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의 영성
에스겔 3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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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유년 새해가 시작되고 어느새 보름이 되었습니다. 새해 요람을 인쇄소에 맡기고 나서야 저는 한숨을 돌리고, 그동안 밀렸던 책도 읽고 강의도 들으면서 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 삶을 돌아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걸어가는 방향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단테의 <신곡> 서문에 있는 문장처럼 ‘인생 중반을 살아오고 나서야 내가 숲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고백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서를 하면서, 세상에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 이들이 많은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하던 명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 사람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지?’ 하는 반성도 했습니다. 정말 멋지게 올곧은 생각을 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껏 몸을 낮췄습니다.
50 중반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돌아보니 허물투성이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것도 너무 많고, 부족한 것도 너무 많습니다. 지난 삶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내 삶이 선명했을 뿐 아니라 의미 있었던 때는 강했던 때가 아니라 부드러웠을 때였으며, 내 삶이 더 풍성했을 때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각을 세웠을 때가 아니라 품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젠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를 조금 깨닫게 되었고, 신앙인으로 사는 자유가 무엇인지 조금 선명해집니다. 여러분은 담임목사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깨달았기를 바라시겠지만, 제가 조금 깨달은 바로는, ‘다 깨달았다’고 ‘많이’ 안다고 하는 분 중에서 정말 많이 아는 분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짓는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울 유, 능할 능, 지을 제, 굳셀 강이 어우러진 사자성어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이긴다.’라는 뜻보다는 ‘짓는다’는 뜻으로 읽으면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짓는다.’라는 뜻이 더 부드럽습니다.
봄에 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신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저 딱딱한 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저 부드러운 새순의 힘, 남도에는 벌써 봄꽃들이 피어났다고 하는데, 언 땅을 녹이고 피어난 저 부드러운 생명도 신비스럽습니다.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살, 씨앗을 품는 부드러운 흙, 이 모든 ‘부드러움’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다른 말임을 죽음에서 봅니다. ‘죽음’은 ‘굳어버린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주입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약하면 죽는다, 강해지는 것만이 살 길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강함의 표상이 되는 ‘권력과 물질’을 최고신으로 숭배하며 살아왔습니다. 필요가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의 불행은 ‘모성의 부드러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병든 현대문명은 결국, 모성과도 같은 부드러움으로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드러워야 비로소 품을 수 있고, 품는다는 것은 곧 사랑이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장석주 시인은 ‘부드러움의 바탕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은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에 의하면 ‘똘레랑스’(관용)가 오늘날의 프랑스를 있게 한 원천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이 관용의 정신이 있었기에, 프랑스는 오늘날 문화와 예술을 넘어선 정신적인 가치를 주도하고 있고, 그 덕분에 자국민 스스로 자의식이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해, 여러분의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하셔서 관용의 씨앗을 뿌리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타자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줄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딱딱하게 마른 뼈처럼 포로의 삶을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이 희망의 메시지에는 고향 땅에 들어가서 해 주실 일들을 상징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정결한 물(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겨줄 것이며,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주어 너희 안에 ‘돌로 된 마음’을 도려내고(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마음’(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먼저 ‘맑은 물, 정결한 물’로 무엇을 씻어내고자 하십니까?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숭배에 찌든 마음을 씻어내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줄곧 약소국가로 지냈습니다. 그들은 주변 강대국의 풍요로움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는 가나안의 신, 풍요의 신 ‘바알’을 부러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시지만, 그들은 주변 강대국들이 믿는 풍요의 신이 훨씬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그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무기와 군사력을 이용해 나라를 지켜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강대국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혔으며, 포로로 끌려가서 마른 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맑은 물, 정결한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물은 부드러움의 상징입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곡선으로 돌아 먼 길을 갑니다.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홍수 때에 물은 모든 것을 쓸어버릴 정도로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물로 그들을 씻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주겠다고 하십니다.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하나님은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정결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맑은 물과 정결한 물로 깨끗하게 씻어지셔서 새 마음과 새 영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 새 마음, 새 영 = 부드러운 마음
26절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는 부분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돌로 된 마음을 도려내고, 자기 뜻 대신 하나님의 뜻을 좇는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굳은 마음’은 히브리어로 ‘돌’을 지칭하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으니 유진 피터슨이 ‘돌로 된 마음을 도려내고’라고 번역한 것은 탁월한 번역일 수 있겠습니다.
돌은 어떻습니까? 차갑습니다. 생명을 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씻어내신다는 말씀은 차가운 마음이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따스한 마음으로, 생명을 품는 마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품는 마음,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바로 새 마음이요, 새 영입니다. 새 마음 새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지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규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타자의 노력을 대가로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그림자노동’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모두 타자의 ‘그림자노동’을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자기를 살아가게 하는 타자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사랑’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웃으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단지 율법조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타자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 얼마나 감사한 분들입니까?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정성껏 드리기 위해 힘쓰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만,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이 없다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성가대가 없다면, 반주자가 없다면, 아니면 자리가 텅 비어서 썰렁하게 예배를 드린다면, 김 목사가 없다면, 지금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이 없다면 이 예배가 얼마나 공허해지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귀한 분들이요, 감사한 분들입니다. 함께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예배를 잘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한남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교회’라는 표어로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부드러운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요, 그래서 ‘부드러움의 영성’을 위해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곧 부드러움이요, 부드러움의 영성을 가진 이들이 가는 곳마다 생명살림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세상입니까? 아니라면, 낙심해야겠습니까? 부드러운 마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선한 일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보상자와 자극적인 언론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니까 절망적인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아가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미 그런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부드러움의 영성,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도 이 영성을 충만하게 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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