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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적산(五積散)의 운용(運用)에 관하여
1. 서언(序言)
『화제국방(和劑局方)』의 상한문(傷寒門)에 오적산(五積散)이란 방(方)이 있다. 이 방(方)은 기혈담음식(氣血痰飮食)의 오적(五積)을 치(治)한다고 해서 이 방명(方名)을 얻었는데, 그 운용(運用)은 대단히 광범위하며 옛부터 후세의가(後世醫家)들이 일상 애용하는 처방(處方)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우리도 역시 본방(本方)을 널리 여러 병에 응용하여 자주 탁효(卓效)를 거두어 대단히 편리함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방(本方)은 그 처방의 구성이 복잡 다양하며, 약미(藥味)도 많고, 그 효능이 어떤 근원으로 하여 연유하는지를 판단하기에 매우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얼마전에 한 부인의 심장성천식(心臟性喘息) 중증(重症)에 본방(本方)을 투여하여 뜻밖의 효과를 얻은 일이 있는데, 그 경쾌(輕快)된 것이 과연 본방(本方)의 약효(藥效)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의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화한의림신지(和漢醫林新誌)』 123호에서 야마다(山田業精)씨가 기술한 비풍론(脾風論)을 보게 되어 씨가 본방(本方)을 마비풍(馬脾風), 즉 디프테리아의 투제(套劑)로 쓰고 있다는 것을 읽고 본방(本方)의 방의(方意)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어 필자가 소위 심장성천식(心臟性喘息)에 진효(秦効)한 이유도 석연하게 풀린 감이 들었다. 이에 고인이 된 선배가 본방(本方)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운용했는가를 널리 관찰 종합하여 보려고 한다.
2. 치험례(治驗例)
먼저 필자 자신의 운용에 의한 대표적치험례(代表的治驗例) 몇 가지를 기술하면서 본방(本方)의 운용 범위의 개요를 그려 보려고 한다.
(1) 심장성천식(心臟性喘息) 및 심장판막증(心臟瓣膜症)
오다(小田)씨의 부인, 32세.
초진(初診)은 금년 9월 5일. 이미 10여년째 심장성(心臟性) 천식증(喘息症)이란 진단을 받고 그 발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신(姙娠)하면 신장염(腎臟炎)을 병발(倂發)하므로, 작년과 금년도 임신(姙娠) 몇 개월로 인공유산(人工流産)을 하였다. 금년의 유산(流産)은 7월 중순경인데, 그 후 심한 천식발작(喘息發作)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 고통(苦痛) 상태(狀態)는 먼저 족냉감(足冷感)이 온 후에 소변(小便) 빈삭(頻數)이 되고 일종의 기괴(氣塊)가 제방(臍傍)으로부터 상충(上衝)하여 마치 심장(心臟)을 찌르는 것같이 느끼면 천식발작(喘息發作)이 일어난다. 이럴 때는 자리에 누워서 양손을 머리 위에서 교차시켜 머리를 흔들어 호흡(呼吸)을 조절하고 더욱 심하게 되면 양손을 놓고 허공(虛空)을 바라보면서 지금 죽는가, 숨이 끊어지는가 걱정할 정도로 참으로 단말마적(斷末魔的)인 고민을 겪는다는 것이다. 유산후(流産後) 매일 또는 격일(隔日) 정도로 이 발작이 일어났다. 왕진(往診)한 날은 비교적 기분(氣分)이 좋은 날이라고 했다. 진찰해 보니 맥(脈)은 침지(沈遲)하고 힘은 약하며, 배는 심하(心下)가 암연(黯然)하여 정체감(停滯感)이 있다. 간장부(肝臟部)는 비경(痞硬)되어 있고, 식욕(食慾)은 거의 부진하고, 조금만 과식(過食)해도 발작(發作)이 시작된다고 했다.
조금만 동작을 해도 동계(動悸)와 숨찬 증세를 호소한다. 기침이나 담(痰)은 거의 없고, 청진상(聽診上) 호흡음(呼吸音)의 예화(銳化)와 심잡음(心雜音)이 들리며, 별로 나음(羅音) 등은 청취되지 않는다. 혀에는 설태(舌苔)가 없고, 빈혈(貧血) 기미가 있으며, 대변은 3일에 한번이다. 월경(月經)은 유산(流産) 후 이 달에 처음으로 약간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부인의 심장판막증(心臟瓣膜症)에서 동계(動悸)、숨이 참、심하비색(心下痞塞)、식욕부진(食慾不振) 등을 호소하며 진찰 결과 오적산증(五積散証)으로 판단하고 본방(本方)을 투여하여 경쾌(輕快)를 본 2 례(例)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 환자를 오적산(五積散)의 정증(正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적당한 처방(處方)이 없어서 얼마 동안 상태를 보려고 본방(本方)을 투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복약하니 의외로 저효(著効)를 나타내어 그후 2주일간 단지 1회의 가벼운 발작(發作)이 있었을 뿐 전신증상(全身症狀)은 대단히 호전된 것이다. 본방(本方)은 물론 심장판막증(心臟瓣膜症)의 근치약은 아닌 완해약(緩解藥)이다. 이것을 복용하여 동계(動悸)、천급(喘急)이 완해되는 것은 본방(本方)이 간(肝)을 화(和)하고, 비(脾)를 구(救)하여 기혈(氣血)을 순환시키고, 담(痰)을 거(去)하며 색(塞)을 쫓기 때문이다. 위의 심장판막증(心臟瓣膜症)의 두 부인의 응용에 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모두가 족냉(足冷)、상충(上衝)、동계(動悸)、숨찬 증상、심하비민(心下痞悶)、식욕부진(食慾不振) 등을 호소했던 것이다.
(2) 위확장(胃擴張), 위산과다증(胃酸過多症) 기타
가와자끼(川崎) 모씨, 남자 54세.
초진(初診)은 1933년 8월 9일이었다. 약 7개월 전부터 심하비색(心下痞塞)의 감(感), 애기(噯氣), 조잡(嘈雜) 등을 호소하고 매일 저녁때 낮에 먹었던 음식을 토하며, 때로는 코피양(樣)의 오물(汚物)을 토하기도 했다. 점점 식욕(食慾)이 떨어져 전신(全身)이 마르고 X선검사(線檢査)결과, 유문협착(幽門狹窄)이란 진단을 받았다. 가족들에게는 암종(癌腫)으로 불치(不治)라는 선고를 내렸다고 한다. 진찰하니, 체격(体格)은 좋은 편이고 피부(皮膚)가 고조(枯燥)되어 안색(顔色)이 창백하다. 맥(脈)은 침지(沈遲)하며 체격에 비해서 약하다. 즉 비위허약(脾胃虛弱)의 맥상(脈象)이다. 배는 심하부(心下部) 일대(一帶)에 약간 비경(痞硬)상태로 눌러 보니 미통(微痛)이 있으며 잠시 관찰해 보니 위낭(胃囊)이 팽융하여 위(胃)의 연동(蠕動)을 확실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대변은 5일~7일에 한 번 정도밖에 없어 괴롭다. 혀에는 엷은 백태(白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위기(胃氣)가 순(順)하지 않다고 보고 오적산가목향(五積散加木香)에 대황(大黃)을 따로 싸서 매일 아침 이것을 가해서 스스로 조절(調節)시켰다. 본방(本方)을 10일간 복용한 후, 환자는 초진(初診) 때와 완전히 달라진 건강한 안색으로 몇 십리 길을 자전거로 내원(內院)했다. 복약(服藥)후 구토(嘔吐)는 한번도 없고, 변통(便通)이 있어서 기분이 좋고, 식욕이 늘고 복용한지 약 1개월에 거이 병환(病患)을 잊어버리고 위암(胃癌)이라고 믿고 있던 가족이나 이웃에서는 참으로 기적이라는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1년 후에 이 환자가 이웃사람을 소개하여 보냈으므로 상태를 물어보니 건강한 모습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환자가 과연 진짜 위암(胃癌) 환자였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위와 같은 위암유사(胃癌類似)의 병증(病症)이 본방(本方)으로 경쾌되는 것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본방(本方)은 악성종양(惡性腫瘍)으로 너무 기혈(氣血)이 허(虛)한 것에는 삼가야 한다.
한편 위산과다증(胃酸過多症)으로 심하비경(心下痞硬)이 있는 것에 본방(本方)이 많이 사용된다. 본방(本方)과 시호계지탕(柴胡桂枝湯)은 아주 비슷하여 필자로서는 아직 명확하게 감별(鑑別)할 수 없지만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시호계지탕(柴胡桂枝湯)은 선병질형(腺病質型) 사람으로 양복직근(兩腹直根)이 저명하게 구련(拘攣)되어 있는 것에 적합(適合)한 것 같고, 본방(本方)은 비교적 근육형(筋肉型) 혹은 비만형(肥滿型)으로 복직근구련(腹直筋拘攣)이라기보다는 심하(心下) 일대(一帶)가 비경(痞硬)되어 있는 것에 잘 듣는 것 같다. 또한 반하사심탕(半夏瀉心湯)이나 생강사심탕(生薑瀉心湯)을 써야 할 경우에도 본방(本方)이 꽤 잘 주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처방으로 효(效)를 거두지 못할 때에는 본방(本方)을 써 보면 좋다. 그 밖에 급성만성위(急性慢性胃)카타르、위(胃)아토니 등에서도 본방(本方)을 써도 좋은 것이 많다.
(3) 위경련(胃痙攣) 및 기타 복통증(腹痛症)
금년 8월 하순 21세되는 남자가 위경련발작(胃痙攣發作)을 일으켜 친구 둘이 업고 내원했다. 겨우 2층 진찰대에 눕히고 맥(脈)을 보니 침지(沈遲)하고. 발이 차며. 심하부(心下部)가 약간 비경(痞硬)되어 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밤공기를 쏘이면서 레몬、사이다 등을 과음했다 한다. 구토하리(嘔吐下痢)는 없다. 심하부(心下部)를 안찰(按察)하니 통증(痛症)이 더 심하다. 급히 서둘러 감초탕(甘草湯)(감초 1미 10g)과 오적산(五積散)을 동시에 따로따로 달이게 했다. 10여분 후에 감초탕(甘草湯)을 복용시켰더니 통증은 약간 가셨다고 하더니 금방 이전과 같은 격통(激痛)이 재발되어 진찰대 위에서 전전하면서 고민 신음하고 있다. 그때에 오적산(五積散)이 다 되었으므로 이것을 복용시키자 얼마 안가서 통증이 태반 가시어 신음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계속하여 다시 한 첩을 복용시켰더니 발작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필자는 집에 돌아가면 따뜻하게 해서 자도록 일렀는데, 돌아가면서 환자는 두 친구와 뭐니뭐니 해도 약(藥)은 한약(漢藥)이라야 한다고 담소(談笑)하면서 걸어서 갔다. 이와 같이 오적산(五積散)으로 멎는 위경련(胃痙攣)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비단 위경련만이 아니라, 소위 배를 차게 해서 일어나는 냉복통(冷腹痛)、산기류(疝氣類), 또는 신경통(神經痛)、류머티즘、각기(脚氣)의 한 증(症)으로 한(寒)과 습(濕)으로 인한 것은 모두 본방(本方)으로 잘 듣는다. 또, 부인의 혈기통(血氣痛)、자궁경련(子宮痙攣)이나 월경통(月經痛)에 당귀사역탕류(當歸四逆湯類)와 똑같은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4) 최생제(崔生劑) 및 기타
국방(局方)의 방후(方後)에 이르기를 「부인난산(婦人難産)에는 초(醋) 1 합(合)을 넣어 함께 전(煎)하여 이것을 복(服)한다」라고 있어서 본방(本方)을 진통미약(陣痛微弱), 또는 파수(破水) 후 태아가 태어나지 않는 것에 초(酢) 1합(合)(식초1작(勺), 勺은 술잔으로 하나 정도)을 가해서 이를 온복(溫服)시키면 좋다고 되어 있다. 필자는 평소 기혈(氣血)이 허약하여 임신(姙娠) 중에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자, 또는 종래 난산(難産)의 경향이 있었던 것에 본방(本方)을 첫 진통(陣痛)이 오고 나서 한두 차례 복용시키면 산파가 놀랄 정도로 안산(安産)을 했다는 3 례(例)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신(姙娠) 중에 당귀작약산(當歸芍藥散)과 그 밖에 안태약(安胎藥)을 복용하고 있던 것에도 힘입었을 것이라. 후에 천전옹(淺田翁)은 파수(破水) 후 태아(胎兒)가 나오지 않고 임부(姙婦)가 갑자기 오한(惡寒)과, 복통(腹痛)이 심하여 여러 가지 최생방(崔生方)을 투여해도 효과가 없을 때 오한(惡寒) 복통(腹痛)을 목표로 해서 마황탕가부자(麻黃湯加附子)를 써서 금방 출산(出産)시켰다고 하는데, 오적산가초(五積散加醋)의 방의(方意)도 이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혈맥(血脈)을 통하고, 한편으로 표(表)를 열면서 리(裏)를 덥게 하여 통하게 하는 것이다. 남풍(南風)을 넣고 싶을 때는 먼저 북창(北窓)을 여는 이치이다. 천전옹집록(淺田翁集錄)에 나오는 노의구결(老醫口訣)의 한 조(條)를 보면 「회임(懷妊)이 두달 석달씩 넘길 때, 빨리 해산(解産)시키려고 하면 오적산(五積散)을 자주 복용시켜야 한다. 1개월을 앞당겨 출산(出産)시키려고 할 때도 이 방(方)을 쓰는 것이 비법(秘法)이다」고 있다.
또한 부인의 허한(虛寒)에 속하는 대하(帶下)는 본방(本方)으로 한(寒)을 물리치고 내(內)를 따뜻하게 하면 경쾌된다. 여학생(女學生)들의 백대하(白帶下)나 수양성(水樣性) 대하(帶下) 등은 대체적으로 본방(本方)으로 치유된다. 또한 경증(輕症) 복막염(腹膜炎)으로 무열(無熱)인 것에 응용되는 일도 있다.
필자의 백씨(伯氏)는 본방(本方)을 경증(輕症) 협심증(狹心症) 같은 데에도 자주 써서 효(効)를 거두고 있는데 『방독변해(方讀弁解)』에 「분돈기(奔豚氣) 등에도 가(可)하다」라고 있는 것을 보고 과연 그렇구나 이해되었다. 분돈증(奔豚症)이란 신적병(腎積病)으로 축음(蓄飮)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므로 본방(本方)이 이것을 잘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즉 본방(本方)은 영계감조탕(苓桂甘棗湯)、영계출감탕(苓桂朮甘湯)、반하후박탕류(半夏厚朴湯類)의 약능(藥能)을 공통으로 겸비할 수 있는 것이다.
3. 주치(主治)에 대하여
이상 경험을 기초로 하여 대표적(代表的) 오적산(五積散)의 운용례(運用例)를 들었는데, 진찰에 있어서 맥상(脈象)은 거의 침지(沈遲)한 것이 많지만 아주 미약하지는 않았다. 만약 미약하면 부자(附子)를 가하면 좋다. 또한 감기(感氣)가 심하면 매우 부삭(浮數)일 때도 있다. 복상(腹狀)은 대체적으로 심하(心下) 비경(痞硬) 또는 비만(痞滿) 설태(舌苔)는 한습(寒濕)이 원인이므로 거의 무태(無苔) 습윤(濕潤)하며, 때로는 미백태(微白苔)인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 주소(主訴)는 어떠한가
화제국방(和劑局方)의 상한문(傷寒門) 본방조(本方條)에,
「① 중(中)을 조절(調節)하고 기(氣)를 순행(順行)시키며 풍냉(風冷)을 제(除)하고 담음(痰飮)을 화(化)한다. ② 비위숙냉(脾胃宿冷), 복협창통(腹脇脹痛), 흉격정담(胸膈停痰), 구토오심(嘔吐惡心). ③ 혹은 외(外)로 풍한(風寒)에 감(感)하고 내(內)로 생냉물(生冷物)에 상(傷)하여 심복비민(心腹痞悶), 두목혼통(頭目昏痛), 견배구급(肩背拘急), 지체태타(肢體怠惰), 한열왕래(寒熱往來), 식욕부진(食慾不振)한 것을 치(治)한다. ④ 부인(婦人) 기혈부조(氣血不調)하고 심복촬통(心腹撮痛), 경후(經後) 균(均)하지 않고, 혹은 경폐불통(經閉不通)한 것은 모두 마땅히 본방(本方)을 써야 한다.」
고 되어 있으며, 다시 방후(方後)에
「⑤ 만약 한열(寒熱)이 부조(不調)하고 해수(咳嗽) 천만(喘滿)에는 조(棗)를 가하여 전복(煎服)한다. ⑥ 부인(婦人) 난산(難産)에는 초(醋) 1 합(合)(즉 일본에서는 1 작(勺))을 가하여 마찬가지로 전복(煎服)한다」
라고 되어 있다. 국방(局方)의 주치(主治)는 번잡(煩雜)하지만 본방(本方)의 약능(藥能)과 운용증후(運用証候)에 대하여 잘 기술되어 있으며, 본방(本方)을 운용함에 있어서는 이것을 조문(條文)으로 삼아도 된다.
한편 제생전서(濟生全書)에는 본방(本方)의 주치(主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사(寒邪)를 감모(感冒)하여 두통(頭痛) 신동(身疼)하고 항강(項强) 구급(拘急)하며 오한구토(惡寒嘔吐)하거나 혹은 복통(腹痛)하는 것을 치(治)한다. 또한 상한(傷寒) 발열(發熱) 두동(頭疼) 오풍(惡風)을 치(治)한다. 내(內)로는 생냉물(生冷物)에 상(傷)하여 흉격(胸膈) 창만(脹滿)하며 외(外)로는 풍한(風寒) 습기(濕氣)에 감(感)하여 경락(經絡)에 객유(客留)하여 요각(腰脚)이 산동(酸疼)하거나 또는 부녀(婦女)의 난산(難産)과 경후(經候) 부조(不調)하고 혹은 혈체(血滯)하여 불통(不通)함을 불문(不問)하고 함께 치(治)한다」라고 있다.
고금의감(古今醫鑑)에 「한사(寒邪)에 갑자기 침범되어 곧 바로 음경(陰經)에 들어가는 등의 증(症)을 치(治)한다」하여 상한(傷寒) 음증(陰証)에 쓰임을 설명하였고, 삼인방(三因方)에는 「태음(太陰) 상한(傷寒)으로 비위(脾胃)가 불화(不和)하고 또한 적취(積聚)가 있어 복통(腹痛)함을 치(治)한다」라고 되어 있다.
방독변해(方讀弁解) 본방(本方)의 조(條)에 국방(局方)의 주치(主治)를 숙독(熟讀)하라고 강조(强調)하고 있는데 우리는 국방(局方)의 주치(主治)에 따라 그 활용을 구명해야 한다.
4. 처방(處方) 및 그 약능(藥能)
본방(本方)은 생료오적산(生料五積散)과 숙료오적산(熟料五積散)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자(前者)는 그 전약미(全藥味)를 수치(修治)하지 않고 생(生)으로 전용(煎用)하는 것인데, 후자(後者)는 그중 특수한 2, 3미(味)를 제외하고 이것을 초용(炒用:炒볶을 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처방(處方)과 분량(分量), 초용(炒用)한 약미(藥味)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따라 이론(異論)이 있다.
먼저 국방(局方)의 처방(處方)과 분량(分量)은 다음과 같다.
진귤피(陳橘皮)、지각(枳殼)、마황(麻黃)、백작약(白芍藥)、천궁(川芎)、당귀(當歸)、감초(甘草)、복령(茯苓)、반하(半夏)、육계(肉桂)、백지(白芷) 각 3 냥(兩), 후박(厚朴)、건강(乾薑) 각 7냥(兩), 길경(桔梗) 12냥(兩), 창출(蒼朮) 27냥(兩).
즉 본방(本方)은 창출(蒼朮)의 분량이 가장 많아 이것이 군약(君藥)의 자리에 있고, 다음에 길경(桔梗)이 신약(臣藥)이 되며 후박(厚朴)、건강(乾薑)이 다음을 차지하고 기타의 약미(藥味)는 좌약(佐藥)이 되어 15미(味)가 종합하여 그 약능(藥能)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방(本方)의 복용법(服用法)은
「위의 육계(肉桂)와 지각(枳殼)을 제외하고 별도로 추말(麁末:麁거칠 추)로 해 놓고 다른 13미(味)도 역시 추말(麁末)로 만들어 이를 만화(慢火:약한 화력)로 초(炒)해서 색(色)을 바꾸어 펴서 식힌 다음에 육계지각말(肉桂枳殼末)을 넣고 고루 섞어 매복(每服) 3돈(錢)을 물 1돈반(錢半)과 생강 3편(片)을 넣고 달여서 1중돈(中錢)이 되거든 찌거기를 제거하여 약간(若干) 열복(熱服)한다」
고 되어 있는 것이 정식(正式)인 오적산(五積散)의 복용법이다. 이것은 후인(後人)들이 숙료오적산(熟料五積散)이란 이름을 붙여서 생료오적산(生料五積散)과 구별한 것이다.
이 방중(方中) 육계(肉桂)와 지각(枳殼)을 제외한 것과 또한 백지(白芷)도 불을 싫어한다고 해서 백지(白芷)를 가하여 3미(味)를 제외시키는 것과 육계(肉桂)와 백지(白芷)를 제외하는 것이 있다.
일본(日本)에서는 이 분량(分量)을 어떻게 환산실용(換算實用)했는가 하면 「화한찬언요방(和漢纂言要方)」에
「창출(蒼朮) 1돈(錢) 5푼(分), 지각(枳殼) 1돈(錢) 2푼(分), 진피(陳皮)、마황(麻黃)、지각(枳殼) 각 6푼(分), 후박(厚朴)、건강(乾薑)、백지(白芷)、천궁(川芎)、복령(茯苓)、육계(肉桂)、백작약(白芍藥)、당귀(當歸)、감초(甘草) 각 3푼(分), 반하(半夏) 2푼(分)」
으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생강(生薑)、총백(蔥白)을 가해서 수전(水煎) 온복(溫服)한다고 있다. 『만병회춘(万病回春)』이나 『제세(濟世)』, 『의방구결(醫方口訣)』 등에는 모두 이론(異論)이 있는데, 필자는 대체로 여기에 백출(白朮)을 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귀(當歸)、작약(芍藥)、천궁(川芎)、대조(大棗)、백지(白芷)、건강(乾薑)、계지(桂枝)、향부자(香附子)、감초(甘草)、마황(麻黃)、길경(桔梗)、후박(厚朴) 각 1.2, 지각(枳殼) 0.7, 반하(半夏)、백출(白朮)、창출(蒼朮)、복령(茯苓)、진피(陳皮) 각 2.0.
위의 1일량(日量)을 달여 3회 분복(分服)한다. 백출(白朮)을 쓰지 않을 때는 창출(蒼朮)을 증량하고, 증(症)에 따라서 국방(局方)의 주지(主旨)를 살려서 가감(加減)하고 있다.
본방(本方)의 약능(藥能)에 대해서는 어쨌든 한 방(方)으로 잘 기혈담음식(氣血痰飮食)의 오적(五積)을 치(治)한다고 하므로, 그 실효(實効)를 경험하지 않으면 다소 공상(空想)처럼 들린다.
『우산방고(牛山方考)』에 「숙료(熟料)는 허한(虛寒)을 치(治)하는데 좋고, 생료(生料)는 풍습(風濕)을 치(治)한다」라고 나와 있다. 우리는 현재 생료(生料)를 쓰고 있다.
『의방구결(醫方口訣)』에 「한풍냉습(寒風冷濕)에 감(感)하는 것에 본방(本方)이 좋다」라고 나와 있다. 본방(本方)의 본의(本意)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처방구성상(處方構成上)으로 논하면,
창출(蒼朮)、후박(厚朴)、진피(陳皮)、감초(甘草)는 평위산(平胃散), 반하(半夏)、진피(陳皮)、복령(茯苓)、감초(甘草)는 이진탕(二陳湯), 당귀(當歸)、천궁(川芎)、작약(芍藥)은 사물탕(四物湯)에서 지황(地黃)을 뺀 것, 계지(桂枝)、작약(芍藥)、생강(生薑)、감초(甘草)、대조(大棗)는 계지탕(桂枝湯)이다. 여기에 속명탕(續命湯)의 방의(方意)에 따라 마황(麻黃)、건강(乾薑)을 가한다.
또 이를 다른 측면에서 관찰해 볼 때는 또한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영계출감탕(苓桂朮甘湯)、영강출감탕(苓薑朮甘湯)、영계감조탕(苓桂甘棗湯)、반하후박탕(半夏厚朴湯) 등의 방의(方意)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공씨(龔氏)의 『고금의감(古今醫鑑)』의 본방조(本方條)에는
「차방(此方)의 약품기미(藥品氣味)는 모두 신온(辛溫), 표(表)를 발(發)하고, 중(中)을 온(溫)하며, 울(欝답답할 울)을 열고 기(氣)를 순행(順行)시키는데 특히 치궐(治厥)의 공(功)이 있다. 요컨대 본방(本方)은 한습(寒濕)을 거(去)하는 성제(聖劑)이니 대개 한습(寒濕)은 음(陰)에 속하고 조열(燥熱)은 양(陽)에 속(屬)하며 사람의 병(病)은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약(藥)을 잘 쓰는 자(者)는 고한(苦寒)으로써 그 양(陽)을 설(洩샐 설)하거나 신열(辛熱)로써 그 음(陰)을 발산하며 병(病)이 유(癒)하지 않음은 이(理)를 얻지 못하였음이다.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으로써 조열(燥熱)을 치(治)하는 약(藥)으로 삼고, 오적산(五積散)으로써 한습(寒濕)을 치(治)하는 약(藥)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실제 경험상 오적산(五積散)과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의 합방(合方)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즉 2방(方)의 이행형(移行型)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중년(中年) 초로시(初老時)의 졸중체질자(卒中體質者)에 상당히 많이 있다. 이 2방(方)의 합방(合方)은 그 약미상(藥味上)으로 볼 때에는 혹시 아연실색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1방(方)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한 이행형(移行型)이 많고, 이자(二者) 합방(合方)이 좋은 결과를 얻는 수가 많다.
공씨(龔氏)는 다시 「춘하(春夏)에는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을 쓰고, 추동(秋冬)에는 오적산(五積散)을 쓴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그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이상으로 약능(藥能)과 더불어 선인(先人)들의 구결(口訣)을 함께 기술한 데도 있는데 다음에 일본(日本)의 선배의 구결(口訣)중에서 두세 가지를 간단히 적어 본방(本方)의 운용을 더 명확하게 구명하여 본다.
5. 구결(口訣) 및 응용(應用)
쓰다(津田玄仙)옹은 그의 저서 『경험필기(經驗筆記)』에 오적산방(五積散方)을 논하여 「차방(此方)을 쓰는 목적은 ①요냉통(腰冷痛), ②요고연급(腰股攣急:股넙적다리 고), ③상열하냉(上熱下冷), ④소복통(少腹痛)의 네 가지 목적에 쓴다」
라고 첫머리에 적으면서 본방(本方)의 응용 16조(條)를 들고 있는데, 대부분이 주치(主治) 및 치험례(治驗例)에 기술한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물오방함구결(勿誤方函口訣)』에
「이 방(方)은 헌기구정론(軒岐救正論)에 기혈음식담(氣血飮食痰)을 오적(五積)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즉 이런 뜻에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풍한(風寒)을 구산(驅散)하고 발표하는 외에 내(內)를 온(溫)하고 혈(血)을 화(和)하는 뜻이 있으니 풍한습기(風寒濕氣)에 감(感)하여 표증(表証)이 있고, 속으로는 본래부터 산적(疝積)이 있어 제복동통(臍腹疼痛)하는 자(者)에게 가장 잘 듣는다. 선철(先哲)들이 이 방(方)을 쓰는 목적은 요냉통(腰冷痛)、요고연급(腰股攣急)、상열하냉(上熱下冷)、소복통(少腹痛)의 4증(症)이다. 그 밖의 제병(諸病)에도 효(効)가 있음은 종대(宗代) 이후 속인(俗人)도 아는 약(藥)이니 경시(輕視)하지 말아야 한다」
고 있어 이 구결(口訣)은 「방독변해(方讀弁解)」와 「경험필기(經驗筆記)」의 요점을 종합한 것이다. 「방독변해(方讀弁解)」에는 부골저(附骨疽)의 초기에 일신동통(一身疼痛)하는 것 및 앞에서 설명한 분돈증(奔豚症)에 응용(應用)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6. 선인(先人)들의 치험례(治驗例)
선배들의 치험례(治驗例)를 쓰기 전에 먼저 첫머리에서 논한 야마다(山田業精)씨의 비풍론(脾風論)은 특히 본방활용(本方活用)중 이색적인 것이므로 그 대요(大要)를 간추려서 독자의 참고로 제공하려고 한다. 즉 「화한의림신지(和漢醫林新誌)」 제123호 비풍론조(脾風論條)에,
「비풍(脾風)의 병(病)에 두 가지가 있으며, 그 하나는 완(緩)이오, 다른 하나는 곧 급(急)이다. 급(急)한 것은 마비풍(馬脾風)이라 하고, 완(緩)한 것은 만비풍(慢脾風)이라 이름한다. 그 기인(起因)은 감기(風邪)이니 이름하여 풍자(風字)를 붙인다. 마(馬)는 급발(急發)을 뜻하고, 만(慢)은 완발(緩發)을 의미하나 오인(吾人)이 의심하는 것은 특히 비자(脾字)에 있다. 혹시 비(脾)는 비(痹)의 잘못이라는 설(說)은 매우 이치에 닿는 것 같으나 내 생각으론 당치 않는 것 같다. 고래(古來)로 비풍(痹風)이란 명칭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원(巢源)에 마비후(馬痹候)란 말이 나오지만 이는 후비(喉痹)의 일종으로 이 병(病)과 전연 다르다. 명칭이 원래 속칭(俗稱)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는데 비자(脾字)를 쓴 데는 상당한 맛도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옛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는다」
라고 마비풍(馬脾風)의 명칭을 논하고, 나아가서 그 병인(病因)을 추구하여,
「내가 이것을 말하자면 비장허약(脾臟虛弱)에 기인하는 병(病)으로 친다. 대개 그 사람은 선천적(先天的)으로 간기(肝氣)가 승(勝)하고 비기(脾氣)가 허(虛)하다. 비기(脾氣)가 허(虛)하면 폐장(肺臟) 역시 따라서 약하고 호흡박색(呼吸迫塞:迫닥칠 박), 천명성아증(喘鳴聲啞症:啞벙어리 아)을 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본(本)은 비(脾)에 있고, 그 표(表)는 폐(肺)에 있을 뿐이며 예부터 이것을 비풍(脾風)이란 명칭으로 불러 온 연유이다」
라고 마비풍(馬脾風)의 병원을 간기승(肝氣勝), 비기허약(脾氣虛弱)으로 귀결시켰다. 또 그 치법(治法)을 논하여 「삼가 고금(古今)을 통관(通觀)하건대 대체로 거담구풍(祛痰驅風:驅몰 구)의 하나에 그치고 달리 이론(異論)이 없다. 도담탕(導痰湯)은 할담(割痰)의 공(功)이 뛰어나 발월(發越)의 능(能)이 뒤지고, 더욱이 보비(補脾)의 힘이 아직 부족(不足)하다. 바라건대 일거양득(一擧兩得)할 방법을 찾고자 항상 염원하던 차에 우연히 한 어린이가 이 증(症)에 걸려 그 아버지가 업고 찾아왔으므로 나는 흔연(欣然)히 이를 진찰하여 오적산(五積散)에 대조(大棗)를 가하여 주었더니 그 통증이 홀연(忽然)히 없어졌다. 그후는 이 방(方)으로 이 병(病)의 정제(定劑)로 삼았다. 고인(故人)들이 말하기를 병(病)을 고치는데 반드시 그 본(本)을 구(救)해야 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확언(確言)이다」
라고 단언(斷言)하고, 그 방의(方意)를 해석하여
「오적산(五積散)의 방(方)에는 평위산(平胃散)、사물탕(四物湯)、계지탕(桂枝湯)、속명탕(續命湯) 등의 뜻이 전적으로 여기에 구비 포함되어 있다. 즉 풍한습(風寒濕)을 쫓고 위(胃)를 화(和)하게 하며 간비(肝脾)를 보(補)하는 것이다. 조(棗)는 심비(心脾)에 들어가 진액(津液)을 통하게 하고, 따라서 폐(肺)를 윤화(潤和)시킨다. 물론 다량(多量)을 가하지 않으면 공(功)이 없다. 방중(方中)의 창출(蒼朮)、길경(桔梗)의 분량이 많음도 역시 음미할 만한 일이다. 운운(云云)」
하면서, 이어 오적산가대조(五積散加大棗)로 마비풍(馬脾風)을 고친 5례(例)를 들고 있다. 여기서 그 대표적 1례(例)를 게재하여 어떤 증(症)에 썼는지 참고로 하려고 한다.
혼고오구(本鄕區), 시라야마에정(白山前町)에 사는 한 사족(士族)인 아사다(淺田長吉)씨의 세 살난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업고 와서 진찰을 청하였다. 그 아이는 감기가 든지 2, 3일이 되었는데 음식기우(飮食氣宇)가 변함이 없으므로 그대로 두었더니 어제 저녁부터 기침이 대단하고 목이 쉬고 심흉(心胸)이 고민하고 천명(喘鳴)이 급박하면서 대열자한(大熱自汗)하여 그저 앉기만 하고 눕지 못한다. 두 변(便)이 불리(不利)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등을 아래도 하는데 설 수 없고 금방 옆으로 넘어져 막 혼모(昏冒)하려 한다. 안정(眼睛)은 몽롱하고 안색은 창백하며, 콧잔등에 백한(白汗)이 나고 그 맥(脈)은 현삭(弦數)하고 결지(結止)하며 혀에는 백태(白苔)가 나타나고 표(表)에 미열이 있으며, 사지(四肢)는 따뜻하고 차지 않으며, 허리(虛里)의 동항(動亢) 성식(盛息)할 때마다 구미(鳩尾)는 함몰(陷沒)하여 천명(喘鳴)이 멎지 않는다.
나는 이를 비풍(脾風)의 증후(症候)라고 여겨 즉시 오적산가대조(五積散加大棗)를 2첩을 투여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복용시켰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사람이 와서 많이 나았으므로 다시 그 약을 더 달라고 청(請)하였다. 이에 3첩을 더 주었다. 4일후에 다시 진찰을 받았다. 그래서 그 동안의 증상을 물으니 첫날밤 2첩을 복용하자 다음날 아침에 이르러 제증(諸症)이 사라지고 이변(二便)이 쾌리(快利)하고 음식을 달라고 하고 계속하여 복용하였더니 지금은 단지 가벼운 기침만을 한다고 한다. 다시 전방(前方)을 5첩을 투여하니 드디어 완쾌(完快)되었다는 소식을 얻었다. 그때가 음력(陰曆) 3월, 양력(陽曆) 4월이었다」
고 하였다. 5례(例)가 모두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그 맥상(脈象)은 반드시 침지(沈遲)가 아니라도 되고, 열상(熱狀)이 있어도 관계 없다는 것이다.
야마다(山田)씨는 마지막으로
「이 병(病)이 겨울이 지나 이른 봄에 많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는 봄은 동방발생(東方發生)의 달로서 간목(肝木)이 기(氣)가 왕성하기 때문이며 더욱이 비장(脾臟)이 허약한 아이들이 걸리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인(故人)이 말한 소위 간목비토(肝木脾土)를 극복하는 이치(理致)가 여기에 있을 뿐이다」
라고 결론(結論)짓고 있다. 필자는 아직 본방(本方)을 마비풍(馬脾風:디프테리아)에 응용한 경험은 없으나, 앞에서 기술한 심장성(心臟性) 천식증(喘息症)을 가진 부인이, 이른바 간실비허(肝實脾虛)하여 천식(喘息)이 급(急)하고 심한 것이 본방(本方)으로 경쾌한 연유를 여기서 알게 되어 대단히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오적산(五積散)의 치험례(治驗例)를 마치는데 있어서 본방(本方)이 필자 형제의 한방의학(漢方醫學) 연구의 동기가 되었다는 기이한 인연을 말하고 이 글을 끝맺을까 한다.
이 이야기는 가형(家兄)이 쓰신 「모리(森道伯) 선생전(先生傳)」의 서문(序文)에서 그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즉 다음 글은 병증(病症)과 치료법을 기술한 것이므로 장문(長文)이지만 이것을 전재(轉載)한다. 즉 그 책의 자서(自序)에
「나는 어려서 해군(海軍)에 뜻이 있어 중학(中學)에 입학하자 교내(校內) 동지(同志)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해사회(海事會)에 들어가 다투어 과도한 공부(工夫)와 격렬한 운동(運動)을 굳이 행하여, 이로 인해 어린 몸에 드디어 화가 미쳐 몹시 건강(健康)을 해쳤다. 우연히 말라리아를 앓아 지방의(地方醫)가 투여한 돈복(頓服)키니네는 몹시 나의 위장(胃腸)을 손상시켜 구역(嘔逆)이 그치지 않아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게 되고 약액도 또한 복용하여도 금방 토한다. 한숟갈의 죽, 한잔의 물조차 들지 못하여, 지방의(地方醫)를 바꾸기 몇 사람, 약효(藥效)는 끝내 무효(無効)하여 나날이 몸이 수척하여 병세(病勢)는 날로 격증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결심하여 동도명의(東都名醫)의 치료(治療)를 받아 보려고 아버지를 따라 상경(上京)하여 먼저 제대병원(帝大病院)을 방문하여 전문의에 치료를 맡겼으나 효험(效驗)이 없음은 지방의(地方醫)때와 다름이 없고, 주치의(主治醫)는 몰래 아버지를 불러 죽음의 선고(宣告)를 내렸다. 그리하여 동도(東都)에서 당시 명의(名醫)라고 불리던 대가(大家)를 역방(歷訪)했으나, 끝내 나의 완고(頑固)한 구토(嘔吐)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절망(絶望)의 비탄(悲嘆)을 안고 귀향(歸鄕)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지 벌써 이순(二旬:旬열흘 순)이 넘었다. 위(胃)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구(嘔)는 해도 토물(吐物)이 없다. 끝내 위벽(胃壁)이 찢어져 다량의 토혈(吐血)을 하기에 이르렀다. 가족 일동은 수연(愁然)하여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기를 동도(東都)에 숨은 명한방의(名漢方醫)가 있으니 그저 헛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안되며 다시 상경하여 그 명의(名醫)의 진찰을 받아보면 어떤가 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상세히 자기의 체험(體驗)을 들려 주면서 간절히 권하였다. 그리하여 해골 같은 병구(病軀:軀몸 구)를 이끌고 다시 동도(東都)로 나가 숨은 한방의(漢方醫)를 찾아 한가닥 희망(希望)을 걸기로 하였다. 이 숨은 한방의(漢方醫)로서 소개받은 사람이야말로 곧 은사(恩師) 모리(森道伯) 선생 바로 그 분이었다. 선생께서 나를 진찰하고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이렇게 말랐는가, 병(病)이 이미 고황(膏肓)에 이르러 치효(治効)를 바라기 어렵지만, 그러나 아직도 미약하나마 생력(生力)이 있는 것이 인정된다. 이 3첩의 전약(煎藥)을 다행이 위낭(胃囊)이 받아주기만 한다면 아직 내게 시행할 수 있는 의술(醫術)이 있으므로 감히 치료해 보겠다고 하셨다.
참 기적(奇蹟)같은 일이다. 나의 생사(生死)를 좌우(左右)할 이 전약(煎藥)은 위(胃)에 넘어가 끝내 토(吐)하지 않았으며, 다시 1첩을 복용하였지만 토하지 않고, 드디어 3첩을 다 복용하고 나서도 물론 구토하지 않고 몸에 조금씩 상쾌감(爽快感)을 느꼈다. 오호(嗚呼)라, 구토(嘔吐)가 증격되면서부터 음식과 약탕(藥湯)을 위에 넘겨본 지 한 달 남짓에 이르는데, 이제 비로소 위에서 받아주었으니 나의 환희(歡喜)야말로 수무족답(手舞足踏)의 지경이며 작약(雀躍)하여 은사(恩師)의 앞에 가서 이 길보(吉報)를 고(告)하였다. 선생께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후 매일 침구약(鍼灸藥) 삼치(三治)를 시술하니 병아(病痾:痾숙병 아)가 날로 마치 엷은 껍질을 벗기듯이 치료를 받은 지 2주일, 고목(枯木)과도 같았던 수구(瘦軀)에 활기(活氣)가 갑자기 살아났다. 이때 이미 고향에서는 나의 사망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하여 첫째는 이 완쾌한 모습을 보여들여서 부모(父母)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둘째로는 고향에 퍼져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일단 허가를 얻어 귀향(歸鄕)하였다가 다시 상경(上京)하여 은사(恩師)의 치료를 계속 받은 지 수개월, 그토록 큰 병이 완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나의 병든 몸을 걱정하시는 부모(父母)님의 심로(心勞)가 보통이 아니어서 간절히 나의 유학지망(遊學志望)의 단념을 권하셨다. 그래서 일시(一時) 학문(學問)을 폐하고 초야(草野)에서 농사짓기를 4년이 되었다.
때는 메이지(明治) 말엽 구미(歐美)의 문화(文化)가 일본(日本)의 상하(上下)를 풍미(風靡)하여 한방의학(漢方醫學)을 돌아보는 사람이 드물고 선생에게 치료를 구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빈곤고독(貧困孤獨)한 병자(病者)들이었으니 시약(施藥)의 대가를 미전(米錢)으로 하니 환가(患家)와 더불어 조강(糟糠)의 고난(苦難)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당시 선생의 거주(居住)하시던 주택(住宅)은 수리하려도 돈이 없고, 누옥(陋屋)은 겨우 무릎을 구부리기에 족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방의술(漢方醫術)을 신봉하시는 은사의 몸에 법(法)의 박해(迫害)가 자주 있어, 빈궁(貧窮)함은 극에 이르러도 의연(毅然)하게 그 절조(節操)를 굽히지 않으시고, 한편 한방의학(漢方醫學) 보존(保存)을 위해서 분투하시는 은사의 인격(人格)을 흠모하고, 또한 재생(再生)의 홍은(鴻恩)을 생각하여 농촌에서 생(生)을 마치는 것을 버리고, 여기에서 새로이 뜻을 세우고 한방의가(漢方醫家)가 되려고 하였으며, 은사를 따라 평생(平生) 고락(苦樂)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운운(운운)
이상은 가형(家兄)의 대환(大患)과 선사(先師) 모리(森道伯)선생의 치료를 적은 것인데, 이때 처방한 3첩의 약(藥)이야말로 실은 위에서 설명한 오적산가감방(五積散加感方)이었다. 본방(本方)은 기이하게도 가형(家兄)의 재생(再生)을 가져다준 처방(處方)이며, 우리의 한방의가(漢方醫家)가 된 입지(立志)의 먼 인연이 된 것이므로 본방(本方)을 해설함에 있어서는 참으로 감개무량(感慨無量)한 바가 있다.