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장41~42절
제목▶ 장차 반석이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을 먼저 만났던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자기의 형이었던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장면입니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 베드로에게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
라고 말하면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본문 42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그리고 번역을 하면 베드로입니다.
시몬이라는 뜻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들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지금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라고
말씀하시는 뜻은 무엇이냐?
“지금은 네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사람이나
장차 게바 즉 반석이 되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인생을 보면
흔들리는 갈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하면 떠오르는 사건들이 많지 않습니까?
갈대 같았던 모습이 많다는 것이죠.
바다를 걷다가 빠져버린 사건도 있었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니까 말고의 귀를 자르잖아요.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세 번이나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죠.
베드로의 성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뱃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원래 직업이 뱃사람이었거든요.
물론 요한은 조금 성향이 다르긴 하지만
베드로는 거친 면이 있고,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따를 것 같다가도
세 번이난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을 보고 있는데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 되어져서
이후부터 계속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록해 둔 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요.
그리고 어떻게 말씀을 하시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베드로에게 3번이나 하십니다.
이 질문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1장에서 주님이 말씀 하셨잖아요.
“지금은 네가 시몬이지만, 흔들리는 사람이지만
장차 너는 흔들리지 않는 돌 반석이 될거야”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을 보면요.
아직도 베드로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예수님은 이름을 잘 부르시지 않으세요.
성경을 보면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그닥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말은
“아직도 네가 시몬이구나”이런 뜻이 있는 거예요.
아직도 베드로의 삶의 모습이 그리고 신앙이
예수님 보시기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한복음이 끝나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사도행전 3장에서 어떻게 바뀌게 되느냐?
40년 동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만났을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때부터 베드로를 향한
시몬이라는 호칭은 완벽하게
그에게서 빠져 버린다는 것이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뀌는 것이죠.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포기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즉 끈질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변할 것 같지 않아요.
요한복음의 모습을 보면 안 변할 것 같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베드로는 끝났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그런데 끝난 것 같은 베드로가 끝나지 않고
다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베드로가 되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삭개오는 변할 것 같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삭개오의 나이는 70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돈 때문에 민족을 팔아먹는 사람이었습니다.
70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삭개오는 쉽게 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깊게 만나고 나서부터
그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포기하지 않고,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에,
그 삶이 완전히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회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들어보면
부모도 형제도 누구도 한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모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장차 게바라 하리라”말씀 하시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지금은 시몬 같은 삶을 살아도
“장차 베드로로 너를 만들어 주리라”
주님의 이 약속이 결국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몬을 마침내 반석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하는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지금은 너가 시몬이지만
장차 게바라고 하시겠다는 이 말씀에는
주님이 포기하지 않겠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장차”라는 의미는
“멋 훗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몬에서 베드로로 가는 길은 쉽지 않지만
내가 인내하겠고, 내가 기다리겠고,
내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주님이 강권적으로
변화 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다루어 가시면서
깨우침과 깨달음 속에서
변화 되어지길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차라는 말은
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느냐?
지금 당장 베드로가 변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며
포기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시몬을 흔들리지 않는 돌
반석으로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 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도 내가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저 깊게 들어가면
내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은 거예요.
사람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그 삶 속에 위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날 고비, 믿음을 포기할 고비
신앙을 버릴만한 고비가 여러 차례
그분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럴때마다 쥐꼬리 같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으로 견뎠고, 그 믿음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요.
그 말이 아예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은 누가 주신 것이냐?
예수님이 주셨다는 것이죠.
결국은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죠.
베드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주님이 지금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성향과 기질을 모르시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계실 때
그 소리를 듣지 않으셨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으로 말하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3년 넘게 함께 한 제자가
나와 함께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나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저주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할 때
얼마나 속이 상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또 찾아오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더라구요.
가족이 너를 버려도, 때론 젖먹이는 어미가
젖먹이는 아기를 잊어 버렸을지라도
나는 너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을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보세요.
끝까지 자신의 집나간 아들을
기다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 더 묵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이냐?
역시 하나님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안될 것 같은 사람이
우리의 힘으로는 변화지 않던 사람이
주님께서 만지시니까 변화된다는 것이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가
성령님께서 임하시니까 어떻게 바뀝니까?
목숨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 보더라도
그들의 끝이 어떠합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는 것이죠.
예전의 베드로를 보면
죽음 앞에서 백번이고 부인 할 사람인데
그는 그 죽음을 맞아들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신약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을 우리가 예로 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는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목숨 빼앗는 일고
서슴없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아주 깊이 만나니까 변화가 된거예요.
그래서 이 사울은 완전히
바울로 바뀌게 됩니다.
바뀌어도요.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예요.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다니면서 왜 이렇게
바뀌지 않는 것일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삭개오를 보면서 풀린게 있어요.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잖아요.
“내가 너와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유한다”는 것은 헬라어로
“하룻밤을 함께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잠잘 곳이 없어서
삭개오 집에 자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 밤 너와 함께 깊이 좀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깊게 예수님을 만나고 난 삭개오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왜 변하지 않느냐?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와 계시는
그 주님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깊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헌신을 하고 난 후에
담임목사님에게 이러한 고백을 하였대요.
“목사님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대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겠죠.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무척이나 놀랐을거예요.
예전에 내가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떠한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느냐?
“아~ 오늘은 여기서 밥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구나! 아멘!”이러면서 나가잖아요.
그런데 이런 우리가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니까
변화가 된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2019년의 삶이 흔들리는 갈대 같을지라도
우리 주변에 상황이 흔들리는 갈대 같을지라도
장차 게바가 된다는 이 말씀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장차 우리의 모습도 바꾸시고,
장차 우리의 환경을 바꾸시고
장차 우리의 상황을 바꾸시는
그런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2019년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주님께서 만져 주시고 변화 시켜 주셔서 주님 의 일 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