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원래는 미코시바 시리즈 2탄에 대한 감상을 올려야 하는데 말이죠.
또 다른 서평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이것도 좀 오래 전에 쓴 거예요. 한국점자도서관의 독후감 대회에 심심풀이 삼아 낸 거거든요.
물론 낙방했고 말이죠. 당시 참여하는 인원의 수를 떠나서 그래도 나와 관련 있는, 정확히 말해서 내가 다니는 출판사의 협력 도서관이고, 가끔 동화구연도 나가는 도서관인지라 병풍용으로 냈었습니다.
즉, 수상이나 낙방 여부를 떠나 그냥 배경 소품으로 활용되면 좋지 하는 생각으로요.
도서명: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저자: 강영우
* 이 책은 아이프리 도서관 3번 종교 부분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독후감 - 절망은 간절한 희망의 동음이의어
강영우 박사는 송암 박두성 선생과 함께 시각장애인들의 ‘유명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유작인 본 도서,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바로 그의 인생을 다룬다. 워낙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그의 일대기는 제법 잘 알려져 있다.
팩트만 짚자면 강영우 박사는 1944년 1월16일 양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직접 세울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북에서 종교적 핍박을 피해 내려온 목사들을 반겨 마지 할 정도로 말이다. 유지에 가까웠던 집안인지라 어릴 적에는 제법 유복했던 듯싶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시각장애인이 되고 만다. 좌절 끝에 다시 일어선 그는 연세대를 차석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피츠버그대학 석사․박사를 취득해 ‘맹인박사 1호’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그 뒤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루스벨트 재단 고문을 역임하면서 전 세계의 장애인 인권개선을 위해 헌신했다. 그를 인정받아 2006년 미국 루스벨트 재단 127인의 공로자에 선정되었고, 2008년 국제로터리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급작스레 선고받은 췌장암 말기 후에도 이타적인 활동을 펼치며 생의 끝을 의연하게 준비했고 2012년 2월에 눈을 감았다.
사실 이 책은 내 취향과 거리가 상당하다. 개인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신앙서와 올바른 말의 나열인 자기계발서는 잘 펼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서는 ‘기승전결 하나님의 영광’이다. 저 그리스의 극작가들의 방식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뉘앙스가 강하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무언가를 신의 개입으로 해소하는 것.
물론 장애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그 무엇이다. 내게 장애가 있다는 것은 신의 역사함으로 큰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런 관점이, 그런 프레임이 좀 거북했다. ‘나’라는 주체가 바래가는 기분이랄까.
한편 자기계발서는 너무 구태의연한 감이 없지 않다. 원론적인 소리, 다소 추상적인 말들,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그리 유순하지 않은 성격이다.
그렇기에 ‘자기계발 + 신앙서’인 이 도서는 내 입맛이랑 안 맞았다. 부연하자면, 예전에 읽으려다가 포기한 전적도 있다. 그럼에도 책을 펼친 이유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람에게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예전 한국점자도서관의 ‘강영우, 시각장애인 인생나눔멘토’의 행사 순서지를 교정했던 인연 때문이기도 했다. 왜 있잖은가, 낯익은 이름에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거. 당시 발대식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단체도 있구나 하며 긍정적으로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다시 읽은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여전했다. 그러나 내 시각은 조금쯤 달라졌다.
강영우 박사는 중도 시각장애인이다. 요즘도 중도에 시력을 잃으면 인생 깜깜한 세상이다. 하물며 한강에 돛단배 다니고, 소달구지가 길을 지나는 그 무렵에는 어떠했겠는가. 하필 또 치료 시기를 놓쳐 회복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면, 억울하고 분하고 절망한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종교에 매달려 눈 뜨길 원했던, 요즘 관점에서는 ‘좀 아닌 행동’을 보인 것도 동조는 못할지언정 이해는 가능하다.
사실 예전에는 그 심정에 영 공감하지 못했다. 병원의 의사가 아니고 왜 신을 찾는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은 인간이다. 아무리 날고 뛰고 잘나봤자 오직 인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장애란 인간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 요컨대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인간이 자연 앞에 겸손해지듯 장애도 그와 유사한 맥락이 아닐까? 저 마틴 루터 또한 천둥과 벼락이 난무하는 폭풍우를 겪은 뒤 겸손한 신앙에 눈을 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종류불문하고 사람을 절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사람 구실을 하고 살려면 절박해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절망을 안긴다. 옛날이었으니 더욱 심했을 터였다. 그래서 강영우 박사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는 절망이, 절망이 아님을, 간절한 희망임을 자신의 지나간 자리로 증명했으니까.
멘토(mentor), 최근에는 너무 무분별하다싶게 쓰이는 말이다. 그 참뜻은 인생의 조언자를 의미한다. 가르침을 받는 멘티(mentee)와 동행하며 자신의 삶으로, 그 궤적으로써 깨달음을 주는 스승. 그렇게 본다면 자신의 지나간 자리로 하여금 교훈 삼게 하는 강영우 박싸는 보기 드물게 진정한 멘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고 듣고 느끼는, 여느 사람들이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장애인에게는 당연하지 못한 게 되곤 한다.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는 것은 많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강영우 박사의 삶을 보노라면 절망은 간절한 희망임을 주지하게 된다. 그래서 감히 생각하길, 그는 절망을 보지 못한 게 아니다. 강영우 박사는 절망을 보았으되, 그를 절실한 희망으로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 자서전의 제목과 같이,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깜깜한 절망만 보이는가? 아니,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당신이 품은 간절한 희망이다. 그러니 ‘절망’은 ‘절망의 동음이의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