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께 내가 뭐라고 했소. 남자 이야기 듣지 말고 여자 말 들으라고 안했소. 절대 손해는 없응께.”
금당과 금일을 오가는 뱃길이 노력도로 옮겨가면서 여객터미널이 감태작업장으로 변했다. 감태만 실고 나오면 된다는 이씨의 말에 사진이나 몇 컷 찍자 싶어 따라 나섰다 낭패를 겪었다. 썰물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배가 걸렸다.
감태를 매던 아주머니까지 붙어서 배를 밀어 보았지만 자연의 순리를 인간의 힘으로 막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시 물이 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감태 자라는 회진포는 ‘청정포구’
감태는 깨끗한 바다에서 자란다. 장흥이 매생이 산지라는 사실만으로 입증되었지만 감태밭을 보고 다시 확인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이것은 약비여. 며칠 있다 오먼 감태가 잔디밭 같을 것이여. 약비는 보리밭만 좋은 것이 아니어. 감태에도 좋아. 육수가 있어야 자라거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물어보지도 않는 말을 넋두리처럼 내뱉는다. 매생이라면 모를까, 회진포구에서 감태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감태는 신안의 안좌, 무안 해제, 충남 서천 지역에서 나온다.
하지만 회진감태의 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이씨의 자랑이다. 감태는 날씨가 너무 추우면 자라지 않고 따뜻하면 거칠어 상품가치가 없다. 게다가 청정해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감태는 하늘이 내려준 장소가 아니면 맛보기 힘들다.
작년부터 정남진 장흥회진에서 감태를 ‘갯벌감태지’로 상품화하고 있다. 식당을 겸하며 감태와 감태지(감태김치)를 판매하고 있는 회진어촌계장 이영배(59)씨와 부인 박금향(57)씨는 물량이 부족하다며 즐거운 비명이다.
감태를 싣고 돌아가려는데 배가 갯벌에 걸려 꼼짝하지 않는다. 감태를 매던 아주머니까지 들어와 용을 쓰고 밀어보지만 바닥에 박힌 배는 요지부동이다. 이를 두고 ‘배가 걸었다’고 한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바람도 일어났다. 면장갑은 축축해지고 비옷 사이로 냉기가 들어온다. 손끝이 아리며 감각이 없어진다. 세상에, 이씨는 운전대에 기대어 졸고 있다. 들물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다시 날물이다. 감태를 매던 아주머니가 안쓰러운지 이렇게 서너 번 해야 물이 완전히 들어온다고 알려준다.
“제기럴, 여자 말을 들을 걸.”
사실 아주머니 말을 듣고 빠지지 않는 갯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다 이씨가 금방 물이 들어온다며 붙드는 통에 돌아섰다.
“혼자 있기 심심해서 그랑께 그냥 나가쇼”라는 아주머니의 말이 뒤통수에 꽂혔다. 잠에서 깬 이씨가 “금방 들어오겄소”라며 또 눈을 감는다. 그러고도 한 시간은 흘렀다.
후학들 상상의 공간인 ‘문학포구’
회진포구는 밖으로는 고금, 약산, 금일, 금당 등 큰 섬이 에워싸고 있다. 안으로는 덕도와 이희진 사이에 노력도 큰말과 작은말 그리고 탱자섬이 있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 준다.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1490년 만호진성을 쌓았다. 회령진성이다.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참패하자 이순신은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다. 구례, 곡성, 순천을 거쳐 회령에 이르러 병력 120명을 모아 벽파진에 진영을 마련했다.
몸과 마음이 병들었지만 고통스런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민초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약무호남시무국가’는 백의종군 길이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회진포구를 돌아 오른쪽 진목재를 넘어서면 《눈길》을 쓴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참나무마을(眞木里)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이 쌓인 이 길을 어머니가 아닌 ‘노인’과 함께 걸었던 것일까. 선창 어디쯤 차부가 있었을 것이다. 바다와 갯벌 그리고 완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구 앞 덕도는 여다지갯벌이 내려다보이는 해산토굴에 들어 앉아 글을 쓰는 한승원이 태어난 곳이다.
회진포구는 문학의 산실이며 후학들의 상상의 공간이다. 회진포구는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이며, 문학포구다. 포구 끝자락에 ‘천년학’의 주막집 세트가 남아 있다. 마을이름도 선학동이다. 물때가 이른 찬바람에도 대목을 앞둔 어미는 자식들에게 고향의 맛을 주려고 갯벌로 나왔다.
김준 / 전남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이글은 김준의 포구이야기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