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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이야기] 04
S#1. 교도소 내부 복도
작업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린다.
각 방의 문이 절컥절컥 열린다.
S#2. 교도소 운동장
각 사별로 수인들이 줄을 지어 각 작업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중에 용식이 슬렁슬렁 줄의 뒤로 이동하여 신에게 가까이 간다. 무뚝뚝하게 걸어가고 있는 신.
용식이 신을 괜히 툭 치면서 친한 척 하더니 뒤쪽을 가리킨다.
줄의 거의 끝에서 어슬렁거리며 오고 있는 중호.
용식 : 절마 다음 주면 출소야.
S#3. 목공 작업장
수인들이 작업 중이다.
신이 속해있는 조는 나무로 된 쌀통을 깍고 조립하는 중.
신의 옆에 붙어 앉은 용식.
그들이 앉은 작업대 건너편에서 혼자 묵묵히 일하고 있는 중호.
용식 : 가진 재주같은 거 없고. 인생 살아온 게 다 병맛에 젬병인데 절마가 딱 하나 가진 게 있어. 절대 충성.
중호, 나무를 깍다가 실수를 해서 손을 찍는다.
저만치에 있던 교도관이 돌아본다.
중호의 손에서 피가 난다.
교도관이 다가오는데 중호는 피가 난 손가락을 죽 빨더니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도관이 들여다보자 또 한번 손가락을 죽 빨며 뭔 일 있냐는 듯 본다.
용식 : 저런 놈이 일본에 태어났으면 말이지. 갈라라 그럼 네에.. 하고 바로 지 배 푹 쑤셔서 가르는 캐릭터지.
그거 머라 그러냐. 그.. 그래. 할복.
S#4. 운동장
휴식 중인 수인들.
예의 자리에 앉아있는 범환. 그 옆에 재섭과 용식 등 패거리들이 있다.
그 앞에서 범환에게 깊이 허리 굽혀 절을 하는 중호.
용식소리 : 그런 놈이 일 맡았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범환은 배를 긁적긁적하며 끄덕여준다.
돌아서 가려던 중호가 다가온 신과 마주선다.
신, 뭔가 말하려고 우물거리다, 그냥 어깨나 한번 쳐주려다가, 중호를 덥썩 안는다.
중호, 어색해서 굳어 서있다. 그래도 신의 간절한 마음은 전해졌다.
S#5. 교도소 앞
사복을 입고 나서는 중호.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데 기다리던 범환의 패거리 하나가 다가온다. 인사를 꾸벅하더니 중호가 들고 있는 색을 받아든다.
그들이 걸어가는데 하나. 둘. 기다리던 애들이 인사를 꾸벅꾸벅하며 옆으로 붙는다.
중호는 조직에서 나름대로 중견급 행동대장이다.
S#6. 사채업 사무실 앞 골목
자가용이 도착한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려서 건물 쪽으로 가는 사장. 유들유들하게 핸드폰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장 : 왜 이러십니까 사장님. 죽어도 갚을 돈이 없다니. 죽을 각오면 뭘 못하겠어요.
그렇게 살려구 살려구 바둥거리니까 돈이 안나오지이..
하다가 뒤에서 뭔가 빠직 깨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본다.
어느새 자동차를 둘러싸고 있는 예닐곱의 사내들. 그 중에 하나가 야구 방망이로 자동차의 앞 유리를 깨놓은 것.
운전사내는 반항하려다가 이내 제압되서 땅에 박힌다. 야구방망이가 옆문 유리창을 갈긴다.
조직 : 선팅했나. 잘 안깨지네.
사장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잽싸게 건물 안으로 튀어 도망치려는데 이미 그 안에서 기다리던 사내들이 막아선다.
벽코너에 몰리는 사장. 도망갈 데가 없다.
사장 : 말로 하십시다. 말로..
하는데 사장의 핸드폰을 주워들고 코앞으로 다가오는 중호. 무뚝뚝한 얼굴로.
중호 : 말로 묻겠는데. 김신 알지?
사장 : 누구요?
중호, 순간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사장의 머리통을 갈긴다.
박살이 나는 핸드폰. 머리통을 움켜잡고 쓰러질 뻔한 사장.
중호 : (여전한 어조) 김신 알지? 그놈 여자두 알지?
S#7. 강남 룸살롱 골든크로스 앞
발리파킹을 하는 웨이터가 잽싸게 달려나와 마악 도착한 손님에게 인사하고 키를 받아든다.
또 다른 웨이터가 손님을 맞아들이고.
발리가 차를 몰고 떠난 자리.
우뚝 서있는 경아. 룸살롱의 입구를 우두커니 보고 있다. 길다란 패딩 점퍼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모습.
마음을 굳히고 성큼성큼 입구로 다가선다.
입구의 웨이터가 돌아본다.
경아가 손을 들어 보인다. 오마담이 준 명함이 들려있다.
S#8. 룸내부 내실
사무실로 쓰이는 방.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장부를 정리하던 오마담이 고개를 기웃해서 본다.
그 앞에 경아가 우뚝 서있다.
오마담 : 뭐야. 그 눌러쓴 모자는. 여기 들어오는 게 챙피했어? 얘.. 얘.. 큰소리치더니 허당이었네.
경아 : 돈 땜에 왔으니까 돈 얘기부터 하면 안될까요. 이런데서 나 같은 사람. 얼마 줄 수 있어요?
오마담 : 채상무님. 쟤 얼마짜리 같애?
보이지 않던 구석의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져 앉아 무릎의 노트북을 보고 있는 남자. 커튼. 가리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고.
주가의 차트가 띄워져 있는 노트북의 화면과 손만. 손가락이 탁탁 터치패드를 두들겨 화면을 작동하는 중.
오마담 : 수정이가 지난 달에 들어앉았잖아. 숫자는 채워야 하는데 눈에 딱 띄는 애가 없어서 그래.
아예 아마추어 하나 키워볼까 싶은데. 좀 봐줘봐요.
커튼 저쪽에서는 반응이 없다. 여전히 터치패드를 톡톡 작동하는 손.
오마담 : 뭐야아. 난 자기가 알아달라는 거. 해달라는 거 다 갖다 바치는데.
그제야 커튼을 젖히고 경아 쪽을 돌아보는 도우. 잠시 보고 있더니 오마담에게 무뚝뚝하게.
도우 : (오마담에게) 뭘 보구 데려왔어요?
오마담 : 그르게. 볼 게 없지? 내 눈이 예전에는 꽤 날카로왔는데..
(전화기를 들더니 구내버튼을 눌러) 주방에 사람 필요하다 그랬지? 여기 하나 델구 가서 설거지 시켜봐.
그러다가 경아를 본다. 경아가 웃고 있다. 웃더니 모자를 벗는다. 감춰졌던 머리칼이 후루룩 흩어진다.
점퍼를 벗어 던진다. 안에는 흰 와이셔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경아 : 이 바닥 시세.. 알아보구 왔는데요. 일단 기본 선금 오천. 거기에 얹어서.
단추를 하나 풀더니.
경아 : 천만원. (또 하나를 풀며) 이천만원. (또 하나를 풀며) 삼천. (또 하나를 풀며) 사천. ..합해서 일억.
와이셔츠를 벗어 던진다. 안에는 심플한 탑.
경아 : 계속할까요?
S#9. 룸
불빛에 반짝이는 잔들. 도미노를 할 잔이 쌓아지고 있다. 왁자하니 웃는 소리가 나고.
(양복차림의 사내 너댓이 앉아서 아가씨들과 술 마시는 중. 아가씨 하나는 연희.)
그 중에 넥타이를 맨 신사복 하나가.
신사1 : 하이고 말도 마라. 들어가까마까 들어가까마까 들어가까마까 하다가 들어갔더만 꼭지에 사가꼬 이기 아이다 싶어
손해보고 파까마까 파까마까 파까마까 하다가 결국 바닥에 판기라. 오늘 장세 봐라. 내사 마 팍 마시고 죽어삘란다.
하며 여자가 건네는 술잔을 찾는데. 그 손에 가득 채운 술잔을 건네는 연희.
연희 : 안돼애. 오빠 죽으면 연희는 어쩌라구.
신사1 : 죽지 마까.
연희 : 응. 죽지 마. 약속..
옆에서 친구들이 '하이구야 눈물 난다.' 하며 떠들다가 신사1이 문득 한쪽을 본다.
신사1 : 쟈는 모하는 애고. 아까부터 지 혼자 놀고 있네.
거기 경아가 혼자 앉아서 도미노할 잔을 집중해서 쌓고 있다.
신사2 : 제니 몰라. 얘. 제니.
경아는 계속 잔 쌓기.
신사1 : 그기 뭔데.
신사2 : 이 집에 얼마 전에 들어온 신상인데. 웃지를 않는대. 선양 둘째하구 김벤처하구 얘 때매 내기 붙었잖아. 누가 먼저 웃기나.
관심이 경아에게 쏠리자 연희가 삐죽거린다.
신사1이 경아의 얼굴을 보려고 기웃거린다.
경아가 신사1을 빤히 보면서 잔을 건드린다. 차례로 무너져 내리는 폭탄주.
으아.. 해서 옷이 버릴까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 틈에 일어난 경아가 신사1의 넥타이를 잡고 앞으로 이끈다.
어어어 해서 끌려 나가는 신사1.
경아가 나오자 밴드가 알아서 음악을 바꾼다.
한손에는 신사1의 넥타이를 잡은 채 그 음악에 맞춰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경아.
다른 신사들. '한다 시작한다..' 하며 자세를 잡아 구경하는.
연희가 새침해져서 술을 마시며 보는 경아. 점점 고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넥타이를 잡힌 신사1이 나름대로 맞춰보려고 용을 쓴다.
경아는 아예 눈을 감고 춤을 춘다. 그러다가 신사1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경아 : 이봐요.
신사1 : (헤벌레해지는)
경아 : 나 웃고 살라구 여기 들어왔는데 웃을 일이 없네. 다.. 너무.. 시시해.
신사1 : 그..그래?
경아 : 그니까.. 나 좀 웃겨봐.
신사1 : 그..럴까.
경아 : 뭐가 그럴까야. 설정이야. 설정. 내 홍보 카피. 웃지 않는 여자. 제니.. 꺽구 싶지? 응?
하며 스윽 신사1을 밀어내더니 춤추며 아예 테이블 위로 올라간다. 계속되는 경아의 춤. 무르익는 분위기.
헤에 해서 보고 있는 신사1.
S#10. 골든크로스 앞
새벽이 가까운 시각이다. 웨이터가 하품을 하며 안에서 나온다. 총총 길을 건너온다.
이만치에 세워져 있는 봉고차. 뒷창문이 열린다. 그 안에 대고 뭐라 말하는 웨이터.
잠시 후 골든크로스에서 나서는 경아의 모습이 보인다. 야구모자를 눌러 쓴 청바지 차림.
경아가 저리로 간다.
그런 경아를 가리켜 보이는 웨이터.
봉고 안에서 그런 경아를 보는 중호.
S#11. 교도소 운동장
늘 범환이 앉던 자리는 비어있고. 용식과 재섭 등이 어정거리며 돌아보는 곳.
저만치 벽에 나란히 기대 선 범환과 신.
조금 떨어진 곳에 역시 벽에 기대 쭈그려 앉은 경태. 나무헤드셋을 손보고 있다.
범환 : 널 위해서 니 빚을 대신 갚고 술 팔고 몸 판다. 머 너는 그렇게 믿으면 폼나겠다만은 그건 70년대에 찍던 신파 얘기고.
중호 그놈이 지켜본 바로는 그 바닥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란다.
그년한테 목 매는 재벌 놈들이 번호표 받아 줄서고 있다는 것이지.
신 : 그년 아닙니다.
범환 : 그려 그 여자분. 그러니까 그 바닥이 그 여자분의 스타일이고 탈랜트다 이 얘기야.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지 체질이 아니면 못하는 거거든.
신 : 형수님은요.
범환 : 니 형수란 사람은 시장에서 떡볶이 집을 냈단다. ...떡볶이.. 그거 맛있지.
말없이 선 신과 범환. 그렇게 나란히 해바라기를 하다가.
범환 : 깜방에 시간이란 거는 내가 어떻게 활용을 하느냐..에 따라 일년이 십년도 되고. 십년이 일년도 되는 것이다.
시간활용을 잘하란 얘기야.
S#12. 목공 작업장
작업을 하는 신. 제법 익숙하게. 그 위로.
범환소리 : 아무리 호적에 빨간 줄 간 인생이라도 설계라는 게 필요하거든.
노후설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인생목표를 자알 뽑아서 리스트를 만들어봐.
S#13. 교도소 사동 내 복도
신과 경태가 나란히 복도 청소를 하고 있다.
둘이 나란히 대걸레질을 하며, 경태는 대걸레에 한 손가락을 대고.
경태 : 1977년 2200만 달라짜리 피델리티 마젤란 펀드를 13년만에 132억달러짜리로 불려놓은 피터 린치.
10년 동안 자기 고객 100만명 모두에게 스물다섯배의 투자수익을 올려줬다 이겁니다. 수익률만 보면 2700 퍼센트죠. 네에..
이 마징거의 롤모델이라고 할까..
신 : 누구?
경태 : 피터 린치.
신 : 누구의 뭐라고?
경태 : 나. 마징가의 롤모델. 내 이상형.
신 : 에헤에 너 코드 안 꼽구 말했다.
신이 놀리며 가리키는 것. 코드를 꼽는 대신 자신을 가리키고 있던 경태의 손가락.
당황하다가 경태 얼른 앞으로 걸레를 밀고 나간다.
킬킬 웃는 신.
범환소리 : 너.. 사회 나가면 손봐줘야 할 놈들 있대매. 하루 세 번씩 그놈들을 생각해. 복수는 우리의 엔진오일.
웃음이 금새 사그러드는 신.
S#14. 운동장
사동별로 팀을 나눠서 땅탁구를 하는 중이다.
열렬한 응원 속에 신과 용식, 재섭 등이 한 편이 돼서 치열하게 공을 받아넘기고 있다.
완전히 열중해서 지가 힘을 쓰며 응원중인 경태.
슬로우모션으로 네트를 스치며 깊숙이 파고드는 상대의 공.
슬라이딩을 하며 받아내는 신.
저쪽에서 다시 넘어오는 공.
공을 향해 달려드는 재섭을 네트 가까이의 상대선수가 몸으로 밀어낸다.
그 뒤로 넘어오는 공을 신이 간신히 받아넘긴다.
그러나 이미 용식은 재섭을 밀었던 선수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네트 밑으로 구르는 공.
한심해서 바라보는 신을 누군가 뒤에서 밀었다.
신이 냅다 받아친다. 어느새 땅탁구는 우루루 양쪽 사동에서 몰려나온 이들로 아우성이 된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지고. 교도관들이 달려오고.. 그 위로.
범환소리 : 그런데 자알 생각해보라구. 그 복수란 거.. A버전으로 할거냐. B버전으로 할거냐.
A는 간단해. 짱보고 있다가 그놈 끌구 가서 쥐도새도 모르게 밟아주든가 묻어버리면 끝. 그게 심플하긴 한데..
S#15. 작업장
여러 수인들 중에 종이봉투 작업을 하는 신. 옆에는 나란히 경태가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
척척 손발이 맞아서 기계적으로 종이봉투를 접고 붙이고..
범환 : 나두 한두놈 묻어봤는데 그게.. 뒤끝이 별루야. 엄청 허전하구 찝찝해. 똥 싸다 말고 나온 기분이라고.
니 놈은 머리두 있으니까 B버전으로 해보지 그래? 당한 거 하고 또옥같이 갚아주는 거야. 이자는 좀 붙여서 말이지.
그런 설계를 하다 보면 니놈 받은 삼년. 한순간에 지나갈 거다. 경험자의 조언이니 믿어.
신이 옆을 돌아본다. 일을 하고 있는 경태가 혼자 질질 울고 있다.
S#16. 감방 안
벽선반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방송되는 중. (2007년의 증권관계 뉴스 중의 하나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걸로..)
그러나 방안의 수인들은 텔레비전보다는 경태의 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다.
경태는 질질 울며 짐을 싸고 있는 중. 색색의 연필이며 사인펜이 든 필통을 싸려다가 수인들에게 일일이 하나씩 나눠준다.
수인들은 잘 쓸게.. 하며 받기도 하고 제가 좋은 걸로 바꾸기도 하고.
그러다가 경태가 신의 앞에 멈춘다.
신이 필통에서 볼펜 하나를 주워든다. 그 볼펜을 경태의 팔에 연결하고
신 : 고마웠다. 마징거선생. 덕분에 많이 배웠어.
다른 수인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래 수고했네.' '다신 들어오지 마.' '이쪽에 대고 오줌도 싸지 마.'
경태가 볼펜을 들더니 앞의 종이에 크게 쓴다. '안 경 태'
신 : 선생 이름이야?
경태가 끄덕인다.
신 : 알았어. 외워놓을게.
경태가 더 크게 끄덕인다.
그 때 감방의 문이 열리고 정교도가 들여다본다.
정교도 : 삼사일구.
경태 : (벌떡 일어선다)
정교도 : (미소 지으며) 가야죠.
S#17. 복도
경태가 교도와 함께 걸어간다. 걸어가다가 돌아본다.
방의 창살로 내다보고 있는 같은 방 수인들. 부러움으로.
그 중에 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S#18. 방안
다들 창가로 몰려가서 텅빈 공간에 신이 혼자 앉아있다. 손에 든 볼펜을 돌리면서.
볼펜이 손에서 벗어나 띠리릭 구른다.
S#19. 요양소 전경
자애원이라고 씌어진 소박한 간판. 수도권 외곽에 주택을 개조해서 쓰는 노인요양소.
안에서 들려나오는 동백아가씨 노래가락.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S#20. 요양소 방안
은수가 무대 위의 가수처럼 폼을 잡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할머니들 몇이 기거하는 방안.
그 중의 몇은 좋다고 노래를 따라하고 있고. 한 할머니는 구석 이불에 누워 심술궂은 표정으로 보고 있고.
은수가 혼자 감정이입해가며 이미자의 목소리에 손짓까지 흉내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빈 물컵이 은수의 머리에 맞는다. 이불의 할머니가 던진 것.
할머니 : 시끄럽다.
'와 그라노.. 아따 성질머리하곤..' 하며 다른 할머니들이 야단을 치는데.
은수 : (아픈 이마를 만지며) 딴 거 해요?
할머니 : 딴 거 해.
은수 : 에.. 그럼..
은수 앞의 플라스틱 양동이를 뒤집어 놓으며 퍼질러 앉더니 양동이를 두들겨 대며
은수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오.
할머니 : 보긴 뭘 봐.
은수 : (목소리 톤을 바꿔서) 노오란 샤쓰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할머니 : 딴 거.
은수 :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야.
이제 할머니가 좀 마음에 들었다. 들어준다.
아까부터 박수를 치던 할머니는 여전히 열심히 박수를 쳐주고 있다. 그다지 박자가 맞지 않는 박수를.
S#21. 요양소 마당
은수가 빨래를 널고 있다. 아까 버린 할머니의 옷과 이불 들이다.
직원이 옆에서 거들며.
직원 : 은수씨 갈 시간 넘지 않았나? 아까부터 기다리던데.
은수가 돌아보면 담 너머 저만치 승용차와 그 옆에 선 만희의 뒷모습이 보인다.
S#22. 요양원 밖
승용차 옆에서 등을 보이는 만희는 전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만희 : 느네 주인 병원 가는 날 정도는 니가 알아서 챙겨. 그러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니야. 그래. 오늘 네시. .... 이 모지란 놈.
거칠게 전화를 끊고 돌아서다 멈칫. 거기 은수가 서있다가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만희가 잠자코 뒷문을 열어준다. 차에 타려다가.
은수 : 오빠 병원. 매주 한번씩이죠?
만희 : 어.
은수 : 매주.. 다니면 좋아지는 거에요?
만희 : 글쎄.
은수 : 아픈 거면.. 약 먹구 치료받으면 좋아져야 되는 거 아닌가.
만희 : 먼저 본인이 인정해야겠지. 난 고쳐야되는 환자라구. 타. 춥다.
은수 차에 탄다. 문을 닫아준다.
S#23. 병원 정신과 치료실
도우가 의자에 편히 기대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말하고 있다.
책상 너머에 정신과 의사 배박사가 그런 도우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다.
도우 : 늪이에요. 시커먼 색이고.. 끈적끈적하고.. 그런데 사방이 너무 조용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완전한 침묵..
내 발이 빠지고 있어요.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천천히.. 근데요. 그냥 그래요. 뭐 무섭다거나.. 큰일났다거나..
그런 느낌은 별루 없어요. 구경하는 거에요. 허리까지 가슴까지 늪에 빠지고 있는 나를..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자세를 바로 하여 앉더니)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배박사 : 그게 요즘 꾸는 꿈이에요?
도우 : ..죄송한데요. 사실.. 별루 기억나는 꿈이 없어서 방금 만들어낸 이야기에요.
이거 참.. 매번 저두 힘드네요. 박사님 듣기 그럴듯한 이야기 지어내는 거요.
배박사 : (별로 반응없이) 언제나 그래요? 느낌이 별루 없어요? 무섭다거나.. 큰일났다거나..
도우 : (아직 미소로 보는)
배박사 : 살아가면서 늘.. 감정이 밍밍해요?
도우 : 이 환자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라고 진단내리고 싶으세요?
배박사 : (대꾸없이 앞의 차트에 뭔가를 써넣는다)
도우 : 아니면 아버지가 부탁하든가요? 아무거나 정신병동에 입원시킬만한 병명을 만들어내라구요? 잘 안되시죠?
배박사 : 다른 이야기 해볼까요. 전에 말하던 어린 시절 얘기는 어때요. 초등학교 4학년때 전학을 갔었다구 했죠?
도우 : 혹시 우리 아버지를 진찰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제가 보기엔 아버지한테 뭔가 정신적 강박증세가 있어요.
전문가시니까 두어시간만 얘기 나눠보시면 아실텐데.
배박사 : 아버지 얘기 하고 싶어요?
도우 : 아버지.. 내가 당신을 죽이려한다고 생각하시거든요. 아들인 내가 아버지를요. 이거 정상 아니지 않아요?
도우는 아주 진지하다는 듯 묻고 있다.
S#24. 채회장의 집
이층 은수의 방 베란다에서 보이는 마당.
도우가 케이와 함께 들어오고 있다.
베란다에서 보던 은수가 재빨리 돌아서 뛴다. (1부에서 그런 것처럼)
방을 지나고 복도를 지나서 달려간다.
S#25. 다락방
석양빛이 붉게 비쳐 들어오는 다락방. 잡동사니들 너머에.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은수.
도우소리 : 다녀왔습니다.
S#26. 채회장 서재
채회장 : 그래서.
책상 앞에 앉은 채회장. 옆의 소파에 오이사.
도우는 선 채.
도우 : 별로 보고드릴 건 없는데요. 늘상 하던대로 요즘 저의 심경 이야기하고 박사님은 들어주시고.. 그러고 왔어요.
채회장 : 오이사.
오이사 : 예 회장님.
채회장 : 의사 바꿔야겠어. 명색이 외국박사란 사람이 몇 년을 끌면서 애 병을 하나 못 잡아내.
오이사 : 하하.. 그게.. (말하기 눈치보인다)
채회장 : 이 놈 명색이 내 아들놈이란 것이 하는 짓 봐봐. 어뜩게 하면 내 회사 말아먹을까. 어뜩게 하면 지 애비 말려죽일까.
그 궁리밖에 없잖아.
도우 : (순순하게 서있는)
채회장 : (책상 위의 서류를 거칠게 도우에게 던지며) 임시 주주총회를 열잰다. 지들이 주인이니까 지들이 열자면 열어야 된대.
(오이사에게) 이 미친 넘이 내 회사를 시장 떨거지들한테 내다판 뒤에 내 회사가, 내가, 어뜩게 됐는가 보라고. 좀.
오이사 : (도우의 눈치를 보며) 우리 채동건설을 주식상장회사로 만든 것을 내다 팔았다고 할 수는.. 없는..
채회장 : (말할수록 더 열받고 있다) 내가 만든 회사고 내가 키운 회사야. 내가 땅바닥 기면서 벽돌 하나씩 날라서 시작한 회사라고.
뭐? 주주? 지들이 왜 주인이야? 기껏 몇만원짜리 종이짝 몇장 사놓고 뭐가 주인이야.
도우 : (조용조용) 아버지가 삼년 전 벽제원 땅 판 돈, 이상한데 날리지만 않으셨어도 굳이 상장시킬 필요는 없었을 거에요. 그런데..
채회장 : 봐라. 삼년 전에 이놈이 꼴랑 땅쪼가리 하나 주워온 뒤로 미친놈 증세 심해진 거.
도우 : 그 꼴랑 땅쪼가리 하나로 몇백억 벌어드렸잖아요. 그걸 무슨 정치를 하신다고 선거자금으로 죄 날리시고..
채회장 : 아주 칠판 갖구 와서 날 가르치지 그래. 분필 갖다 줘. 저 놈이 할 말이 많은 모양인데. 아무튼지간에. 너 잘 들어.
내가 죽어도 니놈한테는 한푼도 안 가. 그러니까 나를 일찍 죽여봤자 아무 소용없어. 내 유서 보여줘?
도우 : 내가 그렇게 무서우세요?
채회장 : ..어째?
도우 : (여전한 어조) 아버지 아들이 아버지보다 유능한 게 싫으세요? 보통 아버지라면.. 그거 좋아해주는 거 아니에요?
채회장 도우를 노려본다.
도우.. 오히려 슬픈 듯이 본다.
오이사. 눈치를 보고.
반쯤 열린 문 밖에 모습이 보이는 케이 조용히 서있다.
채회장 : 나가.
도우 : 임시주총 열자는 거. 대마리 토지 계약한 거 땜에 그래요. 거기 개발 제한 풀린다는 거. 공수표로 확인났는데.
우리 회사 자금 그 땅 사는데 다 끌어넣으면 안되죠. 그 계약 제가 무효화 시켜볼게요. 주총에서두 제가..
채회장 : (버럭) 나가.
도우가 머뭇거리자 채회장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오려 한다. 오이사가 얼른 막아선다.
도우 잠자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돌아선다.
S#27. 서재 앞
나서서 문을 닫는 도우. 빠르게 걷는 도우의 뒤를 케이가 따른다.
도우 : 저 노친네, 아직 그 땅에 미련이 남았어.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뇌물 준비하고 있을거야.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 어느 줄에 매달리고 있는지 알아봐.
케이 : 알겠습니다.
도우가 멈칫 선다. 거기 거실에 앉아있던 만희가 도우를 본다.
도우, 만희를 지나쳐 간다. 케이 역시 따르는데 만희가 영 불편하다.
S#28. 서재
오이사 : (물을 따라 채회장에게 주며) 상무님도 나름대로 우리 회사를 위해 애를 쓰고 계신건데요. 너무 그렇게 구박만 하시면..
채회장 : 아직 몰라? 오이사. 아직도 그 놈을 모르겠어?
물을 마시는 채회장. 마셔도 목이 탄다.
S#29. 채회장 회상 15년 전 그날 밤 거실
가운을 걸친 채 거실을 지나가던 채회장. 문득 걸음을 멈춘다. 선 채 잠시 그냥 서있다. 웬지 모를 불안감.
앓는 아내가 있는 사랑방이 있는 쪽을 돌아본다.
S#30. 회상 사랑방 앞 복도
빠르게 걸어가는 채회장. 거기 반쯤 열려져 있는 방문.
열린 문으로 보이는 내부. 등을 보이고 있는 어린 아들 도우.
도우의 몸 이쪽으로 보이는 아내의 늘어진 팔. 주사기.
채회장이 달려들어간다.
채회장의 시선으로 보이는 당시의 상황. 아내의 팔뚝에 꽂힌 주사기를 빼서 집어던진다.
채회장 : 여보. 여보오. (도우를 돌아본다. 공포와 경악으로) 무슨 짓을 한거야.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도우가 들고 있던 주사기 상자를 쳐서 날리더니 도우를 번쩍 들어 밀어 던진다. 구석에 나가 떨어지는 도우.
부인을 부르며 안아 일으키려고 애쓴다.
채회장 : 여보. 밖에 누구 없어. 여보오.
그러다가 채회장이 돌아본다.
구석에 밀려 넘어진 채의 도우가 이쪽을 보고 있다. 그런데 도우는 엄마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채회장이 보기에는 광인처럼 섬뜻한 미소.
채회장이 떨며 아내를 다시 돌아본다.
채회장의 품 안에서 아내가 추욱 처진다. 숨이 끊어졌다.
S#31. 서재
채회장이 떨리는 손으로 빈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유리잔이 책상 모서리에 걸쳐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깨진다.
깨진 유리를 내려다보며.
채회장 : 그 놈이 어떤 놈인지 어째서 모를까. 사람들이 어째 모르는 거야. 눈 앞에 보면서두 왜 몰라.
S#32. 다락
은수가 저물어가는 빛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손으로 종이를 접고 있다. 종이학이 완성된다.
문득 옆에 놓여있던 탁상 달력을 들어본다. 꼼꼼이 여러 스케쥴이 적혀진 달력. 2월. (몇년인지는 안 보이게)
자애원방문. 방산시장방문.. 등등의 스케쥴 중에 하나. 동그란 빨간 줄이 둘러진 글자.
18일 김신 출소. 글자가 확대되면서.
S#33. 교도소 운동장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 바람이 분다.
옆의 사동에 작은 창문의 창살. 누군가가 기를 쓰고 매달려서 밖을 보고 있다.
밖의 하늘을 보는 휑한 눈길.
S#34. 작업장
아직 작업이 시작되지 않은 빈 작업장. 한쪽에 수인들이 만든 작품들이 진열되어있다.
그 중에는 기나긴 시간을 들인 것이 보이는 세공품들도 있다.
S#35. 교도소 문
철문이 열린다.
정교도관이 먼저 나선다. 추운 날씨. 찌푸려 하늘을 보고는 뒤를 돌아본다.
사복을 입은 신이 나서고 있다.
문을 나서서는 멈칫하듯 서는 신.
정교도 : 연락같은 거 하지 마세요. 다신 보지 맙시다.
신이 정교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다.
정교도가 그의 등을 툭 쳐준다. 그 손에 밀린 듯 신이 앞으로 나선다.
걸어간다. 삼년의 수형생활이 끝났다.
S#36. 무덤
공원 공동묘지의 수없이 많은 묘지들.
그 중의 한 곳. 무덤 위에 소주가 뿌려진다.
신이 병에 남은 소주를 마신다.
무덤을 향해 뭔가 말을 건네 보려다가 그만두었다가 그러다 불쑥.
신 : 뭐하구 살아. 거기선. ..엄마 아부진 만났나? ..만나지나? 만나면 내 얘기두 해? (웬지 울 거 같아 멈췄다가)
부탁이 있는데 당분간 나 보지 마. 내가 할 게 좀 있어서 그러니까.. 형. 신경 꺼. 다 끝나면 그때 다시 올게. ..그때 얘기해줄게.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추키며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 우라지게 춥네. 형. 안 추워?
무덤을 다시 돌아본다.
// 끝도 없이 줄지어 있는 무덤들.
걸어내려오던 신이 멈춰선다. 저 앞에 서 있던 봉고차 하나. 운전석에 앉은 중호가 창문을 내리더니 신을 무뚝뚝하니 바라본다.
신은 겉옷을 벗고 있다.
// 욱의 무덤.
무덤 위에 신이 입었던 겉옷이 잘 덮혀져 있다.
S#37. 지방 시장 먹자 골목
좁은 골목 양쪽으로 작은 식당들이 줄 지어 있다.
순대니 전을 쌓아놓은 가판대.
손님들과 음식을 배달하는 자들이 와글와글 오가는 골목.
한 곳에 손바닥만큼 작은 분식집.
앞의 가판대에서 김을 내는 순대. 오뎅. 떡볶이 등.
숙달된 솜씨로 떡볶이를 뒤적거리며 오가는 손님을 부르는 명선.
명선 : 뜨끈한 국물 한잔 들구 가요. 순대 볶음 맛있어. 아저씨. 금방 볶아 드릴게.
하며 지나가는 남자를 눈으로 쫓다가 멈춘다. 들고 있던 주걱을 떨어뜨린다. 헉.. 손으로 입을 막는다. 울음이 왈칵 솟는다.
명선이 보는 저 앞에 서있는 신. 명선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인사를 해보이다가 어색해진다.
그 뒤로는 중호가 나름 눈에 안 띄게 서있다.
S#38. 분식집 내부
좁은 내부. 한줄로 벽에 붙인 식탁과 의자.
명선이 부지런히 순대볶음 한접시를 식탁에 내준다.
신이 뭔가 말을 붙여보려 하지만 명선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시 달려간다. 신의 옆에 앉은 중호는 불편해서 딱딱하게 굳어있다.
신이 다시 형수를 부르려 한다.
신 : 저기..
그러나 총총 달려온 명선은 오뎅국을 한사발 내주고는 다시 가버린다. 신이 벌쭘해져서 국물을 먹는다.
순대도 먹으며 눈으로 명선을 쫓는다. 명선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대다가 이번에는 떡볶이를 접시에 담기 시작한다.
밖에서 손님이 명선을 부르는데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떡볶이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명선. 돌아서려는데.
신 : 유리하구 누리. 잘 있죠?
명선 멈춰섰다.
신 : 유리는 학교 들어갔겠네. 일학년인가? 이학년이에요? 나.. 기억하구 있을까요?
멎쩍게 웃다가 굳는다. 그대로 선 채 명선이 줄줄 울고 있다.
신 : 형수님.
명선 : 죄송해요. 삼촌. 정말.. 너무 미안해요.
중호가 슬그머니 옆의 의자를 명선의 뒤로 밀어준다.
명선이 그 의자에 무너지듯 앉으며.
명선 : 내가 너무 염치없는 짓을 했어요. 나 편히 살겠다구 삼년동안 면회 한번 안 가구 양말 한짝 안 넣어주구..
신 : 아 형수. 그야 내가 그러지 말라구 했잖아요. 잘하셨어요.
명선 : 애 핑계 대구 해선 안 될 짓 했어요. 삼촌.
신 : 아이구 형수 그만하시구. 이거 국물 맛있네. 원래 형수 음식 솜씨야 대단했지만 이건..
명선 : 경아씨한테 돈 받았어요.
신 : (멈춘)
명선 : 경아씨한테 돈 받아 빚 갚으면서 이거 웬 돈이냐구, 어디서 난거냐구 묻지도 않았어요. 이젠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구 해서..
알았다구 했어요. 다시 만나면 그 돈 갚아줘야 하는데 나 못 갚잖아요. 그런데 삼촌. 나 또 빚졌어요. 그 지긋지긋한 빚.
월세 보증금하구 이 가게 내는데 돈이 또 필요하드라구요. 나두 살아야 되니까. 애들 델구 살아야 되니까..
그저 묵묵히 보고 있는 신.
S#39. 호텔 수영장
시원하게 물로 뛰어드는 경아.
물을 가르며 수영을 한다. 단숨에 한 레인을 수영해온 경아가 풀에서 빠져나오자 기다리던 데니가 얼른 큰 타올을 감싸준다.
데니 : 우리 애기 감기들면 안되지. 자 꼭꼭. 감싸주고. 닦아주고. 수영모 벗어봐. 머리칼도 닦아줄게.
하며 졸졸 따른다.
경아는 만사 귀찮은 얼굴로 걸어간다.
데니 : 어디 가? 한번 더 돌라구? 그만 할거야?
경아 : 뜨거운 코코 먹구 싶어.
데니 : 그래그래. 여기서 먹을래? 아님..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코코아 파는 데루 갈까? 나 거기 어딘지 아는데.
경아 : 라운지에서.
데니 : 거긴 술만 팔지 않나?
경아 : 라운지.
데니 : 그래 가자 라운지. 핫코코 마시러 가자. (졸졸) 우리 제니 핫코코 안 팔면 내가 그냥 사버리지 뭐. 그깐 라운지.
경아는 여자 탈의실 가는 쪽으로 들어가 버리고, 데니의 코 앞에서 문이 닫긴다. 닫긴 문 앞에서 데니 열심히.
데니 : 미장원 몇시까지 가야돼? 내가 델다 줄께. 근데 꼭 가야돼?
문이 열리고 나오는 다른 여자. 열려진 문 쪽으로 데니 얼른 큰소리로.
데니 : 응? 오늘 하루만 쉬면 안돼? 응?
S#40. 달리는 데니의 차 안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경아와 데니.
이제 업소용 의상과 헤어를 한 경아는 새로 한 손톱을 살펴보고 있다.
데니 : 하루만 쉬자아. 대마담한테는 내가 알아서 챙겨줄게. 우리 제니 체면 안 구기게.
아니다. 아주 강남바닥에 제니의 전설을 만들만큼 내가 막 쏜다. 응? 응?
경아 : 데니아저씨.
데니 : 놀자아. 하루밤만.
경아 : 오늘부터 나 지명하지 마. 안 받을거니까.
데니 : 왜애애.
경아 : 끈적끈적 집요한 사내. 싫어.
데니 : (마음 상해서) 알았어.
경아 : 네일숍 바꿔야겠다. 맘에 안 드네.
데니 : 그믄.. 그 아저씨 소리나 좀 빼라. 오빠.. 좋잖아. 해봐. 오빠.
경아 : 유전자 한톨, 피 한방울 안 섞였는데 오빠는 개뿔. 개나소나 오빠래.
데니의 입이 더 나온다.
차가 서고. 운전기사가 얼른 문을 열어줄 때까지 화가 나서 그대로 앉아있는 데니.
// 먼저 내린 경아. 골든크로스 쪽으로 차를 돌아가다가 멈춘다.
그 입구의 바로 옆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내. 신이다. 신은 그저 묵묵히 경아를 보고만 있다.
//차 안에 앉아있던 데니. 경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여다보자 괜히
데니 : 안 내릴 거야. 너 혼자 들어가. 나 삐쳤어.
경아 : 오빠.
데니 : ..뭐?
데니의 팔을 끌어내리는 경아. 데니 어어 해서 따라 내린다.
경아 : (찰싹 붙으며, 여전히 웃지는 않지만) 미안해. 오빠. 마음 풀어. 오늘 제니의 첫 손님. 오케이?
데니.. 어어.. 좋아서 경아에게 끌려 간다.
경아와 데니가 신이의 옆을 지나친다. 신은 그저 보고만 있다.
경아는 신 쪽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골든 크로스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신. 경아가 어찌 맞아줄지 내내 마음조리고 보고 있었다. 그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
S#41. 골든크로스 내부 홀
데니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경아.
데니. 완전히 입이 귀에 걸렸다.
장마담이 그들을 본다. 뭔가 이상하다.
경아, 데니를 매몰차게 밀어내더니 장마담을 부딪힐 뻔해서 지나간다.
그 앞을 가로지르던 웨이터가 들고 있던 쟁반 위의 얼음을 몇 개 꺼내더니 하나는 입에 넣고. 나머지는 목에 문지르고
어쩔 줄을 모르며 얼음을 쥐고 있다. 순간 울컥 터지려는 울음을 식히려하고 있다.
S#42. 골든크로스 입구
아까부터 수상해서 신을 보고 있는 웨이터.
신. 장에서 대충 구입한 허름한 점퍼 깃을 추스르더니 입구를 향해 걸어온다.
웨이터 재빨리 앞을 가로막는다.
웨이터 : 예약하셨습니까?
신 : 어.
웨이터 : (의심) 예약했다구요?
신 : 어. 삼년 전에.
S#43. 내부 홀
와장창 소리에 경아가 돌아본다.
문을 박차며 나동그라져 들어오는 웨이터. 뒤이어 들어서는 신.
근처에 있던 데니가 기겁을 해서 자리를 피한다.
신. 우울한 얼굴로 곧장 경아를 본다.
신 : 잠깐 나올래?
꼼짝않고 보는 경아.
안에서 달려 나오는 두어명의 웨이터. 그 중에 하나가 신의 팔을 잡으려는데 오히려 신에게 팔을 잡혀 꺽이고는 뒤로 밀린다.
뒤에서 달려들려던 패거리와 함께 나동그라지며 거기 쌓여있던 물컵 등을 요란하게 깬다.
신 : (경아에게만) 여기 너무 시끄럽네. 얘기 좀 해야겠는데. 나가자.
이제 더 많은 웨이터며 기도들이 달려나와 포위한다.
장마담이 경아를 돌아본다.
장마담 : 이거 뭐하는 놈이야?
경아 : (똑바로 신을 보며) 지난 삼년 교도소에 있던 놈이에요.
그 말에 신을 둘러쌌던 사내들이 좀 불안해진다. 그 중 하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다.
경아 : 언제 나왔니?
신이 경아의 손을 본다.
냉정한 척 말하는 경아는 얼음을 부여잡고 있다. 떨리는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이쪽 복도에서 도우가 보고 있다.
도우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기울여 신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분명 아는 자이다.
신이 경아를 보고 빙긋이 미소짓고 있다.
신 : 나 술값 없어. 이런데서 못 마셔. 그니까.. 나가자.
S#44. 룸
가운데 우뚝 선 신이 두리번거려 화려한 실내를 살핀다.
돌아보면 입구에 문을 등지고 선 경아.
신 : 여기가 말로만 듣던 텐프로라는덴가.
경아 : ...
신 : 엄청 비싸보이긴 하네.
경아 : 영업시간 6분 남았어. 그 안에 할 말 하구 가.
신 : (순순히 끄덕이더니) 얼마면 되니? 너 여기서 빼낼려면. 처음에 내 빚 갚느라구 외상 졌지? 얼마야?
경아 : (그저 보기만)
신 : 그거 먼저 갚아야 너 델구 갈 수 있는거야? 그 전에 델구 나가고 싶은데. 방법 없을까?
경아 : 5분.
신 : 난 니가 바퀴같이 생긴 놈한테 붙어다니는 거 보기 싫거든. 야 아까 그 놈. 너하구 진짜 안 어울리더라.
경아 : (보다가) 일억 있어?
신 : 일억이면 돼?
경아 : (웃지도 않고) 하루 밤에 일억. 일주일 같이 놀구 싶으면 최소한 강남권의 오피스텔 하나.
내가 좀 비싼데 나두 혼자 먹는 거 아냐. 상납하는 데가 많거든.
신 : ...경아야.
경아 : 좀 유치하구 진부한 대답이지만, 내 이름 경아 아니야. (시계를 본다) 타임 아웃. (문을 열어준다. 나가라고)
신 : 내가 잘못했어. 평생 갚을게. 같이 나가자.
경아 : 나하구 더 얘기하구 싶으면 돈 내고 지명해.
신 : 경아야.
경아 : 모르겠니? 난 이 세상이 좋아. 몇억짜리 자가용으로 모시겠다는 놈들이 몇억짜리 헬스회원권 갖다 바치면서
하루밤도 아니고 하루 낮 데이트만 해달라구 줄 서 있어. 나 이제 백만원 이하짜리 백은 못 들어. 쪽 팔려서.
이런 나 델구 가서 어쩌겠다는 거야?
신. 물끄러미 경아를 보고 있다가 끄덕인다. 또 끄덕이더니 걸어간다. 경아를 스쳐 지나간다.
신이 자기 앞을 지나가자 언뜻 내비치는 경아의 아픈 얼굴.
순간 돌아선 신이 성큼 다가오더니 경아에게 키스한다. 내치지 못하고 키스를 받는 경아.
신. 경아를 끌어안고 그 귓가에 속삭인다.
신 : 봐. 너 맞잖아. 내 경아.. 맞잖아.
안긴 경아 눈물이 그렁하지만. 울음기 없는 목소리로.
경아 : 니가 올래? 이 세상에. 와서 내 차 기사도 하고 술도 마셔주면서 내 옆에 있을래?
잠시 침묵이 흐른다.
신이 경아를 떼어내어 그 얼굴을 본다.
눈물이 기어코 흘러내리지만. 냉정하게 신을 마주보는 경아.
신. 돌아서더니 복도를 걸어간다.
가는 길에 벽에 기대 서 있는 누군가를 지나치지만 그게 누군지 볼 생각도 않는다.
술 한잔을 들고 서 있던 도우. 이번엔 경아 쪽을 본다. 경아는 신이 가는 뒷모습만 보고 있다.
문득 도우가 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는 핸폰을 꺼낸다. 번호를 확인하여 귀에 대며.
도우 : 어뜩게 됐어.
S#45. 골프클럽 라운지
유리 너머로 보이는 라운지에서 오이사와 정부 관료가 만나고 있다.
굽신거리고 있는 오이사와 거들먹거리고 있는 관료.
그들을 보면서 케이가 전화 중.
케이 : 예상대롭니다.
오이사가 슬그머니 밀어주는 자동차 열쇠.
케이 : 차를 이용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S#46. 골프 클럽 주차장
슬렁슬렁 걸어오는 케이. 손에는 커다란 잭핸들(혹은 커다란 스패너)을 가볍게 들고 있다.
자동차의 번호판을 확인하면서 걷던 케이가 한 차의 뒤에 멈춘다.
차의 트렁크를 툭툭 건드려 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잭을 틈새에 집어넣고 비틀어 열어버린다.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자동차 경보음. 트렁크 뒤에는 007가방 두 개가 들어있다.
// 동장소 시간 경과
넘어질 듯 달려 나오는 오이사.
오이사의 차 옆에는 이미 경비 두엇이 난감하게 서있다.
아직도 울리고 있는 사이렌.
트렁크 안은 비어있다. 오이사 울상이 돼서 뒤로 달려간다.
뒤에 뭔일인가 구경하고 있는 관리에게 달려가 꾸벅거리며 그 손에서 차열쇠를 받아 다시 달려온다. 울고 싶다.
그 난리를 이만치의 차 안에서 보고 있는 시선. 도만희다.
도만희의 시선이 오이사에게서 다른 쪽으로 간다. 거기 케이가 운전하고 있는 차가 마악 떠나고 있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다 보고 있던 도만희다.
S#47. 채회장 서재 앞 복도
걸어오는 도우. 마악 문을 열려는데 뭔가가 안에서 문에 던져져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난다.
잠시 찌푸렸다가 문을 연다. 다시 뭔가가 날라온다. 슬쩍 고개를 움직여 피하고 들어간다.
S#48. 채회장 서재
채회장이 단단히 화가 나서 또 던질 것을 찾아 들다가 들어서는 도우를 본다.
도우는 들고 온 007 가방 두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오이사의 차에서 빼낸 것이다.
채회장 : 오이사.
오이사 : 예 회장님.
방안에는 오이사. 구석쪽에는 도만희.
채회장 : 저 놈 내쫓아. 내 집에서 당장 내쫓아. 내 회사에서도 내쫓고. 내 눈앞에 다신 안보이게 해.
도우 : 이유 정도는 물어봐주세요. 제가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채회장 : 내보내라고 하잖아. 저 놈 목소리도 듣기 싫어.
도우 : 이 장관. 저 차관. 그렇게 찔끔찔끔 뇌물을 준다고 그 땅 규제 풀리지 않아요.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구요.
채회장 : (뭐 집어던질게 없나 두리번거린다)
도우 : 그리고 임시 주주총회는 안 열기루 했어요.
오이사 : 오 그놈들이 가만 있든가요.
도우 : 대주주 몇을 제가 만났거든요.
채회장 : 뭘 만나?
도우 : 만나서 얘기했어요. 그 땅 매입건 없는 걸루 하겠다구요. 주주들도 겨우 납득해줬구요.
채회장 : 니가 뭔데 매입건을 없던 걸로 해.
도우 : 벌써 해약했어요. 그 땅 계약.
채회장 : 뭐가... 어째?
도우 : 계약금을 손해보긴 했지만 주주들 이사들 다 이해해줬어요. 아버지가 약간의 치매 증세를 보이신다구.. 그렇게 말했거든요.
그래서 그 땅을 계약한 거라구.
채회장 갑자기 방 한쪽으로 달려간다. 거기 세워뒀던 골프채를 들고 도우에게 달려온다.
오이사가 놀라 피하고.
도만희가 재빨리 채회장의 허리를 잡는다.
도우 : (냉정하게 선 채) 치매는 그렇게 쉽게 치료되는 게 아니래요. 아버지. 당분간 회사일은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간부들한테두 그렇게 얘기해놓을게요.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더니 나간다. 날뛰는 회장의 앞에서 문이 닫긴다.
다음 순간 채회장. 조용해진다. 애써 진정을 하고는 조용히 골프채를 만희에게 넘기더니.
채회장 : 배박사한테 전화 넣어.
오이사가 얼른 전화기로 달려간다.
채회장 : 도실장.
도만희 : 예.
채회장 : 저 놈이 먼저야. 저 놈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거야. 알지?
도만희 : 알겠습니다.
S#49. 채회장 집 앞
도만희가 탄 차가 빠져나온다.
그 차가 지나간 이 구석에 아까와는 반대로 케이가 차 안에서 만희의 차를 보고 있다.
S#50. 채회장 거실
채회장이 전화를 하고 있다. 어두운 실내. 채회장의 마음처럼.
채회장 : 날개 꺽인 새. 다리 부러진 강아지새끼. 수염이 죄 타버리고 눈알 하나가 빠진 고양이.
그런 것들을 델구 와서 보살펴주더라고. 지 에미는 그래서 지 아들이 천사같은 놈인 줄 알았지. 나두 그런 줄 알았어.
내가 뭘 아나. 애들 같은 건 지 애미가 키우는 거잖아. 지 애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거지.
그런데.. 나중에.. 죽기 얼마 전에.. 말하드라구.
서재의 한곳에는 전시용인 사진들이 몇 개 늘어져 있다.
채회장이 정부 관료들과 같이 찍은 사진. 혹은 새 공사장의 테이프를 끊는 사진 등.
그 마지막에 구색을 맞추듯 가족 사진이 한장 있다. 어린 시절의 회장과 부인. 어린 도우와 은수.
사진관에서 구색을 맞춰서 찍은 딱딱한 분위기의 사진이다.
채회장 : 그 날개를 꺽구. 다리를 부러뜨리고 눈알을 뺀 게.. 그 놈이었나보다구. 그러니까.. 그게 보살펴 준 게 아니구
지가 그 짓을 해놓구나서 옆에 놓고 구경한 모양이라구. 그러니 애 좀 치료받게 해 달라구. 지 애미가 매달리는데..
(많이 피로해보이는 채회장)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구 소리를 질렀어. 나.. 이 채동수 아들놈이 미친놈이라구
세상에 광고를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모른 척 했어. 내가.. 크게 잘못했어.
S#51. 배박사 진료실
배박사 : 알겠습니다. 준비는 다 되있습니다. ..예.
배박사가 전화를 끊는다. 그 앞에는 도만희가 앉아있다.
배박사 : 바로 입원을 시킬 생각인가요?
도만희 : 회장님께선 그걸 원하십니다만.
배박사 : 하긴 제대로 치료를 하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을 듯 하네요. 워낙에 머리가 좋은 친구라..
앞에 놓여 있던 서류에 뭔가를 더 기입하고 끝에 사인을 하는 배박사.
배박사 : 이거면 일단 금치산자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의 볍률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구요.
입원은 적당한 날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준비를 해서 모시러 가죠.
도만희 : (받아들며) 수고하셨습니다.
S#52. 병원 복도
서류를 서류 봉투에 넣으며 걸어오는 도만희.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뭔가 미행의 느낌을 가진 것.
그러나 뒤에는 환자나 간호사들 뿐. 수상한 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S#53. 배박사 진료실
배박사가 탈의실로 가서 마악 가운을 갈아입는데. 진료실 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진료실로 뛰어 들어간다. 누군가 방금 나간 듯 진료실의 문이 쾅 닫긴다.
책상 옆 바닥에 액자가 박살이 나서 깨져 있는데 그 안의 사진은 없다.
그리고 진료 책상 뒤 벽에 액자에 있던 배박사의 가족 사진이 시퍼런 등산용 칼에 꽂혀 있다.
사진 안에는 웃고 있는 배박사와 아내. 대학생 고등학생의 아들 딸이 보이고. 칼은 가족들의 얼굴 위에 사정없이 박혀있다.
S#54. 도로
도만희가 운전을 하고 있다. 옆의 조수석에는 서류봉투가 놓여져 있다.
만희는 헤드셋으로 전화를 하는 중.
도만희 : 진단서는 바로 법원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럼 박변호사한테 거기서 만나자고 해주세요.
전화를 끊고, 새 단축번호를 누른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문호소리 : 왜 또.
도만희 : 신청곡.
문호소리 : 찻값은 내구 신청해야지.
도만희 : 그 집 커피를 누가 돈 내구 사마시나.
문호소리 : 그지 발싸개 같은 놈. 뭐.
도만희 : 브라암스.
문호소리 : 또?
도만희 : 바이올린 협주곡. 디장조.
문호소리 : 제발 시디 한 장 좀 사라.
도만희 : 내 차에 그런 거 놔두고 싶지 않아.
S#55. 뮤즈
문호 : 왜. 뭐가 무서워서. 발싸개 같은 놈. (흉내) 내 차에 그런 거 놔두고 싶지 않아.
문호가 툴툴대며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턴테이블로 돌아선다. 자주 듣는 듯 옆에 따로 빼져 있는 엘피를 들어 판을 빼낸다.
올리고 바늘을 얹고 스타트.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
S#56. 차 내부
핸드폰에 연결된 스피커에서도 음악이 흐른다.
도만희. 만족해서 운전을 해가다가 문득 표정이 굳는다. 목에 와 닿은 작은 나이프. 그 칼을 쥔 가죽 장갑.
백밀러에 비치는 모습. 도만희의 바로 뒷좌석에 바싹 붙어앉은 케이의 모습.
케이가 낮게 말한다.
케이 : 우회전.
도만희의 차가 급회전을 해서 옆길로 들어선다.
도만희는 벗어날 빈틈을 노리는데
백밀러의 케이는 전혀 도만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칼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플라스틱통의 마개를 딴다.
도만희가 순간 찬스를 노려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러나 브레이크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다급해서 몇 번이나 브레이크를 밟아보지만 소용없다.
백밀러 속에서 케이가 만희를 향해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천진해보이기까지 한다.
케이 : 좌회전. 왼.쪽.
눈 앞에 보이는 네거리의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는 도만희의 차는 위태롭게 속력을 내며 좌회전을 한다.
그 바람에 직진으로 오던 차량들이 요란하게 서며 크랙션을 울린다.
S#57. 뮤즈
브라암스의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다.
실내에 손님은 하나도 없고. 안경태가 대걸레질을 주욱 주욱 장난치듯 하고 있다.
문호가 제 커피 한잔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온다.
테이블에는 아직 켜져 있는 핸드폰. 문호는 핸드폰은 무시하고 옆의 신문을 당긴다.
S#58. 거리
이제 도만희의 차는 인적이 드문 길을 달리고 있다.
내부에서는 치열하게 신경전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서 차는 위태롭게 중앙선을 넘기도 하고 갓길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S#59. 뮤즈
안경태가 테이블을 치우러 왔다가 놓여진 핸드폰을 보고 들어서 귀에 대본다. 그러다가 멈춘다. 후다닥 가더니 음악을 끈다.
문호 : 그거 그냥 놔둬.
그러나 경태가 핸폰을 문호의 귀에 대준다.
S#60. 차내부
이제 음악이 끊어진 차 내부.
여전히 만희의 목을 노리는 칼.
케이가 도만희의 머리 위로 휘발유를 붓는다.
도만희가 순간 급가속을 한다.
비탈길을 위태롭게 가속하여 오르는 차.
악착같이 도만희의 뒤에 매달려 있는 케이.
만희 : 니 주인이 시킨 거냐. 너같은 개가 혼자 이럴 순 없을텐데.
케이 : 이만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칼을 그으려는 순간. 도만희가 운전대의 손을 놓고. 케이의 팔목을 잡아 저지한다. 차가 지 멋대로 달린다.
앞은 언덕. 그 위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도만희가 케이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빼내는데 성공하는가 싶다.
뒤돌아서 케이를 제압하려는데. 순간. 케이의 번쩍 든 한손이 보인다. 거기 들려있는 지포 라이터. 불이 켜진다.
미처 만희가 손을 뻗치지 직전. 만희에게 던져지는 불붙은 라이터.
// 뒷문이 박차지며 굴러나오는 케이.
외부에서 보이는 운전석에 불덩이.
// 운전석의 도만희는 불길에 쌓인 채 어떻게든 차를 세워보려고 한다.
// 그러나 언덕이 끝난다. 앞의 회전길에 회전을 못한 도만희의 차가 그대로 가드레일을 받고 절벽으로 떨어진다.
S#61. 뮤즈
핸드폰을 사이에 둔 채 듣고 있는 문호와 경태.
순간 핸드폰 저 너머에서 들리는 콰앙 소리. 이어서 통화가 끊어진 소리.
둘 다 멍해져있다. 사태가 파악이 안되는 중이다.
S#62. 절벽 아래.
도만희가 탔던 차가 불타오르고 있다.
어디선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S#63. 채회장의 집 마당 / 밤
현관문이 열리며 은수가 나선다. 숄을 둘둘 말고 가슴에는 담요를 안고 있다.
총총 걸어오는 은수. 마당 한쪽 야외 테이블과 의자. 그 중 한 의자에 도우가 널부러져 있다.
도우에게 담요를 꼼꼼히 둘러주며.
은수 : 오빠는 어떻게 술도 안 마시구 취해? 진짜 안 들어갈 거야? 밤새 여기 있을래?
도우 : 답답해. 안에 들어가면 답답해서 그래.
은수 : 으이그... 있어봐. 뜨거운 차 한잔 갖다 줄게. 위스키 좀 넣어 줘?
돌아서는데 그 팔목을 잡는 도우의 손.
도우 : 잠깐만 있을래? 춥겠지만 쪼끔만.
은수가 그 옆에 앉는다.
은수 : 무슨 일 있어?
도우 : 아마.. 있을 거야.
은수 : 왜애. 돈이 잘 안 벌려?
도우 : (웃는)
은수 : 어깨 빌려줘? ..자. (어깨를 세우고 두들겨 보이는)
도우 : 은수야.
은수 : 응?
도우 : 어쩌면 우리 엄마가 실수를 하셨는지 몰라.
은수 : 엄마가 뭐.
도우 : 원래 사람 안에는 선악이 반씩 있대매. 근데 울엄마는 우리 둘을 낳을 때에 계산을 잘못하신 거 같아.
어두운 건 모두 나한테, 밝은 건 모두 너한테 몰아줘 버린거야.
은수 : .. (웃는) 그런 게 어딨어.
도우 : 여기 있잖아. 너하구 나.
은수 : 그래서. 억울해? (여전히 웃고 있다)
도우 :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가끔. 가아끔.. 오늘 같은 밤. 울고 싶은데.. 울어야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우는 건지 모르겠을 때. ..억울해.
이제 은수는 웃지 않고 도우를 본다.
문득 도우가 마른 잔디 위로 무너져 내리더니 은수의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울지는 못하면서 울고 있는 듯 하다.
그 괴로움만 전해져온다.
은수 조심스레 손을 올려 도우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아이를 재우듯 토닥토닥..
은수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S#64. 경찰서 로비/ 밤
한밤중에도 취객이니 뭐니 시끄러운 경찰서의 현관.
허겁지겁 들어서는 박문호. 어디로 가야할지 우왕좌왕하다가 손에 들렸던 핸드폰을 의식하고 키를 누른다.
잠시 후 근처에서 벨소리가 들린다. 그 쪽을 돌아보자 대기의자에 초라하게 앉아있던 오이사가 전화를 받는다.
오이사 : 여보세요. .. 여보세요?
그러다가 이쪽에서 핸폰을 들고 보고 있는 박문호와 눈이 마주친다.
S#65. 시체보관실 앞 복도
앞에는 경찰직원이 안내를 하고. 그 뒤를 오이사와 문호가 따르고 있다.
오이사 : 도실장님이 인사기록의 그.. 가족난에 선생님 연락처를 적어놨드라구요. 평소 가족분이 계신 줄 몰랐는데.
그래서 연락을 드린...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를 본다.
문호는 완전히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있다.
앞에서 걸어가는 직원이 챠트를 보며.
직원 : 일단 절차에 따라서 시신 확인은 하겠습니다만.. 알아보기는 힘들 겁니다. 워낙 화상이 심해서요.
(멈추더니 뒤를 따라오는 박문호와 오이사를 돌아보며) 회사 동료분이라고 하셨나요?
문호 : 난 친굽니다. 회사 동료같은 거 아닙니다.
직원 : 가족분은 안계세요? 원래 가족분이 해주셔야 되는데.
문호 : 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직원 : 연락 안되요?
문호 :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엘에이. (벌컥) 그래서 보라는 거에요. 말라는 거에요? 그놈이 죽었대매. 날더러 확인하래매!!
오이사가 찔끔해서 돌아본다.
S#66. 경찰서 마당 / 밤
경찰차가 번쩍거리며 돌아 나가고.
문호가 쭈그려 앉아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에서 주소록을 검색하고 있다.
이윽고 뜨는 주소 하나. 이름난에는 발싸개아들이라고 써있다. 엘에이 전화번호.
누르고 귀에 대고 기다린다. 잠시 후.
문호 : 여보세요. (그랬다가 서툰 영어로) 핼로. 아이.. 아이 원트 스피크 미스터 도. 도. 미스터도. 재명. 재애며엉. 코리안보이.
예스. 코리안. 아아.. 씨..
문호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러고보면 울고 있었다. 눈물도 닦는다. 울면서 화를 내며.
문호 : 히즈 파더 대드. 대드. 죽었단 말이다. 그놈 아부지가. 좀 바꿔달라고. 체인지. 프리즈.
S#67. 뮤즈 앞 길 / 낮
걸어오는 신. 두리번거리며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아와 본다.
거기 음악다방이 하나 있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간판에 뮤즈 라고 간단하게 적혀있다.
입구로 들어서려다 멈칫. 입구에는 close 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어쩔까하다가 문을 밀어본다. 열린다.
S#68. 뮤즈
들어서는 신.
음악도 없고 비어있는 실내. 편히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배치된 편한 의자 등.
신. 벌쭘하게 구경하다가 돌아선다. 문을 열려는데.
경태소리 : 이구이사.
돌아보면 카운터 뒤에서 일어선 경태가 신을 보더니 좋아서 헤벌레해진다.
신도 웃는데. 경태가 달려와 신의 주위를 어쩔줄 모르고 돈다. 좋아서 틱이 좀 심해졌다.
신 : 잘 있었어?
경태 : (끄덕끄덕.. 뭔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 하다가 손가락을 신의 팔뚝에 대더니) 기다렸습니다.
여기 사장님도 압니다. 여기 사장님. 내 삼촌. 이구이사. 히히.. 환영합니다. 웰컴. 더블유이엘씨오엠이.
신 : 어디 계셔? 인사해야지.
경태 : 아.. (심각해지더니) 없습니다.
신 : ?
경태 : 공항 갔습니다. 배웅. 아니 마중. 엘에이. 미국. 도 재명.
신. 뭔소린가해서 보는.
S#69. 공항
우루루 오가는 사람들.
후루룩 바뀌는 전광판. 엘에이 출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사인.
// 도착 출구.
가방을 밀며 여행객들이 나서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문호가 있다.
문호는 도화지에 [환영 도재명/ welcome DO] 라고 써서 양손으로 들고 있다. 얼굴을 모른다.
젊은 남학생 같은 사람이 문을 나서면 신경써서 보는 중이다.
그렇게 나오는 사람들 중에 웬 히피 같은 사내가 있다.
긴 머리에 후줄근한 옷차림. 밀차도 필요없이 낡은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문호. 그 사내에게 힐끗 시선이 갔다가 다시 그 뒤의 젊은 신사복에게 신경을 쓴다.
두리번거리는 게 아무래도 그 멀끔한 신사인 것 같다.
그 때 문호의 시선을 가로막는 사내. 도재명이다. 문호의 손에서 도화지를 스윽 뺏더니 읽어본다.
구겨서 뭉치더니 농구를 하듯 휙 던진다. 종이뭉치가 저만치의 휴지통에 정확하게 들어간다.
문호를 향해 싱긋 웃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도재명이 걸어간다.
문호가 어이가 없어서 본다.
재명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