약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도봉산 기슭에 절을 짓는 일이었다. 그의 집안은 어머니를 비롯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피보약국이 유명해지면서 전국의 약사들이 줄을 지어 방문하였다. 전국의 약사들이 방문한 것은 직접 제조해 팔고 있는 약을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약사들의 간청에 못이겨 전국 60군데에 약을 제조해 조달했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무허가 제약으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린 것이다. 79년 ‘잘 나가던 약사’에서 ‘도망자’로 변신한 그는 전국 절을 찾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했다. 6개월을 피해다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양산 통도사의 냄새나는 작은 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텅빈 방안에 빚바랜 신문 한 장만이 그를 반겼다. 다름아닌 6개월전 자신의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했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고 울분이 솟구쳐서 신문을 움켜쥐고 울었다. 한참 동안 울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술에서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하나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웠다. 왜 하필 그곳을 찾았으며 그 방에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이 있었을까? 그날 그는 눈물 끝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도 끝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행운을 안게 된 것이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자수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매일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사업도 구상하게 되었다. 아무도 생각 못했던 기초전문화장품회사인 ‘참존’이었다. 기도 중에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것이 화장품 업계에 신화가 생긴 것이다. “저는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일조의 역사죠.” 사업가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모두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에게 놀라운 축복의 간증이 되었다. 십일조 후에는 두배의 경제적 축복이 쏟아졌다. 그래서 김회장은 만나는 사람마다 ‘십일조 축복론’을 강의한다. 매주 월요일이면 그의 비서실은 단체, 개척교회 등 20여 군데나 넘는 곳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로 분주하다. 이일은 벌써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선교사업이다. 서울 청담동에 자리잡은 참존화장품은 ‘믿음의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창업 15년만에 화장품업계에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참존화장품은 매주 월요일이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믿음을 더하게 하시고 전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교만은 그 모양이라도 생각하게 마시고 겸손하게 하소서.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는 또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고백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가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축복이 내려온다는 사실입니다. 부자가 되길 원하시면 하늘 나라에 저금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 때 돈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3단계로 나누어서 그 문제를 논했다. 첫째-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돈을 벌도록 하시오. 그 농부는 옆 사람을 툭툭 치면서“저 분은 속에 무엇이 있는 사람이야, 아주 경탄할 만한 설교야!”라고 말했다. 둘째- 할 수 있는 만큼 모두 저금하시오. 그 농부는 아주 흥분해서“아주 훌륭한 말이로구나!”라고 했다. 웨슬리는 돈을 절약하지 않고 낭비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 농부는 손을 비비면서 ‘그런 것은 젊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으로 구원이 그의 집에 왔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시오. 그것이 하늘나라 은행에 저금하는 것이오. 이 말을 듣던 농부는 부르짖기를 “오! 여보, 그는 전부 망쳤소.”라고 했다.
헌금에 대한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 영혼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헌금에 대한 그릇된 기준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릇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 그릇된 자세를 고쳐야 한다. 1)억지헌금 억지로 마지못해 내는 헌금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눈 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6:6,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충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후8:7) 성도들 중에는 펌프성도가 있고 옹달샘 성도가 있다고 한다. 펌프성도는 지하수는 풍성하지만 항상 펌프질을 하듯 자극을 주고 권해야 헌금하는 성도들이다. 펌프질을 하지 않으면 한번 주고는 다시 낼 줄 모른다. 그러나 옹달샘 성도는 누구의 간섭이나 자극이 없어도 항상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에 길손이 앉아 떠마실 뿐 아니라 누구나 할 것없이 이런 샘에 둘러앉아 마시고 쉬기를 좋아한다. 이런 성도는 강권할 겨를도 없이 항상 단 마음(with good)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므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2)기분헌금 기분이 내키는 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사전에 준비하여 드리는 계획성이 전혀없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고 되는대로 헌금하는 자들이다.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 있을 때에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처럼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을 속이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전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분헌금 성도는 인색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대부분의 경우 겸손한 마음으로 앉아서 성경의 교훈 앞에 자기의 헌금 생활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 드리는 중에 성령이 주시는 감동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기분대로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일 수 있다. 3)말 많은 헌금 교회 안에 부자가 몇 명 있으므로 교회 살림이나 빚더미를 감당했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은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예산은 모두 충당이 되었으므로 나는 헌금을 안해도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금은 개개인에게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각자에게 따르는 것이다. 바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몫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운영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낌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재정 문제에 관하여 불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 많은 사람은 언제나 헌금 생활에 인색한 분들인 경우가 많다. 4)찌꺼기 헌금 저희 집에서는 가끔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면 식사는 시작된다. 식사시간만 되면 고양이는 어느새 냄새를 맡고 ‘야옹 야옹 밥좀 주세요’하면서 우리 집을 방문한다. 혹시나 구운 생선이 올라 올 때면 대충 먹고 고양이를 주자고 한다. 우리 집의 고양이 밥은 나 아니면 신애가 챙긴다. 생선 찌꺼기를 모아 밥과 함께 비벼서 접시에 담아 갖다 준다. 이런 찌꺼기는 대부분 고양이, 개, 돼지 밥으로 갖다 준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짐승을 먼저 주는 법은 없다. 좋은 음식을 주는 경우도 없다. 1년 내내 찌꺼기를 준다. 고양이나 개 팔자는 상팔자라고 말들 하지만 찌꺼기를 먹는 팔자가 무슨 상팔자이겠는가? 이처럼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수입이 생기면 승용차 유지비, 아파트 관리비, 자녀 교육비, 세금, 부대비, 외상값, 할부값, 겟돈 등 이것저것을 제외시켜 놓고 더 이상 용도가 없으면 교회 헌금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흔하다. 다 쓰고 남은 찌꺼기 중에 일부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바치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리가 없다. 사실상 그런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했고,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다.(잠3:9-10) 수입이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사업을 생각하는 정신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5)눈치 헌금 꼭 필요한 사업이나 계획을 의논할 때에는 이런 소리가 종종 들린다. “나도 누구만큼은 내겠다.”순간적으로 들을 때에는 반가운 소리인 것 같으나 알고보면 이 역시 그릇된 헌금 자세다. 각자가 반드시 자기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낼 것이요, 다른 사람이 헌금에다가 자기 헌금의 표준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요한을 보면서 예수께 여짜오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19-22) 타인의 태도에 따라 나의 기준을 맞출 필요는 없다. 타인들이야 어떻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드리면 된다. 다른 사람을 보고 헌금하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망하였다. 바울사도는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헌금 정신을 높이 칭찬하였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하였고,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대로 할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으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듯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헌금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축복하기를 헌금 생활에 풍성한 것 같이 은혜도 풍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바른 헌금생활은 바른 신앙으로 인도되고 풍성한 은혜가 언제나 임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신학자 부시넬(Horace Bushnell)은 성도들이 헌금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죄로 멸망하지 않으며, 구주가 필요치 않다는 것.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 “가인과 같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여 남의 영혼에 대하여 책임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의 말은 재능과 재물에 관하여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會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매월 (월급의 경우) 또는 주일마다 (사업하는 경우) 지정된 십일조 봉투에 넣되 반드시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여 내어야 성경적인 자세이다. 구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리거나 제물을 드릴 때에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안 것 같고 신약에도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셨다. 특별한 경우가 있을 때에는 별문제이지만, 가능한 한 유기명으로 하여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한다. 담임 목회자가 알아야 만이 헌금한 성도를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는 무기명으로 할 경우를 가르친 곳도 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것이다. 이것은 “구제의 경우”에 속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나서 자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예물(헌물)은 유기명으로 하되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서 십일조의 기준은 소득의 2/10에 해당된다. -내가 IS의 십일조(the tithes:십일조들을)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민18:21) -모든 것의 십일조 중 (from all your tithes:ahems 것의 십일조 중에서)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민18:28-(히)미콜 마세로테켐:너희의 모든 십일조로부터) -너희의 십일조(your tithes:너희의 십일조)와 (신12:6, 26:12)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In tithes and offerings)이라(말3:8)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레27:3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14;22) -> 히브리어 원어 : 에트 콜 테부아트 - 모든 산출의 (민18:28절 참고) 잘에카 - 너희 종자의 하요체 - 나오는 핫사데 솨나 솨나 - 매년 토지에서 (NKJV 번역: You shall truly tithe all the increase of your grain that the field produces year by year)
(NKJV 번역:Bring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 히브리어 원어 : 에트 콜 - 의 모든 것을 함마아세르 - 그 십일조 엘 벨트 - 의 집으로 하오차르 - 창고 우히 - 그것이 있게 하라
(NKJV번역:....... and they brought in abundantly the tithe of everything) -> 히브리어 원어 : 히레부 베네 이스라엘 - IS의 많은 자손은 웨콜 테부아트 - 그리고 밭의 모든 생산물 우마사르 하콜 - 그리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라롭 - 대부분의 헤비우 - 가져왔다
세계적인 치약 상표가 된 콜게이트사의 사장 콜게이트(William Colgate, 1783-1857)는 영국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어린시절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참하였다. 그는 중병 병자인 아버지와 폐병 환자인 어머니 밑에서 살 길이 막막하여, 제 힘으로 돈을 벌어보겠노라고 어린 소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린 콜케이트가 결심을 하고 떠나는 그에게 누워있는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네가 버는 돈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배삯도 없이 미국으로 떠난 콜케이트는 배표를 검사하는 선원에게 발각되어 어려움을 당했으나 선장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미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비누제조 회사에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며 열심과 성실로 일을 하여 곧 지배인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작은 비누 제조회사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잊지않고 실천하였는데, “하나님과의 계산”이라는 장부를 만들어서 수익금의 십분 일을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그의 수익은 날로 늘어났고 회사는 점점 커져 치약과 화장품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그중 치약회사는 그의 이름을 상표로 붙인 “콜케이트 치약”은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십분 일을 바쳤고, 그 다음에는 십분 오를 드렸으며, 나중에는 아예 수익금 전액을 하나님 사업에 바쳤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콜케이트는 이런 말을 즐겨 대답했다. “저의 성공 비결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온 십일조 생활에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은 항상 구별하여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고 나머지 십의 구는 경영에 투자했습니다. 한 때, 하루의 수입이 네 사람이 겨우 옮길만한 무게의 큰 금덩이였을 때에도 저는 십일조 바치기를 주저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거짓 선생의 말에 의해, 십일조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누가 12장에 기록된 “부자영감”에 대한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영감의 비유를 기록케하신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물질을 탐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인색한 자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물론 이 세상에서 부의 축적을 위해 선하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비유는 이 세상의 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만 몰두된 상태 즉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돈된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상실해버린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대화에서도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케 하신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던졌다. 부자 관원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을 일러준다. 먼저 부자 관원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훈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의‘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역설하신다. 부자 관원은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과연 하나님께 대하여는 계명을 지켰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게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근심하고 돌아감으로써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부자 관원은 외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 율법을 준수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부자 관원의 마음을 이미 읽은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시험해 본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금은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은 기본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이 두 사람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상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돈으로 영생 얻는다는 잘못된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결국 부자 관원처럼 그의 본심이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드려질 때만이 하늘에 보화가 보장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십일조가 그렇게 무거운 짐인가, 멍에인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섬김,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몸, 우리의 재능, 우리의 사랑 등에 대한 원초적이며, 선행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총명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창조의 원리, 우리를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자비, 구속의 신비,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성품을 부여받은 것, 천국의 언약과 계시의 소망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 모두는 모든 선한 은사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느끼고 있다. 풍성한 식탁과 넘치는 잔과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 주는 약과 우리의 거처에서 들을 수 있는 기쁨과 건강의 소리, 아무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는 안정감 등은 모든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모든 간접적인 것들 -기회, 기술, 판단, 친구들, 영향력 등-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위대한 후원자인 하나님의 종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잔을 들고 있는 것들이지 잔을 채워주는 것들은 아니다. 주님은 우물곁에 서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게 할 때 그들의 잔을 가득히 채워 주신다. 당신은 이 부유함을 갖고 있는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당신에게 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지어 주는 분은 주님이시며, 당신에게 지혜롭고, 이해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이와같은 은총이 주어질 때 우리는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시는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순종의 제단에 사랑의 산제사, 가장 쾌활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선한 마음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항상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관계로 빌렸던 건물을 1년 이내에 비워 주어야만 했다. 그는 여섯달 동안이나 다른 건물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그는 얼마간의 부지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담보로 하여 은행이 건물을 내어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부지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철도 변에 있는 꽤 쓸모있는 유용한 땅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땅의 구입 대금으로 3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에게는 총3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1만 달러는 바로 주님의 사업을 하는데 쓰기로 작정된 금액이었다. 그는 2만 달러에 철도 변의 부지를 구입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3만 달러를 지불해서라도 그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펼쳤더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펼쳐졌다. “너의 모든 재산의 십일조를 드려라. 그리하면 하늘 문을 열어 네가 축복을 쏟아부어 주리라”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됐다. 주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님의 것 곧 십일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그는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1만 달러를 가져다 써라. 그 돈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철도 변의 땅 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땅을 당신에게 2만 달러에 팔겠습니다.”그리하여 결국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받으시게 되었고, 그 사업가는 자신의 몫으로 공장을 다시 경영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사업을 날로 번창해 나갔다.
카타 미안 삽바투 - 주간의 첫째날에 헤카스토스 휘몬 - 너희 각자가 파르 헤아우트 - 스스로에 의해서 티데트 데사우리존 - 비축하여 두라 호 티 에안 유오도타이 - 혹 그가 번영하여(얻은 것) 무엇이든지 히나 메 - ∼하지 않도록 호탄 엘도 토네 - 내가 갈 그 때면 언제나 로게이아이 기논타이 - 헌금들이 이루어지지
매주 첫날에 너희 각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헌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
①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 ②사랑과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③미리 준비하여 드려야 한다. ④힘을 다해 드려야 한다. ⑤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지 말고 자원함으로 드려야 한다. ⑥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⑦섬기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고후8, 9장을 자주 읽어야 할 것이다.
①십일조는 구약의 명령이며 지금도 그 명령은 계속 유효하기 때문이다. ②십일조는 믿음의 행위의 거룩한 부분이다. ③십일조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다. ④십일조는 몸된 교회 곧 하나님 사업에 절대 필요한 기금이다. ⑤십일조는 이 세상에 대한 탐심을 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⑥십일조는 하늘에 쌓는 보물의 거룩한 부분이다. ⑦십일조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행하는 것이다.
①그랜드 종합주석, 2권, 3권, 11권, 15권 (성서교재간행사, 1991) ②기독교인 생활백과사전 중권 (정원문화사, 1984) ③기독교 문장대백과사전 6권, 13권, 19권, 22권 (성서연구사, 1994) ④주제별 설교대사전, 4권 (아가페, 1984) ⑤크로스 종합주석 2권, 3권, 13권, 15권, 18권 (포도원, 1999) ⑥기독교대백과사전, 10권 (기독교문사, 1995) ⑦구약 원어분해성경, 3권, 7권, 13권 (로고스, 1995) ⑧신약 원어분해성경, 4권 (로고스, 1995) ⑨조누가, 십일조를 넘어서 (베틀북, 2000) ⑩국민일보, 종교면 (2000, 3.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