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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秋 戰 國 時 代
吳(오)나라
동주시대, 춘추시대에 장강 하류에 존재했던 국가. 초반에는 工吳(공오), 句吳(구오)와 같
은 명칭으로 불렀다. 사기 권 30 오태백세가에 의하면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과 차남
중옹이 삼남 季歷(계력, 주 문왕의 아버지)에게 제후의 자리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국가이다. 태백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 없어 중옹이 뒤를 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
를 이었다고 한다. 무왕(주나라)은 큰 할아버지 태백과 작은 할아버지 중옹의 자손을 찾
다가 마침내 중옹의 자손인 周章(주장)을 찾아내 그를 오에 정식으로 봉하고, 주장의 아
우 虞仲(우중)은 虞(우)나라에 봉했다고 한다.
春秋時代(춘추시대) BC, 6세기이전〜BC, 473 위치 江蘇省(강소성) 성 姬(희) 작위 후작
| 대수 | 재위기간 | 위 | 휘 | 관계 | 수도 | 현재지명 |
| 제1대 | 太伯(태백) | 姑蘇 | 江蘇省 蘇州 | |||
| 제2대 | 仲雍(중옹) | 태백의 동생 | 고소 | 강소성 소주 | ||
| 제3대 | 季簡(계간) | 중옹의 아들 | ||||
| 제4대 | 叔達(숙달) | 계간의 아들 | ||||
| 제5대 | 周章(주장) | 숙달의 아들 | ||||
| 제6대 | 熊遂(웅수) | 주장의 아들 | ||||
| 제7대 | 柯相(가상) | 웅수의 아들 | ||||
| 제8대 | 疆鳩夷(강구이) | 가상의 아들 | ||||
| 제9대 | 여교의오(여교의오) | 강구이 아들 | ||||
| 제10대 | 柯盧(가로) | 여교의오 자 | ||||
| 제11대 | 周繇(주요) | 가로의 아들 | ||||
| 제12대 | 屈羽(굴우) | 주요의 아들 | ||||
| 제13대 | 夷吾(이오) | 굴우의 아들 | ||||
| 제14대 | 禽處(금처) | 이오의 아들 | ||||
| 제15대 | 轉(전 | 금처의 아들 | ||||
| 제16대 | 頗高(파고) | 전의 아들 | ||||
| 제17대 | 句卑(구비) | 파고의 아들 | ||||
| 제18대 | 去齊(거제) | 구비의 아들 | ||||
| 제19대 | BC, 585〜BC, 561 | 吳王(오왕) | 壽夢(수몽) | 거제의 아들 | ||
| 제20대 | BC, 560〜BC, 548 | 諸樊(제번) | 수몽의 아들 | |||
| 제21대 | BC, 547〜BC, 544 | 余祭(여제) | 제번의 동생 | |||
| 제22대 | BC, 543〜BC, 527 | 余昧(여매) | 여제의 동생 | |||
| 제23대 | BC, 526〜BC, 515 | 僚(요) | 수몽의 서장자 | |||
| 제24대 | BC, 514〜BC, 496 | 闔閭(합려) | 제번의 아들 | |||
| 제25대 | BC, 495〜BC, 473 | 夫差(부차) | 합려의 아들 |
周 太王 古公亶父(주 태왕 고공단보) 에게는 아들이 셋 있는데 長子(장자)가 太伯(태백),
次子 仲雍(중옹)이고 막내가 季歷(계력)이다. 그 중 계력이 가장 덕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
나 고공단보가 계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태백과 중옹은 荊蠻(형만)으로 달아나 만이
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들의 주장이 되었다.
태백이 죽자 후사가 없어 그의 동생인 중옹이 뒤를 이었다. 후에 계략은 창을 낳고 창
은 무왕을 낳아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주 왕조를 세운 후에 태백과 중옹의 자손을 찾
았으나 주장은 이미 오나라의 군주라 그를 오 땅에 봉하고 이어 주장인 우중을 주나라
도성 북쪽에 위치한 옛 하나라의 도읍지에 봉했다. 그것이 虞(우)나라다.
한편 강소성의 오나라는 태백의 19대손인 수몽에 이르러 초나라의 망명객인 申公 巫臣
(신공 무신)이 당진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오나라에 와서 중원의 용병술과 전차전을 전수
하여 주고 다시 무신의 아들인 굴호영이 행인이라는 관직으로 오나라에 살면서 중원의
문물을 전해주어 오나라는 중원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제1대 태백(BC, ?〜BC, ?) 주나라의 사실상 시조인 고공단보의 아들, 중옹의 형
그는 고공단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고공단보에게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태백,
둘째가 중옹, 셋째는 계력이었다. 태백과 중옹은 계력이 자신보다 유능한 것을 알고
태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중옹과 함께 오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오나라의 시조가 되
었다. 그에게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인 중옹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제2대 중옹(BC, ?〜BC, ?) 태백의 동생이며 고공단보의 아들이고 계력의 형이다.
일명 吳仲(오중), 虞仲(우중)이라고도 한다. 아버지 고공단보는 손자 창(창)이 태어나는
것을 보자 그의 잠재력을 예견했는지 창의 아버지인 삼남 계력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
다. 그것을 눈치챈 태백과 중옹은 자신들이 먼저 떠나기로 결심, 남하하여 衡山(형산)
에 정착해 오나라를 세웠다. 나중에 계력이 형들을 도로 불러오려 했는데, 이를 전해
들은 두 사람은 온몸에 문신을 들였다. 형 태백을 군주로 추대했는데, 태백이 후사 없
이 죽어서 그 뒤를 이었다. 준옹은 아들인 계간에게 나라를 물려주었고 중옹의 후손들
이 계속 오나라를 통치하게 되며, 현존하는 모든 오씨들은 그를 시조로 인식하고 있다.
제3대 계간(BC, ?〜BC, ?) 중옹의 아들이며 고공단보의 손자이며 숙달의 아버지다.
아버지 중옹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오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계간이 죽고 숙달이 뒤를
이었다.
제4대 숙달(BC, ?〜BC, ?) 계간의 아들이며 주장의 아버지다.
아버지 계간이 죽고 그 아들인 숙달이 뒤를 이었다. 숙달이 죽고 그 아들인 주장이 뒤
를 이었다.
제5대 주장(BC, ?〜BC, ?) 西主(서주)시대의 오나라 군주. 숙달의 아들
바로 이 시기에 주나라에 남아있던 7촌 아저씨 發(발)이 상나라를 정복하고 중국의 패
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요충지에 자신의 친족이나 공신을 배치해 다스리게
했다. 당연히 태백, 중옹의 적손인 주장도 분봉의 대상이 되어, 주장의 동생인 虞仲(우
중) 은 주나라 근처에 있는 憂(우)나라를 받았다. 주장이 죽은 뒤에는 아들인 웅수가 뒤
를 이었다.
제6대 웅수(BC, ?〜BC, ?) 주장의 아들이며 가상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주장이 죽고 그 아들인 웅수기 뒤를 이었다. 웅수가 죽고 그 아들인 가상이
뒤를 이었다.
제7대 가상(BC, ?〜BC, ?) 웅수의 아들이며 강구이의 아버지다.
아버지 웅수가 죽고 그 아들인 가상이 뒤를 이었다. 가상이 죽고 강구이가 그 뒤를 이
었다.
제8대 강구이(BC, ?〜BC, ?) 가상의 아들이며 여교의오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가상이 죽고 그 아들인 강구이가 뒤를 이었다. 강구이가 죽고 그 아들인 강구
이가 뒤를 이었다.
제9대 여교의오(BC, ?〜BC, ?) 강구이의 아들이며, 가로의 아버지다.
여교의오는 오나라 왕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실 계통을
이해라는 데 참고가 되는 인물입니다. 별도의 업적이나 주요 사건에 대한 추가 정보는
없습니다. 가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제10대 가로(BC, ?〜BC, ?) 여교의오의 아들이며, 주요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여교의오가 죽고 그 아들 가로가 뒤를 이었다. 가로가 죽고 그 아들인 주요
가 뒤를 이었다.
제11대 주요(BC, ?〜BC, ?) 가로의 아들이며, 굴우의 아버지.
아버지인 가로가 죽고 그 아들인 주요가 뒤를 이었다. 주요가 죽고 그 아들인 굴우가
뒤를 이었다.
제12대 굴우(BC, ?〜BC, ?) 주요의 아들이며 이오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주요가 죽고 그 아들인 굴우가 뒤를 이었다. 굴우가 죽고 그 아들인 이오가
뒤를 이었다.
제13대 이오(BC, ?〜BC, ?) 굴우의 아들이며, 금처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굴우가 죽고 그 아들인 이오가 뒤를 이었다. 이오가 죽고 그 아들인 금처가
뒤를 이었다.
제14대 금처(BC. ?∼BC. ?) 이오의 아들, 전의 아버지다.
아버지인 이오가 죽고 그 아들인 금처가 뒤를 이었다. 금처가 죽고 그 아들인 전이 뒤
를 이었다.
제15대 전(BC, ?〜BC, ?) 금처의 아들, 파고의 아버지.
아버지인 금처가 죽고 그 아들인 전이 뒤를 이었다. 전이 죽고 그 아들인 파고가 뒤를
이었다.
제16대 파고(BC, ?〜BC, ?) 전의 아들, 구비의 아버지.
아버지인 전이 죽고 그 아들이인 파고가 뒤를 이었다. 파고가 죽자 그 아들인 구비가
뒤를 이었다.
제17대 구비(BC, ?〜BC, ?) 파고의 아들, 거제의 아버지며 오왕 수몽의 할아버지다.
아버지인 파고가 죽고 그 아들인 구비가 뒤를 이었다. 당시 晉 獻公(진 헌공)이 오나
라의 친척 국가인 우나라에 길을 빌어 西虢(서괵)을 멸하고 길을 빌려준 우나라 또한
멸망시켜 버린 假道滅虢(가도멸괵) 사간이 일어났다. 구비가 죽고 거제가 뒤를 이었다.
제18대 거제(BC. ?∼BC. ?) 그비의 아들, 오왕 수몽의 아버지.
아버지인 구비가 죽고 그 아들인 거제가 뒤를 이었다. 거제가 죽고 그 아들인 수몽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오나라에서 최초로 칭왕한 오왕 수몽이었다.
제19대 수몽(BC. ?∼ BC. 561) 제번. 여제. 여매. 계찰의 아버지다.
거제 36년(기원전 586년), 거제가 죽자 수몽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나라를 잘 다스려
국력이 증대되어 오왕 수몽 대에는 대단히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수몽 원년(기원전 58
5년) 오나라 왕 수몽은 周(주)나라에 입조해 간왕에게 하사품을 받았다.
수몽 2년(기원전 584년)봄, 수몽이 郯(담)나라를 치니 담나라는 오나라에 강화를 청했다.
같은 해 초나라의 대부 신공 무신이 초왕 자반에게 한을 품고 晉(진)나라로 달아나 晉
景公(진 경공)을 섬겼는데 그가 진 경공에게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오나라를 키워
줘야 한다고 권했고 진 경공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오나라를 키워주고자 무신을 오나라
에 출사시켰다. 그리고 오나라에 전차전을 하는 법과 중원의 선진 문물을 전수했다. 그
리하여 오나라의 국력은 날로날로 신장되었다. 오왕 수몽 3년(기원전 583년), 겨울 진
경공은 패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담나라가 오나라와 화친한 것을 알고, 晉(진)나라,
노나라, 제나라, 邾(주)나라 4국이 담나라를 쳤다. 오왕 수몽 5년(기원전 581년), 오나라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의 장군 지반을 물리쳤다. 오왕 수몽 10년(기원전 576), 11월 오
나라는 노나라, 晉(진)나라, 齊(제)나라, 宋(송)나라, 衛(위)나라, 정나라와 중지에서 회맹
했다. 오왕 수몽 12년(기원전 574년), 서나라, 용나라. 사람이 초나라에게 포위당해 패하
자 오나라가 소나라를 포위했다. 이때 초나라는 서나라와 용나라를 멸했다. 오왕 16년
(기원전 570년) 봄, 초 공왕은 자중을 파견해 오나라를 쳤다. 초군은 구자 땅에서 승리
했다. 그러나 형산에서의 격렬한 저항으로 자중은 패배하였다. 이에 초 공왕은 자중을
책망해 분사시켰다. 오왕 18년(기원전 568년), 오왕 수몽은 晉(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
호를 다졌다. 같은 해 9월 23일 오왕 수몽은 사자를 파견해 노나라, 晉(진)나라, 송나라,
陳(진나라), 위나라, 정나라, 제나라와 척 땅에서 회맹했다. 오왕 수왕 23년(기원전 563년
봄 노 양공, 晉 悼公(진 도공), 조 성공, 제나라 태자 광이 柤(사) 땅에서 회맹했다.
오왕 수몽 25년(기원전 561년), 장남 제번. 차남 여제. 3남 이매. 4남 계찰을 불러 순서
대로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문제는 계찰이 왕위에 대하여 욕심이 없었던게
문제였다. 생전 수몽은 계찰의 영민함에 감탄하여 자신 사후 계찰에게 왕위를 주고 싶
어 했고 장남인 제번 뿐 아니라 다른 두 아들들도 계찰이면 왕의 재목이다 싶어 왕위
계승권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계찰은 왕위에 미련이 없어 명목상 장자 계승권이 우선
이라 했으니 큰 형 제번은 어떻게든 부왕의 유언을 지키고자 형제계승법을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삼남 이매 이후 사람들이 계승자인 계찰에게 가서 권유함에도 기어이 계
찰은 계승식 전날, 진나라로 가서 새 장가를 든 뒤 조용히 살아갔다.
제20대 제번(BC. ?∼BC. 548) 수몽의 아들, 여제, 여매, 계찰의 형, 합려의 아버지.
오왕 제번 원년(기원전 560년), 제번은 아우인 계찰에게 군주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제번 13년(기원전 548년), 舒鳩國(서구국)이 초나라를 배신하고 오나라를
따르자 초 강왕은 영윤 굴건을 보내 오나라와 서구국을 치게했다. 오군이 패해 포로로
잡힌 사람이 적지 않았다. 8월 초나라가 서구국을 멸망시켰다. 12월 초나라의 부용국
소나라를 쳤는데, 그 도성을 치다가 오왕 제번이 죽자 그 유언대로 여제가 뒤를 이었다.
제21대 여제(BC. ?∼BC. 544) 수몽의 아들, 제번의 동생, 여매, 계찰의 형이다.
여제 3년(기원전 545년), 제나라의 상국 慶封(경봉)이 죄를 짓고 오나라로 오자 그를 받
아들여 봉읍을 주었다. 그런데 초 영왕이 그것을 핑계로 오나라 주. 역. 마 3개성을 쳤
다. 예제 4년(기원전 544년) 아우 季札(계찰)을 노나라에 보내 거기서 음악을 들었다.
이때 여제가 죽어 그 동생인 여매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여제는 상나라 때부터 내려오
던 풍습에 따라 월나라 포로의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가한 후 배를 지키는 노예로 썼
다. 이후 이 노예가 배를 보러온 여제를 죽였다고 한다.
제22대 여매(BC. ?∼BC. 527) 수몽의 아들, 제번, 여제의 동생, 계찰의 형
여매 6년(기원전 538년), 초 영왕이 경봉을 죽였다. 여매 7년(기원전 537년), 초나라가
오나라의 雩婁(우루)에 이르렀다. 여매 8년(기원전 536년), 초나라가 오나라를 쳐서
乾谿(건계)에 주둔했으나 오군에게 패했다. 오왕 여매 17년(기원전 527년), 여매가 무거
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중원의 문화를 배우러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은 달아나면서 거절해서 어쩔 수 없어 아들인 주우에게 물려주니
그가 오왕 료다.
제23대 료(BC. ?∼BC. 515) 여매의 아들, 경기의 아버지, 합려의 사촌 동생이다.
오왕 여매가 죽으면서 아버지 오왕 수몽의 유언대로 계찰을 세우려 했으나 계찰이 끝끝
내 거절하면서 달아났다. 이에 여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들인 료를 왕으로 세웠다.
그간 오왕의 계승위는 형제순으로 이어졌으므로 맏형 제번의 아들 광이 유력했으나 여
매의 아들 료가 왕이 됨으로써 왕위 쟁탈전의 씨앗이 탄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왕 료 2년(기원전 525년), 오왕 료는 공자 광에게 초나라를 치게했다. 그러나 패해
배를 잃었다. 그러나 공자 광이 꾀를 써서 초나라 군대를 기습해 배를 되찾아 돌아왔다.
오왕 료 5년(기원전 522년), 초나라에서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공자 광에게
의탁하니 공자 광은 상빈으로 대우했다. 그리고 공자 광은 원래 자신에게 왕위가 돌아
가야 한다면서 유능한 선비를 맞아들이며 오왕 료를 처치하고 왕이 될 야심을 품었다.
오왕 료 8년(기원전 519년), 오왕 료가 공자 광과 함께 초나라를 쳤다. 이때 초나라는 7
개국이 연합한 대군이었지만 영윤 약개가 죽어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오왕 료가 공
자 광의 계책을 채택하여 초군을 크게 이기고 태자 건의 가족을 郹(격)에서 오나라로 옮
겼다. 그리고 陳(진)나라와 채나라를 쳤다. 오왕 료 9년(기원전 518년), 초나라 비량읍의
처녀와 오나라의 변경 읍의 처녀가 뽕나무를 가지고 다투어 초나라가 오나라의 변경을
치니 오왕 료가 크게 노해 공자 광을 보내 초나라를 치게 해 거소와 종리 땅을 빼앗았
다. 오왕 료 12년(기원전 515년), 초 평왕이 죽었다. 이에 오왕 료는 공자 掩餘(엄여)와
燭庸(촉용)을 보내 유읍과 첨 땅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계찰을 晉(진)나라에 사신으
로 보냈다. 이때 공자 광은 오왕 료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공자
광은 오왕 료를 잔치에 초대했고 료가 참석한다. 공자 광은 오왕 료와 같이 식사하는
도중 자신은 다리를 다친척 하면서 숨고는 자객 專諸(전제)를 시켜 오왕 료에게 생선
구이를 바치게 했다. 그리고 專諸(전제, 오자서가 추천한 요리사)가 광에게 미리 지시
받은대로 생선 구이 요리 뱃속에 있는 어장검을 꺼내 요리를 먹으려던 오왕 료를 척
살했다. 이 여파로 전제는 근위병들에게 죽었지만 공자 광이 대기시켜놓은 군대로 공
격하여 그 근위병들을 쓸어버리거나 항복을 받아내고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
다. 그 아들 慶忌(경기)가 용맹하고 몸이 날랬다. 그래서 오왕 합려가 그를 두려워해
오자서가 추천한 요리를 시켜서 그를 척살하게 함으로써 오왕 료의 무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제24대 합려(BC. ?∼BC. 496) 오왕 여매의 아들이고 부차의 아버지다.
자객인 專諸(전제)와 함께 모의하여 왕인 요를 시해하고 오자서의 도움으로 즉위해 합려
라고 불린다. 한편 다른 두 공자인 燭庸(촉용)과 蓋余(개여)는 합려가 꾸민 것인줄 알고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 소왕은 그들을 舒(서)땅에 봉했다. 또한 손무를 등용하고 초나라
가 伯州犁(백주리)를 죽이자 그의 손자 伯嚭(백비)가 오나라로 망명하자 대부로 임명했
다. 오왕 합려 3년(기원전 512년), 오왕 합려는 오자서. 백비와 함께 초나라의 舒(서)
땅을 공격하여 초나라로 도망간 촉용과 개여를 죽였다. 오왕 합려 4년(기원전 511년),
초나라의 육과 첨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왕 합려 5년(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오왕 합려 6년(기원전 509년), 초나라의 영윤 囊瓦(낭와)가 오나
라를 침략하자, 오왕 합려는 이에 대응하여 豫章(예장) 땅에서 초나라 군을 물리치면서
초나라의 거소를 취하였다. 오왕 합려 7년(기원전 508년),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초나라 도성 영성을 공격할 수 있냐고 묻자 오자서와 손무는 초나라의 앙화가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서 당나라와 채나라가 원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이들 나라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합려는 군대를 크게 일으켜서 당과 채와 함
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漢水(한수)에 이르렀다. 초나라는 오군을 막기위해 한수에서 진
을쳤다. 오와 합려의 동생 夫槪(부개)가 합려에게 이 전투에 나서겠다고 하자, 합려는
부개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부개는 자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전세가 유
리한 상황인데 무엇을 기다리냐고 말하면서 5천의 병사로 초나라를 기습하여 대파하였
다. 이에 오왕 합려는 병사를 풀어서 초군을 쫓았고, 영성에 이를 때까지 초군을 다섯
번 격파하였다. 이 때문에 초 소왕은 鄖(운)땅으로 도망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영성에
도착했고,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서 그 시신에 채찍찔을 하여 굴묘편시라는
일화를 남겼다. 오왕 합려 10년(기원전 503년) 봄, 월나라가 오군이 초나라의 도읍인
영성에 있어서 오나라 땅에 군사가 없는 것을 알소는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오왕 합려
는 월나라 토벌군을 보냈다. 한편 초나라의 사신 신포서가 진나라로 가서 초나라가 위
급한 것을 알리자, 진나라는 군대를 초나라로 보내 오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진나라와
월나라가 동시에 오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에서 물러나게 되는 상황을 본 동생 부개는
오나라로 돌아와서 오왕이 되었다. 오왕 합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군대를 돌려
부개를 공격하였다, 부개가 대패하여 초나라로 도망갔다. 같은 해 9월 초 소왕은 영성
으로 돌아왔고, 부개가 초나라로 망명한 것을 알고는 그를 堂谿(당계)의 제후로 봉하였
고 부개는 씨를 堂谿氏(당계씨)로 바꾸웠다. 오왕 합려 11년(기원전 502년), 오왕 합려
는 태자 부차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명하였고, 부차는 초나라 番(번) 땅을 빼앗았다
초 소왕은 오나라의 공격으로 도읍을 영성에서 鄀(약)으로 천도하였다.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越王 勾踐(월왕 구
천)은 檇李(취리)라는 땅에서 오나라군을 맞이하여 싸웠다. 월나라 군이 오나라 군을 공
격하여 패배시키고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오나라 군대는 후퇴하였다. 오왕 합
려는 상처로 도져서 죽었다.
제25대 부차(BC. ?∼BC. 473) 오왕 합려의 아들이다. 마지막 왕이다.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 오왕 합려가 월나라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거
두었다. 태자였던 波(파)는 처를 잃고 요절해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오나라의 최고
실권자 였던 오자서의 지지로 부차가 옹립되었다.
오왕 부차 원년(기원전 495년), 대부 伯嚭(백비)를 太宰(태재)로 삼았다. 오나라 병사들
에게 훈련과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 하고 외
치게 하였다. 부차는 매일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늘 월나라에 복
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였다. 오왕 부차 2년(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는 아버지의 원
한을 갚기 위해서 정예병들을 모아서 월나라를 쳐들어갔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
으로 夫椒(부초)에서 월나라 왕 구천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월나라의 수도를 포위
했다. 싸움에서 크게 패한 월왕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會稽山(회계산)
에서 농성을 하였다. 그러다가 오나라의 공격을 못 견디고 대부 文種(문종)을 보내 오나
라의 태재 백비를 만나고 하고 그를 통해서 오왕 부차에게 화친을 요청하였다. 구천은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넘겨주고, 오나라의 신하와 노비가 되겠다고 하였다. 오왕 부차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자, 오자서가 지금 월나라를 멸해야 후환이 없어진다고 만류하였
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무시했다. 왕은 태재 백비를 통해서 월나라와의 화친을 받
아들이고 오나라 군대는 월나라에서 철수하였다. 포로가 되어서 오나라에 잡혀온 구천
이 부차의 건강을 살펴주고 미녀 서시. 鄭旦(정단)을 바치는 등 아첨하며 뇌물을 주자,
오왕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오왕 부차 7년(기원전 489
년), 제나라에서 제 경공이 죽고, 제나라의 대신들이 서로 싸우며, 뒤를 이은 제나라 군
주가 어리석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부차는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는데, 오자
서가 제나라 정벌에 대해서 간하였다. 오자서는 월왕 구천이 음식의 맛은 안보고, 옷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안 쓰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며 이를 이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오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고 간하였지만, 오왕 부
차는 오자서의 말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艾陵(애릉)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
고, 繒(증) 땅에 이르렀을 때 노나라의 군주 노 애공에게 제사용 가축을 무리하게 요구
하였다. 그러자 노나라의 季康子(계강자)가 자공을 사신으로 삼아 오나라로 보냈고, 자
공은 태재 백비를 만나서 주나라의 예법을 설명하면서, 이를 그만 둘 것을 설득해 오
나라 조정은 이를 그만 두었다. 오왕 부차 9년(기원전 487년), 오왕 부차는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노나라와 화친을 하였다. 오왕 부차 10년(기원전 486), 오왕 부차
는 오나라 로 돌아가는 길에 제나라를 공격했다. 오왕 부차 11년(기원전 485년), 월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어서 뇌물을 바치고 조회했다. 오왕 부차는 이를 기쁘했지만 오자
서는 오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면서 월나라는 오나라의 근심거리라고 간하였지만,
오왕 부차는 듣지않고, 오자신을 사신으로 삼아 제나라로 보낸다. 오자서는 아들을 제
나라의 대부 鮑氏(포씨)에게 의탁시켰고, 제나라는 오자서를 융숭하게 대접하여 돌려보
냈다. 이 사실을 안 부차는 결국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를 내려 자결을 명하고는 그 시
체를 장강에 던져 버렸다.
오왕 부차 13년(기원전 483년), 오왕 부차는 노나라와 衛(위)나라의 군주를 불러서 탁고
땅에서 회맹하였다. 오왕 부차 14년(기원전 482ㄴ녀) 봄 오왕 부차는 3만 대군을 이끌고
황지 당에서 제후들을 불러서 회맹하였다. 6월,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기습하여 태자 友
(우)를 포로로 잡았다. 어느 오나라 사람이 부차에게 패배한 사실을 알렸는데, 오왕 부차
는 월나라에게 패배한 일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어떤 이가 이를 발설하자,
부차는 이 일에 노하여 7명을 죽였다. 7월, 晉(진)나라의 군주 定公(정공)과 회맹했는데.
맹주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이때 궁지에 몰린 오나라가 3만 대군으로 대놓고 압박하자
진나라의 상정 趙鞅(조앙)이 吳王(오왕)의 칭호를 버리고 吳公(오공)이 된다면 패주로 인
정해주겠다고 제안하자 부차가 승낙했다. 이때부터 오나라는 월나라의 피로 전술에 휘
말려서 국력이 쇠락하게 된다. 오왕 부차 18년(기원전 478),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
하여 笠澤(입택) 땅에서 오나라 군을 물리쳤다. 오왕 부차 20년(기원전 476년), 월왕 구
천이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왕 부차 21년(기원전 475년), 월나라 군이 오나라의
도읍을 포위하였다. 오왕 부차 23년(기원전 473년), 11월 정묘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
망시켰다. 이때 오왕 부차가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구
천이 순간 망설였을 때 범려가 “쓸개를 핧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라
며 진언하여 사실상 결정을 내렸으나, 전에 자신을 살려준것도 있고 해서 명분상 직접
죽으라 할 수는 없었기에 백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일국의 왕에게 이런 제
안을 한다는 것은 사실 그냥 곱게 알아서 죽어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진짜 살려줄
생각이었으면 최소한 제후에 준하는 지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오왕 부차는 자신이 늙
어 군왕을 섬길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낮이 없다며 고소
산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 그 뒤 오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도변천
太伯(태백) 梅里(매리) 江蘇省 無錫 梅里(강소성 무석 매리
諸樊(제번) 姑蘇(고소) 江蘇省 蘇州市(강소성 소주시)
사료 출처
司馬遷의 史記世家(사마천의 사기세가)와 曾先之의 十八史略(증선지의 십팔사략)과
馮夢龍의 東周列國志(풍몽룡의 동주열국지)또한 司馬光의 資治通鑑 (사마광의 자치
통감) 그리고 左丘明의 春秋左傳(좌구명의 춘추좌전).
“吳 越 同 舟“
吳(오)나라 사람과 越(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탔다는 뜻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이해 때문에 뭉치는 경우를 말한다.
“臥 薪 嘗 膽“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디는 일을 가리
키는 故事成語(고사성어)다. 중국 춘추 시대 오나라 임금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의 임금 구천에게 복수할 것을 맹
세하였고, 그에게 패배한 월나라의 왕 구천이 쓸개를 핧으면서 복수를 다짐한 데
서 유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