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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아버지’, ‘독립군의 아버지’
지청천 장군과 대전자령 전투
지창식
지청천1888~1957은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배웠다. YMC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도 활동했으며,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울 수 있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에는 무관 학교에 들어가서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때는 다름 아닌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이루어지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껍데기만 남은 시기였다. 이 영향으로 얼마 안 가 무관학교에서 나오게 된 지청천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국내에는 더 이상 군부대나 군사학교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 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지청천은 1908년 국비 유학생으로써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어엿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일본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그였지만 나중에는 앞장서서 일제에 저항했다는 점이 꽤나 아이러니하다.
1919년, 국내에 머무르던 지청천은 3.1 운동을 목격했다. 수많은 이들에게 독립 운동의 열망을 불어일으킨 3.1 운동답게 지청천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시설들이 지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북쪽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에 임명받았다. 인재들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신흥무관학교에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지청천의 존재는 각별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의 병서와 지도 등을 함께 챙겨왔기에 독립군 세력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지청천은 1920년 임시정부 소속 독립군부대인 서로군정서의 간부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가 된 이 서로군정서는 대한독립단, 광복군사령부(서간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북간도)과 함께 1920년대 무장 투쟁 운동의 중추를 담당했다.
그런데 그해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등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들에서의 패배를 곱씹은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보복했다. 이 끔찍한 학살로 인근 주민들은 물론 독립군들도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만주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 부대들은 연합 부대를 편성해 힘을 합치고자 했다.
지청천 또한 이 움직임에 편승해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 안도현으로 향했다. 곧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외에도 서일, 이범석 등의 독립군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뒤 일본군을 칠 준비를 해나갔다.
군복을 입은 지청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지만, 이내 자유시 참변이 터지고 말았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을 다루며 설명했던 이 사건은 소련의 정치 상황과 이념 대립이 얽혀 빚어진 대한독립군단의 내분이었다. 대한독립군단 군사 고문이었던 지청천은 기껏 모인 독립군이 다시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1개 여단으로 이루어진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다. 또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대한독립군단의 이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지만 지청천은 1922년 4월 군관학교의 방침이 소련의 규정에 어긋난다는 명목으로 체포당했다. 다행히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더이상의 고초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임시정부의 방향을 의논한 국민대표회의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석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 운동에 계속 매진했다. 양기탁과 함께 정의부를 만들어서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려는 노력도 했지만,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큰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지청천은 김원봉을 대표로 하는 좌익 세력과 달리 우익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30년 김구, 이시영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창당한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다. 독자적으로 한국독립군이라는 군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한국독립당은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에 밀려 해산되었다가 나중에 재건된다.
그즈음 일제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 지역을 유린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자연스레 중국군과 가까워졌다.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전선을 결성했고 1932년 8월 쌍성보를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가 쌍성보 전투로, 중국군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쌍성보를 빼앗겼지만 11월 다시 한·중 연합군이 쌍성보를 탈환하였다. 지청천 장군은 만주국 군사 전원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지만 밀려드는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아쉽게도 쌍성보에서 철회하고 만다.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은 이후로도 중국군과 손을 잡고 동경성, 사도하자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 6월 벌어진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매복전에서 다수의 적군을 사살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 전리품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벌어져 한·중 연합군이 결국 해산된 것을 보면 연합이란 것이 이렇게 부질없는 것일까 싶다.
오랫동안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끈 지청천은 1940년에 중요한 행적을 남겼다. 임시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어 연합군 측의 활동에 함께한 것이었다. 광복군은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자는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무산되었다. 그들은 지청천의 휘하에서 여러 게릴라전, 매복전에서 주로 활약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비롯한 좌익 계열 독립군과 연대하지 못하는 바람에 더 큰 활약을 이루지는 못했다.
지청천과 김구. (출처: 네이버 블로그)
1945년, 마침내 한반도가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지청천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환국했고 대동청년단의 단장으로 소소하게 활약했다. 이후 국회의원에 선출되는 등 잠시 정치계에 몸담기도 했던 그는 1957년 세상을 떠났다.
지청천은 독립군의 네임드 장군들 중 광복 이후까지 살아남으며 항일 투쟁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池靑天) 장군, 그의 이름은 원래 지석규(池錫奎)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동안은 이름은 청천(靑天)으로, 성(姓)은 어머니의 성인 이(李) 씨를 따서 이청천(李靑天)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언제나 상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는 분들은 국내에 있는 가족의 안위(安危)를 생각해서 흔히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른 중요한 뜻은 장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파란 하늘을 보고 앞으로 독립운동에 맹진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각오를 새롭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조국이 광복된 후에는 이미 굳어진 청천이란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고, 성은 원래 성인 지(池) 씨를 찾아 지청천으로 이름을 사용했다.
나는 장군을 생각하면 ‘광복군의 아버지’, ‘독립군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싶다. 장군은 광복군을 창설하기도 했지만,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많은 수의 독립군을 오랜 기간에 걸쳐 양성했기 때문이다.
장군의 여러 전투 중에서도 대전자령 전투는 의미가 큰 전투다.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는 독립군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다른 3대 대첩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관해서는 학교에서 국사 시간에도 들었고, 책에서도 많이 다뤘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지청천 장군이 지휘한 대전자령 전투는 일본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격멸하고,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노획한 큰 전투였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거 같다.
1930년대 초엽, 일본은 현재 중국 동북 지역에 일본의 꼭두각시인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웠다. 그때 그곳에는 만주국과 일본에 반대하는 반만항일(反滿抗日)의 중국 의용군이 도처에 있었으며, 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도 활동 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진압 임무를 맡은 부대는 일본 관동군이었는데, 일본은 이를 증원하기 위해 당시 조선 함경도 지역에 있던 일본군 19사단 예하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을 차출, 1개 연대 전투단 규모의 간도 파견군을 구성하여 보냈다. 1933년 6월, 일본은 간도 파견군이 항일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이들을 조선으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이 정보는 바로 한국 독립군에서 알게 됐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이를 치기로 했다.
현재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構) 지역에 주둔하던 간도 파견대가 복귀하는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길은 좁고 험한 산속을 통과하나 거리가 가까운 길이고 다른 하나는 길은 넓고 양호 하나 거리가 먼 길이었다. 지청천 장군은 적(敵)이 전자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예상하고 통과 예정지점인 대전자령에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하기로 하는 한편, 일부 병력은 넓은 길 쪽으로 보내어 만약의 경우에는 적의 후미를 치기로 했다.
한중연합군은 3일간 100km 이상을 적이 모르게 은밀히 행군하여 대전자령 북쪽에 있는 노모저하(老毋猪河)에 6월 28일경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을주민들로부터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넘을 것이라는 보다 확실한 정보를 얻고 병력을 배치했다. 이 때 참가한 병력은 중국군이 2,000명, 한국 독립군이 500명 정도였는데, 한국 독립군이 주공으로서 보다 중요한 지점에 배치하였다. 이때 장군은 예하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고 한다.
“이번 전투는 이천만 대한(大韓) 인민을 위하여 원한의 복수를 하는 공격이다. 총탄 한 발 한 발이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保佑)하여 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환배검(桓倍儉)의 자손들로 굳세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만대 자손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도록 하라.”
예상 적 통과일이 7월 1일인데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아침 폭우가 쏟아져서 일본군의 출발이 3일 동안 연기되었던 것이다. 한국 독립군은 빗물에 몸이 젖고, 준비된 마른 식량도 떨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장군은 간부들을 데리고 참호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하여 용기와 인내심을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마침내 7월 3일 일본군은 전초부대를 앞세우고, 수많은 보급품을 실은 자동차와 우마차와 함께 대전자령 한중연합군 매복지역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일본군이 완전히 들어온 다음에 총공격하기로 했으나 후미가 약간 덜 들어온 상태에서 중국군이 발포하기 시작하여 한국 독립군도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했다. 바위를 굴러 내리고, 소총과 기관총을 맹렬히 사격하였다. 거의 일방적인 완전한 공격이었다. 약 5시간의 전투에서 항일군 토벌부대로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간도 파견대는 섬멸되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여러 개 부대의 혼성부대인 간도 파견대 병력 중에는 함경북도 회령에 있던 부대에서 약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이 참가했었는데 나중에 회령에 무사히 귀환한 일본군은 불과 27명이었다고 한다. 전투 후에 막대한 양의 노획품도 수습하였다. 소총 만해도 1,500정, 군복이 3,000벌, 각종 보급품을 실은 우마차가 200량이었다고 한다.
지청천 장군은 본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이 학교가 폐교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하게 된다. 일본 육사 재학 중에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한국 유학생 중에는 조국이 없어진 마당에 중도 포기하고 귀국할 것인가?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심지어 자결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군은 그때 연장자로서 이왕 군사학을 배우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중위가 되는 날 조국 광복을 위하여 궐기하자고 설득해서 다 같이 맹세 했다고 한다.
삼일운동이 발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군은 일본군을 탈출한다. 최신 군사학 서적과 군용지도를 가지고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교관과 통솔하는 교성 대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군사학을 정식으로 배운 일본육사 출신의 장교가 와서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생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이후에 장군은 서로군정서, 고려혁명군관학교, 정의부 등에서,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독립군 양성을 계속했다. 대전자령 전투 때는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전에 쌍성보 전투,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을 통하여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과 합의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지청천 장군을 그 책임자로 초청한다. 이 일을 계기로 장군은 대전자령 전투에 참여했던 독립군들을 데리고 중국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나중에 임시정부의 정규군대인 광복군을 창설할 때 대전자령 전투에 참여한 한국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은 한국광복군의 뿌리가 된다. 이렇게 하여 만주에서 활동했던 한국 독립군의 맥은 광복군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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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가면 지청천 장군의 일기와 장군의 딸이며, 광복군 첫 여성 대원 중 한 분인 지복영 여사의 일기가 전시되어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관한 전시물은 있는데 같은 3대 대첩인 대전자령 전투를 소개하는 전시물이 없는 점이다. 적당한 기회에 이점이 보완되었으면 싶다. 한편 장군의 묘소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부인 윤용자 여사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서울현충원을 방문하면 ‘독립군의 아버지’, ‘광복군의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뵙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