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상술한 바 있는 <시 창작에 관한 노-트>를 보면, 미당은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기에 대해 앞서 인용한 회고담과는 상당히 다르게 진술합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국화 옆에서>가 갑자기 어느 날 쓰게 된 시가 아니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결합되어 생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마는 내가 二十代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四十代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 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하고 비웃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서도 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서상한 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 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靜溢)한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아마 2, 3년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각주1).
우선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창작시점은 1946년이 아니라 1947년이 되고, 국화꽃이 상징하는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 미당의 내면에 싹트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내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미당이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 <마쓰이 히데오 송가 (伍長頌歌)> 발표한 시점이 1944년 12월인 것을 고려할 때,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지닌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의 여인"의 이미지의 시원(始原)을 탐색하는 작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위 인용문보다 앞서 상술하길, 소복한 사십대 여인의 이미지에는 일련의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첩된 영상들의 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
2)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
3)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4)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5) 성모(聖母)마리아와 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6) 황진이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미당은 이러한 여러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이 중복되어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당의 국화꽃은 여인의 다양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여성, 융의 표현을 빌린다면, 태모(太母, Great Mother)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이미지가 일본 신화 속의 아마테라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미당이 언급한 4)의 여인의 경우, 미당은 그 여인을 산악에 비유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니고 신화적 여인, '태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누이를 산악(山岳)에 비유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미당은 그 산악과 같은 여인의 이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 크레오파트라를 언급하면서, 이 들보다 더 장엄한 이미지를 지닌 태모에 대해선 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산악과 같은 여인=아마테라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1991년에 발표된 시집 <山詩>에 수록된 <일본 산들의 의미>라는 미당의 시 때문입니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얼시구!
天皇이 좋아하는 대나무에선 나비가 여덟 마리나 날아오르며 무우 아랫도리같이 자는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어서
'야 이건 우리들의 해의 女神님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께서 손수 낳으신 나비님들이시죠'하며 日本 사람들은 매우나 좋아했네 ({미당 시전집3}321)
여기서 미당은 천황과 해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언급하면서 일본 산들의 의미를 수수께끼같은 말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당이 말년에 쓴 이 시는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제 논문 본론부분의 두번째 장에서 <국화 옆에서>를 일본창세신화와 연계시켜 상세히 풀어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미당이 <국화 옆에서>를 창작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지 국내의 상황만 고려할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저는 미당의 국화꽃을 일본 문화적 상징물과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일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박광용교수의 연구는 거의 해방 이후의 국내상황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만, 제 생각엔 그 당시의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1944년 말엽에서 1947년 중엽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일왕의 인간선언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6년 1월 1일 <신일본 건설에 대한 조서>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왕의 인간선언이 지닌 의미에 대해, 역사학자 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조서에서 천황은 신일본 건설의 방침으로 5개조의 서문(誓文)을 내세우고, 이어서 천황과 국민의 유대는 상호간의 유대와 경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화와 전설에 의한 종전의 왜곡된 신적(神的) 권위를 버리고 민주주의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 국민과 함께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천황을 신으로 숭상하여 천황을 위해 전쟁을 하고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책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각주2) 일왕의 인간선언은 일본인들에게는 패망보다도 더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스 베네딕트도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각주3). 일왕의 인권선언은 1946년 11월 3일 신일본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법제화됩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주권자였던 천황은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주4). 즉 신일본국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일왕이 아니라 국민이며, 일왕은 신적 권위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상징적 존재, 일체의 정치적인 권한을 지니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 됩니다.
일본국헌법이 공포된 날짜가 11월3일이라는 것은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죽은 뒤에도 조선신궁에 신으로 모셔진 메이지왕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한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왕이 일본인들의 정신영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忠)는, 최고 사제(司祭)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忠)가 이처럼 쉽게 왕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天照大神)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139-140쪽). 신화로부터 자신의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끌어 왔던 왕이 11월3일을 기점으로 법적으로 한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일본인들에게나 친일파 한국인에게나 모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정주는 1946년 가을 내지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천황복을 벗어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 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 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국화 옆에서>를 일본제국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데에는, 부분적으로는 실증적 자료에 대한 부주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후 관조의 단계에 이른 40대의 시인 서정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 데, 이는 <국화 옆에서>의 발표 시점 (1947)과 <서정주시선>에 수록된 시점 (1956)을 혼돈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광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정주가 이 시를 발간한 때는 32세였으므로, 40대의 중년여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 였습니다(52).
태평양전쟁(패전의 암운이 짙은 마지막 발악...내선일치..신사참배강요 창씨개명..징병...징용..정신대),,,1945 8 15광복.....1947 천황의 인간선언(신으로서는 굴복할 수없다..마지막 자존심? 정신적 할복?)...1948..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말땅 (이쪽 저쪽 지식은 꿰어참.)의 의식구조는 그 변화는?...
1945 8 15 히로시마 원폭투하..광복.......,몽양 여운형 암살....백법 김구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북한 방문...1948..5.10 이승만 등에 의한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거...7.17 제헌..8.15 단독 정부수립...이후 백범 김구 암살....이승만 독재.(사사오입 삼선개헌).4.19의거 ..박통의 쿠데타.....유신(체육관대통령).....궁정동의 총소리....하나회 전투왕 광주를 쓸어버림.....6.10민주항쟁(체육관이 아닌 직접 선거로)..보통사람 노가리...ㅠㅠ...학실한 땡삼이...노벨상 지팡이...그나마 좀 젊은 NO대통령...다음은 누가 친인척 구설수에?...^^
첫댓글 시는 시로 읽고, 평론은 또 평론으로 읽습니다. 둘 다 흥미있거든요. ^^*
태평양전쟁(패전의 암운이 짙은 마지막 발악...내선일치..신사참배강요 창씨개명..징병...징용..정신대),,,1945 8 15광복.....1947 천황의 인간선언(신으로서는 굴복할 수없다..마지막 자존심? 정신적 할복?)...1948..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말땅 (이쪽 저쪽 지식은 꿰어참.)의 의식구조는 그 변화는?...
1945 8 15 히로시마 원폭투하..광복.......,몽양 여운형 암살....백법 김구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북한 방문...1948..5.10 이승만 등에 의한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거...7.17 제헌..8.15 단독 정부수립...이후 백범 김구 암살....이승만 독재.(사사오입 삼선개헌).4.19의거 ..박통의 쿠데타.....유신(체육관대통령).....궁정동의 총소리....하나회 전투왕 광주를 쓸어버림.....6.10민주항쟁(체육관이 아닌 직접 선거로)..보통사람 노가리...ㅠㅠ...학실한 땡삼이...노벨상 지팡이...그나마 좀 젊은 NO대통령...다음은 누가 친인척 구설수에?...^^
3번찍어 3번 맞추었으니 객관식에 달인...? 이제는 안할랍니다...기권도 권리다...()()()
올리신 글 읽다가 연표가 도움 될까 싶어 찾아보다가...현재까지 주절주절....너무 믿진 마세요...들리는 소문에....^^()()()
도올의 다큐 7부작이던가? 발로 쓴 독립운동사...보고 울었습니다...애들과 함께 보신다면 유익한 시간 될 것 같네요()()()
님들이 많이 읽어 주셔서 다행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