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7세기 일본문서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공개
독도를 ‘조선 강원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한 17세기 일본측의 공문서가 26일(2006년 2월) 공개됐다. 이 문서는 최근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해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한 가문에 전승된 것이다. 손승철(孫承喆)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무라카미(村上) 가문으로부터 ‘원록 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원본 사진을 입수하고 이를 공개했다. 문서는 “조선국 강원도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있다”는 안용복(安龍福)의 진술을 담았다. 이어 ‘조선의 8도(朝鮮之八道)’라는 제목 아래 각 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강원도’ 아래 ‘이 도(道) 가운데 죽도와 송도가 있다’라고 명기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사진.점선 안) 이 문서는 1696년(숙종 22년) 5월 일본 어선의 독도 출어에 항의하 기 위해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안용복을 일본 지방 관리가 취조해 막부 직할령인 이와미(石見)주에 보고한 내용이다. 문서의 존재는 작년 5월 일본 시마네현의 지방지 산인주오신보(山陰中央新報)의 보도에 의해 알려졌으나 실물사진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1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3차 상봉) 제3차 이산가족 상봉이 2001년 2월 26일부터 2박3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졌다. 서울 센트럴시티에선 100명의 북측 이산가족들이 500여명의 남쪽 가족을 만났으며, 이어 평양 고려호텔에선 남한 이산가족 100명이 북쪽 가족들과 눈물어린 포옹을 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969년 12월 대한항공 여객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납북된 딸 성경희 씨를 어머니 김삼례 씨가 32년 만에 만나 회한의 정을 나눈 순간이었다. 또한 6.25때 포로가 돼 북한에 살고 있던 국군 포로 2명도 평양에서 남한측의 동생들을 만나 눈물의 50년을 회상했다. 서울에선 고 정지용 시인의 둘째 아들이 남쪽의 형을 만나 얼싸안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1919년] 미국의 그랜드캐년, 국립공원(면적 2,600km2)으로 지정됨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과 디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그리고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 과정은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1919년 2월26일 민족 자결주의를 외쳐 유명해진 미 28대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에 의해 125만 에이커에 달하는 이 지역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미연방 정부의 관리와 보호 속에 있게 되었다.
[1903년] 이탈리아 화학자 나타(Natta, Giulio, 1903~1979) 출생
임페리아 출생. 1924년 밀라노공과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로마대학 등을 거쳐 1938년 밀라노공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X선에 의한 결정구조 연구, 합성고분자의 연구에 종사하고, 폴리프로필렌 등의 합성섬유, 에틸렌프로필렌 등의 합성고무의 제조법을 발명하였다. 또한 고분자의 입체규칙성의 개념을 확립하여, 규칙성이 없는 것은 어택틱중합체, 규칙성이 있는 것은 신디오택틱중합체와 아이소택틱중합체로 분류하여 입체구조의 차이에 의한 성질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 1963년에는 독일의 K.치글러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36년] 일본 ‘2ㆍ26 사건’ 발발
←2.26 쿠데타 당시 국회의사당을 지나가고 있는 반란군 부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1,400여명의 사병들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2ㆍ26 사건’이었다. 장교들은 내각을 습격, 다카하시 대장상과 사이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수상관저와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다. 27일에는 도쿄에 계엄령이 시행됐고, 28일에는 이들에게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29일에는 2만4천여명의 군병력이 이들을 포위, 선무방송과 비라살포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천황에 의해 반란군으로 단정됐다는 소식에 동요하기 시작한 사병들은 대부분 원대복귀했으나 장교단 중 나카야마 대위는 책임을 지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른 청년장교들은 무장해제된 후 체포돼 법정에서 1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2.26사건’은 육군 내부에 존재해 온 두 개의 파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준비를 위한 국내체제 확립과 고도의 국방국가실현을 목표로 하는 ‘통제파’와 관념적 행동방식에 의한 국가 개조를 계획하는 ‘황도파’가 이들이다. 통제파가 주로 참모본부, 육군성 등 중앙의 참모장교로 이루어졌다면, 황도파는 위관급의 청년장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933년, 천황은 국가통치권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최고기관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뿐이라는 ‘천황기관설’ 논쟁이 발단이 되어, 통제파가 황도파를 요직에서 내쫓으려 하자 두 파의 싸움이 격화되어 이날의 ‘2.26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실권을 장악한 통제파는 일본을 파시즘의 길로 내몰았다.
[2006년] 세계인구 65억명 넘다 세계 인구가 26일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인구통계국의 국제 프로그램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한국 시각 26일 오전 9시16분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섰다고 MSNBC방송이 2006년 2월 25일 보도했다. 현재 초당 4.4명이 태어나고 있으며 현 인구는 1990년에 비해 4배 가량 늘어났다. 통계국은 지난 2004년 3월 보고서를 통해 1999년 6월에 인구 60억명을 넘어섰다고 밝힌 바 있어 7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명이 늘어난 것이다. 또 6년 후인 2012년 10월 18일 오후 4시36분(미국 동부 시각)에 70억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1801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 사형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이승훈 선생. 1801년 2월26일, 이승훈 정약종 등 초창기 천주교 지도자 6명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서소문 밖 네거리(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참수됐다. 청나라에서 한국인 최초로 영세(1784년)를 받고 귀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설립(1785년)하는 데 기여한 순교자 이승훈은 태어난 곳도 반석골(지금의 중구 중림동)이었고 세례명도 반석(베드로)이었다. 탄압이 거세질 때마다 배교(背敎)로 위험을 피해갔지만 결국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는 것이었다.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1866년에, 증손 연구와 균구가 1871년에 순교해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됐다.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는 천주신앙을 중심으로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가 대립하던 민감한 시기에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등을 옮기다 발각된 것이 발단이 됐지만, 남인 시파의 기세를 꺾으려는 노론 벽파의 정치적 공세 성격도 짙었다. 신서파에 온화한 정책을 펴오던 정조가 1800년에 죽고 벽파에 치우친 영조비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막 시작한 것도 박해를 부추겼다. 300여명이나 순교하면서 천주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살아남은 신도들이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오히려 천주신앙의 전국적인 확산을 촉진시켰다.
[1801년] 조선후기 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 사망
←정약용의 셋째 형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회장이었던 선암 정약종 선생.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자이면서 한국 천주교 첫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한 선암 정약종(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선생이 1801년 2월 26일 순교했다. 그는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당대에 천주교 교리지식이 가장 해박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천주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760년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27세 때인 1786년 3월 둘째 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대부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와 구성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을 맡아 교회에 헌신했다. 1801년 1월 19일 정약종의 `책롱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임대인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의 서한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약종 일기 등이 들어 있는 정약종의 책롱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검거되고, 11일에 권철신과 함께 정약종이 체포돼 의금부에 투옥됐다. 정약종은 이날 국가가 금하는 사교(邪敎)를 믿고,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당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문화관광부는 그를 `200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1802년] 위고 Victor(-Marie) Hugo 출생
1885년 5월 22일 죽음 위고는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극작가·소설가이며 시인이다.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했다. 그는 <크롬웰 Cromwell>(1827)·<에르나니 Hernani>(1829) 등을 발표하면서 낭만주의의 기수로 떠올랐는데, 1931년에는 <노트르담의 꼽추 Notre Dame de Paris>를 발표해 큰 명성을 얻었다. 1840년대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귀족원 의원으로 부와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작가로서의 진정한 위대성에 도달한 것은 연이은 가정적 불행과 정치적 시련을 통해서였다. 1851년 프랑스 제2제정 수립에 저항하던 위고는 벨기에의 브뤼셀로 피신했고, 이후 영국 해협의 저지·건지 섬으로 옮겨다니며 20년간의 망명 생활을 했다. 불후의 명작인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을 위시해 그의 심오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씌어졌다. 1870년 제3공화정이 선포되자 위고는 귀국했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세상의 모든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제 때를 만난 사상이다. "- 빅토르 위고
[1848년] 프랑스 임시정부, 제2공화국 선포 1848년 2월 26일 프랑스 임시정부가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1830년 앙시앵 레짐(구체제라고도 함. 프랑스 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었던 이전의 체제)을 부활시키자는 왕당파와 혁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세력과의 갈등 속에 샤를 10세는 의회 해산, 선거권 제한 등을 내용으로 하는 7월 칙령을 공포했다. 국민들은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에 반대하며 시가전을 벌였고, 결국 의회는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새 입헌군주로 내세웠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부르주아 중심으로 사회를 개편하자 노동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파리 집회를 계기로 경찰과 충돌하면서 개혁 혁명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2월 24일 혁명이 일어난 지 2일 만에 7월 왕정은 붕괴해 루이 필리프는 퇴위하고 라마르틴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890년] 이형우[李亨雨] (한국 독립운동가) 출생 1890. 2. 26 충북 제천~1958. 6. 10. 1908년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으며, 1918년 왕칭 현[汪淸縣]에서 광복단에 입단하여 청년계몽운동 및 한인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광복단원과 함께 노령으로 일단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총기·탄약 등을 구입하여 다시 왕칭 현으로 가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했다. 5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오봉산에 잠입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강원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징역 3년 6개월의 언도를 받았으나 감형으로 1925년 7월 28일 출옥했다. 그뒤 3년 동안 각처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원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언도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61년]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드(Ferdinand, 1861~1948) 출생
페르디난드는 엽관제도를 활용해 불가리아 내정을 굳건히 다졌다. 1908년 10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 전야 기회를 이용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불가리아 완전 독립을 선언했으며 왕, 즉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제국주의적 야심도 품고 있었던 그는 발칸 동맹의 형성(1912)을 주도했다.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비공식적으로 참여)로 구성된 이 동맹은 유럽 지역에 속한 투르크의 분할을 추구했다(제1차 발칸 전쟁, 1912. 10~1913. 5). 그의 영토적 야심은 승리를 거둔 동맹국들간에 점령된 투르크 영토의 배분 문제를 놓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좌절되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로 하여금 불가리아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투르크·루마니아도 참가하게 된 이 동맹에서 패한 불가리아는(제2차 발칸 전쟁, 1913. 6~7) 발칸 인접 국가들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페르디난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참여한다는(1915~18) 결정을 내렸다. 불가리아의 군사적 패배(1918)로, 그는 아들 보리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918. 10. 4). 그뒤 코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1864년] 에버셰드 (영국 천문학자) [Evershed, John] 출생 1864. 2. 26 영국 서리 곰섈~1956. 11. 17 서리 유허스트. 1909년 태양흑점(太陽黑點)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흐르는 가스의 수평운동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때때로 에버셰드 효과라고 한다. 1906년 인도의 코다이카날 및 마드라스 천문대의 부대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대장이 되었다. 1915년 카슈미르로 원정하는 동안 무거운 천체(이 경우에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빛의 파장은 국소중력장(局所重力場)의 세기에 비례하는 양만큼 증가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측정을 처음으로 했다. 1923년 은퇴한 뒤 영국에 돌아와 1925년 유허스트에 자신의 태양관측천문대를 세웠다. 그는 개기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노르웨이(1896)·인도(1898)·알제리(1900)·스페인(1905)·오스트레일리아(1922)·요크셔(1927) 등 6차례나 원정대에 참가했다.
[1852년] 켈로그 (미국 의사) [Kellogg, John Harvey] 출생
1852. 2. 26 미국 미시간 타이론~1943. 12. 14 미시간 배틀크리크. 미국의 의사, 건강식품 개척자. 건조된 조반용 곡물가공식품을 개발했고, 곡물식품을 얇은 조각 모양으로 만드는 산업을 개척했다.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이자 채식주의자였던 켈로그는 1875년 뉴욕 시의 벨뷰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76년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건강개선연구소를 지도·관리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배틀크리크 요양소가 되었고, 1959년 배틀크리크 건강 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환자의 식단을 다양화하기 위해 그래노즈와 콘플레이크로 불리던 얇은 조각의 밀을 비롯하여 수많은 견과식·야채식을 개발했다. 콘플레이크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조반용 곡물가공식품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동생인 W.K. 켈로그는 자신의 곡물가공식품 회사를 차렸으며, 요양소의 환자였던 C.W.포스트도 곡물가공식품 회사를 차려 유명해졌다. 켈로그는 배틀크리크대학의 창립자인 동시에 초대 총장(1923~26)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스프링스에 마이애미배틀크리크 요양소를 건립했다. 그밖에도 많은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나폴레옹(Napoleon I, 1769~1821)은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Elba I.)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2월 이 섬을 탈출하여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Saint Helena I.)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밖에 2007년 부동산 실거래 첫 집계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3주년 맞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 2006년 '황우석논문' 서울대교수들 정부 연구사업서 모두 제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0m 금메달 캐나다 클라라 휴즈 2006년 친일파 땅소송 모두 중단 2006년 프랑스, 유대청년 피살에 반유대주의 시끌 정치인·시민 등 3만여명 추모 행진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첫 미사 2006년 일본 왕인박사 묘에 백제문 세운다 2003년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치과의사 이도행씨 무죄확정 2001년 고 박종철씨, 서울대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 2001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3차 상봉) 1999년 패티김, 가수 데뷔 40주년 기념 대형콘서트 1996년 전두환 전대통령 비자금 첫 공판 1996년 일본, 여성 결혼한 후 성(姓) 유지 가능.결혼연령 18세로 조정 1996년 제46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에 리안감독 `감각과 분별` 수상 1995년 김영식(9세) 킬리만자로 정복, 세계 최연소 등정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 1992년 보건복지부, 태아 성감별 집중단속 1980년 서울지하철2호선중 왕십리~문래동 강북구간 건설공사 착공 1969년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 사망 1967년 자전거 개조한 비행기 실험 1967년 KBS TV, 아침방송 실시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1960년 미국 해군기와 브라질 여객기 리우데자네이루 상공서 충돌 1954년 서독하원, 재군비허용 개헌안 가결 1952년 영국, 원폭소유 확인 1949년 유엔안보리 심사위원회, 한국유엔가입자격 가결 1948년 유엔소총회, 남한지역 총선거안 가결 1916년 독일-프랑스, 베르당 전투 시작 1908년 장지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 창간 1895년 교육강령조칙 영포 1876년 부산 개항 1876년 한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조약) 조인 1869년 미국 헌법개정으로 흑인에게 투표권 부여 1786년 맴돌이 전류 현상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도미니크 아라고 출생 1577년 스웨덴 왕 에리크14세 사망 1564년 영국 극작가 말로우 출생 14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禁火)도감` 설치 1154년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국의 왕 루지에로 2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