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는 ‘만인의 연인’

해인사 벽화에 그려져 있는 태전선사와 홍련
열반한 어느 노장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스님은 해방 전에 출가했는데, 그 시절에는 일본불교 영향으로 절 바깥에 나갈 때는 양복을 입기도 했다. 하루는 도반들과 뭉쳐서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가, 모두 승려라는 신분을 숨기고 사주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 스님의 차례가 돌아왔다.
“거 참 이상하네. 저렇게 멀쩡하니 생겼는데 장가를 못 가겠네.”
‘당연하지.’ 스님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에에. 이게 뭐야. 여자가 없어서 못 가는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못 가겠네.”
‘ 정말 신통하네. 어떻게 알았지?’
출가자는 혼자 살기 때문에 주인(?)이 없다. 동시에 모두가 주인이다. 이른 바 ‘만인의 연인’이다. 출가자의 존재의미는 정법을 오래토록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러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만 하는 ‘등거리외교’가 처신의 기본이다. 같은 얘기로.오래 전 한 일간지에 나온 유명 시인 수녀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스스로를 ‘실속(?)없이 바쁘기만한, 만인의 연인’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럴듯했다. 산중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가끔 사람 냄새 나는 ‘로맨스’류의 이야기를 선어록에서 양념처럼 발견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태전 선사와 기생 홍련 사이의 이야기가 있다.
큰 문장가요 선비로 명망이 자자했던 한퇴지는 불교를 비방한 일 때문에 좌천을 당했다.중앙에서 밀려나 조주땅으로 내려와 분심을 삭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화풀이 삼아 당시 그곳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태전 선사의 스타일을 구기게 할 목적으로 고을에서 제일가는 기생 홍련에게 모종의 임무를 맡겼다. 기생에게 맡긴 임무라면 뻔하다. 그런데 작업을 개시한 지 백일이 되어도 태전 선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홍련은 선사의 고매한 인격에 반해 선사를 애인이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작전을 성공시키지 못한 일로 홍련은 혹여 자기가 화를 입지나 않을까 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사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편으로 홍련에게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도력뿐만 아니라 글 실력으로도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여 줌으로써 한퇴지와 승부를 가릴 심산이었다.
축융봉 내려가지 않기를 십년 十年不下祝融峰
색을 보고 공을 보매 색 그대로 공이네 觀色觀空卽色空
어찌 조계의 물 한 방울을 如何一滴曹溪水
홍련의 잎사귀에 떨어뜨릴 수 있으랴 肯墮紅蓮一葉中
결국 이 시 한 수로 홍련도 살고 한퇴지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힘까지 겸비한 멋진 선시禪詩가 아닐 수 없다. 시의 내용 또한 의미심장하다. 구절구절마다 두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를 꼬실 때 읊었다는 시 “청산리 벽계수야…명월이 만공산하니…” 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벽계수와 명월(황진이의 호)은 문자 그대로의 뜻도 품으면서 동시에 두 인물을 상징한다. 태전 선사의 시에서는 미모의 기생을 보고서도 담담한 경지를 ‘색즉시공’이라 했다. ‘홍련의 잎사귀’와 ‘조계의 물 한방울’ 또한 남녀의 성을 아름답게 승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대단한 안목이다. 그리고 이 시를 종이가 아니라 홍련의 비단 치마를 펼쳐놓고 그 위에 일필휘지 써 내려갔다 하니, 그 상황 을 상상만 해도 멋이 넘친다. 해인사 큰법당 뒤쪽에 가면 외벽 한 켠에 이 장면이 벽화로 남아있다.
혹시나 닥칠지도 모를 이런 일을 대비해서라도 이 시는 반드시 외워 두어야 할 것 같다. 글자 몇 개만 바꾸면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 더불어 시간 날 때 붓글씨 연습도 좀 해두어야 할 것 같다. 글짜꼴을 제 아무리 궁서체로 한들 컴퓨터에서 프린트로 뽑아 주어서는, 홍련은 몰라도 한퇴지 같은 뛰어난 교양인까지 교화시키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원철스님의 <할喝로 죽이고 방棒으로 살리고> 에서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