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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와 촛불 사이, 그 불교적 개입 / 유승무 | ||||
특집 | 촛불 이후, 한국사회와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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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특유의 불평등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1. 들어가는 말 그러나 내 생각이 ‘유의미한 변화를 관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는 순간, 새로운 착상이 떠올랐다. 이론적 차원에서 볼 때 변화를 상징하는 불꽃은 항상 구조를 상징하는 나무와 연동될 수밖에 없는바, 촛불이 가져온 변화 정도(혹은 한계)는 현 단계 한국사회 특유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촛불의 변화 요구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구조적 요인 및 그와 연동된 마음의 습속(한국 특유의 정경유착과 그 마음의 습속)을 밝혀보고, 바로 그 지점에서 불교의 개입 여지를 탐색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런 추론 혹은 가설을 바탕으로 원고청탁을 최종적으로 수용했다. 매우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바로 그 찰나부터 ‘어떻게?’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촛불과 사회변동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미 최근의 다른 논문을 통해 한국사회 특유의 불의(不義)의 마음문화와 촛불 사이의 관계를 실증한 바 있기 때문에 이 과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촛불과 한국 특유의 불의 사이의 구조적 관계나 공진화의 정도를 실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두 가지 단계 즉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의한 불평등구조를 살펴본 다음 그것이 촛불 이후 어떠한 변화(혹은 변화의 압력)을 겪었는지를 실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 작업도 의외로 쉽게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선 필자는 촛불 이전 한국의 사회 불평등 문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바 있기 때문에 별도의 실증작업이 필요 없기도 하거니와 촛불 이후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사건이란 이재용의 재판을 가리키는데, 그 재판에서는 한국 특유의 정경유착 구조와 그 마음의 습성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수반될 것이고, 그 사건이 촛불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론은 그 판결 전후를 대서특필할 것이었다. 또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는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쟁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실들만으로도 실증에 필요한 자료는 충분한 데다가 자료수집의 수고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상과 같은 나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잘 입증하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입증의 성공 여부에 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리라. 〈그림 1〉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16년 12월 9일부터 2017년 2월 5일까지 구글 트렌드 서비스를 이용해 ‘마음’ ‘촛불’ ‘태극기’라는 세 단어의 검색 빈도 추이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한편 〈표 1〉은 세 단어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촛불’과 ‘마음’의 상관계수는 0.77로 높은 편이고,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마음’과 ‘태극기’, ‘촛불’과 ‘태극기’ 사이의 통계적인 상관관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 1〉과 〈표 1〉은 모두 촛불집회라는 정치적 성격의 사회운동과 마음이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통치자 혹은 통치자의 정치 위에는 국민 혹은 백성의 민심이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저항적 민심이 한국의 정치사회질서 변동을 추동하는 에너지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것을 한국사회운동 특유의 ‘불의의 프레임(injustice frame)’이라 명명한다. 그러면 이러한 불의의 프레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증해 보자. 이를 실증하기 위해 여기서는 중대한 사회 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긴급한 조치(대통령 탄핵이나 하야 등)를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분석에 사용한 자료는 2016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현대 한국사회의 사회적 동원 능력을 갖춘 조직이나 단체, 즉 노조, 종교단체, 학생회, 교수회, 각종 직능단체, 정치사회단체, 사회원로 등이 발표한 89건의 시국선언문이다. 첫째, 글의 구조는 대체로 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부끄러움과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고, 이어서 구체적인 불의를 나열하면서 비판한 다음, 자신들의 결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생인 우리는 앞선 정유라 특혜 의혹에 분개한다. ……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생이 각고의 노력으로 입시경쟁의 문턱을 넘어 대학에 입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입학하는 특혜를 누렸다. 고등학교 시절 130일 넘게 결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업 수준 미달에도 부당하게 학점을 취득하였으며, 이를 위해 대학본부와 교수, 교육부까지 동원하였다.(서울과학기술대학교 총학생회, 2016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하여 약 30여 년간 그 맹위를 떨쳐 왔다. 이러한 변화는 늦어도 1960년대 이후 국가를 중심으로 한 동원적 발전국가모델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상정하여 국부와 시장을 인위적으로 키워왔던 한국의 경제모델에는 매우 낯선 경제체제였다. 소위 ‘1987년 체제’의 등장과 함께 시장의 자율성과 정치의 민주화가 양립할 수 있다는 인식과 경험이 조금씩 확산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시장의 자율성은 국가에 의해서 제한되었으며, 분배의 문제는 강력한 임금 및 물가 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7/98년 외환위기의 발발과 함께 IMF에 의해 강제된 구조조정은 비로소 국내에서 시장의 자율성에 기초한 소득의 불평등이 오히려 시장경쟁력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동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공리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는 자못 혹독하여 GDP 2만 달러와 교역량 기준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양극화는 오늘날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촛불 이전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가 이명박 정권의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책과 박근혜 정부의 계승으로 이어졌다. 이는 촛불 이전 한국사회 내부의 불평등구조가 지속적으로 심화하여 왔음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제일성은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한나라당은 집권 이전의 국민 · 참여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이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자주 묘사하였던바, 집권과 동시에 정부는 그 상실의 대상이 결국 대기업과 부유층이었다고 명료하게 공표한 셈이다. 따라서 지난 2년간의 정부 정책은 운명적으로 계층 간의 이익을 양극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경제를 제대로 살려보겠다는 정부의 정책적 디딤돌은 기업과 자산자본가 친화적 정책이 사회 전반적인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가져오리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에 기초한 규제 완화와 감세였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이미 2008년에 발발한 세계경제 위기로 인해 그 실효성이 부정된 신자유주의 핵심 공리였으나, 정부의 정책적 방향은 자신이 표방한 실용주의와는 무관하게 이 공리를 이념적으로 계승하였다. 대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는 무엇보다 공정거래법 개정 시도, 금융지주회사법, 자본시장통합법 등으로 압축된다. 우선 공정거래법 개정은 1997년 경제위기의 주범이었던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과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를 제한해왔던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실질적으로 폐지하고,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정부는 법 개정의 명분으로 경제활성화를 내세웠지만, 순환출자가 기업투자로 이어지지 않으며, 이는 과거에도 보았듯 지배주주의 지배력 강화에만 기여할 것이 자명하다. 특히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제한하고, 지주회사가 비계열사 주식을 5% 초과해서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폐지함으로써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할 소지가 더욱 커졌다.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의 다른 한 축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의 경계를 허무는 금융지주회사법이다. 이로써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증권 및 보험사 등 비은행지주회사가 제조업체를 자회사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금산분리의 경계가 허물어져 재벌에 의한 은행의 사금고화와 경제력 집중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 자본시장통합법은 증권, 자산운용, 선물, 신탁업 등으로 나뉘었던 자본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금융업종 간 구분과 각종 금융규제를 풀어서 금융투자회사가 은행과 보험업을 제외한 자본시장 내 모든 업종을 겸업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법은 자본시장의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보다 공격적인 방식으로 특화한 것으로, 정부의 법안으로 인해 금융시장의 안정성(투자자 보호장치의 부실)을 훼손할 위험이 증가하였다. 한편, 고소득층과 자산자본가들을 위한 감세 조치는 파격적으로 이루어졌다. 2008년 세제개편안에 의하면 종합소득세와 상속세 등 대부분의 부유층이 내는 세금과 대기업이 주로 부담하는 법인세를 중심으로 2012년까지 5년간 26조 4천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세금감면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세제개편안은 특히 소득세 2%p, 양도세 3%p, 법인세 최대 5%p, 상속세 최대 17%p 인하를 담고 있는데, 실질적인 혜택은 연소득 1억 원 이상, 상속재산 30억 원 이상의 부유층(0.7%의 최상위층 국민)과 0.126%의 대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종합선물세트에 불과하였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진짜 서민과 중소기업,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적 대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책이었다. 2009년 세제개편안은 2008년 추진된 부자감세 결손분 90조 원(국회예산정책처 ‘2008년 이후 세제개편의 세수효과’ 보고서)에 대한 아무런 재고 없이 임시방편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이 같은 두 차례에 걸친 세제개편안은 감세정책이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가 날 것이라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이념을 답습한 것으로 경기진작 효과보다는 재정만 축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내각이라는 비난이 허명이 아니듯 이명박 정부는 28만 명의 부자(2008년 국토해양부 자료에 의하면 6억 원 초과 주택보유자는 총 28만 6,343가구)를 위해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 원 초과에서 9억 원 초과로 상향 조정하고, 종부세율도 0.5%~1%로 대폭 낮추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전인 2008년 2월 인수위원회에서 ‘능동적 복지’라는 국정과제를 제시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중산층과 서민들에 대한 사회정책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의 대척점에 서 있다. 무엇보다 실질복지비용 지출이 이전 노무현 정부보다 늘어나지 않았다.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할 때 2008년의 67조 6,500여억 원에 비해 73조 7천여억 원으로 9%가량 증가하였으나(동일 시기 정부 전체 지출규모는 6.5% 증가), 복지비용 증가분에서 국민연금, 노령연금 등 자연증가분(4조 5천여억 원)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 증가액은 1조 786억 원으로 전년 대비 1.6% 증가한 것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신규 복지사업 증가분의 대부분은 경제위기에 따른 긴급지원사업에 불과하였다. 특히 빈곤층을 지원하는 예산과 최저생계비의 실질적인 감소가 두드러졌다. 일례로 2009년 4월 국회의 추가경정예산안 심의과정에서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1조 4,401억 원 추경안 중 1,200억여 원 삭감됨에 따라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긴급복지 예산이 각각 3분의 1씩 줄어들게 되었으며, 2010년 최저생계비 심의과정에서 4인 기준 최저생계비를 1,363,091원으로 정해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2.75%만 인상되었을 뿐이었다. 이명박 정부 복지정책의 큰 특색은 소위 복지의 ‘산업화’ 전략으로 정부의 경제살리기 전략에 복지부처가 동원되어 화장품산업 선진화, 의료기기산업 선진화, 해외환자유치 선진화, 첨단의료복합산업 추진 등을 추진하고, 오히려 주 업무인 공공복지, 사회서비스 제공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복지의 산업화 전략은 국민연금의 시장화, 의료영리화 정책 등에서 그보다 노골화되었다. 국민연금은 2008년 경제위기로 무너진 주식시장을 되살리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으며(2008년만 19조 원의 손실 기록), 시민생활의 노후를 일부 기업 및 주식투자자들의 이익과 맞바꾸는 위험한 도박이 지속되었다. 한편, 의료영리화 정책 추진(외국인 환자유치, 의료법인 간 합병절차 신설, 부대사업 범위의 보건복지가족부령 위임조항 등)은 의료의 공공성을 무시하는 정책이다. 이 법안에 포함된 ‘누구든지’ 유인 · 알선행위를 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보험업자가 이 같은 행위를 하게 될 경우에 추후 ‘국내의료기관-민영보험회사’의 조합(영리추구의 심화)이 등장할 우려가 있으며, 의료법인 합병절차는 자본을 소유한 대형병원에 의한 소형병원의 몰락, 병원의 대형화로 이어져 의료의 접근성 저하와 건강보험 재정악화가 예상된다. 전반적으로 경제제일주의의 기치 아래 시행된 이명박 정부의 경제 및 사회정책은 계층 간의 이익 양극화를 확대 ·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년간 정부의 각종 세제개편안과 복지정책을 비교해 보면 한편으로는 부자들과 대기업을 위한 감세정책,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서민계층만을 위한 선별주의적 복지정책과 복지의 산업화를 특징으로 하였다. 촛불은 이러한 정책 기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일종의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나 촛불만으로 기존의 사회구조가 쉽사리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촛불이 몰고 오는 변화의 에너지(혹은 사회적 압력)와 기존 구조에서 솟아 나오는 저항의 에너지가 날카롭게 충돌할 것이라는 관측이 현실적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재용 재판의 사례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확인해 보고자 한다. 2017년 8월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5개 혐의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 저널을 대표하는 신문 〈한겨레〉의 사설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렇게 볼 때, 촛불로 인하여 기업 친화 일변도의 정책에 다소의 제동이 걸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를 완화하는 결과로 곧바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마음의 습속이 유지되는 한 한국사회의 불평등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흔히 사람들은 불교가 경제정책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초기경전에서 빈곤을 최소화하기 위해 왕(최고 통치자)이 어떤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이상의 논의를 볼 때, 사회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불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경제활동의 우선성은 이윤추구의 극대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의 만족에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생산활동(의 목적)도 거기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생산 과정 그 자체도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는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에게까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소비활동도 모든 사람의 총복지에도 공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적 경제 논리가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개인적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인간에게는 다른 존재에게 궁극적인 손해를 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위를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앞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정책적 개입과 관련된 불교의 입장을 살펴보았지만, 불평등에 대한 불교적 처방전의 방점은 행위자의 마음가짐이나 마음의 습속에 놓여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경전은 행위자 자신의 마음가짐 혹은 마음의 습속에 따라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도 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경전에 따르면, 붓다는 파세나디 왕에게 궁극적으로 네 가지 계급의 사람들 즉 첫 번째 부류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사람, 두 번째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밝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 세 번째는 밝은 곳에 있으면서 어두움 속으로 움직이는 사람, 네 번째는 밝은 곳에 있으면서 밝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첫 번째 유형은 낮은 지위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상향이동을, 세 번째는 하향이동을, 네 번째는 높은 지위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이동을 낳은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자 자신의 업 즉 마음과 실천의 결과이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는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법제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차별금지법을 약속한 바도 있지만,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차별금지법을 누락시킴으로써 법 제정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처사는 마치 좌측 깜빡이를 켜놓고 우회전을 하는 것처럼 국민을 당혹스럽고 실망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부정의에 저항하였던 촛불의 의미와 염원에도 반하는 처사다. 이렇게 볼 때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법제적 노력을 가름하는 가늠자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갑질문화의 사회심리적 근원을 밝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마음문화를 좀 더 풍요롭게 가꾸어가도록 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요구한다. 특히 평등과 평화의 사상을 내면화하는 것이야말로,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유승무 |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