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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5 - 청나라를 세우는 만주족의 조상인 말갈족과 여진족의 시대별 변천!
임계순이 지은 750페이지에 달하는 “淸史(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이란 책에 보면.... 자기는
이스트만 교수의 지도로 이 책을 쓰게 됐다는데, 이스트만은 또 하버드대학 페어뱅크 교수
의 제자이니 옛날부터 서양인들은 만주족(여진족) 이 세운 청나라에 대해 연구가 깊었던 듯 합니다.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과 더불어 조공국인 월남(베트남) 이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를 용인할 경우
서남변방이 열강의 침략에 노출될 것이고 군사적으로 대결하자니 재래식인지라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 청조가 정책을 결정해 가는 과정을 이스트만 교수는 박사 논문에서 연구 분석했다고 합니다.
중국 25개 왕조 가운데 마지막 왕조인 淸朝(청조) 는 漢族(한족) 이 아니라 소수민족인 만주족(여진족)
이 건국했음에도 중국을 정복하고는 무려 268년간이나 통치했는데... 오늘날의 중국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후손들은 현재 중국인이 되었으니 이를 중국사로 보는데 이견은 없습니다.
만주족의 조상은 전국시대 진(秦) 나라 진시황 이전에 만주에 “숙신” 이라고 불리는 족속이 있었고 한(漢)나라
시대에는 “읍루” 였으며, 남북조시대 후위 때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시대에는 “말갈” 이었는데
이 말갈이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 때 부터는 “여진” 으로 불렸으며..... 청조를 세우고는 만주족이라고 했습니다.
서기 290년경에 진 (西晉) 나라 진수 (陳壽) 가 쓴 삼국지 (三國志) 위지 줄여서
위서 (魏書) 에 열전 30 ‘오환선비동이전’ 중에 동이열전 (東夷列傳) 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및 왜(倭) 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숙신 (肅愼) 은 동아시아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읍루,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의 조상인데.... 숙신
= 만주족 이라고 보기 어려운건 만주가 한반도와 달리 사면이 열려있는 개방적인 지형으로
외부와의 인적 교류가 활발했고, 시대가 지나면서 여러 유목·수렵 부족들과 혼혈화되었기 때문 입니다.
숙신 (肅愼) 은 만주·연해주에 사는 퉁구스족인데, 원래 퉁구스족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예니세이강 상류 및 스타노보이 산맥과 오호츠크해 연안 일부에서
살면서 순록을 방목하는 생활을 했는데 연해주로 이동한 시기는 3,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1천년경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한 퉁구스인들은 순록 방목 및 가축들을 목축하거나 소규모 농업을
하는 것으로 생업을 바꾸기 시작했으니 중국 주 (周) 나라 시기에는 “숙신”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샤머니즘을 믿었고 동예나 옥저 처럼 부족국가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중심지인 수도는 없었습니다.
숙신은 남북조시대나 수, 당 시기에는 읍루·물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후 말갈로 호칭되었고, 흑수말갈은
여진족이 되었으며 복속되지 않고 남은 북쪽의 생여진들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금나라 및 동진국을 세웠고,
금과 동진국 멸망후 다른 민족에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만주족이 되어 청나라를 세웁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고구려, 부여와 접한 외세 국가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를 침략해 약탈했다가 나중에는
고구려에게 제압당하니 광개토대왕 시기에 숙신은 고구려에 토벌당하여 복속하게 되니......
고구려는 두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 수,당 침공에 맞선 고구려군에는 말갈 기병이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相婁 (상루) 곧 '읍루 (揖婁)' 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함경북도) 에
닿고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산이 험하고 많으며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 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
와는 다르고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으며 읍락에 대인이 있다.
산림 사이에 거처하면서 동굴에서 사는데 큰 집은 사다리 아홉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한척 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 만큼 드는데,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드니 옛날부터 '숙신씨' 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읍루초 이다.
한 (漢) 의 말기에 '부여' 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는지라 황초 중에 모반하니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무리가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
거리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 는 아니며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말갈(靺鞨) 은 고대에 만주 동부 지역과 연해주 일부,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거주했던, 계통상 현재 만주족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퉁구스 계통으로 추정되는 어로와 수렵채집, 유목 생활을 한 종족으로... 순수한 유목
민족은 아니고 말갈이라 불렸을 때까지는 유목도 했으며, 여진이라고 불릴 때에는 삼림 수렵과
채집, 목축, 유목, 농경으로 삶을 영위했는데 당대 발음은 '모트기트', '마트카트' 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말갈 (靺鞨)‘ 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 중심의 시각으로 변방인들을 멸시해 부른 비칭
이었다' 는 시각도 있으니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수도 중심이니 신라 주류층이 경주 외에는 전부 변방
촌놈으로 업신여기었듯 고구려도 평양 사람 입장에서 동쪽 변방 시골 사람들을 말갈로 낮춰 불렀다는 견해입니다.
이에 따르면 말갈은 “촌놈” 과 같은 뜻이었다고 볼수 있으니...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측의 신당서에 “대조영을 속말말갈인” 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말 그대로
해석하면 걸걸중상의 아들인 대조영의 가문이 말갈족이라는 의미이며, 말갈비칭설에
따르면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란 것을 고구려 속말부 출신 촌놈이란 뜻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말갈 7부 중에 하나인 속말부는 강한 병사가 수천명이고, 날랜 무사도 많아 매번 고구려
를 노략질하였다고 전하며, 궐계부의 만돌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의 소부 8부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수나라로 귀순한 사례가 있는데, 아쉽게도 고구려의 기록에는 대조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물길-말갈의 독자적인 외교가 기록에 남아있으니 '말갈이 촌놈이란 뜻의
비칭이지 이민족을 구분해 부른게 아니라는 주장' 에는 오류가 있으며 또한 중국의
역사서에서 이민족 열전에는 말갈에 대한 내용을 고구려와 분리하여, 고구려전과
말갈전 이 따로따로 등장하니.... 중국이 고구려와 말갈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인지했습니다.
말갈족은 속말말갈, 백산말갈에 흑수말갈, 철리말갈, 월희말갈,우루말갈, 불열말갈, 백돌말갈등 7개 부족이 있었는
데.... 남쪽인 동만주 지역 지린성(길림성) 일대에 거주한 부족은 속말말갈과 백산말갈로 생활 방식은 고구려
및 부여와 비슷한데, 애초 거주하는 지역이 고구려와 부여 발상지 근처이고 반농반목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소속된 속말부는 아예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후 흑수말갈의 후신인 완안부가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금나라 라는 새로운
여진족의 제국을 세운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사례로서, 이미 백산과 속말 두 부족
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갈인' 인 동시에 '고구려인' 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료에는 발해의 말갈 부락들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대부분 서쪽의 길림성 지방 출신인 속말말갈인들과 토착
고구려인들이었으니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남쪽의 신라와 고려로
유민이 유입될 때 예맥계와 함께 유입되었다가 동화되어 자연스레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흑수말갈을 비롯한 퉁구스계 말갈족들은 북쪽 흑룡강성(하얼빈), 혹은 연해주 일대에서 거주하던 민족
으로 위의 두 말갈 부족과는 매우 이질적인 부족이었는데.... 흑룡강 일대는 환경 자체가 남쪽의 길림성
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척박한 지역이었므로 매우 거칠고 유목 민족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을지언정 끝까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으며
고구려 때도 완전히 복속된게 아니라 반(半) 복속 상태로 있었고, 발해 때도
북쪽 흑수말갈은 발해에 속하지 않고 멀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독립하려고 분투했으나... 발해 선왕시기에 결국 제압당하고 발해에 복속되었습니다.
여러 말갈 부족들이 발해에 소속되긴 했지만 간접적 복속에 그치고 여전히 발해라는 나라 안에서 말갈족
들은 큰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
와 '철리부 말갈족' 이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행열로 따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합니다.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자리를 가지고 이런 자존심 다툼한 것을 보면 발해인 주류와 철리부는
서로 상당한 지역감정,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한데 이후 발해가 거란족 요나라에 허무하게
멸망하면서, 말갈인들은 발해 유민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해 점차 만주의 주인이 되어 여진족으로 재탄생합니다.
발해의 멸망 후에 여진족으로 명칭이 바뀌어..... 거란에 복속한 숙(熟) 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生)여진으로 구분되어 지냈으니.... 거란족의 요나라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를 이룩하지는 못했고,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 영가, 우야소 등의
추장이 등장하여 부족 단위를 국가 형태로 통합해 가면서 주변국과 긴장 구도를 이루었습니다.
1107~1108년 윤관과 척준경이 별무반 중심으로 토벌하고 동북 9성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반격으로 2개
성을 뺏기자 다른 7성도 도저히 지킬수 없는지라 반환했고, 1115년 정월 북쪽 흑룡강에서 완안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금나라가 된 말갈 7부는 신속하게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 지방까지 차지
하였으며..... 그뒤 고려도 이자겸의 주도하에 금나라의 신하국이 되어 슴황제를 모시는 조공 체계에 편입됩니다.
말갈인은 고구려와 발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민족이었는데 북한산성 전투의 말갈인 지휘관
생해(生偕) 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에 남은 자도 있으나 그 외에도 역사상 기록된 '고구려인'
들 중에 종족 출신이 명시되지 않은 인물들 중에서 일부는 말갈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때 남진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주에 살던
말갈족을 고구려가 징병해서 남진에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비슷하게 예인
(동예) 을 백제와의 독성산성 전투에 동원하기도 했고 심지어 의자왕 때도
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 북쪽 국경 33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르강과 연해주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을 비롯한 상당수 다른 말갈 부족들은 복속과 이탈을
꾸준히 반복한 것으로 보아 끝끝내 발해에 동화되지는 않은 듯하니 즉, 말갈족들은
고구려인에 일부 동화된 남쪽 말갈 부족(속말부, 백산부)들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동화되지 않은 북쪽 말갈 (흑수부, 철리부, 월희부 등) 부족들이 금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압록강 북쪽 강변 졸본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와서
한강 하류에 새로 자리를 잡은 백제를 상류에서 한강을 따라 내려와 자주 공격해온
한반도 중부 춘천과 철원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말갈(靺鞨)” 은 저 만주
지방의 말갈과는 다른...... 그러니까 진짜 말갈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말갈족 군대를 대거 동원한 첫 기록은 영양왕때 이니...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598년 말갈 기병 1만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공격했는데, 하지만 수군 장수 위충이 지키는
임유관을 점령하지는 못했고 수 문제는 이에 격분하여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나당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수인 이근행 (李謹行) 의 아버지는 속말말갈 출신으로 돌지계 (突地稽)
인데, 부 (部) 의 추장으로 수나라때 그에 속한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부해 오니,
영주(營州) 에 거처하게 하고, 금자광록대부(授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遼西太守) 에 제수하였습니다.
아들 이근행(李謹行 ? ~ 682년)은 당나라 장수로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 기록에 자주 등장하니 672년 황해도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을 몰살시켜 서라벌을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당 태종때, 그의 부를 영주로 삼고
총관 직을 제수했고 군공으로 기국공(耆國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부는 옮겨 창평(昌平)에 거처하게 했습니다.
고개도(高開道)가 돌궐 병력으로 유주를 공격하자, 돌지계가 맞아싸워 패배시켜으며 뒤이어 우위장군
으로 승진시키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으나 돌지계는 얼마 안가 죽었는데 아들 이근행은
용모가 장대하고, 용맹은 군중을 뒤덮었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영주도독이 되었는데, 가동
(家童) 은 수천명에 이르러 재물로써 스스로 웅걸이 되니 이인 (夷人) 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김부식은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당태종의 30만 대군으로 부터 끝내 성을 지킨 위대한 안시성 성주
의 이름을 알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는데.... 역시 수양제 100만 대군에 성을 지킨 요동성 성주의
이름도 알수 없는건, 우리 역사 기록이 너무 빈약한지라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안시성 성주 이름은 楊萬春(양만춘) 입니까, 아니면 梁萬春(양만춘) 일까요? 1145년에 김부식도 알지못한
이름인데, “900년” 이나 지난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 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에 나오니
중국 소설가가 적당히 지은 이름으로 임진왜란때 온 명나라 병사가 중국 소설에 저런 이름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가오홍레이가 지은 1,044 페이지에 달하는 ‘절반의 중국사’ 라는 책 제8장 말갈편에
보면 장백산(백두산) 기슭에 놀던 선녀 셋 중에 푸쿠룬이 까치가 떨어뜨린
붉은 열매를 먹고는 후금을 건국하는 아이신기오르(애신각라 ) 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백두산(장백산)과 흑수(흑룡강) 사이 동굴이나 움집에 살던 원시적인 부족 말갈(깊은 숲의노인)
은 헤이룽강 하류지역 숲이 원 고향이라는데, 이들이 성장해 여진(女眞: 동방의 매)
으로 불릴 때 금나라를 세우고 또 훗날 후금 (청) 을 세워 스스로를 만주족 이라고 자칭합니다.
거란족 요나라는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강한 부족들을 요양부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자신
들이 관할하는 호적에 편입시키니 “熟女眞(숙여진)” 이라고 불렀으며,
북쪽 휘발강에 거주하던 여진은 요와 반기미(半羈靡) 관계로 “生女眞(생여진) 이라 불렀습니다.
금(金) 나라는 북만주 흑룡강 유역의 흑수말갈의 후예로 생여진인 완안부 여진족이 1115년에
만주 지방에 세운 나라로 1234년에 몽골에 망하는데.... 시조는 완안 아골타 이고 수도는
초기에는 북만주인 상경 회령부였으며 훗날 4대 군주인 해릉왕이 연경(북경) 으로 옮겼습니다.
황성(皇性) 은 한국식 독음으로는 완안(完顔) 으로, 금대 여진어로 온얀(Won-ian) 이라고 읽었으며 만주어
발음 으로는 왕야(Wanggiya) 고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며 원조비사등 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니 근대
여진어로 자신들을 주션(ʤu-çiɛn) 이라 부른 것으로 보이며 훗날 만주어(청나라) 로도 주션(ʤuʃən) 입니다.
금(金) 은 중국식 국호이고 여진어로는 암반 알춘 구룬 (Amban Altʃun Gurun) 으로, 국호인 금 (Antʃun) 은
하얼빈 동쪽 아십하 (阿什河) 의 옛 이름 안출호수 (按出虎水) 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 (按出虎) 는
여진어로 금(金) 을 뜻하는 '알춘(Altʃun)' 을 음차한 것인 말갈 7부중 안차골부 (安車骨部) 의 땅 입니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 아골타가 말하기를, "요(遼)나라는 빈철(賓鐵)로 국호(國號) 를 정했는데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띠는 금만이 변치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라면서 금 (金) 을 국호로 삼았습니다.
다만 청나라 시절 “흠정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안출호가 금(金) 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해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합니다. 금 시조 함보가 신라 땅에서 여진족 땅으로 이주
했다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두 사람의 연대가 100여년 차이가 나는
데다가 금태조 본인이 저렇게 말하며 국호를 지었으니 후대 사람인 청의 학자가 엉뚱한 소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진족은 발해 멸망후 만주지역을 떠돌며 지배자 거란족에게 숨 죽인채 지내야 했는데, 거란(요나라)
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자 북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12세기초 부족 통일을 이룹니다.
그러고는 금태종 때 거란에게 시달리던 송나라에게 사신을 보냈고, 송나라는 요나라를 제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다음 목표는 우리 송나라 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워낙 커서 무시하였는데 순망치한 (脣亡齒寒) 을 몰랐나 봅니다?
금나라가 건국한지 10년만인 1125년 송과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북송의 송휘종이 잔꾀를 내어
요의 잔당들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견제하려고 하자 노한 금나라는 1년 만에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무너뜨리고 화북 일대를 통째로 집어 삼키니 정강의 변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송은 황제·상황· 황후·
황자·황녀가 모두 금에 포로로 끌려갔으니 북송이 멸망하고 임안(항저우) 을 수도로 한 남송이 세워집니다.
금나라는 건국으로 부터 화북을 점령하기 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니 중원의 다크호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왕조로,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을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했던 때가 1109년인데,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간에 당시 동북 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전광석화 처럼 무너뜨렸으니 고려 입장
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을 바치던 자들이 순식간에 대제국을 이루었으니 황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고려와 국경을 접한 함경도에 살던 여진족이 아니며... 또 고구려 시대에
동남만주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이나 백산말갈과는 다른, 발해 시대 흑룡강변 북만주 하얼빈에
있던 흑수말갈의 후예로 고려시대는 완안부로 불렸으니 세력이 커져서 남진해 여진족들을
통일하는데, 윤관의 여진정벌이 실패한 결과 승전의 구심점이 된 완안부가 금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맹안모극 (猛安謀克) 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느
뜨리고 화북을 얻을 수 있었는데,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는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 했습니다.
금건국 이전 부터 맹안모극제는 여진의 고유 병력 운용체계로 1114년 10월에 찰지수 전투후 아골타
가 3,000호를 묶어 1천명 1맹안 제도를 확립시켰으며 금사 병지에 따르면 1184년 대정
24년에 등록된 맹안모극은 맹안(猛安) 202, 모극(謀克) 1878, 호(戶) 616,000 호 였다고 합니다.
훗날 송과 금이 해상동맹 체결후 요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출격한 송나라 동관이 이끄는 1차 20만은
얼마 싸우다가 후퇴하였고, 2차 10만 송군은 연경의 1만 요군에 처참하게 패배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 송군은 겁을 먹고 도주하다가 서로 짓밟혀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경을 두 번이나
함락시키지 못한 동관은 패전의 죄를 받을까 두려워 금에게 돈을 주고 연경을 함락시키고자 합니다.
금나라 아골타는 다시 1122년 12월에 연경을 직접 함락하는데 이때도 송에서 사신 조양사
와 마확이 왔는데, 아골타는 송에게 어찌 그리 대군을 이끌고도 질 수가 있느냐?
너희는 군법이 없느냐? 라고 묻고는 1~2일 사이에 우리는 관문에 도착할
것이니, 너는 우리 금나라의 전투하는 모습을 잘 살펴보라, 도망하는 자가 있는가 말이다.
금군이 요나라 수도 연경을 함락한후 동관이 막대한 세폐를 금나라에 바치고 저 연운 16주 중에 6주를
얻자, 휘종은 동관을 왕에 봉작합니다. 방랍(方臘, 요나라)이 비록 평정되었지만, 이어 북벌지역
(北伐之役 : 금) 이 마침내 일어났다. 이미 연 산(燕山)을 회복한 공 (功) 으로써, 절월 (節鉞)
을 풀고, 동관을 진삼공(真三公)으로 삼았으며, 서(徐)와 예(豫)의 양국(兩國)을 가봉(加封) 하였다.
연지역을 회복한 공으로 동관은 왕에 책봉되었으나, 곧이어 금이 요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붙치자
연운의 나머지 지역도 회복할 요량으로 동관이 요나라 천조제를 송에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이를 알고 분노한 금 태종 오걸매는 곧장 송을 공격하여 개봉을 두 차례
포위하고 함락시킨후 휘종과 흠종에 황족을 모두 끌고 가니 결국 북송은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여진 문자는 금 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며 한자 사용을 더 선호
했으니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고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 합니다.
‘송사전 금 열전’ 에 초창기인 금 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훗날 1150년에는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습니다.
문화 수준이 낮은데 불과 12년이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 여진족이 한족
(漢族) 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고,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
가면서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뀌면서, 적응을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납니다.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에는 금의 국세가 기울게 되고 게다가 이때 최강인
몽골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금나라는 방위비를 많이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하니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한지라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뒷날 누르하치가 후금(청)을 세운 것처럼, "금" 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으니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에서 '아이신' 은 금, 기오로는 '씨(氏)' 를 뜻하니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를 뜻하고, 愛新覺羅 가 "新羅 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 말을 섞어놓은 것이라는데 맞지 않습니다.
여진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으니 여진 문자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사용했으며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한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금나라는 건국한지 불과 12년 만에 요와 북송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장악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 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짙었으니,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며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고 황족과 귀족의 의복이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다든가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십수년만에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니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입니다.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며 사라졌는데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으며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으며 한문학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취했습니다.
백두산(장백산) 은 BC 2세기에 편찬된 중국 책 山海經(산해경)에 不咸山(불함산)으로 기록된
후.... 한나라 시대에는 개마대산,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태백산과 도태산으로
이후 백산, 삼신산으로 불리다가 금나라 때는 영웅산을 거쳐 長白山(장백산)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는 여진어로 "골민샹기얀알린 (Golmin Šanggiyan Alin)" 곧 궤리만싸에아린 (果勤敏瑢廷阿林)
을 한자어로 옮기니.... 큰흰산 (태백산) 또는 긴흰산 (長白山 장백산) 으로 기록된 것 입니다.
백두산(白頭山) 이라는 지명은 고려중엽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전혀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당시 수도인 국내성에서 백두산이 너무 먼 거리이니,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는 국내성 앞 압록강변의 산 중턱에 자리한 큰 동굴(大穴)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백두산” 이란 이름은 1135년 묘청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며 쓴 "호국영산" 이란 구절이
백두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1285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나오는 "태백산(太白山)"
을 백두산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정작 일연은 각주에서 "태백산을 묘향산" 이라고 적었습니다.
인터넷에 삼국유사 원문이 올려져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3 탑상 (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
(臺山五萬眞身) 에 “留二十日乃還<五臺山>此山乃<白頭山>之大脉,各臺眞身
常住之地.” 이라고 나오니... “이 산(五臺山 오대산) 은 곧 백두산(白頭山) 의 큰 줄기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에서 “백두산” 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입니다.
두번째는 1396년 조선 개국후 정도전과 조준이 편찬한 "고려사" 에 "白頭山(백두산)" 이라는 이름이 나오니,
“성종 10년 991년 10월 왕이 서도에 갔으며 압록강 바깥에 사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
거기서 살게 했다.” 이며 그외에도 “有名虎景者....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 이름이 호경(虎景)
이라는 사람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러...” 라고 나옵니다.
고려사에는 “玉龍記云,‘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옥룡기(玉龍記) 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지형지세) 는
백두산 (白頭山) 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라고 언급되며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에 “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 “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정상에 큰 못( 大澤) 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이 보인다.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나라를 세우자 자기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백두산)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에 제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로 이름(존호)을 지어 올립니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지신" 이라
부르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족
들은 장백산 (長白山) 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 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낸다"
라고 적었으며 그 전에 우무나의 장백산 탐사보고에 의하면 어허너연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등정 했습니다.
금나라가 몰골에 망하고 그 몽골은 다시 주원장의 명나라에 망한후 저 여진족들은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임진왜란 과정에서 성장한 누르하치는 1583년 거병해 30여년전쟁을 통하여 후금(훗날 청나라) 을 동서로는
동해로 부터 요변(遼邊) 에 이르기까지요, 북으로는 몽골 눈강(嫩江) 까지, 남으로는 조선의 압록강까지 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