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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1-8.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019. 3.10.
지난 수요일, 3/6일부터 교회력으로 2019년 사순절이 시작 되었습니다.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화목하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화목하게 되기까지는, 화목하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되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하고 그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 것을 패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사순절 기간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 과정을 의미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갱신했던 시간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이 무엇입니까? 사순절은 영어로 lent입니다. 사순에서 4*10=40이 됩니다. 그런데 특히 성경에서 40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40일간 시내 산에서의 모세의 금식과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과 예수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과 같이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입니다.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 부활절로부터 46일 전입니다. 이 기간 동안은 부활을 기다리면서 신앙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과 경건의 시간으로 믿음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감동을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절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물로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프게 할 때 예수님은 피를 흘려 우리를 깨끗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일 때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우리를 대속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땅에 묻을 때 예수님은 부활로 다시 일어나십니다. 이 것이 사순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일부터 시작한 사순절 기간에 고난과 갱신을 통한 영적 신앙성장과 회복과 부활을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에 특별한 의미를 자신에 대하여 부여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3년 동안 사역의 현장, 퓨리칭, 티칭, 힐링의 3대 사역을 했습니다. 그 사역의 현장에서 똑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같은 의미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것이 나는 누구누구 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 집중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 사역의 사실과 함께 영적해석을 요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키워드가 ἐγώ εἰμι입니다. 그러면 ἐγώ εἰμι가 무엇이고 연이어 오늘 주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ἐγώ εἰμι입니다.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나는 ~이다. 라는 뜻의 헬라어 ἐγώ εἰμι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 자신을 비유적 ἐγώ εἰμι로 표현하신 것이 모두 7번 나옵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0년 광야 생활에서 맛나를 공급 받았던 것과 같은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 은혜 가운데 말씀을 하신 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두 번째는 성전에 있을 때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을 살려주고 그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다. 세 번째는 양과 선한 목자의 관계에서 요10;7에 나는 양의 문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울타리와 보호자로서 예수님 자신을 말씀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미 죽고 썩은 냄새가 나는 죽은 나사로 앞에 낙심한 마리아와 마르다와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섯 번째는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하는 현실에서 불안하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ἐγώ εἰμι는 단순히 “나는 ~이다”라는 주어와 술어가 아닙니다. 여기에 매우 깊은 영적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이나 지금도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BC 3세기경에 72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70인 역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 성경으로 전 세계의 기독교인이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72인 율법학자들이 그때 출3:14의 야훼, 여호와, 여호와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인데 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ἐγώ εἰμι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ἐγώ εἰμι가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모세에게 야훼, 여호와라고 말씀하시고 그 뜻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설명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을 향해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스스로 있는 자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6개 ἐγώ εἰμι와 요 15장의 ἐγώ εἰμι는 조금 관계성에서 다릅니다. 그것은 다른 ἐγώ εἰμι는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특별히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누구이신지를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요 15장의 ἐγώ εἰμι는 제자들과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힌 ἐγώ εἰμι입니다.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5;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힘에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참 포도나무인 주님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왜 수 많은 비유의 대상 중에서 포도나무를 들어 예수님, 자신을 설명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포도나무를 설명하는 참된 수식어에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사회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를 상징하는 식물은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세 나무 중에 포도나무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로 등장을 합니다. 시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430년 만에 출애굽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시편기자 아삽은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성전건축에도 반영이 되었습니다. 성전 입구에는 가장 정교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든 금, 은으로 된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 달린 무성한 잎사귀와 큰 포도송이들은 번성하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의 축복으로 상징이 되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파송했던 12명의 대표자들이 열매가 무성한 포도가지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참 포도나무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스스로 여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그냥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super ultra 캡송 포도나무입니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의 품종은 극상품이었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그러니까? 환경과 조건을 좋게 만들어서 심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소출도 극상품 포도열매이고 심은 극상품 포도나무가 계속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상품 포도를 맺는 대신 형편없는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자신들도 얼마 못가서 들 포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배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은 상실한 채 율법의 겉만 고수하고 지키다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완전하고 가짜로 살았던 극상품,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의 잘못된 역사를 잘 아시던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님 자신을 배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을 가짜와 불완전한 것에서 새롭게 하실 진짜와 순수와 이상적인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 가운데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여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런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극상품 포도나무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농부로 나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왜 에수님은 자신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농부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본래의 정체성대로 살지 못했던, 형편없는 들 포도를 맺었던 이스라엘들과는 다른, 다시 말해 인간과는 분명히 다른 참 포도나무입니다. 육체라는 몸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훌륭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비결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가꾸고 돌보듯이 하나님께서 주님과 주님의 사역을 돌보시는 농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의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는 누구의 손에 에게 달려있습니까? 포도나무는 절대적으로 농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들판과 논에서 자라는 보리와 벼가 혼자서 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농부의 손길이 얼마나 자주,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보리와 밀과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까지 했겠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을 느끼고 교감하며 참 포도나무로서 참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여러분, 농촌에서 가장 바쁜 시기가 언제입니까? 5, 6월입니다. 5, 6월이 가장 바쁜 이유는 보리를 추수하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교차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고 수확하고 다시 논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에 늦은 비와 이른 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하늘의 문을 열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간절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안 오면 어떻습니까? 늦은 비가 안 오면 열매가 쭉정이가 됩니다. 이른 비가 안 오면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밭과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보리와 벼들이 타들어 갑니다. 그러면 농부가 가만히 있습니까? 지금 같으면 냇가 바닥을 파서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고, 밤새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립니다. 용정을 파고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립니다. 그러다 하늘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소낙비, 폭우라도 쏟아지면 농부는 들로 논으로 뛰어가서 물 조절을 합니다. 대부분의 농부가 그렇습니다. 별 의미 없이 사서 먹는 밀과 보리와 쌀 한 톨에 이런 농부의 땀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애환이 서려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포도나무를 책임지는 농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포도원을 만들기까지, 그리고 포도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대로 된 농부라면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오늘 참 포도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농부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열심히 케어하시고 지키시고 자라게 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3. 관용과 배려의 안전망, 울타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성만찬과 세족식 이후에 자리를 옮기면서 까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십자가 처형 하루 전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버림받는 밤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이미 경고하셨던 예수님이었지만, 예수님은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의 낙심과 근신과 비애와 섭섭함을 아셨습니다. 떠나고 도망 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비록 배신하고 도망갈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죄악으로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버림받은 인생들을 위하여 그 길을 가시려고 했습니다. 왜요?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울타리요, 안전판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안전이 필요할까요?
3-1. 안전할 때 더 멀리가고 울타리가 있을 때에 관계가 깊어집니다. 여러분, 안전할 때 사람들은 더 멀리 갑니다. 안전할 때 비로소 위험을 감수한 시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돌아갈 집이 있는 오지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마음과 같습니다. 여행자에게는 고통이 고통이 아니며, 비참함도 아픔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돌아갈 안전망, 울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뛰어가다가도 뒤돌아 엄마가 자기를 빙그레 지켜보고 있음을 확인한 뒤 다시 더 멀리 뛰어갑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함은 곧 두려움이요, 멈춤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처절한 투쟁이요, 벗어야 할 무거운 짐이요, 수고로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사회가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과 같습니다. 울타리와 안전망이 허물어져 처절한 투쟁과 비참한 포기만이 무성하여 아우성과 비명 가득한 어두운 숲입니다. 여러분, 안전한 사람이 빛이 납니다. 안전한 아이가 얼굴에 광채가 깃듭니다. 안전한 사회는 관용과 배려가 깃듭니다. 안전한 사회는 관용과 배려가 거리마다 소리치며 울려납니다. 울타리와 안전함은 나태함이 아니라, 깊은 힘이고 용기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해야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사순절에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신 예수님은 사랑과 관용과 배려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원을 받은 내가 살아가는 거리는 관용과 배려가 소리치며 울려나고 있습니까? 내 가족들은 나로 인하여 울타리와 안전함을 누리며 모험을 시도합니까? 농부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 예수님께서 가지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안전판, 돌아갈 생명의 집이 되셨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모험을 즐기십니까? 하나님을 든든한 배경 삼아 용기 있는 시도를 하십니까? 고난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소명의 길을 걷습니까? 우리 또한 나와 함께 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꺼이 안전판이 되고 돌아갈 집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해야 하고 누려야 할 기본가치요, 관계성인 안전판과 울타리가 되어주신 주님으로 세상을 바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그러면 부족한 관계성을 어떻게 할까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말끝마다 관계를 뜻하는 우리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라는 말을 아무데나 붙입니다. 우리끼리,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집, 우리교회, 우리성도, 우리 장로님, 우리 권사님, 우리 집사님, 모두 우리입니다. 겉으로 보면, 관계성이나 공동체성이 매우 발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몸의 한 기관이 자꾸 신경 쓰이고, 손이 자주 간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처럼, 자주 특정한 말이 사용된다는 것은 그것에 문제가 있고, 실은 부재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유엔 자문기구인 SDSN(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에서는 매년 전 세계 나라들을 상대로 국민 행복 도를 조사하여 순위를 발표합니다. 2017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2018년 세계 행복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보고서는 10점 만점으로 발표되었고, 점수는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국민의 소득, 국가의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부패도), 사회의 너그러움(관용도) 등 다양한 기준을 종합한 점수입니다. 2018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는 핀란드가 선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를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위스가 선정되었습니다. 한국은 몇 위를 했을 것 같습니까? 자그마치 57위입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한국보다는 우위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57위일까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본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10위 안에 들뿐 아니라, 영국 의학저널 ‘랜싯'에 실린 WHO논문에 의하면 기대수명이 여성이 세계최초로 90세(90.82세)를 넘어서 세계 1위, 남성 또한 84.07세로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 57위를 했을까요? 나머지 항목인 선택의 자유와 부패와 사회의 관용도에서 거의 바닥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형편없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본은 조금 다릅니다. 사회의 관용,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부패가 적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고, 국가의 사회적 지원이 있고, 국민소득이 높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달라요. 물론 이해되지 못하는 바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근대사가 없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36년이 근대사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GNI, 국민총소득이 250달러로 필리핀, 인도네시아는 물론 우간다. 튀니지, 카메룬 등 아프리카 국가 경제에도 못 미쳤던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단 기간 유례없는 압축 성장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고공 선진화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경제 강국의 동력이 된 지나친 근면과 사회 경쟁의식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성장하여,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게 되고 일그러진 행복의 가치 기준을 세습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앞선 통계에 반영이 되었습니다.
앞선 UN조사보고서인 2018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관계 만족 지수는 조사에 응한 세계 156개국 가운데 95위입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만족 여부를 뜻하는 자율성 부문은 139위로 최하위권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 가는데 어려움이 있고, 지나치게 타인에게 간섭 당하고 조정당하고 눈치를 보다 보니 나라는 존재감과 나와 너의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대수명은 남녀 모두 세계 1위인 반면, 자살률 또한 11년 연속 세계 1위의 아픈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하고 좀 다른 부분이지만 오늘 살아가는 사회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 변화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히메지 비전교회만이라도 관용과 너그러움이 있는 예수님의 피로 나눈 형제자매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나에게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weary and burdened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 11:2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을 NIV성경은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그러면 무엇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것입니까? weary and burdened, 걱정과 근심을 안고, 생의 갖가지 짐을 진 채 힘겹게 하루하루 노정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죄로 만든 여행 가방, 불만 보따리, 한 쪽 어깨엔 권태의 더플 백을 메고 다른 쪽엔 슬픔 가방을 걸쳤습니다. 등에도 의심의 배낭과 외로움의 침낭, 두려움의 트렁크 따위를 둘러멨습니다. 순식간에 공항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인부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마감할 무렵이면 파김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몸의 중심이 마음으로 간다는 시입니다.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 그곳으로 온 몸이 움직인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어루만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농부가 되셔서 우리 삶을 일구시고 인도해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왜 근심이 있고, 왜 무거운 짐을 여전히 지고 있습니까?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히 센척하고 안 그런 척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신 예수님도 근심이 있고, 무거운 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적 중량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힘센 척, 가면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십자가를 이길 힘을 주시길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물론 두려워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때론 피곤하고, 때론 아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때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버거웠기에 새벽에, 밤에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농부 되시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힘들면 어디를 찾습니까? 스트레스 받고, 스트레스를 주고, 근심이 쌓이고,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누르면 누구와 만납니까? 무엇으로 해결합니까? 어느 분이 퀴즈를 냈습니다. ( )만 있으면(된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괄호 속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아픈 데만 나으면 입니까? 승진하기만 하면입니까? 돈만 있다면 입니까?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입니까? 아니면 나 혼자 살 수만 있다면 입니까? 괄호 속에 무슨 단어를 넣어서 내 인생의 문장을 완성하시렵니까? 채우지 못하고 괄호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은 ἐγώ εἰμι, 하십니다. 내가 너의 빈 괄호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시 23:1을 통하여 이렇게 괄호를 채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는 여호와가 내 목자만 되신다면, 정말 행복할거야’라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으로만 빈 괄호를 채우며 살아가겠다는 그의 결단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농부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만 내 삶의 농부가 되신다면 나는 정말 말 행복 할거야! 라는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으로만 생의 빈 괄호를 채우며 살아가겠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에게 필요로 하는 것들이 허락되고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교우들에겐 건강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교우들에겐 물질의 복을 주셔서 저와 여러분의 빈 괄호가 채워지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채워지지 않던 우리 생의 괄호가 채워지는 그래서 참 포도나무가 되고 참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은혜와 은총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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